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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낫 터칭 스텝 시퀀스 下

*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 차유진 X 작곡가 김래빈
* 글자수 제한으로 인해 4~6(完)화까지의 분량 수록


크리스마스이브가 나흘 남았을 시점.
차유진은 결심했다.


낫 터칭 스텝 시퀀스
4

 
“이브에?”
“응!”
유진이 고개를 힘껏 주억거렸다. 등을 돌렸던 김래빈이 달력을 향해 손을 뻗은 것도 그때였다. 종이가 팔랑팔랑 넘어갔다. 스마트폰과 달력을 몇 번 비교하던 김래빈은 이내 의뭉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의자가 팽그르르 돌아가며 시선이 마주쳤다.
“일정이 비기는 하는데. 왜?”
“나랑 놀아! 둘이서만.”
차유진이 힘차게 말했다.
며칠 전. 김래빈의 작업실에 첫발을 내디딘 이후 차유진은 작업실을 제집인 양 들락거렸다. 처음 몇 번은 군말 없이 문을 열어주던 김래빈이 질색할 때까지. 계속. 덕분에 차유진에겐 새로운 루틴이 생겼다. 새벽 조깅 후 아침밥을 먹고 링크장 대신 김래빈의 작업실로 향하는 거였다.
사실 줄기차게 놀러 온다고 하더라도 차유진이 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냥 낡은 침대에 걸터앉아서 발이나 휘적거리는 게 전부였다. 기껏 뽑는다면. 글쎄. 가끔 김래빈이 의견을 물으면 성심성의껏 대답해주기?
김래빈은 그런 차유진더러 할 일이 그렇게 없냐고 쏘아붙였지만. 뭐. 할 일 없는 게 사실이었으니 차유진은 구태여 말씨름하는 대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 잃은 듯하던 김래빈이 진지한 표정으로 계속 올 거냐고 물은 게 바로 어제.
같이 놀자는 말에 김래빈이 얼굴을 찡그렸다. 작업 중엔 안경을 쓰는 덕분에 콧잔등이 살짝 눌려 있었다. 김래빈은 세 시간이 넘도록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 덕분인지 낯빛이 거멓다. 날카로운 눈매가 몇 번 씰룩거렸다.
“우리 지금도 놀고 있는 거 아니었어? 둘이서?”
맹한 물음이었다. 그럼 그렇지. 유진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찡그렸던 얼굴을 한껏 구기며 김래빈이 물었다.
“아니야?”
“그거랑 이거랑 달라.”
말씨가 제법 단호했다. 자주 대화하다 보니 한국어도 쑥쑥 늘었다. 한층 능숙해진 한국말로 차유진이 조곤조곤 말했다. 그러니까 요는 이거였다. 지금 내가 네 작업실 놀러 오는 건 일상이다, 내가 논다고 말하는 건 일상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뭐 대충 그런 느낌.
이해한 건지 아닌지. 김래빈은 그냥 인상을 팍 찡그리고 턱만 툭툭 두드렸다. 그러다가 다시 손을 뻗는 것이다. 달력이 또 차르르 소리를 내며 넘어갔다. 의자에 놓인 손가락이 빠른 박자를 타다가 뚝 끊겼다.
“기왕 만날 거면 크리스마스 당일이 좋지 않아?”
“Nope. 크리스마스에는 가족 만나.”
“아. 그렇지. 하긴 나도 누나랑 밥 먹으러 가기로 했으니까.”
“이브 괜찮아?”
쐐기 박듯 마지막으로 물었다. 김래빈은 달력을 몇 번 더 뒤적이다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는 다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김래빈이 모니터에 흡수될 듯 집중했다는 뜻이다. 차유진은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렸다. 카일과의 대화창을 하릴없이 밀어 넘기다가 김래빈 뒤통수만 뚫어지라 봤다. 가늘어지는 눈이 잠시 허공에 머물다가 작은 머리통에 집중하기를 거듭했다.
차유진이 결심한 것. 사실 별거 아니었다. 김래빈이 호의를 베풀었으니 차유진도 돌려주겠다고 마음먹은 것뿐이다. 김래빈의 작업실과 비슷한 의미를 가지는 게 뭐가 있을까 고심했는데 나오는 게 하나밖에 없어서 좀 머뭇거렸을 뿐이지. 하지만 이젠 다르다. 카일에게 허락까지 받았으니 거칠 건 없었다.
차유진은 김래빈을 링크장에 데려갈 생각이었다. 선수와 작곡가의 관계가 아니라. 친구와 친구의 관계로.
카일에게 물어보니 그 정도는 괜찮댔다. 어차피 일반인들 사용 시간에 고난도 기술 쓰는 건 금지되어 있으니까 내린 허락일 거였다. 차유진도 균형 잡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절반 넘는 빙판에서 점프 뛸 만큼 멍청하지 않고.
다만 기대는 했다. 김래빈이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패를 드러냈으니까. 차유진도 그러고 싶었다. 무엇보다 기대됐다. 김래빈이 좋아할까. 좋아했으면 좋겠다. 그래도 좋다는 문자를 거듭 읽다가 웃는 이모티콘을 하나 덧붙인 차유진이 몸을 일으켰다.
“김래빈.”
“…….”
“김래비인.”
“왜?”
김래빈은 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언뜻 성의 없어 보이지만 작업 중에 대답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차유진은 히히 웃으며 손을 뻗어 의자를 쭈욱 당겼다.
“나랑 놀아.”
“하지 마!”
“김래빈 세 시간째야. 이거 망치야.”
“방치겠지…….”
의자가 팽그르르 돌아갔다. 피로가 덕지덕지 달라붙은 얼굴이 무시무시했다. 차유진은 킥킥 웃으면서 김래빈 발목이나 콱 잡았다. 보채듯 살살 흔들면 김래빈은 투덜거리면서도 내려와 앉았다.
“방해하지 말라고 했잖아.”
“김래빈 누나가 김래빈 감시하라고 했어.”
“너 누나랑 연락해?”
“응!”
“허…….”
일그러졌던 얼굴에서 힘이 탁 풀렸다. 눈을 가물가물 끔뻑이던 김래빈은 이내 그럴 리가 없다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언제 연락처를 교환했냐, 어떻게 아는 사이냐, 어쩌다가 친해졌냐. 질문 세례가 날아왔지만 차유진은 그냥 어깨만 으쓱이고 말았다. 대신 차유진은 발목 대신 손목을 잡고 침대로 엎어졌다.
침대에 누워서 마른 손목을 몇 번 당긴다. 그러면 엉거주춤 앉은 김래빈이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말 대신 손목만 살살 당기자 김래빈이 고개를 내저었다.
“싫어.”
“왜애.”
“지난번에도 너랑 같이 잤다가 여섯 시 넘어서 일어났잖아! 깨워주겠다고 약속했으면서 나중에 가선 까먹었다고 발뺌했던 일을 설마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기억 안 나. 나 졸려.”
“아 일어나 바보야! 지금 자면 밤에 잠 못 자!”
“아냐. 틀렸어. 지금 안 자면 김래빈 내일까지 안 자.”
김래빈의 얼굴이 훅 붉어졌다. 그건 부끄럽다기보단 열 받아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다. 저런 험악한 얼굴 해봤자 기껏 하는 욕이라곤 바보밖에 없다. 차유진은 그냥 키득거리면서 연신 손목을 당겼다.
처음엔 굳건하던 힘이 점점 빠진다. 몇 번 더 조르듯 당기면 이번엔 순순히 끌려왔다. 입으론 안 된다고 중얼거리면서도 침대를 탐하는 김래빈의 눈이 퍽 열심히 빛났다. 결국 김래빈도 사람이다. 재밌는 일 잔뜩 있는 건 알아도 피곤하면 침대 찾고 싶어진단 뜻이었다.
그 결과. 간단하다. 오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차유진은 김래빈이랑 좁은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안경은 벗어둔 채 누운 김래빈이 푹푹 한숨을 내쉰다. 그러더니 고개를 살짝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피곤해 죽겠다는 얼굴로 김래빈이 엄포를 놨다.
“네 시 전에 깨워줘. 진심이야.”
“응!”
“너 때문에 내가 못 살겠다…….”
누가 할 말인데. 김래빈은 무슨 사고뭉치 자식 키우는 보호자처럼 중얼거리곤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셋. 둘. 하나.
호흡이 단정해졌다. 힘을 주느라 주름이 졌던 미간이 살살 펴졌다. 힘 하나 들이지 않은 얼굴이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입이 살짝 열렸다가 벌어지길 반복했다.
삼 초 만에 곯아떨어진 주제에. 이래놓고 네 시 되면 깨우라니. 슬쩍 확인한 시각은 세 시 사십 분이 조금 넘었다. 차유진은 눈만 데굴데굴 굴리다가 어깨 으쓱이고 말았다. 조금 과장해서 눕자마자 잠든 사람을 이십 분 있다가 깨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김래빈은 모르는 것 같지만.
사람 하나가 까무룩 잠드니 작은 작업실은 금세 조용해졌다. 차유진은 숨소리마저 죽인 채 슬쩍 고개를 돌렸다. 감은 눈. 아래 찍힌 점. 얇은 입술. 볼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김래빈 진짜 죽은 것처럼 잤다. 호흡이 너무 얕아서 가끔 좀 무서웠다. 저러다가 벌떡 일어나서 어기적어기적 걸으면 그게 워킹 데드지 뭐가 워킹 데드겠어.
시답잖은 생각이나 하는데 김래빈이 뒤척였다. 적당히 긴 머리칼이 떨어지며 미간에서 살살 흔들린다. 그게 불편한지 김래빈이 얼굴을 찡그렸다. 으……. 잇새로 흘러나오는 신음에 차유진은 킥킥 웃다가 손을 뻗었다. 머리카락을 살살 치우자 얼굴이 그새 느긋해졌다.
기분이 좀 이상했다. 김래빈 누나한테서 래빈이 잘 부탁해요, 하는 말 듣기는 했는데. 너무 몰입한 것 같으면 적당히 끊어서 재우라는 말을 전해 받긴 했지만. 그런데 굳이 옆에 누워서 자는 얼굴 구경할 건 또 뭐람. 그냥 일어날까 싶기도 한데. 평온한 김래빈 표정 보다 보면 그러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진다.
진짜 뭐지. 김래빈이 뒤척이다가 몸을 웅크렸다. 시체처럼 자는 데에 반해 움직임이 좀 많은 편이다. 공간이 좁아서 그런 것도 같다. 차유진은 머뭇거리다가 슬쩍 몸을 일으켰다. 살짝 눌린 뺨 보다가 손가락으로 슬쩍 눌렀다. 말랑한 볼이 푹 꺼졌다.
“바보.”
차유진이 숨죽여 중얼거렸다. 김래빈이 화답하듯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게 제일 웃겼다.


시간은 또 쏜살같이 흘렀다. 텔레비전 앞에 오순도순 모여 앉아서 이브에 눈 안 온다는 비보에 눈물을 찍어 발랐다. 사실 차유진으로선 화이트든 아니든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김래빈은 조금 아쉬운 눈치였다. 원래 눈 좋아하냐는 질문에는 눈 오면 낭만적이잖아,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김래빈 이브 때 나랑 놀기로 했는데. 나랑 낭만적으로 놀고 싶냐고 물으려는데 김래빈이 덧붙였다. 그리고 눈 오면 고향 생각이 난다고.
그 말에 차유진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향수에 젖은 사람한테 플러팅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서. 대신 속으로만 앓았다. 아니 김래빈. 그런 말을 하려거든 일찍 좀 하지. 하필 이브 얘기하는데 그럴 일은 또 뭐야.
입을 오므리고 있자 김래빈이 고개를 갸웃하긴 했다. 너 어디 아프냐면서. 왜 말을 하다 마냐면서. 눈치가 빠른지 없는지 모르겠다. 차유진은 그냥 고개를 저었다.
이브는 그렇게 왔다.
눈은 없을 거라는 일기예보답게 아침부터 쨍쨍했다. 날이 서늘하긴 했는데. 뭐. 캘리포니아가 추워 봤자 얼마나 춥다고. 차유진은 일찌감치 일어나서 옷장을 뒤적였다. 편하면서 멋지게. 그런데 너무 꾸민 티는 안 나게. 옷들 늘어놓고 고민하다가 누나의 웃음만 샀다. 낄낄대는 소리에 등 떠밀리듯 손에 집히는 걸 입었다. 누나는 거기에다가 비니 모자를 푹 씌웠다. 아끼는 거니까 조심히 쓰고 다니라는 소리를 덧붙이는데 목소리가 누가 봐도 장난이었다.
준비를 끝낸 차유진은 방구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 처박힌 스케이트 부츠를 만지작대다가 차곡차곡 가방에 넣었다. 수건. 물. 날 보호대. 여분의 끈. 오랫동안 신지 않은 탓에 부츠와 날이 연결되는 접합부가 헐거웠다. 열심히 조인 후에 보호대를 씌워서 가방에 넣었다.
“[저녁은 어쩔 거야?]”
“[래빈이랑 같이 먹을 거야.]”
“[너무 늦게 들어오지만 마.]”
고개를 대강 끄덕였다. 어차피 김래빈도 그렇게 늦게까진 못 놀 거였다. 가방을 메고 신발을 신는데 뒤에서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유진이 데이트라니. 믿기지 않는다는 말이 뒤따르기도 전 여동생은 입을 합 다물었다.
“[눈에서 광선 나오겠다. 광선검이 따로 없네.]”
“[시끄러워.]”
유진이 문을 열었다. 잘 다녀오란 말에 고개만 끄덕였다. 눈이 내릴 기미라곤 티끌도 보이지 않는 캘리포니아의 아침 하늘이 그를 반겼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깨를 적당히 짓누르는 가방 무게가 반가웠다. 차유진은 가볍게 정의했다. 기분이 좋다. 매우 좋았다! 이브에 잡힌 김래빈과의 나들이 때문인가. 어쩌면 그냥 스케이팅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짜릿한지도 몰랐다.
그래도 중요한 건 제 기분이 뛸 듯이 좋다는 사실이다. 근래 들어서 이렇게 기분이 상기된 건 퍽 오랜만이었다. 콧노래를 흥얼대며 차유진은 걸음을 빨리했다. 지금은 네 시 오십사 분이었다. 약속 시각은 다섯 시 반이었으니 늦지는 않을 거였다.
한참을 걷다 보니 저 멀리 링크장이 보였다. 이브를 맞이한 가족, 연인, 친구들이 스케이팅을 즐기기 위해 모인 듯 사람이 바글거렸다. 차유진의 시선이 링크장을 한 번 죽 훑었다. 커다란 도넛 건물은 변한 게 없었다.
하긴. 고작 한 달쯤 됐다고 갑자기 링크장이 도넛에서 타코 모양이 될 리는 없지. 실없는 농담이다. 차유진은 킥킥대며 인파를 쭉 훑어봤다. 가로등 앞에서 보기로 했는데. 사람들이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다 싶더니.
“김래빈!”
차유진이 목소리를 높였다. 사람들 틈에서 김래빈을 찾는 건 어렵지도 않았다.
가로등에 기대서 스마트폰을 바라보던 김래빈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김래빈도 마찬가지였다. 주변을 한 번 둘러볼 법도 한데 눈이 곧장 맞았다. 까만 목도리를 두른 김래빈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다섯 시 십오 분이 채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
“많이 기다렸어?”
“아니.”
짤막하게 대꾸한 김래빈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손을 뻗은 김래빈이 배낭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거, 네 스케이트야?”
“응! 내 거. 김래빈 건 안에 들어가서 빌리면 돼.”
“사람 엄청 많다.”
“이브니까. 다들 우리랑 똑같은 생각 했을걸.”
차유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김래빈은 또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할 말을 찾는 듯 눈을 데록데록 굴린 덕분에 분위기가 묘한 소강상태에 들어섰다. 뻣뻣한 고개를 먼저 팩 돌리며 운을 뗀 건 김래빈이었다.
“일단 들어가자. 계속 서 있으면 길 막으니까 민폐야.”
가로등에 딱 붙어 있는데 길을 막기는 무슨. 그래도 차유진은 말꼬리 늘어 잡는 대신 고개를 열렬히 끄덕였다.
스케이트장 안에도 사람은 어김없이 많았다. 원래 휴일이면 사람이 제법 몰리는데 이브니까 더 바글대는 느낌이었다. 키가 작은 편이 아닌 김래빈도 우글대는 인파를 보고 퍽 당황한 것처럼 얼빠진 소리를 냈다. 길 잃는 거 아니냐며 머쓱하게 중얼거리길래 차유진은 태연하게 손을 뻗었다. 멀뚱히 흔들리던 김래빈 손을 단단히 맞잡고 쭉쭉 끌고 나갔다.
크기에 맞는 스케이트를 빌리고 갈아 신는 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끝났다. 차유진은 김래빈의 발에 맞춰서 스케이트를 대여하고 빈자리를 찾아 그를 앉혔다. 스케이트를 요리조리 살피던 김래빈은 익숙하게 발을 밀어 넣더니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발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헐거운 끈을 만지작대더니 말했다.
“이거 생각보다 딱딱하네. 좀 더 신발 같은 느낌일 줄 알았는데.”
“점프나 스핀 돌려면 발목 고정해줘야 해. 그래서 그래. 안 딱딱하면 점프 뛰다가 다쳐. 김래빈 끈 묶는 법 알아?”
“응. ……아마도?”
“Good. 묶어봐! 이따가 보고 다시 해야 하면 알려줄게.”
김래빈이 헐거운 끈과 씨름하기 시작하는 모습까지 보고 난 후에야 차유진은 제 가방을 열었다.
까만 스케이트를 신기 전 버릇처럼 날과 부츠를 반대로 살짝 당겨보았다. 단단하게 고정되었음을 확인한 후에야 익숙하게 발을 넣었다. 풀어놓았던 끈을 전부 구멍에 엮어 넣고 힘을 주어 당긴다. 최대한 꽉 조인 후에 매듭지어 묶고선 방해가 되지 않도록 남은 끈까지 전부 매듭 아래로 넣어서 고정했다. 발목을 단단하게 고정하는 낯익은 감각에 차유진은 괜히 웃었다.
반대쪽 발도 빠르게 신고는 고개를 돌렸다. 김래빈이 눈을 잔뜩 찌푸린 채 왼쪽 발 매듭을 마무리 짓고 있었다. 확신이 없다는 듯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는데 결과물은 제법 그럴싸했다. 특히 매듭을 짓고 남은 끈을 아래로 밀어 넣어 고정한 모양새가 제 버릇과 똑 닮아 있었다.
“됐어?”
“된 것 같기는 해.”
눈을 가늘게 뜬 김래빈이 발을 이리저리 틀어보다가 말했다. 차유진은 대충 쪼그려 앉곤 스케이트를 몇 번 당겨봤다.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때 안 불편해? 헐렁하거나.”
“안 불편해. 발목 좀 답답한 것 빼면.”
“그럼 됐어! 김래빈 끈 잘 묶었어.”
엄지까지 척 펴주자 김래빈이 눈을 떼굴 굴렸다.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는데 뭔가 멋쩍어 보이기는 했다. 발이 불편해서 그런가. 말을 더 붙이기도 전에 김래빈이 벌떡 일어났다.
“우리 안 가?”
다소 황급한 듯한 목소리였다. 차유진은 눈을 언뜻 가늘게 뜨다가도 어깨를 으쓱하곤 말았다. 그리곤 캐묻는 대신 앞장이나 섰다. 선수마다 매듭짓는 방법이 다르다는 건 굳이 알려줄 필요가 없겠지, 싶었다.
발걸음은 망설임 없이 링크장으로 향했다. 문을 하나 열고 들어가면 춥다기보단 시원한 바람이 먼저 맞이했다. 바글대는 사람들 너머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날아든다. 차유진은 조금 새삼스럽게 주위를 둘러봤다. 연습 시간이나 경기 때는 무질서한 링크장을 볼 수 없다. 링크장 위에서 어기적거리면서도 즐거워 못 참겠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다소 생경한 감각이었다.
허리를 숙인 차유진이 날 보호대를 벗었다. 펜스를 단단히 붙잡고 이내 발을 조심스레 내디딘다. 딱딱한 얼음 위로 날이 미끄러지는 감각이 선명했다. 매끄럽게 나아갔다. 움직이는 대로 얼음이 갈리며 내는 사각사각 소리가 마치 차유진을 반기는 느낌이었다.
차유진은 이대로 속도를 내 스핀이라도 돌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돌아보았다. 사람이 많아 위험할뿐더러 오늘은 챙겨야 할 사람이 있으니까. 시선은 김래빈에게로 향했다. 입구 주위에서 머뭇거리다가 한 발을 조심스레 내디디던 김래빈은 두 발을 링크장에 올리자마자 주르륵 미끄러졌다. 펜스를 동아줄이라도 되는 듯이 애처롭게 붙들고는 비틀거리는 모습이 꼭 갓 태어난 기린 같았다.
“김래빈, 몸에 힘 너무 들어갔어.”
“어쩔 수가 없어……. 생각한 것보다 너무 미끄러워서 균형을 못 잡겠어.”
“몸에 힘주면 더 미끄러져!”
넋 놓고 있어도 사나운 얼굴을 팍 찡그리니 진짜 무슨 삼류영화 악당을 닮았다. 차유진은 킥킥 웃으며 매끄럽게 나아가 김래빈 곁자리에 섰다. 펜스에 매미처럼 딱 붙은 김래빈에게 손을 내밀었다. 김래빈은 펜스와 손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한 손을 뗐다.
손과 손이 단단히 얽히는 건 순간이다. 반대쪽 손도 간신히 붙들자 김래빈이 얼굴을 한층 찡그렸다. 미끄러워서 불안하다며 중얼거리는 듯도 했다. 차유진은 대답하는 대신 조심스럽게 펜스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나도 할머니한테 이렇게 배웠어!”
앉은 것도 선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간신히 발을 떼던 김래빈이 고개를 들었다. 차유진은 김래빈의 손을 제 팔뚝까지 올린 후에 단단히 힘을 주어 섰다.
“나 믿어, 김래빈! 이거 안 놓을 거야. 김래빈이 적응할 때까지!”
그리고 차유진은 그 말대로 했다. 갓 태어난 기린보다 위태롭게 걷던 김래빈이 어느 정도 감을 잡을 때까지 차유진은 손을 놓지 않았다. 제법 익숙하게 빙판에서 미끄러지고, 아프지 않게 넘어지는 법을 완전히 익혔을 무렵에야 김래빈이 먼저 손을 뗐다. 어색한 몸짓이지만 넘어지지 않고 링크장을 한 바퀴 돌았을 때 차유진은 쏜살같이 달려와 엄지를 척 내보였다.
링크장에서 나왔을 땐 딱 저녁 무렵이었다. 그들은 링크장 내부에서 핫도그를 사 먹을지, 밖에서 햄버거를 사 먹을지 고민하다가 후자를 택했다. 차유진의 강력한 권유 덕분이었다. 차유진이 걸어서 오 분 거리에 있는 수제버거집이 환상적이라고 열렬히 떠들어댄 것이다.
그리하여 저녁 여섯 시 사십칠 분. 온종일 스케이팅과 걷기 운동으로 녹초가 된 김래빈은 모래사장에 놓인 수제버거집 테라스 자리에 앉아서 졸고 있었다.
분위기가 좋았다. 저물녘의 해변에 가끔 서핑하는 사람들이 어둠에 물들어 까맣게 변해갔다. 테라스를 장식한 꼬마전등이 불규칙적으로 깜빡일 때마다 김래빈의 머리도 조금씩 꾸벅댔다. 파도 소리. 사람들의 즐거운 비명. 음식점 내부에서 나오는 올드팝. 바람이 선선했다. 차유진은 꾸벅꾸벅 조는 김래빈을 보며 생각했다. 크리스마스이브치고도 퍽 다정한 날이다.
조는 김래빈의 얼굴 위로 까치놀이 쏟아졌다. 깊은 음영을 만들고 미끄러지듯 내려가면 살짝 벌어진 입술 틈으로 일정하게 숨이 오갔다. 테이블 하나를 가운데에 둔 채 차유진은 턱을 괬다. 확실히 몸이 나른하긴 했다. 오랜만의 스케이팅에 들떠 너무 오래 탔나 싶기도 하고.
시야가 주홍빛 색채로 가득했다. 이마에 묻은 머리칼이 바람에 흔들렸다.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 조심스러운 손길은 머리칼에 닿기 직전 황급히 거뒀다. 종업원이 음식을 들고 찾아온 덕이었다.
“[데이트니, 유진? 혹시 내가 방해했을까?]”
차유진은 대답하는 대신 눈만 흘겼다. 이곳 버거를 좋아해 꼬박꼬박 왔더니 졸지에 종업원 에밀리와 친구 사이가 됐다. 테이블 위를 하나둘씩 채우는 음식들을 바라보던 유진은 이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아니에요. 쟤는 데이트를 어떻게 하는지도 모를걸요.]”
“[어머나. 그런데 데이트가 아니라기엔 너무 꿀 떨어지게 보고 있던데.]”
“[할 일이 없어서 그래요. 스마트폰도 배터리 간당간당하고.]”
“[그러니?]”
이어지는 너털웃음에 차유진이 눈을 흘겼다. 에밀리는 정말이지 쓸데없이 짓궂은 면이 있었다.
음식 세팅을 마친 에밀리가 떠나자 또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차유진은 김래빈과 음식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을 찡그렸다. 깨우기엔 너무 곤히 자고 있고. 그렇다고 기다리기엔 음식이 식을 것 같다. 어쩌지. 깊은 고민은 다행스럽게도 빨리 끝났다. 김래빈이 먼저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뜬 것이다.
잠기운 덕지덕지 붙은 눈이 몽롱하게 주위를 한번 훑었다. 그리고는 눈을 끔뻑. 끔뻑. 이윽고 뺨을 가볍게 두드려 잠을 쫓아낸 김래빈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미안. 잠들 줄 몰랐어.”
“김래빈 엄청 잘 잤어.”
“알아…….”
여전히 잠기운 가득한 표정으로 김래빈이 대답했다.
이후야 뭐. 적당히 배를 채우는 와중에 에밀리가 서비스라며 아이스크림을 준 것 외엔 별다른 특이점은 없었다. 둘은 버거를 먹으면서 시답잖은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김래빈은 자신의 작업실과 현재 커리어, 그리고 미래의 자신을 위한 포트폴리오 이야기를 해주며 그래도 아직 학생 신분이니 아쉬울 점이 많다고 토로했다. 그러며 네 곡을 작업하게 되어서 몹시 영광이었다는 말까지 착실하게 덧붙였다.
이야기는 길어졌다. 맨발로 모래사장을 걸으며 차유진은 자신의 이야기를 차근히 풀어놓았다. 한 손엔 아이스크림을 들고서. 복숭아뼈를 핥고 지나가는 파도에 괜히 발재간이나 해보면서.
“메달 딸 거야. 금메달.”
아이스크림의 콘을 한 입 베어 물며 차유진이 말했다. 이제는 완연한 밤이었다. 얼굴에서 너울대던 짙은 주홍빛은 밤의 장막 뒤로 사라졌다. 덕분에 김래빈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선물하고 싶은 사람 있어. 내 금메달.”
달짝지근한 바닐라 향과 바다의 짠 내음이 사방을 어지럽혔다. 살짝 습한 바람을 맞으며 차유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금메달 주고 많이 사랑한다고 말할 거야. 금메달을 따는 데 필요한 건 기적이 아니라 김래빈 노래야.
김래빈은 아주 오랫동안 고민하는가 싶더니 조금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링크장은 시원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숨을 내쉰다. 사람은 얼마 없다. 빙판 위에는 자신뿐이다. 펜스 너머에서 카일이 몸을 쭉 뺐다. 너 또 고집부리다가 다치지 말고 감만 보라는 잔소리가 우다다 쏟아졌다. 유진은 손만 저었다. 그럴 일 없을 거라고 장담했다. 감이 말하고 있었다. 오늘은. 오늘만큼은.
한 달이 지났다. 링크장 출입 금지당한 지 딱 한 달이 지난 날이었다. 카일은 유진을 불렀다. 약속한 대로였다. 트리플악셀. 성공하면 대회 준비. 실패하면 다시 한 달 금지. 경기가 두 달도 안 남은 지금, 한 달 금지당하는 건 곧 경기를 포기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달리 말하자면. 이번 점프에서 실패하면 금메달이고 뭐고 출전조차 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차유진은 차분히 숨을 골랐다. 발목을 조이는 스케이트를 괜히 툭툭 건드렸다. 링크장을 몇 바퀴를 돈 몸이 뜨끈했다. 깊이 심호흡했다. 기이할 만큼 마음이 평온했다. 감각은 명징하고 의식은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감이 말하고 있었다. 실패할 리가 없다고.
천천히 발을 밀고 나갔다. 처음엔 느긋하게 구나 싶더니 이내 속도를 점차 높였다. 링크장 외곽을 따라 한 바퀴 빙 돈다. 속도는 충분하다. 자세를 잡았다. 직전 다시금 숨을 삼켰다. 발을 크게 돌리는 몸짓. 그리고 이어지는 도약. 회전.
얼음 갈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날이 빙판에 닿는다. 깊이 반원을 그리며 균형을 잡았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치들었다. 천장에 점점이 박힌 빛살들이 눈동자 속으로 굴러떨어졌다. 그게 꼭 며칠 전 보았던 음식점 테라스의 꼬마전구 같다고 생각했다.
멀리서 카일이 외쳤다.
“나이스 점프!”
일상이다. 차유진은 확신했다.
한 달간의 일탈 아닌 일탈 끝에 트리플악셀을 완벽하게 성공한 지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카일은 약속대로 다시금 유진을 선수로서 대하기 시작했다. 차유진의 하루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연습과 훈련의 시간으로 꽉 들어차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다시.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유진은 오히려 기꺼웠다. 그도 그럴 것이. 차유진은 애당초 피겨 선수였으니까. 세계 선수권대회를 석 달 앞두고 링크장 출입 금지였던 시절은 이제 안녕이다. 다시 빠짐없이 연습 시간에 참여하는 유진의 등에 동료 선수들의 시선이 날카롭게 콕콕 박혀댔지만, 뭐. 차유진은 원래 그런 거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진득하게 따라붙는 시선들이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의심, 부러움, 질투, 업신 따위가 어지럽게 뒤섞여 있을 것이다. 사실 선수권대회가 두 달쯤 남았는데 연습 시작했다고 하면 비웃음당하기 일쑤기는 했다. 그게 어떤 대회인데. 고작 두 달 남짓 연습했다고 메달 따가면 그것도 나름대로 미친놈이니까. 두 달 남기고 메달 따겠다고 연습에 매진하는 놈도 역시나 미친놈이고.
유감스러운 점은 그거다. 차유진은 굳이 미치지 않아도 여전히 우승 후보였다. 두 달 남은 상황이지만. 아무튼 간에.
“들어가서 몸 풀고 있어. 난 이것만 확인하고 갈 테니까.”
유진은 카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은 근래 유진만큼이나 바빴다. 안무가와 안무 짜랴, 김래빈과 곡 조율하랴, 그러는 와중에 유진의 훈련도 맡으랴. 안무 초안이 거의 막바지였던 것을 생각하면 카일도 카일 나름대로 준비해오고 있었던 게 분명하지만.
차유진은 문을 열고 링크장 안으로 들어섰다. 시원한 공기에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면 빙판 위를 누비는 선수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왔다. 문 열리는 소리에 시선이 일순 집중되었다가 일사분란하게 흩어졌다. 음악 소리를 제하면 대화 소리가 거의 없었다. 선수들이 슬슬 예민해지기 시작할 시기니 당연했다.
빙판 위를 올라 가볍게 몸을 풀며 차유진은 문득 생각했다. 이게 일상이긴 했다.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서 동네 한 바퀴 돌고. 밥 먹고 링크장 와서 훈련하고. 저녁 여덟 시가 돼서야 지친 몸 이끌고 집에 가서 씻으면 아홉 시. 카일과 피드백을 주고받으면 금세 열한 시가 된다. 그러면 자기 싫어도 자게 됐다. 체력이 아무리 좋아도 온종일 훈련 다음 훈련이니 당연했다.
예전엔 열한 시 딱 되면 미련이고 뭐고 그냥 눈 붙여서 꿈나라 갔는데. 요즘엔 잘 모르겠다. 뜻 모를 미련이나 아쉬움은 손가락 끝에 남았다. 그렇게 괜히 메신저를 한 번 뒤적여보고. 자기 전에 뒤척이고. 아침에 일어나면 알람 한 번 확인해보는 식이었다. 몸에 무리가 갈 정도는 아니지만 영 신경을 끄기도 힘든. 딱 그 정도.
빙판 가장자리를 도는 건 두 바퀴째다. 펜스 너머를 곁눈질했을 때 카일은 여전히 없었다. 세 번째 바퀴를 시작하며 유진은 생각했다. 음. 그러니까 말이지. 그 미련인지 아쉬움인지. 괜히 손 끝 근질거리게 하는 그거 말이지.
원인은 알았다. 원인이라기보단 대상자라는 말이 더 맞나. 아무튼.
뭐가 문제냐면. 김래빈하고 도통 연락이 안 됐다.
차유진이 바쁜 만큼 김래빈도 바빠질 만했다. 편곡 작업을 한 달 안에 끝내야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게다가 안무와 맞추어 계속 세부 조정이 들어갈 테니 기반을 탄탄하게 잡아놓는 게 몹시 중요하단 사실 정돈 문외한인 차유진도 알았다. 그러니까. 래빈은 근래 들어 카일보다도 바쁠 몇 안 되는 사람이란 뜻이었다.
머리로는 알았다. 그래서 연락도 틈틈이 했다. 하루에 한두 번씩 안부 인사만 가끔 주고받았다. 시간이 날 때 밥은 먹었느냐느니 날씨가 좋다느니 떠들어댔지만 답장을 기대하진 않았다. 김래빈에게서 답이 없지도 않았다. 질문 하나 하면 답장은 꼬박꼬박 왔다. 간극이 좀 길 뿐이지.
그렇다면 뭐가 문제인가. 네 번째 바퀴를 막 끝내며 차유진은 결론을 지었다. 목소리 못 들은 지 너무 오래됐다. 얼굴 못 본 지는 더 오래였고.
일주일 전. 그러니까 크리스마스이브 때 이후론 머리칼도 못 스쳤다. 늦은 밤에 통화를 짧게 한 적은 있으나 그때도 대화다운 대화는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둘 다 강행군을 견디느라 녹초가 된 까닭이었다. 그때 나눈 대화에서 기억나는 건 김래빈의 목소리가 몹시 피로했다는 사실뿐이었다. 아. 그리고 샘플링할 노래를 클래식 계열에서 찾아보고 있다는 것도.
아마 앞으로도 당분간은 못 볼 거였다. 갑자기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다치거나 하지 않는 이상은. 좋은 이유로 보는 건 아마 완성된 곡과 안무를 시연할 때 세부 조정을 위해 만나는 걸 텐데. 그 단계까지 가려면 아직 한 달쯤은 남았다. 중간에 탈주해서 김래빈 작업실에 들이닥치자니 이건 차유진 본인의 시합이었다. 그만큼의 책임감이 뒤따랐다.
어쨌든 결론은 그거였다. 당분간은 얼굴 볼 일 없음. 어쩌면 당연한 건데 왜 묘하게 섭섭한 마음이 드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차유진이 여섯 바퀴쯤 돌았을 때 마침내 카일이 링크장 안으로 들어왔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였다. 뭔가 일이 제대로 안 풀린 기색이 역력했다. 카일은 버펄로처럼 우악스럽게 걸어오더니 펜스에 기대어 손짓했다. 부드럽게 다가가자 이내 고개를 내젓곤 말했다.
“유진. 오늘 몸 상태는 어때.”
“나쁘지 않아요. 언제나 그렇듯이. 당신이 보기엔 어때요, 카일?”
“멀쩡해 보인다. 다행스러운 일이지.”
유진은 대답 대신 피식 웃었다. 지독하게 눌어붙었던 슬럼프도 차근차근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지난 일주일간의 기록이 증명했다. 점프 성공률도 정상궤도였고 기초적인 실수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슬럼프 때 조급하게 진입하던 점프 타이밍도 많이 늦춰졌고. 유진은 속으로 엉망이던 제 상태를 하나씩 짚다가 고개를 저었다. 엉망 중의 엉망이었는데 자각을 못 하고 있었다는 게 차라리 신기했다.
안무에 관한 대화가 몇 번 오갔다. 카일은 진중한 목소리로 그러나 아직은 조심해야 할 단계이므로 너무 자만하지 말라며 충고에 충고를 이었다. 유진은 하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의 눈이 탐탁지 못한 듯 게슴츠레해졌지만 어쨌든 이어진 말은 없었다.
훈련은 해가 질 때까지 이어졌다. 근 한 달간 빙판에 오르지 않은 터라 스핀 자세 교정부터 차근히 진행했다. 덕분에 하루를 통째로 썼는데도 진도는 지지부진이었다. 짐을 꾸리며 점프 성공률을 기록한 기록지를 빤히 들여다보는데 문득 누가 말을 걸었다. 퇴근 준비를 끝마친 카일이었다.
“소감이 어때?”
“무슨 소감이요?”
“주니어 때 루틴으로 돌아간 기분.”
차유진은 대답하는 대신 어깨만 으쓱였다. 주니어 시절 기술의 안정성을 높이려 했던 루틴을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재미는 없네요. 장난스레 대꾸하자 카일이 키득거렸다.
“그럴 만도 하지. 고작 한 달 쉰 것 가지고 뭐 이런 걸 하나 싶진 않니?”
“그런 생각이 아예 없지는 않아요.”
“인정해라. 너 이번 한 달 때문에 하는 루틴이 아니란 거 알잖아.”
“그래서 별말 안 하잖아요? 쉬기 전부터 내 상태가 끔찍했다는 사실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어요, 카일.”
카일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넌 정말 못 말리는 장난꾸러기야. 어쩌다 너랑 같이 십 년이나 지냈는지 모르겠다니까. 한숨인지 뭔지 모를 것에 뒤섞여 나온 말에 유진은 그냥 킥킥 웃었다.
시답잖은 대화는 조금 이어졌다. 기록지를 확인하며 균형과 속도에 관한 이야기를 잠깐 했으나 주제는 또 금방 넘어갔다. 하릴없는 잡담이었다가 경기에 대한 진지한 조언이기도 했다. 할 말이 없으면 자연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또 아 그렇지, 이걸 알려줘야 했지, 하며 누군가가 말을 꺼냈다.
카일이 주제를 바꾸어 꺼낸 건 침묵이 서너 번쯤 오간 후였다.
“확실히 너답지 않았어. 슬럼프 때 말이야.”
기록지를 뒤적이던 유진의 손이 문득 멈췄다. 카일은 벽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말을 고르는 듯 손가락으로 턱을 두드리다가 이내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물론 네가 이제껏 슬럼프를 아예 겪지 않았냐 묻는다면 결단코 아니라고 하겠지만……. 여태껏 네가 지나온 슬럼프와는 확실히 경향이 달랐지. 너도 알 거야, 유진.”
계기가 있는 것과 없는 것. 유진은 속으로 가만히 뇌까려봤다. 카일의 말엔 틀린 점이 없었다. 선수 생활을 하며 지독한 슬럼프는 여러 번 만났다. 이렇게까지 고생한 적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번 슬럼프가 유난스러운 이유 또한 있다.
“지금은 잘 이겨내고 있으니 별말은 하지 않겠지만…….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은 그거다, 유진.”
“뭔데요?”
“메달 못 따도 상관없어. 기적 같은 걸 바랄 필요도 없다. 너도 알잖니.”
이번에 내려앉은 침묵은 조금 다른 양상이다. 공백을 채우던 책장 넘어가는 바스락거림, 가벼운 너털웃음 따위마저 사라진다. 입을 다문 순간 유진은 멍청하게도 링크장을 떠올렸다. 생각보다 미온한 링크장의 공기를. 얼음으로 가득 찼으니 뼛속까지 추울 거라는 사람들의 예상과는 다르다.
그리고 동시에 차유진은 생각한다. 메달을 따는 건 사실 중요하지 않다. 차유진은 일의 경중을 두고 이성적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판단력을 지녔다. 그건 차유진이 어린 나이임에도 지금의 위치에 다다를 수 있었던 어떠한 결정적 요소와도 맞닿아 있었다.
정말로 중요한 것.
입을 다문 유진을 내려다보던 카일은 느리게 한숨을 쉬었다. 하여간 그의 소중한 제자는 열여덟밖에 되지 않은 주제에 세상만사 힘든 짐을 죄 끌어안은 늘그막 노인네처럼 굴고는 했다. 십여 년이나 보았건만 가끔 그 속내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카일은 무릎을 굽혀 몸을 반쯤 앉혔다. 그제야 벤치에 앉은 유진과 눈높이가 맞아들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것 같니, 유진?”
“글쎄요.”
“자꾸 틱틱대지 말고.”
카일은 터지려는 한숨을 꾹 집어삼켰다. 죽을 날 받아 사는 노인처럼 군다고한들 유진은 고작 십 대 청소년에 불과했다. 나이로 유진을 낮잡아 볼 생각이 없는 만큼이나 카일은 그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과중한 짐을 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유진은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건 간혹 유진의 배를 산 카일마저 놀라게 할 정도로 날카로웠다.
초연하다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꾹 참고 사는 것은 유진의 적성이 아니다. 다만 때때로 어떤 상황이나 흐름이 자유분방한 유진마저 낚아채 억누르곤 할 뿐이지. 조금 우스운 말이지만 카일은 그것들이 창작물에서 흔히 다루는 운명과 결을 같이 한다고 믿는다.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운명을 깨부수고 나아가는 고결한 주인공과 그를 응원하는 창작물과는 달리, 이곳은 현실이라는 점이겠지.
그렇지만.
“중요한 건 네가 즐기는 거야. 선수가 된 이상 항상 즐거운 일만 있을 수는 없겠지만, 근본적으로 너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기쁨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들이어야 해.”
“…….”
“이자벨도 그걸 원하실 거야.”
카일은 근래 들어 문득 생각했다. 유명하다는 소설을 읽을 때마다. 아침 아홉 시 라디오가 시를 낭송할 때마다. 노래가 사랑을 읊을 때마다. 무심코 돌린 채널에서 판타지 영화가 나올 때마다. 어쩌면 중요한 건 현실과 비현실이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불가능해 보이는 길을 걷는대도 말없이 응원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아마도 주인공을 사랑해서가 아닐까 하고.
유진은 대답하는 대신 어깨만 으쓱였다. 멈췄던 손은 기록장을 다시 넘기는 대신 종이무더기를 벤치 위에 올려놓았다. 눈이 마주쳤다. 카일은 말을 잇는 대신 입을 지그시 다물었다.
“그럴지도 모르죠.”
유진의 말은 생각보다 가볍게 시작했다. 지금껏 침묵을 고수한 것과는 어울리지 않는 태도였다.
“하지만 카일. 이건 굉장히 사적인 문제예요. 나와 오래 함께한 당신이라고 해도 말을 얹거나 함부로 조언하는 건 삼가야하지 않나요?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네요.”
“사적인 문제라는 건 나도 인정해. 하지만 문제가 너의 커리어까지 위협하고 있다면 더는 개인적인 사정이 아니지. 너는 엄연한 국가대표야, 유진 차. 나는 네 코치고. 나는 코치로서 선수가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게 다독일 책임이 있다.”
“잘못된 길이라는 건가요?”
“옳은 길이었다면 적어도 네가 슬럼프에 허덕여 주니어 루틴을 따르고 있을 필요는 없었겠지.”
카일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유진은 대꾸하지 않았다. 짜증스러운 듯 눈썹을 불쑥 올리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어찌됐든 유진은 본인의 위치를 잘 알았다. 카일 또한 말을 얹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을뿐더러 카일은 카일 나름대로 조금 후회 중이었다. 대화하다 보니 말이 조금 세게 나간 감이 없잖아 있었다.
“좋아요.”
유진은 대화를 끌지 않고 깔끔히 잘라냈다. 말을 더 하지 않겠다는 의미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럴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겠다는 유진 나름대로의 표현이었다. 유진은 다소 성마른 손길로 기록장과 스케이트를 챙겨 벌떡 일어섰다. 와중에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꼴이 불만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카일. 나한테 중요한 건 메달이 아니에요. 그걸 따기 위한 기적 같은 것도 필요 없고요.”
“그럼?”
“내가 바라는 기적은 단 하나뿐이에요. 그리고 그건 내 스케이팅과 전혀 관련이 없죠.”
카일의 말문을 완벽하게 막아버린 유진은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낫 터칭 스텝 시퀀스
5
시간이 빨랐다. 솔직히 말해서 눈 감았다가 뜨면 한 달이 지나 있다던 어른들 말엔 과장이라고 생각했는데. 근래 들어 본인도 비슷한 흐름을 체감하고 있음을 김래빈은 인정했다.
달리 말하자면 바빴다. 진짜로. 인간적으로 너무.
김래빈은 작업을 즐겼다.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을 거냐, 잘하는 일을 업으로 삼을 거냐는 그 흔하디흔한 고민 한 번 안 해본 사람이었다. 질문을 들으면 의아하다는 듯 되레 되물을지도 몰랐다. 그런 고민을 왜 합니까? 왜냐하면, 김래빈은 정말이지 운이 좋게도, 좋아하는 일을 잘했다. 잘하는 일을 좋아했다. 게다가 그냥 잘하는 수준이 아니라 몇 년에 한 번 나오는 천재 수준이었다.
그런 김래빈 씨. 고작 열여덟이지만 내로라하는 사람들에게서 외주 따내고 작업하는 워커홀릭 미스터 김은 현재 모니터를 앞에 두고 머리 박은 채다.
작업량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김래빈을 근본적으로 괴롭히는 문제는 그 많은 작업 중 딱 하나였다. 골머리를 앓고 어떻게든 쥐어짜내 작업하는 것을 나름대로 즐기는 편인데. 이 음원만큼은 도무지 잘 풀리지가 않았다. 서른여덟 번째로 작업이 막힌 김래빈은 울적한 표정으로 컨트롤 에스만 연타했다.
차유진 거였다. 이건.
어줍잖은 완벽주의 같은 건 아니었다. 차유진을 향한 팬심과는 별개로 김래빈은 본인의 실력에 대한 자부심과 확신, 그리고 프로 의식이 있었다. 제게 차유진이 특별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음원 퀄리티를 높이려 악을 쓰지 않았다. 김래빈은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다시 한숨을 거하게 내쉬었다. 바꿔 말하자면. 평소와 똑같은데 작업이 영 지지부진하다는 뜻이다.
차유진 음원 하나 붙잡는 동안 다른 외주 두 건을 끝냈다. 두 클라이언트 모두 몹시 만족하며 다른 외주 건에 대해 열렬히 토로하고 갔다. 머지 않아 새로운 일이 들어올 거였다. 일정표가 한 번 갈아엎어질 동안 차유진의 이름 석 자만은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었다. 이름이 사람을 닮은 건지 사람이 이름 닮은 건지 모르겠는 수준이었다.
김래빈은 손만 움직여서 작업한 음원을 틀었다. 이번 프로그램 때 차유진은 난도 높은 점프를 주로 배치한 안무로 특유의 정열적임을 살릴 예정이었다. 음원 작업은 누구나 알 법한 대중적인, 그러나 강렬한 클래식을 샘플링해주십사 하는 요청이 있었다.
고민 끝에 김래빈은 슈베르트의 마왕을 골랐다. 웅장하고 어둡지만, 동시에 강렬하고 대중적인. 마왕이 가진 깊고 어두운 선율을 이리저리 만져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환기시키려는 시도가 여섯 번인가 있었지만 전부 실패했다. 그렇다고 원곡 분위기를 그대로 가져가기엔 보았던 이번 시안과 맞물린다는 느낌이 부족하다. 안무와 음원 모두 하나의 시안에 불과하지만 바꿀 거라면 음원 쪽이 편하다는 사실쯤은 김래빈 또한 알았고.
끙 소리가 절로 나왔다. 콧잔등을 무겁게 짓누르는 안경만 연신 만지작거렸다. 이대로 가다간 마감일을 맞출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더럭 들었다. 아주 비이성적인 생각이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만큼 조급한 마음을 떨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의식하지도 못한 채 손가락을 빠르게 두드리던 김래빈은 이내 벌떡 일어났다.
일이 안 풀린다면 어쩔 수 없지. 가장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모니터 화면을 가득 채운 작곡 프로그램을 밀어 치웠다. 대신 주위에 굴러다니던 패드를 들었다. 메모장을 켜고 빈 공백을 지그시 들여다본 김래빈은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큼직하게 적었다. ‘차유진’.
차유진하면 생각나는 것. 김래빈은 지금껏 자신이 생각했던 이미지를 하나씩 끄적여내렸다. 만나기 전. 영상으로 보았던 차유진의 경기. 강렬하다. 사람으로 하여금 경기에 푹 빠지게 하는 인력이 있다. 과감한 안무 구성과 그걸 가볍게 해내는 괴물 같은 피지컬. 날 사용이 올바르고 엣지를 넣는 데에 두려움이 없다. 기본기가 그만큼 탄탄하다는 증거다.
하지만.
거침없이 써내려가던 손이 점차 느려졌다. 차유진을 만난 후의 이미지. 사실 김래빈은 경기 그 자체보다 이후의 영상을 더 좋아했다. 경기를 깔끔하게 마쳤을 때 보이는 세리모니. 환하게 웃으며 코치인 카일과 나누는 뜨거운 포옹. 대기실에 앉아 점수를 기다릴 때 엿보이는 자신감 같은 것들.
어렴풋한 이미지는 조금 더 최근으로 돌아오며 구체적으로 변한다. 첫 만남. 다소 불만스러워 보이던 표정. 멀리서 보던 것과는 다르다. 상상한 것보다 표정이 더 많고 화려했다. 그러는 주제에 애처럼 유치하게 굴고. 바보 같은 말도 종종 하고. 느린 손이 차유진의 이름 아래에 단어 두 개를 써내렸다. 멍청이. 바보.
웃을 때 송곳니 보임. 송곳니 날카로움. 잘생김. 빙판 밖에서도 사람 시선 끌고 다님. 피자 좋아함. 돼지. 갈비도 좋아하는 듯? 사람이 자는 모습 보는 거 좋아함. (왜?)
“김래빈 뭐 해?”
“으아악!”
차유진은 장담하건대 김래빈이 그때 허공으로 오 미터쯤 솟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김래빈은 갑작스러운 낯선 목소리가, 그것도 귀 바로 옆에서 들린 덕분이라고 반박하겠지만.
김래빈이 비명을 내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큰소리에 놀란 건지 눈을 휘둥그레 뜬 차유진이 지척이었다. 코와 코가 살짝 부딪히듯 엇갈렸다.
“너 여기서 뭐 해!”
“심심해서 왔어!”
“어떻게 들어온 거야!”
“김래빈 누나가 비밀번호 알려줬어! 갑자기 왜 소리를 질러?”
“네가 놀라게 하니까 그렇지!”
“나 김래빈 불렀는데 대답 안 한 거 김래빈이야!”
놀랐네 진짜. 무슨 드럼 비트보다 세게 뛰는 심장을 지그시 잡아누르며 김래빈이 고개를 내저었다. 와중에 비밀번호 알려준 건 누나란다. 누나랑 연락하는 건 알았지만 비밀번호까지 쉽게 알려줄 만큼 친해졌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김래빈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저녁 아홉 시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평소였다면 훈련 중이거나 집에 돌아가서 카일과 피드백 주고받을 시간일 텐데. 다시 고개를 돌리니 입을 댓 발 내민 차유진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얘는 왜 여기 있지. 그보다 왜 저런 표정이지. 화내야 하는 건 나 아닌가. 멍청한 독백만 뇌까렸지만 그래, 차유진이 좀 유치하긴 하지, 하며 시선을 돌렸다. 하릴없이 모니터나 만지작거리는데 뒤에서 차유진이 돌연 입을 연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나 심심해.”
“너 대회 얼마 남지도 않았잖아. 가서 연습할 시간 아니야?”
“아니야. 원래 연습하는 것만큼 쉬는 것도 중요해. 카일도 나 쉬는 거 알아. 김래빈만 몰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멋쩍은 손길로 키보드만 두드리고 있자니 의자가 휙 돌아갔다. 시야가 갑작스럽게 트였다. 바닥에 앉아 의자를 돌린 차유진은 뚱한 표정이었다. 입술은 오리인 양 쭉 내밀고. 눈은 게슴츠레 떴고. 눈썹은 씰룩대고. 새삼스럽지만 얼굴 참 잘 쓴다 싶었다. 누군들 차유진의 저 표정 한 번 보면 괜히 잘못한 것 같고 그럴 거다.
불만스러운 표정 잔뜩 지으면서 차유진이 말했다.
“김래빈 안 쉬잖아. 누나가 그랬어. 쉴 거면 래빈이랑 같이 쉬라고. 김래빈 요즘 안 쉰다고.”
불퉁한 목소리가 작업실을 울렸을 때. 김래빈은 열여덟 인생 처음으로 누나한테 진심으로 비명을 지르고 싶어졌다. 누나 그런 걸 말하면 어떡해! 그래봤자 호텔에서 늘어지게 자고 있을 누나가 대답할 리 없지만.
김래빈은 뻣뻣한 고개를 팩팩 저었다. 나비 다리하고서 앉은 차유진은 그러거나 말거나 의자를 당겼다가 밀었다가. 무슨 고양이 놀이하듯이 의자를 가지고 노는 것이다. 그 짓을 몇 번이나 반복하니 김래빈도 슬슬 어지러웠다. 틈틈이 쉬라는 말을 빼놓지 않는 걸 보면 눈치 없기론 서러운 김래빈도 알았다. 누나가 차유진 보낸 목적이 이거구나, 하고.
하지만 이렇게 되니 김래빈 안에 있던 반항심이 무럭무럭 피어 올랐다. 나 그래도 열여덟이나 먹었는데. 누나가 원하는 대로 꼬박꼬박 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본인이 작업하느라 이틀째 밤샘 중이라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채 열여덟 남자애는 동갑내기 친구 앞에 두고 결심했다. 좋아. 누나 뜻대론 되지 않겠어. 그러니까 가장 먼저 차유진을 내보내거나 조용히 시킬 거다.
“김래빈 바빠?”
때마침 조용히 시키기 딱 좋은 주제로 대화를 끌고 간다. 김래빈은 차유진의 질문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당연히 계속 자기 앞에 의자 밀어대고 있을 줄 알고.
“그래!”
“근데 이거 뭐야?”
있으란 자리에 없고. 어디 있나 했더니 잊고 있던 패드 들여다보고 있었다. 차유진이.
패드 들여다보는 눈이 반짝였다. 차유진은 흥미 있는 주제나 물건을 맞닥뜨렸을 때 저렇게 눈을 반짝이고는 했다. 그리고 한 번 집중하면 나름대로 조용한 편이고. 빠르게 계산을 마친 김래빈은 힘차게 의자 바퀴를 돌돌돌 밀어 차유진에게 다가갔다.
“작업이 잘 안 돼서, 네 이미지와 너를 생각했을 때 연상되는 단어들을 전부 적어놓았어. 내가 무엇을 표현하려고 하는지, 어떤 음악을 만들어야 네게 어울리는지 같은 추상적인 목표를 좀 더 구체화하기 편하니까.”
“Oh.”
“관심 있어? 그거 보고 있을래?”
굳이 두 번 물을 필요도 없었다. 차유진은 이미 패드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순탄하게 작전을 성공시킨 김래빈은 뿌듯한 미소를 그리며 다시 의자를 밀었다.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작업실 안을 가만히 채우는 순간이다.
“알았어?”
김 새는 소리보다 작은 중얼거림이다. 김래빈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뭐를? 그러다 고개를 돌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어라. 빨갛다.
패드를 얼마나 꽉 쥐었는지 손이 하얗다. 입술은 꾹 다물었는데 눈은 크게 뜨였다. 발갛게 열 오른 뺨이 몇 번 씰룩거렸다. 영락없이 놀란 모양새인데 또 언뜻 보면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순간 김래빈 머릿속엔 커다란 물음표가 하나 떠올랐다. 패드에다가 이상한 소리를 써놨나? 그보다 알았냐고 하지 않았나? 생전 처음 보는 차유진 표정에 덩달아 당황한 김래빈이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은 건 고작 한 마디다.
“어, 뭐를?”
“김래빈 자는 거 구경한 거.”
“어, 어……. 알기는 알았는데.”
“어떻게?”
“눈을 조금만 감고 있어도 금방 웃어대던 걸 설마 들키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게다가 틈만 나면 얼굴 만지작거리는데 모를 리가 없잖아, 바보야!”
“나는 김래빈 자는 줄 알았어!”
“네가 옆에 있는데 신경 쓰여서 어떻게 자!”
그리고 침묵. 씨근대는 숨소리만 한참 울린다. 얼굴 벌게진 건 피차 다를 바 없으면서 할 말 찾느라 눈 깜빡대기 바쁘다.
차유진 쪽에선 신경 쓰여서 미치겠는 거다. 지금껏 진짜로 자는 줄만 알아서, 그래서 그냥 조금 구경하겠다고 생각했던 걸 김래빈이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김래빈의 마지막 말이. 신경 쓰여서 어떻게 자냐니. 김래빈은 내가 신경 쓰여? 좋은 쪽으로 나쁜 쪽으로? 좀 억울하기까지 하는 마음에 어깨 붙잡고 묻고픈 마음이 산더미다.
김래빈도 어이없기는 마찬가지다. 얼굴을 그렇게 만지작댔으면서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는 사실이 웃기기 그지없고. 와중에 본인이 그렇게 옆에 딱 붙어 있는데 마음 편히 자라고 진짜 마음 편히 잘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줄 아는 건지 원. 차유진 신경 쓰여서 눈 감고 있다가 얼굴 만지작대는 손길에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는데. 본인은 몰랐다는 사실이 좀 괘씸하긴 하고.
그런데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 억울하고 서운하고 괘씸한 마음이 단박에 사라진다. 그냥 어라, 하는 거다. 얼굴 빨갛다. 왜지. 부끄러운가. 아무래도 그렇겠지. 차유진 머릿속은 스피드 스케이터가 들어찬 것처럼 쌩쌩 돌아가기 바빴다. 반대로 김래빈은 아무 생각도 못하겠는 게 꼭 텅 빈 오선보 같고.
그러다가 마침내 차유진이 입을 열고서는, 간신히 쥐어짜듯 말하는 거다.
“김래빈. 나 신경 쓰여?”
“옆에 있는데 어떻게 신경이 안 쓰여?”
“그럼 나 하지 말까?”
“아니, 그 뜻은 아닌데.”
“그럼?”
그럼?
멍청하게 눈만 끔뻑이다가 김래빈은 생각한다. 어. 그러니까. 차유진은 뭘 묻고 싶은 거지?
심장은 아마추어 드러머의 형편없는 비트로 쾅쾅 울려대고. 머리가 살짝 어지러운 것도 같고. 열이 올라서 그런 게 분명할 텐데. 아니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됐지. 나는 그냥 누나 뜻대로 하기 좀 싫었을 뿐인데. 수면 부족인가. 아 그건가. 역시 진짜 수면 부족인가.
“김래빈 나 좋아해?”
아마 이 환청도 수면 부족 때문일 거다.
짝. 제 뺨을 가볍게 두들긴 김래빈이 고개를 부르르 떨었다. 누나. 누나 말이 맞았어. 사람은 잠을 자야 하나 봐. 내가 바보 같았어. 거 참 이상한 환청이네. 중얼거린 김래빈이 비척비척 일어난다. 걸음은 침대로 향한다. 좀 자고 나면 나아질 거라고 중얼대면서.
중간에 손목을 잡아챈 건 수문장처럼 앉아 있던 차유진이었다. 아프진 않지만 쉽게 뺄 수는 없는 묘한 힘이다. 맞닿은 살결이 화끈거렸다. 차유진 손은 항상 뜨거웠다. 얼굴 만질 때도 알았지만 이번에 손목 잡히니 더 잘 알겠다.
“진짜로?”
진짜는 무슨 진짜야. 침대가 코앞인데. 한 숨 자고 일어나면 현실로 돌아와 있을 거다. 그런데 손을 뿌리치자니 차유진이 자꾸 눈에 밟혔다. 저 눈. 초롱초롱한 저 눈. 아까 패드 볼 때보다 배는 반짝이는 눈이 심장에 콕콕 박혀든다. 그러고 보니 김래빈은 항상 저 눈을 좋아했다. 경기 시작하기 직전에. 아직은 연기에 돌입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로. 자신이 펼칠 프로그램을 백 퍼센트 기대하는 눈.
차유진과 친해지고 나서부터는 더 좋아했을 거다. 차유진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바보 같고 장난꾸러기지만, 동시에 제법 다정하기도 해서. 반짝거리는 눈을 볼 때마다 도무지 시선을 뗄 수가 없다고. 그래서 아주 멀리서부터 너를 단숨에 알아볼 수 있다고.
항상 보고 있었다고. 그뿐이라고.
그때 차유진이 웃었다. 다 벌게진 얼굴로. 입꼬리가 활짝 호선을 그리니 송곳니가 반짝였다. 동시에 몸이 훅 당겨졌다. 놀란 김래빈이 무어라 할 새도 없었다.
시원한 스킨로션 향이 훅 밀려왔다. 귓가에서 천진하게 웃는 소리가 폭죽처럼 터졌다. 맞닿은 가슴께 너머 심장 박동이 꼭 닮아 있어서, 순간 김래빈은 심장이 하나가 되었나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김래빈 얼굴 진짜 빨개!”
꾹 껴안은 팔에 힘을 주며 차유진이 웃었다.

“[준비됐어?]”
펜스에 몸을 기댄 차유진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카일이었다. 자리를 비우나 싶더니 반가운 얼굴과 함께였다. 카일 곁에서 바짝 긴장한 듯 패드를 쥔 김래빈이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몸은 다 풀었어요.]”
“[잠깐만 기다려봐.]”
뒤이어 안무가가 조금의 간격을 두고 들어왔다. 김래빈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와중 차유진은 빙판 가장자리를 느긋하게 돌며 몸 상태를 점검했다. 손목과 발목 탄력도 좋고. 오랜만에 몸이 가볍다.
오후 아홉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다른 선수들은 모두 돌아갔지만 유진만은 남았다. 본래 유진의 개인 이용 시간도 여덟 시까지였으나 대회 준비 기간에 돌입하면서 일정이 조금씩 밀렸다. 유진뿐이 아닌 다른 선수들 또한 대회 준비에 지장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개인 이용 시간이 없어졌는데도 남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특히나 작곡가와 안무가까지 링크장에 불렀다면 더더욱.
일 월 중순을 향해 달려가는 오늘 아침. 유진은 완성된 첫 안무 시안과 음원을 받았다. 덕분에 온종일 안무를 익혔다. 김래빈과 안무가는 첫 시연을 검토하기 위해 링크장을 찾은 것이다.
카일은 둘과 대화를 나누는가 싶더니 이내 손을 내저었다. 준비하라는 소리가 빈 링크장을 왕왕 울렸다. 관중석 불은 죄 꺼졌는데 안전을 위해 빙판 위 전등만 켜져 있었다. 목을 가볍게 꺾은 유진은 빙판 중심부에서 자세를 잡았다. 고개는 하늘 위로. 오른손은 심장 위에. 왼손은 늘어트리듯이. 그림자가 진하고 길게 남았다. 흘기듯 내려 처리한 시선 끄트머리에서 김래빈과 눈이 마주치는가 싶던 순간.
음악이 느리게 흘러나왔다.
간질이듯 가벼운 칼람바 소리다. 동시에 빙판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날을 깊이 기울여 몸을 돌린다. 앞부분 음악은 서정적이다. 귀를 기울이면 밑바닥에 음울히 깔린 마왕을 눈치챌 수 있겠지만 차유진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첫 번째 점프. 쿼드러플 악셀. 추진력을 위해 속도를 높이는 동안 펜스 너머에 선 사람들이 스치듯 지나간다. 와중에 김래빈의 얼굴은 똑바로 보였다.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패드 위에 무언가를 끄적이기 바쁘다. 다시 자신을 보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추진력을 얻은 그대로 도약한다. 박자에 딱 맞추어 뛰었을 때의 짜릿한 고양감이 전신을 울렸다. 사 회전. 그리고 반 바퀴 더. 빙판에 착지하곤 깔끔한 마무리. 가벼운 박수 소리가 났다. 카일일 것이다.
다음 동작과 그다음 동작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수행한다. 오늘 낮에 처음 본 안무였다. 아직 완전히 제 것이라 말하기는 어려워도 손짓 하나까지 허투루 대하지 않는다. 노래는 점차 절정으로 향했다.
베이스에 깔렸던 음울한 마왕의 곡조가 점차 수면 위로 떠오른다. 천진한 소년을 연기하던 가벼운 손길이 이내 차츰 무거워지고, 빨라지며 동시에 단호해진다. 스텝 시퀀스를 거침없이 수행하며 차유진은 생각한다. 김래빈에게 물어볼 것. 안무가에게 물어볼 것. 카일에게 물어볼 것.
다음을 생각한다. 하나씩 다듬고 고쳐가야 하는 것들을. 스핀에서는 회전을 충분히 돌았는가. 축이 기울진 않았는가. 감각적으로는 알지만 타인의 눈을 통해야 확신할 수 있는 것.
마침내 음악이 터지듯 멈추는 순간. 유진 또한 고개를 치들며 멈춘다.
숨이 가쁘다. 오랜만에 느끼는 벅참이다. 숨을 차근히 고르고 고개를 돌린다. 카일보다도 먼저 김래빈과 눈이 마주쳤다. 조금의 지체도 없다. 그 순간 하릴없이 깨닫는 것이다. 결국엔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첫 시연치고는 굉장하네요.]”
안무가가 중얼거렸다. 뇌를 지배하는 아드레날린에 유진은 괜히 킥킥 웃었다. 미끄러지듯 펜스로 다가가 기대니 카일이 이온 음료와 수건을 건네줬다. 기꺼이 받는데 김래빈이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히 시연이 중요하긴 한 것 같습니다. 상상하던 것과는 다른 점을 집어낼 수 있었습니다. 수정하고자 하는 방향이 다소 명확하게 보이는데 지금 말씀드리면 될까요?”
“[수정할 점 지금 알려주면 되겠냐는데요.]”
“[오, 그럼 좋지. 얼마든지 부탁해요.]”
“지금 괜찮대.”
“네! 그럼 우선 도입부 부분부터 차근차근 말씀드리겠습니다. 안무 시안과 차유진 선수의 움직임을 대조했을 때…….”
안무가와 김래빈이 열띤 대화를 시작하는 와중에. 차유진은 빙판에서 내려와 벤치에 몸을 앉혔다.
오랜만에 프로그램 규정대로 몸을 움직였더니 영 숨이 찼다. 그새 체력이 안 좋아진 건지. 음료수를 들이켜는데 카일이 곁자리에 앉았다. 익숙하게 지분거리듯 어깨를 툭 치더니 이내 웃으며 말했다.
“[멋지네. 아직 어설픈 부분이 한두 군데쯤 보이긴 하지만, 뭐. 처음치곤 훌륭했어.]”
“[페이즈 바뀐 후에 점프 축 말이에요. 살짝 기울어졌죠?]”
“[응. 오른쪽으로 살짝. 그래도 착지 때 엣지 깊게 넣어서 안정적으로 잡은 건 잘했어.]”
유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숨 좀 고르고 피드백 진행하자. 카일의 말에 순순히 대답한 유진은 이내 벽에 머리를 기댔다. 쿵쾅대는 심장에 절로 웃음이 났다.
기분이 좋았다. 반가운 안무. 점차 빛을 발하는 음악. 그 중심에서 연기하는 자신. 이대로만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뇌리에 꽂히듯 발했다. 이대로만 진행하면 금메달은 제 것이 될 테다. 가장 높은 단상에 올라서서 금메달을 목에 거는 건 차유진일 거다. 그러면.
“[유진!]”
링크장 입구가 부서지듯 열렸다. 비명 같은 부름에 유진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이든이었다. 어울리지도 않게 얼굴이 다급했다.
“[방금 라껠이 연락했는데, 할머니가…….]”
그 순간. 모든 소음이 사라진다. 누군가 어깨를 흔드는 것도 같고. 이든이 허겁지겁 달려오는 것도 같고. 손이 잡혔다가 어깨가 잡혔다가. 누군가가 등을 두드렸다가.
멍하니 흔들리며 차유진이 중얼거렸다. 금메달을 딸 거였다. 선수권대회 때.
금메달을 따면. 그러면.
그러면 할머니께…….

약속했다. 아주 예전에. 스케이팅을 처음 시작했을 때. 유진은 할머니의 손을 꼭 잡은 채 한 발씩 어기적어기적 떼고는 했다. 재밌냐는 질문에 굉장히 즐겁다며 웃었다. 지치지도 않는지 몇 시간씩 스케이트를 타다가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잠들기 일쑤였다.
선수가 되는 건 어떻겠냐는 질문에 유진은 눈을 빛내며 대답했었다. 그러면 할머니한테 가장 소중한 메달을 주겠다고.
“의사가 뭐래?”
“이제껏 쓰러지지 않은 게 용하다는데. 앞으로가 고비일 거래.”
“이래서 멀리 가시는 건 반대했는데…….”
부모님이 대화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울린다. 레이첼은 가브리엘라를 달래느라 바쁘다.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달달 떨리는 다리를 자각하지도 못한 채 유진은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머리가 아팠다.
그랑프리가 끝날 무렵 할머니가 쓰러지셨다. 건강하고 씩씩한,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활력으로 가족을 들쑤시고 다니던 할머니가 그렇게 조용하실 수 있는지 유진은 그때 처음 알았더랬다. 돌이켜보면 슬럼프도 그때부터였다. 지끈대는 관자놀이를 힘주어 누르며 유진은 나직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계기가 명확하지 않은 슬럼프라니. 너 자신을 알라던 소크라테스의 말이 왜 떠올랐는지 인제야 알겠다.
시니어로 올라온 이후. 유진의 실적은 가히 괴물 같다고 할 법했으나 그에게 주어진 금메달은 아직 없었다. 지난 그랑프리 때 은메달을 받은 이후 유진의 전성기라는 말이 치솟았고 유진 또한 인정했다. 이대로라면 금메달을 딸 수 있을 거였다. 조금 전 시연에서 다시 한번 확신했다. 이대로만 가면. 그러면 분명히.
왜 하필 지금.
고작 두 달이었다. 그 두 달을 기다리지 못하고 빌어먹을 신은 유진에게서 할머니를 빼앗으려 하고 있었다.
“유진.”
뺨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유진이 고개를 들었다. 이든이었다. 그새 얼굴에서 피로감이 잔뜩 묻어났다. 유진은 대답하는 대신 뺨에 닿은 것을 받아 들었다. 물이 잔뜩 맺힌 콜라 캔이었다.
“가비랑 라껠이 안 보이는데.”
“아까 같이 내려갔어. 화장실인지 편의점인지 모르겠지만.”
“그래?”
“가비가 너무 울어서.”
이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곁자리에 앉는 이든에게 관심을 주는 대신 유진은 캔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물기 맺힌 뺨이 척척해서 기분이 나빴다.
“할머니 지금 병실에 계시는데. 안 가볼 거야?”
이든이 물었을 때 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목이 탔다. 성마른 손길로 캔을 따서 콜라를 목구멍에 들이부었다. 그런데도 가슴이 답답했다. 갈증은 가실 생각을 하지 않는데 정신을 차리니 캔이 비어 있었다. 턱에 걸려 찰랑거리기만 하는 콜라를 들여다보다가 근처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그때까지 이든은 아무 말도 없었다.
잠시간 침묵이 감돌았다. 유진은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 이든은 무슨 생각인지 감이 안 잡혔다. 부모님은 유진에게 할머니의 병환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려주지 않았다. 연세가 있으시니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는, 위로라기엔 기만적이고 자책이라기엔 공허한 말만 되풀이했을 뿐이다.
적막이 길어지던 찰나 스마트폰이 울렸다. 유진의 것이었다. 주섬주섬 꺼내니 화면에 메신저 알람이 와 있었다. 카일이다. 할머니는 괜찮으시냐는 질문이었다. 같은 메시지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 읽는데 곁에서 이든이 물었다.
“괜찮아?”
“뭐가?”
“대회. 준비 때문에 바빴잖아. 갔을 때 래빈도 있었는데. 시연 중이던 거 아니었어?”
“끝났어. 아마 수정사항 반영해서 고치고 있을 거야.”
“그래.”
그리고 다시 침묵이다. 할 말을 쥐어 짜내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질문에서 흥미가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다. 유진은 고개를 들었다. 할머니의 병실은 가까웠다. 고개를 돌리면 살짝 열린 문틈으로 부모님이 보였다.
작은 틈새를 뚫어지라 바라보며 이번에는 유진이 물었다.
“할머니 말이야. 많이 위독하셔?”
“글쎄. 나도 정확히 들은 건 아니라서.”
질문을 피하는 듯 모호하게 대답한 이든은 이내 천천히 말을 덧붙였다.
“의사가 마음의 준비는 하라더라.”
그 대답이면 충분했다.
유진은 메신저를 켰다. 카일과의 대화창으로 들어가 자판을 두드렸다. 망설임 하나 없었다. 메시지를 보내자 읽었다는 표시는 금세 떴다. 괜찮겠냐는 질문이 뒤따랐다. 유진은 답장하는 대신 스마트폰을 끄고 일어났다.
“어디 가?”
“링크장.”
“유진.”
“연습하러 갈 거야. 할머니 깨시면 연락해.”
걸음이 조급해졌다. 이든은 유진을 붙잡지 않았다. 앓는 소리가 언뜻 들리는가 싶더니 몸을 일으키는 것까지 보았다. 이후에는 잘 모른다. 모퉁이를 꺾어 돌아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 탓이다.
두 달. 두 달 남았다. 대회가 빨라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차유진이 할 수 있는 일은 딱 하나밖에 없다. 두 달 동안 연습에 매진하는 것. 세계 선수권대회는 시즌의 대미를 장식한다. 선수권대회가 끝나면 앞으로 몇 달간은 대회가 열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할머니가 언제까지 기다려주실지 모르는 일이니 차유진은 이번 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따야 했다.
따야만 한다.
지끈대는 머리가 유진의 결심을 비웃는 듯했다.
감각이 미묘하다. 추위는 물론이거니와 더위도 느껴지지 않는다. 빙판 위인지. 땅 위인지. 미끄러지는 감각. 욱신대는 발목. 지끈대는 머리. 할머니가 쓰러지셨다. 답답한 가슴. 막혀오는 숨. 마음의 준비를 하래. 단전에서부터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입을 틀어막으며 허리를 굽혔다. 땀방울이 눈물처럼 흘렀다.
숨이 터질 듯이 가쁘다. 손끝이 저릿했다. 몇 시간 내내 혹사당한 몸이 욱신거렸다. 그 몇 시간 동안 카일과도 몇 번인가 충돌했다. 카일은 드물게도 단호하고 엄한 목소리로 이런 건 훈련이 아니라고 호통쳤더랬다. 유진은 대꾸하는 대신 스핀을 한 바퀴라도 더 돌기를 선택했다.
지금이 몇 시지. 마지막으로 스마트폰을 확인한 게 언제였는지도 잘 모르겠다. 빙판 위에서 돌고 뛰고 스텝을 밟는 데에 한참이나 몰두했다는 사실만이 어렴풋하다. 선수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는 걸 보아 늦은 밤쯤 되었나 보다 짐작할 뿐이다. 시계가 어디에 달려 있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스마트폰은 벤치 위에 놓인 짐 무더기 어딘가에 파묻혀 있겠지. 거기까지 갈 시간이 아깝다. 갔다가 돌아올 자신도 없다.
발목이 욱신거렸다. 숨을 고르기 위해 애써 허리를 폈다. 산소를 폐부에 욱여넣듯 밭게 호흡했다. 그러고 보니까 유달리 고요하다. 카일이 벤치에서 역정을 내느라 제법 소란했는데. 그새 갔나. 어쩌면 지쳤는지도 모른다. 유진으로선 아무래도 좋았다.
숨이 어느 정도 잦아들었다. 다리 근육이 딱딱하게 굳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주먹 쥔 손으로 허벅지를 두드리며 다시 한 걸음씩 내디뎠다. 점차 속도를 붙이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안무와 음원은 조금씩 바뀔 거다. 하지만 첫 시안에서 큰 변화는 없겠지. 그러니 첫 시안만이라도 주야장천 익히다 보면 바뀐 시안도 금세 적응할 수 있다.
유진은 속으로 그날 들었던 노래를 차근히 떠올려봤다.
다정하고 서정적인 칼람바. 뻣뻣해진 손길이 벽을 짚듯 바르르 떨린다. 날을 깊이 기울여 반 바퀴 턴. 빙판 위를 미끄러지며 속도를 낸다. 점프를 위한 밑거름이다. 첫 번째 점프는 쿼드러플 악셀. 땀에 푹 젖은 머리칼이 축 늘어져 얼굴에 들러붙었다. 그게 기분이 나빴다.
부츠가 이렇게 무거웠던가. 도약할 수 있을까. 이를 악물고 다리를 가눈다. 심장이 쾅쾅 울렸다. 유진. 할머니가. 발을 교차하고 속도를 내던 상태 그대로. 힘껏 도약한다.
반 바퀴가 고작이다. 그마저 착지에서 한번 크게 흔들렸다.
개의치 않는다. 다음 점프. 그다음 점프. 직후의 스핀. 아닌가. 다음 점프. 후에 스텝 시퀀스였던가. 분명히 전부 기억했는데. 유진. 할머니가 쓰러지셨어.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지. 그냥 헷갈리는 거다. 기억나지 않는 것과 헷갈리는 데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거래. 유진. 아무래도 모르겠어. 머릿속 흐르던 선율. 칼람바 소리가 잦아든다. 바이올린 소리도 걷힌다. 피아노도. 하프도. 이름 모를 귀여운 음도. 남은 건 음울하기 짝이 없는 마왕밖에 없다.
그리고 다음 순간.
“차유진!”
문이 부서지라 열리며 김래빈이 뛰어 들어왔다.
격정적인 부름에 유진이 반사적으로 멈췄다. 갑작스러운 제동에 몸이 휘청 기울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시야 너머 김래빈이 일렁였다. 펜스 안으로 들어오려는 듯 몸을 쭉 뺀 김래빈. 바보 같다. 빙판 위에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주제에.
“그만해!”
카일과 똑같은 소리였다. 떨리는 숨을 욱여넣은 차유진이 다시 한 걸음 뗀다. 발목이 욱신거렸다. 사실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누군가가 사정없이 두들겨 패서 곤죽이 된 기분이다. 첫 점프를 뛰었을 때 온몸으로 빙판에 부딪혀도 이만치 아프진 않았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그때는 할머니가 있었으니까. 이자벨이 일으켜 세워줬으니까. 멍든 부분을 감싸며 그저 하나의 단계일 뿐이라고 속삭여줬으니까.
그런 할머니가 없는 지금. 차유진은 도무지 자신이 없다.
한 걸음 내디딘다. 부어오른 발목에 신경을 쓰지 않기로 한다. 약속했다. 금메달 줄 거라고 약속했다. 당신께서 나를 사랑해주신 덕이라고. 금메달과 함께 이마에 가볍게 키스하면서. 많이 행복했다고. 많이 힘들었지만 견딜 수 있었던 것도 결국 당신이 준 행복 덕분이었다고. 그러니 앞으로 내가 발전하는 모습을 꼭꼭 챙겨봐달라고. 그렇게 부탁하려고 했는데.
“그만하라니까, 바보야!”
펜스 문이 거칠게 젖히며 괴성을 질렀다. 인제 보니 김래빈. 스케이트 부츠 신었다. 웃기지도 않지. 차유진은 기억한다. 빙판 위에서 갓 태어난 고라니 뺨치게 어기적거리던 김래빈을. 한 발 떼면 그대로 주르륵 미끄러질 거였다. 그게 아니더라도 펜스를 동아줄처럼 부여잡은 채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할 게 뻔한데.
김래빈이 다급하게 빙판에 올랐다. 펜스를 부서지라 쥐는 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등을 돌렸다. 다시. 머릿속에서는 마왕이 속삭였다. 아들아. 나의 아들아. 왜 그렇게 떠느냐. 바람이 많이 차느냐…….
의사가 마음의 준비는 하라더라.
스텝 시퀀스. 크로스 오버로 시작해서 원 룹. 격정으로 치솟는 음악에 맞추어 쑤셔오는 등허리를 비튼다. 연기를 빼먹지 말아야 한다. 유진은 항상 스텝 시퀀스 때의 섬세함이 부족하다고 지적받아 왔다. 차차 고칠 생각이었다. 지금은 차근히 같은 단어를 붙일 여유가 없다.
이담엔 트위즐. 크로스로 연결해서 토 스텝을 한번. 비명조차 나지 않는다. 갈증으로 말라붙은 목구멍 덕분인가. 흘러내린 것이 입술을 적신다. 바닷물처럼 짠 것은 잠시 입을 축이다가 까맣게 말라붙어 갈증을 돋궜다.
토 스텝 다음엔 뭐였더라. 촉토였나. 에지를 바꿔야 한다. 지금 내디딘 발이 오른발이지. 그러면. 노래에 맞춰서. 그러고 보니 노래가 어디까지 왔더라. 마왕의 중얼거림마저 안개 속에 파묻힌 듯 부옇다. 아들아. 아들아. 떨지 말라고. 어렴풋한 속삭임이.
“그만하라고 했지, 차유진!”
그리고 다음 순간. 둔탁하고 단단한 것이 힘 있게 부딪혀 온 그때.
혹사당하던 다리는 힘을 주지 못하고 그대로 넘어갔다.
우당탕 쓰러지는 감각. 빙판에 몸을 부딪치는데 둔탁한 고통이고 뭐고 아무것도 안 느껴진다. 쓰라린 폐부만 부여잡듯 감싸는데 기다렸다는 듯 무언가가 덮쳐왔다. 어깨를 단단히 내리누르는 손길. 몸을 짓누르듯 올라타서는 뺨을 쥔 억센 힘이 있다.
김래빈이었다.
텅 빈 빙판 위. 김래빈 머리 위로 전등 빛이 쏟아져 내렸다. 흐린 시야는 몇 번 깜빡이고 난 후에야 초점을 제대로 잡았다. 안 그래도 날카로운 시선인데. 완전히 벼려졌다. 눈은 잔뜩 치뜨고. 뺨은 단단히 굳힌 채로. 입술을 꾹 깨물곤 제 어깨를 힘주어 내리누르고 있다. 목구멍이 까끌거렸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어서.
“비켜.”
“싫어.”
“연습해야 해.”
“이건 연습이 아니야!”
“[……카일이 불렀지? 그랑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뻔해.]”
애써 가라앉힌 숨이 씨근대며 가라앉았다. 깔깔한 목구멍 너머 바싹 마른 침만 간신히 넘겼다. 빙판 위에 누워 있는데도 춥지가 않다. 등이 차츰 젖어가는 감각조차 없었다. 머리가 어지럽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알았다.
다시 한번 말하려고 했다. 비키라고. 할 일이 있다고. 쉬어서는 안 된다고. 할머니가 언제까지 기다려주실지 모른다고. 분명히 말하려고 했다. 내 판단이고 내 결정이라고. 아무리 너라고 해도 나를 멋대로 막아설 수는 없다고.
“카일이 알려준 게 맞아. 너를 그대로 놔두면 큰일날 것 같다고 했어. 작곡가로서 제발 어떻게든 말려달라고.”
“[그럼 카일에게 전해. 빌어먹을 작곡가든 안무가든 코치든. 누가 오든 간에 나는,]”
“하지만 내가 너를 막으러 온 건 내가 네 음원을 맡은 작곡가이기 때문이 아니야!”
그런데 김래빈이 입을 열어 말하는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네가 그랬잖아, 차유진. 내 작업실에서.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안다고. 너도 나 좋아한다고! 그래도 사귀는 건 나중에 하자며. 지금은 금메달이 더 중요하다면서 네가 그랬잖아!”
“…….”
“지금 네 행동은 네게 중요하다는 금메달에서부터 더욱 멀어지는 행위밖에 되지 않아! 나는 선수 차유진의 곡을 작업하는 작곡가로서도, 차유진이라는 사람을 좋아하는 개인으로서도 그 사실을 용납하지 못하겠어!”
김래빈의 목소리가 텅 빈 링크장에 울린다. 차유진은 제 어깨를 단단히 짓누르는 손에 시선을 떨궜다가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김래빈 뒤에서 빛이 쏟아진다. 역광에 가린 얼굴엔 물기 하나 없다. 겉옷에 묻은 살얼음만 조명에 산란했다.
“나더러 휴식도 훈련에 포함되는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던 사람은 너였어, 차유진.”
그랬지. 빙판에 등 대고 누운 채 차유진은 뒤늦게야 떠올린다.
그날. 김래빈 작업실에 쳐들어갔던 날. 작업이 잘 풀리지 않는다던 김래빈의 패드를 읽어봤던 그 날. 시뻘게진 얼굴로 할 말을 찾느라 눈만 깜빡이던 김래빈을 보면서 내심 귀엽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직후에 깨달았지. 네가 나를 보고 있었듯 나도 너를 보고 있었다고. 네가 내게 품었을 감정이 내가 네게 품었을 감정과 엇비슷할지도 모른다고.
김래빈을 품에 안았을 때 열 오른 이마가 맞닿았었다. 좁은 바닥에 심장을 딱 붙이고 누워 킥킥댔었지. 그러나 동시에 차유진은 관계를 이 이상으로 끌고 가고자 하지 않았다. 자각한 감정은 생각보다 농밀하고 짙었기 때문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즐긴다는 전제가 불가할 정도로. 그리고 그때의 차유진에게도 금메달은 일 순위였다.
머리를 맞대고. 서로 시선을 주고받다가. 괜히 김래빈 머리칼만 살살 만지작대고 말했었지. 아직은 안 된다고. 그렇지만 대회가 끝나면. 메달은 못 주지만 승리의 키스는 해줄 수 있다고. 그러자 김래빈은 눈을 흘기면서도 숨죽여 키득거렸다.
넘어지면서 부닥친 몸이 뒤늦게 아프기 시작했다. 뒤통수며 등이 차갑고 축축하다. 그에 반해 호흡은 불에 덴 듯 뜨거웠다. 머리가 어지럽다. 관절이란 관절이 쑤시다 못해 욱신거렸다. 발목부턴 아예 감각이 없었다. 이를 악무는데 김래빈이 단호하게 말했다.
“우선은 씻고 한 숨자는 것부터 시작해. 기적을 바라지 않는다는 건 그런 거야.”
차유진은 대답하는 대신 눈을 감았다. 얕은 호흡이 막혔던 목구멍에서 비실비실 새어 나왔다. 머리가 띵하고 온몸이 아프다. 사고가 비틀어 쥐어 짜낸 물수건처럼 엉망이다. 그런 와중에 확실한 건 하나밖에 없었다.
피곤하다. 쉬고 싶었다.
그래서 차유진은, 자신을 부축해 일으키는 김래빈의 손길에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낫 터칭 스텝 시퀀스
6 (完)
“[나한테 할 말이 있지 않니, 유진?]”
“[카일. 혼내는 건 나중에 해요. 어차피 유진이 저런 꼴일 때는 누가 와서 윽박질러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니까.]”
“[애가 무슨 넝마가 됐어. 누가 보면 전쟁터 나갔다 온 줄 알겠네.]”
유진은 말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벽에 등을 기댔다. 링크장 바깥 벤치였다. 김래빈 말고 다른 사람이, 특히 카일이 있으리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이든까지 함께인 줄은 몰랐다. 땀으로 푹 젖은 머리 위에 수건을 던져 올린 이든은 이내 마실 것을 가져오겠다며 모퉁이 너머 사라졌다.
김래빈이 벤치 옆에 앉아서 무어라 종알대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피로감이 눈꺼풀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손 하나 까딱할 힘이 없어서 한숨만 쉬는데 카일이 다가왔다. 한쪽 무릎을 꿇어 시선을 맞춘 카일의 눈이 진지했다. 덩달아 입을 다문 김래빈 덕에 사위가 고요해졌다.
“[유진. 몸은 어때?]”
“[괜찮아요.]”
“[솔직하게 말하렴. 나는 코치로서 네 몸 상태를 알 필요가 있어.]”
카일이 단호하게 말했다. 차유진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입을 열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를 내뱉는 것이 피곤했다.
“[온몸이 아파요.]”
“[그리고?]”
“[발목에 감각이 없네요.]”
카일이 표정을 굳혔다. 잠시 고민하듯 턱을 쓸어내린 카일은 이내 정중하게 물었다.
“[스케이트. 벗겨봐도 되겠니?]”
차유진은 대답 대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솔직히 결과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카일도 그럴 것이다.
카일은 느리게 발을 옥죄던 매듭을 천천히 풀어 내렸다. 꽉 조였던 매듭이 풀리며 서서히 피가 도는 느낌에 발이 저렸다. 부츠를 완전히 벗기자마자 카일의 고개가 푹 내려갔다. 곁에서 침묵을 고수하던 김래빈이 조심스레 묻는 소리가 나직했으나 유진은 대꾸하지 않았다.
몇 시간 내내 혹사당한 발목이다. 깊은 에지를 넣어 돌고 뛰고 난리도 아니었다. 게다가 마지막에 김래빈은 망설임 없이 몸으로 부닥쳐왔다. 한계에 이르렀던 발목은 그때 항복 선언을 내렸을 것이다. 잘못 넘어졌다는 감각이 어렴풋이 있기도 했다.
카일은 말없이 가져온 얼음팩을 발목에 댔다. 반대쪽 발도 부츠를 벗기곤 똑같이 했다. 시원하다 못해 얼얼한 감각에 헛웃음이 절로 났다. 양쪽 발목 모두 단단히 부었다. 아마 이든이 돌아오고 대화가 일단락되거든 담당 물리치료사를 찾아가야 할 거였다. 그리고 아마 혼도 나겠지. 어마어마하게. 선수고 국가대표가 이렇게 무책임한 행동을 보이면 어떡하냐면서.
그래도 그건 나중의 일이다. 유진은 발목을 단단히 고정한 얼음팩을 힐끔 내려다봤다가 시선을 돌렸다. 김래빈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린 채 발목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할 말이 많은 것처럼 입을 움찔거리다가도 금세 다물었다.
와중에 카일은 바쁘게 움직였다. 발을 천천히 마사지하다가 발목 부분을 힘주어 꾹꾹 눌러보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아프냐는 질문에 차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프긴 아팠다. 지금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욱신대서 상대적으로 감각이 모호할 뿐이지.
몇 분 후 카일이 엄숙하게 선언했다. 물리치료사보단 병원을 먼저 찾아가는 게 나을 것 같다고.
“[단순히 부은 거라면 좋겠지만, 인대가 늘어났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해. 무식하게 뛰었다가 넘어지고. 발 꼬였다가 넘어지고. 그 짓을 몇 시간 동안 계속했으니 사실 네 인대와 발목이 무사하길 바라는 게 멍청한 짓이긴 하지만.]”
“…….”
“[혼내는 거 아니다. 그건 나중에 할 거야. 이든이 돌아오거든 우선 병원부터 가자.]”
“[네.]”
유진의 대답까지 착실히 들은 카일은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든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잠깐 통화가 와서 늦어졌다던 이든은 카일의 설명을 들은 후 짐짓 표정을 굳혔다. 다만 고민은 짧았다. 금세 상황을 이해한 이든은 고개를 돌려 유진을 내려다봤다. 지긋한 시선은 유진에게 잠시 머물었다가 곁에 앉은 김래빈에게 안착했다.
“카일이 말하기를, 유진의 발목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해요. 그래서 우선은 병원에 가보려고요.”
“발목이 말입니까?”
김래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눈은 곧장 차유진에게 향했다. 차유진은 꿋꿋하게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입만 열어서 말했다.
“김래빈도 같이 가.”
“나?”
“응.”
“왜?”
왜냐니. 차유진은 힘든 것도 까먹고 고개를 팩 돌렸다. 김래빈이 눈을 끔뻑대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뺨을 긁적이더니 덧붙이는 것이다. 아니. 싫다는 게 아니라.
“너 부모님도 오시고 할 건데……. 불편하지 않아?”
“안 불편해! 김래빈도 와!”
김래빈이 표정을 괴상하게 일그러트렸다. 그런 와중에도 알겠다는 듯 떨떠름하게 고개를 주억거린다. 차유진은 그 괴상한 표정을 보며 괜히 키득거리다 고개를 돌렸다. 이든과 눈이 딱 마주쳤다.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이든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선 이동하자. 발목 처치는 빨리 받을수록 좋으니까.]”
“[밖에 주차해놨어요. 가져올게요.]”
이든이 손에 든 음료수를 유진에게 넘기며 말했다.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까지 확인한 후에야 이든은 걸음을 돌렸다.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였다. 이든이 차를 끌고 왔을 때 차유진은 김래빈과 함께 뒷좌석에 처박혔다. 병원으로 향하는 도중엔 실없는 대화가 몇 번 오갔다. 김래빈은 몸을 반쯤 쭉 뺀 채 아마도 그렇게 심한 부상은 아닐 거라며 이상한 근거들을 몇 개 읊었다. 차유진은 귀를 기울이는 대신 김래빈의 손을 가지고 놀았다. 잘 정리된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손가락을 얽으면 김래빈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곧장 힘주어 잡아 왔다.
병원에선 예상과는 달리 레이첼이 기다리고 있었다. 할머니가 입원하신 병원과 같은 곳이었다. 부모님은 할머니 일로 바쁘셔서 급한 대로 자기가 왔다고 했다. 진료 끝나면 한번 뵈러 가라며, 엄마랑 아빠가 몹시 걱정하신다는 레이첼의 말에 차유진은 어깨를 으쓱였다가 꿀밤을 한 대 맞았다.
녹초가 된 몸이 이리저리 이끌려 다니니 죽을 맛이었다. 이런저런 검사가 끝났을 때 차유진은 의자에서 거의 녹아내리고 있었다. 체력이 이렇게까지 부족한 느낌을 받는 건 너무 오랜만이었다. 카일이 둘러준 담요 속에서 졸다 못해 어렴풋한 꿈까지 꾸었을 때가 되어야 의사는 유진을 호명했다. 새벽 한 시가 되어가는 시각이었다.
선언은 빨랐다. 유진과 카일, 그리고 이든이 나란히 앉자마자 의사는 지체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예상하셨겠지만요,]” 입을 연 의사는 유진과 카일을 번갈아 바라봤다. 마치 애가 이렇게 될 때까지 당신은 뭐 했냐는 듯한 시선이었다. “[오른쪽 발 인대가 늘어났습니다. 왼발도 붓기가 상당하고요. 당분간 심한 운동은 금물입니다.]”
카일과 이든이 앞다투어 의사에게 질문하는 동안. 차유진은 가운데 의자에 파묻혀서 멍하니 생각이나 했다. 인대가 늘어났다는 것. 가뜩이나 슬럼프에 시달렸는데 인대까지 늘어났다는 건. 이삼 주는 훈련을 못 할 거라는 뜻이고. 대회는 두 달 남짓 남았는데 이삼 주를 훈련도 못 할 거라는 사실은 곧.
이럴 줄 몰랐느냐고 묻는다면, 차유진은 고개를 저을 것이다.
알았다. 몸을 혹사하는 데에 있어 차유진은 전문가였다. 게다가 사람은 누구나 몸을 쓰다 보면 어느 순간 감이 오기 마련이다. 여기서 더 했다가는 정말로 크게 다치고 말 거라는 본능적인 감각. 차유진은 그걸 무시하고 훈련 아닌 훈련을 강행했다. 그러니 어쩌면 이건 당연한 결과다. 몇 시간 전 자신은 조금 미쳐 있었는지도 모른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적어도 그렇게 느껴졌다.
“[괜찮아?]”
카일이 의사에게 질문을 던지는 와중에 이든이 숨죽여 물었다. 차유진은 의자에 파묻힌 채 이든의 얼굴을 힐끔대다가 눈만 떼굴 굴렸다. 괜찮지 않을 이유는 없다. 자신이 내린 선택이었다. 그에 따른 책임도 온전히 본인 몫일 뿐이다.
“[명심하세요. 이삼 주입니다. 인대는 한 번 다치면 다시 다칠 확률이 높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계실 테고요.]”
의사는 안경을 대충 추켜올리곤 말을 이었다.
“[유진 선수 같은 경우엔 선수권대회도 있는 만큼……. 적어도 다음 달까지는 최대한 재활에 집중하시는 게 좋을 것 같고요. 인대 부상이 생각보다 흔하다는 건 아시죠? 그렇게 막 절망하실 필요는 없으시고요.]”
“[조언 감사합니다. 그 외에 알아야 할 것들은 없나요?]”
“[재활 동안은 그냥 푹 쉬시는 걸 추천합니다. 인대 늘어났을 때는 쉬는 것보다 좋은 치료법도 드물어요. 이번엔 단순히 늘어난 거지만, 무리했다간 파열까지 갈 수 있으니 정말로 조심하셔야 합니다. 알겠죠, 유진 선수?]”
유진은 흥미 없는 목소리로 알겠노라 대답했다. 진료는 거기서 끝났다.
절뚝거리며 진료실을 나왔다. 김래빈은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던 레이첼은 이든에게 다가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카일은 전화할 곳이 생겼다며 떠났다. 병원 복도에 놓인 의자에 아무렇게나 구겨져 앉았다. 사람들이 오가는 복도를 멍하니 구경하다가 김래빈을 봤다. 곤란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전화 상대에게 연신 무어라 말을 걸고 있었다.
누나일까. 하긴. 래빈의 누나는 래빈을 지극히 아꼈다. 늦은 밤까지 돌아오지 않아 걱정이 많을지도 몰랐다. 아주 이상적인 남매지. 레이첼과 자신의 관계나 자신과 가브리엘라의 관계를 떠올리다가 실없이 웃었다. 언젠가 래빈의 누나를 만났을 때 차유진은 깨달았다. 김래빈이 하는 다정한 눈은 그의 누나로부터 왔을 거라고. 그 다정함은 숨기려고 해도 숨겨지지 않는다. 베푸는 사람은 모르지만 받는 사람은 모를 수가 없는 종류였다.
통화를 마친 김래빈은 쫄레쫄레 다가와 곁자리에 앉았다. 시선이 차유진의 얼굴을 지그시 훑다가 사라졌다. 말을 걸지 않는 김래빈이 기꺼웠다. 그리고 뒤늦게 자신이 몹시 지쳐 있음을 상기한다. 뭔가 주제를 내어놓고 진득하게 대화하고 싶은 동시에 이대로 입을 다물고 끝까지 침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양립했다. 차유진은 김래빈에게 선택할 기회를 넘겼다.
둘 다 입을 열지 않았다. 할 말을 찾느라 그런 걸지도 몰랐다. 차유진은 생각하고 있었다. 금메달. 선수권대회는 포기하는 게 나을 거라는 의사의 말. 위중하신 할머니. 이상했다. 할머니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땐 금메달을 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당장 뭐라도 해야 조급하고 갑갑한 마음이 사라질 듯했다. 그런데 지금.
오른발은 인대가 늘어났다. 왼발도 그보다 아주 조금 나은 상태다.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전에 받았던 안무를 그대로 수행하는 건 불가능했다. 인대가 늘어난 이상 발목을 최대한 덜 써야 했고, 그러려면 필연적으로 에지도 얕아진다. 점프를 뛰고 착지하는 것조차 위험하니까.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번 금메달은 날아간 거나 다름없다. 얻지 못할 거다. 대회조차 나가지 못할 게 분명하다. 이건 차유진이 특별히 비관적이라기보단 그냥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아무렇지 않다.
차유진은 손을 가만히 쥐었다 펴보았다. 힘을 주며 근육이 움찔대는 감각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게 어지럽던 머리가 거짓말처럼 텅 비었다. 그냥 눈꺼풀이 무겁고 졸린다는, 아주 근본적인 피로감만이 온몸을 들쑤셨다. 그냥 이대로 눕고 싶었다. 누워서. 눈을 감고서.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잠드는 것이다. 삼 월이 되도록. 그러면 선수권대회도 끝나 있을 테고.
지독한 피로감에 머리가 아팠다. 이대로 있다가는 복도에 널브러져 잠들겠다 싶었다. 일단 자리를 옮기려 입을 여는데 김래빈이 한발 빨랐다.
“차유진.”
“응?”
“할 말이 있어.”
차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별말은 아닐 거였다. 앞으론 좀 더 제대로 쉬라거나. 그런 식의 훈련은 다시는 하지 말라거나. 여상 같은 잔소리겠지. 그래도 지금은 그마저 제법 기꺼울 것 같다. 이어질 말을 조금쯤 기대하며 차유진은 허리를 곧추세웠다. 가벼운 대화를 끝내고 자리를 옮길 셈이었다.
“나 한국으로 돌아가. 다음 주에.”
아니었다. 예상했던 모든 것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언어가 낯선 파동으로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단어와 낱말을 재정립하는 뇌가 삐걱거렸다. 한국어와 영어가 마구 뒤섞였다. 돌아간다고. 어디로? 한국? 왜? 김래빈은 차유진과 동갑이었다. 학생이란 뜻이었다. 애당초 그는 누나와 함께 호텔에 머문다고 했다. 그건 즉 돌아갈 날이 정해져 있다는 거다.
뭔가 억울했다. 당연한 일인데도 그랬다. 돌아간다니. 왜? 우습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마음이었다. 곁에 있었으면 했다. 왜 하필 지금인지도 몰랐다. 할머니도 떠날지 모른다는데. 이젠 김래빈까지 곁을 떠난단다. 타이밍의 신이라는 작자는 정말로, 진심으로 자신을 싫어하는지도 몰랐다. 지금껏 특혜를 많이 봐줬으니 현실의 쓴맛도 선물해주겠다며 이를 갈았나. 그게 아니라면 온갖 악재가 이렇게까지 겹칠 일인가. 속상했다. 하릴없이 억울했고. 애당초 김래빈이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일을 악재라고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치기 어린 발상임을 아는데도.
그런데 눈이 마주치는 그 순간. 차분한 시선이 허공에서 얽힌다. 모든 생각을 불태우며 뜻밖의 사실 속에 빠진 유진을 억세게 끌어당긴다. 그렇게 현실로 돌려놓는 저 굳건하고 부드러운 영혼이 있다.
차유진은 그제야 깨닫는다. 김래빈의 다정함은 할머니의 것과 닮았다. 주는 본인이 몹시 당연하게 여기지만, 받는 자신은 그걸 도무지 당연하다고 인정할 수 없게 하는 데에 있어서.
김래빈이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방금 누나에게서 전화가 왔다고. 돌아갈 비행기 표를 끊느라 몇 번이고 전화했는데 연락이 안 돼서 혼났다고 말할 땐 짐짓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차유진은 그걸 곧이곧대로 듣고만 있었다. 멍청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진 별로 감이 잡히지 않았다.
“사실 미국에 온 것도 방학이었기 때문이라서,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어. 너는 모르겠지만, 한국의 방학은 3월이면 끝나거든. 원래부터 학기 준비를 위해 이월 초중반에 돌아가려고 했으니 딱히 너 때문에 일찍 돌아가거나 하는 건 아니야.”
“……나한테 할 말 없어?”
괜히 투정 부리듯 묻자 김래빈이 고개를 기울였다. 할 말? 되묻는 목소리가 맹하기 그지없다. 잠시 고심하듯 눈을 찌푸린 김래빈은 이내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것이다.
“돌아가서도 물론 너와 연락을 계속할 거야. 카일과도 마찬가지고. 내가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네 경기 음원 준비에 차질이 생길 일은 결단코 없을 거니 그 건에 관해서는 안심해도 좋아! 요즘은 영상통화나 그룹 미팅 어플 등이 굉장히 잘 발달했기 때문에,”
“김래빈 진짜 바보야?”
“할 말 없냐고 물은 건 너인데 어째서 내가 바보가 되는 거야!”
됐다. 열 내는 김래빈 보고 있자니 할 말이 그것밖에 없냐고 투덜거릴 힘도 사라졌다. 우리 사귀지는 않아도 서로 감정은 있는데. 그런데 이젠 얼굴도 제대로 못 보게 될 텐데. 하는 말이라곤 일 관련한 얘기밖에 없다니. 김래빈이 이상한 데서 무드가 있고 없다는 사실을 알기야 했는데 막상 이런 상황이 오니 그냥 정신이 아득해진다. 차유진은 대꾸하는 대신 어기적어기적 일어났다. 잠이나 자고 싶었다.
“……아무튼! 나는 내가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우리 관계는 특별히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야. 물론 시차가 있으니 네가 보내는 문자를 늦게 확인할 때가 분명히 있겠지만, 그 정도는 너도 감안하기를 바라!”
달라지지 않는다니. 얘는 상황 파악이 느린 건지 진짜 바보인 건지 모르겠다. 오른발에 압박붕대를 깁스처럼 두른 제 꼴이 보이지도 않는지 김래빈이 종알종알 떠들어댔다. 목소리가 너무 여상 같아서 기분이 묘해질 지경이었다.
그래도 한국으로 돌아가는 이상. 할 말은 전부 하고. 상황 파악은 전부 끝내고. 그 이후에 가야 한다. 괜히 대화가 안 됐다가 누구든 손해 보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되니까. 차유진은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며 입을 열었다. 최대한 무심한 투로 말하기 위해 평온을 가장한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김래빈. 몰라? 노래 이제 필요 없어.”
“……그래서 내가 생각한……. 잠깐. 왜? 그런 말은 듣지 못했어!”
입에 불 난 것처럼 떠들어대던 김래빈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당혹스러움을 추호도 숨기지 못하는 표정에 한숨만 난다. 차유진은 제 발을 이리저리 흔들며 말했다. 태연하려고 애를 쓰는데도 목소리가 꼭 빈정대는 것처럼 나갔다.
“발 다쳤으니까 쉬어야 해. 대회는 못 나가. 그러니까 경기에 쓸 노래도 이제 필요 없어.”
“대회는 두 달 후인 걸로 알아! 두 달 동안 꼼짝도 못 할 정도로 부상이 심한 거였어?”
김래빈의 얼굴이 더 하얘졌다. 안 그래도 창백한 얼굴이 이젠 완전 시체처럼 변했다. 차유진은 고개만 내저었다. 그 뜻이 아니라. 김래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심하진 않아도 다친 거라서 다시 나아지는 훈련 해야 해. 그거 끝내면 진짜로 시간 없어. 나가봤자 금메달도 못 따. 나가도 나한테 좋을 거 없어. 그러니까 안 나가는 거야, 바보야. 다쳤는데 경기를 어떻게 해? 금메달은 또 어떻게 따? 그거 기적 일어나도 안 돼.”
“하지만…….”
김래빈이 우뚝 멈췄다.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울 것 같은 표정은 아닌데, 또 단순히 곤란함을 표현한다기엔 과하다. 차유진도 덩달아 멈췄다. 김래빈이 무슨 말을 할지 감이 안 잡힌다. 사실 슬슬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제 입으로 자긴 끝났다는 선고를 내리는 기분을 좋아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네가 그랬잖아. 금메달 따는 데 필요한 건 기적이 아니라 내 노래라고.”
그러나 말은 이어진다. 그리고 차유진의 말문을 완벽하게 막아버렸다.
차유진이 고개를 돌렸다. 김래빈은 얼굴을 단단히 굳힌 채였다. 날카로운 눈이 추궁하듯 파고들었다. 차유진이 입을 달싹였다. 그랬던가.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했던 때가 있다. 적어도 그때 차유진은 발목을 다치지 않았다. 할머니도 위독하지 않으셨을 거다. 그러니 저런 말을 했을 거였다.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어떤 사건은 차유진마저 구석으로 몰아가 그의 숨통을 옥죈다. 그때처럼 마냥 단순히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도 안 됐다. 멍청하게 눈만 깜빡이는데 김래빈이 입을 열었다. 표정만큼이나 단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차유진. 대회를 포기하는 게 정말로 부상 때문이야?”
차유진은 대답하지 않는다. 문득 카일의 말이 떠올랐다. 금메달은 따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말. 깜빡이는 시야 너머 김래빈의 얼굴에서 차츰 표정이 사라졌다. 빵빵하던 풍선에 작은 구멍을 낸 것처럼. 손톱보다 작은 흠집에서 보이지 않는 공기가 서서히 빠져나가는 것처럼. 그렇게 차근히 아무것도 담지 않은 표정이 된다. 그렇게 차유진을 본다.
그 순간 차유진은 문득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숨이 턱 막혔다. 무언가가 어긋났다는 근본적인 불안감은 들불처럼 전신을 뒤덮었다. 목이 바싹 말랐다. 김래빈의 질문을 느리게 곱씹는데 김래빈은 기다리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네가 그렇게 느낀다면 내가 왈가왈부할 수는 없을 거야. 그건 내가 말을 얹을 수 없는, 엄연한 너 본인만의 감정이니까.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쉽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 왜냐하면.”
김래빈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일말의 머뭇거림은 그러나 오래가지 않는다. 입을 다시 열었을 때 김래빈은 직전보다도 단단한 표정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심한 슬럼프에 시달렸을 때 내게 아주 중요한 걸 알려준 사람이 너거든.”
거침없이 말이 이어졌다. 차유진은 궤도에서 튕겨 나온 위성처럼 덩그러니 서선 귓속으로 쏟아지는 말을 이해하려 애썼다. 김래빈과 만난 적이 있던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던가. 아무리 기억을 헤집어봐도 떠오르지 않았다. 여전히 침묵을 고수하자 김래빈은 잠시 눈을 찡그렸다. 이제는 안다. 김래빈은 그저 고민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아마도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고르고 있는 거겠지.
밭은 숨이 새어 나왔다. 아주 중요한 걸 알려줬다고. 내가. 김래빈한테. 김래빈과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와의 첫 만남은 아주 또렷하게 기억했다. 링크장 밖에서. 출입을 금지당한 상태로 뱅뱅 맴돌다가. 받아들었던 명함은 여전히 침대 옆 협탁 안에 들어 있다.
“중학생 때 아주 심한 슬럼프를 겪었어. 그때는 풀리는 게 없었어. 찍는 코드마다 마음에 들지 않고, 더 나을 수 있다는 확신과 건드려봤자 나빠지기만 할 거라는 스트레스가 양립했지. 당시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그때 슬럼프를 이겨내서 아직 작곡을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해.”
김래빈이 한 걸음 다가왔다. 차유진은 반사적으로 주춤거렸다. 압박붕대로 단단히 감싼 발목이 욱신거렸다. 저린 통증에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그러자 김래빈은 더 다가오지 않았다. 다만 말을 이었을 뿐이다.
“보다 못했는지 누나가 나한테 표를 하나 쥐여줬어. 그때도 나는 네 경기를 즐겨보았는데, 그 티켓이 네 그랑프리 무대였다는 사실은 프로그램이 시작하기 직전에 알았어.”
“난…….”
“거기서 네 프로그램을 봤어, 차유진.”
잠시 침묵. 그때를 회상하듯 김래빈은 잠시 말이 없었다. 다시 대화 아닌 대화가 이어지기 시작한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직접 두 눈으로 보니 생각보다 훨씬 좋았어. 그건 부정할 수 없지. 그런데 내가 주목했던 건 네 표정이야. 연기가 끝나고 나서 기뻐하는 네가 정말 즐거워 보였거든. 재밌어 보인다고 문득 생각했어. 그런데 우연히 퇴근하는 너를 마주쳤었지.”
여전히 떠오르지 않는다. 퇴근길에 마주친 팬들이 한둘이 아닌 탓이라 그렇다. 누군가에겐 별것 아니라 떠오르지 않는 기억이 상대에겐 크나큰 이유가 될 수 있음을 그제야 깨닫는다. 김래빈이 말하는 주니어 때의 차유진이 그럴 것이다. 할머니와의 기억을 되짚는 차유진이 그럴 테고.
“같이 있던 누나한테 졸라서 간신히 대화를 붙였어. 네게 팬이라고 하자 너는 사인을 해주겠다고 했지. 나는 들고 있던 티켓을 건넸고. 사인을 받은 직후에 나는 고민하다가 물었어. 스케이팅이 즐거워 보인다고. 선수 생활하면서 힘든 점은 없냐고. 굉장히 전형적인 질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때의 나는 진심으로 궁금했거든. 누나가 뭐라고 통역해줬는진 몰라. 그게 내 뜻대로 전달됐는지도 모르고. 그렇지만 나는 네 대답을 기억하고 있어. 전부는 아니지만.”
“…….”
“네 대답에서 기억나는 단어는 이 셋이야. 스케이팅. 러브. 펀.”
“김래빈.”
“너는 그 단어들을 말할 때 아주 힘을 주어서 말했거든.”
김래빈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차유진은 할 말을 찾는 대신 침묵하기로 선택했고.
스케이팅. 러브. 펀. 무슨 말을 했는진 알 수 있다. 아무리 과거라고 한들 차유진은 결국 차유진이었다. 스케이팅을 좋아했다. 재밌었고. 그래서 사랑했지.
“그때 나는 너를 보면서 즐거워야겠다고 생각했어. 너는 정말 즐거워 보였으니까.”
그는 몹시 즐거워 보여. 언젠가의 댓글이 수면 바깥으로 고개를 내민다. 혀뿌리가 아렸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할 말을 찾는 건 진작에 그만뒀다. 김래빈은 시선을 지그시 맞췄다. 눈을 피하지 않았다. 조용한 눈동자가 일렁이며 파문을 일으켰다.
“네가 즐겁지 않다면 슬픈 일이지.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감상일 뿐이니까, 결국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안타깝기는 해도 내 사견을 네게 강요할 생각은 없어. 결국 스케이팅의 주체는 너니까.”
그러며 김래빈은 어깨를 으쓱였다. 은퇴는 하지 않을 거라던 제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래도 팬을 위해서라고. 이번 경기만큼은 하겠다고.
메달을 위해서. 팬을 위해서. 할머니를 위해서. 가져다 붙였던 이유를 한없이 곱씹다가 말없이 주먹을 쥔다. 파르르 떨리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스케이팅. 러브. 펀. 단어들은 머릿속을 부유하다가 어느 순간 조립되어 하나의 완성된 문장이 된다.
나는 스케이팅을 사랑해요. 내게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겠죠…….
“네 의견을 들었으니 나는 이만 가볼게. 시각이 늦기도 했고, 누나가 걱정할 테니까. 할머니 뵈러 갈 거지? 이든 형이나 레이첼 누나께는 내가 말씀드릴게.”
말을 마친 김래빈이 등을 돌렸다. 걸음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목소리를 높여 그를 부르고픈 충동이 치솟았다. 막상 돌아본 김래빈에게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차유진은 그냥 우두커니 서 있었다. 김래빈이 모퉁이를 돌아 눈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차유진은 병원에서 처치 받은 후 나흘 동안 집에 머물렀다. 링크장엔 관심도 가지지 않았다. 침대에 드러누워 있다가 자주 뒤척였다. 김래빈의 작업실에도 가지 않았다. 싸운 것도 아닌데 얼굴 보기가 묘하게 힘들었다. 며칠 후에 김래빈이 한국으로 돌아갈 거라는 사실을 잊으려는 듯 강박적으로 잠을 청하다가 레이첼의 등쌀에 못 이겨 가끔 산책하는 것이 일상의 전부였다. 스케이팅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삶이었다.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다지 위태로워지지도 않았다.
닷새째 되는 날. 차유진은 발목을 지탱하는 압박붕대를 가는 것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통증은 많이 가라앉았다. 왼쪽 발목의 붓기는 거의 다 빠진 상태였다. 의사는 차도가 놀라울 정도로 좋다며 푹 쉬고 있는 듯하니 안심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차유진은 의사의 면전에 대고 그럼 꼴이 이 모양인데 뭘 어째야 하냐고 비아냥거리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하릴없이 감정만 소모한다는 사실을 알아서였다.
카일에게선 말이 없었다. 메시지 하나조차 오지 않았다. 하다못해 질책이라도 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몇 번 전화를 걸어봤지만 족족 받지 않았다. 발목은 나아가고 있는데 상황은 전혀 그러지 못했다. 이틀 후에 김래빈과는 전혀 다른 땅에 있을 거라는 사실은 조금도 위안이 되지 못했다.
“유진. 깼어?”
“응.”
“아침은?”
“됐어.”
가비가 문틈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말간 눈으로 유진을 지그시 바라보던 가비는 이윽고 문을 열고는 몸을 반쯤 내밀었다. 영락없이 어디에 나가는 옷차림이었다. 게다가 보통 책의 배는 될 법한 크기의 커다란 앨범을 든 채였다.
“할머니 뵈러 다녀올게.”
할머니는 이틀 전에 의식을 회복하셨다. 유진은 할머니가 지금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씩씩하게 지내신다는 이야기만 건너 들었다. 만나 뵈러 갈 용기가 도무지 나지 않은 탓이다. 특히나 발목에 압박붕대를 칭칭 두르고서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냐고 물으시거든 필연적으로 나오게 될 이야기를 맨정신으로 할 자신이 없었다.
덕분에 가족 중에선 유진만 할머니를 뵈지 못했다. 유진은 몸을 반쯤 일으킨 채 가비가 든 앨범을 지그시 응시했다. 저런 앨범은 본 적이 없는데. 시선이 유난스러웠는지 가비는 능숙하게 앨범을 감추곤 태연히 말했다.
“할머니 드릴 선물이야. 동아리에서 만들었어. 미리 말해두지만, 유진, 이건 할머니가 가장 먼저 보셔야 해.”
“누가 뭐래?”
“그래서. 안 갈 거지?”
유진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응.”
가비는 미련 없이 걸음을 돌렸다. 문이 닫혔다. 초조하게 아랫입술을 질겅질겅 씹던 유진이 거칠게 머리를 휘저은 것도 그때다. 시선은 스마트폰을 향했다가 천장으로 옮겨갔다. 애꿎은 전등만 노려보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소 성마른 걸음으로 문을 열어젖혔다. 허겁지겁 계단을 내려서자 현관문을 막 여는 가비가 보였다. 계단참에서 고개를 쑥 내민 채 유진은 외쳤다.
“저녁쯤에 뵈러 가겠다고 아부엘리따한테 전해줘, 가비!”
가비는 대답하는 대신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보였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 유진은 대차게 드러누웠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말로리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연신 지분대는 말랑말랑한 털 뭉치에 유진은 킥킥대며 그의 귀여운 동생을 품에 가득 안았다. 꼭 껴안자 작게 박동하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말로리. 지금 내 상황 말이야. 어떻게 생각해?”
말로리는 크고 부드러운 다갈색 눈으로 유진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한 번 짖었다. 북슬북슬한 털 속에 손을 파묻어 열심히 긁어주자 곧장 배를 까고 덜렁 눕는다. 그 위에 엎드리듯 포옹하니 좋다는 듯 헥헥거리는 것이다. 뜨끈한 온기가 피부 결에 닿았다.
“알겠어, 알겠어. 바보 같은 거 알아.”
웃음이 절로 써졌다. 말로리는 누운 그대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양. 그리고선 아프지 않게 유진을 깨물었다. 힘차게 흔들리는 꼬리가 유진의 등허리를 탁탁 때렸다.
“사랑하는 거 알지?”
말로리는 대답 대신 유진을 한번 핥았다.
날은 쉽게 갔다. 이른 점심을 먹은 유진은 발목 재활에 힘썼다. 거창한 건 없었다. 열심히 스트레칭을 하고 아프지 않게 마사지해주는 게 전부였다. 의사는 그마저 통증이 있다면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일렀다. 고작 일주일도 안 됐는데 재활에 들어가는 건 아무래도 조심스럽다는 의견이었다. 유진은 이번만큼은 의사의 말에 동의했다. 닷새였다. 아무리 회복이 빠르다고 한들 늘어난 인대가 원래대로 돌아가기엔 무리가 있었다.
오후가 다 되어서는 잠시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뒤졌다. 뉴스에는 자신의 부상 소식이 여전히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었다. 닷새나 지났으니 내려올 법도 한데 시기가 시기다 보니 여론이 후끈 달아오른 모양이었다. 그것들은 전부 지나쳤다.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보지 않는 편이 나았다. 다만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바로 아래에 새로운 감자가 불길에 내던져진 상태였다는 것이다.
뉴스 제목을 본 순간 유진은 두 눈을 의심했다. 미카엘이 세계 선수권대회를 한 달 조금 앞두고 출전을 포기했다는 뉴스였다.
내용은 제목과 다를 바 없었다. 짤막한 사실 전달과 더불어 미카엘의 코치와의 인터뷰가 짧게 실려 있었다. 유진은 미카엘이 다른 선택을 하는 데에 망설임이 없었다고 밝혔다는 대목까지 읽고 메신저를 켰다. 그리곤 미카엘의 연락처를 선택했다. 마지막 대화가 거의 넉 달 전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EeeeG] 미카엘
[EeeeG] 기권한다는 거 진짜야?
[EeeeG] 혹시 미쳤어?

답장은 또 금세 돌아왔다.

[M~] 오, 이제 알았어?
[M~] 카일이 아직 안 알려준 모양이네lol
[EeeeG] 뭐를?
[EeeeG] 카일이 왜 나와?
[M~] 그럴 게 있어.
[M~] 잘 부탁해 bro :D

뜻 모를 메시지를 뚫어지라 바라보는 데에 몇 시간을 낭비했는지 모를 일이다. 미카엘를 추궁해봤지만 특별한 답은 얻지 못했다. 때가 되면 카일이 알려줄 거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을 뿐이다.
정신을 차렸을 땐 여섯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저물녘이었다. 느긋하게 지는 해를 창밖으로 바라보다가 차유진은 스마트폰을 껐다.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붕대를 마지막으로 갈아주고 집을 나섰다. 저녁을 맞은 샌디에이고 바람은 적당히 후끈하고 또 적당히 쌀쌀했다. 유진은 뛰거나 자전거를 타는 대신 천천히 걷기를 선택했다.
목적지는 병원이다. 할머니를 보기 위해서였다.
하늘이 맑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파도치는 소리가 울렸고 짭짤한 바다 내음이 어디서든 풍겼다. 시원한 맞바람이 불 때마다 차유진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은 거의 없었다. 북극성인지 아닌지 모를 별 몇 개만 선명하게 빛나다가 가끔 구름 뒤로 사라졌다. 유별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유진에게 기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병원에 도착해 병실로 올라갔다.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차유진은 잠시 심호흡했다. 힐끔 훔쳐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할머니 혼자만 계셨다. 무언가에 집중한 듯 안경을 끼고 계신 모습만 확인한 유진은 천천히 손을 들었다. 노크는 짧고 간결했다.
“나 왔어요, 아부엘리따.”
문을 열고 들어섰다. 반쯤 열린 창문 너머에선 여상 같은 풍경이 이지러졌다. 가장 먼저 느낀 건 어렴풋이 남은 소독약 냄새였다. 문을 열어둔 이유를 단번에 알았다. 환기를 위해서였을 것이다. 방안은 생각보다 공기가 찼다. 얼마나 오래 열어놓았는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도 약 냄새가 여즉 남아 있다는 사실은 유진을 조금 슬프게 했다.
이자벨은 손주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의 눈이 곱게 접혔다. 환한 미소에선 여느 때와 다름없는 활력이 흘러나왔다. 유진은 마주 웃어주며 문을 닫았다. 침대 옆엔 이미 의자가 놓여 있었다.
“올 줄 알았단다. 오늘은 날이 이상하리만치 좋았거든.”
“늦어서 죄송해요. 사정이 있었어요.”
“아무렴 그랬겠지. 하지만 나초. 내가 살아 있는 한 너는 늦을 수가 없어. 그러니 사과하지 않아도 돼. 오, 그렇지. 나는 오히려 이렇게 말하겠어. 딱 맞추어 왔구나!”
익살맞은 할머니의 농담에 유진은 그냥 웃었다. 곁자리에 놓인 의자에 앉자 이자벨은 쓰고 있던 안경을 추켜올렸다. 품에는 익숙한 앨범이 놓여 있었다. 아침에 가비가 가져갔던 것과 똑같은 표지의 앨범이었다.
“앨범 구경하고 계셨어요?”
“물론! 가비가 만들었다고 자랑하더구나. 그 애가 최근에 사진 동아리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스크랩북을 만드는 활동을 했다면서 말이야. 이참에 집구석을 뒤적여봤는데 제법 흥미로운 사진들이 많이 나와서 기뻤다고 했지. 아주 훌륭한 작품이야.”
“그래요? 웬만한 사진은 전부 가족 앨범에 있었을 텐데.”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몇 번이나 봤지 뭐니. 이걸 네게 꼭 보여주고 싶었어.”
이자벨이 킬킬 웃었다. 유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내 사진이 많아요? 맹하게 되묻자 이자벨은 고개를 저었다.
“많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네가 보면 참 좋아할 것 같은 사진들이 많았지. 같이 보겠니?”
유진은 조금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얼마든지요.”
이자벨이 앨범을 열었다. 첫 장부터 가비가 낙서해놓은 가족사진이 붙어 있었다. 벌써 오 년 전에도 더 전에 찍은 사진이었다. 어린 유진은 활짝 웃고 있었다. 앞니가 하나 빠져 있었지만.
“이든이랑 자전거 타다가 굴러서 빠트렸었지.”
이자벨이 설명하듯 덧붙였다. 유진은 그냥 머쓱하게 웃었다.
앨범은 팔랑팔랑 넘어갔다. 어떤 사진은 이자벨과 열띤 토론을 나눌 만큼 기억이 선명했다. 또 어떤 사진은 둘 모두 기억하지 못했다. 유진만 기억하는 사진도, 이자벨만 회상하는 사진도 있었다. 가족 사진이 가장 많았는데 정리한 시간순이 엉망이라 나이도 들쭉날쭉이었다. 몇 달 전 사진과 십 년 전 사진이 나란히 붙어 있는 모습을 보고 유진은 괜히 사진 속 할머니 얼굴만 문질러댔다.
앨범이 거의 끄트머리에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장이 한 장 넘어갔다. 직후 유진은 저도 모르게 뺨을 굳혔다. 어린 차유진이었다. 눈이 잔뜩 내리는 겨울 속 한 장이었다. 앳되다 못해 어린 차유진이 스케이트를 신고 브이 자를 그리고 있었다. 코와 뺨은 언 듯 잔뜩 붉었다.
“이 사진은 꼼짝없이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가비가 찾아냈더구나.”
이자벨이 조용히 말했다. 유진은 잠시 뜸을 들인 후에야 짐짓 태연하게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잃어버린 줄 알았어요. 아무리 찾아도 안 나왔는데. 이제는 잃어버렸다는 사실마저 잊었었는데 말이에요.
그건 유진이 가장 처음 스케이트를 타던 날 찍은 사진이었다. 이자벨은 사진을 손끝으로 살살 훑으며 웃었다. 과거를 되짚는 눈이었다.
“네가 빙판 위에서 오롯이 두 발을 뗀 것이 너무 자랑스러웠단다, 나초. 그래서 이 사진을 찍었지. 즐거운 만큼 웃어보라고 했더니 너는 이렇게 웃었어.”
“할머니.”
“그래놓고선 사진을 찍은 직후엔 우당탕 넘어져 버렸지만 말이야. 어찌나 놀랐던지 카메라를 집어 던질 뻔했어.”
유진이 머쓱하게 웃었다. 그랬던가. 사실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할 말이 없어 사진만 들여다봤다. 살얼음을 온몸에 묻힌 채 어린 유진은 웃고 있었다. 발갛게 물들인 얼굴이 바람에 흔들리는 듯도 했다.
“드리고 싶었어요. 금메달.”
그래서 차유진은 참지 못했다.
아주 오래된 기억을 차근히 되짚는 동안 목구멍 속에서 차근히 응어리졌던 말이었다. 가장 태초의 기억은 그렇게 날아들어 묵은 것들을 단숨에 끄집어냈다. 이자벨은 사진을 가만히 만지작거릴 뿐 대답하지 않았다. 뜻 모를 조급함에 유진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자벨 덕분이잖아요. 제가 스케이팅을 시작한 것 말이에요. 그래서 뭐라도 드리고 싶었어요. 그런데 막상 생각하니까 이렇다 할 게 없는 거예요. 그래서 결심했어요. 시니어 때. 가장 좋은 성적을 받아서. 그렇게 금메달을 따서. 할머니한테 드리자고. 제가 스케이팅을 사랑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뜻으로요.”
말이 빨라졌다. 마음은 그만큼 조급해졌다. 그런데. 그런데요. 목소리가 형편없었다. 몇 번 입을 여닫은 유진이 우울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알려주셔서 감사하다고요. 스케이팅 말이에요. 앞으로 계속 곁에서 봐달라고. 그런데.”
그런데 먼저 쓰러졌고. 조급함과 답답함과 말로는 형용하지 못할 거대한 감정에 짓눌려 허덕이다가 발목까지 다쳤다. 끝맺을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릴없이 입을 달싹였다. 무언가가 소리 없이 다가와 유진의 머리칼을 헤집고 지나갔다. 형체 없는 바람이었다. 이자벨의 손길이 아니라.
“이야기는 들었어. 네가 많이 힘들어한다고 말이야. 오는 사람마다 전부 네 걱정뿐이었지.”
“저는…….”
“그전에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단다, 유진.”
유진이 고개를 들었다. 이자벨과 시선이 맞닿았다. 부드럽고 다정한 눈이었다. 유진은 그 눈앞에선 거짓말을 하거나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스케이팅이 더는 즐겁지 않은 거니?”
그래서 차유진은, 의미 없이 몇 번인가 주먹을 쥐고 폈다가, 갈라진 목으로 무어라 항변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마침내 소득 없이 다물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기가 찼다. 어느샌가 완연한 밤이었다. 파도치는 소리마저 침묵에 어렴풋이 묻혔다. 적막이 내려앉고 묵은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차유진은 자신을 괴롭히던 질문이 무엇이었는지를 느리게 체감했다. 즐겁지 않았다. 더는 즐거울 수가 없었다. 그저 즐겁기에는 붙잡고 옭아매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제 인생에서 스케이팅이 없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즐겁지 않을 바에는 그게 나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그렇게 한번 생각하고 나니 돌아오는 질문은 필연적이었다. 이렇게 단숨에 마음이 식을 거라면. 그러면 지금까지 사랑했다고 생각했던 순간들은 실은 정말로 사랑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고.
그럴 수는 없었다. 쓰러진 할머니를 위해서라도 그래서는 안 됐다. 단호하게 결론을 내린 생각은 이윽고 피할 수 없는 인력이 되어 유진을 끌어내렸다.
이자벨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마치 유진을 기다려주는 듯했다. 유진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김없이 눈이 마주쳤다. 웃음이 없었다. 서글픔도 없었다.
“두려웠던 것 같아요.” 하고 유진이 더듬더듬 말하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제 스케이팅의 시작이었잖아요.”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고말고.”
“신경 쓸 게 너무 많았어요. 그래서 조급했고요. 이걸 다시 좋아하게 되는 데에는 기적이라도 일어나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생각하니 조금 웃기네요.”
“글쎄. 나는 아주 멋지다고 생각하는데.”
이자벨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은 창밖으로 향했다. 유진도 덩달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깊은 밤이었다. 별빛이 유달리 흐린 듯도 했다. 뻥 뚫린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 소리가 파도치는 소리와 간간이 섞여들었다.
“사진엔 너밖에 없지만 사진을 볼 때 너는 나를 함께 생각하겠지. 나는 사진 바깥에 존재하는데도 말이야.”
이자벨이 느리게 말했다. 시선이 밤하늘에서 떨어져 사진에 닿았다. 환하게 웃는 어린 유진 위를 덮은 이자벨의 손가락. 그 틈새로 흩날리는 눈발과 웃음이 있었다.
“너는 스케이팅을 사랑한다고 말했지. 몇 년 전까진 말이야. 사랑이라는 건 눈에 보이지도 않고, 외따로 존재하지도 않아. 그건 오히려 포말을 닮았지. 자세히 살피면 물거품에 불과한데도 우리는 모래사장에 앉아서 포말이 뜨고 지는 것을 하염없이 보곤 한다는 점에서 말이야.”
“사랑했다고 생각했어요. 스케이팅 말이에요. 지금은 그냥. 잘 모르겠을 뿐이고요.”
“그래.”
이자벨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느리게 말했다.
“포말을 증명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단다. 모든 기적이 그렇듯이. 포말 하나를 붙잡고 다른 사람에게 분명히 이곳에 물거품이 있었다고 호소할 필요도 없지. 중요한 건 존재했는지 안 했는지 모를 물거품이 아니야. 모래사장에 앉아서 하염없이 포말을 바라보던 그 순간이다. 네 곁에 있던 사람. 그때의 바람. 날씨 같은 것들 말이다.”
“…….”
“사랑이 외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그런 뜻이야. 사진과는 달리 추억은 사랑하는 것들의 군집이니까. 오래된 사진을 보며 배경이 흔들렸고, 벌레가 함께 찍혔고, 하며 셈하지 않는 것처럼 구태여 하나에 집중할 필요는 없어. 사진은 결국 또렷하게 남을 테니. 네가 그걸 깊이 사랑했다면 더더욱.”
이자벨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건 유진에게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이자벨의 웃음은 항상 유진의 뇌리 깊숙한 곳에 남고는 했으니까.
익숙한 다정함을 가득 머금은 채 이자벨이 말했다.
“그러니 유진. 네가 스케이팅을 사랑한다고 증명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단다. 이미 네게 충분한 흔적으로 남아 있을 테니 말이야.”
기묘한 말이었다. 응어리졌던 부분을 부드럽게 눌러 터트리는 것 같았다. 유진은 입을 달싹이다가 손을 뻗었다. 할머니의 손 너머. 환히 웃는 앳된 유진의 사진. 그 위를 차근히 더듬었다.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말. 그건 유진이 이제껏 들었던 어느 말보다도 기이한 울림을 지닌 채 다가왔다.
숨을 골랐다. 고개를 들었다. 의식하지도 않았는데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쩐지 마음이 가벼웠다. 아주 오랫동안 짊어졌던 무거운 짐을 마침내 내려놓은 듯이. 홀가분한 마음으로 유진이 가볍게 말했다.
“다시 해볼까요?”
“글쎄. 해보고 싶니?”
“이번을 마지막으로 생각하면 될지도 몰라요. 이번에 해보고 정말 재미가 없거든 관두든 말든 하면 되겠죠.”
조금 후에 유진은 덧붙였다.
“이번에는 괜찮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네가 원하는 대로 해야겠지. 내가 아는 나초는 망설이다가 기회를 놓치는 아이가 아니니까.”
이자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에서 밤을 보낸 다음 날 아침. 일찌감치 일어난 차유진은 스마트폰을 들었다. 메신저 창을 열었다. 카일과의 대화창은 저 아래로 밀려나 있었다. 발굴하듯 찾아내 메시지 하나를 보냈다.

[EeeeG] 결과가 어떻든 준비해보고 싶어요.

잠든 할머니의 머리맡에서 한참이나 앉아 있었다. 아침이었다. 수평선 너머에서 떠오르는 해로 윤슬이 붉게 부서졌다. 이른 아침임에도 모래사장을 걷는 사람들은 있었다. 그들이 남기는 궤적 너머 부서지는 파도를 구경했다. 깨어난 할머니와 함께 아침밥을 먹었다. 답장은 그러고도 조금 늦게 왔다.

[Kyle] E_ISU.mp3

듣지 않아도 알았다. 경기 음원이었다.


“진심이에요?”
유진의 불퉁한 질문에 카일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피하기만 하는 게 능사는 아니지. 능글맞은 말에 차유진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교훈적인 말이나 하면서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지 마세요, 카일.”
“내가 언제?”
“설명해달라니까요. 선수권대회 기권한다던 미카엘이, 왜 여기에서, 내 훈련을 참관하러 왔는지.”
벤치 옆에서 핫도그를 입에 밀어 넣던 미카엘이 킬킬 웃었다.
점심시간을 갓 넘긴 시각이었다. 카일은 음원을 보내고 몇 시간 후 내일 만나자는 연락을 보내왔더랬다. 유진은 카일의 부름대로 시간에 맞추어 링크장에 왔다. 제대로 사과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정중히 부탁하려고 했지. 그런데 다른 주에 있어야 할 미카엘이 대뜸 나타난 것이다. 보아하니 카일이 부른 모양이었다.
“설명이라. 설명.”
카일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몇 번 만지작댔다. 그리곤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안무를 고칠 때 필요한 의견을 얻기 위해 부른 참관인 정도랄까.”
“그게 뭔데요?”
“그냥 구경꾼이라는 거지. 카일, 핫도그 맛있네요. 여기 맛집이야.”
“그렇지? 하나 더 먹어도 돼.”
“이봐요. 둘이 언제 친해졌어요?”
어이가 없어도 너무 없다. 유진은 질린 표정으로 둘을 바라봤다. 카일과 미카엘은 서로 시선을 한 번 주고받더니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어깨 으쓱여대다간 빗장뼈 나가겠다는 말을 삼키는 데엔 몹시 대단한 인내심이 필요했다.
시답잖은 대화가 몇 번 더 오갔다. 그러는 동안 유진은 발목 상태를 점검했다. 애당초 심한 부상은 아니었다. 지금은 움직일 때마다 조금 욱신대는 정도였다. 반대쪽 발의 붓기는 완전히 빠졌다. 발을 구부렸다가 펴고 있자니 미카엘과 대화하던 카일이 다가왔다.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춘 카일은 이내 거침없이 손을 뻗었다.
“발목은 좀 어때?”
“괜찮아요. 생각보다 빨리 낫고 있어요.”
“내가 장담하는데, 이번 선수권대회에 정말 나갈 거라면 다음 시즌 반절은 날린다고 생각하는 게 편할 거야.”
뒤에서 미카엘이 말했다. 유진은 대답하는 대신 눈을 데굴 굴렸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인대 늘어난 채로 경기 출전했다가 또 다치면 그땐 선수 생활 끝이라고 봐도 무관하고.”
“그렇죠? 내가 일부러 겁을 주려는 게 아니라니까, 유진.”
“그런데도 하고 싶니?”
카일이 눈을 찡그렸다. 유진은 지체하는 대신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협회장님한테 깨지는 건 자기가 아니다 이거죠. 아니면 훈련 외적인 고생은 카일이 전부 하니까 믿고 일임하겠다는 일종의 선언인가?”
“미카엘. 애 놀리지 마.”
“하지만 사실이잖아요?”
유진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눈이 마주치자 미카엘은 아코, 하는 괴상한 추임새와 함께 과장스럽게 몸을 움츠렸다. 저 자식은 대회 안 나가고 여기까지 날아오더니 한다는 짓이라는 게 남한테 시비 거는 건가. 울컥하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는데 카일이 한숨을 쉬었다.
“유진. 네 발목 상태가 급속도로 좋아지고 있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래도 완치를 기대할 수는 없지. 훈련하기 위해선 낫는 만큼 써야 하니까.”
“네.”
“쇼트 프로그램은 어쩔 수 없으니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프리용 프로그램은 안무를 새로 구성해야 할 거야. 발목이 다친 이상 에지가 얕아질 수밖에 없고, 발목이 부담이 많이 가는 고난도 점프는 최대한 줄이게 될 테니 부족한 점수는 연기 부문 가산점에서 충당해야 해. 그러기 위해선 스텝 시퀀스 위주로 프로그램을 구성하게 될 테고.”
카일의 설명을 차근히 듣던 유진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미카엘과 눈이 마주쳤다. 너스레를 떨 듯이 한쪽 눈을 윙크하는 그를 질린 표정으로 보던 유진은 그냥 고개를 돌렸다.
스텝 시퀀스와 연기는 유진의 약점 중 하나였다. 그리고 섬세한 스텝과 연기에 있어서 미카엘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선수다.
미카엘이 왜 이곳에 있는지 이해해버렸다. 질린 표정을 짓자 미카엘은 태평하게 킥킥거렸다.
“음원은 들어봤지?”
“네.”
“나중에 래빈한테 고맙다는 얘기 꼭 해. 며칠 동안 잠도 안 자면서 고쳤다더라.”
익숙한 이름에 차유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카일은 패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조용히 입만 달싹이던 유진은 이내 힘없이 대답했다.
“네.”
“좋아. 그럼 미카엘. 우선 전체적인 안무 흐름부터 볼 건데…….”
카일의 말에 미카엘이 몸을 바로 했다. 둘이 진지하게 나누는 대화를 반쯤 흘려들으며 차유진은 곁에 놓인 스케이트 부츠를 만지작대기 시작했다.
김래빈 화났으려나.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역시 그거다. 아무리 싸운 게 아니라고 말해도 부정할 수 없다. 차분한 말로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고 말하던 김래빈 얼굴이 자꾸 아른거렸다. 괜히 눈을 끔뻑이다가 지퍼를 만지작댄다. 만나서 사과하고 싶다. 그게 아니더라도 돌아가기 전에 한 번쯤 만나고 싶었다. 뺨에 찍힌 점을 문지르다가 바보 같다고 웃고 싶었다. 시간이 된다면 자는 모습도 마지막으로 구경하고 싶고.
사실 같이 하고 싶은 건 많다. 물어보고도 싶었다. 빙판에서 몇 시간씩 연습하던 자신을 말리러 왔을 때. 몸으로 힘껏 부닥쳐 넘어트렸을 때. 차유진은 봤다. 김래빈 옷에 잔뜩 묻어 있던 살얼음을. 그건 몇 번인가 넘어졌다는 뜻이었다. 혹시 멍들진 않았냐고 쭈삣대며 물어보고 싶었다. 그럼 김래빈은 어떻게 반응하려나. 신경 쓰지 말라고 할까. 멍든 줄도 몰랐다고 하려나.
“유진.”
카일의 목소리에 차유진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카일과 미카엘이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준비됐냐는 질문이 뒤따랐다. 차유진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가방에서 부츠를 꺼냈다. 카일은 먼저 빙판 위로 올라섰다. 미카엘은 옆에서 싱글벙글 웃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매듭을 맺으며 유진은 미카엘을 힐끔 바라봤다. 제 부상 소식은 뉴스가 나기도 전 미카엘에게 닿았을 거였다.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 중 하나가 다쳤으니 미카엘에겐 금메달을 딸 확률이 커졌다고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미카엘은 출전을 포기했다. 그리고 돌연 샌디에이고로 날아와 자신의 안무를 봐주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왜 그랬어?”
그래서 유진은 물었다. 한쪽 발 매듭을 마무리 짓고 반대쪽 발을 고정할 즈음이었다. 연신 웃고 있던 미카엘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대신 매듭을 짓는 유진을 지그시 내려다보다가 대답했다.
“궁금했거든. 만일 내가 이 길을 고른다면, 내 이후의 삶은 어떤 흐름으로 흘러갈 건지.”
“흠.”
“이 대회가 너한테 도전이듯 내게도 똑같이 도전이란다, 유진.”
잠시 침묵하던 미카엘은 선심 쓰듯 덧붙였다.
“기왕 도전할 거라면 확률은 높을수록 좋잖아?”
미카엘이 눈을 휘어 웃었다. 유진은 대답하는 대신 끈을 힘주어 잡았다. 정갈한 매듭을 묶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연습은 성황리에 끝났다. 시작한 지 세 시간 만에 발목에 통증을 느껴 빙판에서 쫓겨났다는 뜻이다. 통증이 심하진 않았으나 미카엘과 카일은 오늘은 이만하면 되었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통증이 있는 상태에서 빙판 위에 올라가는 건 위험하다는 카일의 말에 유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츠를 벗고 얼음으로 찜질했다. 틈틈이 미카엘이 수정한 안무와 음원을 들으며 맞춰보았다. 상체는 움직임에 제약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미카엘은 생각보다 남을 가르치는 일에 재능을 보였다. 그게 아니라, 하고 설명하면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었다. 정해진 시간이 끝났을 때 유진은 괜히 눈을 굴리며 미카엘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미카엘은 별것 아니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고마우면 래빈에게 말이나 한번 걸어봐.”
미카엘은 짐을 꾸리는 유진에게 말했다. 차유진은 김래빈의 이름을 잠시 떠올렸다가 눈을 흘겼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눈치가 빨랐다. 좀 쓸데없을 정도로.
“돌아가기 전에 한 번 연락하긴 할 거야.”
“래빈이 돌아간대?”
“응. 이틀 뒤였나.”
“그럼 더더욱 걸어봐야겠네. 대회 준비에 지장이 가면 안 되잖아? 신경 쓰일 법한 요소들은 전부 마무리해놓아야지.”
유진은 대답 대신 어깨나 으쓱였다. 놓고 가는 것이 없는지 마지막으로 점검할 때였다. 조용하던 미카엘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넌 스케이팅 좋아하지?”
“갑자기?”
“부츠를 제때 손질 안 하면 녹이 슬지. 녹슨 부츠로는 스케이팅을 만족스럽게 즐길 수 없어.”
난데없는 말이었다. 유진은 할 말을 잃고 미카엘을 바라봤다. 갑자기 뭐라는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더 열받는 점은 저 말의 주체가 누군지 알 것 같다는 거였다. 미카엘이 빙긋 웃으며 말을 끝맺었다.
“사람도 똑같아. 괜히 속 쓰린 경험 만들지 말라는 형님의 친절한 조언이야.”
“난 너한테 연애 상담 같은 거 한 적 없는데, 미카엘.”
“연애라는 자각이 있긴 하구나? 래빈보다 낫다니 다행이다.”
“래빈한테도 이 얘기를 했어?”
“글쎄?”
미카엘이 한쪽 눈을 익살스럽게 윙크했다. 차유진은 질린 표정으로 가방을 메고 일어났다. 작별 인사는 길지 않았다.


링크장을 나섰다. 어둑한 저녁이었다. 사람은 거의 없었다. 차유진은 주위를 한 번 둘러봤다가 괜히 스마트폰을 꺼냈다. 메신저를 열었다. 김래빈한테선 여전히 말이 없었다. 미카엘과 카일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가방을 고쳐맨 차유진은 이윽고 걸음을 뗐다. 가만히 앉아서 고민하는 건 성정에 맞지 않았다.
길은 오랜만이었지만 헷갈리는 구석이라곤 없었다.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아 차유진은 익숙한 문간 앞에 서 있었다. 노크하려다가 대신 벨을 눌렀다. 작업에 한 눈 팔렸을 때 김래빈은 노크 정도는 못 듣고 넘어가곤 했다.
쨍한 소음이 한 번 울렸다. 차유진은 바싹 마른 입을 축이며 기다렸다. 대답이 없었다. 다시 한번 벨을 눌렀다. 할 일이 없어서 발만 비비적댔다. 대답은 여전히 없었다.
갔나. 그제야 잊고 있던 가능성을 떠올렸다. 이틀 뒤 한국으로 돌아가려면 작업실 짐은 진작 빼야 할 거였다. 호텔에서 머물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세 번째로 벨을 누르려다가 손을 뗐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괜히 중얼거리곤 등을 돌렸다.
작업실이 있는 건물에서 나왔다. 인도를 걸어 내려가는데 괜히 마음이 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메시지 하나라도 남기고 올 걸 그랬나. 메신저를 계속 만지작대는 짓이 미련하다는 건 알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역시 대화는 얼굴을 맞대고 나누고 싶은데. 전화라도 해볼까. 메신저를 다시 열었다. 전화 아이콘을 누르기 직전이었다.
“차유진!”
익숙한 목소리였다.
고개를 팩 들었다. 저 앞에서 새까만 인영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림자뿐이었지만 확신했다. 김래빈이었다. 저 방향은 우리 집인데. 멍청한 생각만 하다가 걸음을 뗐다. 저도 모르게 달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제야 깨달았다.
주먹 하나 놓을 공간만 남긴 채 서로 멈췄다. 둘 다 숨을 거세게 몰아쉬고 있었다. 호흡이 딸리는지 얼굴이 벌겠다. 흔들림 하나 없는 시선으로 눈이 마주쳤다. 김래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너 어디 갔었어! 훈련 끝날 시간에 맞춰서 갔는데 아직 안 왔다길래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나 김래빈 작업실 갔었어! 김래빈 만나러! 김래빈은 어디 갔었는데?”
“나야 네 집 다녀왔지! 이든 형께서 당혹스러워하셔서 얼마나 죄송했는데!”
서로 할 말을 잃은 듯 시선만 오갔다. 김래빈 찾으러 작업실 간 자기나 자기 찾으러 집까지 찾아간 김래빈이나. 상황이 퍽 웃기기만 했다. 그건 김래빈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대화가 사라진 자리는 참지 못한 키득거림이 하나둘씩 채웠다.
“그냥 전화하지, 바보야. 어디 있냐고 물었으면 됐잖아.”
“방금 하려고 했어. 근데 김래빈이 먼저 나 불렀어.”
“돌아오는데 너 보이길래.”
김래빈이 말했다. 차유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김래빈은 이내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데려다줄게.”
머쓱한 목소리에 차유진은 고개를 팍팍 끄덕였다.
이상하리만치 바람이 좋았다. 그들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걸었다. 시답잖은 이야기만 나누는데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걸음은 자연히 느려졌다. 거북이보다 느리게 걷던 차유진은 슬쩍 손을 옮겼다. 손이 스쳤다. 조심스레 잡았다. 김래빈은 뻣뻣하게 굳었지만 손을 빼지 않았다.
한참이나 대화를 나눴다. 적당히 시원한 바람과 공기는 기꺼울 정도로 다정했다. 차유진은 불어오는 맞바람에 깊이 숨을 들이켰다. 기분이 좋았다. 어쩐지 괜찮을 것 같았다. 많은 것이.
“차유진.”
어느 순간 김래빈이 걸음을 멈췄다. 차유진도 덩달아 멈췄다. 고개를 돌렸다. 묘하게 비장한 표정을 지은 김래빈이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것도 같았다. 왜, 하고 물으니 김래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말을 신중하게 고르는 태도였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우리가 연락이 끊기는 것도, 모르는 사이가 되는 것도 아니지. 하지만 지금처럼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기엔 많은 어려움이 따를 거야. 그래서, 조금 이기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꼭 직접 전하고 싶은 말을 하려고 해.”
김래빈이 가볍게 숨을 고른다. 시선엔 한 점 흔들림이 없다. 차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을 할지 알 것도 같으면서 전혀 모르겠다. 양립하는 감정마저 기꺼웠다.
“너를 믿어.” 김래빈은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말했다. “이후에 네가 무슨 선택을 하든 간에 말이야. 그건 아마도 내가 너를 많이 좋아하기 때문일 거야.”
“나도야!”
“그렇지만 역시 저번 같은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코치님 말씀엔 귀를 기울이도록……. 어?”
김래빈이 눈을 끔뻑였다. 차유진은 얼빠진 표정을 바라보다가 킥킥 웃었다. 무언가를 사랑한다고 확신하는 것은 생각보다 더 즐거운 일이다. 차유진은 그 사실을 다시금 실감했다.
“나도 김래빈 좋아해.”
지체하지 않고 차유진은 말을 끝맺었다.
“그러니까 나 열심히 해! 김래빈 노래로 다시 피겨 스케이팅 재밌게 할 거야. 그러니까 김래빈도 나 경기하는 거 보러 와!”
“곡을 작곡한 작곡가로서 완성된 경기를 보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 아마 학기 중일 테니 직접 가지는 못하더라도 중계방송은 꼭 챙겨볼 테니 걱정하지 마!”
김래빈이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유진도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윽고 침묵이 내렸다. 집에 다다랐음을 깨닫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체통 옆에 선 김래빈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차유진도 깊이 심호흡했다. 시선은 말하지 않아도 얽혔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럼.”
“응.”
손을 놓았다. 미련은 없었다. 김래빈이 먼저 등을 돌렸다. 목소리는 또렷하게 남았다.
“잘 가!”
작별을 말하는 데에 긴말은 필요치 않았다. 차유진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아주 오랫동안 김래빈의 등을 좇았다. 흐릿한 형체마저 보이지 않게 된 후에야 차유진은 걸음을 돌렸다. 어쩐지 괜찮을 것 같았다. 기적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사랑이 기적보다 컸을지도 모르고.
며칠 후. 김래빈은 예정에 맞추어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가 떠나는 오전 열한 시 삼십이 분. 차유진은 빙판 위에서 음악에 맞추어 스텝을 밟고 있었다.


춥지 않다. 맨 처음 느낀 감각은 그거였다.
사방이 얼음인 데에 반해 관객석은 후끈하다. 적막인 듯 소란인 듯 아뜩한 속살거림만 울렸다. 높은 천장에서 떨어지는 쨍한 조명은 거울 같은 빙판 표면에 부딪히며 비산했다. 이곳의 빙질은 그가 겪었던 곳보다 미끄럽다고 들었는데. 괜한 걱정이 문득 솟았다.
누군가 그 위에 올라섰다.
키는 훤칠했다. 잠깐 안 본 사이에 빠졌던 근육을 도로 붙여놓은 듯했다. 어두운 색감의 옷에 자갈자갈 붙은 큐빅들이 눈이 아프게 빛났다. 보는 눈이 시릴 만큼 화려한 옷인데도 시선은 얼굴에서 떨어지지 못했다. 중계석에 앉은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다음 선수는 아무래도 강력한 우승 후보 중 하나였죠. 대회를 두 달 앞두고 발목을 다쳤는데, 이게 실은 굉장히 치명적인 부상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승 후보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습니다. 빙판 위 백조라고도 불리는 미카엘 선수가 출전을 포기하는 대신 이 선수의 안무를 다듬어줘서 더욱 이목이 쏠린 선수입니다.”
그가 빙판 가운데로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발을 들어 스케이트 앞코로 빙판을 툭툭 두드렸다. 주위에서 헛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떨리는 숨소리만이 또렷했다. 그러다가 그마저도 지워졌다.
눈을 감았다 뜬 그가 고개를 느리게 치든다. 이때를 특히 좋아한다. 경기에 완전히 몰입하기 직전. 가만히 가라앉은 시선. 경기장을 한 바퀴 죽 돈다.
소란하던 관중이 쥐 죽은 듯 침묵했다.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온 무언가를 눈앞에 직면하기 직전처럼. 혹은 한껏 긴장한 듯이. 떨리는 심장을 지그시 누르며 심호흡했다. 이미 알고 있다. 그는 최선을 다해 연기할 것이다.
느릿한 선율이 흐르기 시작했다. 굳은 듯 서 있단 손이 파르르 떨렸다.
부드러운 칼람바 선율.
빙판을 갈랐다. 빛이 진동했다.
언뜻 시선이 마주친 듯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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