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원을 빌어보세요!
01.
유진은 눈을 번쩍 떴다. 어쩐지 몸이 가벼웠다! 늘어지게 하품을 내뱉고 몸을 일으키자 어쩐지 시야가 높아진 것 같았다. 음? 고개를 갸웃하곤 비척비척 발을 끌며 걸어갔다. 여긴 어디람. 나는 누구람. 졸음이 가시지 않은 눈 위로 따사로운 캘리포니아의 햇볕이 쏟아졌다.
주위를 둘러봤다. 저기 아래에 구겨지듯 떨어진 이불은, 글쎄, 제 것이 맞고. 자유분방하게 흩어진 베개 두 개, 바닥에 버려진 기다란 전신 배게 하나. 벽면엔 풋볼팀 포스터가 덕지덕지. 책상 위엔 컴퓨터 한 대와 마우스. 깜깜한 컴퓨터 화면에 제 얼굴이 비쳤다. 음, 오늘도 잘생긴 유진 이그나시오 차. 머리를 바꾸셨군요. 까치집 에디션이 참 잘 어울립니다.
왕! 반가운 울음과 함께 몸통 박치기 펼친 귀여운 래트리버 한 마리. 복슬복슬한 털에 파묻혔다가 쭈우욱 기지개를 켰다. 늘어지게 하품하는 와중 배를 긁적이며 걷다가 문득 전신 거울과 눈이 마주쳤다. 어라라. 제 얼굴이 반쯤 잘려나갔다. 이게 웬일이람. 거울이 나를 다 못 담다니.
“유진, 아침부터 뭐 해? 아침 안 먹어?”
고개를 불쑥 내밀어 눈을 끔뻑이는 저 여자애는 내 동생. 유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전신 거울을 노려봤다. 이상한데. 전신 거울은 항상 자신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비추었거늘 오늘따라 얼굴이 반이나 잘린다. 눈을 가늘게 뜨고 거울을 노려보자 여동생이 눈을 흘기며 말하길,
“왜 또 이상한 짓이야?”
“이상한 짓 아니야. 봐봐, 나 키가 좀 컸어? 육 피트 삼 인치는 넘었으려나.”
그러자 여동생이 눈을 끔뻑였다. 그리곤 코웃음 치듯 대꾸하는 것이다.
“육 피트 삼 인치 넘은 지가 언젠데 그걸 물어?”
오. 그 순간 유진은 깨달았다. 맞다, 내 키는 이제 육 피트 삼 인치야!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유진은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노래를 흥얼거렸다. 내일 만난 너를 오늘 내내 생각해……. 아무 노래나 틀었는데 이거 제법 옳은 선택이었나 보다. 유진은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우스꽝스럽게 춤까지 췄다. 음, 음, 육 피트 삼 인치가 되니 춤 선이 몹시도 볼 만하군.
미들턴 고등학교 정문은 오늘도 시끄러웠다. 한 사람 건너 한 사람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유진은 귀에 처박았던 이어폰을 뺐다. 음, 흠흠, 오늘 뭔가 좋은 일이 마구마구 일어날 것 같아. 캘리포니아의 느긋한 바람이 불어와 코끝을 살랑살랑 간질였다. 아침부터 널따란 필드를 뛰어다니는 건 하키부. 쟤네도 참 고생이 많아. 뭐 풋볼부만큼은 아니지만. 그나저나 하키부가 아침 운동 중이라면 오늘은 화요일이나 목요일이겠군. 자연스럽게 스마트폰을 들어 날짜를 확인했다. 20XX년 X월 XX일, 목요일.
캐비닛에 도착했을 무렵 패션처럼 매고 온 가방은 이미 어깨에서 흘러내려 달랑거리는 중이었다. 유진은 익숙하게 가방을 내려놓고 캐비닛을 열었다. 열자마자 가방을 대충 밀어 넣다가 미간을 팍 찡그렸다. 그리고 옆에 있던 제임스에게 입술을 삐죽이며 타박한다. 헤이, 제임스. 내 캐비닛에 땀투성이 체육복 넣지 말랬잖아! 그러자 우글대던 남정네들이 와락 웃음을 터트렸다.
“유진, 제임스의 땀투성이 체육복이 아니어도 네 캐비닛은 이미 엉망진창이야. 그걸 왜 모르는 거야?”
“필립, 입 다물지 않으면 제임스의 체육복은 네 캐비닛에 들어가 있을 거야. 기대해도 좋아.”
“이봐! 내 체육복이 대체 어디까지 흘러 들어가는 거야? 이러다가 미스터 심슨의 우체통에 들어가겠어!”
제임스의 넉살맞은 농담에 또 와르르 터지는 웃음보. 유진은 낄낄거리며 캐비닛 문을 당겼다. 너희 첫 교시 뭐더라? 대수롭지 않게 묻자 온갖 곳에서 대답이 튀어나왔다. 체육, 수학, 역사, 음악, 그리고 등등등. 유진은 캐비닛 문을 닫기 직전 역사 교과서를 꺼냈다. 사백 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양장본을 장난스럽게 휘두르며 농담을 건네는 것도 잊지 않은 채.
문을 닫으려는 순간 무심코 거울을 봤다. 캐비닛 문 안쪽에 달아놓은 거울이 반짝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깨달았다. 눈이 마주쳤다. 어딘가 탁하고 피로에 찌든, 그러나 반짝반짝 빛나는 보라색 눈.
“어라.”
먼저 고개를 돌린 건 상대였다. 귀에 잔뜩 뚫은 피어싱이 움직임을 따라 달랑거렸다. 종종걸음으로 걸어 사라지는 그 애의 뒷모습을 빤히 보던 유진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제임스. 검은 머리에 피어싱 많은 동양인 남자애 알아?”
자칭 타칭 통칭 마당발 제임스가 갑작스러운 질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음, 글쎄. 알아볼까? 끔뻑. 유진은 눈을 감았다 떴다. 그 애는 교실 하나로 쏙 들어가 사라졌다. 저긴 또 무슨 과목이람. 머리를 잠시 굴리던 유진은 씨익 웃었다. 응, 뭐. 그렇게 해주면 고맙겠어.
삼 교시 직후 캐비닛 앞에서 유진은 제임스와 재회했다.
“음, 일단 네가 언급했던 요소들은 터무니없이 광범위했다는 점을 미리 말해두겠어.”
“오, 저런. 제임스. 사람 찾는 실력에 벌써 먼지가 쌓인 거야?”
“그게 아니잖아! 유진, 내가 아니었더라면 너는 평생 검은 머리 피어싱 많은 동양인 남자애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녀야 했을걸.”
제임스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유진은 대답 대신 그냥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자신감이 대단한걸. 그래서 찾았어? 실없는 대화는 끊어내고 곧장 묻자 제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아쉽다는 표정으로 입맛을 다녔지만.
“지난주에 편입한 애래. 이름이 뭐였더라. 김라빈? 리빈? 동양인들 이름은 어려워서 한 번에 못 외우겠다니까.”
“흐음.”
“아, 물론 유진은 예외지만.”
뭐래. 유진은 그냥 빙긋 웃었다. 하여간 친구다, 친구다 해도 가끔 전형적인 기득권 백인의 인종차별인지도 모르는 인종차별 발언을 내뱉었다. 처음 몇 번은 집어서 말해준 것도 같은데 이젠 그냥 포기했다. 넌더리가 난 것도 있고, 굳이 꼬집어서 정정해줄 필요도 없어진 것 같고.
유진은 너 이 새끼 차별주의자냐 하며 제임스의 면상에 주먹을 꽂는 대신 속으로 생각했다. 김라빈? 김리빈? 어째 이름이 좀 익숙하다. 그런데 제임스가 내뱉은 발음보단 조금 더 귀여웠던 것 같은데. 아닌가? 지난주에 편입해 활발하게 활동했더라면 유진의 귀에도 검은 머리 피어싱 많은 동양인 남자애에 대한 정보가 들어왔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는 걸 본다면 상당한 너드일지도. 유진은 캐비닛에서 분철한 수학 교제를 꺼내고 문을 닫으며 말했다.
“그게 끝?”
“오, 그럴 리가. 이 몸은 제임스 밀이라고, 유진. 미들턴 고등학교의 대표적인 마당발!”
유진은 성의 없이 반응 한 번 뱉곤 발걸음을 뗐다. 제임스는 졸졸 따라오며 열성을 다해 말했다. 적당히 쓸모 있는 정보와 쓸모없는 정보를 솎아낸 유진이 교실 앞에 다다랐을 무렵, 유진은 김라빈인지 리빈인지 모를 남자애가 실은 한국에서 왔으며 편입하자마자 밴드부에게 단단히 찍혔다는 사실을 더불어 소소한 정보 몇 개를 알게 됐다. 아, 그리고 홈-클래스가 미스터 우드라는 것도.
제임스는 눈을 반짝이며 유진을 바라봤다. 유진은 그냥 환하게 웃었다. 나한테 할 말 있지 않아? 제임스의 물음에 글쎄, 하며 말꼬리를 늘어트리던 유진의 귓가에 날카로운 종소리가 울렸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었다. 하는 수 없이 어깨를 잔뜩 늘어트리고 터덜터덜 걷는 제임스를 향해 유진이 외쳤다. 바이바이, 이따가 봐!
교실 문을 닫았다. 떠들 아이들은 제임스 말고도 수두룩했다. 아이들은 유진을 기다렸다는 듯 반겼다.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녹아드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유진은 미들턴 고등학교의 최고 인기쟁이 쿼터백이었다! 지난 학년에도, 지지난 학년에도 당당히 프롬킹을 차지한 명실상부 최고의 핫가이!
“오.”
그런 유진과 또 눈이 마주쳤다. 김라빈인지 리빈인지 하는 동양인 남자애.
그 남자애는 가장 구석진 자리에서 노트를 펴놓고 있었다. 창가 자리였던 탓에 쏟아지는 햇빛과 오히려 대조되어 더더욱 음울해 보였다. 와, 가까이서 보니 인상이 퍽 사나웠다. 매섭고 부리부리한 눈이며 잔뜩 뚫어놓은 피어싱까지. 밴드부한테 찍혔다더니 뭐 잘못이라도 했나.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유진은 빠르게 신경을 껐다. 동아리한테 찍히든 말든 사실 유진의 알 바는 아니었으니까.
종이 치고 오 분이 지난 후에야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왔다. 어서 자리에 앉으라며 심드렁하게 말씀하시는 선생에게 아이들이 야유했다. 우우우, 지각쟁이 제니! 유진은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미스 제니는 아이들에게 성을 내는 대신 너희가 진도가 가장 느리다는 말로 응수했다. 가벼운 웃음기 담긴 농담임을 알아들은 아이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말이다.
미스 제니는 빠르게 출석을 불렀다. 케이티, 케이트, 켈리, 그리고 어쩌고저쩌고. 유진 차, 하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유진은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손을 들었다. 미들턴 고등학교 최고의 프롬킹이 오늘따라 흥미가 없어 보이는구나? 미스 제니의 장난스러운 농담엔 입술을 삐죽이며 대꾸했다. 아 글쎄, 오는 길에 루트와 한 판 하고 왔더니 영 흥미가 안 생기네요. 아이들이 또 와락 웃었다. 거의 조건 반사 수준의 반응이었다.
교제를 팔랑팔랑 넘기던 유진은 또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또 눈이 마주쳤다. 말랑하게 빛나는 보라색 눈동자. 유진이 눈을 끔뻑였다. 상대도 눈을 깜빡였다. 험악한 인상에 어울리지 않게 왼쪽 뺨 부근엔 점이 쿡 찍혀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시선이 빨려 들어갈 것처럼 일렁이다가,
“래빈 김.”
“네.”
이번에도 먼저 눈을 돌린 건 상대였다.
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갸웃했다. 응? 응? 이거 뭐지? 방금 되게 이상한 장면 지나가지 않았나? 영화로 따지자면 유진이 혐오하는 진부한 B급 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 같지 않았나? 당황스러움에 눈을 연신 끔뻑였으나 상대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름이 김래빈이었구나. 쭉 내민 입술 위에 펜을 하나 올려놓으며 유진은 생각했다. 음, 역시 잘 어울렸다. 제임스가 서툴게 발음했던 라빈이니 리빈이라는 이름보다는 역시 래빈인 편이 나았다. 래빗 닮았잖아. 그렇지, 김래빈은 좀 토끼 같지. 문득 생각했다가 엑, 하고 실망했다. 다시 돌아본 김래빈은 토끼는커녕 토끼 사냥꾼이래도 믿을 몰골이었다. 쟤의 대체 어디가 그렇게 귀엽다는 거람. 자기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꼴이었다.
수학 시간은 순식간에 끝났다. 중간중간 한눈팔았다며 미스 제니에게 한 소리 듣기는 했으나 정신 차려 보니 종이 치고 있었다. 느긋하게 기지개를 켜고 내려다본 교제는 깨끗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유진은 자신이 김래빈을 구경하는 데에 수학 시간을 통째로 낭비했음을 깨달았다. 웁스! 풋볼 명문에 들어가려면 성적도 좋아야 하는데. 텅 빈 교제를 내려다보던 유진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뭐 수업 하나쯤이야 괜찮지. 정 따라잡기 어렵거든 친구에게 부탁하면 됐다. 있지, 나 노트 좀 보여줄래, 하며 활짝 웃으면 자진해서 노트며 필기를 까놓을 친구가 널렸다. 조금 과장해서 전교생 중 아무나 붙잡고 부탁해도 빌려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시간은 또 순식간에 흘렀다. 유진은 그동안 수학 시간의 실수를 만회하듯 심화 역사와 스페인어와 음악과 미술 과목을 차례차례 해치웠다. 체육 때는 완전히 날아다녔다. 같이 체육을 듣는 지미는 곡예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이는 유진에게 손뼉을 짝짝 치며 저거 완전 미친놈이라며 웃음을 터트렸다. 유진은 그냥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렸다.
점심시간은 생각보다 이르게 찾아왔다. 하루의 흐름이 거의 배는 빠르게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도시락 대신 급식으로 나온 페페로니 피자를 순식간에 집어삼키고 셀러리를 질겅질겅 씹는데 문득 카페테리아 입구에서 소란이 일었다. 유진은 물론 관심이 없었다. 기껏해야 쌈판 좀 났겠지 싶었다. 그리고 유진에겐 남의 싸움 구경하는 취미는 없었다. 싸움 그런 거 필드에서 몸통 박치기하며 다니는 유진에겐 별 흥미가 돋지 않았다.
그런데 기웃거리던 앨런이 냅다 고개를 디밀며 말하는 것이다. 헤이, 대박이야. 웬 동양인 남자애랑 에밀리랑 싸움 붙었어! 에밀리는 밴드부 부장이자 보컬이었다. 예쁘장한 외모로 인기가 제법 많았는데 평소 성격이 상당히 온건했다. 유진은 질겅거리던 셀러리를 삼키고 앨런을 바라봤다. 밴드부, 동양인 남자애. 어쩐지 좀 익숙한 단어 조합인데. 오, 설마.
유진이 몸을 일으키자 주위 애들이 우르르 일어났다. 아마 다들 궁금해서 엉덩이 들썩이고 있었을 것이다. 덩치 큰 남자애들이 인파에 합류하자 저절로 자리가 났다. 유진은 눈을 끔뻑이며 에밀리가 날카롭게 외치는 말에 귀 기울였다. 확실히 밴드부 보컬이라 그런지 복식 호흡으로 내지르는 고함이 쩌렁쩌렁하군.
“어째서야! 대체 왜 거절하는 건데!”
처절한 질문에 유진은 눈을 끔뻑이며 앨런에게 물을 뻔했다. 그러니까, 에밀리는 저 남자애를 좋아하는 거야?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질문은 간신히 삼켰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에밀리의 이상형과 딴판이었기 때문이었다. 피로가 덕지덕지 눌어붙은 사나운 인상, 귀에 화려하게 꽂힌 피어싱, 치켜뜬 눈은 에밀리를 단단히 노려보는 것 같기도 하고…….
오우, 역시나. 수학 시간을 통째로 말아먹게 만든 당사자 김래빈이었다.
입술을 잔뜩 사리 문 래빈은 품에 뭔가를 꾹 쥐고 있었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손가락 마디마디가 새하얗게 보일 지경이었다. 에밀리는 이제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혔다. 주위 애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왜 싸워? 몰라. 에밀리가 고백이라도 했어? 설마. 근데 하는 말 들어보면 정말 고백했다가 차인 느낌인데. 그러니까 말이야. 그런데 쟨 누구야? 나도 몰라. 부산스럽게 뒤섞이고 흩어지는 대화들을 쭉 듣던 유진은 간단하게 정의했다. 개처럼 싸우는데 왜 싸우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다 이거였다.
그나저나 래빈의 얼굴은 정말 창백했다. 에밀리에게 화가 단단히 난 것처럼 그렇잖아도 험악한 인상이 잔뜩 찌푸려졌다. 에밀리는 한 번 꽂힌 것엔 브레이크 고장 난 레이싱카처럼 냅다 돌진하는데, 그런 성향과 래빈은 잘 안 맞는 모양이었다. 에밀리가 열 마디 할 때 래빈은 더듬더듬 한 마디 내뱉었다. 서툴고 느린 영어는 생각보다 정중했기 때문에 유진은 좀 놀랐지만.
“너랑 나라면 충분히 가능하다니까? 내가 널 프롬킹으로 만들어줄 수 있다고!”
“프롬킹?”
아무 생각 없이 되풀이한 말에 순식간에 이목이 몰렸다. 이젠 에밀리의 얼굴마저 새하얗게 질렸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힌 뒤에야 유진은 아, 하고 깨달았다. 그러니까 지금 이거 약간 그런 거야? 프롬킹을 핑계로 래빈을 꼬시려는 에밀리와 싸움을 구경하다가 그것만은 양보 못 한다며 치고 나온 전직 프롬킹? 우와, 완전 너디해. 유진의 표정이 급속도로 질렸다. 하여간 관심도 없는 싸움엔 끼는 게 아니었다.
“유, 유진. 내 말은 그런 게 아니라…….”
아아, 변명하지 마. 변명하니까 더 이상해지잖아!
유진은 속으로 경악하면서도 그냥 웃었다. 에이, 뭘 신경 쓰고 그래. 프롬킹은 매년 바뀌니까, 음, 래빈도 얼마든지 될 가능성이 있지. 안 그래? 자연스럽게 호응을 유도하며 래빈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쳤다. 보라색 눈 위를 덮은 뿔테 안경이 카페테리아 형광등에 빛났다.
래빈은 대답 대신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다. 아무래도 대답할 마음은 추호도 없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고개 기울이니까 좀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별 시답잖은 생각을 했다가 잽싸게 옆으로 치웠다. 한 번 개입한 이상 결국 끝까지 책임져야 했다.
“그런데 에밀리. 명실상부 최고의 밴드부 보컬이 어째서 래빈과 사랑과 전쟁을 찍게 됐는지 연유를 물어봐도 될까?”
“오, 유진. 농담하지 마. 내가 래빈과 사랑과 전쟁을 왜 찍니?”
“하는 말은 꼭 네가 래빈에게 마음을 전했다가 장렬히 거절당한 것만 같았는데! 아니었단 말이야?”
넉살 좋게 웃어주자 에밀리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우글우글 모인 애들 사이에서 웃지 않는 건 래빈밖에 없었다. 그냥 얼굴에 그림자만 가득 띄운 채 눈살만 찌푸려대고 있었다. 음,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도 싫다는 건가? 하긴 래빈은 사회성이 좋은 부류처럼 보이진 않았으니까. 유진은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다가 에밀리의 말에 반쯤 자동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부탁 하나 했을 뿐이야. 그런데 원, 제대로 듣지도 않고 단칼에 거절하지 뭐니. 그래서 좀 구질구질하게 매달려봤어.”
“세상에. 다름 아닌 에밀리의 부탁을 단숨에 거절하다니. 래빈은 시답잖게 마시는 차조차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는 거 아니야?”
또 웃음이 와락 터졌다. 에밀리는 한결 편해진 얼굴로 키득거렸다. 래빈은 또 눈을 찌푸렸다. 이번엔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별건 아니고, 밴드부에 스카우트하려고 했지.”
물론 웃음 어린 목소리로 내뱉은 에밀리의 폭탄 발언에 좌중은 단숨에 고요해졌지만.
미들턴 고등학교의 밴드부가 어떤 존재인가! 유진마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새 학기가 시작된 첫 일주일에만 엄선된 부원을 고르고 골라 프로처럼 공연하는 것이 바로 미들턴 고등학교의 밴드부였다. 스카우트라니 듣도 보도 못했다. 이번엔 모두의 이목이 래빈에게 쏟아졌다. 유진의 시선도 래빈에게 향했다. 그러니까, 저 음침한 너드 남자애한테 밴드부 부장인 에밀리가 직접 나서서 거듭 권유할 정도의 재능이 있다는 뜻이지? 찍혔다는 말이 이런 뜻이었나? 뒤통수만 긁적이는데 에밀 리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런데 어쩜, 물을 때마다 퇴짜를 놓는 거야. 그것도 아주 단호하게! 이 에밀리 미들스턴, 살면서 이렇게 냉정하게 거절당하는 건 처음이었어.”
이제 상황이 제법 재밌게 돌아간다. 유진은 말을 더 얹는 대신 시선을 돌려서 래빈을 바라봤다. 그렇다는데, 하고 입을 열자 창백한 표정이 한층 하얗게 질렸다. 뒤에서 앨런이 나직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와, 사람 하나 칠 기센데. 유진도 그럭저럭 동의했다. 뭐, 그래도 호리호리한 몸을 봐서 힘 싸움에서 질 것 같지는 않으니 걱정이 크진 않았지만.
래빈은 한참 동안 입을 우물거렸다. 그동안 에밀리와 유진은 신나게 떠들어댔다. 우글우글 몰려 있던 아이들은 흩어질 법도 한데 심심한 점심시간에 흥미가 동했는지 움직일 생각을 않았다. 근처에 어슬렁거리는 선생님들은 주먹다짐이 일어나지 않는 한 개입하지 않을 것 같다. 좌불안석인 건 래빈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오! 마침내 래빈이 입을 연 건 유진이 대화에 끼어든 지 꼬박 오 분이 넘고서였다.
“그래서, 래빈. 다시 한번 생각해봐. 밴드부에 들어올 생각 정말 없어?”
에밀리가 대화 중 열세 번째로 권유했을 때, 마침내 래빈이 입을 연 것이다!
“……음, 권유는 고맙습니다. 하지만 역시, 부 활동에 진심이 되면 학업에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거절하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열세 번째로 거절당한 에밀리는 그냥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울상을 지었다. 그러다가 소식을 듣고 찾아온 밴드부 베이스 담당 조에게 질질 끌려나갔다.
에밀리의 절규 아닌 절규를 들으며 유진은 생각했다. 오, 다시 생각해도 래빈의 영어는 몹시 격식 있고 소위 말하는 교과서 같았다. 슬랭이 조금도 섞이지 않고 엄격하다고 느껴질 만큼 딱딱하게 어법을 지켰다. 얼굴이랑 완전 딴판이네.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던 유진이 그냥 뒤돌아 자리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잠깐만, 차유진!]”
낯선 언어가 들렸다. 그런데 다리가 멈췄다. 처음 듣는 언어의 발음이 제 이름과 비슷해서인지도 몰랐다. 게다가 어딘가 익숙하기까지 한 저 세 어절. 유진은 속으로 낯선 언어를 발음하며 고개를 돌렸다. 래빈이었다.
“나 말이야?”
“아.”
“음,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불러도 상관은 없는데. 날 부를 거라면 그냥 유진이라고 불러. 못 알아들을지도 모르니까.”
멀거니 서 있던 래빈이 고개를 푹 수그렸다. 유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틀린 말도 아니니까. 유진은 분명 한국계였으나 한국어를 배운 적은 없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언어는 스페인어와 영어지 한국어가 아니었다. 아무리 발음이 비슷하대도 혹여 못 알아들 가능성도 있으니까 그냥 말했을 뿐인데.
래빈이 고개를 들었을 때 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렸다. 감추지 못한 섭섭함이 래빈의 얼굴에 덕지덕지 붙어 있어서였다.
래빈은 유진을 노려보다시피 빤히 바라보다가 대답 없이 등을 돌렸다. 그리고 흩어지기 시작한 인파를 뚫고 사라졌다.
“쟤 왜 저래?”
“좀 특이한 애네. 같은 한국계라고 내적 친밀감이라도 쌓았던 건가?”
“오, 제발. 그런 거라면 너무 웃기잖아.”
누군가가 키득거렸다. 유진은 사라진 래빈의 등을 가만히 좇다가 시선을 돌렸다. 어쩐지 속이 메슥거렸다.
유진은 꿈을 꿨다. 꿈속에서 그는 별이었다! 온통 반짝반짝 빛나고 사람들의 환호를 받았다. 유진 이그나시오 차라는 이름을 조금 과장해서 전 세계에 알렸다. 사람과 사랑이 가득 찬 삶이었고 부족한 건 없었다. 아마도?
유진이 눈을 번쩍 떴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잠결에 흘린 침을 벅벅 닦다가 유진은 눈을 찌푸렸다. 오, 육 피트라니. 꿈속의 자신은 키가 육 피트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쿼터백도 포기했겠지? 아무래도 쿼터백과 별을 동시에 하는 건 힘드니까. 하지만 육 피트인 자신도 그럭저럭 볼 만한 것 같았다. 미들턴 고등학교에서 쿼터백을 하는 것보다 재밌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확답을 내릴 수는 없겠지만.
유진은 늘어지게 하품했다. 오늘은 일요일이었다. 집이 조용했다. 시간을 보니 오전 아홉 시를 반이나 넘겼다. 그렇다면 조용한 집이 이해가 갔다. 다들 나갔겠지. 누나와 형은 휴일에 집에만 있는 것을 죽어도 이해 못 하는 사람들이었고, 나머지는 아마 할머니 따라 교회에 갔을 테니까. 아무리 그래도 깨워주지도 않는담. 잠깐 입술을 삐죽이던 유진은 그냥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긴, 방임주의인 엄마가 날 깨우는 게 더 이상하긴 하지, 하면서.
배를 벅벅 긁으며 일 층으로 내려왔다. 유진의 사랑스러운 금덩이들은 제각기 자리에서 뜨끈한 캘리포니아의 아침 햇살을 만끽하고 있었다. 유진의 발소리에 꼬리를 붕붕 흔들면서도 다가오진 않았다. 저 구석에 처박힌 친구는 늘어지게 하품까지 했다. 오, 부럽군. 나도 아침만 먹고 바다에 갈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유진은 부엌으로 향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침 식사가 없었다!
설거지까지 완벽하게 끝낸 식기들을 바라보며 유진은 절망했다. 어째서! 나를! 깨우지 않았던 거야! 환청처럼 엄마의 단호하면서도 짓궂은 목소리가 들렸다. 유진, 고등학생이 되었는데도 늦잠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을 셈이니? 머리를 화려한 붉은색으로 염색한 누나가 따봉을 날리는 환각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 배고파. 뱃가죽이 등짝에 달라붙은 기분이다. 힘차게 냉장고를 열었건만 유진을 반긴 건 반쯤 빈 오렌지주스 한 병과 덩그러니 놓인 달걀 두 알뿐이었다. 그리고 유진은 또다시 깨달았다. 어젯밤 엄마와 아빠와 할머니가 냉장고를 비우자며 작정하고 판을 벌여 파티를 열었다는 사실을. 그러니 냉장고에 뭐가 있을 리 없지!
유감스럽게도 유진의 허기는 달걀 두 알로 해결될 수준이 아니었다. 유진은 냉장고를 우울하게 닫고 비틀비틀 일어났다. 나 돈이 얼마나 있더라. 아침맞이 외식인가. 아빠는 외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지만, 뭐, 먹을 게 없다고 우기면 한 번쯤은 너그럽게 봐주실 것이다. 게다가 우기는 것도 아니다. 진짜 냉장고 텅텅 비었으면서 점심까지 굶으라니, 그건 정말 가혹한 처사였다.
유진은 빠르게 이 층으로 올라가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지갑과 스마트폰을 챙기고 실외용 슬리퍼로 갈아신었다. 굳은 몸을 가볍게 스트레칭하는 유진의 머릿속엔 주위에서 아침을 때울 수 있는 맛집 리스트가 주르륵 출력되고 있었다.
햄버거? 노우. 아침부터 너무 기름져. 그럼 타코벨? 나쁘진 않지만 일단은 보류. 간단하게 카페나 갈까? 근데 그럼 배가 안 차는데. 음, 음, 음. 어디가 좋을까.
한참을 고민하던 유진은 그냥 타코벨에 들어갔다. 별수 없었다. 갑작스럽게 발생한 아침 사태를 고려하지 않은 탓에 유진은 돈이 없었다. 그냥 적당히 먹고 오는 길에 바닷가 카페에 들르면 될 것이다. 대충 문을 열고 들어가 적당한 메뉴를 시켰다. 유진이 타코 두 종류와 감자튀김과 밀크셰이크를 전부 해치우는 데에는 십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배를 채운 유진은 느긋하게 길을 걸었다. 바닷가 카페는 타코벨에서 십 분 거리에 있었다. 형이랑 누나는 아마 각자 떨어져서 친구들끼리 서핑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모래사장에서 눈만 잘 굴리면 서로에게 은근슬쩍 엿을 날리는 그들을 볼 수 있을지 몰랐다. 유진은 킥킥 웃으며 모퉁이를 돌았다. 기분이 좋았다. 날씨도 좋았다! 하긴 샌디에이고 날씨가 항상 좋지만.
“어서 오세요. 유진, 오늘도 왔네?”
“음, 그렇죠. 오늘은 서핑 대신 구경하러 왔어요.”
“평소에 먹던 것 그대로 줄까?”
“음…… 좋아요. 부탁할게요, 제이미.”
“맡겨만 줘.”
이젠 얼굴에 이름까지 튼 카페 사장 제이미가 방긋 웃었다. 유진은 조금 후 나올 딸기 셰이크와 오렌지 푸딩 두 개를 기다리며 창밖을 구경했다. 한쪽 벽면을 떼고 접이식 통창을 단 제이미의 가게에선 백사장이 몹시 잘 보였다.
그때 유진은 보았다. 익숙한 머리통을.
백사장 끄트머리에 앉아서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는 저 작은 머리통! 빛을 받아 번쩍이는 피어싱들! 몸을 잔뜩 쭈그린 채였으나 유진은 확실했다. 저건 래빈이었다. 래빈이 아닐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유진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 래빈에게 척척 걸어가고 있었다. 거리가 좁혀졌을 때, 그래서 저기 혼자 궁상맞게 앉은 사람이 래빈임을 더더욱이 확신했을 때 문득 유진은 궁금해졌다. 왜지? 자신은 어째서 자리를 박차고 나섰을까? 유진이 사람을 대놓고 가리며 사귀는 편은 아니지만 래빈과는, 글쎄, 결코 친하다고 말할 순 없는데. 우연찮게 눈 몇 번 마주치고 대화 몇 번 나눈 것 가지고 친하다고 볼 수는 없지 않나.
그러면서도 다리는 착실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저벅저벅 걸어가 말없이 래빈의 곁자리에 털썩 주저앉자 앉아있던 래빈이 화들짝 놀라는 게 느껴졌다. 유진은 바다만 빤히 바라보다가 인사나 할 겸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놀랐다.
“……너 울어?”
“아니!”
래빈이 울고 있었다. 와우.
래빈은 황급히 눈을 문질렀으나 벌겋게 변한 눈두덩이가 퍽 쓰려 보였다. 유진이 절로 눈을 찌푸렸다. 날도 좋고 기분도 좋은 날 캘리포니아 바닷가를 보며 혼자 궁상맞게 질질 짜는 남자애라니. 래빈이 미끄러진 안경을 올려 쓰는 동안 유진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 진짜 이런 너드 옆에 왜 앉은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유진은 혼자 울어대는 래빈을 매몰차게 무시하고 도로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먼저 곁에 앉은 건 자신인데. 그냥 떠났다간 상대가 무안해할 게 뻔했고, 해변가에는 눈이 많았고, 괜히 이상한 소문이 났다간 귀찮고. 이런저런 걸 따져도 결국 그냥 가긴 또 싫어서.
유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래빈의 눈치를 힐끗 보곤 입을 어물거리며 물었다.
“왜 울어?”
“울지 않아. 우는 게 아닙니다.”
“거짓말. 누가 봐도…….”
“안 운다니까.”
킁, 하고 코를 씰룩거린 래빈이 시선을 돌렸다.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며 그가 웅얼거렸다.
“그냥 볕이 강해서 그래. ……내가 살던 곳에선 이렇게까지 햇볕이 강하지 않아서. 그래서 눈이 아팠어.”
그 말을 듣자마자 유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생각했다. 흠, 향수인가. 하긴 유학생들의 유구한 문제점이었다. 본국과 가족의 품을 떠나 타국에서 산다는 것이 참 힘든 일이긴 하지. 유진은 어쭙잖은 위로 대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종종걸음으로 카페로 돌아갔다. 주문했던 딸기 셰이크와 오렌지 젤리 두 컵을 들고 돌아왔을 때 래빈은 또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자. 맛있어.” 유진은 자신이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그래도 그냥 그렇게 했다. 출렁거리는 오렌지 젤리를 가만히 보던 래빈이 유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벌건 눈두덩이가 퍽 아파 보였다. “이상한 거 아냐. 음, 가루 같은 것도 안 들었어. 난 그런 거 안 해.”
“알아.”
뜻밖에도 래빈은 단조롭게 중얼거리며 컵을 받아들였다. 그리곤 익숙하게 젤리를 입안에 털어 넣고 우물대기 시작했다. 뺨이 가득 부풀어 올랐다. 유진은 순식간에 사라진 오렌지 젤리 한 컵을 바라보다가 래빈을 바라봤다. 안다니, 뭘. 유진과 래빈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땐 생판 남이나 다름없는데.
“[너는 진짜 바보야.]”
“으응?”
낯선 발음으로 중얼거린 래빈이 벌떡 일어난 건 직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오렌지 젤리를 꿀떡 넘기고 무어라 중얼거린 래빈이 인사도 없이 휑하게 떠난 것이다. 졸지에 오렌지 젤리 하나를 뺏기고 덩그러니 남겨진 유진은 제 손에 남은 딸기 셰이크와 나머지 젤리 하나를 들고 바보처럼 되물었다. 응? 갔어? 간 거야? 아무리 중얼거려도 멀어지는 래빈은 돌아오기는커녕 멈출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유진은 그날 밤 한국어 사전에 코를 박은 채 지냈다. 래빈이 마지막에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참을 사전을 뒤적이는 것으로 모자라 인터넷의 힘까지 빌린 유진은 꼭두새벽이 되어서야 단어 조합을 문장으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Babo……. Fool? 이거 진짜야?”
물론 졸지에 욕까지 얻어먹었음을 깨달은 유진은 그냥 헛웃음만 짓고 말았지만.
다음 날 유진은 냅다 래빈부터 찾았다. 내가 우는 사람 달래주고 오렌지 젤리까지 줬는데 냅다 욕부터 하다니. 생긴 대로 놀지 않는 놈이라는 첫인상 위에 빨간 줄을 죽죽 긋고 생긴 대로 노는 놈이라고 고친 유진은 입술을 연신 비죽였다. 평소라면 깔끔하게 잊고 넘어갔을 테지만 왠지 자꾸 거슬렸다. 너드랑 대화 좀 했더니 나도 너디해진 건가? 불현듯 든 생각에 으, 몸을 부르르 떠는 것도 덤.
래빈은 죽도록 보이지 않다가 점심시간 무렵 필드 끄트머리에서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도서관 구석에 처박혀서 책이나 읽을 것 같은 주제에 필드를 기웃대는 모습은 퍽 신기할 지경이었다. 때마침 몸을 풀고 있던 유진은 래빈을 발견하자마자 냅다 전방을 향해 사자후를 내질렀다. 래비이이이이인! 그리고 뛰었다. 기웃거리던 래빈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을 보며 와, 진짜 바보 같다, 생각하면서.
연습 경기 준비하던 주장 쿼터백이 냅다 탈주하자 모두의 이목이 쏠리는 것은 당연했다. 유진은 래빈을 향해 미친 듯이 뛰었고 유진에게 주목하던 시선은 천천히 래빈에게 향했다. 래빈은 정확히 삼 초 얼었다가 반대편으로 후다닥 뛰기 시작했다. 모범생 주제에 몸은 또 날렵했다. 래비이이인! 거기 서어어어어! 따라오지 마…… 마…… 마…… 마……. 우렁찬 목소리 두 개가 충돌하더니 흩어졌다. 느지막하게 나타난 코치는 필드를 가로지르는 유진을 보더니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음, 역시 내 쿼터백. 달리기 솜씨가 아주 훌륭하군. 그러다가 유진이 몸을 날려 래빈을 덮치곤 데굴데굴 구를 무렵엔 아주 박수를 쳤다. 좋아! 아주 좋아! 완벽한 태클이야! 백 점짜리 태클이라고!
그러거나 말거나 유진은 버둥거리는 래빈을 붙잡기 바빴다. 호리호리해 보여서는 생각보다 힘이 셌다. 허옇게 질린 채로 식겁한 표정을 지은 래빈의 팔다리를 단단히 고정한 채로 유진은 냅다 물었다.
“왜 도망가?”
“[왜 쫓아오는데!]”
“으응? 영어로 하지 않으면 몰라.”
래빈은 제풀에 지쳤는지 숨만 헥헥 내쉬다가 도끼눈을 뜨고 유진을 바라봤다. 날카로운 시선이 닿았다. 유진은 순간 자기 꼴을 자각하곤 정신이 아득해졌다. 와, 나 얘랑 있으면 진짜 바보 되나 봐. 뒤에서 손뼉 치며 좋아하는 코치님보단 실컷 놀려댈 친구들을 생각하던 유진이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래빈도 뒤따라 엉거주춤 일어섰다.
“왜 따라왔습니까?”
래빈의 불퉁하면서도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유진은 제 머리를 벅벅 긁다가 투덜거렸다.
“사전 찾아봤어. 그날 너 나한테 욕했지?”
“욕?”
“나한테 [바보]라고 했잖아. 미안하지만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상대가 다른 나라 언어로 욕을 해도 발음만 기억하면 뜻을 찾을 수 있거든.”
“아.”
제 머리에 잔뜩 엉겨 붙은 풀을 대충 털어내며 유진이 말했다. 좀 굴렀다고 온몸에 들러붙은 풀들은 몸을 근질거리게 했다. 유진은 조용히 투덜거리다가 뒤늦게 고개를 들어 래빈을 바라봤다. 그리고 굳었다. 당혹 때문도, 당황 때문이 아니었다.
“미안합니다. 네 말이 맞아.”
래빈이 우물우물 내뱉은 사과 때문도, 저 멀리서 아득하게 들리는 장난스러운 야유 때문도 아니었다.
유진이 눈을 끔뻑였다. 따스한 캘리포니아의 햇살이 래빈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오렌지빛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래빈의 얼굴은 다름 아닌 해골이었다.
???.
소원을 빌어보세요!
당신이 원하는 모든 소원을 들어줍니다!
02.
유진이 눈을 번쩍 떴다. 한가로운 새 소리가 들렸다. 따사로운 오렌지빛 햇살이 얼굴 위로 쏟아졌다. 눈이 부셨다. 눈을 찡그리는 대신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뭔가 굉장히 중요한 꿈을 꾼 것 같은데 도통 생각이 나질 않았다.
유진은 손을 뻗어 탁상을 더듬거렸다. 스마트폰이 손에 채여 바닥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아, 진짜…….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린 유진이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허리를 숙여서 스마트폰을 켰다. 오전 아홉 시 삼십사 분. 20XX년 X월 XX일 목요일. 어쩐지 익숙한 숫자의 나열을 바라보던 유진이 침대에 대 자로 누웠다. 학교는 완전히 지각이었다. 그런데 어째 가고 싶지가 않았다.
몸을 일으켜서 잽싸게 씻고 준비하는 대신 유진은 메신저를 켰다. 밀린 메시지가 수두룩했다. 풋볼부 단체 채팅방은 300+가 찍혀 있었고 친구들은 각각 개인 메시지까지 착실하게 보내놨다. 유진은 단체 채팅방에 들어가서 가장 끝까지 스크롤을 내렸다. 가장 최근 메시지조차 유진의 행방을 묻고 있었다.
-제임스: 유진 안 왔어
-제임스: 지각인 듯?
-로니: WOw
유진은 메시지를 빤히 보다가 대충 타자를 두드렸다.
-늦잠 잤어lol
오늘은 그냥 가지 말까, 까지 두드렸다가 도로 지웠다. 무단으로 빠졌다간 후폭풍이 좀 두려웠다. 느지막하게라도 가는 게 좋긴 할 텐데. 유진은 침대에서 한참을 뒹굴거리며 메신저를 뒤적였다. 오지 않은 유진을 찾는 메시지에 반쯤 대답하고 반은 넘겼다.
그러던 중 유진의 눈에 낯선 채팅방이 잡혔다. 가장 최근 대화가 바로 어제저녁이었다. 유진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채팅방을 눌렀다. 곧장 대화가 펼쳐졌다.
-김래빈: 미안해.
웬 사과람. 그나저나 래빈이라면…….
유진은 눈을 찌푸렸다. 래빈. 래빈. 아는 사람인 것 같은데. 어째 기억이 어렴풋하기만 하고 떠오르질 않았다. 고민하던 유진은 모르는 사람에게 사과받을 일도 있나 싶어 고개만 갸웃하다가 타자를 두드렸다.
-뭐가?
그리고 스마트폰을 껐다. 이젠 정말 준비할 시간이었다.
느지막하게 나타난 유진은 어김없이 모두의 관심을 받았다. 선생님에게 애교를 부려 반성문으로 지각 사건을 해결한 유진은 그날 정신없이 학교를 돌아다녔다. 유진은 여전히 육 피트 삼 인치였고, 여전히 미들턴 고등학교 최고의 인기쟁이이자 쿼터백 프롬킹이었다. 바뀐 건 없었다.
오후 수업이 전부 끝났을 무렵 유진은 제임스를 찾았다. 어렵잖게 찾아낸 제임스는 벤치에 앉아서 여자친구와 진하게 키스하고 있었다. 와우. 짜게 식은 눈으로 제임스와 여자친구를 바라보던 유진은 그냥 늘어지게 하품했다. 그들은 적당히 붙어먹다가 헤어졌다. 여자친구 쪽이 공부 잘하기로 유명한 여자애였으므로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유진은 혼자 남은 제임스의 곁에 털썩 앉았다. 제임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했다. 왜? 유진은 고민 없이 입을 열었다.
“김래빈이라는 애 알아?”
“김라빈?”
“아니, 래빈.”
“라…… 리?”
“래. 레인보우 할 때처럼.”
“아. 래빈. 김래빈?”
제임스가 발음하는 래빈의 래는 래라기보단 레이에 가까웠지만, 유진은 구태여 토를 다는 대신 가볍게 본론으로 넘어갔다.
“지난주에 편입한 편입생일 텐데. 밴드부한테 단단히 찍힌.”
“그래?”
“근데 그것 말고는 별로 특별한 애는 아냐. 네가 싫어하는 전형적인 너드 상이던데. 되게 조용하게 생활하더라.”
그러다가 제임스는 목소리를 낮추더니 덧붙였다.
“아, 그런데 특이한 소문은 있어.”
“특이한 소문?”
“응. 유진 네가 들으면 혐오할 얘기긴 하지만.”
유진이 눈을 찌푸렸다. 비록 말은 그렇게 했으나 제임스는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심각한 이야기는 아니란 뜻일 것이다. 유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디 한 번 해보란 의미였다.
“개가 유령이라는 소문이 있어.”
아, 혐오한다는 게 이런 의미? 빠르게 인정해버린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래빈은 대체 뭘 어떻게 하면서 살길래 일주일 만에 이런 소문이 퍼진담. 그러거나 말거나 제임스는 신나서 떠들어댔다.
“일주일 전에 편입했다고 했잖아. 그런데 실은 그게 아니래. 한 달쯤 전에 김라빈을 봤다는 애가 있는데,”
“래빈.”
“그래, 래빈을 봤다는 애가 있는데 말이지. 걔가 무덤 앞에서 가만히 서 있는 거래. 묘비를 빤히 바라보면서 말이야.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 묘비에 적힌 이름이 김래빈이었다는 거지!”
“흥미로운 얘기네.”
“유진, 표정은 바꾸고 그렇게 얘기해주면 안 되는 거야?”
유진은 대답 대신 턱을 괬다. 그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믿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이 외국인들이 묘비에 적힌 동양식 이름을 잘못 읽을 확률은, 글쎄,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라와 리와 래를 헷갈리는 제임스를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던 유진은 그냥 고개나 설레설레 저었다. 걔가 좀 퀭하고 좀비 같은 몰골이긴 한데 이런 소문이 나다니. 좀 가엾기까지 했다.
유진은 마침내 제임스에게 가벼운 감사 인사를 건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잠을 잤는데도 피곤했다. 아침부터 너무 시달렸다. 좀 조용한 곳 없으려나. 몸을 일으키는 유진을 보며 제임스가 물었다. 벌써 가게?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지. 따라 일어서려는 제임스를 웃으며 거절한 유진은 발걸음을 돌렸다. 음, 어째 머리가 좀 아픈데. 적당히 조용한 곳에서 눈이나 붙이고 싶고…….
복도를 걸으며 유진은 멍하니 생각했다. 래빈. 김래빈. 낯설면서도 익숙한 이름. 꿈에선 육 피트였던 자신. 음, 육 피트가 좋긴 한데 역시 쿼터백은 육 피트 삼 인치부터지. 암, 그렇고말고. 제 키가 육 피트라면 아무리 나라도 쿼터백은 무리지. 그렇지. 근데 김래빈은 뭐하려나. 노래 쓰고 있으려나. 음. 찾아가면 싫어할까?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문득 발이 멈췄다. 래빈이 노래도 썼나? 제임스에게서 들은 정보인가? 래빈이 노래를 쓴다는 이야기는 어디서도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찌푸린 유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목적지를 정했다.
음악실은 이 층 웨스트윙 끄트머리에 있었다. 유진은 음악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음, 역시 노래 쓴다는 것과 음악실을 연결해서 생각하는 건 너무 단조로운 생각이었나. 그래도 텅 빈 음악실은 제법 적막했고 적적함이 퍽 그리웠던 유진은 음악실 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닫고 크게 숨을 들이켜자 희미하게 묵은 먼지 냄새가 났다.
유진은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늘어지게 하품하자 잠이 솔솔 왔다. 잠을 그렇게 잤는데도 졸렸다. 바깥에서 훈련 중인 하키부에서 나는 고함이 울렸다. 우리 코치도 목청이 조금만 더 우렁찼으면 좋겠는데. 항상 팀원들의 우렁찬 목소리에 묻히는 코치의 외침을 회상하던 유진이 스르르 눈을 감았다. 음, 내일 훈련에서는 스칼렛한테 단백질 셰이크를 준비해달라고 말을 해야…….
코가 간지러워서 눈을 떴다. 초점이 잡히지 않는 눈을 굴리는데 말갛게 빛나는 눈이 보였다. 유진은 그 눈의 주인을 알았다.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는 눈, 하고 싶은 말을 잔뜩 눌러 담은, 내뱉는 대신 꼭꼭 씹어 삼킨 채 눈으로써 모든 것을 표현하는. 유진은 그 눈을 바라보다가 웅얼거렸다.
“[김래빈, 유령이야?]”
자신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외국어였다. 이게 한국어인가? 몽롱한 정신에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어렴풋한 목소리가 들리자 귀를 쫑긋 세웠다.
“[그걸 이제 알았어, 바보야?]”
김래빈이 말했다. 차유진은 생각했다. 오, 유령이라니. 멋진걸. 투명해서 날 수도 있고, 벽 같은 것도 막 통과할 수 있고……. 가물거리던 눈이 완전히 감겼다. 의식이 수면 아래로 잠기기 직전에 김래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이상한 소원 빌지 말고, 나 얼른 잊어버려.]”
눈이 번쩍 떠졌다. 고개를 치들었다.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차유진은 수업이 모두 끝났음에도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필드 한가운데를 차지해 드러누웠다. 여전히 청명한 하늘을 있는 힘껏 쏘아보며 늘어지게 하품했다.
집에 돌아갈 기분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친구들과 농구니 풋볼이니 내기할 기분은 더더욱 아니었다. 유진은 뺨을 간질이는 짧은 풀들의 감촉을 잠시 만끽하다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학생들이 쭉 빠진 학교와 필드는 어딘가 을씨년스러울 만큼 고요했다.
고요함 속에서 유진은 생각했다. 육 피트 삼 인치인 자신과 꾸었던 실없는 꿈. 오늘 아침 벌어졌던 지각 대소동과 밀려오던 피로. 땅을 짚은 손바닥이 물기에 젖어 축축해졌다.
누군가 곁에 다가와 앉은 건 그때였다. 유진은 소리 없이 다가와 풀썩 앉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자마자 헛숨을 삼켰다. 아니, 애초에 걸어와서 앉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 제 곁에 존재했대도 믿을 것만 같다. 유진은 실없는 생각을 하며 곁에 앉은 사람을 응시했다. 래빈이었다.
언제부터 있었어?
오래전부터.
집에 가고 싶지 않아.
새삼스럽지도 않지.
꿈을 꿨어. 내가 별이었어.
그게 꿈이던가.
“김래빈은 어떻게 생각해?”
유진이 물었다. 래빈은 한참 말이 없다가 느리게 입을 뗐다.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을 땐 무엇이 주어인지를 말해줘야지, 바보야.”
어라라. 유진은 눈을 끔뻑인 후에야 그들이 지금껏 입을 열지 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유진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얼버무리곤 그냥 입을 다물었다. 사실 래빈이 어째서 제 곁에 앉았는지부터 묻고픈 이야기는 수두룩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진으로선 드문 일이었다. 왜냐하면, 음, 유진은 뭐든 간에 참는 부류가 아니었으니까. 제 누나는 유진더러 이런 탐욕스러운 자식이라고 몇 번이나 을러댄 적이 있었다. 유진은 그냥 그런 사람이었다. 참기보단 마음껏 발산하고 그 대가를 치르는 사람. 물론 낄 땐 끼고 빠질 땐 빠지지만, 기본적으로 그렇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러고 있는지.
전부 래빈 때문이다. 이 이상한 남자애는 유진을 더더욱 이상하게 만들었다. 래빈은 유진과 엮이는 걸 최대한 피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가끔 책장에서 툭 튀어나온 책처럼 눈길을 끌었다. 유진은 래빈을 볼 때마다 문득 궁금해졌다. 한국과 미국의 차이, 미들턴 고등학교와 한국 고등학교의 차이. 또 차유진과 김래빈의 차이 같은 것들.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으나 래빈 또한 그러하리라고 어림짐작했다.
래빈과 유진은 노을이 지고 하늘이 새까맣게 물들도록 그냥 앉아 있었다. 올려다본 밤하늘엔 별이 없었다. 유진은 전화에 불이 나도록 울려댈 때가 되어서야 몸을 일으켰다. 래빈은 곁에서 무릎을 끌어안은 채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 갈 거야?”
래빈은 고개를 돌리려다가 멈칫했다. 그리곤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응.
“바닷바람은 밤이 되면 생각보다 많이 차서 추워.”
“그래?”
“수위한테 걸리면 골치 아플 거야.”
“알아.”
“밤이야.”
“그렇지.”
“졸리진 않아?”
“별로.”
“같이 갈래?”
유진은 래빈을 내려다봤다. 몸을 쪼그린 래빈은 유달리 작아 보였다. 무릎을 모아 앉은 래빈의 위로 풀이 돋고, 뼈가 삭고, 이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 버릴 거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유진은 화들짝 놀랐다.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한테 이게 무슨 예의람.
래빈은 고개를 돌렸다. 희미하게 빛나던 옆얼굴마저 사라졌다. 자그마한 뒤통수만 보인 채 래빈이 속삭였다. [아니.] 유진은 래빈이 무어라 했는지 몰랐으나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가슴 한 구석이 쿡쿡 쑤셨다. 김래빈은 게임이 아닌 이상 거짓말을 잘 못 했다. 그래서 김래빈은 진실을 교묘히 숨겨 말할 때마다 시선을 피하곤 했다. 아, 그랬던가. 사람과 대화할 땐 눈을 맞춰야 한다며 을러대던 네가 고개를 돌린 것도 그 때문인가.
유진은 래빈을 바라보다가 발을 돌렸다.
그날 밤 유진은 꿈을 꿨다. 누군가가 나타나 자신에게 소원을 말해보라며 열심히 꼬시는 꿈이었다. 유진은 그를 앞에 두고 고개를 갸웃대더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내가 육 피트 삼 인치가 됐으면 좋겠어.
???.
소원을 빌어보세요!
당신이 원하는 모든 소원을 들어줍니다!
정말 뭐든 상관없어?
아무래도 좋다면 나는,
내가 육 피트 삼 인치가 됐으면 좋겠어.
03.
하루가 짧아졌다. 체감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짧아졌다. 차유진은 그걸 느낄 수 있었다.
등교 후 눈을 깜빡이니 아침나절이 날아갔다. 졸거나 잤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카페테리아에서 급식으로 나온 피자를 질겅질겅 씹다가 반이나 남기고 죄다 버렸다. 곁을 둘러싼 애들이 너 어디 아프냐며 던지는 한 마디들이 전부 1.5배속처럼 들렸다. 쓰레기통에 일회용 식판까지 전부 던져넣은 차유진은 그냥 고개를 저었다. 대꾸하기도 지쳤다.
오늘은 20XX년 X월 X일 목요일. 날은 밝고 바람이 청명하다. 카페테리아에서 래빈을 영입하려던 에밀리의 처절한 눈물 고백쇼가 있었던 일만 제외한다면 터무니없이 순탄하고 재미없는 하루다. 차유진은 마지막 양심으로 남겨놓은 셀러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걷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스칼렛이 단백질 셰이크를 잔뜩 구비해둔 것이다. 풋볼부 매니저인 스칼렛은 단백질 셰이크가 부족하단 사실을 모를 텐데 말이다.
오늘은 풋볼부 훈련이 있었다. 모의 게임이었다. 부원들끼리 임의로 팀을 나누고 내기를 걸어 시합했다. 차유진은 A팀 주장이자 쿼터백이었다. B팀 주장은 조안이 맡았다. 팀을 대충 뽑고 전략을 상의하며 게임을 진행했다. 필드에서 공을 부여잡은 채 데굴데굴 구르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오늘은 목요일인데 왜 하키부가 아니라 풋볼부가 연습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머릿속에 왜인지 모를 상념이 가득하니 집중이 될 리 만무했다. 절호의 득점 기회를 세 번째로 놓치자 감독이 길길이 날뛰며 차유진을 불러들였다. 너 이 새끼 모의 게임이라고 정신 놓은 거냐며 좀 혼났다. 보호구를 벗고 땀을 닦았다. 사실 혼나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너 자꾸 이러면 조안한테 쿼터백 자리 뺏긴다는 협박 아닌 협박도 무용지물이었다. 당연하다. 차유진은 주전 쿼터백으로써 실력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이 있었으니까. 조안은 차유진을 못 이긴다. 감독도 미치지 않고서야 차유진을 주전에서 뺄 리가 없으니 그냥 정신 차리라는 의미에서 내뱉는 뾰족한 말일 뿐이다. 차유진은 그 또한 알았다. 그래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모의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구경하려는 학생들로 관람석이 들썩였다. 차유진은 감독의 윽박에서 간신히 벗어나 다시 필드로 향할 때 벤치를 힐끗 바라봤다. 치어리더 애들 몇몇과 밴드부 몇몇만 알아봤다. 나머진 모르는 애들이었다. 저들끼리 숙덕대다가 눈이 마주치자 손을 흔들었다. 차유진은 웃으면서 손을 마주 흔들어주었다. 그러자 뒤에서 감독이 또 소리를 빽 질렀다. 인사할 정신 있으면 게임이나 제대로 해라, 유진! 오, 맞는 말이구나 싶어서 헐레벌떡 필드에 합류했다.
공에 집중하려 했다. 에릭이 땅에 찍어놓은 적갈색 공을 뚫어지라 노려보면서 차유진은 상념을 없애려고 애를 썼다. 자신은 쿼터백이었다. 쿼터백이 흔들리면 안 됐다. 모의 게임이어도 게임이고 시합이었다. 집중이 안 되는 일은 몹시 드문 일이었는데.
휘슬이 울렸다. 에릭이 공을 있는 힘껏 찼다. 옹송그렸던 몸이 순식간에 튀어 나갔다. 잔디를 짓밟고 흙을 차며 달려나가는 순간 차유진은 생각했다. 이게 아닌데. 내가 왜 여기에 있지?
“유진!”
날아온 공을 반사적으로 받는다. 품에 껴안고 이를 악물고 달려나간다. 대각선엔 존이, 직선 위치엔 데미안이, 뒤쪽엔 조쉬가 있다. 오른쪽에서 거친 태클이 들어왔다. 피하지 않고 맞부딪쳤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차유진은 육 피트 삼 인치니까. 거친 몸싸움에도 밀리지 않는 신장을 가졌으니까. 단단한 다리로 버티고 데미안에게 공을 던졌다. 깔끔한 포물선을 그리며 데미안의 품에 공이 안착했다.
그리고 다시 달려나가면서, 차유진은, 도무지 집중할 수 없는 차유진은 생각했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의심해본 적 없다. 육 피트 삼 인치의 세계인 풋볼의 세계. 그 속에서 어엿하게 한 자리를 차지한 자신. 너무 당연하다. 차유진은 미들턴 고등학교의 쿼터백이다. 지역 최고의 쿼터백이다. 모두가 자신을 안다. 그렇지, 모두가 나를 알지. 나는 반짝이니까. 나는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데에 도가 튼 사람이니까. 알아. 안다. 차유진은 반짝이는 사람이다. 차유진은 별이다. 별. 폭발하지 않는, 언제나 그곳에 있는, 빛나는, 끌어당기는, 존재하는…….
공이 날아온다. 왜 자신에게 주는지 깨닫지도 못한 채 품에 안아 들었다. 골인 지점이 코앞이다. 미친 듯이 뛰었다. 달렸다. 폐가 터질 것 같다. 수그렸던 차유진의 몸이 붕 떴다. 몸을 던졌다. 공을 잡은 손을 내뻗었다. 눈앞에서 번쩍이는 골대의 조명이 점멸했다.
그리고 대지를 울리는 환호가.
“A팀 인정 득점!”
몸이 무거웠다. 제 위에 몇 사람이 쌓였는지 모를 일이다. B팀 애들은 슬금슬금 몸을 일으켰고 A팀 애들은 환호했다. 차유진의 등을 마구 때리며 기뻐했다. 차유진은 엎어진 채로 일어나지 않았다. 눈을 깜빡였다. 나는, 유진 이그나시오 차는 육 피트 삼 인치. 미들턴 고등학교의 쿼터백. 눈을 깜빡였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몸에 힘을 주자 위에 쌓였던 애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소리를 지르며 기뻐하는 관중석을 바라봤다. 모르는 애들이 산더미였다. 차유진의 날카로운 눈은 와중에 익숙한 얼굴을 기민하게 찾아냈다.
구석진 곳에서 래빈이 차유진을 보고 있었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 빤히. 시선을 고정한 래빈의 위로 새까만 그림자가 쏟아진다. 차유진은 두 발로 땅을 딛고 섰다. 또 다른 라운드의 시작이었다.
모의 게임이 끝나고 차유진은 곧장 관중석을 찾았다. 떠들썩했던 열기가 거짓말처럼 관중석은 텅 비어 있었다. 래빈은커녕 사람의 시옷 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차유진은 땀에 젖은 머리를 탈탈 털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애초에 자신이 왜 래빈을 찾고자 하는지도 모르겠다. 래빈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해본 적이 있던가. 그렇지, 있었지. 필드에서, 카페테리아에서, 바다 너머 타국에서. 차유진과 김래빈은 세트처럼 함께 다녔으나 어느 순간부터 차유진은 혼자가 됐다…….
아니지. 차유진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차유진은 래빈을 몰랐다. 육 피트 삼 인치의 차유진은 타국에서 김래빈과 끈끈한 친구 관계를 맺지 않았다. 육 피트 삼 인치의 차유진은 미들턴 고등학교의 쿼터백이고, 타국에 가본 적은 없고, 캘리포니아에서 사는 사람일 뿐이다. 눈을 깜빡였다. 세계가 이지러졌다가 돌아오길 반복한다. 그 순간 손에 들린 스마트폰이 징징 울렸다.
메시지였다. 차유진은 기억나지 않는 메시지를 곱씹다가 눈을 찌푸렸다.
-김래빈: 미안해
-뭐가?
-김래빈: 많은 것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