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유진 님께. 정성스럽게 프린트된 서류의 첫 장을 보자마자 차유진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단정한 고딕이 그리는 글자가 퍽 낯설었을뿐더러 애초에 자신의 손에 서류가 닿았다는 사실이 지극히 비정상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차유진은 서류를 읽는 대신 종이를 둘둘 말아 나팔처럼 하곤 입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Hey, 이거 나한테 왜 줬어요? 케이트는 차유진을 어깨너머로 흘겨보곤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한국에서 온 이적 제의 서류예요. 길드장님께서 말씀하시길, 본인이 앉을 곳은 본인이 정해야 한다고 하시던데요.]”
“[케이트, 진심이에요? 지금까진 전부 케이트 선에서 거절했잖아요! 어디였더라, 남미에 캐나다에 프랑스도 있었던가요?]”
“[아니요, 프랑스에서 왔던 건 구역 겹치니 조심해달란 경고 문서였어요.]”
“[아무튼요! 다른 나라는 전부 거절했는데 하필 한국은 내 손에 들어왔네요. 이건 대체 뭘 의미하는 거예요?]”
차유진은 케이트를 빤히 응시했다. 노트북 타자를 두드리던 케이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선 서류를 읽으라고 윽박지르고 싶었으나 제 앞에 앉은 저치에게는 도통 그럴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케이트는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두근거리는 가슴께를 진정시키려 크게 숨을 들이켰다.
준수한 외모에 의거해 판단했을 때, 타인이 본다면 케이트가 차유진에게 호감이 있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케이트는 그 말을 듣는 즉시 정색하며 정정할 것이다. 호감은 무슨. 따지고 본다면 케이트의 심장이 뛰는 이유는 정반대였다. 말하자면 오랜만에 마실 나왔던 개미가 인간의 눈에 띄었음을 깨달았을 때 느낄 법한 감정이랄까.
미국에서 제일가는 길드 소속 S급 헌터 차유진. 고유 스킬 블랙홀은 S급, 그 외에도 자잘한 스킬 모두가 A급 이상인 괴물. 던전과 헌터라는 개념이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을 무렵 갑작스럽게 각성해선 고위험 등급 던전을 홑몸으로 클리어하며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케이트는 항상 웃음이 많은 차유진을 일컬어 고양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차유진의 SNS 게시글에 고양이라는 애칭을 다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코웃음 쳤다. 고양이는 무슨. 케이트가 볼 때 그건 S급 헌터와 면대면으로 일해보지 않은 사람들이기에 할 수 있는 태평한 소리였다.
케이트의 시선이 차유진의 눈에 닿았다가 미묘하게 비껴갔다. 차유진은 케이트가 교묘하게 자신의 시선을 피하고 있음을 알았으나 별다른 말을 얹지 않았다. C급, 그것도 사무직인 케이트는 항상 차유진을 어려워했다. 그래서 항상 분위기를 풀려고 노력하는데 케이트의 성격상 그것도 어려웠다. 지금도 그랬다. 그냥 궁금한 걸 물어봤을 뿐인데 추궁당하는 사람처럼 호흡을 골랐다. 그럴 시간에 얼른 알려줬으면 좋겠는데. 서류를 팔랑팔랑 흔드는 차유진의 시야에 Republic of Korea라는 단어가 비쳤다.
“[케이트?]”
“[유진 씨 한국인 재미교포시잖아요.]”
잠시 고민하는 듯했던 케이트가 말했다. 어딘가 두루뭉술한 대답이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했던 차유진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한국엔 가본 적도 없는데요.]”
“[그쪽 생각은 다른가 보죠. 게다가 좀 웃긴 제안이 함께 와서.]”
“[오, 웃긴 제안이라면요?]”
“[서류 삼 페이지 스물두 번째 문장 보세요.]”
케이트의 담담한 말에 차유진이 서류를 팔락팔락 넘겼다. 줄을 세며 빠르게 넘어가던 차유진의 손이 갑자기 멈췄다. 세 번째 페이지 스물두 번째 문장을 빤히 바라보던 차유진이 박장대소를 터트린 건 직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맙소사, 이 사람들 진심일까요?]”
“[진심이든 아니든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아요. 문제는 우리 쪽에서 그걸 모욕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거죠.]”
“[모욕이라니, 케이트! 조금만 더 부드럽게 생각해요. 이게 어떻게 모욕이에요?]”
차유진은 서류를 팔랑거리며 깔깔거렸다. 하여간 이 사람들도 웃겼다. 자신을 영업하려는 길드는 세계 어디에나 있었고 합류 제의 서류를 한두 번 받아보는 것도 아니지만, 이런 제안은 또 처음이었다. 동시에 차유진은 케이트와 길드장이 왜 서류를 제 손에 넘겼는지 깨달았다. 케이트의 말마따나 자칫하면 모욕이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는 문항이었다.
“[매치율 97%의 가이드는 또 어디서 찾았대요?]”
“[나도 몰라요. 묻지 말아요. 그렇잖아도 통제부에서 유진 씨 파장이 빠져나간 것 같다고 얼마나 갈궈댔는지 알아요?]”
“[게다가 그 가이드가 B급이라니. 세상에.]”
차유진이 쥔 서류는 이제 꼬깃꼬깃 접힌 채였다. 언뜻 불쌍하게까지 느껴질 정도로.
첫 던전이 나타난 날부터 세상 사람들은 각성자와 미각성자로 나뉘었다. 각성자는 F급부터 S급까지 급이 나뉘었고 능력 또한 천차만별이었다. 문제는 세 번째 던전이 터졌을 무렵 생겨났다. 각성자, 다른 말로 헌터라고 불리는 이들이 능력을 견디지 못하고 폭주하는 사례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말했다. 인간의 몸으로 신체 능력을 아득히 뛰어넘는 능력들을 써대는데, 정신이고 몸이고 버티지 못하는 게 정상이라면서.
그 무렵 등장한 게 가이드였다. 가이드는 헌터들의 폭주를 잠재우고 그들의 능력을 가라앉히는 능력을 지녔다. 파장이 유달리 잘 맞는 헌터와 가이드는 서로 짝을 맺어 함께 활동하는 일이 잦아졌다. 차유진이 현재 속한 길드에서도 웬만한 A급 이상 헌터들은 각자 가이드가 있었다. 급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폭주 시 감당이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차유진은 길드에서 가이드가 없는 몇 안 되는 헌터였다.
아무렴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B급을. 급으로 사람 나누는 취향은 없었으나 차유진은 그냥 웃었다. 보통 비슷한 등급의 가이드와 헌터가 짝을 맺는 게 일반적이었다. 한쪽이 너무 우위라면 반대쪽이 상대를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가이드 쪽의 급이 낮다면 헌터의 폭주 확률이 비상식적으로 치솟았다. 반대로 헌터 쪽의 급이 낮다면 능력이 봉인되는 일까지 발생하곤 했다. 차유진은 종이를 툭툭 건드리다 어깨를 으쓱였다. 매치율이 97%라고 한들 상대 쪽에서 차유진을 견디지 못할 게 틀림없었다. 차유진은 S급, 상대는 B급이었으니까.
“[당신이 S급이란 사실은 지나가던 돌멩이도 알아요. 그런데 매치율이 97%라는 핑계로 소개한 가이드가 B급이라니, 이건 당신에 대한 모욕이에요. 더 넓게 봐선 우리 길드를 향한 모욕이나 다름없어요.]”
“[와우, 케이트. 조금 더 너그럽게 생각해요, 우리. 지금껏 가장 매치율이 높았던 가이드가 고작 71%였잖아요?]”
“[그리고 충분히 안정적인 71% S급 가이드를 뻥 찬 것도 유진 씨죠. 그래요, 너그럽게 생각하겠어요. 당신이 언제 폭주할지 모르는 시한폭탄 비슷한 상황이란 것만 되새기고요.]”
“[아야. 아파요, 케이트.]”
차유진이 찡긋 윙크했다. 케이트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다시 노트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확실히 차유진은 전속 가이드가 없었다. 매치율이 낮은 다른 가이드들을 통해 틈틈이 가이딩을 받을 뿐이었으므로 케이트의 말은 따지고 보자면 사실이었다. 그래도 언제 폭주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라니, 너무하네. 나직이 킬킬거리던 차유진은 이내 종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S급 헌터에게 이적 제의를 하면서 내세운 조건이 매치율 97%의 B급 가이드라. 아마 길드장과 케이트가 차유진에게 직접 서류를 건넨 이유는 차유진이 이적 제의를 수락하지 않을 거라는 강한 확신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97% 매치율 가이드를 제외한다면 그럴싸한 제안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그 가이드마저 B급. 아무리 봐도 차유진만 손해인 계약이었다. 이런 웃기지도 않는 이적 제안 계약서를 내민 길드에게 차유진이 제의 거절 의사를 밝혀 망신을 주는 게 목적이겠지.
차유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꾸깃꾸깃한 종이를 도로 폈다. 이적할 마음은 들지 않았으나 호기심은 일었다. S급 가이드도 자신과의 매치율은 70%를 간신히 넘었는데, B급 가이드가 97%라니. 잘못된 파장으로 잘못 계산한 거 아니야? 차유진은 킥킥거리며 서류를 팔랑팔랑 넘겼다. 보통 가이드에 대한 제안이 서류에 들어갈 땐 가이드 본인에 대한 소개서가 동봉되곤 하는데……. 아, 유레카. 마지막 장에 끼어 있는 이력서를 쏙 뽑아낸 차유진은 이윽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우. 케이트, 이걸 봐요.]”
“[또 왜 그래요?]”
“[이 사람, B급이면서 한국의 A급 헌터 여섯 명과 S급 헌터 한 명의 폭주를 잠재웠다는데요.]”
그제야 케이트의 고개가 돌아갔다. 차유진이 말한 건 흡사 지나가다 땅 팠더니 뉴욕 맨해튼 땅문서가 나올 확률이었다. 케이트의 눈이 부르르 떨렸다. 정말요? 되묻는 목소리가 차유진이 쾌활하게 웃었다.
“[설마요.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요?]”
“[……유진 씨, 부탁이니 나가주시면 안 될까요?]”
“[에이, 케이트. 우리 사이에.]”
그럼 그렇지. 급격히 피곤해진 케이트가 도로 노트북에 시선을 돌렸다. 차유진은 케이트가 업무에 몰두하는 모습까지 확인하곤 이력서를 들여다봤다. 불량한 인상의 남자가 차유진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세상에, 귀에 피어싱은 대체 몇 개나 한 거야? 누가 봐도 EMO 밴드를 닮은 모습에 잠시 치를 떨던 차유진은 이력란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B급으로 각성한 건 열여섯 살. 열일곱 살에 현 길드에 입사하고 지금껏 쭉 지낸 듯했다. S급인 차유진은 이곳저곳을 전전했으나 B급은 그 수가 제법 많았으므로 누군가 기를 쓰고 스카웃할 정도는 아니란 거였다. 이력서를 가만히 읽던 차유진이 흠,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봐도 그냥 평범한 B급 가이드였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떻게 나랑 매치율이 97%람.
“[나 말고 다른 사람 파장이랑 착각한 거 아니에요?]”
“[그럴 확률도 있는데 극히 낮아요. 며칠 전에 통제부에서 쥐새끼를 한 마리 잡았거든요. 그래도 영 미심쩍으면 유진 씨가 한 번 확인해보지 그래요? 그 눈으로.]”
케이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차유진은 빙긋 웃었다. 그렇잖아도 막 실행하려는 참이었다.
차유진은 자신의 상태창을 열었다. 이름과 나이부터 시작해서 등급에 스킬까지, 잘 정리된 창 하나가 허공에 열렸다. 어젯밤 투고 사이트를 뒤지다 발견한 노래를 흥얼거리며 차유진이 스킬창을 뒤졌다. 얼마 걸리지 않았다.
[‘반짝이는 눈빛(A)’을 활성화하시겠습니까? Yes / No]
차유진은 가볍게 Yes를 눌렀다. 눈앞이 살짝 일렁였다. 그리고 다시 이력서를 들여다봤을 땐 빼곡하게 적힌 이력 옆마다 깨알 같은 글씨가 붙어 있었다. 진실. 진실. 진실. 진실. 거짓과 진실을 판별할 수 있는 반짝이는 눈빛 덕분이었다.
“[어때요?]”
“[음, 반짝이는 눈빛으로 봤을 땐…….]” 차유진은 종이를 내리며 빙긋 웃었다. “[한 치 틀림없는 진실이네요. 진짜로 매치율이 97%인가 봐요.]”
“[이런. 유감이네요.]”
케이트가 전혀 유감스럽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차유진은 그냥 어깨를 으쓱였다. 불량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이력서 사진을 들여다보던 차유진은 이내 뒤늦게 이름을 더듬더듬 읽었다. 김, 래……. 래 뭐? 래빈? 이름이 꼭 래빗 같네. 심드렁하게 생각하던 차유진은 이내 힘차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정했어요.]”
“[잘했어요. 거절 의사는 길드장님께 직접…….]”
“[비행기 잡아줘요, 케이트. 그동안 고마웠어요!]”
“[네?]”
케이트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노트북에 집중했던 고개가 휙 돌아갔다. 크게 뜨인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차유진은 또박또박 발음했다.
“[까짓것, 한국 한 번 가보죠. 매치율 97%가 어디 흔한가요.]”
“[자, 잠깐만요. 유진 씨. 이걸 이렇게 결정하시면.]”
“[나한테 이적할지 말지 결정하라고 서류 준 거 아니었나요?]”
“[그게 아니라……!]”
케이트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가 하얗게 질리길 반복했다. 오만한 길드장과 무관심한 케이트 본인이 방금 세계에서 일이 등을 다투는 S급 헌터를 제 발로 뻥 차버린 것이나 다름없음을 깨달은 탓이었다. 하필 그 길드가 미국도 아닌 한국이었다. 다른 길드로 넘어가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나라를 옮겼다. 자칫하면 미국 정부에서 뭔 짓을 저질렀냐며 멱살 잡힐지도 모른다. 아니, 케이트는 이백 퍼센트 확률로 잡힐 것이다. 정부는 S급 헌터인 길드장에게 빌빌 기지 C급 사무직인 케이트에겐 당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차유진은 그냥 활짝 웃었다. 저 웃는 얼굴이 오늘따라 미운 건 왜일까. 케이트가 말릴 틈도 없이 차유진은 마지막 장에 사인하고 인벤토리에서 착실히 도장까지 꺼내 찍었다. 붉은 인주가 그 흔적을 남기자 케이트는 순간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자신이 저도 모르게 일어나 있었음을 깨달았다.
“[여기요. 설마 중간에서 빼돌리거나 하진 않을 거죠, 케이트?]”
차유진이 계약서를 건네며 유쾌하게 말했다. 뼈 있는 농담이었다. 케이트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계약서를 중간에서 빼돌려 계약을 막는 일은 제법 흔하게 일어났으나 무력 최강을 다투는 S급 헌터에게 할 짓은 아니었다. 차유진은 아예 백지장처럼 하얘진 케이트를 보며 윙크했다. 웃음을 따라 뾰족한 송곳니가 드러났다.
“[그럼 남은 기간 일정 조율 부탁해요.]”
차유진이 손을 흔들며 나갔다. 케이트는 제 손에 쥐어진 도장 찍힌 이적 계약서를 들고 닫히는 문을 멍하니 바라봤다. 넋이 나간 채로 길드장의 번호를 찍는 케이트는 순간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어졌다. 케이트의 집무실은 팔십구 층임을 너무나도 잘 안 채로.
밀린 일정을 불같이 소화한 차유진은 한 달 후 진짜 한국으로 날랐다. 비행기 타고. 길드장에 국가 요인들까지 나서서 막았으나 차유진은, 그 고집불통에 제멋대로인 S급 헌터 차유진은, 그냥 따봉을 날리는 것으로 마지막 인사를 장식했다.
세계가 떠들썩했다. S급 헌터 차유진이 길드를 이적함에 따라 소속 국가가 바뀌게 된 것이다!
차유진은 자신의 이적에 관한 뉴스를 쭉 읽다가 스마트폰을 껐다. 주위가 영 소란스러웠으나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오늘은 유월 십칠 일. 한국에 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리고 바로 오늘, 정식으로 길드 및 소속 국가 이적을 알리는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출석한 거였다.
사실 처음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 부길드장이 허겁지겁 달려온 꼴은 제법 볼 만했다. 길드장은 던전 공략 중이기에 반기지 못했다며 설명하는 모습에서 당혹스러움이 느껴졌다. 아마 저들도 올 줄 몰랐겠지. 걸리든 말든 일단 던져나 보는 심정으로 구멍 숭숭 뚫린 그물을 던졌더니 백상아리가 잡힌 꼴이었다. 차유진은 서툰 영어로 손짓 발짓 다 동원해 설명하는 부길드장을 보며 씨익 웃었더랬다.
이후론 서류 처리하느라 바빴다. 매치율 97% 가이드를 보여달라고 요구했더니 지금은 없댔다. 길드장 따라 던전 공략에 갔다고. 자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거듭 사과하는 모습에 차유진은 그냥 손만 휘휘 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사실 한 달 정도 기간이 있었을 테지만 던전 공략이 한 달 만에 후루룩 끝나는 건 아니니까.
차유진은 조금 답답한 제복 단추를 끌러 내렸다. 대외 행사는 여러 번 다녔기 때문에 그렇게 어색하진 않았으나, 반대로 익숙하지도 않았다. 차유진은 자유분방하게 흐트러진 머리를 가다듬는 스타일리스트의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알고 그냥 웃었다. 스타일리스트는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면서도 착실히 할 일을 끝냈다.
“[유진 씨, 대기하실게요!]”
귀를 기울일 필요도 없었다. 대문 뒤에선 셔터와 숨죽인 중얼거림, 이름 모를 누군가와 부길드장의 목소리가 뒤섞여 나고 있었다. 기자들이 빼곡히 몰려왔을 것이다. 차유진은 가볍게 몸을 풀었다. 옆에서 대기 중인 스태프가 크게 초를 셈했다.
삼! 차유진이 숨을 들이켰다.
이! 천천히 내쉬었다. 손끝에서 가벼운 불꽃이 튀었다.
일!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띄우고,
문이 열렸다.
곧장 셔터 세례가 쏟아졌다. 눈이 부셨다. 차유진은 방긋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웬 레드카펫이람. 고풍스러운 한옥과는 영 어울리지 않았으나 그러려니 했다. 다행스럽게도 카펫이 깔린 길은 짧았다. 떠내려갈 듯한 함성, 비명, 셔터음까지. 차유진은 당당한 자세로 걸어가 부길드장 곁에 섰다.
그 이후론, 뭐, 그저 그랬다. 차유진은 마이크를 건네받아 짧은 소감과 이유를 발표했고 함께 리본을 잘랐다. 대체 왜 잘랐는지는 몰랐지만. 직후엔 몰려든 기자들과 짧게 질문을 주고받았다. 마지막으로 제발 사인 좀 해달라는 사람들에게 가볍게 사인해준 후에야 차유진은 차에 올랐다. 기다란 리무진이었다. 차유진은 붉고 채도 낮은 내부를 살피며 부길드장 취향이 제법 너디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젠 어디 가나요?]”
“[아, 별도로 예정된 일정은 끝났습니다. 숙소로 모실까요?]”
“[음, 좋아요. 부탁할게요. 혹시 가이드는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요?]”
온종일 차유진을 졸졸 따라다녔던, 아마 비서로 추정되는 남자의 얼굴이 묘해졌다. 남자는 잠시 목을 가다듬더니 짧게 말했다. 차유진의 눈이 순간 빛났다.
“[던전 공략 완료 예상일은 이틀 후입니다. 휴식일 하루를 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사흘 뒤에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반짝이는 눈빛(A)’을 사용합니다.]
[‘반짝이는 눈빛(A)’이 해당 발언이 거짓임을 확인합니다.]
흠. 차유진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만난 지 일주일 만에 거짓말이라. 그것도 헌터에게, 가이드에 관한 소식을. 남자는 차유진의 반응이 돌아오지 않자 슬쩍 눈치를 봤다. 눈이 마주쳤다. 차유진은 그냥 웃었다.
“[좋아요. 알겠어요. 막 공략을 다녀온 헌터에게 휴식일을 빼라고 할 수는 없죠.]”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차는 부드럽게 나아갔다. 숙소라는 이름의 주택 앞에서 차유진은 내렸다. 사흘 후에 뵙겠습니다. 배려처럼 보이겠지만 일종의 폭탄 돌리기 같은 거였다. 타지에서 예민할 헌터를 곧장 굴려 먹었다간 언제 터질지 모르니까 적응 기간을 주는 것이다. 차유진은 손을 휘휘 흔들곤 숙소 안으로 들어섰다.
이후 사흘은 순식간에 지났다. 차유진은 사흘 동안 자고 먹고 놀고를 반복했다. 미국 길드 소속일 땐 느껴보지 못했던, 아주 까마득한 세월 만에 체감하는 나태함이었다. 이 사흘이 끝나고 가이드를 만나면 던전 투어가 시작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기 때문에 차유진은 더욱 열심히 놀았다. 이후부턴 쉬는 날이 거의 없을 테니까.
마침내 사흘째 되는 날, 차유진은 약속 시각에 맞추어 리무진에 올라탔다. 역시나 암적색으로 빛나는 내부를 보며 리무진은 됐으니 그냥 아반떼나 달라고 요구할 셈으로. 사흘 만에 만나는 남자는 어딘가 초췌한 얼굴이었다. 일이 많았나 보지 싶었으나 구태여 캐묻진 않았다. 차유진은 귀찮은 일엔 엮이지 않는 법을 몹시 잘 알았다.
“[우린 어디로 가죠?]”
“[여의도에 있는 특수능력자 길드 본부로 갑니다.]”
“[거기로 가면 만날 수 있나요?]”
“[네.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반짝이는 눈빛을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차유진은 기분 좋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창밖을 보았다. 짙게 선팅한 창은 안에서 보는 세상을 희미한 구릿빛이 돌게 했다. 높다란 빌딩과 바삐 오가는 자동차들을 보며 차유진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여의도 특수능력자 길드 본부는 미국에 있던 길드 본부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쭉 뻗은 고층 건물 세 개가 구름다리 여러 개로 연결된 모양이었는데, 남자는 건물을 올려다보는 차유진의 곁에 서서 저것이 길드를 대표하는 문양이니 뭐니 떠들어댔다. 차유진은 반쯤 흘려들으며 휘적휘적 걸었다. 곧장 들어가진 않았다. 벌떼 같이 몰려든 기자들과 짧은 회견을 가졌다. 그들은 S급 헌터가 길드 이적 후 본격적인 활동을 나서는 데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몸 상태는 어떠신가요?]”
“[오, 아주 좋아요. 그간 푹 쉬었답니다!]”
“[가이드를 만나게 되실 텐데 소감은 어떠실까요?]”
“[가슴이 두근거리네요. 아주 기대하고 있어요.]”
“[김래빈 가이드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보셨나요?]”
그때 서툰 영어가 들렸다. 차유진이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눈을 빛내는 기자가 마이크를 들이밀고 있었다. 소문? 가이드의 이름이 분명 김래빈이었는데. 이건 또 뭐람. 차유진이 대답할 말을 찾으며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자니 남자가 끼어들었다. 이제 됐다며 기자들을 물리는 손짓에선 일견 다급함까지 엿보였다.
“[가이드에 대한 소문이 있나요?]”
기자들을 뒤로하며 차유진이 물었다. 남자는 한참 입을 다물고 있다가 느리게 말했다.
“[특수능력자들은 모두 구설수에 사로잡힌 존재죠. 김래빈 가이드도 똑같을 뿐이에요.]”
흠. 스킬을 사용하지 않아도 남자가 대충 얼버무렸음을 알게 하는 대답이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차유진은 입술을 비죽 내밀며 생각했다. 너무 충동적으로 왔나. 매치율 97%의 B급 가이드라니, 너무 신기해서 그만. 케이트한테 돌아가고 싶다고 메시지 하면 반응이 어떠려나. 하얗게 질렸던 얼굴을 떠올리던 차유진은 키득키득 웃었다.
본부 내부는 그냥 그랬다. 커다랗게 헌터 차유진 환영 플래카드를 걸어놨다는 점만 제외하면 평범했다. 대문짝만하게 박힌 얼굴과 눈이 마주쳤을 때 차유진은 웃음을 금치 못했다. 저거 뭐냐고 깔깔거리며 묻자 남자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길드장님 지시라며 어쩔 수 없었음을 필사적으로 설명하는 남자에 차유진은 숨이 넘어갈 뻔했다.
전면 유리로 만든 엘리베이터 덕분에 길드장 사무실이 있는 최고층까지 올라가면서도 플래카드와 눈을 맞출 수 있었다. 중간에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최고층까지 오르자마자 차유진은 홍채 인식에 지문 인식에 파장 인식까지 받았다. 이럴 필요는 또 뭐람. 남자를 힐끗 바라보니 지레 찔린 남자가 줄줄 대답했다. 설명은 길었으나 요약하자면 대충 고위 헌터들을 영입했더니 암살 시도가 늘었다는 말이었다. 미국 길드에 있을 땐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다. 대형 길드장이 암살 시도라니.
마침내 모든 검사를 끝내고 남자가 으리으리한 문을 두드렸을 때. 안에서 들어오란 소리가 들렸을 때 차유진의 눈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아, 어서 오세요.”
[스킬 ‘금수의 시선(S)’을 사용합니다.]
[이름: 김진수
나이: 51세
등급: A급
고유 스킬: 없음
보유 스킬 – 활성화: 명경지수(A), 기민한 감각(B)
비활성화 - 더보기]
차유진은 사람 좋게 웃어 보이는 길드장을 가만히 바라보다 활짝 웃었다. 그리고 손을 흔들며 말했다.
“Hi~.”
길드장의 얼굴이 굳었다. 뻣뻣한 웃음이 떠올랐다. 이런 부류는 알기 쉬웠다. 아마 어린놈의 자식이 등급만 높다고 반말을 찍찍해대니 마느니 할 것이다. 차유진은 언행을 조심하는 대신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사흘이나 가이드를 안 보내줬으면서 나한테 뭘 바란담.
그러나 김진수는 빠르게 표정을 수습하고 자리를 권했다. 푹신푹신한 소파에 털썩 주저앉자 곧장 차와 다과가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는 생전 처음 보는 종류였다.
“차유진 헌터, 그동안 잘 지냈나요? 우리가 준 숙소는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으음, 나쁘지 않았어요. 근데 밤공기 bit cold.”
“그러시군요. 온풍기를 설치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말하며 차유진은 속으로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화염 스킬이 있는 헌터 주제에 밤공기가 춥다니, 웃기지도 않았다. 저 김진 어쩌구 길드장도 자신을 놀리기 위해 하는 말임을 알 터였다. 이건 그냥 소소한 복수였다. 가장 중요시 여겼던 가이드 조항을 일주일이 넘도록 모르쇠한 것에 대한.
이후 대화는 제법 순탄하게 흘러갔다. 길드장은 서류를 내밀며 차유진이 지켜야 할 새로운 시스템과 길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상세히 설명했다. 차유진 역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설명이 끝나자 다음은 던전이었다. 여러 개의 후보가 나왔다. 차유진은 가볍게 놀이하듯 갈 던전을 골랐다. A급인 타란튤라의 미궁이었다. 현재 S급 던전은 등장하지 않았으므로 그게 최고 등급이었다.
“그럼 일주일간 적응 기간을 갖춘 후, 오는 24일 목요일에 던전에 진입. 맞으실까요?”
“Yup. 맡겨만 줘요.”
“좋습니다. 혹 중간에 훈련 등이 필요하시다면 말씀해주세요.”
“얼마든지요.”
차유진은 가볍게 손을 놀려서 찻잔을 기울였다. 적당히 씁쓸하고 적당히 달달한 차가 목구멍을 넘어간다. 이제부턴 본격적인 눈치 싸움인가? 길드장은 서류 뭉텅이를 적당히 정리하더니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유레카. 차유진의 예민한 감각은 다음 대화 주제를 기민하게 알아챘다.
“김래빈 가이드는 지금 만나시겠어요?”
“오, 빠를수록 좋아요.”
그 조건으로 나를 영입한 주제에 며칠 동안 꽁꽁 싸맨 건지 이해할 수가 없네. 속으로 중얼거리며 빙긋 웃자 길드장도 허허 웃었다. 헐레벌떡 일어나 앞장서는 길드장의 뒤통수를 뚫어지라 바라보다가 그냥 어깨를 으쓱였다. 뭐 알아서 잘하겠지. 인제와 뒤통수친다면 그때야말로 다시 미국으로 날라버릴 테다. 케이트에게 잔소리는 좀 듣겠지만 사기당하는 것보다야 훨 낫잖아?
길드장은 차유진을 데리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리곤 익숙하게 지문을 인식하더니 지하 13층을 눌렀다. 제법 깊이 들어가네. 엘리베이터가 대지를 너머 지하로 파고들자 차유진은 주위를 가볍게 둘러봤다. 사람들이 개미 떼처럼 우글거린다. 지상보다 지하에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은 꼴은 또 처음인데.
땡! 때마침 경쾌한 소리가 나며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길드장이 또 앞서나갔다. 차유진은 태연자약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느긋하게 걸었다. 시야 구석에서 아른거리는 길드장은 어딘가 초조한 표정이었다.
“김래빈 가이드가 좀 특이한 유형이라, 그래도 실망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내가 왜 실망해요?”
“매치율이 높기는 한데…….”
이것 봐. 또 뭐 숨겼지. 서류에 사인했다고 뒤통수를 몇 번씩이나 때리는지 모르겠다. 뭐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대뜸 날아온 제 업보겠지 뭐냐. 차유진은 흐음, 하고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말을 끝맺는 대신 대충 얼버무린 길드장의 발걸음은 이내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멈춰 섰다. 명패가 흐린 조명에 반짝였다. 훈련2실.
“안에 있을 겁니다.”
안에서 강렬한 파동이 소용돌이친다. 차유진은 거의 본능적으로 알았다. 힘과 힘이 맞부딪힌다. 서로 탐색하듯 눅진하게 흐르다가 일순 이빨을 드러내며 물어뜯는다. 차유진은 저도 모르게 눈을 찡그렸다. B급 가이드랬는데. 이 파장이 어떻게 가이드고, 어떻게 B급이야?
차유진이 문을 열었다. 경첩이 앓는 소리 하나 없이 열렸다. 그리고 그 순간 차유진은 ‘들었다’.
음이다. 도, 레, 미, 다시 도, 레, 미. 단조로운 음들이 얽히고설키더니 순간적으로 고함을 토해낸다. 뒤섞이고 녹아내리고 뭉치고 흩어지고 폭발하는 광막한 세계. 그리고 그 가운데에 홀로 선 남자. 세상에서 가장 고요한 동시에 가장 시끄러운 소리를 몸에 두른 채로 그가 고개를 틀었다.
“아.”
눈이 마주쳤다. 남자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옅은 보랏빛 섬광이 눈에 일순 깃들다 사라진다. 그리고 남자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래빈입니다.”
[스킬 ‘금수의 시선(S)’을 사용합니다.]
[이름: 김래빈
나이: 24세
등급: B급 / A급
고유 스킬: ■■
보유 스킬 – 활성화: 기나긴 울림(A), 지휘자(C)
비활성화 – 더보기]
[스킬 ‘판별하는 눈(B)’을 사용합니다.
이름: 유진 이그나시오 차(차유진)
나이: 24세
등급: S급
고유 스킬: 블■홀(S)
보유 스킬 – 활성화: 금수의 시선(S), ■짝■■ ■빛(■)
※이하 내용은 대상의 상위 스킬 보유로 인해 열람할 수 없습니다.]
결론부터 말하겠다. 차유진은 사기당했다.
이 짓을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폭넓은 단어와 서툰 언어로 장식한 서류를 다시 훑어보니 귀책 사유가 그렇게 많을 수가 없었다. 근데 그걸 인제와 따지고 들자니 덧붙은 조건들이 발목을 잡았다. 한 마디로 노림수라는 뜻이었다. 차유진은 김래빈을 만나고 온 저녁 담당자를 시켜 서류를 처음부터 끝까지 빼곡하게 훑었다. 세 시간이 넘도록 이어진 문답과 검토 끝에 차유진은 결론지었다. 사기였다. 계약의 처음부터 끝까지가 전부.
차유진은 소파에 드러누운 채 한숨을 푹 쉬었다. 소파 앞 탁상엔 두꺼운 서류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곁눈질로 그것을 가만히 노려보던 차유진은 이내 손가락을 튕겼다. 순식간에 불길이 올랐다. 시뻘건 화염은 혀를 날름거리며 게걸스럽게 종이를 먹어치웠다. 잿더미만 폴폴 날리고 나서야 불이 꺼졌다. 와중에 화재경보기가 울리지도 않았다. 뭐 특별한 장치라도 마련해뒀을 가능성도 있었으나 사기당했음을 깨달은 직후엔 그냥 부실공사 같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와. S급으로 각성하고 나서, 아니, 태어난 이래 이런 취급은 생전 처음이었다. 각성하기 전부터도 사람들은 모두 차유진을 조심스럽게 대했다. 다른 말로 뒤통수칠 엄두도 못 냈다는 거였다. 그런데 맞았다. 아주 호쾌하게. 한 번만 더 생각해보라던 케이트의 말을 들을 걸 그랬다. 그런데 뭐 어떡해. 후회해봐야 이미 한참은 늦은 것을.
“으아아…….”
텅 빈 집은 와중에 정말로 온풍기가 설치됐는지 뜨끈했다. 그게 제일 짜증 나는 점이었다. 사람 뒤통수쳐서 데려다 놓고 계약한 주제에 어떻게든 차유진을 여기에 두고자 한다는 의지가 엿보여서.
골머리 앓던 차유진은 그냥 비척비척 일어났다. 부엌으로 가 냉수 한 잔을 시원하게 들이켠 후엔 침착하게 숨을 골랐다. 자, 절망했니? 짜증 났니? 열 받았니? 그럼 이제 머리를 굴려보자. 고급스러운 글라스가 대리석 탁상에 부딪혔다. 내리깐 차유진의 눈이 침침한 빛에 선뜩하게 빛났다. 아무튼 간에 차유진은 항상 포식자였다. 이렇게 뒤통수 맞고 상황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태풍의 눈에 가까웠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뒤통수 안 치지. 거기까지 차근히 곱씹은 차유진은 조금 전 만났던 김래빈을 떠올렸다.
가이드가 맞기는 맞았다. 근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길드장이 설명하기를 김래빈에게 가이딩 능력이란 보통 헌터의 스킬과 다름없다고 했다. 몹시 드물고 이례적인 존재라며 떠벌렸다. 사실 점점 올라가는 차유진의 눈썹을 신경 쓰던 게 틀림없었지만. 본업은 헌터고 가끔 한가하거나 손이 부족할 때 가이드도 겸한댔다. 그러다가 우연찮게 받은 차유진의 파장과 97%라는 동조율을 보인 즉시 차유진의 전속 가이드가 되었다고. 길드장이 말을 맺을 때쯤 차유진은 짝다리를 짚고 팔짱을 낀 채 손가락을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화제의 김래빈은 훈련 도중 불려 나왔는지 땀범벅인 채로 눈만 끔뻑이고 있었고.
오케이. 거기까진 좋았다. 솔직히 말하겠다. 전속 가이드의 전직이 헌터든 마피아든 해적이든 차유진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가이딩만 제때 해주고 폭주할 염려를 줄여주고, 결론적으로 차유진이 죽지 않게 도와주기만 한다면야 뭐가 그리 중요할까. 차유진의 심기를 단박에 거스른 건 김래빈의 존재라기보단 길드장의 태도였다. 아, 그리고 금수의 시선으로 간파한 김래빈의 등급과 스킬들까지. 전부.
차유진은 항상 눈치가 빨랐다. 눈치를 못 보는 게 아니라 안 보는 거였다. S급쯤 되면 웬만한 사람의 심경 정도는 보고 싶지 않아도 눈에 탁탁 보였다. 기민한 감각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벼려진 탓이었다. 그리고 그 예리한 감각, 혹은 직감은 말하고 있었다. 저 길드장은 김래빈을 가이드로만 쓸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전속이라는 말이 붙기는 했어도 어디까지나 가이드에 국한되니까, 헌터 일은 헌터 일 나름대로 계속할 게 뻔했다. 차유진은 개인의 사생활을 침범하는 편이 아니었으므로 괜찮았다. 문제는 그 직후, 그러니까 차유진 전속 가이드 김래빈이 헌터로서 임무를 지속할 때 나타났다.
김래빈이 헌터 일을 하느라 자신에게 벌어진 돌발 상황에 대처가 늦는다면? 대한민국 여의도에 위치한 이놈의 길드는 지금 신용도가 바닥을 치고 있었다. 자신이 만에 하나 폭주라도 한다면 제꺽 김래빈을 불러야 할 텐데, 그때 김래빈이 던전 공략에라도 나가 있다면? 평소라면 어깨나 으쓱이고 넘겼을 테지만 여기에서만큼은 그 무게가 달랐다. 이 자식들이 이적할 때 내세운 거의 유일한 조건이 김래빈인 탓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차유진은 부엌 찬장에 머리를 들이박았다. 퍼킹 모런 차유진. 엄마가 어렸을 적부터 말씀하셨지 계약서 똑바로 읽으라고.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 있을 모친이 후회는 항상 늦다며 웃는 얼굴로 따봉 날리는 상상이 아득하게 펼쳐졌다. 그래서 차유진은 다시 머리를 박았다. 퍼킹 코리아……. 지금 당장 길드장한테 쳐들어가서 계약서 원본 내놓으라 협박하고 불살라버리면 돌아갈 수 있으려나. 거기까지 생각하고 한숨이나 푹 쉬었다. 돌아갈 수는 있을 것이다. 미국이 아니라 태어났던 곳으로. 그러니까 저승으로.
차유진은 또 부글거리는 속을 식히기 위해 찬물을 들이부었다. 그리고 손에 잡히는 젓가락을 아무거나 들어서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어딘가로 던졌다. 탕,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벽에 박힌 젓가락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동시에 공기가 조금씩 가벼워졌다. 힐끔 바라본 젓가락은 온풍기 스위치에 정확히 꽂혀 있었다. 더웠다. 이놈의 온풍기는 쓸데없이 성능이 좋았다.
고민 끝에 차유진은 노트북을 꺼냈다. 메신저를 켜고 익숙한 아이디를 입력했다. 여기가 저녁 아홉 시쯤 됐으니 너무 이르진 않을 터였다. 마우스로 연결 버튼을 누르자 짧은 신호가 가더니 액정에 익숙한 얼굴이 비쳤다. 눈그늘이 세 배가 된 케이트였다.
“[안녕하세요, 케이트.]”
-…….
“[고민이 있어서 연락했어요. 상담 좀 해줄 수 있죠?]”
-[나도 고민 중이에요. 서른여덟 번째 멱살 잡히는 기분을 어떻게 말해야 당신이 이해해줄지.]
“[그것참 유감이네요. 그나저나 말이에요.]”
유진은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었다. 지치다 못해 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케이트는 마지막 정신줄을 붙잡고 성의 있는 답변을 꼬박꼬박 내놓았다. 차유진이 사기당한 것 같다고 말하자 한숨을 내쉬었다는 뜻이었다. 가이드를 보여주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던 길드를 입에 올리자 눈썹을 쓱 올렸다. 마침내 차유진이 헌터와 가이드를 병행하겠다는 거나 다름없는 길드장의 발언을 그대로 읊을 때 케이트의 얼굴은 거의 시뻘겠다.
-[그러니까……. 명색이 길드장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는 거죠?]
“[난 틀린 말 안 했어요.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전달했다고요.]”
-[……기다려요. 네. 잠깐만 기다려요, 유진. 마리한테 전하겠어요.]
고대하던 말이 튀어나왔다. 마리는 미국 지부 길드 길드장의 직속 비서였다. 마리에게 들어가는 정보는 웬만해선 전부 길드장에게 닿았다. 이적하기는 했어도 전 길드와 연락을 주고받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 게다가 까놓고 말하면 먼저 뒤통수친 건 한국 지부 쪽이니까. 케이트가 바삐 키보드를 두드리는 동안 차유진은 그냥 노래나 흥얼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케이트가 다시 고개를 디밀었다. 화면에 가득 찬 눈동자는 조심스럽게 바다 너머 차유진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걱정이라면 걱정이었다. 내 새끼가 몸 성히 있는 거 맞나, 같은 느낌보다는 저 미친 새끼들이 이 시한폭탄에 불붙이진 않았나, 같은 느낌이 더 강하긴 한데. 아무튼. 열흘이 넘는 기간 동안 드높기만 한 언어 장벽과 따라붙는 묘한 시선에 이골이 났던 차유진은 그 걱정마저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런데 유진, 그 가이드는 어땠어요? 래빗이던가 하는 그 사람 말이에요.]
케이트가 가라앉은 눈으로 물었다. 말투는 영 느렸고 단어와 단어 사이에 숨이 잔뜩 섞인 질문이었다. 차유진은 케이트가 필요 이상으로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음을 단박에 눈치챘다. 그러나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뭐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 이를테면 여기에 CCTV나 도청기가 붙어 있음을 경계한다거나. 물론 그런 감시 기구는 전혀 없었다. 이곳에 발을 들인 첫날 차유진이 짐 정리를 핑계로 집안을 전부 갈아엎으며 붙어 있던 것들을 모두 폐기한 덕이었다.
그래서 차유진은 한층 편안한 심정으로 케이트의 질문을 곱씹었다. 사운드 클라우드에서 우연찮게 들었던 중독성 있는 비트가 입에서 자꾸만 맴돌았다. 대답 대신 노래나 흥얼거리는 차유진을 두고도 케이트는 재촉 한번 없었다. 케이트의 배려 아닌 배려 덕분에 마침내 차유진은 생각을 정리했다.
“[나쁘진 않아요. 파장도 제법 잘 맞는 것 같고요. 매치율 97%가 괜히 나온 수치는 아닌 것 같던데요.]”
-[정말 그게 전부예요?]
그건 질문이라기보단 추궁에 가까웠고, 추궁이라기보단 확신에 가까웠다. 차유진은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다가 씩 웃었다. 설마. 그게 전부였다면 이렇게까지 골머리 앓지는 않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음에 안 드는 길드장과 신뢰도 바닥을 치는 길드. 잔뜩 닳고 마모된 원 같은 길드를 살살 매만지다가 어느 순간 느껴진 따끔함에 손끝을 살피면 자그마한 상처가 나 있다. 김래빈의 첫인상은 딱 그랬다. 믿을 거 하나 없고 마음에 드는 구석도 전혀 없는 이 길드에서, 유일하게 신경 쓰이는 존재.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진 모르겠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가이드로서의 자질보단 헌터로서의 자질이 더욱 뛰어난 사람이에요. 게다가 눈치도 없는 것 같고. 가이드로서 가져야 할 덕목은 눈 씻고 봐도 없는 것 같아요.]”
-[……역시 신중하게 생각하라고 했잖아요, 유진. 마리에게 재촉 전화를 넣을까요?]
“[오, 괜찮아요. 그런데 정말, 음. 설명하기가 애매한 사람이라.]”
케이트가 얼굴을 찌푸렸다. 좋지 않은 연결에 글리치가 튀는 화면 속에서도 케이트의 심각한 얼굴만은 또렷하게 보였다. 차유진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기분 나쁜 주제는 이쯤 하면 될 것 같았다. 차유진은 능숙하게 노선을 틀었다. 정확히 말하면, 틀려고 했다. 때마침 초인종이 울리지 않았더라면 차유진은 케이트와 근래 열리는 던전 브레이크 관련한 이야기들도 시답잖은 농담이나 따먹고 있었을 터였다.
초인종은 짧고 굵게 한 번 울렸다. 노크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차유진은 소파 너머 고개를 빼꼼 들어 밖을 살폈다.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눈을 끔뻑이는데 초인종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도 고지식하게 딱 한 번이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실수로 찾아온 건 아닌 모양이었다. 차유진이 읏차, 하고 몸을 일으키는데 말이 없던 케이트가 입을 열었다.
-[유진, 건투를 빌게요. 최대한 이른 시일에 얼굴 맞댈 수 있으면 좋겠네요.]
길드장과 법무팀 바리바리 싸 들고 최대한 빨리 항의하겠다는 뜻이었다. 차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땡큐, 케이트. 고마웠어요. 손을 흔들고 소파를 훌쩍 넘었다. 노트북 화면은 맥없이 꺼졌다. 그때 세 번째 초인종이 울렸다. 딱 삼 초였다. 띠, 잉, 동.
“누구예요?”
차유진은 문밖을 내다보지도 않은 채 현관을 벌컥 열었다. 길드장의 잘난 비서 양반이거나 차유진 전담팀장이었더라면 속으로 욕이나 한 바가지 퍼부을 기세로.
“안녕하십니까! 연락 없이 불쑥 찾아온 점 사과드립니다. 혹여라도 무례하다 여기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근데 아니었다. 차유진은 자신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을 줄줄 내뱉는 남자를 보고 눈썹을 쑥 올렸다. 하? 얼빠진 소리가 잇새를 빠져나갔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김래빈이었다. 한 다섯 시간 전쯤에 처음 실물을 마주했던 가이드 겸 헌터 김래빈. 게다가 품에는 또 뭐를 잔뜩 들고 있었다. 종이봉투 안에서 먹음직스럽고 고소한 냄새가 났다. 차유진은 김래빈의 말은 전혀 듣지 않은 채 종이봉투만 빤히 내려다봤다. 그러고 보니 저녁을 좀 부실하게 먹었던가. 아닌가. 미디엄 레어 양고기 스테이크에 이런저런 곁요리면 객관적으로 봤을 때 부실하다는 축에도 속할 수 없었으나 차유진은 그냥 부실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맛은 있었는데 양은 적었어, 그거. 시답잖은 생각이나 한번 해주고.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Oh. 미안해요. 들어와요.”
용건은 조금 전 구구절절 랩 어딘가에 끼어 있었을 터였다. 유감스럽게도 차유진은 듣지 못했지만. 적당히 분위기 풀렸을 때 다시 물어보면 될 일이니 심각할 건 없었다. 차유진은 문간에서 비켜섰다. 김래빈은 제법 날렵한 몸놀림으로 틈을 파고들어 쏙 집안에 들어섰다. 문을 닫기 전 차유진은 가볍게 바깥을 훑었다. 작게 난 정원과 짧은 산책길은 새 소리 한 점 없이 고요했다.
문을 닫고 들어오니 김래빈은 소파 옆에 꼿꼿하게 서 있었다. 종이봉투는 어디에 뒀나 싶어 주위를 살피니 부엌 탁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차유진은 거실로 가는 대신 부엌으로 발을 옮겼다. 종이봉투를 뒤적이자 안에선 정체 모를 찬합이 나왔다. 뚜껑을 하나씩 열자 차곡차곡 담긴 한식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맛깔스러운 냄새를 풍겼다. 차유진은 눈앞에 놓인 반찬과 여전히 소파 옆에 선 김래빈을 번갈아 바라봤다. 고민은 짧고 행동은 빨랐다.
“먹을 거예요?”
“아니요. 차유진 씨 몫입니다.”
그럼 사양 않고. 차유진은 찬장에서 즉석밥을 꺼내 뜯었다. 전자레인지에 손바닥만 한 즉석밥 두 개를 넣고 시간을 맞췄다. 숟가락을 손가락 사이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곁눈질한 김래빈은 여전히 소파 옆에 꼿꼿이 서 있었다. 얼굴을 찡그린 채 험악한 인상으로 자신을 빤히 노려보면서.
“……소파 앉는 거예요. 몰라요?”
“압니다. 하지만 집주인이 먼저 앉으라고 권하지도 않았으니 멋대로 앉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차유진의 눈썹에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내려온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슬금슬금 올라가기 시작한 눈썹을 내버려 둔 채 김래빈은 꿋꿋이 말을 이었다. 요컨대 자신이 허락하지 않았으니 못 앉겠다, 이거였다. 진절머리 날 정도로 고지식한 사람. 차유진은 오렌지빛으로 돌아가는 전자레인지를 힐끔 바라보다가 대강 말했다. 앉아도 돼요, 그럼. 그러자 김래빈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마침내 멀대 같던 인영이 자리에 풀썩 앉았다.
“길드장님께서 제 위치를 사전에 알리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차유진 씨께서는 저를 단순한 가이드로 알고 계셨으며, 그 조건을 우선시하여 계약을 맺었다고요. 맞습니까?”
오. 김래빈이 자리에 앉자마자 내뱉은 말에 차유진은 자연스럽게 팔짱을 꼈다. 벽에 등을 비스듬히 기댄 채 김래빈의 뒤통수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잠시 말이 없던 김래빈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짓씹듯 되풀이했다. 맞습니까? 기어코 대답을 듣고자 하는 의지가 선명했다. 그래서 차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리고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지는 것 같으니 가벼운 농담처럼 덧붙이는 말. “이거 사기예요.”
차유진의 노력 아닌 노력에도 불구하고 김래빈은 말이 없었다. 분위기가 무겁든 가볍든 신경 안 쓰지만, 밥 먹을 땐 기왕이면 산뜻한 기분인 게 좋지 않나. 차유진은 손가락만 툭툭 두드리다가 전자레인지를 살폈다. 일 분 십사 초 남았다. 두 개를 한꺼번에 돌렸더니 시간을 좀 잡아먹었다. 그냥 하나 까먹는 와중에 다른 하나 돌릴 걸 그랬나. 가벼운 후회가 지나갔다. 그때까지 김래빈은 조용했다.
김래빈이 입을 연 건 전자레인지가 사십 초 남았음을 알릴 즈음이었다. 꼿꼿하게 든 고개로 뒤통수만 보이던 김래빈이 고개를 휙 돌렸다. 시커먼 삼백안이 어떤 의지로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날카로운 눈은 내가 아니라 김래빈이 가져야 하는 스킬 아닌가? 눈을 껌뻑이다가 멍하니 생각하는데 김래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순식간에 눈앞까지 척척 걸어왔다. 그리고 차유진이 기겁할 일을 했다.
김래빈은 차유진의 코앞에서 허리를 구십 도로 숙였다.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날 만큼 잽싸게.
“죄송합니다!”
“오?”
“길드장님께선 길드의 이득을 최우선시하시는 면모가 있으십니다. 변명이라고 생각하신다면 별수 없으나 이번 사건 역시 그러한 계산 아래에 이루어졌을 듯합니다. 하지만 차유진 씨가 말씀하셨듯 이는 명백히 사기 행각이니, 차유진 씨가 원하신다면 저는 차유진 씨의 미국 지부 복귀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Wait, wait. 기다려요. 잠깐 기다려!”
“예?”
“밥 다 됐어요.”
그리고 차유진은 고개 숙인 김래빈을 지나 전자레인지 문을 열었다. 뚜껑 딴 즉석밥에선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김이 모락모락 솟아올랐다. 김래빈이 멍청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예? 차유진은 그냥 어깨를 으쓱이며 즉석밥 하나와 숟가락을 김래빈에게 건네며 말했다.
“모든 건 식사 후에 해요.”
“……지금 저녁 아홉 시 오십사 분입니다. 식사하기엔 시간이 너무 늦은…….”
“Whate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