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 차유진 X 작곡가 김래빈
* 글자수 제한으로 인해 1~3화까지의 분량 수록
춥지 않다. 맨 처음 느낀 감각은 그거였다.
사방이 얼음인 데에 반해 관객석은 후끈했다. 적막인 듯 소란인 듯 아뜩한 속살거림만 들렸다. 높은 천장에서 떨어지는 쨍한 조명은 거울 같은 빙판 표면에 부딪히며 비산했다. 반짝거리는 게 꼭 언젠가 봤던 유리 조각 같았다.
누군가 그 위에 올라섰다.
제 또래인 듯했다. 키는 훤칠하고 비율도 좋았다. 쨍한 옷감에 자갈자갈 붙은 반짝이들이 빛에 산란했다. 눈이 아플 만큼 화려한 옷인데도 이목구비가 묻히지 않았다. 잘생긴 얼굴은 관중석을 보며 장난스레 눈을 찡긋했다. 주위에서 소란이 한 바퀴 돌았다.
남자애가 빙판 가운데로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발을 들어 스케이트 앞코로 빙판을 툭툭 두드렸다. 주위에서 헛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떨리는 숨소리만이 또렷했다. 그러다가 그마저도 지워졌다.
눈을 감았다 뜬 남자애가 고개를 느리게 치들었다. 조금 전 보았던 장난스러움은 온데간데없었다. 가만히 가라앉은 시선. 경기장을 한 바퀴 죽 돈다.
소란하던 관중이 쥐 죽은 듯 침묵했다.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온 무언가를 눈앞에 직면하기 직전처럼. 혹은 한껏 긴장한 듯이. 침 삼키는 소리가 간신히 났다. 뒤늦게 알았다. 다름 아닌 제 소리였다.
느릿한 선율이 흐르기 시작했다. 굳은 듯 서 있던 걔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녹턴 20번.
빙판을 갈랐다. 빛이 진동했다.
낫 터칭 스텝 시퀀스
1
“싫어요.”
제가 들어도 퍽 단호한 목소리였다. 말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감과 동시에 카일의 얼굴이 있는 대로 일그러졌다. 주니어를 시작하면서부터 쭉 함께해 온 코치였다. 함께한 시간만큼 카일과 유진은 서로를 잘 알았다. 그러니 카일은 알 수밖에 없었다. 이만치 단호하게 말한 유진의 마음을 돌리기는 샌디에이고 바닷속에서 인어를 발견하기보다 어렵다는 사실을.
“유진.”
“싫다고 했어요.”
“말 좀 들어보렴.”
“설득하려는 셈인 거 알아요. 하지만 그럴 필요 없어요. 카일. 당신이 뭐라고 하든 나는 생각을 바꾸지 않을 거예요.”
유진은 카일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는 대신 펜스에서 훌쩍 물러났다. 날이 잘 갈린 스케이트는 얼음과 흠집 사이도 매끄럽게 갈랐다. 펜스 너머 땅에서 발 붙이고 서 있던 카일이 다급히 유진을 불렀다. 물론 유진은 들은 체도 안 했지만.
“유진! 고집 그만 부리고 이리 와!”
“고집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 부리고 있는 거예요.”
“진심이니? 너 지금 여기서 나랑 기 싸움하겠다는 거야? 코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선수라니 듣도 보도 못했어.”
유진은 대답하는 대신 왼발에 힘을 줬다. 오른쪽 날을 몇 번 앞뒤로 밀다가 얻은 추진력 그대로 원을 그렸다. 빙글빙글. 다리를 들고 왼쪽과 반쯤 얽는다. 그리고 다시. 속도를 높여 팽글팽글. 갈린 얼음이 사방으로 튀었다.
“유진 이그나시오 차!”
카일의 고함이 링크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동시에 단단히 지탱했던 왼발이 미끄러졌다. 조금 비틀거리던 유진이 도로 두 발을 디디고 섰을 때 카일은 성난 황소처럼 빙판에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유진은 카일을 곁눈질했다가 입맛을 다셨다. 영 깔끔하지 못한 마무리였다.
“신발 신고 들어오면 토미가 화낼걸요. 지난번에도 그랬잖아요. 빙판 닦는 게 쉬운 일인 줄 아냐면서.”
“오, 토미도 지금 네 꼴을 보면 내 심정을 이해할 거다.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부탁하는데, 제발, 집에 들어가서 그냥 쉬어.”
또 저 소리였다. 유진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코웃음만 쳤다.
“너 슬럼프야. 유진 차.”
“알아요.”
“아는 놈이 자꾸 이래?”
“슬럼프인데 쉬면 어떡해요? 세계선수권 대회도 고작 석 달 남았는데.”
“너 올해 열여덟이야. 기회는 남았어.”
“열여덟이죠. 앞으로 삼 년 안에 은퇴할.”
카일이 입을 다물었다. 유진은 허리를 숙여 왼쪽 발목을 만지작거렸다. 어쩐지 좀 욱신거렸다. 조금 전 미끄러졌을 때. 넘어지지 않기 위해 힘을 줬다. 그 과정에서 근육이 좀 놀란 것 같았다. 되는 게 없네. 조용히 투덜거리며 유진은 슬쩍 카일의 눈치를 봤다. 조금 곤혹스러워하는 듯했으나 지금 발목에 관한 말을 꺼내면 가차 없이 집으로 돌려보낼 게 뻔했다.
유진 이그나시오 차. 올해 열여덟 먹은 그는 십일 년 차 프로였다. 다섯 살 때 처음 스케이팅을 시작해 이듬해에 첫 경기에 나간 천재기도 했다. 잘생긴 외모와 거침없고 화려한 스케이팅 덕분에 전 세계의 스케이터 중 인기도는 항상 순위권. 유진의 간판 기술인 쿼드러플 악셀 점프가 성공할 때마다 관중석에선 환호 대신 한숨 소리가 들린다는 속설도 있었다.
그런 유진 이그나시오 차. 현재는 지독한 슬럼프에 허덕이고 있었다.
열여덟이었다. 세간에선 아직 어린 나이지만 프로 스케이터 중에선 은퇴를 고민할 나이였다. 피겨 스케이팅은 평균 은퇴 나이가 스물둘을 넘지 못했다. 유진은 알았다. 자신은 훌륭한 성적을 내는 톱 스케이터니 그나마 은퇴가 늦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 봐야 오 년 안이었다.
나이가 들면 몸이 무거워진다. 관절도 약해졌다. 제대로 점프를 뛸 수 없었다. 난도 높은 점프가 차지하는 점수를 생각하면 결코 우습게 볼 수 없었다.
하물며 모든 스포츠가 으레 그렇듯, 피겨 스케이팅 역시 짧은 시간 동안 모든 걸 쥐어짜야 했다. 모로 보나 나이 듦은 치명적이었다. 나이가 선사하는 환상적인 단점들. 셈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딸리는 체력. 달라지는 무게중심. 짧아지는 비거리. 낮아지는 점프 높이. 부족해지는 회전.
어떤 은퇴는 필연적이었다. 유진은 그 기한을 늘릴 대로 늘리고 싶었다.
카일은 눈썹을 씰룩거리는 유진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껏 수많은 아이를 가르쳤지만 유진만큼 고집불통에 욕심쟁이인 아이는 또 드물었다. 저런 끈질김 덕분에 훌륭한 경기를, 나아가 훌륭한 평가를 받을 수 있지만……. 카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유진은 제가 다 컸다고 주장했지만 카일 눈엔 아직 어린애였다.
“좋아. 알겠어.”
이를테면 지금 같은 상황에서.
한발 물러나자 일그러졌던 눈이 단박에 동그래졌다. 카일은 팔짱을 낀 채 유진을 가만히 훑어내렸다. 조금 전부터 무게중심이 묘하게 오른쪽으로 쏠려 있었다. 직전의 스핀이 마무리에서 좀 삐끗했다 싶었는데. 그때 뭐가 잘못된 듯했다.
앞뒤 안 가리고 달려나가는 건 모든 운동선수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이었다. 하지만 때때로 몸을 살필 줄도 알아야 하거늘. 카일은 터지려는 한숨을 집어삼키며 말을 골랐다.
“너는 네가 계속 연습해야 한다고 주장할 셈인 거지.”
“석 달이라니까요. 세계선수권이.”
“내 말을 좀 들어, 유진. 좋아. 네 고집이 또 어디 가겠어. 하지만 코치인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널 위해서, 내기를 걸자.”
내기라는 말에 유진이 눈을 찡그렸다. 카일은 턱짓으로 유진을 가리켰다.
“트리플 악셀 뛰어봐.”
“갑자기요?”
“그 정돈 뛰어야지. 네 간판 기술이 쿼드러플 악셀이라는 걸 잊지 마, 유진. 밑바닥에 있는 선수들도 트리플 악셀 정돈 전부 뛰니까. 트리플에서 실수한다면 쿼드는 꿈도 꾸지 말라고 했던 말. 기억하지?”
그건 유진이 주니어에 들어가기 직전 카일과 만났을 때 들었던 소리였다. 그때 유진은 쿼드러플 악셀 점프를 다듬기 위해 그것만 주야장천 뛰어댔었다. 어린 자신을 잠시 떠올린 유진은 이내 표정을 구겼다.
“누가 들으면 트리플 악셀이 개나 소나 뛰는 건 줄 알겠어요. 카일.”
미력한 항의는 카일의 한마디에 짓눌렸다.
“너는 그래야지.”
유진이 한숨을 쉬었다. 잠시 엇나갔던 시선은 이내 또렷해져 카일에게 박혀 들었다. 깔끔한 승낙이었다.
“뛰면요?”
“클린 점프 뛰면 네가 하라는 대로 할 거야. 세계선수권 대비를 하든, 연습을 계속하든.”
“분명 내가 하자는 대로 할 거라고 했어요.”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앞코를 빙판에 툭툭 부딪히던 유진이 고개를 돌렸다. 카일이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채 유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일은 조금 전 유진만큼이나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일 실패하면, 다음 한 달은 링크장 출입 금지다.”
“…….”
“그리고 다음 달에 다시 볼 거야. 똑같이 트리플 악셀로.”
카일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곧장 덧붙였다.
“트리플 악셀. 깔끔하게 성공할 때까지 계속 한 달 간격으로 출입 금지할 거야. 대회를 놓쳐도 상관없다.”
유진은 대답 대신 코웃음 쳤다. 대회를 놓쳐도 상관없다니. 말만 번지르르하지. 알겠으니까 빙판 나가요. 말이 생각보다 날카롭게 나갔다. 카일의 눈썹이 위로 솟구쳤다. 뭐라고 지적하려나 싶었으나 카일은 그냥 등을 돌렸다.
링크장엔 유진과 카일뿐이었다. 빙판 위에는 유진 혼자였고. 유진은 지역에서 가장 성적이 좋은 선수였기 때문에 협회에선 유진의 개인 시간을 마련해주었다. 매일 여섯 시에서 여덟 시까지. 매일 두 시간. 링크장을 독점하는 것도 올해로 사 년째였다.
유진은 가볍게 목을 꺾었다. 일종의 준비 자세였다. 빙판에서 나간 카일은 펜스를 닫았다. 유진은 깊이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차분히 내쉬었다. 링크장은 춥지 않았으므로 김은 서리지 않았지만.
다리에 힘을 줬다. 근육이 긴장하는 감각이 선명했다.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가장자리를 따라가며 점차 속도를 높였다. 시원한 맞바람이 얼굴을 마구 때렸다. 몸을 반쯤 틀고, 그 상태로 나아가다가.
추진력을 얻어 빙판을 박차는 순간 유진은 확신했다. 성공할 것이다.
회전을 돌고 발을 내디딜 때까지만 하더라도 유진은 이후의 연습 일정을 생각하고 있었다.
착지하는 순간이었다. 조금 전부터 욱신거리던 왼쪽 발목이 훅 꺾였다. 놀랄 틈도 없었다. 어, 하고 중얼거린 나지막한 탄성이 점프의 단말마가 됐다. 중심을 잃어 엉덩방아를 찧는 그 순간까지 유진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고 있었다.
미끄러진 그대로 빙판에 주르륵 미끄러졌다. 눈만 깜빡이는데 카일이 펜스를 넘어왔다. 유진은 바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발목이 욱신거렸다.
유진을 내려다보던 카일의 표정이 미묘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카일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한 달 동안 링크장 출입 금지다.”
선고가 내렸다. 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계기가 드러난 슬럼프와 숨겨진 슬럼프가 있다. 까다로운 건 후자였다.
전자라면 그 계기를 깨부수면 될 일이었다. 계기가 드러나 있다면 그에 따른 해결방법도 명백했다. 당사자야 스트레스받겠으나 계기를 넘어서는 어느 순간엔 슬럼프는 자연스레 사라졌다.
지금 유진의 경우엔 후자였다. 승승장구하던 끝에 다다른 곳은 지난한 슬럼프의 늪이었다. 자신 있던 쿼드러플은 개뿔. 트리플 악셀에서조차 비틀거리는 제 꼴이 우습기 그지없었다. 유진은 신을 믿지 않았으나 이럴 때면 자연히 정체 모를 절대자에게 묻고 싶어지는 것이다. 날 미워하는 거예요? 그도 아니라면.
누군가가 유진에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선수로서의 네 수명은 이제 끝났다고.
하지만 유진은 아직 빙판을 사랑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일곱 시를 갓 넘긴 시간이었다. 해가 걸려있을 때 링크장을 나온 건 선수 생활 시작하고는 처음이었다. 괜한 미련에 미적거리면서도 유진은 멍하니 생각했다. 하기야. 슬럼프였다. 제 상태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었다. 처참했다.
여들없는 걸음으로 센터 주위만 뱅뱅 맴돌았다. 후련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가는 건 불가능했다. 중간에 퇴근하는 카일에게 들켜 어서 돌아가라는 전화 세례를 받았다. 전화를 끊고 두 바퀴를 더 돌았다. 새빨갛게 물들던 하늘이 점차 보랏빛으로 젖어갔다. 그제야 멈췄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뭐랄까. 십이 월은 좀 추웠다.
내쉰 숨이 허옇게 번졌다. 빙판 위보다 밖이 더 싸늘했다. 비단 온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스케이트 가방을 멘 어깨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진짜 돌아가야지. 결심했을 때다.
“[유진 차 선수?]”
유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서툰 억양으로 보아 영어가 모국어는 아닌 듯했다. 저와 키가 비슷했지만 조금 작았다. 사위가 어두워서 그런가. 사실 얼굴은 잘 안 보였다. 목소리로 남자라는 사실만을 알았다.
“[저요?]”
“[유진 차 선수 맞으십니까?]”
“[네.]”
유진이 잠시 입을 다물자 상대가 말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팬입니다. 당신의 경기를 매우 좋아합니다.]”
서툰 영어가 더듬더듬 나왔다. 유진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팬. 유진의 팬이라고 자처한 사람들은 종종 유진에게 달갑지 못한 경험을 선사했다. 특히 링크장까지 찾아올 정도로 극성이라면 더더욱. 유진은 어둠에 녹아든 상대를 차근히 살폈다. 조금 쭈뼛거리는 것도 같고.
“[음. 좋아요.]”
“[예?]”
“[사인? 사진? 둘 다? 종이랑 펜 있어요? 지금 없어서 안 갖고 있으면 사인 못 해주는데.]”
해가 완전히 졌다. 한발 늦게 가로등이 켜졌다. 유백색 빛에 눈이 시렸다. 으. 잠깐 고개를 내렸다. 눈을 깜빡였다. 적응이 됐다 싶을 때 다시 들었다. 마침내 상대의 얼굴이 똑바로 보였다.
그리고 유진은 당황했다. 날카롭기 그지없는, 일견 질 나쁜 양아치처럼 보이는 얼굴이 자신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에.
……팬 맞아? 이 사람 영어도 못 하는 것 같은데 팬이랑 원수랑 헷갈린 거 아냐? 얼굴로 보아 제법 타당한 의문을 품으며 유진은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굳게 다물린 입이 비틀림에 따라 뺨에 찍힌 점도 같이 씰룩댔다. 형형한 눈이 유진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도망쳐야 하나. 상대는 말이 없었다. 부리부리한 눈으로 유진을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달싹일 뿐이었다. 스케이트가 좀 많이 아깝긴 하겠지만 그래도 사는 게 우선이니까. 머릿속에서 스케이트 가방을 상대에게 던지고 냅다 도망치는 시뮬레이션까지 돌리던 때였다. 경쾌한 칼람바 소리가 적막을 갈랐다.
“아!”
그리고 상대가 곧장 반응했다. 주머니를 부산스럽게 뒤적여 스마트폰을 꺼낸 것이다.
험악하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안달 난 것처럼 발을 동동 구르던 상대는 유진과 스마트폰을 번갈아 바라보다더니 얼굴을 완전히 구겼다. 그게 좀 울상을 짓는 것 같았다. 맞나? 아닌가? 긴가민가하게 서 있다가 고갯짓으로 스마트폰을 가리켰다.
“[받아도 돼요.]”
머뭇거리던 상대가 그제야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누나.”
한국어였다.
유진은 그 순간 바보 같은 자신의 뒤통수를 한 대 때리고 싶어졌다. 빈말로도 좋다고 말 못 할 인상 때문에 간과하고 있었다. 저 사람은 누가 봐도 동양인이었다.
유진은 팔짱을 낀 채 가만히 기다렸다. 상대는 거의 죄인이라도 된 양 쩔쩔매고 있었다. 단말기 너머 고함이 몇 번 울렸다. 그럴 때마다 상대는 더 쪼그라들었다. 웬 고함이냐고 욕지거리나 퍼부을 것처럼 생긴 주제에. 반응이 순하다 못해 바보 같았다.
“응. 응. 미안해. 늦어질 줄 몰랐어. 중간에 길 잃어서. 응……. 응.”
상대가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유진을 힐끔거렸다. 전화를 받느라 몸을 반쯤 틀고 있었기에 유진한텐 상대의 옆얼굴이 보였다. 그 순간 옆얼굴은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할머니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상대의 귀. 빨갰다. 무슨 노을처럼.
추위 때문인가? 유진의 눈이 가늘어지는 데에 반해 상대는 입을 가리고 속닥거리기 바빴다. 그래 봐야 전부 들렸지만.
“응. 지금 같이……. 응. 맞아. 차유진 선수 맞아.”
“…….”
“아니……. 아직 못 여쭤봤어. 영어를 못 알아듣겠어. 응. ……그래도 되나? 어, 음. 그래도…….”
저 사람은 지금 자기가 전부 알아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나 할까. 유진은 그냥 느리게 시선만 피했다. 어렸을 적 양친으로부터 대충 배웠던 한국어가 여기서 쓰일 줄은 몰랐다. 진짜로.
그러거나 말거나. 상대는 유진을 힐끗거리다가 눈이 마주치면 후다닥 시선을 피하길 반복했다. 전화 단말기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이제 상당히 차분해졌다. 상대는 아주 오랫동안 말이 없다가 “응. 응, 알겠어. 고마워, 누나.”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거의 오 분 가까이 이어진 대화였다.
전화가 끊기자 다시 적막. 조금 전까진 그렇게 말이 많던 상대는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영어 못한다더니 진짜 한마디도 못 하나. 한국에서는 무조건 영어 가르친다며. 유진은 눈을 살짝 찡그렸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렴 그래도 팬이라고 밝힌 상대였다. 사진 한 장 정도는 찍어주고 싶었다. 어쩌면 그냥 변덕이었는지도 모르지만.
“한국인 맞아요?”
“어, 네?”
“나 한국말 할 줄 알아요. 조금.”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납던 인상이 조금 누그러진 것도 같았다. 유진은 나직이 킥킥 웃었다. 한국을 딱히 좋아하진 않았다. 몇 년 전 메달을 땄던 올림픽에서 욕 얻어먹었던 기억이 있었다. 한국 피가 섞여 있는데 미국 국적으로 출전했다는 이유였다. 유진은 엄연한 미국인인데도.
그러나 동시에 유진은 수많은 국적의 팬들이 제게 보내는 사랑이 얼마나 기꺼운지 아는 사람이었다. 국적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제게 욕을 양동이째로 들이붓던 사람들과 똑같아지는 거나 다름없기도 했고.
유감스러운 표정을 짓는 대신 유진은 기다렸다. 상대가 말을 고르기까지.
“한국말을 하실 줄 아셨군요. 다행입니다. 할 말을 준비해오긴 했는데, 막상 닥치니까 전부 잊어버려서. ……그, 차유진 선수 경기, 많이 좋아합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굉장한 박력을 지녔다고 생각합니다.”
“오! 고마워요.”
“예! 개인적으로 저는 차유진 선수의 진가가 탄탄한 기본기와 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점프의 높이와 비거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임은 인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차유진 선수의 경기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하는 매력이…….”
음.
유진은 웃는 표정 그대로 생각했다. 이 사람 말 진짜 많다. 영어 못할 때 답답해서 어쨌대. 그런데 한 구십 퍼센트는 못 알아듣겠다.
“……특히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무대는 삼 년 전 그랑프리 파이널 때의…….”
“Okay. 잠깐 기다려요.”
“예?”
“무슨 말인지 몰라요.”
그러자 상대 얼굴이 과연 가관이었다. 희게 질렸다가 새파랗게 질렸다가. 그러곤 냅다 허리를 구십 도로 꺾었다. 상대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따위의 문장으로 시작한 사과는 구구절절 이어졌다. 유진은 또 구십 퍼센트 정도 못 알아들었다.
“Okay, okay. 미안하단 거 알아요. 그리고 무슨 말 하는지도 알아요. 나 잘해요. 그거 칭찬이에요.”
“예? 아, 예. 차유진 선수의 경기를 보면서 매번…….”
또 시작하려나. 랩. 유진이 은은한 미소를 짓는데 상대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얼굴이 다시 구겨졌다. 험악해진 눈으로 유진을 빤히 들여다봤다. 그러다가 굳은 결심이라도 한 양 비장하게 입을 열어 말했다.
“유. ……베리 굿 스케이팅. 아이 라이크 유어 액트.”
이번엔 유진 차례였다. 휘둥그레 떴던 눈이 서서히 나붓하게 접혔다. 굳었던 입가가 천천히 호선을 그렸다. 한국말 못 알아듣겠다니까 서툴게나마 영어로 칭찬하는 사람이라니. 간단하다 못해 짧게까지 느껴지는 칭찬이었으나 유진은 그 속에 담긴 열기를 알아챘다.
웃긴 사람. 유진은 킥킥거리며 흘러내린 가방끈을 갈무리했다.
“Thanks! 사진, 사인. 괜찮아요?”
“어…….”
“나 팬한테 해줘요!”
상대가 눈을 끔뻑였다. 그러더니 아, 하고 탄성을 뱉었다. 까맣게 잊었던 무언가를 떠올린 듯이. 그리곤 곧장 주머니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온 건 꼬깃꼬깃 접힌 지폐와 작은 종이였다.
저기다가 사인해달라는 건가? 유진은 눈을 끔뻑이며 제게는 펜이 없다는 말을 한국말로 하면 어떻게 되나 고심하고 있었다. 상대가 종이를 두 손으로 정중히 건넨 것도 그때였다.
“죄송합니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반사적으로 종이를 받아들었다. 그건 명함이었다.
아무리 봐도 제 또래인데. 유진은 상대와 명함을 번갈아 바라봤다. 한국인들은 나이 상관없이 전부 명함을 들고 다니나? 게다가 이 명함. 아무 데에서나 뿌리기 위해 싸구려 종이로 대량 발주한 게 아니다. 고급 종이에다가 깔끔한 디자인. 이름에 들어간 디보싱에 단가 높은 벨벳 코팅까지. 누가 봐도 돈깨나 쓴 태가 났다.
게다가 신경 쓰이는 건 그거였다. 이름 옆에 붙은 석 자. 작곡가.
‘김래빈’은 작곡가였다.
“이번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차유진 선수의 프리 경기용 음원 편곡을 담당하게 된 김래빈입니다.”
힘찬 인사말에 차유진은 얼굴을 있는 대로 구겼다.
유진은 확신했다. 세상이 날 엿 먹이려는 게 틀림없다.
정황은 명명백백했다. 가뜩이나 사라지지 않는 슬럼프. 실패한 트리플 악셀 점프. 그렇게 대회 준비는 무슨 한 달 동안 링크장 출입 금지 처분으로 쫓겨났는데. 서성이다가 우연히 만난 팬이 대회 때 쓸 음원 담당 작곡가라니. 이건 뭐 놀리는 것도 아니고. 좀 너무하지 않나? 세상이 언제까지고 내 편이겠냐마는.
와중에 명함은 착실하게 챙겼다. 돌려줄 겨를도 없었다는 말이 더 맞을 테지만. 명함을 받자마자 대화 나눌 틈도 없이 김래빈의 스마트폰이 다시 진동한 것이다.
이번에도 공손한 자세로 전화를 받은 김래빈은 전화를 끊자마자 허리를 구십 도로 숙여서 사과했다. 급한 일이 생겨서 어쩌고저쩌고. 그리고 떠났다. 홀랑. 혼자 남은 차유진만 명함 쥔 채 덩그러니 서 있었다. 집 나간 이성 붙들고 집으로 비척비척 돌아온 게 꼭 십 분 전이었다.
“유진!”
유진은 자신을 호명하는 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동생인 가비였다. 문간에 기대어 선 그는 눈을 깜빡이다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저녁 안 먹어?”
유진은 가비를 가만히 뜯어 살폈다. 가브리엘라는 유진과 엇비슷하게 피겨 스케이팅을 시작했으나 영 흥미를 못 붙인 애였다. 유진이 첫 경기에 나갈 무렵 가비는 스케이팅을 관뒀다. 그러고 보니 쟤는 요즘 무슨 동아리랬더라.
유진은 짧게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딱히 배가 고프지 않았다. 링크장에 다녀와서 배가 고프지 않은 건 거진 오 년 만에 처음이었다.
“미친……. 너 어디 아파?”
그 유진 차가 링크장에 다녀와서 밥을 안 먹겠다니. 표정을 잠시 굳혔던 가비가 부산을 떨어댔다. 어쩐지 자신을 놀리는 것처럼 들렸다. 유진은 눈을 부리부리하게 치켜뜨고 방문을 가리켰다. 그리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비. 나가.”
“무슨 사춘기 온 꼬마애처럼 굴어대? 사춘기 올 나이는 나거든?”
“나가라고 했어.”
가비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잠시 말 없는 시선이 유진을 지그시 훑고 지나갔다. 그러더니 이어지는 한숨.
“마음대로 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데 저 소리라니. 유진이 울컥하는 순간 문이 닫혔다.
한숨만 푹 내쉰 유진은 그냥 침대에 드러누웠다. 가브리엘라에게 필요 이상으로 날카롭게 굴었다는 후회가 뒤늦게 찾아들었다. 그냥 안 먹겠다고 하면 될 것을. 베개에 머리 박고 있다가 땅 꺼지게 한숨만 쉬어댔다.
계기가 드러나지 않은 슬럼프. 그게 지금의 차유진을 괴롭히는 것의 정체였다.
다른 말로 이유가 없었다. 직전의 그랑프리 파이널에선 은메달을 땄다. 초청받은 갈라쇼에서도 실수 한번 없었다. 올해 중요 경기 중에선 세계선수권이 마지막이었다. 그나마 슬럼프가 시즌 막바지에 닥친 것에 기꺼워야 하나.
너 자신을 알라던 소크라테스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슬럼프에 빠진 이유조차 명확히 알지 못하는 자신을 비웃듯이.
그때였다. 벨이 울렸다. 손을 뻗어 더듬자 스마트폰이 잡혔다. 전화였다. 상대는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우울한 빛이 사라지지 않던 얼굴에 마침내 화색이 돌았다. 유진은 늘어졌던 몸을 발딱 일으키곤 곧장 전화를 받았다.
“[할머니!]”
단말기 너머에서 기분 좋은 웃음이 터졌다. 보고 싶었단다, 잘 지냈니, 하며 다정히 말을 붙이는 목소리에 유진의 얼굴이 점차 밝아졌다. 할머니인 이자벨이었다. 오랜만에 안부 인사 겸 전화가 온 거였다.
“거긴 어때요? 답답하지 않아요?”
“답답하기는. 바다가 탁 트여서 꼭 샌디에이고 생각이 나. 어제도 시원하게 파도를 탔지.”
“거기 파도도 라호이야 해변이랑 비슷해요?”
“라호이야보다는 조금 더 거칠어. 그런데 그게 꼭 나쁘지만은 않더구나.”
호탕한 웃음이 이어졌다. 유진도 뒤따라 웃었다.
시답잖은 잡담은 한동안 이어졌다. 이자벨은 자신이 겪은 일을 늘어놓기 바빴으며 유진은 전해지는 모든 경험이 기꺼웠다. 스노클링을 했는데 육지로 올라오기 싫었다든지. 오랜만에 펀치를 마시며 옆에 있던 젊은이와 춤을 췄다든지. 일견 평범할 수도 있는 이야기들이 이자벨의 입을 타고 환상이 되어 전해졌다.
한참을 떠들다가 이자벨이 마침내 입을 다물었다. 들뜬 숨소리가 단말기 너머에서 잠시 울렸다. 유진의 웃음마저 잦아들었다. 잠깐의 공백 끝에 이자벨이 여상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유진.”
“Hm?”
“너는 어떻게 지내니?”
유진은 곧장 대답하는 대신 입을 달싹였다.
이자벨은 유진에게 단순한 할머니가 아니었다. 말하자면 절친한 친구였다. 동시에 든든한 버팀목이었고. 스케이팅을 시작한 것도 이자벨이 권한 덕분이었다. 이자벨은 지금껏 유진에게 수많은 도움을 주었고 그 도움 하나하나는 유진이 성장하는 데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그랬기에 유진은 더는 이자벨을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사랑하는 할머니가 시한부 판정을 받고 요양 겸 마지막 여행을 떠난 상태라면 더더욱.
“별일 없어요. 언제나 똑같아요.”
유진은 태연하게 말했다. 어차피 틀린 말도 아니었다. 유진 이그나시오 차의 삶에 눅진히 달라붙은 슬럼프는 얼마 전부터 지독한 일상이 되었으니까.
이자벨은 잠시 침묵했다가 대답했다.
“그것참 유감이로구나.”
“네?”
“네 입에서 언제나 똑같다는 소리가 나온다는 건 참 슬픈 일이거든. 비단 너뿐만이 아니란다, 유진. 헤수아도, 라껠도, 가비도 마찬가지야.”
뜻 모를 소리였다. 유진이 잠시 눈을 굴리고 있는데 이자벨이 쾌활한 목소리로 말을 끝냈다.
“시간이 되거든 한번 놀러 오거라. 이곳에 빙판은 없어도 파도가 환상적이니까.”
유진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게요.”
대화는 흐지부지 끝났다. 단말기 너머 이자벨을 부르는 소리가 어렴풋이 전해진 까닭이었다. 유진은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할머니께 언제나 고맙다고 인사하며, 부디 아프지 말고 즐겁게 지내라고 인사했다. 이자벨은 호쾌한 웃음으로 대답했다.
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유진은 고개를 돌렸다. 샌디에이고는 침침한 저녁을 맞이하고 있었다. 창문 너머 바깥에선 고양이 울음소리가 멍하니 울렸다. 오늘따라 달빛이 흐렸다. 어쩌면 아직 완전한 밤에 이르지 않은 탓인지도 몰랐다.
잠시 고민하던 유진은 이내 인터넷을 켜 자신의 이름을 입력했다. 관련 기사가 주르륵 떴다. 동영상으로 들어갔다. 그랑프리에서의 경기 영상이 맨 위에 있었다. 조금 더 내렸다. 짧으면 몇 주, 길면 달 간격의 영상들이 미끄러졌다. 유진은 개중 아무 영상이나 눌렀다. 섬네일에는 붉은 옷을 입은 제가 이나 바우어를 펼치고 있는 모습이 대문짝만하게 박여 있었다.
영상은 소란스러웠다. 언제 경기였는지 기억도 안 났다. 외관으로 봐선 주니어 때 같았다. 화면 속 어린 유진은 음악에 맞추어 스텝을 밟고 스핀을 돌고 점프를 뛰었다. 지금의 유진이 보기에 한참 서툰 실력이었다.
영상을 따라 댓글 창을 쭉 내렸다. 주로 보이는 건 귀엽다느니 멋지다느니 하는 칭찬. 조금 더 들어가자 자세 지적부터 원색적인 비난까지. 각양각색이었다. 그것들은 전부 넘겼다. 감흥 없이 스크롤을 내리던 유진이 갑자기 멈춘 건 직후의 일이었다.
6:28 이때의 그는 정말로 즐거워 보여 :)
파랗게 뜬 타임라인을 눌렀다. 경기를 마친 직후 땀범벅이 된 채 웃는 제 얼굴이 화면 한가득 잡혔다.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유진은 그냥 창을 껐다.
할 일도 없었다. 하고 싶은 일도 없었고. 무료하게 애꿎은 액정만 문지르던 유진의 눈에 명함이 잡힌 건 그때였다.
작곡가 김래빈. 나이는 모른다. 그래도 기껏해야 세 살 차이쯤 더 날까. 외관으로 봐선 제 또래일 것 같은데. 타이밍이 나빴을 뿐이지 김래빈 개인에겐 별다른 유감도 없고. 마침 심심하기도 하고. 대회에 참가한다면 무슨 노래를 쓸지 궁금하기도 하고. 사실 대회가 석 달 남았는데 노래 초안이 안 나왔을 수가 없으니까.
유진은 아주 잠깐 망설이다가 몸을 일으켜 명함을 가져왔다. 멋들어지게 디보싱 넣은 이름 아래에 있었다. 찾던 것.
이메일. 패스. 사운드 클라우드 아이디. 흥미롭긴 하지만 나중에. 전화번호. 빙고.
문자 메시지 창을 띄운 채 잠깐 고민했다. 뭐라고 보내지. 하지만 유진은 오래 고민한 적이 별로 없었다.
[EeeeeG] Hi
[EeeeeG] 김래빈 맞아요?
[EeeeeG] 나 Eugene!
[EeeeeG] 지금 바빠요? :D
이 정도면 되나. 유진은 가벼운 마음으로 메신저 창을 껐다. 답장은 언제 오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유진에겐 시간이 많았으니까. 중요한 대회 석 달 전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답장은 허기에 패배한 유진이 식은 팬케이크를 쑤셔댈 때까지도 오지 않았다. 소득 없이 터덜터덜 화장실로 들어가 말끔하게 씻은 뒤에도. 오랜만에 누나 레이첼과 게임 한 판하고, 연신 지분거리는 귀여운 동생들과 한바탕 뒹군 후에도. 그리고 다시 씻고 침대에 누울 때까지조차.
“……번호 바꾼 거 아냐?”
유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메신저 창을 쏘아봤다. 읽었다는 표시조차 없었다. 황당할 지경이었다. 명함에 써놓은 연락처라면 외주도 이쪽으로 받는 거 아닌가. 근데 연락을 이렇게까지 확인 안 해도 되나. 벌써 네 시간째였다. 아직 밤 열한 시니 자고 있진 않을 것 같은데.
유진이 미심쩍은 마음으로 전화번호를 뚫어지라 바라봤다. 잘못 입력한 것도 아닌데 말이지. 혹시나 진짜로 번호를 바꿨을까 싶어 영어로 사과 메시지를 두드리던 때였다.
마침내 떴다. 읽음 표시. 동시에 입력 중이라는 자그마한 모션이 창에 올라왔다.
[김래빈] 확인이 늦어 죄송합니다. 차유진 선수십니까?
[EeeeeG] yup (선글라스 쓴 이모티콘)
[김래빈] 개인 사정으로 인해 문자는 확인이 늦습니다. 급한 용건이라면 메일이나 전화가 빠릅니다.
[EeeeeG] ok
[EeeeeG] 나 기억해요
짤막하게 메시지를 보내자 김래빈은 한참 말이 없었다. 입력 중이라는 표시가 떴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유진은 물음표 두 개를 보낼까 하다가 말았다. 김래빈은 그로부터 일 분 뒤에야 다음 메시지를 보냈다.
[김래빈] 지금은 바쁘지 않습니다.
[김래빈] 연락하신 연유가 있으십니까?
문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유진은 메신저 창을 껐다. 그리고 기술의 발전에 감사하며 번역기를 켰다.
연락한 이유라. 딱딱한 AI의 번역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유진은 다시 메신저 창으로 돌아갔다. 이유야 있었다. 간단했다.
[EeeeeG] yes
[EeeeeG] 노래 듣고 싶어요
[EeeeeG] 경기 노래!
대답은 곧장 돌아왔다.
[김래빈] 안 됩니다.
번역기 안 돌려도 이 정돈 알았다. 완강한 거절이었다.
경기할 선수가 음원 듣겠다는데 거절하는 건 대체 무슨 경우지? 유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액정만 노려봤다. 환한 빛에 눈이 아팠다. 그러거나 말거나 화면 속 입력 중 표시는 태연하게 깜빡거렸다.
[김래빈] 카일 코치님께서 연락 주셨습니다. 음원을 들려달라고 부탁하시거든 거절해달라고요. 현재 차유진 선수는 링크장 출입을 금지당한 상태라고 알고 있습니다. 슬럼프 및 정신력 회복을 위한 조치이므로 저 또한 동의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대로 복사해서 번역기에 붙여넣었다. 문장 첫 마디에 카일이 떴다. 비록 철자는 다르지만 김래빈과 차유진 모두가 알 카일이라면 한 명밖에 없었다.
망할 카일! 하다못해 음원 정도는 듣게 해줄 수 있는 거 아닌가. 어차피 링크장 들어가지도 못하는데. 쓸데없이 철저했다. 입술만 잘근잘근 씹던 유진은 메신저 창을 밀어 넘겼다. 카일과의 대화 창은 김래빈 바로 아래에 있었다.
왜 음원도 못 듣게 하냐고 막 입력했을 무렵이었다. 액정 위에서 미리 보기가 깜빡댔다. 김래빈이었다.
[김래빈] 경기 때 사용하실 음원은 불가하지만, 다른 곡은 들려드릴 수 있습니다. 보내드릴까요?
음원은 왜 금지했어요? 유진은 메시지를 착실하게 보낸 후 다시 창을 넘어갔다. 입력 중이라는 표시는 없었다. 반응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유진은 고민하지 않고 순순히 승낙했다. 어차피 심심했으니까. 게다가 제 경기용 곡 편곡을 맡은 작곡가였다. 막 써도 졸작은 아닐 터였다.
[EeeeeG] sure
[EeeeeG] 들려줘요
입력 중이라는 표시가 뜨지도 않았다. 대신 파일 하나가 날아왔다. 제목은 간단했다. 036_E_0502. 다른 설명도 없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창작물을 공유할 때 으레 붙이곤 하는 주절거림조차. 조용한 채팅방은 마치 차유진을 종용하는 듯했다. 어서 빨리 나를 들으라고.
그래서 유진은 파일을 눌렀다. 내려받는 데에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분 삼 초짜리 음원이었다. 재생을 눌렀다.
시작은 느린 현악기 연주였다. 무거운 베이스 대신 일정한 울림을 지닌 가상 악기로 배경을 깐 것 같은데, 정확히 들리진 않았다. 얇은 선율 아래를 단단히 받치는 둥둥거림. 현악기를 조교한 솜씨가 예사가 아니었다.
초마다 악기가 하나씩 쌓였다. 조밀하고 촘촘한 그물망 같았다. 바이올린, 하프, 이름 모를 가상 악기, 종종 끼어들어 한 방을 주는 드럼. 그 외에 차유진이 알지 못하는 악기들까지. 어우러지고 녹아내리다가 순간 치솟고 가라앉는다. 잔잔한 노래였다. 그런데 집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노래가 잦아든다. 마침내 끝맺은 순간 유진은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한발 늦게 자신이 숨을 참고 있음을 깨달았다. 장장 이분 삼 초 동안.
손이 떨렸다. 차유진은 애써 손가락을 놀려 김래빈과의 대화창을 밀어 넘겼다. 그리고 카일과의 대화 창을 넘겼다. 고작 삼 분 전 자신의 항의가 버젓이 떠 있었다.
[EeeeeG] [음원은 왜 못 듣게 했어요? 그 정돈 들을 수 있잖아요.]
바보 같은 유진 이그나시오 차. 입술을 악문 채 타자를 두드리며 유진은 인정했다. 카일은 자신을 너무 잘 알았다.
[EeeeeG] [취소할게요.]
[EeeeeG] [그냥 계속 못 듣게 해줘요. 출입 금지 끝날 때까지.]
[EeeeeG] [들으면 곧장 빙판 가고 싶어질 것 같으니까.]
답장은 곧장 돌아왔다.
[Kyle] lmao
유진은 카일의 대화창을 밀어 끄며 생각했다. 짜증 나.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번엔 유진의 완벽한 패배였다.
대기실은 적막하다. 긴장감 어린 공기 속에서 유진은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 들숨.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가 잠시 참고. 다시 날숨. 카일이 알려준 방법이다. 긴장감을 풀기에 심호흡만큼 효과 좋은 방법은 드물었다.
“유진 차 선수. 준비해주세요.”
관계자가 대기실 너머에서 머리를 빼꼼. 곁에 앉아 있던 카일이 유진의 어깨를 두 번 툭툭. 그러면 유진은 감았던 눈을 뜬다. 몸을 일으킨다. 날이 상하지 않도록 끼운 보호대를 한번 만지작거렸다. 할머니가 직접 달아주신 호랑이가 손끝을 따라 흔들렸다.
이어폰 속에는 오늘 경기 때 쓸 노래가 반복 재생되고 있다. 긴 복도를 걸어 링크장으로 향한다. 노래는 중반부쯤 왔다. 유진은 이때 스텝 시퀀스를 밟고 있을 것이다. 카일은 이번 경기부터 스텝의 난도를 높였다. 본 경기에선 도전해본 적 없는 스핀이 들어갔다. 하지만 유진은 걱정되지 않는다. 그는 안다. 성공할 것이다.
모퉁이를 꺾는다. 두꺼운 문 하나 너머 냉기가 어른거린다. 다시 들숨. 그리고 날숨. 터질 듯한 음악. 관중의 환호. 이때가 가장 차가울 때다. 막상 링크 위에 올라가면 호승심과 집중에 추위마저 잊으니까. 문이 덜컹거릴 때마다 스미는 한기에 숨을 가볍게 골랐다.
“점프 각도 조심해. 연습 때 보니까 너무 꺾이더라.”
“그때 누가 중간에 끼어들었어요.”
“알아. 봤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유진은 깔끔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다시 들숨. 다시 날숨. 숨은 링크장이 아닌 이곳에서 희다.
음악이 멎는다. 쩌렁쩌렁한 환호가 문 너머에서 왕왕 울린다. 이어폰 속에서 유진은 막 하이라이트 부분에 다다르고 있다. 이번 경기를 위해 카일은 안무가와 합심해 이를 갈고 안무를 구성했다. 고난도 스텝. 음악에 따라 늘어질 타이밍에 이나 바우어. 그리고 이어지는 콤비네이션 점프.
“유진. 기억해.”
발목을 단단히 감싼 스케이트. 숨을 고르며 내려다본다. 방울처럼 달린 호랑이가 팔랑거린다.
“네가 아니면 우승할 사람 없어.”
카일은 빈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차유진 또한 안다. 그는 자신이 있었다.
“유진 차 선수. 들어가겠습니다.”
대답 대신 입꼬리를 올렸다.
문이 열린다. 서리 낀 대기실을 뒤로하고, 한기를 지르밞으며 나아간 곳엔 아득하니 눈부신 링크장이…….
낫 터칭 스텝 시퀀스
2
개꿈 꿨다. 침대에 널브러진 채 동태눈 장착한 차유진이 내린 첫 번째 감상이었다.
아침이었다. 언제 잠들었는지는 기억 안 났다. 머리맡에서 스마트폰만 격렬하게 울려댔다. 아침맞이 알람이었다. 허공을 열심히 더듬다가 알람을 밀어 껐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앉는 데에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시계는 굳이 안 봐도 됐다. 몇 시인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아침 여섯 시 이십칠 분. 유진은 선수 생활 시작하고 나서 거의 십 년 동안 매일같이 이 시간에 일어났다. 아침 먹고 동네 한 바퀴 뛰고. 집에서 씻고 장비 챙겨서 링크장 가면 시간이 딱 맞았으니까. 바로 어제도 이때 일어났다. 물론 오늘부턴 링크장 출입 금지당했으니 굳이 일찍 일어날 필요는 없었지만.
유진은 침대에 걸터앉아 하품했다. 침대엔 여전히 온기가 남았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슴푸레한 새벽이 점점이 물러나고 있었다. 일찍 깬 말로리가 비척비척 걸어와 주둥이를 내밀었다. 목을 슥슥 문지르며 유진은 중얼거렸다. 잔뜩 잠긴 목소리가 공간을 가만히 울렸다.
“말로리. 어떻게 생각해?”
순한 말로리는 대답 대신 고개만 살짝 기울였다. 아직 잠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말간 눈. 유진은 코와 코를 콩 부딪치며 말을 이었다.
“조깅 갈까? 아니면 좀 더 잘까?”
왕! 잔뜩 숨죽인 울음에 유진은 말로리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따뜻하고 복슬복슬한 털. 제게 쏟아지는 무조건적인 사랑. 있는 힘껏 사랑스러운 동생을 껴안은 유진은 이내 힘차게 일어섰다.
“산책 갈래?”
단박에 또렷해지는 눈. 모터 단 듯 돌기 시작하는 꼬리를 보며 유진은 활짝 웃었다.
산책 준비는 일사천리였다. 유진에겐 일상이었다. 일찍 일어나기. 씻기. 물 한 병을 챙기고 쭉쭉 몸을 늘렸다. 평소와 다른 점이라곤 손에 쥔 리드 줄뿐이었다.
다녀오겠다는 말은 삼킨 채 유진은 현관문을 열었다. 시원한 아침 바람이 유진의 뺨을 스치고 지나쳤다. 푸르른 새벽빛이 거리를 차분히 적시는 광경. 궁둥이를 붙이고 앉은 말로리가 밭게 호흡하는 소리가 들렸다. 잔뜩 흥분한 게 틀림없었다.
링크장에 못 오른다고 해서 유진이 선수가 아니란 뜻은 아니니까. 앞코를 가볍게 두드린 유진은 이내 씩 웃으며 말로리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쳤다.
“가자, 친구!”
말로라기 총알같이 뛰어나갔다. 유진의 몸도 앞으로 훅 쏠렸다. 저를 이끄는 힘찬 감각에 기꺼이 몸을 맡기며 유진은 바삐 뛰기 시작했다.
샌디에이고는 어김없이 날이 좋았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다. 일찌감치 산책하는 주민들과 바지런히 움직이는 관광객들이 적당히 뒤섞인 풍경이 펼쳐졌다. 유진은 호흡에 신경 쓰며 모퉁이를 돌았다. 유진의 동네는 어디서든 바다가 보였다. 새벽같이 나와 파도를 타는 서퍼들이 개미처럼 점점이 찍혀 있다가 파도에 휩쓸려 사라졌다.
맞바람이 시원했다. 꾸물꾸물 먹구름 꼈던 머릿속이 그제야 상쾌해지는 감각. 로켓처럼 튀어 나가던 말로리도 이젠 익숙하게 유진과 발을 맞췄다. 옆구리가 아플 때쯤엔 목을 축였다. 잠깐 호흡을 고르고선 다시 달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말로리가 멈췄다. 잠깐 쉬기 위함이 아니었다. 배를 붙이고 눕고 숨을 골랐다. 자신을 향한 순한 다갈색 눈이 마치 묻는 듯했다. 여기가 목적지 맞지, 하고.
다다른 곳을 깨닫자마자 유진은 아연해졌다. 커다란 건물. 깔끔하게 마감한 도넛 모양. 유진이 출입 금지당한 링크장이었다.
버릇이란 게 무섭긴 했다. 아침. 산책. 그리고 말로리. 말로리도 아마 알고 있을 거였다. 유진의 아침 루틴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유진의 막냇동생은 정말이지 명석하니까. 평소라면 기꺼웠을 터였다. 말로리를 품 안에 잔뜩 끌어당겨 이렇게 똑똑한 아이는 누구냐며 마구 쓰다듬었을지도. 그러다가 힘찬 걸음으로 건물에 들어갔겠지.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들어가지도 못하는 링크장이 있는 건물. 유진의 입에서 나직이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주인의 불편함을 느꼈는지 말로리의 귀가 펄떡였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둥이를 쿡쿡 미는 모습에 유진은 그냥 너털웃음만 지었다. 하기야. 말로리 잘못이 어디 있다고.
“아무것도 아냐, 친구. 그보다.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네가 아마 이든보다 똑똑할 것 같은데.”
“설마 그러겠어?”
능글맞은 대꾸에 유진은 순간 얼굴을 와락 찡그렸다. 말로리에게 고정됐던 시선이 훽 꺾여 뒤를 돈다. 짝다리를 짚은 채 선 익숙한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유진의 얼굴은 한층 불퉁해졌다. 저 생글생글한 웃음. 누가 봐도 유진 놀리려고 작정한 표정이다.
“쫓아왔어? 음침하게.”
“무슨 소리를. 나는 내 남동생을 사랑하지만 일부러 그의 뒤를 밟는 괴상한 짓은 하지 않아.”
“여긴 왜 온 거야?”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이든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더니 태연하게 덧붙였다.
“너는 링크장 출입 금지당하지 않았어, 유진?”
유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 체감한 것과 타인이 말해주는 것 사이엔 정말 크나큰 간격이 있구나. 쓸데없는 깨달음이다. 속이 울렁거렸다.
하릴없이 리드 줄만 꾹 쥐는데 이든이 눈을 데굴 굴렸다. 유진의 눈이 자연스레 그를 좇았다. 그러고 보니 이든의 차림새. 좀 이상했다.
가벼운 상아색 니트. 그 아래 받쳐입은 셔츠. 깔끔하게 다린 슬랙스까지. 누가 봐도 차려입은 모양새다. 이든이 마지막으로 이렇게 꾸민 건 애인이랑 데이트 나갔을 때인데? 유진의 눈이 설설 가늘어졌다. 울렁이던 속은 그새 뒷전 됐다. 혈육의 연애엔 그다지 관심 없지만 저렇게 빼입고 도착한 곳이 링크장이라는 게 문제였다.
“데이트라도 가? 옷을 왜 그렇게 입었어?”
“응? 아.”
새삼스럽다는 듯 제 옷차림을 한번 점검한 이든은 어깨를 으쓱였다.
“미카엘이 오늘 원정 오거든. 그런데 지난번 그랑프리 파이널 경기 때 편곡 맡아준 작곡가가 마침 와 있다는 소식을 들은 모양이야. 통역을 부탁하지 뭐야? 그 작곡가가 한국인이래.”
미카엘. 유진은 익숙한 이름에 눈을 살짝 찡그렸다. 유진보다 세 살 많은 스케이터인 그는 유진의 주력 경쟁자였다. 활력과 힘이 넘치고 동작이 큰 유진과는 달리 섬세하고 신중한 스케이팅으로 유명한 선수였고.
유진은 지난 그랑프리 파이널을 가만히 더듬어봤다. 차유진은 은메달을 땄고. 금메달은 어김없이 미카엘이었는데. 그날 미카엘의 경기는 유진이 봐도 흠잡을 곳이 없었기 때문에 별로 속상하거나 분하지도 않았다. 음악에 완전히 몰입한 채 연기하던 미카엘을 보며 명성이 어디에 가진 않는구나 체감하기도 했고.
그런데 잠깐만. 이든의 말을 되새기던 유진의 머릿속에 순간 커다란 느낌표가 떴다.
미카엘 정도 되는 선수의 중요한 경기 편곡을 맡아준 작곡가. 근데 마침 미국에 온 그 사람이 한국인이란다.
어째 좀 익숙하지 않나? 묘한 불길함이 뱃속에서 스멀거렸다. 주머니에 넣어놓은 스마트폰이 이상하리만치 신경 쓰였다. 설마. 그러고 보니 미카엘의 그랑프리 파이널 편곡. 카일이 노래를 들으며 순수하게 감탄하던 기억이 있는데.
설마 진짜로?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없었다. 무슨 일 있냐는 이든에게 대답하기도 전이었다. 저 멀리서 누군가가 쾌활하게 말을 걸어온 것이다. 그것도 퍽 익숙한 목소리로.
“이든! 세상에, 유진까지! 이것 참. 설마 날 위해서 형제가 사이좋게 나와줄 줄은 몰랐는데!”
“젠장. 난 갈래.”
“미카엘에게 인사는 하고 가지?”
“인사가 문제가 아니라…….”
유진의 걸음이 떨어지기도 전이다. 저 멀리서 미카엘이 냅다 달려들었다. 결 좋은 금발을 바람에 나부끼며 달려오는 꼴을 보며 유진은 한숨만 푹 쉬었다. 그리고 그 뒤에 보이는 익숙한 얼굴엔 이마를 짚었고.
“이든, 세상에.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작곡가님과 만났는데 대화가 안 통해서 답답해 죽는 줄 알았어. 이놈의 번역기가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하나도 모르겠지 뭐야!”
유진은 부산을 떨어대는 미카엘을 이든에게 떠넘긴 채 몇 걸음 물러나 있는 상대를 뚫어지라 바라봤다. 여전히 날카로운 얼굴. 그래도 훤한 아침에 만나니 이목구비가 또렷하게 보여 강한 인상이 그나마 죽는다. 잘생겼네. 시답잖은 생각이나 하는데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상대의 눈이 동그래졌다.
“미스터 차?”
손을 휘적거리기도 전에 김래빈이 고개를 갸웃 꺾으며 물었다.
“[링크장은 출입 금지 아니셨습니까?]”
“작곡가 씨가 뭐라고 하셔?”
동시에 유진의 목이 이든을 향해 확 꺾였다. 눈을 잔뜩 부라린 유진의 시선이 이글이글 타는 걸 태연하게 구경하던 이든은 그냥 어깨를 으쓱였다.
시끄럽게 종알거리는 미카엘. 능글맞게 웃기만 하는 이든. 그리고 눈치 없는 김래빈.
셋 사이에 낀 차유진은 그냥 절규하고 싶어졌다.
미카엘의 스케이팅은 과연 아름답다. 현대무용보단 발레를 위주로 공부한 미카엘의 스케이팅은 손짓 끝까지 부드럽고 상냥한 구석이 있었다. 빙판을 미끄러지며 음악의 음 하나하나를 표현하는 섬세함. 주니어 시절의 유진을 경기장에 끌고 간 카일은 미카엘의 경기를 보여주며 너도 저런 부드러움을 익혀야 한다고 귀에 딱지가 얹히도록 말했었다.
금메달을 받고 단상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서던 미카엘.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환하게 웃던 미카엘. 고작 세 살 차이지만 어쩐지 묘한 부러움을 일으키던 미카엘.
시니어가 되어 미카엘과 단상에 몇 번씩 오른 지금. 유진은 자신의 기억이 얼마나 미화되었는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다.
“[맙소사! 카일이 정말 이를 갈았네.]”
빙판 위, 펜스에 기대어 선 미카엘이 깔깔 웃었다. 사람은 넷이었으나 빙판 위에 올라간 건 미카엘밖에 없었다. 유진은 미카엘의 발을 단단히 고정한 스케이트를 조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팩팩 저었다.
“[그래서 요 제멋대로인 유진 이그나시오 차가, 빙판을 눈앞에 두고도 날 구경하는 것밖에 못 한다 이거지?]”
“[시끄러워.]”
“[이야. 난리 났네. 난리 났어. 세계선수권 대회는 기대해봐도 좋으려나?]”
그러며 터지는 장난스러운 웃음. 유진은 딱딱하게 굳어가는 입매에서 애써 힘을 풀었다. 이든은 왜 이런 것까지 번역해줘서. 뾰족한 눈으로 노려봐도 그러거나 말거나. 이든은 래빈과 열성 띤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여덟 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이때의 링크장엔 선수들만이 오를 수 있었다. 다른 말로 바꾸자면, 자신의 경쟁자들이 열띤 연습을 이어가는 모습을 가만히 볼 수밖에 없는 시간이란 뜻이었다.
게다가 조금 전부터 묘한 시선이 자꾸만 콕콕 박혀 들었다. 연습 시간인데도 빙판에 오를 생각이라곤 티끌도 없어 보이는, 혹은 오르고 싶어도 못 오르는 듯 펜스 밖만 배회하는 유진을 향한 시선이었다.
아침 연습에 빠지면 저들끼리 은근하게 숙덕거리겠지. 저녁 연습 때도 보이지 않으면 마침내 말이 돌기 시작할 것이다. 슬럼프에 시달리던 유진 차 선수. 마침내 세계선수권 대회를 포기한 게 아니냐고.
유진은 펜스에 턱을 괬다. 미카엘도 연습의 이응 자에조차 관심을 두지 않는 모양새였다. 오히려 유진이 더 흥미롭다는 듯 연실 뺀질뺀질 웃는 얼굴이 눈에 거슬렸다. 진짜 괜히 왔어. 영리한 막냇동생을 조금 원망하고 싶어지는 마음을 꾹꾹 누르며 유진이 눈을 데굴 굴렸다.
“[기껏 링크장에 올라가 놓고. 안 탈 거야?]”
“[오, 가끔은 쉬어야지. 나는 어젯밤에 아주 열띤 연습 덕분에 무릎이 아프거든.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고작 하루 이틀 머물 이곳 빙질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것보단 잔뜩 애달파하는 널 구경하는 게 훨씬 실용적이라.]”
유진이 코웃음 쳤다. 그냥 대화만 하려면 차라리 벤치에 앉아서 나누는 게 낫겠지. 기어코 스케이트를 갈아신고 빙판에 오른 걸 보면 이미 적응 단계에 돌입한 거나 마찬가진데. 미카엘의 이런 능글맞은 대화 방식은 도무지 마음에 안 들었다.
열 오르는 기분이나 만끽하던 유진은 그냥 힐끔 시선을 돌렸다. 래빈과 이든이 저들끼리 열렬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래빈의 말이 끊기지를 않는다. 개중 반절도 못 알아듣겠다는 게 좀 답답했다. 이든은 다 알아듣나. 혈육의 한국어가 자신보다 훨씬 낫다는 사실을 체감한 유진의 눈이 점차 가늘어지던 때였다.
“[이번에 래빈을 채간 건 너라며?]”
빙판 위에서 가볍게 미끄러졌다가 돌아온 미카엘이 또 말을 걸었다. 유진은 미카엘의 말을 가만히 곱씹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채갔다니?]”
“[래빈의 곡 말이야. 나도 이번 선수권 대회 때 쓸 곡을 부탁하려고 연락했는데 가차 없이 거절당했지 뭐야. 이미 선약이 있다면서 말이지.]”
미카엘의 시선이 차유진을 빗겨 지나쳤다. 헤이즐 빛깔 눈동자가 강한 빛에 노랗게 반짝인다. 자연스레 시선을 좇자 끝엔 김래빈이 있었다.
“[설마 그 선약이 카일일 줄은 몰랐는데.]”
미묘하게 차분해진 투로 미카엘이 중얼거렸다. 잠시 들러붙었던 시선은 그 진득함이 거짓말처럼 가볍게 떨어졌다. 유진의 눈만 잔뜩 가늘어졌다. 손가락이 펜스를 바쁘게 두드렸다.
“[그래서. 이번에 래빈이 작업한 네 곡은 어때? 자랑이나 좀 해봐.]”
미카엘이 말을 이었을 때. 산만하게 펜스를 두드리던 손가락이 뚝 멈췄다.
“[몰라.]”
“[응?]”
“[못 들어봤어. 아직. 카일이 금지해서.]”
미카엘의 눈이 동그래졌다. 눈을 정확히 세 번 끔뻑이는 꼴을 보며 차유진은 그냥 귀를 막았다.
“[으하하하! 진짜? 진짜로?]”
박장대소도 그런 박장대소가 없었다. 앞날을 박아넣고 몸까지 고정한 채 펜스를 두드려가며 웃는 미카엘을 빤히 내려다보던 유진은 이를 악물었다. 웃지 말란 소리가 도무지 안 나왔다. 제 상태가 우스꽝스럽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유진이 잘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유진은 미카엘이 눈물까지 훔칠 동안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냥 눈을 부라린 채 미카엘을 빤히 노려봤을 뿐.
“[아니, 대체 왜? 그럴 필요까지 있나? 카일은 선수권 대회 포기했대?]”
“[몰라. 난 그냥…….]”
“[아니다. 확실히. 링크장 출입 금지라면 아예 못 듣게 하는 게 낫겠네. 특히 유진. 너 같은 성격이면 더.]”
이어진 말이 뜻밖이었다. 웃음기가 어려있었으나 척 봐도 진심이었다. 유진이 고개를 살짝 꺾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눈을 찡그리며 물으니 미카엘이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래빈의 곡 말이야. 한번 들으면 스케이팅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게 하는 매력이 있거든.]”
“…….”
“[게다가 유진. 너는 인내심이 턱없이 부족하지. 래빈의 곡을 들려줬다간 카일의 말도 무시하고 몰래 빙판에 오를 게 뻔해.]”
“[나는 코치의 말도 무시하고 막 나가는 사람이 아니야.]”
“[아니. 넌 분명히 그럴걸.]”
미카엘이 피식 웃었다.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확신에 가득 찬 채 자신을 응시하는 눈이 묘하게 거슬렸다. 불퉁하게 팔짱을 끼는데 미카엘이 태연자약하게 물었다.
“[래빈의 곡. 들어본 적 있어?]”
“[있어. 습작이라고 했나. 경기 음원 못 들려주니 미안하다면서 그거 보내줬거든.]”
“[감상은?]”
젠장. 유진은 직전 자신의 말을 곱씹다가 이마를 짚었다. 코치의 말을 무시하고 막 나가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지만 김래빈이 보내줬던 곡을 듣자마자 카일에게 보냈던 메시지는 증거물처럼 남아 있다. 들으면 곧장 빙판에 가고 싶어질 것 같다던 그 문장.
대답하지 않는 유진을 보며 미카엘이 킥킥거렸다. 의식하기도 전에 웃지 말라는 말이 불퉁하게 튀어 나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미카엘은 개의치도 않았지만.
“[어마어마하지? 그런데 말이야. 유진. 네가 뭘 들었든 간에 그건 네 것이 아니거든. 즉 래빈이 널 생각하며 다듬은 곡이 아니란 말이야.]”
“[무슨 뜻이야?]”
“[내 말은. 래빈이 네 경기를, 네 스케이팅을, 너를 분석하고 뜯어 살펴서 네게 가장 잘 어울리도록 만든 곡을 들으면 너는 가만히 자리를 지킬 수 있냐, 이거야.]”
내가 장담하는데. 너는 그러지 못해. 미카엘이 단호하게 말을 끝맺었다. 무슨 소리냐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차유진은 기억한다. 김래빈의 곡을 들었던 순간. 미카엘이 맞았다. 유진은 한숨을 쉬는 대신 고개만 뒤로 젖혔다. 쨍한 빛이 그대로 눈에 떨어졌다. 시릴 정도로 강했다.
“차유진 선수.”
시야에 스미듯 번지는 빛. 그 너머에서 낯선 언어가 유진을 부른다. 김래빈이었다.
이든과 함께였다. 유진은 몸을 바로 하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용건이 있어서 말을 걸었다기보단 본인들의 대화가 끝났음을 알리기 위해 부른 듯했다. 빙판에 서 있던 미카엘이 손을 흔들었다. 김래빈은 허리를 구십 도로 숙였다가 폈다. 거의 부담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정중한 인사였다.
“[이든. 통역해주기로 했으면서! 나를 유진과 팽개쳐놓고 혼자 떠드니 좋았어?]”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래빈. 알다시피 미카엘 선수예요. 할 말이 있다고 해서요. 원래 용건도 그거였는데 좀 늦어졌네요.”
“아, 괜찮습니다! 저도 이든 형과 대화하는 데에 정신이 팔려서……. 오랜만에 뵙습니다, 미카엘 선수!”
이든을 사이에 낀 대화는 능숙하게 이어졌다. 미카엘은 격식 있게 지난 그랑프리 파이널 때의 감사함을 전했다. 이든이 단정하게 번역하면 김래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히려 즐거운 작업이었다며 떠들었다. 차유진은 팔짱을 끼고 셋의 대화를 지켜보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곤 걸음을 옮겼다.
“[미카엘 선수의 스케이팅에 맞추어……, 유진. 어디 가?]”
바삐 통역하던 이든이 물었다. 유진은 어깨를 으쓱이곤 대답했다.
“음료수 살 거야.”
대답을 듣는 대신 유진은 발을 뗐다. 묘하게 속이 안 좋았다.
링크장을 나서서 모퉁이를 꺾었다. 센터 안에는 슬러시와 잡다한 간식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 유진은 익숙하게 계산대로 다가가 몸을 쭉 뺐다. 달콤한 추로스와 계피 냄새가 진동해야 하는데. 아무리 기웃거려도 인기척이 없다. 불도 꺼진 걸 보아 아직 문을 열지 않은 듯했다.
하여간. 가게 주인은 장사를 아주 제멋대로 했다. 유진은 계산대를 툭툭 두드리다가 그냥 걸음을 돌렸다.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을 생각이었다. 목이 마른 건 사실이니까.
그러나 동시에 유진은 알았다. 자신은 그냥 자리를 피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김래빈과 대화를 나누던 미카엘. 미카엘은 올해로 스물하나였다. 이번 세계선수권 대회를 끝으로 은퇴할 가능성이 컸다. 그게 아니더라도 삼 년을 넘기지 못하겠지. 미카엘은 여전히 괴물 같은 기량을 지녔으나 점프 비거리가 점점 짧아지고 있음은 모두가 알았다.
제 기량을 낼 수 없는 상황을 벗어나느냐, 벗어날 수 없느냐에 따라서 은퇴의 기로가 갈린다. 미카엘은 벗어나지 못할 거였다. 슬럼프와 나이는 그 양상이 다르니까. 예전 같지 않다는 표현을 쓰게 되는 순간 선수는 은퇴를 목전에 둔다.
그리고 유진은 말 그대로 ‘예전 같지 않았다’.
유진은 미카엘의 그랑프리 파이널 경기를 기억했다. 관객과 심사위원을 완전히 끌어들일 듯 몰입하게 하던 경기. 음악과 한 몸이 된 듯하던 완벽한 일체감. 후련한 표정으로 김래빈과 지난 경기를 되짚는 미카엘의 표정이 어른거렸다.
김래빈의 곡은 좋을 것이다. 고작 습작 하나 들은 게 전부였으나 유진은 확신했다. 그렇게 좋은 곡을 마음에 찰 만큼 표현하지 못하는 것. 그건 곡에 대한 모욕이다. 유진의 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턱을 툭툭 두드리는 손길은 깨닫지도 못한 채였다.
예전 같지 않은 기량. 자꾸만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은퇴. 좋은 곡을 완전하게 표현해내지 못할 때 유진을 괴롭힐 스트레스. 그리고 할머니.
문제점들이 한두 개가 아니다. 거듭 겹치는 그것들이 머릿속을 짓뭉개고 뭉그러지더니 하나로 단단하게 얽혔다. 묵직하고 생생한 압박감에 유진이 애써 고개를 저을 때였다.
“차유진 선수!”
누군가 차유진의 목덜미를 훅 잡아당겼다. 아차 할 틈도 없이 고개가 뒤로 확 꺾였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반사적으로 악 소리가 튀어 나갔다. 준비되지 않은 억센 힘에 목덜미가 욱신거렸다. 넋을 놨던 유진이 퍼뜩 고개를 돌렸다. 기둥이 지척에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아무리 불러도 반응을 안 하셔서…….”
“Oh.”
그러고 보니 익숙한 목소리다. 김래빈이 멋쩍은 표정으로 손을 놨다. 느슨해진 목덜미를 머쓱하게 훔친 유진이 눈을 굴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렀어요? 미안해요. 못 들었어요.”
“아닙니다.”
“근데 왜 왔어요?”
“아.”
기둥을 피해 걷기 시작하자 김래빈이 서둘러 발을 맞췄다. 시선을 앞에 고정한 그는 이내 거침없이 답했다.
“이든 형께서 차유진 선수께 같이 먹을 음료수를 부탁했다고 해서요. 네 명 몫을 혼자 드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아 도와드리려고 왔습니다.”
“이든이?”
“예? 예.”
듣도 보도 못했는데. 유진은 말을 꺼내는 대신 스마트폰을 켰다. 액정 위에 메시지 하나가 깜빡이고 있었다.
[Ethan] [음료수 아무거나 상관없어.]
[Ethan] Good luck :)
유진은 대꾸도 하지 않고 그냥 화면을 껐다. 이든은 눈치가 빨라도 너무 빨랐다.
반면에 김래빈. 유진은 눈을 떼굴 굴렸다. 옆에서 발맞추어 걷는 김래빈의 머리는 유진보다 살짝 아래 있었다. 김래빈은 눈치가 없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대화한 적은 그보다 적었지만. 그래도 차유진은 확신했다.
이를테면 지금처럼. 곧게 앞만 바라보는 눈은 유진을 위로한다거나 그의 불안을 어설프게나마 위해주겠다는 의지라곤 티끌도 품지 않았다. 말갛게 끔뻑이는 눈은 정말로 손이 부족할 유진을 돕겠다는 의도 그 이상도 이하도 품지 않은 듯했다.
오히려 그게 나았다. 자신을 무슨 녹고 파여 살짝만 건드려도 깨지는 빙판처럼 다루는 사람들엔 넌더리가 났으니까.
모퉁이를 꺾어 돌았다. 침침한 전등이 깜빡였다. 좀 춥나. 겉옷을 입고 올 걸 그랬나. 시답잖은 후회나 중얼거리며 자판기 앞에 섰다. 대화 없던 그네들 사이에서 말이 흘러나온 것도 그맘때였다.
“좋아하는 거 있어요?”
“어……. 글쎄요. 여기엔 없는 것 같습니다.”
“미카엘이랑 이든은 주는 대로 먹어요. 김래빈은요?”
“저도 딱히 가리진 않습니다!”
그렇다면야. 유진은 지폐를 한 장 넣고 버튼을 네 번 연타했다. 주로 마시는 파란색 이온 음료였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캔 네 개가 우르르 떨어졌다. 어차피 그리 크지도 않았던지라 유진의 품에도 충분히 들어갈 거였다. 그런데도 김래빈은 꿋꿋하게 캔 두 개를 나눠 들었다. 양손에 하나씩. 유진은 눈만 데굴 굴렸다.
손에 쥔 캔이 찼다. 손끝이 살짝 얼얼해지는 기분은 마치 빙판을 짚을 때를 떠올리게 했다. 축축한 손끝을 캔에 문지르며 유진이 몸을 일으켰다. 말은 없었으나 차유진과 김래빈은 자연스럽게 걸음을 돌렸다.
“미카엘 선수와는 아는 사입니까?”
돌아가는 길은 적적하지 않았다. 김래빈이 미간을 찌푸렸다가 돌연 물어온 것이다.
“음. 아무래도요? 경기 때 많이 만났어요.”
“확실히……. 같은 선수시니 만날 기회도 많았겠군요.”
“응. 그리고 미카엘이랑 이든이 친구예요. 이든이 여행 갔다가 친해졌다고 했어요. 한 삼 년 전에?”
김래빈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멋진 일입니다, 따위의 반응이 기다렸다는 듯 족족 돌아왔다. 경청하고 있는 건지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지 헷갈릴 일은 없었지만. 그야 말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묘하게 이쪽으로 돌아가는 고개를 보면 제 이야기에 마음 쏟고 있음을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은 법이었다.
“김래빈은 미카엘을 좋아해요?”
말 한마디 던질 때마다 곧장 돌아오는 고개는 제법 웃겼다. 차유진은 조금쯤 가벼운 마음으로 질문을 툭 던졌다. 뜻밖이었던 건 김래빈의 반응이었다.
그러니까,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단박에 고개를 주억거릴 줄은 예상도 못 했다는 뜻이다.
“예! 좋아합니다!”
“Oh.”
너무 당당하고 우렁차서 되려 차유진이 머쓱해졌다.
좋아한다는 사람 마음에 왈가왈부할 만큼 차유진은 어리지 않았다. 잔뜩 상기된 표정, 반짝반짝 빛나는 눈 따위를 보면 어떤 의미로 좋아하는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근데 너무 당당해서 헷갈리기도 하고. 차유진이 할 말을 찾으려 머리를 팽팽 굴리는데 김래빈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미카엘 선수 측에서 먼저 작업 제의를 주셨습니다. 경기 편곡은 그때가 처음이었던지라 처음엔 거절했는데, 정말 열심히 권유해주시고 알려주셔서……. 이참에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여 승낙 후 함께 작업하며 알게 되었습니다. 미카엘 선수의 스케이팅은 정통 발레와 접목된 부분이 많더군요.”
“맞아요. 미카엘 발레 오래 배웠어요.”
“예! 정통 발레의 우아함을 미끄러운 빙판 위에서 섬세하게 잘 표현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미카엘 선수는 스텝 시퀀스와 체인지 풋 스핀을 가장 잘 소화하시는 것 같습니다. 부드럽고 섬세하다는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안무가분과 상의하며 곡을 다듬은 기억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사 년 전 그랑프리 프리 쇼트를 가장 좋아합니다.”
차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 년 전 미카엘은 말 그대로 물오른 선수 중 하나였다. 김래빈이 말한 프로그램도 좋아할 가치가 충분한 경기였고. 유진은 그때 주니어에서 한창 활약 중이었다. 카일이 유진을 미카엘의 경기에 데려간 것도 딱 그맘때였는데.
캔 뚜껑을 툭툭 긁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래빈은 숨도 쉬지 않은 채 말을 토해내고 있었다. 이 사람 작곡가가 아니라 래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김래빈의 직업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던 유진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피겨 스케이팅 좋아해요?”
“예?”
“김래빈 엄청 좋아하는 것처럼 말해요. 경기도 다 기억하고. 기술 이름도 알고.”
“아.”
“미카엘 진짜로 좋아하나 봐요.”
그러자 김래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과는 달랐다. 한껏 차분한 얼굴이었다.
“미카엘 선수의 경기를 기억하는 이유는 경기 음원을 완성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어울리는 박자와 흐름을 찾아내기 위해 몇 번씩 돌려봤습니다. 물론 경기 자체를 즐기기도 했지만요.”
그리고 잠시 침묵. 어색한 간격이다. 말이 이어지지 않자 유진이 고개를 돌렸다. 김래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였다. 무언가 고심하는 듯했다.
다만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잠깐 입을 다물었던 김래빈이 이내 태연하게 말을 이은 것이다.
“저는 차유진 선수를 가장 좋아합니다.”
차유진은 대답하는 대신 눈썹을 슬쩍 올렸다. 조금 전 흥분에 차 말을 쏟아내던 것과는 달리 퍽 침착한 어조였다. 그래서 더 묘하게 느껴졌다. 담담한 말. 그게 꼭, 아주 오랫동안 곱씹고 사유한 끝에 내놓은, 깊이 고심한 만큼이나 단단하게 굳어 바뀌지 않으리란 굳센 확신을 꾹꾹 눌러 담은 것처럼 들려서.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술렁거렸다. 유진을 사랑하는 팬은 전 세계에 있었고 유진은 경기마다 그들의 사랑을 체감했다. 쏟아지는 환호. 경기를 끝내면 날아드는 선물들. 생일마다 오는 메시지북이나 정성 어린 편지들.
그러나 이렇게 진지하게, 얼굴을 맞대고서, 마치 우리가 호흡하듯 너무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그래서 들뜰 필요도 없다는 것처럼. 그렇게 무던한 목소리로 가장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단 말 앞에 붙인다니.
기이한 감각이었다. 오히려 김래빈이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입만 잠깐 달싹이다가 음, 아무튼, 그렇습니다, 하고 만 것이다. 분위기가 한껏 차분해졌으나 차유진은 그게 불편하지 않았다. 호흡 하나하나에 집중할 수 있는 기분이란.
“나 요즘 잘 못 해요.”
“압니다.”
김래빈은 모퉁이를 꺾으며 여상처럼 말을 이었다.
“그래도 가장 좋아합니다.”
“왜요?”
불퉁한 목소리가 튀어 나가자마자 아차 싶었다. 어느새 걸음을 멈춘 김래빈이 살짝 뒤를 돌았다. 차유진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실수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좋아한단 사람에게 대뜸 이유를 묻다니. 심지어 고운 목소리도 아니었을 텐데.
김래빈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날카로운 시선이 마치 무슨 뜻이냐고 빤히 묻는 듯했다. 앓는 소리를 애써 삼키며 유진은 지레 태연한 척 말했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요. 지난번에 말해준 것도 기억해요.”
“지난번 말입니까?”
“밤에. 센터 앞에서 만났을 때요.”
“아.”
김래빈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하는 중얼거림이 어렴풋이 들렸다. 차분히 가라앉은 분위기가 금세 멋쩍어졌다. 아. 이런 어색한 분위기는 별로인데. 망해버린 분위기를 어떻게 띄우나 고심할 때였다.
“말씀드린 사유도 전부 맞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건 부가적인 거라서요. 차유진 선수를 좋아해서 경기를 많이 시청하다 보니 자연스레 보이게 된 장점들입니다. 차유진 선수를 좋아하는 것과는 좀 별개로 두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만만한 목소리였다. 차유진은 반사적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밤에 만났을 적. 김래빈은 차유진을 붙잡고 점프고 스텝이고 연기고 말을 쏟아냈었다. 근데 그게 전부 부가적인 거라니. 차유진이 좋아서 그의 경기를 봤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장점들이라니.
차유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김래빈은 그러거나 말거나 태평하게 말을 잇고 있었다. 눈치 하나는 기함할 정도로 없었다. 이 정도로 집요한 시선도 못 알아채고.
열심히 떠드는 김래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차유진은 이내 적당한 때에 입을 열었다.
“그럼 나 왜 좋아해요?”
김래빈이 눈을 데굴 굴렸다. 대답을 망설이는 듯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던 김래빈은 이내 느릿느릿 말했다. 누가 봐도 다소 꺼리는 말투였다.
“개인적인 사유입니다. 별로 재밌는 이야기도 아니고요.”
“그래요?”
“네.”
차유진은 말꼬리를 잡거나 캐묻지 않았다. 그 대신 멈췄던 걸음을 뗐다. 잠시 멈췄던 발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화는 소강상태였다. 가만히 호흡하는 소리만 어렴풋이 울렸다.
링크장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차유진이 입을 열었다.
“요즘 별로 안 즐거워요. 점프도 다 실패하고. 스텝도 제대로 못 하고. 내가 즐겁지 않은 경기를 팬한테 보여주는 것도 싫고.”
“그렇습니까?”
“그래서 은퇴할까 고민 중이에요.”
카일이 아닌 사람에게 은퇴를 언급하는 건 처음이었다. 아니지. 사실 카일에게도 직접 말한 적은 없었다. 머릿속에 머금었던 단어는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중력에 짓눌려 쿵 떨어졌다. 생각보다 더 무거운 말이었다.
문에 손을 올렸던 김래빈이 뒤를 돌았다. 눈이 마주쳤다. 김래빈은 놀라거나 경악하지 않았다. 되레 평온했다. 흔들림 한 점 없이.
“그렇다면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뭘요?”
“작업이요. 차유진 선수의 은퇴 경기를 어중간한 음악으로 장식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역정이 아니었다. 왜 벌써 은퇴를 걱정하냐는 물음도, 괜찮냐는 질문도 돌아오지 않았다. 너무 담담하게 말한 탓에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맙소사. 이런 반응일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는데.
참았던 웃음이 마침내 터졌다. 숨이 넘어가도록 깔깔거리자 태연하던 얼굴이 마침내 일그러졌다. 커다란 물음표를 그린 것처럼.
“왜, 왜 그러십니까?”
“Wow. [상상하지도 못한 대답인데.]”
“예?”
“김래빈 진짜 웃겨요.”
“사, 사람에게 웃기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을……. 아니. 그보다. 제가 웃깁니까?”
강한 인상이 팍 찌그러졌다. 그래봤자 잔뜩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이니 무서울 것도 없었다. 진짜 웃긴 사람이다. 욱신대는 옆구리를 부여잡고 문을 열었다. 시원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밀려들었다.
“그러고 보니까. 김래빈 몇 살이에요? 난 열여덟!”
“저도 차유진 선수와 동갑입니다.”
“동……. 동?”
“나이가 같다는 뜻입니다.”
“그럼 열여덟?”
“예.”
김래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황급히 들어왔다. 멀리서 펜스에 기대 있던 이든이 손을 휘휘 저었으나 유진은 가볍게 무시했다. 입술이 선명한 호를 그렸다. 한참 쥐고 있던 탓에 미지근해진 캔을 힘차게 흔들며 유진이 말했다.
“그럼 말 놔!”
“말이요?”
“친구끼리는 말 놓으니까.”
김래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친구라고, 그런가, 하며 더듬더듬 중얼거리는 얼빠진 목소리가 그렇게 웃겼다. 차유진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늦었어, 유진.]”
“[팔자에도 없는 심부름 시킨 게 누군데?]”
이든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유진은 대충 눈만 흘기고 빙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연습하던 선수들의 곁눈질이 은근히 닿았다. 그래도 답답하진 않았다.
대신 차유진은 킥킥거렸다. 어중간한 음악으로 장식하고 싶지 않다는 김래빈의 말. 자꾸만 귓가에서 맴돌았다. 김래빈이 최선을 다해서 빚어낸 결과물은 과연 어떨까. 거기에 맞추어 스케이팅하면 얼마나 멋진 결과물이 나올까.
걱정을 덜어도 되지 않을까. 김래빈처럼 굉장한 작곡가가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면.
차유진은 크게 숨을 들이쉬며 기지개를 켰다. 가슴이 뻥 뚫린 것 같다. 그런데 마냥 싫지가 않았다.
채도 낮은 주황. 깜빡이는 전등에 의자에 앉은 김래빈이 처박았던 고개를 들었다. 굳었던 몸을 움찔거리며 으그그, 괴상한 신음까지 흘린 김래빈은 고개를 꺾어 전등을 올려다봤다. 카일이 구해준 작업실은 방음이 완벽했으나 틈만 나가면 나가는 전등이 유일한 흠이었다.
뻣뻣한 목덜미를 주물거리며 김래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곡 프로그램을 열 몇 시간째 돌린 컴퓨터는 흡사 추운 겨울날 흔들어둔 핫팩만치 뜨거웠다. 안경을 내려놓은 손은 이내 책상 위를 더듬었다.
“아, 안약…….”
몸이 성한 구석이 없다. 눈은 쩍쩍 말라서 눈물도 안 났다. 책상 끄트머리로 밀려났던 안약을 간신히 집어 들었다. 수혈하듯 눈에 떨어트리고 잽싸게 깜빡이면. 그제야 김래빈은 한숨을 내쉬었다. 누나가 안 와서 다행이란 생각이 무심코 들었다. 봤으면 또 엄청 혼났을 텐데.
김래빈은 다소 복잡한 눈으로 책상 위 달력을 바라봤다. 십이 월 중순이었다. 열흘쯤만 지나면 벌써 크리스마스였다.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새로운 해가 올 테고. 해가 바뀌고 달이 술렁술렁 넘어가다가 삼 월에 다다르면.
세계선수권 대회는 모든 대회의 종막 같은 거였다. 비정규적으로 잡히는 아이스쇼 같은 종류를 제외한다면 가장 마지막 순이었다. 달력을 바라보는 김래빈의 눈이 점점 가늘어졌다. 석 달. 사실 그보다 조금 안 남았는데.
김래빈의 시선이 다시 모니터로 향했다. 복잡한 프로그램엔 자신이 밤새 찍어놓은 코드가 조밀하게 엮이고 쌓여 있었다. 그리고 가장자리에 찍힌 파일 제목.
새하얗게 표시된 문장을 빤히 바라보던 김래빈은 손을 뻗어 컨트롤 에스를 눌렀다. ‘E.I.C_032’ 파일이 저장되었다는 안내창을 눌러 끄는 손길엔 거침이 없었다.
김래빈. 열여덟. 대한민국 학생이라면 응당 찾아오는 지옥의 고삼을 대비하지 않고 냅다 미국에 날아온 연유는 바로 저 파일 때문이다. 팔짱 낀 팔 위로 두드리던 손가락이 점점 빨라졌다. 음. 음. 음. 고심하듯 앓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흘러나왔다. 얼굴을 찌푸렸다가. 작업실을 빙글빙글 돌다가. 머리를 쓸어내렸다가.
단전에서부터 끌어올린 한숨이나 푹 내쉰 김래빈은 책상을 앞에 두고 머리를 박을 때였다. 버려뒀던 스마트폰이 명랑하게 울었다. 누군가의 메시지였다.
김래빈은 다소 울적한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켰다. 마지막까지 열심히 떠들었던 메신저 창이 곧장 화면에 떴다. 차유진이었다. 새벽 세 시 이십칠 분에 마지막 메시지를 보냈다.
[김래빈] 너 빨리 자기나 해
읽음 표시가 아직인 걸 보니 진짜 잠든 모양이었다. 얜 선수면서 생활 리듬이 이래도 되나. 괜히 며칠 전 대화가 떠올랐다. 은퇴할까 고민 중이라던 차유진의 말.
차유진의 결정이니 김래빈이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그건 확실했다. 게다가 카일에게 신신당부를 듣기도 했으니까. 쟤가 무슨 땅굴을 파던 간섭하지 말라고 말이다. 그때 카일은 싱숭생숭한 표정으로 말했었다. 뭐라고 말을 얹으면 가만히 노려보다가 제멋대로 액셀러레이터 밟고 튀어 나가는 놈이라고. 그래서 뭐라고 말을 못 하겠다고.
멀리서 봐왔던 선수 차유진과 친구로서 마주한 차유진은 제법 달랐다. 말 트고 지낸 지 일주일이 조금 안 됐지만 김래빈은 알 수 있었다. 그건 눈치와는 조금 다른 종류였다. 아주 오랫동안 그려왔던 인간상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을 체감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니까.
이를테면 그런 거다. 선수 차유진은 강박적일 정도로 루틴을 지킨다. 김래빈은 차유진이 중요한 경기 직전 수행하는 일들을 눈감고도 읊을 수 있었다.
우선 가볍게 성호를 그으며 빙상장에 오르고. 다음엔 할머니가 만들어주신 호랑이 날 보호대를 왼손으로 톡톡 두드린다. 그리고 무조건, 무슨 일이 있어도 오른발 먼저 보호대를 벗었다. 본인은 자각하지 못한 것 같지만.
하지만 친구 차유진은?
걔는 배고프다며 피자 먹으면 안 되냐고 울부짖다가 아이스크림에 정신 팔리는 놈이었다. 진짜 바보. 또 어딘가 서툰 한국어에 거침없는 발상 덕분인지 함께 있으면 묘하게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물가에 어린애 내놓은 기분이랄까.
한숨 푹 내쉰 김래빈은 차유진과의 대화 창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어젯밤에 빼곡하게 나눈 대화를 가만히 되짚던 손은 이내 머뭇거리며 메시지 하나를 두드렸다.
[김래빈] 잘 잤어?
착실하게 전송까지 누른 김래빈은 그제야 차유진과의 대화 창을 벗어났다.
알림의 주인은 카일이었다. 영어엔 젬병인 김래빈을 배려한 것처럼 번역기를 돌린 한국어 메시지가 덩그러니 도착해 있었다.
[Kyle] 계획 준비 완료.
[Kyle] 앞으로 그를 잘 부탁합니다.
이거 진짜 이래도 되나.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김래빈은 조심스럽게 자판을 두드렸다.
[김래빈] Thank you very much.
[Kyle] (선글라스 쓰고 웃는 이모티콘)
스마트폰을 끈 김래빈은 이내 모니터로 다가갔다. 작업 중이던 파일을 끄는 손엔 망설임이 없었다. 서른일곱 번째 파일로써 ‘유진’ 폴더에 자리 잡은 E.I.C_032를 바라보던 김래빈은 모니터 전원을 꾹 눌러 껐다.
안개 낀 듯 뿌연 머릿속이 속삭이고 있었다. 계획이고 뭐고. 일단은 한숨 자고 생각하자고.
낫 터칭 스텝 시퀀스
3
형형색색 유리를 투과한 오색 빛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단상에 선 신부의 나지막한 강론 소리가 성당을 울린다. 두 손을 맞잡고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유진은 느긋한 신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오늘의 강론은 창세기에 나오는 구절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선 이러한 시련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고…….]”
고루한 이야기다. 자길 향한 믿음과 사랑이 흔들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고자 내리는 시련이라니.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난 안 그럴 텐데. 자신을 굽어보는 십자가 바로 밑에서 차유진은 감히 생각했다.
“[가장 원론적인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조금쯤 생각해볼 수 있는 겁니다. 시련으로써 내리신 죽음이라는 의미에 대해서 말입니다…….]”
사랑하면 힘들게 안 할 거다. 유진은 괜히 입술을 비죽였다. 내가 신이었으면 사랑하는 사람에겐 얼마든지 품을 내어줄 거다. 믿음을 의심하지도 않을 거다. 의심하게 된다면 그 전에 마음을 거둘 것이다. 일부러 시련까지 내려가며 사랑을 증명받고자 하는 마음. 유진으로선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죽음이 고작 누군가의 시련을 위한 거라면. 그건 너무 억울하고 슬프지 않나. 기도하듯 맞잡았던 손이 움찔거렸다.
“[……하여 그들의 죽음을 잊지 않으시고…….]”
말이 길어. 조금 불퉁하게 숨을 내쉰 순간 기다렸다는 듯 옆구리가 찔렸다. 눈을 반쯤 뜨고 노려보니 옆자리에 앉아 있던 레이첼이었다. 마찬가지로 눈 감은 채 손을 맞잡은 그가 입을 빠끔거렸다. 아마 가만히 있으란 뜻이겠지.
“[우리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유진은 눈만 떼굴 굴렸다. 마지막엔 레이첼에게 정신이 팔렸다. 덕분에 어쩌다 끝을 맺었는지 전혀 기억이 안 났다. 신부님은 말을 되풀이할 생각일랑 없다는 양 거침없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길고 무거운 침묵.
성스럽게까지 느껴지는 묵직한 고요함. 그 속에서 유진은 손을 꼭 모은 채 간절히 기도했다. 이런저런 것들. 자연히 기적을 바라게 되는 것들에 대해서.
그 뒤로는 그냥 그랬다. 미사가 으레 그렇듯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몇 번 앉았다가 일어서고 무릎 꿇고. 영성체를 받아 모시고 다시 앉았다가 일어서고 무릎 꿇고. 성당을 왕왕 울리는 성가에 귀를 조금 기울였다가.
“[유진. 내가 맞춰볼게. 너 강론 시간에 졸았지?]”
미사가 끝나고 성당을 나설 때였다. 곁에서 나오던 레이첼이 장난스럽게 타박했다. 유진은 바지 주머니에 손만 찔러넣었다. 불퉁하게 어깨만 으쓱이니 레이첼의 눈썹이 불쑥 아치처럼 솟았다.
“[나는 조용히 했어. 떠들지도 않았고.]”
“[그래. 멋지네. 그래서 졸았다는 소리엔 부정하지 않는구나?]”
“[안 졸았어. 안 졸았다고. 눈 감고 있으면 전부 존 거야?]”
“[그럼 뭘 했는데?]”
“[기도했지. 신앙심을 꽉꽉 눌러 담아서. 하느님께.]”
“[그것 참 흥미로운 소리네.]”
말을 끝맺은 레이첼이 피식 웃었다. 누가 봐도 비웃는 모양새였다. 유진은 코웃음만 치곤 걸음을 옮겼다. 레이첼은 가끔 자신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 것처럼 놀려댔고 그 시기는 때를 가리지 않고 찾아왔다.
“[알겠어. 알겠다고. 그냥 내가 졸았다고 해.]”
“[미사에 오자고 한 게 누구였는지 너무 궁금해지는 말이구나. 유진 차 선수.]”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성의없이 손을 휘휘 젓자 레이첼이 키득거렸다. 그러나 이어진 말은 없었다. 한숨을 꾹꾹 삼킨 유진은 그냥 주머니 속에 잠든 스마트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한참 맞잡고 있었던 손이 괜히 아렸다.
성당 부지를 나선 남매는 이내 익숙하게 차에 올랐다. 레이첼이 시동을 걸 때 유진은 차 시트에 파묻혀 실없이 스마트폰만 만지작대고 있었다. 오늘은 일요일이었다. 그것도 한낮인 두 시. 평소라면 한창 훈련 중이었겠지만.
말하자면 유진은 방황하고 있었다. 십여 년 만에 생긴 자유 시간이었다. 붕 뜬 시간에 가만히 앉아만 있다간 하릴없이 우울해지기만 했다. 유진이 레이첼과 함께 성당에 온 연유도 딱 그러한 까닭이다. 갈피 잃은 시간을 어떻게든 해소하고자. 겸사겸사 기적을 바라고도 싶어져서.
“[집 갈 거야?]”
“[응.]”
레이첼은 두말하지 않고 차를 출발했다.
스마트폰만 두드리던 유진은 갤러리와 인터넷을 번갈아 오가다 오 분 만에 할 일이 없음을 자각했다. 집에 도착하기까진 조금 남았다. 유진은 창밖에 스치는 바다를 구경하다가 창에 이마를 붙였다. 한기가 스몄다.
“[라껠.]”
“[왜?]”
“[내가 생각해봤는데.]”
운전석을 등지고 있었다. 그 탓에 레이첼이 무슨 표정인진 몰랐다. 머리를 차게 식히는 냉기에 유진은 한숨을 쉬며 말을 끝맺었다.
“[역시 점심은 페퍼로니 피자가 좋겠어.]”
“[절대 안 돼. 그건 이미 끝난 대화야.]”
“[페퍼로니.]”
“[치즈야.]”
“[치즈를 왜 그렇게 좋아해?]”
“[네가 할 말이야, 유진?]”
웃음기 잔뜩 깃든 타박에 차유진은 코웃음만 쳤다. 투닥거림과는 달리 차는 매끄럽게 모퉁이를 돌아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깔끔하게 주차를 마친 레이첼과 함께 문을 열고 나설 때 유진은 하릴없이 투덜거렸다.
“[성당에서 점심은 페퍼로니 피자로 변하는 기적이 찾아오길 기도했는데 말이지.]”
“[나 참.]”
“[역시 기적 같은 건 없는 게 분명해.]”
유진이 중얼거리며 현관문을 열었다. 레이첼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문을 닫고 익숙하게 동생인 가브리엘라를 불렀다.
가브리엘라와 레이첼이 부엌으로 향하는 동안 유진은 위층으로 올라갔다. 방문을 밀어 열고 겉옷부터 걸었다. 피자 먹고 뭐 하지. 조깅이나 할까 싶었지만 이미 아침에 동네를 세 바퀴나 돌았다. 서핑을 나가는 것도 영 마음이 안 끌렸고.
유진의 시선이 자연히 방구석으로 향했다. 벽에 기대어놓은 검정 가방이 시야에 잡혔다. 허리에 손을 짚은 유진의 발이 바닥을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입을 잔뜩 옹송그린 채 고민하던 유진은 결국 가방 앞에 무릎을 꿇고 조심스레 지퍼를 열었다.
가방 안엔 잘 관리한 스케이트 부츠 한 쌍이 가만히 잠들어 있었다. 다소 침침한 빛에도 새까만 광이 반질거렸다. 부츠를 만지작거릴 때마다 날 보호대 앞코에 달린 호랑이가 빙글빙글 흔들렸다. 순한 얼굴을 손끝으로 툭툭 두드리던 유진의 몸이 뒤로 벌렁 넘어갔다.
타고 싶다. 링크장을 잽싸게 가를 때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이 그리웠다. 시원한 맞바람. 차오르는 숨. 쿵쾅거리는 심장. 긴장감과 희열. 모든 기술을 완벽하게 수행했을 때 차오르는 고양감. 손끝까지 찌릿하게 만드는 그 감각들.
점차 멍해지던 유진의 의식을 순식간에 일깨운 건 날카로운 알림이었다. 침대 위에 던져놓고 잊어버렸던 스마트폰을 간신히 더듬어 쥐었다. 발신자를 확인하자마자 차유진이 활짝 웃었다. 스케이팅도 못 하는 요즘의 빈자리를 조금이나마 채워주는 천재적인 친구가 어김없이 연락한 것이다!
“여보세요? 김래빈?”
“여보세요.”
낮은 목소리가 한발 늦게 대답해왔다. 심지어는 전화였다. 그들은 대개 메시지로 떠들어댔다. 단말기 너머에서 들리는 래빈의 목소리는 다소 생경했다. 직접 만나서 들을 때보다 한층 낮은 울림이었다.
“너 지금 바빠?”
“아니!”
“점심은 먹었어?”
“그것도 아니! 김래빈은?”
“나도 아직.”
차유진은 웃음을 참지 않고 킥킥거렸다. 숨 쉴 틈도 없이 질문하는 김래빈은 마치 준비된 안내서를 그대로 읊는 듯 들렸다. 시답잖은 대화는 몇 번 더 오갔다. 차유진은 감히 말하건대 답지 않은 김래빈의 머뭇거림을 그 이유로 들 거였다.
전화를 건 걸 보면 분명 아주 중요한 일인 듯한데. 단말기 너머 김래빈은 자꾸 말을 빙빙 돌았다. 말을 걸면 걸수록 목소리가 점점 묘해졌다. 얼굴을 못 본다는 게 이렇게 안타까운 일일 줄이야. 김래빈이 지었을 법한 표정을 몇 가지 상상하던 찰나였다.
한참 침묵하던 김래빈이 마침내 결심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차유진.”
“Hm?”
“내가 지금 작업실에서 만지는 곡이 있는데 말이야. 물론 네 경기 음원은 아니지만.”
어라. 귀를 기울이던 차유진의 눈썹이 훅 솟았다. 낮은 목소리는 뜨문뜨문 끊기는 덕분에 한층 오싹하게 들렸다. 그런데 그게 뭐 대수람. 차유진이 스마트폰을 귀에 더욱 바짝 붙였다. 단말기 너머 김래빈은 자꾸 음, 어, 그러니까, 하며 멈칫거렸다. 차유진이 재촉하듯 몇 번 이름을 부르자 김래빈은 그제야 한숨을 푹 쉬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어서 그런데.”
“응!”
“올래? 작업실. ……그리고 점심 아직 안 먹었으면 같이 먹자.”
반쯤 몸을 일으켰던 차유진이 튀어 올랐다. 방금까지 상념으로 가득했던 머릿속에 새로운 단어가 들어찼다. 김래빈 작업실!
“갈래!”
“어? 어. 주소 메시지로 보내줄게. 끊어봐.”
“Yup!”
전화를 끊기 직전 차유진은 잽싸게 덧붙였다.
“빨리 보내!”
대답은 돌아오지도 않고 끊겼다. 김래빈이 제 말을 들었는지조차 의문이었다. 차유진은 그러거나 말거나 후다닥 달려갔다. 걸어놨던 겉옷을 아무렇게나 걸쳤다. 거울을 보고 흐트러진 머리를 조급하게 다듬는데 스마트폰이 울렸다. 안 봐도 알았다. 김래빈이었다.
작업실 주소는 옆 동네를 가리켰다. 유진이 전속력으로 뛰거나 자전거를 타면 십오 분 안으로 도착했다. 늘어졌던 뇌에 도파민이 돌 듯 정신이 쌩쌩해졌다. 작업실이라니! 김래빈의 작업실에 가는 건 처음이었다. 몇 번 얘기나 들어봤지.
계단을 우당탕 내려갔다. 유진을 부르는 대신 자매끼리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던 레이첼과 가브리엘라의 시선이 동시에 꽂혔다. 치즈피자를 입안 가득 머금은 채 레이첼이 눈을 찡그렸다. 콜라를 들이켜던 가비는 헛기침을 했다.
“[너 어디가?]”
“[놀러!]”
가브리엘라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피자는 전부 먹는다는 외침이 유진의 뒤통수를 향해 날아갔으나 유진은 현관문을 꽝 닫음으로써 공격을 간단히 막았다.
문간에 선 유진은 자판을 빠르게 두드렸다.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읽었다는 표시가 떴다. 드물게도 빨랐다.
[EeeeG] 나 지금 가!
[김래빈] 오다가 넘어지지 말고 걸어와 바보야
히히 웃은 유진이 스마트폰을 껐다. 그리곤 힘껏 뛰기 시작했다.
“너 진짜 뛰어왔어?”
그게 김래빈의 첫 마디였다.
차유진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래빈은 복잡한 표정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고개를 저을 때마다 콧잔등에 얹힌 안경이 흔들렸다. 김래빈이 안경 쓴 모습은 처음이다. 유진은 맹하니 눈을 끔뻑였다.
“걸어오라고 했잖아. 뛰어오다가 넘어져서 다치면 어쩌려고! 너는 네가 운동선수라는 자각이 부족해.”
“아냐! 나 무리 안 했어. 안 넘어질 만큼 뛰었어.”
김래빈의 눈이 슬슬 가늘어졌다. 잔소리 폭탄의 기미를 눈치챈 차유진이 잽싸게 고개를 디밀지만 않았다면 차유진은 아마 김래빈의 프리스타일 잔소리 랩을 실시간으로 관람했을 거다. 부러 해사하게 웃은 차유진은 까치발로 김래빈 너머를 기웃거렸다.
“김래빈 작업실 안 보여줄 거야?”
철옹성처럼 서 있던 김래빈이 그제야 몸을 돌렸다. 어서 오라는 의례적인 말이 뒤따랐다.
김래빈의 작업실은 묘한 내음을 풍겼다. 바람 냄새 같기도, 바다 냄새 같기도 했다. 크지 않은 방엔 커다란 모니터와 전자 피아노와 이름 모를 기계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었다. 반대쪽 구석엔 접이식 침대가, 책상 바로 옆에는 미니 냉장고가. 채도 낮은 색들로 구성된 작업실은 차유진이 들어오자 마치 차유진이 모든 색을 흡수한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김래빈은 연신 두리번거리는 차유진을 침대 아래쪽 공간으로 안내했다. 차유진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행동반경이 넓은 차유진에겐 좀 협소하고 답답해 보였다.
“김래빈 여기서 지내?”
“아니. 작업할 때만 있어. 쉴 때는 주로 호텔에서 머물러.”
“호텔?”
“누나랑 같이 왔거든. 콜라 괜찮지?”
“Yup!”
차유진이 가볍게 대답했다. 미니 냉장고를 뒤적이던 김래빈이 콜라를 건넸다. 시원한 캔을 받아든 차유진은 태평하게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
“노래 들을래! 김래빈이 말했던 거.”
냉장고를 닫고 일어나던 김래빈이 멈칫했다. 대답은 묘하게 엇박자로 돌아왔다.
“마음대로 해.”
김래빈이 모니터로 향했다. 차유진은 침대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몇 번의 달칵거림이 사뭇 조용하게 울렸다. 차유진이 가볍게 숨을 들이켰다. 조금 늦어지나 싶을 때였다. 스피커를 통해 첫 음이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역시는 역시다. 유진은 눈을 감은 채 중독적으로 반복하는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짧은 노래들은 금방금방 넘어갔다. 미완성이 대부분이라 그런 듯했다. 허리를 뚝 자른 듯 단호하게 잘리는 선율들이 퍽 아쉽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마저 이어지는 선율에 금세 사라졌지만.
심혈을 기울인 듯 다듬은 멜로디. 또는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코드. 어떨 때는 베이스만 잡혀 있었다. 유진은 숨을 죽인 채 나직이 흥얼대며 캔뚜껑을 톡톡 두드렸다. 이번 곡은 박자감을 강조한 덕분에 듣기가 특히 편했다.
“김래빈. 내 생각 궁금하다고 하지 않았어?”
“아.”
노래가 순환하듯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을 때 차유진이 말했다. 살짝 비스듬하게 열린 시야 너머 김래빈은 태연한 표정이었다. 괴상한 초록색 에너지 드링크를 딴 김래빈은 여상처럼 말을 이었다.
“말한 후에 생각해 본 건데. 클라이언트에게도 들려주지 않은 초안을 외부인인 네게 공개하는 건 옳지 못하다는 결론에 다다랐어. 같이 작업하는 팀원분이었다면 괜찮겠지만 너는 엄연히 외부인이니까. 그래도 들려주겠다고 했으니 습작들이라도 공개하는 게 맞는 것 같았는데.”
잠깐 침묵한 김래빈이 고개를 팩 돌렸다. 침대에 늘어지듯 기댔던 차유진과 눈이 마주쳤다. 나른하던 정신을 순식간에 깨우는 형형한 눈이었다.
“마음에 안 들어?”
그러며 김래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묘하게 가늘어지는 눈을 바라보며 유진은 고개를 휙휙 저었다. 마음에 들지 않은 건 아니다. 그게 아니라.
“아쉬워.”
“뭐가?”
“나 완성된 거 듣고 싶었어!”
아무리 열심히 다듬었다고 한들 완성작과는 다를 텐데. 짐짓 입술을 비죽이자 김래빈의 얼굴이 묘해졌다. 그리곤 음, 하고 신음하더니 몸을 일으키는 것이다. 차유진은 눈만 끔뻑였다. 모니터 앞에 다가선 김래빈의 등만 빤히 보면서. 그러고 보니 김래빈도 키는 제법 크구나 싶어서.
“완성본……. 들려줄 만한 게 없는데.”
“우.”
하릴없는 소음이 몇 번 울렸다. 폴더를 몇 개 여닫는 모습만 어렴풋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김래빈은 몇 살 때부터 작업을 시작했길래 파일이 저렇게 많지. 묘한 궁금증에 고개만 갸웃거릴 때였다.
김래빈의 스마트폰이 한 번 짧게 울렸다. 마우스에서 손을 뗀 김래빈이 화면을 보더니 곧장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책상 위에 놓인 모자를 아무렇게나 눌러 썼다.
“피자 왔대. 가지고 올게.”
“Oh! 같이 가?”
“아니. 괜찮아. 듣고 싶은 거 아무거나 듣고 있어!”
“Roger.”
차유진은 잰걸음으로 사라진 김래빈의 빈자리에 대신 섰다. 모니터 화면 밝기를 한참 낮춰놨다. 살짝 어둡게 보일 지경이다. 오랫동안 작업하려고 그런가. 시답잖은 생각이나 하며 마우스를 몇 번 달칵거렸다. 뭔가 이목을 확 끄는 제목이나 파일이 없었다. 사실 웬만한 이름들은 전부 날짜와 정체 모를 알파벳뿐이어서 더 그랬지만.
실망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 차유진이 배경화면으로 곧장 넘어갔을 때였다. 솔직히 말해서 차유진은, 누군가 이 기묘한 발견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려 든다면 억울함에 가슴을 치고선 토로할 거였다. 이런 폴더를 바탕화면에 저장해 놓은 김래빈 잘못이라고!
“허…….”
잠깐 굳어 있던 마우스 커서가 설설 움직였다. 그리곤 폴더 하나를 선택했다. 흰 바탕에 깜빡이는 단어 하나를 빤히 들여다보던 유진이 마우스를 눌렀다.
폴더 이름이 ‘유진’이었다.
열린 ‘유진’ 폴더 안에는 자그마한 파일이 쭉 나열되어 있었다. 김래빈이 파일을 저장하는 제목 형식과 똑같았다. 알파벳과 숫자. E.I.C. 그리고 순서대로 찍어놓은 숫자들. 차유진은 멍청하게 눈만 끔뻑였다. 아니 잠깐만. 이거 모를 수가 없는데.
폴더 이름. 유진. 파일 이름. E.I.C. 유진 이그나시오 차. 제 착각인가? 그도 아니면. 기막힌 우연? 혼란스러운 머리에 눈만 깜빡이면서도 손가락은 착실하게 스크롤을 내렸다. 가장 최신 파일. 생성 날짜. 어제. 저장 날짜. 오늘.
이번엔 다시 스크롤을 올렸다. 가장 예전 파일. 첫 생성 날짜. 무려 사 년 전이다. 근데 이상한 건 저장 날짜였다. ……이거 오늘인데?
차유진이 마우스를 움직였다. 아무 파일이나 집어서 클릭한 직후였다. 스피커를 통해 음악이 발화하는 그 순간. 기적의 타이밍처럼 김래빈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커다란 피자 상자를 양손에 들고. 손가락 사이에 낀 일 리터짜리 콜라병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차유진! 나 콜라 좀…….”
“Oh.”
몸으로 문을 밀어 열던 김래빈이 멈칫했다. 드럼 솔로가 경쾌했다. 차유진은 괜히 죄지은 사람처럼 삐걱삐걱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까 좀 무례하지 않았나. 아무거나 듣고 있으래도 막 배경화면에 있는 폴더를 아무거나 열고. 뒤늦은 후회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그. 김래빈.”
“내가 너한테 물어보는 걸 잊었어. 피자 괜찮지?”
“어? 응. 피자 좋아. 근데 김래빈.”
“차유진, 그리고 나 콜라! 콜라 들어줘. 손 아파!”
차유진은 그제야 펄쩍 뛰며 달려갔다. 보물 옮기듯 소중히 콜라를 받아내자마자 김래빈이 한숨을 쉬며 문을 닫았다. 뚜껑 부분을 쥐었던 손가락이 시뻘겠다. 와중에 노래는 또 감미로웠다. 드럼 솔로 위에 베이스와 피아노 같은 가상 악기가 겹겹이 쌓였다. 선율이 퍽 부드러웠다. 혹시 이거 나 생각하면서 쓴 곡이 아니었나 싶을 만큼.
김래빈이 컵과 접시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스피커를 통해 터져 나오는 형형색색의 선율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어 보였다. 콜라 먹을 거냐고 물어오기까지 했다. 차유진은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모니터와 김래빈을 한번씩 번갈아 살폈다.
진짜로 내가 아닌가? 보통 창작가들한테 영감을 아낌없이 퍼주는 존재가 있다고 듣기는 했는데. 그러니까, 뮤즈 말이다. 파일만 보면 누가 봐도 김래빈의 뮤즈는 차유진이었다.
근데 얘는 왜 이렇게 무덤덤하지. 아니. 무덤덤한 수준이 아니라 그냥 관심이 없다. 원래 다들 이런가. 김래빈이 유별난 건지 모든 창작자가 자신의 뮤즈에게 제 창작물 드러내는 걸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지. 차유진은 심란한 표정으로 피자 상자를 열었다. 페퍼로니 피자였다.
“너 페퍼로니 좋아하는 것 같아서.”
김래빈은 밑도 끝도 없이 내뱉곤 피자를 덥석 집어 들었다. 그리곤 곧장 우물우물. 한 입 크게 베어 물고 열심히 씹어 삼키는 모습. 와중에 노래는 한창 절정으로 향하고 있었다. 악기들이 격하게 제 존재감을 발산하며 만드는 선율들. 그것들이 자연스럽게 맞물리며 하나의 곡이 되어가는 과정. 그 끄트머리에.
차유진은 얼빠진 채 고개만 주억거렸다. 피자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아니 잠깐만. 근데 이게 뭐 하는 짓이지. 김래빈보다 자기가 더 신경 쓰고 있는 것 같다는 자각은 뒤늦게 왔다.
“김래빈. 미안.”
“뭐가?”
“폴더 내 마음대로 열었어.”
“내가 아무거나 들으라고 했으니까 그런 거 아니야? 상관없어.”
그리곤 우물우물. 피자를 거침없이 해치우곤 다음 조각을 드는 손길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다. 차유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김래빈이 아무거나 듣고 있으라고 말 안 했다면 멋대로 컴퓨터를 뒤적이지는 않았을 건데.
아니 근데. 그 문제는 해결됐다고 치더라도.
차유진은 피자를 입에 욱여넣었다. 피자를 아무리 씹어 삼켜도 혀뿌리에 맺힌 의문은 목구멍 뒤로 넘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유진 폴더. 그 안에 있는 수많은 파일. 알파벳 E.I.C. 사 년 전 곡을 오늘 만졌다는 표시. 이건 신경 쓰이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결국 차유진은 의문을 끝끝내 삼키지 못했다. 피자를 세 조각이나 해치웠을 때. 마침내 결심했다.
차유진은 사뭇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김래빈.”
“왜?”
“이거 내 노래야?”
뚝. 기다렸다는 듯 노래가 끝났다. 덕분에 차유진의 질문만 허공을 빙빙 맴돌았다. 김래빈의 눈이 언뜻 가늘어졌다.
노래 하나 꺼졌다고 이렇게 조용해질 일인가. 차유진은 아주 오랜만에 신이라는 작자의 멱살을 잡고 싶어졌다. 딱 한 명 꼽을 수 있다면 특히 타이밍의 신 멱살을.
피자를 집어 들던 김래빈의 손이 아주 잠깐 굳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찰나였다. 평온하게 다음 조각을 집어 든 김래빈이 열심히 피자를 씹기 시작했다. 그리곤 꿀꺽. 착실하게 콜라까지 마신 후에야 김래빈의 입이 열렸다.
“널 생각하면서 쓴 노래라고 묻는 거라면, 맞아.”
“폴더 봤어. 전부?”
“응.”
대답이 나왔다. 아주 명료하게.
결국 E.I.C는 유진 이그나시오 차를 가리키는 말이 맞았다. 차유진은 눈을 깜빡이다가 피자를 입안에 밀어 넣었다. 사 년 전. 사 년 전 자신은 주니어에 데뷔하고 시니어를 준비 중이었다. 그때 뛴 경기는 워낙 많았기에 하나하나 기억도 안 났다.
“김래빈은 나 주니어 때부터 알았어?”
반사적으로 질문이 튀어 나갔다. 김래빈은 이번에도 망설이지 않았다. 착실하게 피자를 씹어 삼킨 김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또렷한 목소리가 울렸다.
“응.”
김래빈은 태연하게 말하더니 덧붙였다. “주니어 때부터 계속 봤어. 경기.”
맙소사.
피자에 집중하던 김래빈이 고개를 들었다. 눈을 빠르게 깜빡이더니 뻣뻣하던 고개가 기우뚱 기울었다. 그러더니 한 점 흔들림 없이, 마치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평온한 투로 말하는 것이다.
“차유진. 너 그러다가 피자 흘려.”
그게 중요한 거야?
김래빈의 지적에 반사적으로 입안에 피자를 접어 넣는 차유진은 확신했다. 아마도 제 표정은 얼빠진 바보 같을 게 틀림없다고.
“왜 말 안 했어?”
“내가? 오래 봐왔다고 하지 않았어?”
“그거랑 이거 달라! 그냥 오래 본 거랑 처음부터 본 거랑 완전히 달라! 김래빈 바보야? [맙소사. 신이시여, 맙소사!]”
“나는 바보가 아니야!”
“지금 그게 문제야?”
바보다. 차유진은 김래빈을 만나고 여섯 번째로 확신했다. 김래빈은 진짜 바보였다. 이 바보 어떡하면 좋지.
계속 봐왔다니. 주니어 때부터. 계속. 사 년 동안. 아직까지는 노비스 기간이 가장 길다지만……. 차유진이 제대로 된 선수로서 활약하기 시작한 건 주니어부터였다. 그때부터 계속 봐왔다는 건. 그러니까.
김래빈은 차유진의 경력을 전부 꿰고 있다는 거였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여기까진 괜찮았다. 열성 팬 중엔 어떤 경기에서 어떤 옷을 입었는지까지 기억하는 사람도 심심찮게 있었으니까.
그들과 김래빈의 차이점.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었다.
김래빈은 작곡가였다. 그것도 차유진의 경기 음원을 편곡할.
시선이 자연히 모니터로 향했다. 빼곡하던 파일들이 자꾸만 이목을 끌었다. 괜히 목이 탔다. 콜라를 목구멍에 들이부으며 차유진이 애써 머리를 굴렸다. 저기에 있는 노래들. 차유진을 생각하며 만든 곡들. 자신의 경기를, 연기를 보며 빚어낸 결과물들. 분명한 애정으로 반짝이던 선율들.
나는 그런 사람 앞에서 은퇴니 뭐니 지껄인 거야? 때늦은 깨달음에 차유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변명이나 해보자면. 이럴 줄 몰랐다. 일이 터지기 전에 누가 알겠냐마는. 자신을 가장 좋아한다던 말에 위로받은 건 사실이었다. 김래빈처럼 대단한 작곡가가 자신의 경기를 꾸며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멋진 일이라는 사실. 이건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차유진은 봐버렸다. 유진 폴더 안에 쌓인 시간과 애정들. 말로만 전해지던 것들이 실체를 가지고 눈앞에 들이닥쳤다. 하물며 자신의 경기를 보면서 빚어낸 결과들이었다. 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다듬을 만큼 지대한 애정이 담긴. 그런 작품들이 몇십 개씩 있었다.
자신의 안도감과 상대가 느꼈을 박탈감은 별개였다. 별개여야 했다. 차유진은 김래빈의 단호한 말에 위로받았을지언정 쌓아온 시간이 있는 김래빈은 상처받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너무 가볍게 은퇴를 입에 담았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은퇴 얘기는 하지 말걸! 눈앞이 핑글핑글 도는 기분이었다. 일로 엮였다고 한들 김래빈도 차유진의 팬 중 하나였다. 오래 봐온 팬에게 위로받았다고 면전에다가 은퇴 얘기를 하다니. 머저리 같은 짓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래빈은 우물우물 피자나 씹어대고 있었다. 방금 머릿속에 몰아치던 생각들이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질 만큼 태연해 보였다. 차유진은 울적한 손짓으로 피자 조각을 들었다. 방금까지 괜찮았는데. 페퍼로니가 갑자기 너무 짜게 느껴졌다.
“너 벌써 배불러?”
먹는 둥 마는 둥 하자 김래빈이 물었다. 눈치가 괴멸한 사람답게 짐짓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럴 리가 없다며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차유진이 고개를 내저었다. 저으면서도 느껴졌다. 한껏 우울한 모습일 것이다. 지금의 자신은.
“김래빈한테 은퇴 얘기하지 안 할 걸 그랬어.”
“갑자기?”
차유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괜히 코가 찡했다. 페퍼로니의 소금기 때문인가. 콜라를 꼴깍꼴깍 마시는데 김래빈의 고개가 점점 기울었다. 강한 인상이 기울어지는 목과 함께 찌그러졌다.
“혹시 내가 은퇴 얘기를 어디에 떠벌리고 다닐 거라고 생각한 거야? 만일 그만한 신뢰도 주지 못했다면 사과할게. 네가 세계 선수권대회를 끝으로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다는 얘기는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거야!”
“그거 아니야, 바보야…….”
“바보 아니라니까!”
차유진은 울적한 표정으로 콜라나 따랐다. 김래빈이 눈치 없고 둔한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차유진은 컵을 기울이며 생각해봤다. 내가 좋아하는 선수가 면전에 대고 은퇴를 생각하고 있다면 좀 속상할 것 같은데. 게다가 자신이 상대를 가장 좋아하는 선수라고 꼽은 직후라면 더더욱.
하긴. 김래빈은 좀 이상하게 반응하긴 했다. 은퇴 경기를 엉망으로 장식하고 싶지 않으니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었나. 차유진이 컵 가장자리를 잘근잘근 씹다가 모니터를 응시했다. 며칠 전까진 뜻 모를 안도감을 주던 말이었다. 근데 ‘유진’ 폴더를 봐버렸다.
차유진은 제게 주어지는 사랑을 허투루 대하고 싶지 않았다. 팬들의 사랑이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 또한 뼈저리게 알았다. 무한하게까지 느껴지는 사랑을 상대로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 광막한 애정에 자신이 줄 수 있는 보답.
가장 쉬운 방법은 그들에게 멋진 경기를 보여주는 거였다. 그래서 차유진은 열심히 했다. 차유진이 연습에 매진하는 다양한 이유 안에는 팬들에 대한 고마움 역시 빠지지 않고 끼어 있었다.
“생각 바뀌었어.”
차유진은 허리를 곧게 폈다. 잔소리를 쏟아내던 김래빈이 또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하고 묻는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차유진은 입을 달싹이다가 사뭇 진지한 표정을 그렸다. 김래빈의 고개는 점점 둔각을 그렸지만.
“나 은퇴 안 해. 적어도 이번엔. 이번 선수권대회는 내 마지막 아니야.”
“왜?”
“김래빈은 내 팬이지?”
김래빈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러나 고개는 착실하게 끄덕이고 있었다. 물론 프로로서 공사를 구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말이 뒤따랐다. 차유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 오래 본 팬이 만든 음악으로 은퇴 경기 안 할 거야.”
“…….”
“선수니까 당연해. 그러기 싫어.”
해사하게 웃은 차유진이 말을 맺었다.
“그 대신에, 김래빈이 만족할 만큼 멋진 경기 할 거야!”
그러나 뜻밖에도 김래빈이 얼굴을 찡그렸다. 종잡을 수 없는 반응이었다. 차유진은 당황을 버젓이 드러내는 대신 피자를 우물대기로 했다. 묘하게 입안이 깔깔했다.
김래빈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생각을 정리하는 듯 가만히 가라앉은 눈이었다. 마침내 김래빈이 첫 마디를 뗐을 때 차유진은 마른침 대신 콜라를 삼켜대고 있었다.
“네가 은퇴를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놀라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거야. 하지만 만일 세계 선수권대회가 네 은퇴 경기가 된다면 최선을 다하겠다고 한 말 또한 빈말이 아니야.”
“응.”
“그렇지만…….”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김래빈은 이내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그건 네가 너의 팬이 아닌, 네 경기 음원을 맡은 작곡가로서 말한 거였어.”
김래빈이 눈을 살짝 찡그렸다. 컵을 만지작거리던 차유진의 손이 멈춘 건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네 경기를 즐기고, 스케이터 중에 널 가장 좋아하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무리해서까지 시합에 나갈 필요는 없어. 너도 알겠지만. 휴식도 분명 중요하니까.”
“…….”
“그리고 무엇보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김래빈이 말을 끝맺었다.
“그런 독단적인 결정은 성립하기 어려워. 분명 선수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지만 코치가 괜히 있는 건 아니야. 게다가 혹시 네가 경기 도중 부상이라도 입는다면 방금 우리가 나눈 대화에 따라 생각했을 때 책임은 내게…….”
“김래빈 진짜 바보야?”
김래빈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아니라는 외침이 꼭 비명을 닮았다. 차유진은 혀만 쑥 내밀고 말았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기정사실로 자리 잡았다는 걸 저 바보는 알기나 할까. 씩씩대는 김래빈을 보며 얄밉게 웃어 보인 차유진은 마지막 피자 조각을 날름 집어 들었다.
그러면서도 속으론 생각했다. 김래빈이 맞다. 평소에 눈치는 죽도록 없으면서. 이상한 데에서 정곡을 찌르는 실력이 아주 발군이었다.
공사를 구분해야 했다. 김래빈은 차유진의 팬인 동시에 그의 경기 음원을 맡은 작곡가였다. 감정을 배제하고 교류해야 하는 관계. 차유진은 페퍼로니 피자를 우물거리며 차근히 생각을 정리했다. 김래빈이 그러하듯. 자신 역시.
어차피 그래 봐야 이번 경기가 마지막이 아닐 거라는 건 정해진 거나 다름없지만. 차유진은 어깨를 으쓱이곤 피자 끝부분까지 착실하게 입에 넣었다. 제풀에 지쳐 꺾인 김래빈만 부리부리한 눈으로 차유진을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차유진은 그냥 히히 웃으며 말했다.
“김래빈.”
“왜?”
“Sorry.”
“그래!”
한 치 망설임도 없이 사과를 받아들이는 얼굴이 퍽 당당했다. 김래빈은 자신이 무엇 때문에 사과하는지 알기나 할까. 상자를 치우기 시작한 김래빈의 뒤통수만 빤히 보다가 함께 몸을 일으켰다.
쓰레기를 버릴 때쯤에야 깨달았다. 점심으로 먹은 게 페퍼로니 피자였다는 사실.
“하느님이 내 기도 들어줬나 봐.”
정리가 끝나고 하릴없이 누워 있을 때였다. 배가 부르고 분위기가 편하니 정신이 절로 몽롱해졌다. 혼곤한 정신 속에서 불쑥 말이 튀어 나갔다. 모니터 앞에 앉은 김래빈이 슬쩍 돌아보는 듯 의자가 삐걱거렸다. 대답은 늦지 않게 돌아왔다.
“기도?”
“아까 열심히 빌었어.”
“뭐를?”
“점심 페퍼로니 피자 먹게 해달라고.”
말 끝마디마다 졸음이 묻어났다. 느긋하게 몸을 뒤척이자 김래빈과 눈이 마주쳤다. 김래빈이 눈을 깜빡였다. 차유진도 마찬가지로 끔뻑거렸다. 남의 작업실인데. 이렇게 막 누워 있어도 되나. 하릴없는 의문이 솟았다가 가라앉았다. 김래빈이 별말 없으니까 괜찮겠지. 김래빈은 싫은 건 싫다고 확실하게 말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골몰하는 대신 차유진은 꾸물꾸물 몸을 웅크렸다. 시야가 점차 부예졌다. 속절없는 잠이 몰려왔다. 차유진이 늘어지게 하품했다. 와중에 입은 제멋대로 움직였다.
“누나가 치즈피자 먹을 거라고 해서……. 나는 페퍼로니 먹고 싶었어. 그래서 기도했어. 기적 일어나게 해주세요! 하고.”
“…….”
“기적 진짜 있나 봐. 그러니까…….”
차유진은 눈을 감으며 웅얼거렸다.
“아부엘리따한테도 일어났으면 좋겠다. 기적.”
뭉개진 발음을 끝으로 의식이 끊겼다. 저항할 수 없는 끈질긴 수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