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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선향불꽃 下

* 외전 미포함
어둡다. 어지럽다. 춥다. 산발적인 정보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한 채 드문드문 이어진다. 래빈은 이불을 뒤집어쓴 채 멍하니 사고했다. 흔들린다. 바다는 물결치니 당연하다. 어지럽다. 뱃멀미 때문일 것이다. 속이 텅 빈 기분이다. 아마 저녁을 적게 먹어서 그럴 테다. 떠오르는 단어들에 차근히 이유를 붙였다. 그러다가 눈을 감는다. 비로소 찾아드는 어둠.
밤이다. 동이 트지 않는 새까만 밤이다. 망망대해 위에서 표류하는 래빈을 부드럽게 짓누르는 밤이다. 부유하듯 떠 있다가 다정한 손길에 차근히 침몰하는 밤이다. 바닷새의 울음조차 들리지 않는다. 눈을 뜬다. 나무를 짜 맞춘 벽이 이지러진다. 물결무늬를 눈으로 훑다가 날숨을 뱉었다. 밭은 호흡이다.
무슨 정신으로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눈이 마주친 순간 래빈은 머리가 백지가 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완전히 이해했다. 페로 로꼬가 다감하게 말을 붙였으나 새하얗게 질린 머릿속은 낯선 언어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멍하니 고개를 내젓다가 내뱉은 것도 같았다. 아니야. 유진은 반응하지 않았고 페로 로꼬는 고개를 가볍게 기울였다. 무엇이? 간단한 질문 하나에도 반응하지 않고 그대로 등을 돌렸던가. 쫓기듯 돌아왔던가. 턱 밑까지 차오른 숨을 채 갈무리하지 못하고 침대에 뛰어들었던가. 이대로 침몰하기를 바라며 이불을 뒤집어썼던가. 모를 일이다. 사실 제대로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언젠가 일어날 일이 일어났을 뿐이다. 머리는 알지만 심장은 그러지 못했다. 입술을 사리 물 때마다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비쩍 마르는 목구멍은 마치 언젠가 소금물을 한가득 퍼마셨을 때와 같다. 일곱 살인가 여덟 살인가. 래빈은 바다에 빠진 적이 있다. 농도 짙은 소금물이 입이고 코로 밀려와서. 쩍쩍 갈라지고 따가운 피부. 숨구멍이 틀어막히는 생생한 감각. 그날 고통은 래빈에게 속삭였다. 너는 살아있다. 아, 그러하다. 래빈은 지금도 자신이 살아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되뇐다. 페로 로꼬를 미워하지 마. 그분께선 잘못이 없어. 잘못이 있다면 애초부터 제게 있는 것이다. 입술을 짓씹은 래빈이 베개에 머리를 박았다. 둔탁한 소리가 울린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우습게도 눈물조차 나지 않는다. 래빈은 그저 젖어 드는 천이 숨구멍을 느리게 옥죄는 감각에 집중하며 눈을 감았다. 시야가 사라지고 청각이 날카롭게 벼려지는 느낌은 이런 상황에서도 익숙해서.
예민한 래빈의 귀는 또다시 소음을 잡아챈다. 저 먼 곳에서 다가오는 묵직한 걸음이 있다. 구둣발 소리가 특이하다. 라보 데 누베의 선원들이 신는 구두는 저렇게 가벼이 울리지 않는다. 저건 구두라기보단 운동화다. 그리고 이 배에서 운동화 신는 사람은 손에 꼽지. 동시에 래빈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떨리는 숨을 짓씹어 삼키고 애써 가라앉힌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유진이다. 저렇게 걷는 사람은 차유진밖에 없었다.
아무 말도 없던 차유진. 고개를 젓지도, 놀라지도, 캐묻지도 않던 차유진. 그저 지긋한 시선으로 바라만 보던 유진 이그나시오 차. 아직도 가만한 시선이 눌어붙은 것만 같아 팔을 쓸어내린다. 소름이 오소소 돋은 팔에 차가운 손이 닿는 감각이 생경하다. 발소리가 문 앞에서 멈췄다. 래빈은 숨을 꾹 삼키고 뒤집어쓴 이불을 천천히 끌어 내렸다. 자는 것이다. 자신은 깊은 잠에 빠진 거다. 너무 깊이 잠든 나머지 유진이 자리를 비운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 것이다.
문이 열렸다. 망설임은 없다. 래빈은 질끈 감았던 눈에서 천천히 힘을 풀었다. 호흡한다. 들숨. 날숨. 떨리던 숨이 차근히 안정되어 간다. 걸음이 다가온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다. 차유진은 언제나 저렇게 걸었다. 발소리가 꼭 그 자체를 닮았노라 생각한 적도 있다. 한없이 가벼운 것 같으면서도 들여다보면 깊이를 가늠하기가 힘든. 그런데 한없는 깊이로 하는 일이 고작 제 얼굴 비추는 놀이라서. 반질거리며 비치는 래빈의 얼굴을 보고 못생겼다며 키득거리는 게 전부여서.
“김래빈.”
마른 목소리가 속삭인다. 평소보다 가라앉은 울림이다. 잠기운 때문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 래빈은 대답하는 대신 날숨을 뱉는다. 잠든 사람은 부름에 대답하지 못하니까. 눈을 질끈 감고 괜히 뒤척였다. 말은 한참 없다가 또 불현듯 튀어나온다. 규칙 없이 쓸려 들었다가 사라지는 파도인 양.
“자?”
자고 있다고 생각해 줘. 래빈은 눈을 감은 채 멍하니 뇌까린다. 차유진은 또 말이 없다. 억겁 같은 시간이다. 눈을 감으니 뱃전에 부딪치는 물결 하나까지 들리는 듯했다. 아. 자그마한 밤이다. 세상이 무너지는 날. 종말을 맞이한 세계의 밤은 터무니없이 고요하기만 해서.
“생일 십일 월이라고 했지.”
오늘이 며칠이더라. 가만히 헤아리다가 만다. 자신이 언제 저런 이야기를 했었지. 제 생일을 알려준 적이 있었던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차유진은 왜 알고 있지. 페로 로꼬께서 알려주셨던가. 어렴풋한 기억들은 아무리 떠올려봐도 또렷한 결론을 내뱉지 않는다. 래빈은 굴러가지 않는 머리를 애써 헤집었다. 떠올라라. 부디. 자신이 언제 제 생일을 알려준 적이.
그러나 이어진 자그마한 소음에 사고가 멎는다. DAO 방식으로 작동하는 리볼버를 제대로 조준하기 위해선 한 손으로 몸체를, 다른 손으로는 바닥을 받쳐야 한다. 상대가 움직이지 않고 속도를 요하지 않는 상황이라면 조준은 아무리 느려도 상관없다. 총구를 하늘로 올렸다가 천천히 목표와 영점을 맞춘다. 옷깃이 서로 스치며 내는 소리. 이윽고 뒤통수를 누르는 묵직한 감각.
래빈은 그러나 반응하지 않는다. 우습게도 몸에서 힘이 풀렸다. 들숨. 그리고 날숨. 고른 호흡. 미친 듯이 박동하던 심장이 차츰 느려지기 시작한 것도 그때다. 뒤통수를 짓누르는 무겁고 차가운 총구는 조금도 떨리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차유진은 항상 그랬다. 몸 쓰는 일에는 웬만해선 금방 적응했지. 조립부터 해체까지. 하물며 예시 한번 보여준 사격마저도.
래빈은 기다린다. 때가 오기를. 상대가 방아쇠를 당기기를.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의식이 날아가기를. 차유진이라면 그럴 만하니까. 차유진이라면 그래도 되니까. 아, 물론 자신의 죽음을 알아챈 페로 로꼬에게 어떤 보복을 당할지 생각하면 조금 망설여지기는 하는데. 그러나 유진은 이제 어엿한 라보 데 누베의 선원이다. 그의 쓸모는 페로 로꼬가 가장 잘 알았다. 그러니 헛되이 죽이진 않으리라.
다만 때는 오지 않는다. 머리가 눌려 슬슬 아플 지경이 될 무렵 무게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길게 우짖는 바닷새의 울음만이 선연하다. 고통은 찾아오지 않는다. 의식이 사라지지도 않는다. 방아쇠를 당기며 들리는 마지막 단말마 또한 없다. 대신 닿은 것은 뜨거운 여름. 제 머리를 헤집고 지나치더니 끝끝내 입술을 매만지다 사라지는 것.
“Happy birthday.”
멀어지는 걸음. 이불의 부스럭거림. 이내 잦아드는 소음. 한참 후에야 차유진은 말을 끝맺었다.
“잘 자, 김래빈.”
악몽 꾸지 마. 나직이 속삭이는 목소리에 래빈의 손아귀로 이불이 말려든다. 짓씹은 아랫입술이 뜨거우리만치 아파서.
그날 새벽은 소리 없이 찾아왔다. 짙은 해무가 껴 동이 텄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커다란 종이 새벽 여섯 시를 알렸을 무렵 래빈은 몸을 일으킨다. 날밤을 꼬박 새운 덕분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눈그늘 짙게 내려앉은 채로 허공을 가만히 헤다가 시선을 돌렸다. 유진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유진일 이불 뭉치가 있었다. 느리게 일어났다. 두툼한 이불에서 벗어나자마자 몰아치는 한기에 몸을 움칫 떨었다가.
고개를 숙였다. 얌전히 닫힌 눈꺼풀 덕분에 눈이 마주치진 않았다. 보였다. 길고 얇은 속눈썹이 바람에 흐늘거리는 것까지. 전부. 미간 하나 찌푸리지 않고 고른 숨을 들이쉬었다 내쉰다. 살짝 벌어진 입에서 뜨거운 숨이 터지다가 사라지길 반복하고. 래빈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단정한 이마를, 봉긋한 콧대를, 그리하여 갈라진 입술을 차근히 스칠 요량이었다. 아마도 마지막일 작별 인사를 대신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한 손짓이지만 그런데도 만족할 생각으로.
“……Abuelita…….”
그러나 손은 허공만을 더듬었다.
아부엘리타. 유진이 한숨처럼 내쉰 이름이 누구 것인지 래빈은 안다. 이름이라기보단 호칭에 가까운 그것은 이 외딴 바닷가 마을에서도 간혹 들리는 발음이었다. 내뻗었던 손이 천천히 떨어진다. 손가락이 느리게 곱아든다. 아부엘리타. 래빈은 유진이 이름의 주인 앞에서 어떻게 웃는지 알았다. 기분이 좋을 때 뭐라고 부르는지, 경기에서 승리했을 때 어떤 표정으로 달려가는지조차.
그리하여 래빈은 멍하니 떠올렸다. 할머니. 강원도 어드매에서 딸기 농사를 지으시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얼굴조차 뿌옇다. 떠올릴 수 있는 건, 그래. 상한 음식 잘못 주워 먹고 배앓이 하던 어린 래빈을 무릎에 눕히곤 쓰다듬어주시던 손길. 세월과 농사로 인해 거칠어진 손은 결코 부드럽지 못했으나 어리기만 하던 손주는 마냥 좋았더랬다.
마른 배를 슥슥 문지르시던 할머니. 하나뿐인 손자가 탈 났다는 소리에 소금물과 바늘을 챙겨다 경로정에서부터 잰걸음으로 달려오신 할아버지. 머리맡에서 한참 골려대다가 까무룩 잠드니 그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키던 누나. 곱아들던 손은 이내 손바닥을 파고든다. 마디가 허옇게 떴다. 주먹 쥔 손이 파르르 떨린다. 돌아가고 싶지 않냐고. 래빈은 유진이 물은 말에 고개를 저었으나 때때로 새벽을 맞은 바다에서 강화도의 냄새를 맡았다. 그래서 래빈은 때때로 숨이 막혔다.
같이 갈 수 없음을 안다. 그들은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비극적인 연인이 아니다. 그만치 앳되고 치기 어리지도 않다. 차유진과 김래빈은 어느새 어엿한 열아홉. 스무 살을 맞이하기까지 두 달이 채 남지 않은 지금. 잃기만 하며 살아온 인생이라고 생각했으나 막상 저지르려니 잃을 것이 터무니없이 많다. 그래서 래빈은 숨을 들이켰다. 마디가 허옇게 변할 만큼 세게 쥔 주먹을 떨어트렸다. 대신 손을 뻗어 흐트러진 이불을 쥔다. 조심스럽게 끌어올려 유진의 어깨 위로 덮었다.
잘 자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부디 악몽을 꾸기를. 지난한 꿈 끝에 깨어난 너는 이곳에서 벗어나고파 안달이 나 있기를.
이윽고 래빈은 망설임 없이 등을 돈다. 고른 파도 소리가 마치 환호 같았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음을 깨달은 건 이튿날 아침이었다. 래빈은 낡아빠진 식당 의자에 몸을 붙인 채 멍하니 숟가락질이나 하고 있었다. 허공만 푹푹 뜨는 숟가락을 지나가던 이사벨라가 지적한 뒤에야 깨달았단 뜻이다. 래빈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사벨라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하니 이만 신경을 쓰지 않으셔도 좋다는 태도가 완곡하게 드러났으나 이사벨라는 되레 의자를 끌어 앉았다. 턱을 괴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눈동자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주위가 잔뜩 소란스러운데 막상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식은땀이 식어 몸의 온기를 뺏어갈 즈음이 되어서야 이사벨라가 불퉁한 목소리로 물었다.
“[문제라도 있어?]”
래빈은 대답 대신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이사벨라에게 고민 상담을 받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을뿐더러, 이사벨라의 귀에 들어가는 건 곧 페로 로꼬의 귀에 닿는다는 뜻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유진과의 관계가 영 순탄치 않다는 사실을 페로 로꼬가 알아서 좋을 게 없었다. 그들은 어찌 되었든 결국 이곳을 탈출할 테고, 그러기 위해서 넘어야 할 가장 큰 산이 페로 로꼬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래빈에겐 거짓말 실력이나 상황을 능숙히 넘어갈 만큼 능글맞은 면모가 부족했다.
“[괜찮습니다.]”
“[보통 괜찮다고 하는 놈들 태반이 할 말이 없으니 입이나 놀리는 거던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메노르.]”
“[……정말 괜찮습니다.]”
이사벨라의 눈이 점점 더 가늘어졌다. 래빈은 숟가락을 꾹 쥔 채 마른침만 삼켰다. 넘어가려나. 이사벨라는 페로 로꼬가 아닌 이상 타인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 정도는 눈치 없다고 소문 난 래빈도 알았다. 평소에는 잘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오늘은 왜 이렇게 꼬치꼬치 캐묻는지 알 길이 없다. 눈 딱 감고 외면하고픈 마음에 래빈이 우는 소리를 간신히 삼켰을 때 이사벨라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 애 때문이지? 그 뭐더라. 이그나시오.]”
래빈은 할 말을 찾느라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사벨라의 눈이 점점 더 날카롭게 번득인다. 깍지 낀 손을 탁상 위로 올린 이사벨라의 날카로운 시선으로부터 애써 고개를 돌리던 래빈은 마침내 고개를 저었다. 차유진 때문은 맞다. 하지만 이사벨라에게까지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거짓말.]”
“[정말입니다. 이그나시오는 관계없습니다.]”
“[메노르, 너는 거짓말에 몹시 서툴다는 사실을 다시 알려주겠어.]”
래빈은 입을 달싹이다 그냥 고개만 저었다. 거의 고집스러운 행동이었다. 이사벨라는 눈썹을 들썩였으나 별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그는 대신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을 뿐이다.
“[이그나시오는 방에 있던데.]”
“…….”
“[만나러 가려거든 지금 가는 게 좋을 듯해.]”
만나러 가도 될까. 래빈은 페로 로꼬의 입에서 메노르라는 단어가 튀어나왔을 때 유진의 반응을 떠올렸다. 놀라지 않고, 격분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담담하게, 마치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혹은 처음부터 이럴 줄 알았다는 양 무던한 눈으로 래빈을 가만히 들여다봤을 뿐이다. 래빈은 오히려 그게 두려웠다. 왜 속였냐고 화라도 냈으면 했다. 멱살을 틀어잡고 거칠게 흔들며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냐고 따져 묻기를 바랐다. 유진은 분노에 차 래빈을 매도하는 대신 흔들림 없는 눈으로 그를 지그시 바라봤다. 결국 먼저 물러난 건 래빈이었고.
“[고민할 바에는 그냥 저질러버리렴.]”
그때 이사벨라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래빈은 천천히 숟가락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추호도 관심이 없다는 듯 무심한 눈동자가 허공에서 미끄러지다가 래빈에게 닿는다. 다소 성가시다는 듯 찡그렸으나 래빈으로선 알 턱이 없었다.
“[무엇 때문에 이그나시오가 널 피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만히 있는 것보단 뭐라도 행동하는 게 낫지 않겠니.]”
“[저는…….]”
“[이그나시오에게 무슨 생각이냐고 직접 물어봐. 괜히 끙끙 앓고 있지 말고.]”
이사벨라는 그 말을 끝으로 망설임 없이 몸을 일으켰다. 간다는 말조차 없었다. 래빈은 덩그러니 남아 눈만 끔뻑였다. 직접? 허심탄회하게? 그래도 될까? 머릿속이 뭉게뭉게 피어오른 잡생각들에 어지럽다. 머뭇거리던 래빈은 이내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사벨라의 말마따나 유진은 래빈의 방 안에 있었다. 굳게 닫힌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갔을 때 유진은 침대 위에 널브러진 채였다. 왔냐는 인사는 없다. 곁눈질조차 하지 않은 채 유진은 이불에 코를 처박고 있었다. 죽은 건가 싶어서 눈을 가늘게 뜨자 그제야 오르내리는 등이 보였다. 그래도 죽진 않았네. 시답잖은 안도감에 휩싸이며 래빈은 문을 닫았다. 두어 발 다가서는데 유진이 말했다.
“김래빈도 같이 가.”
“뭐?”
“나랑 같이 갈 거라고. 여기서 같이 나갈 거라고. 김래빈도.”
목소리가 날카롭다. 둔한 래빈마저 그 속에 담긴 불퉁함을 읽어낼 지경이었다. 래빈은 입을 달싹이다가 되물었다. 갑자기? 세 걸음만 디디면 유진에게 닿을 수 있는데 발이 안 움직인다. 잡생각이 사라지는 대신 숨쉬기가 어려웠다. 멍한 물음에 유진은 대꾸를 툭 던졌다. 여전히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로.
“우노가 나한테 그랬어. 메노르 부탁한다고.”
“…….”
“그러니까 김래빈도 같이 가. 김래빈이 메노르잖아.”
무심한 목소리였다. 래빈은 반사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저런 목소리를 들어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 당사자가 되리라곤 상상도 못 했을 뿐이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자신이 얼마나 태만했는지 알 것만 같아서 더욱 머리가 아프다. 머리가 뜨끈하게 열 오르는 감각이 선연했다. 래빈이 입을 달싹이는데 유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김래빈 메노르 아니야?”
“……맞아.”
유진은 또 한참 말이 없었다. 심장이 아프게 뛰는 느낌만이 또렷하다. 어색한 침묵이 방을 물들 무렵 유진이 돌연 물었다. 근데 김래빈.
“나한테 아는 척 왜 했어?”
“뭐?”
“메노르면서 왜 나한테 말 걸었어? 왜 자꾸 찾아왔어?”
“난…….”
“왜 말 안 했어? 메노르라는 거 말도 안 할 거면서 왜 그날 아는 척했어? 나한테 빵은 왜 줬어?”
문득 차유진이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 걸터앉고는 래빈을 지그시 바라봤다.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없어 래빈은 주먹만 쥐었다. 하. 헛웃음보단 조소에 가까운 한숨을 터트린 유진이 팔짱을 낀다.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를 씨근거린 유진의 표정이 차근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추궁하듯 쏘아붙이는 목소리만은 여전해서.
“나는 몇 번이고 물었어!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고, 나는 정말로 몇 번이나 말했어. 그럴 때마다 아무 말도 안 한 건 김래빈이야. 나는 계속 기다렸는데. 말 안 한 것도 김래빈이야.”
목이 턱 막혔다. 누군가 목구멍에 돌멩이를 틀어박는 기분이었다. 왜 아는 척했냐고. 그날. 왜 도와줬냐고. 그야 네가 비 맞고 있었잖아. 내뱉고픈 말은 끝없는 침몰 끝에 심해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비 오는데 네가 우산도 없이 전부 맞고 있었잖아. 그러다가 감기 들 게 뻔한데 내가 어떻게. 혀를 아무리 구부려도 꽉 막힌 목구멍은 아무런 말을 내뱉지 않는다. 대답하지 않자 차유진이 나직이 조소했다.
“이해할 수가 없어.”
“…….”
“[나를 그 정도도 못 믿었단 말이지. 내가 그렇게 못 미덥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말이야.]”
거친 스페인어가 튀어나왔을 때 래빈은 마침내 한숨을 내쉬었다. 돌멩이가 꽉 틀어쥔 목구멍 사이를 비집고 나올 수 있는 유일한 숨이었다. 파르르 떨리던 주먹에서 힘이 빠진다. 맥없이 흔들리는 팔에 애써 힘을 준 래빈은 이내 유진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맞아.”
“…….”
“그래, 너 못 미더워서 말 안 했어. 고작 그만큼 믿었어. 그래서 말 안 했다고 하자. 그러니까…….”
그때였다. 침대 위에 엎어져 있던 차유진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침잠하던 분위기가 단숨에 흔들린다. 잔잔하던 수면에 파동이 가듯 방안의 고요함도 그렇게 깨졌다. 놀랄 틈도 없었다. 거친 움직임에 침대 위 이불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래빈이 물러나지도 못한 채 주춤대는 사이 성큼성큼 걸어온 유진이 손을 뻗었다. 억센 손길이 어깨를 잡아채는 순간 래빈은 얼굴을 찌푸렸다.
“[대체 뭐가 문제야?]”
“뭐?”
“[곧이곧대로 수긍하는 게 내 기분에 도움이 될 줄 알았다면 아주 단단히 착각한 거야.]”
“차유진. 답답한 건 알겠어도 이건 놓고 말해! 게다가 미안하지만 영어로 말하면 나는 알아듣지 못하니까…….”
“[나는 메노르가 아닌 너랑 같이 떠나고 싶었어! 네가 메노르여도 상관이 없었어. 아, 그래. 하지만 넌 이 말도 못 믿음직스럽다고 생각할 테지.]”
뭐? 욱신거리는 어깨에 손을 올리던 래빈이 멍하니 굳었다. 영어는 못 알아듣겠다는 말에 곧이곧대로 스페인어를 한 유진을 칭찬해야 할지. 하필 이 말만 알아들을 수 있다는 현실에 눈물이라도 흘려야 하는지. 래빈은 반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아찔하게 열이 오른 머리는 제대로 사고를 돌리지 않는다. 그제야 눈이 마주쳤다. 씨근거리는 숨을 연신 들이켜던 유진이 거칠게 손을 놓으며 물러났다.
“내 감정 같은 건 안 중요해?”
“아니, 난…….”
“날 돌려보내려고 했던 것도 김래빈 마음 편하려고 한 거고.”
“차유진!”
“내가 페로 로꼬에게 묻지 않았으면 마지막까지 말 안 했을 거지?”
대답할 틈도 없다. 입술을 감쳐 문 유진의 눈이 언뜻 흔들림과 동시에 그가 발을 뗐다. 큼직한 걸음으로 성큼성큼 래빈을 지나치는 유진을 잡지 않는다. 내버려 두려고 했다.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실은 그냥 두려워서. 방을 나서려던 유진이 씨근거리는 숨 사이로 내뱉지만 않았어도 래빈은 그를 내버려 뒀을 거였다.
“[기만자.]”
열이 오르던 머리가 펑 터지는 기분이었다.
래빈은 거침없이 몸을 돌렸다. 문고리를 잡은 유진의 뒷덜미를 잡아챈다. 그리곤 힘껏 당겼다. 이끄는 대로 끌려오던 유진이 비틀거렸다. 일그러지는 얼굴에 래빈은 입술을 짓씹었다. 주먹을 쥔다. 기만자라고? 있는지도 몰랐던 화약에 무심코 튄 불티 같은 말이다. 눈앞이 꺼멓게 질리며 가슴이 터질 듯 박동한다. 주워 삼키고 억눌렀던 감정은 습한 여름에 녹아 뒤섞여버렸다. 래빈은 머리가 아찔하도록 자신을 울리는 감정에 차마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대신 마디가 새하얗게 질린 주먹을 든다. 이를 악물고 있는 힘껏 내질렀다. 둔탁한 타격음이 울린다. 동시에 유진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허?”
주먹이 욱신거린다. 벌게진 오른뺨을 만지작거리던 유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셋. 눈이 마주친다. 래빈은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대신 그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활활 타오르는 유진의 시선이 따끔따끔 피부에 박혔다. 기만자. 그 한마디가 불붙인 화약 더미는 망설이지 않고 제 몸을 터트리고. 욱신거리는 주먹에 다시금 힘을 준다. 둘. 유진이 목을 꺾는다. 하나. 가슴이 터질 듯 부풀다가 가라앉고. 심호흡만 간신히 하던 유진의 손이 파르르 떨리고.
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달려들었다.
무슨 정신인진 몰랐다. 한 대 맞고 한 대 때리고 했다. 말 대신 주먹이 오갔다. 깨물고 머리를 쥐어뜯고 할퀴고 난리도 아니었다. 방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니다가 침대에 머리 박고 탁상 위에 올려놨던 병도 깼다. 유진 위에 올라탔다가 삼 초 뒤에 깔려 있었다. 입안이 터지고 눈앞이 핑글핑글 돌았다. 그런데도 주먹질은 멈추지 않는다. 말 한마디 나누는 대신 몸싸움하는 소리와 억눌린 신음만 한참 나돌았다. 아프기만 하지 별생각도 안 들었다.
선연한 통증 속에서 래빈은 입술을 연신 짓씹었다. 고개가 돌아가고 시야가 번쩍일 때마다 가슴에 응어리졌던 무언가가 움찔대는 기분이다. 터지려는 듯 답답하던 속내가 거친 주먹질에 깨지고 부서진다. 기만이라고. 내가 너를 기만했다고. 거센 힘에 고개가 홱 돌아가는 순간 래빈은 손을 뻗는다. 찢어진 옷깃을 붙잡고 그대로 당긴다. 이마와 이마가 부닥치며 정신이 아찔해졌다. 비틀거리며 물러나는 틈을 타 주먹을 휘둘렀다. 묵직하던 무게가 사라진다. 기만자. 욱신대는 머리를 부여잡고 숨을 몰아쉬며 래빈은 생각한다. 기만일지도 모르지. 그래도. 적어도 나는. 그러나 사고의 끝에 마침표를 찍기 전 채 마르지 않은 잉크 위로 다시 거친 주먹질이 덤벼들고. 래빈은 피하는 대신 거세게 발길질하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한참 후에야 진이 빠질 대로 빠진 래빈은 제 위에 엎어진 유진을 발로 밀었다. 차이는 대로 미끄러진 유진은 반응이 없었다. 대 자로 드러누워 숨만 간신히 고르던 래빈이 힐긋 곁눈질했다. 유진은 등을 돌린 채 축 늘어졌다. 등이 불안정하게 달싹인다. 얼마나 오래 치고받고 싸웠는지 모른다.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손 하나 까딱 못하겠다. 옆구리가 터질 듯 아팠고 몇 대 맞았는지 모를 입가는 다 터져서 비린 맛이 났다. 소강상태에 접어든 방안에 거친 숨소리만 가득 찼다. 따끔거리는 목구멍 너머 허겁지겁 숨을 삼키던 래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유진의 등을 향해 몸을 비틀었다.
“차유진.”
“…….”
“차유진!”
갈라진 목소리를 기어코 높인 후에야 유진이 대꾸했다. 왜? 래빈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손가락으로 등을 툭툭 두드렸다. 유진은 움찔했으나 반응하지 않았다. 돌린 등이 거의 고집스럽게까지 느껴진다. 웬만해선 돌아보지 않겠다는 선언 같았다. 그래서 래빈은 한숨을 삼키고 말했다.
“나 봐봐.”
“싫어.”
“고집부리지 말고.”
“싫어.”
“네가 애야?”
“먼저 때린 거 김래빈이야.”
“미안해. 미안하니까 얼굴 좀 봐.”
그제야 유진이 꿈틀댔다. 꾸물거리더니 천천히 몸을 돌렸다. 뺨이 붓고 입술은 찢어지고. 잘생긴 얼굴이 아주 난리였다. 아마 제 꼴도 엇비슷할 테지. 래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손을 뻗었다. 찢어진 입술에 손이 닿자마자 유진이 얼굴을 찡그렸다. 아파? 아니. 근데 왜 찡그려? 김래빈이 또 때리는 줄 알았어. 불퉁한 대꾸에 래빈이 한숨만 쉬었다. 미안하다니까. 근데 사람 말을 무시한 네 잘못도 있어. 물론 그렇다고 주먹부터 사용한 건 정말이지 잘못된 일이지만…….
“잔소리하지 마. 지금은 듣기 싫어.”
“별로 잔소리는 아닌데.”
“하지 마.”
눈을 찡그린 래빈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천천히 손을 놀렸다. 엉망인 얼굴을 천천히 훑다가 눈가를 지그시 눌렀다. 멍들겠다. 가만히 중얼거리자 얼굴을 찌푸렸던 유진이 코웃음 쳤다. 김래빈이 쳤으면서. 맞는 말이라서 반박도 못 한다. 래빈은 그냥 손을 거뒀다.
한동안 말이 오가지 않았다. 둘 다 입을 꾹 다물고 서로 눈만 집요하게 노려봤다. 누가 먼저 눈을 돌리나 하는 대결 같았다. 잠잠한 침묵이 내리자 통증이 서서히 움찔대며 고개를 든다. 온몸이 욱신거리는 감각을 애써 무시하며 래빈은 흐트러진 유진의 머리를 슥슥 정리했다. 그제야 유진이 눈을 가만히 감았다. 길고 단정한 속눈썹 위로 볕이 한가득 쏟아졌다.
“차유진.”
“…….”
“미안해.”
유진은 눈을 뜨지 않는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래빈은 유진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진짜 미안해. 너를 기만하거나 속이려는 의도는 없었어. 정말이야.
들숨. 이어지는 날숨. 찢어진 오선보 조각을 그러모아 래빈은 떨리는 손으로 쉼표를 그린다. 흐트러진 종이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덧그리는 문장 하나.
“나는 그냥…….”
침묵이 나앉았다. 말은 끝끝내 이어지지 않았다.

“넌 도대체 뭐가 문제니?”
유진은 상냥한 비아냥에 버릇처럼 목을 꺾었다. 근처에 앉아 낡은 총을 천으로 박박 닦던 씽코가 불현듯 물어온 말이었다.
“나 말이에요?”
“그래, 이그나시오. 너 말이야.”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다고 그래요?”
어이가 없어 되묻자 씽코의 눈이 가늘어진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 대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이다. 하긴, 본인이 알고 있으면 고쳤겠지. 어떻게든.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말에 이번엔 유진이 눈을 찡그렸다. 씽코. 왜? 대체 무슨 말이에요? 아무것도 아니야. 재미없어지기 전에 말해요. 난 이미 재미없는데. 농담하지 말고요. 내 농담 마음에 드니? 재미없다고! 젠장, 이게 무슨 피트 앤 매트도 아니고. 유진은 바삐 움직이던 손을 떼고 팔짱을 꼈다.
거의 이 주 만에 밟는 육지였다. 단숨에 거절하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페로 로꼬는 흔쾌히 허락을 내주었다. 덕분에 유진은 지금, 주인 없는 파란 대문 집에서, 씽코를 만나 탈출 계획을 처음부터 다시 세우고 있었다. 배를 나설 때 핑계로 댄 신선한 과일들은 마당 구석에 처박힌 채로.
물자를 정리하느라 한창 바쁘던 찰나 들려온 뜻 모를 소리는 절대 반갑지가 않았다. 팔짱을 끼고 가만히 내려다보았으나 씽코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저 혼자 의문을 제기하고 저 혼자 이해한 듯 어딘가 멍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기계처럼 손만 놀렸다. 유진의 눈썹이 또 불쑥 올라갔다. 와우. 가볍게 탄식했으나 씽코는 반응 한번 없고.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뭐가 문제예요?”
“문제없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너도 그냥 그렇게 생각하렴.”
“대충 넘어가려고 하지 말고. 불만이 있으면 말을 해요. 그래야 고치든 말든 할 거 아니에요.”
그러자 마침내 씽코의 손짓이 멎었다. 굳은 채 음, 하고 뜻 모를 소리만 낸 씽코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곁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유진은 말을 덧붙이는 대신 순순히 가 앉았다. 가을볕이 따스해서 기분은 좋았다. 바람은 적당히 시원했고 바다와 오밀조밀한 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손가락을 가볍게 두드리며 허공을 훑는다. 희끄무레한 물안개 너머 떠다니는 배 두 척을 멍하니 노려보는데 씽코가 말했다. 태연스러운 목소리였다.
“메노르를 증오하니?”
딱. 일정한 리듬으로 박자를 타던 손가락이 일순 멈춘다. 유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지 않는다. 선글라스 탓이 아니다. 씽코는 여전히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시선을 맞추지 않을 거라는 비장한 마음가짐까지 엿보였다. 유진은 씽코의 옆얼굴만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요? 메노르를요?
“왜 그렇게 생각해요?”
“메노르 때문이잖아. 네가 여기에 온 건. 얼굴에 붙인 그것도 메노르 때문 아니니?”
“당신, 라보 데 누베에 첩자라도 심어놨어요?”
“또스, 뚜레스와 꽈트로가 어디서 뭘 하고 지내겠어.”
“죽었다면서요.”
“죽은 거나 다름없지. 법적으론 말이야.”
웃기지도 않네. 유진은 대답 대신 코웃음만 쳤다. 그러나 씽코는 반응하지 않는다. 대신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느리게 내쉴 뿐이다. 유진은 희게 부서지는 날숨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궜다. 십일 월이다. 슬슬 겉옷을 걸치지 않으면 몸이 으슬거렸다.
“그럼 메노르가 누군지도 알겠네요.”
“이그나시오, 장담하건대 나도 상상조차 못 했어.”
“누가 뭐래요?”
유진은 쏘아붙이는 대신 입을 지그시 닫는다. 턱을 괴고 가만히 수평선만 응시했다. 가을바람이 분다.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치는 부드러운 손길에 유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증오하냐고. 메노르를. 그러니까, 래빈을. 우습게도 유진은 그 순간 래빈의 얼빠진 얼굴을 떠올린다. 뺨에 콕 찍힌 점이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움칫거리던 모습.
유진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입가를 만지작거렸다. 손바닥만 한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며칠 전 래빈과 치받으며 싸운 흔적이었다. 손이 어찌나 매운지 빗맞았다고 생각한 곳마저 빠짐없이 멍이 들었다. 그나마 얼굴은 말끔해서 다행이지. 옷을 벗으면 완전 얼룩덜룩, 대충 물감 흩뿌린 캔버스 꼴이었다. 미식축구 주장하던 때에도 몇 번 이렇게 싸우긴 했는데. 유진은 처음 래빈을 봤을 때 저 정도는 가볍게 이길 수 있지 않나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을 비웃으며 손을 뗐다. 김래빈은 과연 메노르였다. 해적 라보 데 누베의 사랑받는 막내.
증오하냐고. 그런 메노르를.
“안 해요.”
유진은 차분히 말했다. 머릿속이 어지러웠으나 내뱉는 말엔 망설임이 없었다.
“당신은 내가 납치당한 게 래빈……, 메노르 탓이라고 했지만. 오, 나는 동의하지 못하겠는걸요. 결국 나를 기절시키고 데려온 건 메노르가 아니라 페로 로꼬와 그의 수하들이에요. 메노르에겐 잘못이 없어요.”
“메노르가 바라지 않았더라면 페로 로꼬는 네게 관심도 없었을 거야.”
“그렇게 따지면 온 세상 불행은 전부 내 탓일걸요.”
유진이 가볍게 코웃음 쳤다. 씽코는 또 말이 없다. 침묵을 틈타 유진은 가만히 생각을 정리했다. 그래. 내뱉은 말이 옳다. 제가 이곳에 떨어진 이유는 래빈 때문이 아니다. 누군가를 증오하려거든 방향이 제일 중요하지. 잘못은 페로 로꼬에게 있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한다.
페로 로꼬의 말마따나, 메노르의 정체를 묻던 그 순간 유진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궁금증이 아니었다. 유진은 그때 확신이 필요했을 뿐이다. 김래빈이 메노르라는 사실. 놀라지 않았다. 그 사실 자체에 화가 나지도 않았다. 과거의 김래빈이 자신을 만나고 싶다는 한마디가 일으킨 나비 효과로 자신이 페루 바닷가 마을에 삼 년이나 떨어져 있었다는 사실. 그 사실을 들었을 때 유진은 메노르가 아닌 페로 로꼬에게 분노했다.
유진이 화가 난 건 그게 아니라.
유진과 래빈은 만났다. 함께 지낸 시간이 길다고는 못하지만 짧지도 않았다. 그 모든 순간 동안 유진은 항상 진심이었다. 시답잖은 대화를 하는 것도, 함께 잡일을 하며 떠드는 것도 좋았다. 항상 티격태격 다퉜으나 그 기저에는 래빈을 향한 굳건한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문 너머의 래빈이 고개를 저었을 때. 아니라고 중얼거렸을 때. 조급한 숨을 애써 삼키며 떨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 유진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가 내게 했던 모든 말과 행동은 진심이었어?
동시에 수면 아래 잠겨 있던 우노의 말이 불쑥 떠올랐다. 메노르를 부탁해. 그를 데리고 도망쳐줘.
유진은 인정해야 했다. 래빈에게 화가 난 이유는 그가 메노르이기 때문이 아니다. 가장 실망스러운 형태로 사실을 알아버릴 때까지 김래빈이 입 한 번 벙긋하지 않은 까닭이다. 기회가 몇 번씩 주어졌음에도 외면했다는 이유다. 숨기고 감춘 끝끝내 드러났을 때 고개를 저은 탓이다. 비 오던 날 왜 자신에게 우산을 맡기고 따끈한 빵을 가져다주었는지 이해할 수 없게 했기 때문이다. 외려 유진은 래빈에게 묻고 싶었다. 메노르라는 사실을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웠냐고. 이 감정은 분노라기보단 서운함에 가까웠는지도 몰랐다.
손을 턴 유진이 몸을 일으켰다. 아무튼 그런 거예요. 대충 얼버무리자 씽코는 말이 없었다. 짙은 선글라스만이 진득하게 따라붙었다. 유진은 태연하게 배낭으로 걸어가 안에 있는 물건들을 괜히 들쑤시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 어쩔 거니?”
씽코가 물었을 때 유진은 입술을 지그시 삼켰다. 간신히 정리됐던 머릿속이 다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김래빈이 메노르다. 메노르가 김래빈이다. 우노는 죽었다. 죽기 직전 우노는 유진에게 메노르를 부탁한다고 했고. 눈을 깜빡이다가 마당 구석에 시선을 던졌다. 아직 꾸리지 않은 배낭이 바닥에 팔락거리고 있었다. 메노르는 김래빈이고 김래빈이 메노르다. 메노르를 부탁한 우노는 죽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메노르와 함께 탈출하고자 한다면 막지 않을게.”
“당신은 애초에 메노르와 나를 부탁받은 거 아니었어요?”
“그건 저번 몫이지. 메노르는 그때 나타나지 않았고. 그러니 이번 의뢰는 별개인 거야.”
“한두 푼 아니라더니 그렇게 입 싹 닦아도 되는 거예요?”
“실패는 실패고 돈은 돈이니까.”
씽코가 딱 잘라 말했다. 유진은 헛웃음만 짓고는 고개를 돌렸다. 손을 배낭 안에 처박고 의미 없이 휘적거리던 유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메노르의 정체를 알았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어요.
“나는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로 돌아갈 거고, 망설이지 않을 거예요. 우노가 내게 메노르를 부탁했으니 그도 함께일 거고요.”
“네가 남의 말을 그렇게 잘 듣는지 몰랐는데.”
“우노의 부탁이잖아요.”
부탁이라기보단 유언이지만. 유진은 이어진 말을 삼켰다. 아마 씽코도 무슨 말을 삼켰는지 알 것이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휑한 마당에 가을바람만 불어댔다. 이상하리만치 마른 바람이다. 유진은 가만히 눈을 떨군 채 한숨만 푹 쉬었다. 우노의 유언이다. 유진은 타인의 부탁에 휘둘리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누군가의 유언을 매몰차게 외면할 만큼 냉정한 사람도 못 됐다. 하물며 그 사람이 제게 첫 번째 희망을 주었다면 더더욱.
“만일 메노르가 원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유진은 씽코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답할 수 없었다.
“죄책감이라는 건 가끔 훌륭한 원동력이 되지. 그건 나도 잘 알아. 하지만 동시에 이성적인 판단을 흐리기도 해.”
“죄책감이 아니에요.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전혀 믿음이 가지 않지만, 뭐. 그래.”
태연한 씽코의 말에 유진은 이젠 버릇 같은 한숨을 삼켰다. 그래서 어쩔 거니. 메노르가 원하지 않으면? 씽코가 끈질기게 물었을 때 유진은 두 손을 들고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몰라요. 됐어요? 모르겠다고요. 젠장, 지금 물건 정리하느라 바쁜데 말 좀 걸지 말아요.”
“너는 가끔 보면 문제를 회피하려 들더라고.”
“날 얼마나 봤다고 아는 체예요?”
“지금도 그래. 나쁘다곤 못 하겠지만 가끔 문제를 직면하는 용기도 필요한 법이야.”
씽코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유진은 터지려는 욕지거리를 질겅질겅 씹어 삼키고 고개를 돌렸다. 거친 손짓으로 배낭을 헤집다가 한숨과 함께 물러났다. 되는 게 없네. 배려 없는 몸짓에 또 온몸이 쑤신다. 유진은 욱신거리는 옆구리를 부여잡고 끙끙 앓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 빌어먹을. 풀리지 않는 난제로 가득 찬 머리는 당장이라도 터질 듯 울렸다.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메노르가 거절한다면 그를 두고 가는 게 맞아요.”
“현실적으로.”
“네. 현실적으로.”
잠시 뜸을 들인 유진은 느리게 덧붙였다.
“현실적으로 페로 로꼬의 관심을 듬뿍 받는 메노르가 나와 함께 탈출하는 건 불가능하잖아요.”
그러며 유진은 몸을 일으켰다. 시야가 훅 올라선다. 바람이 얇은 옷 틈을 베어내며 성큼 다가온다. 가볍게 몸을 떨며 유진의 시선에 문득 배낭에서 쏟아진 물건들이 잡혔다. 온갖 상비약과 말린 식품들. 그 틈바구니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리볼버.
유진은 그 새벽을 기억했다.
어쩐지 숨을 쉴 수가 없던 밤. 공기 가득 물기에 젖어 폐가 완전히 축축해진 듯 느껴지던 새벽이었다. 내뱉는 모든 숨이 떨렸으나 이상하게 머리는 차가웠다. 심장이 빠르게 뛰지도 않았다. 손을 떨지도, 목구멍이 따갑지도, 그냥 주저앉아 울고 싶지도 않았다. 대신 유진은 닫힌 문 앞에서 망설였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는 무얼 할까.
유진은 방 안에 들어섰고 고요한 침묵이 그를 반겼다. 사실 리볼버는 언제 어디서 꺼내왔는지 기억조차 흐릿했다. 뇌리에 선명히 남은 건 오직 하나. 손에 착 감기던 리볼버의 몸체. 총구를 뒤통수에 지그시 누르며 맞추던 영점. 떨리지 않던 손. 불안하게 흔들리던 래빈의 숨이 고르게 펴지기 시작한 것도 딱 그맘때쯤.
유진은 알았다. 깊이 잠든 래빈은 씨근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잘 깨지 않았다. 잠귀는 밝았으나 유진이 곁에 있을 땐 평온한 표정으로 몸을 자주 뒤척였다. 손을 건네면 꼭 붙들었고 머리를 쓰다듬으면 부드럽게 웃기도 했다. 유진은 알았다. 그날 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떨리는 래빈의 숨소리를 들었다. 눈을 질끈 감은 탓에 잔뜩 찡그린 미간을 보았다. 불안하게 흔들리던 속눈썹과 간헐적으로 움찔거리던 눈꺼풀을 똑똑히 기억했다.
“현실적이라는 말은 때때로 훌륭한 방패가 되지.”
그때 씽코가 말했다. 유진은 돌아보지 않는다. 거의 고집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쏟아진 물건들을 배낭에 쑤셔 넣었다. 건포도 팩과 진통제 한 통을 던져넣고 구겨 넣은 옷을 거친 손짓으로 퍽퍽 쑤셨다. 그러나 씽코의 목소리는 어김없이 귀에 닿는다. 입술을 짓씹고 가벼이 내쉬는 숨 따위가 눈에 보이는 가을이니까.
“핑계라고는 하지 않을게. 너는 정말로 현실적으로 생각한 게 맞으니까. 네가 맞아, 이그나시오. 페로 로꼬의 총애를 듬뿍 받는 메노르가 너와 함께 멀쩡히 두 발로 이 바닷가 마을을 탈출할 가능성은 극히 낮지.”
“…….”
“단순히 원한다는 이유로 행동하기에 우리는 목숨을 걸었고.”
어디 목숨뿐이랴. 유진은 흰 숨을 삼켰다. 거칠던 손길이 느리게 잦아든다. 이내 유진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늘을 가득 메운 짙푸른 파랑. 바다보다도 짙고 높은 하늘이다. 여름 내내 낮고 옅던 하늘은 가을을 맞이한 지금에야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말하는 것쯤은 괜찮지 않겠니.”
씽코가 무덤덤하게 말을 끝맺었다. 유진은 한참이나 반응하지 않았다. 씽코도 말을 뱉는 대신 천을 든다. 낡은 총을 천천히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네들 사이에 나린 침묵은 짙은 파랑으로 물들다가 유진이 입을 열자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김래빈이 거절한 일을 내가 강요할 수는 없어요. 어디까지나 본인의 뜻이 가장 중요하니까. 게다가 나는 내심 반길지도 몰라요. 메노르가 함께하지 않는다면 성공률도 높아질 거라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알잖아요.”
“…….”
“하지만 씽코.”
잠시 입을 다물었던 유진이 느리게 입을 연다. 새어 나온 목소리는 답지 않게 희미하기만 해서.
“김래빈이 쓴 노래. 들어본 적 있어요?”
씽코는 알지 못한다. 메노르의 이름이 김래빈이라는 낯선 어감인 것. 메노르가 노래를 쓴다는 것. 그러니 들어본 적도 없다. 그래서 순순히 고개를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아니. 그러자 눈앞의 유진이 등을 돌렸다. 그제야 얼굴이 비친다. 선글라스 덕분에 새까만 세상 위로 흐느러지듯 뭉그러지는 빛이 있다. 유진의 위로 쓰러지듯, 덮이듯, 녹아내리듯, 흘러내리듯 점멸하는 볕이 있었다.
“내가 장담하건대, 씽코. 그가 쓴 노래를 듣는 순간 당신조차 그 애를 사랑하게 될 거예요.”
“그러니.”
“세상엔 어쩔 수 없는 일들이란 게 있어요. 나는 지금껏 내가 이곳에 떨어진 일 또한 그런 종류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어요. 씽코. 나는.”
너는?
어린 소년이 입을 달싹인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은 소금기 하나 없이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빛 속으로 녹아들던 유진이 밭은 숨을 내쉬며 말을 끝맺는 순간, 아. 씽코는 깨달았다. 세상엔 어쩔 수 없는 일들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의 세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메노르의 세계를. 자신이 우노라고 알고 있는 여자는. 페로 로꼬의 손에 이끌려 밟은 타지의 땅에서 눈만 멀뚱히 끔뻑이는 여섯 살의 메노르를 본 순간. 어디선가 얻어들은 잡지식으로 얼기설기 음을 얽어냈을 그 순간부터. 하나라는 흔하디흔한 이름을 지닌 우노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유진 이그나시오 차의 세계를. 열다섯의 메노르는. 비디오테이프를 받아 재생한 순간. 그 속에서 유진이 번호 십이 번을 등에 짊어지고 필드에 나선 그 순간부터. 김래빈이라는 낯선 어감을 지닌 메노르는.
사랑하지 않고야 못 배겼을 것이다. 그들이 사는 세계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치 아름다웠을 테니까. 나 자신을 폭죽처럼 터트리면서까지 달려나갈 수 있는 이유는 알고 있어서였을 것이다. 알맞은 자리에, 알맞은 시간에, 알맞은 위치에 서 있을 그들이 얼마나 눈부신지 모를 수가 없었을 테니까.
유진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환한 역광에 가려 짙은 그림자가 낀 덕분에 표정 하나 읽을 수 없었다. 낮이었다. 밝은 한낮이었고 태양은 하늘 꼭대기에 걸려 번쩍였다. 그런데도 씽코는 순간 보았다. 새까만 하늘. 그 위로 제 몸 날려 스스로 광원이 되는 이들. 손짓하는 대로 기다란 흔적을 남기면서도 기어코 사라지고야 말 사람들.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워 씽코는 마음먹었다. 그들을 안타깝게 여기지 않으리라.
“너는 돌아가겠지.”
씽코의 중얼거림에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돌아갈 거예요. 그리고 후회는 없을 거예요. 우노의 부탁을 가끔 곱씹긴 하겠으나 그뿐일 거예요. 단호한 말이다. 한 치 흔들림 없는 믿음이다. 씽코는 그냥 시선을 떨궜다. 메노르와 함께? 가만히 되묻자 답은 느리게 돌아온다. 나도 모르겠어요.
“김래빈이 나와 함께 떠났으면 좋겠다가도, 그를 여기에 둘 수 없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가……. 그가 거절하리라는 사실이 어쩌면 너무 당연하게 다가와요. 나도 모르겠어요, 씽코. 모르겠는데. 하나도 모르겠는데.”
씽코는 입을 열지 않는다. 입술을 지그시 삼킨 채 고집스레 총만 바라봤다. 유진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그런데도 꿋꿋한 목소리가 들렸다.
“함께 하지 않더라도 좋아요. 나는 그저…….”
어딘가 혼란스럽다는 듯 일그러졌던 얼굴에 서서히 평온이 찾아든다. 찡그렸던 미간을 풀고 감쳐 물었던 입술을 풀어 내렸다. 희미한 웃음을 띤 유진의 눈이 반짝인다. 그게 꼭 불꽃을 닮은 것만 같아서.
확신 어린 표정으로 유진이 말했다.
“나는 그저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대로 만든 김래빈의 음악이 궁금할 뿐이에요.”
잠잠한 목소리가 부서졌다.
씽코는 답하지 않았다.

“모래사장 갈래?”
유진은 느닷없는 목소리에 처박았던 고개를 들었다. 소리 없이 다가온 래빈이 지척이었다. 발끝은 땅에 비비적거리고 눈에는 힘을 잔뜩 줬다. 입매는 완벽한 일자로 굳은 채였다. 마찬가지로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인 래빈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힘을 풀어도 섬뜩한 얼굴이 긴장하니 완전 삼류 공포영화의 악당이다. Wow. 유진은 속으로 과연 해적에 어울리는 얼굴이라는 평을 내리면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나? 괜히 손으로 자신을 집어 가리키니 험악한 얼굴이 고개를 끄떡인다. 유진은 앉아 있던 나무 상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조립했다 해체하기를 열댓 번은 거듭한 리볼버는 대충 보자기에 싸서 구석에 던져넣은 유진은 이내 태평하게 손을 배며 물었다.
“왜?”
“……가서 말해줄게.”
“김래빈 나 피했으면서.”
“그건!”
시체처럼 허옇던 피부가 시뻘게졌다. 근데 혈색이 돌아서 보기 좋다기보단 그냥 제대로 열 받은 악당 같았다. 꼴이 우스워 키득거리니 이젠 귀까지 완전 활활 타오른다. 그러면서도 주먹을 꽉 쥐고 바보야, 남을 함부로 비웃으면 안 돼, 하고 말문을 여는 것이다. 자칫하면 장황한 잔소리가 시작될 테다. 눈치 빠른 유진은 한 발 선수 쳤다. 그래. 응? 알겠어. 어?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였던 래빈이 멍청하게 되묻기만 하자 유진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갈래. 모래사장.
씽코를 만나러 육지에 간 것도 벌써 열흘 전이었다. 일주일이 넘도록 배에서 물살에 흔들리는 건 그다지 달가운 경험이 아니었다. 생전 없던 뱃멀미가 생겨 갑판에 들락거리는 것이 탐탁잖았는지 마떼오에게 욕이란 욕도 전부 들어 처먹었다. 물론 순순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지만. 몇 번 대꾸하니 눈에 불을 켜고 쥐 잡듯이 잡으려 들던 마떼오의 일그러진 얼굴을 회상하던 유진은 낼름 혀를 내밀었다. 가만히 서 있으면 몸이 저절로 흔들리는 배는 이제 질릴 대로 질렸다. 유진은 안정을 원했다. 두 발을 디디고 서면 꿈쩍도 하지 않는 땅을 원했다.
그리고 그걸 전부 차치하고서라도, 거의 보름 만에 대화한 래빈의 제안이었다. 거절하고픈 마음은 한 톨도 없었다.
유진은 가벼운 걸음으로 창고 문을 열었다. 뒤를 돌며 안 오냐고 채근하자 얼떨떨한 대답이 돌아왔다. 어어, 가. 지금 가. 표정조차 목소리와 똑같이 넋이 나간 채다. 조금 전까진 악마의 현존, 삼류 공포영화의 악당을 닮았다고 생각했던 똑같은 얼굴일 텐데도. 뭐 나름대로 귀엽지 않나? 마떼오나 이사벨라가 들으면 기함할 소리를 태연히 뇌까린 유진은 부러 느리게 걸음을 뗐다. 얼빠진 채로 우두커니 서 있던 래빈이 헐레벌떡 따라붙었다.
“근데 나 모래사장 가도 돼?”
“응. 허락받았어.”
“오우.”
뭐 그다지 놀랍진 않았다. 사랑하는 메노르의 부탁인데 뭔들 안 들어줄까. 언젠가 만나고 싶다는 한마디에 냅다 사람까지 납치했으니 정말 못 해줄 게 없겠지. 신랄하게 중얼거리던 유진은 그냥 생글생글 웃으며 어깨나 으쓱였다. 김래빈 잘못이 아니다. 잘못은 처음부터 끝까지 페로 로꼬에게 있다. 그러니까 괜히 기분 잡치지 말자. 오랜만의 나들이였다. 김래빈과 함께라면 더더욱.
작은 보트에 몸을 싣고 물살을 가르며 나아갔다. 부두에 닿아 닻을 내리고 튼튼한 밧줄로 배를 말뚝에 묶을 때까지 래빈은 별말이 없었다. 단조로운 대화만이 가끔 오갔다. 배고파? 아니.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물고기는 싫어. 안 추워? 괜찮아. 유진은 뱃전에서 훌쩍 뛰어 부두에 발을 디디고 섰다. 능청스럽게 손을 건네자 래빈이 눈만 끔뻑인다. 손은 왜? 멀뚱히 돌아오는 대꾸에 유진은 킬킬거리며 손을 거뒀다. 김래빈은 변하질 않았다. 보름 만에 변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마는.
“김래빈 무드 몰라. 재미없어.”
“손을 건네는 뜻 모를 행위의 어디가 무드라는 거야? 혹시 나를 도와주고자 건네준 거라면 고맙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배와 육지를 오갔기 때문에 따지고 본다면 도움이 필요할 가능성이 큰 건 너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그런 점이.”
“뭐?”
진짜 바보야. 유진은 샐쭉하니 혀를 쑥 내밀고 팔랑팔랑 뛰기 시작했다. 유진이 자리를 비운 부두에선 기다렸다는 듯 고성이 날아들었다. 바보는 내가 아니라 너야, 차유진! 유진은 제 뒤통수를 때리는 고함에 슬쩍 뒤를 돌아봤다. 오, 역시. 래빈이 눈에 불을 켜고 쫓아오고 있었다. 말마따나 도움 따윈 필요 없나 보네. 그나저나 눈을 부라리고 자신을 쫓아오는 김래빈은 진짜 농담 안 하고 귀신 뺨치는 몰골이다. 아니지. 유진은 나직이 키득거리며 땅을 박찼다. 귀신도 저 얼굴 보고는 한 수 접을 것이다.
사방에 핀 바다풀과 간혹 고개를 내미는 파도를 제외하곤 그들뿐인 모래사장이었다. 그들이 남긴 발자국은 선명하게 남은 채 따뜻한 볕에 반짝였다. 비탈진 경사를 오르던 유진의 다리가 모래에 푹 빠짐과 동시에 래빈이 유진의 목덜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힘차게 뛰던 유진의 머리통 아래서 팔락거리던 후드를 쭉 잡아당긴다. 즐거운 괴성을 내지르는 유진에게 한소리를 하려던 참이었다. 깊이 빠진 래빈의 발이 중심을 잃기 시작하며 뜻밖의 술래잡기는 막을 내렸다. 더욱 세세히 따지고 든다면 균형 잃은 래빈이 비틀거리다 넘어지는 와중 유진의 후드를 단단히 잡고 있었고, 그 덕분에 유진까지 함께 발이 꼬여 우당탕 구르게 된 까닭이지만. 육지에 오른 지 십 분 만에 흙투성이가 된 채 제 위에 엎어진 래빈을 바라보며 유진은 그냥 킬킬 웃었다. 아, 살겠다. 자신은 역시 육지 체질이었다. 서핑은 좋아했으나 이십사 시간 내내 바다에서 사는 건 속이 울렁거려서 못하겠다.
“김래빈이 나 자빠뜨렸어.”
“아으……. 자빠뜨린 게 아니라, 아니, 애초에 네가 먼저 도망갔잖아!”
“김래빈이 나 쫓아오니까 그랬어.”
“네가 먼저 바보라고 했으니까 쫓아갔지!”
엎어진 채로 머리를 부여잡던 래빈이 씩씩댔다. 얼굴을 잔뜩 붉히고선 눈을 부라리는 꼴이 퍽 볼 만했다. 유진은 눈을 맞추며 키득거렸다. 뒤통수를 받치는 억센 풀의 감촉마저 반가울 지경이다. 벌어진 잇새에서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웃었다.
“김래빈 바보 같아.”
“네가 더 바보 같아, 바보야.”
“김래빈 흙이랑 수영했어?”
“안 했어.”
끙차.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반쯤 일으킨 래빈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안 다쳤어? 상체를 짓누르던 무게가 사라지자 어쩐지 허전하다. 유진은 눈을 깜빡이다가 손을 뻗었다. 흐트러진 래빈의 옷자락은 금세 잡혔다. 마른 옷자락을 만지작거리자 래빈이 물어왔다. 왜? 유진은 답하지 않는다. 대신 힘 주어 옷자락을 당겼다.
“차유진!”
경악과 함께 래빈이 다시 엎어졌다. 숨이 턱 막히는 감각에 유진은 키득거렸다. 손을 들어 래빈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자 한발 늦게 고개를 든 래빈이 눈을 치뜨며 쏘아봤다. 뭐 하는 거야? 일어나지 마. 여기 땅바닥이야, 바보야! 알아. 근데 여기가 좋아. 히히덕거리며 눈을 데룩데룩 굴리니 몸을 겹친 래빈이 움칫거렸다. 허리에 손을 단단히 감싸고 힘을 주자 얼마 지나지 않아 래빈의 잇새에서 한숨이 푹 나왔다. 항복 신호였다.
“허리는 안 아파? 딱딱할 텐데.”
“아파. 그리고 아까 넘어질 때부터 머리 아파.”
“근데 왜 안 일어나!”
“이대로 있을래. 지금이 좋아.”
어깨에 기댄 손으로 몸을 지탱하던 래빈이 투덜거렸다. 그게 뭐야. 유진은 대답하는 대신 히히 웃었다. 래빈의 얼굴이 지척이었다. 못 죽여서 안달 난 사람처럼 엎치락뒤치락 싸운 일이 꼭 거짓말 같았다. 그때도 우리 이렇게 가까웠나? 가만히 생각하던 순간이다.
허공에서 시선이 얽혔다. 래빈이 눈을 홉떴고 유진은 차분히 입을 다물었다. 얼굴이 붉다. 화가 나서 열이 쏠린 건 아닐 테고. 밀착한 가슴 너머 심장 박동이 또렷했다. 멀리서 아슴푸레 부서지던 파도 소리마저 멎는다. 바람은 불지 않고 바닷새도 우짖지 않는다. 부두에서 멀지 않은 바다풀 들판엔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유진과 래빈은 모두 알았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살짝 벌어졌던 래빈의 입이 굳게 닫혔다. 유진은 속으로 가만히 수를 세기 시작했다. Three. 래빈의 눈에 일순 다짐이 깃든다. Two. 어깨에서 방황하던 손이 천천히 올라와 제 뺨을 감싸고. One. 래빈의 얼굴이 가까워지다 순간 시야를 한가득 채운다. 입술에 말랑한 열감이 스치듯 눌렸다가 떨어지고.
유진은 참지 않았다.
허리를 감싸던 손을 떼 래빈의 뺨을 감싸 당긴다. 맞붙은 입술을 진득하게 빨아들이고 핥아내자 어물거리던 틈새가 마침내 벌어졌다.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공간을 침범한 살덩이가 서로를 갈급한다. 뜨거운 숨이 포말처럼 부서지길 몇 번이고 반복하고. 래빈이 다급한 손길로 어깨를 퍽퍽 때렸을 때야 유진은 느리게 물러났다. 마지막까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무는 것도 잊지 않은 채.
잔뜩 달아오른 얼굴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가를 보며 유진은 그냥 히히 웃었다. 밭은 숨을 허겁지겁 삼키는 래빈은 헐떡이면서도 눈을 부라린다. 너 이러려고……. 말은 이어지는 대신 목구멍 깊숙이 떨어졌다. 부여잡은 뺨이 열감으로 가득한 게 그렇게 웃길 수가 없다. 유진은 마침내 킥킥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허리에 둘렀던 손을 풀자 래빈이 후다닥 물러난다. 거리를 두고 얼굴을 붉힌 채 죽일 듯이 노려보는 꼴에 유진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김래빈이 심장 엄청나게 빨리 뛰었어.”
맞붙었던 가슴 너머 심장은 61번 국도를 내달리는 브레이크 고장 난 스포츠카 뺨치는 속도로 뛰고 있었지. 꾹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는 모습까지 우습기 그지없었다. 유진은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은 채 지레 가엾은 낯을 하고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또 곧잘 반응이 온다. 눈을 치뜬 채 노려보다가 흠칫하는 것이다.
“싫었어?”
“그게 아니라,”
“나 잘하는데. 키스.”
“……아니! 못한다는 게 아니고.”
“김래빈은 못 해.”
“…….”
“한 번 더 할래?”
건드리면 터지겠네. 얼굴 시뻘겋게 달아오른 래빈이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안 해, 바보야! 너 나 놀리는 거지? 그걸 이제 알았다니 유감이다. 아니지. 김래빈 눈치로 알아챈 거니 크나큰 발전인가? 유진은 낼름 혀를 내밀고 또 땅을 박찼다. 우다다 뛰어나가자 뒤에서 역정 어린 고함이 날아드는 게 퍽 정겨웠다. 차유지이이이인! 파도 소리마저 뒤덮는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유진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폐부에 감돌던 숨을 전부 토해낼 듯 커다란 목소리로.
한참을 뛰어다니다가 또 넘어지고. 넘어지면 또 눈이 마주치고. 눈이 마주치면 또 입술을 붙이고. 그러기를 몇 번씩 반복하고 나야 유진과 래빈은 바다풀 들판에서 벗어나 광장으로 향했다. 가파르게 난 계단을 오르고 마침내 다다른 광장은 열흘 전과 변한 것이 없었다. 유진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눈이나 데굴데굴 굴리며 래빈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바삐 움직이는 래빈의 뒤통수에 눈을 단단히 고정한 채로. 자신은 딱히 할 일이 없었으나 래빈은 시간에 쫓기기라도 하는 양 바삐 움직였으니까.
마침내 래빈이 벽에 기대어 긴 숨을 뱉었을 때 날은 어렴풋이 저물고 있었다. 한낮 조금 안 되었을 때 도착했으니 대여섯 시간은 넘게 돌아다닌 거다. 래빈이 자리에서 숨을 고르고 있을 때 유진은 뚱한 표정으로 곁에 주저앉았다. 대여섯 시간 동안 래빈은 사재기하나 싶을 정도로 물건을 사재꼈다. 그렇게 사들인 물건을 혼자 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덕분에 유진은 대여섯 시간 동안 물건의 탑을 운반하며 김래빈이 날 육지에 데려온 건 그냥 쇼핑카트로 쓰기 위함인가 심각하게 고심해야 했다. 결론적으로 딱히 틀린 생각이 아닌 것 같아서 더 비참해! 유진은 입술을 비죽 내밀며 곁에 앉은 래빈을 향해 괜히 눈을 흘겼다. 그래 봐야 본인은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았지만. 봐라, 지금도 눈만 끔뻑이다가 얼빠진 목소리로 되묻지 않는가.
“왜?”
“김래빈 온종일 돈만 썼어.”
“그래서?”
“나는 김래빈이 나랑 놀러 나온 줄 알았단 말이야.”
“놀러 나온 거 맞는데?”
유진은 짜게 식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뭘 어떻게 말해. 그냥 포기하는 게 편하지. 김래빈 바보. 투덜거리자 곧장 반박이 따라왔다. 바보 아니야! 그리고 블라블라블라. 유진은 동태눈으로 래빈의 기나긴 잔소리를 능숙하게 흘려 넘겼다. 마을 너머 수평선에선 침몰하는 태양이 수면에 부서지며 빛무리를 흩뿌리고 있었다.
적당히 습한 바람이 불었다. 래빈은 잠시 말이 없었다. 유진도 구태여 입을 열지 않았다. 바다가 질린다고 투덜거리긴 했으나 결국 유진은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 출신이었다. 거친 파도에 몸 맡기는 것을 사랑했다. 계단참에 걸터앉아 노을 지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쩔 수 없이 떠올랐다. 흠뻑 젖은 채 드러누웠던 모래사장. 누나가 대충 입안에 쑤셔 넣어주던 아이스크림 같은 것들. 지난 삼 년간 기억들을 떠올릴 때마다 돌아갈 수 없는 현실에 탄복했으나 지금은 아니다. 유진은 비식 웃으며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정말로 돌아갈 것이다. 우울해할 이유는 없다.
그러다가 유진이 고개를 돌렸다. 제 곁자리에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는 래빈이 있었다. 깊은 눈에 노을이 부서진다. 새까만 눈 사이로 움트는 불꽃. 타오르고 불사르는 영혼. 한없이 부드러운 동시에 거침없는. 어딘가 우수에 젖은 듯까지 보이는 눈, 노을에 흠뻑 젖어 붉어지는 피부와 깊이 지는 그림자 따위가.
유진은 자신이 망설이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가장 고대하는 것을 눈앞에 두었을 때 머뭇거리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발목을 잡는 모든 것을 떨치고 기어코 목표를 움키는 부류였다. 그러니 유진은 확신했다. 래빈이 남는다고 자신이 머물 리가 없다. 래빈을 정의할 때 어떤 단어를 쓴들 바뀌지 않으리라. 차유진과 김래빈의 이름을 연결하는 작대기에 사랑이라는 낱말을 제 손으로 적는다고 하더라도.
“가자.”
래빈이 문득 말했다. 깨진 침묵을 지르밟으며 래빈이 일어섰다. 오늘 내내 사재낀 잡동사니를 품에 가득 안고 유진을 내려다봤다. 유진은 그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응. 곁에 놓였던 종이상자들을 그득 안아 올리고 걸음을 뗀다. 어김없이 발소리가 따라붙었다.
후회하지도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떠나왔다며 두고두고 쓰라린 후회를 곱씹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두려운 건 그런 게 아니라.
발맞추어 한참을 걸었다. 올랐던 계단을 내려가 부두에 매어둔 보트에 짐을 전부 실었다. 땅거미 진 밤바다는 푸르다기보단 시꺼멨다. 안에 뭐가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보트 바닥을 날름날름 적시는 파도를 들여다보는데 뒤에서 래빈이 대뜸 말을 걸었다. 있잖아, 차유진. 눅진하게 눌어붙던 시선을 떼 래빈을 돌아본다. 입술을 앙다물고 눈에 힘을 준 래빈이 쭈뼛쭈뼛 물어왔다. 여기서 오 분 정도 해안선 따라 걸으면 모래사장 나오거든. 가본 적 있어? 유진은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젓는다. 아니. 가본 적 없다. 마을 밖으로 나온 적도 없거니와 근래엔 계속 배에만 있었다. 래빈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희끄무레하게 철썩이는 바다를 지나쳐서 귓가에 꽂히는 숨소리.
“거기, 밤에 사람이 거의 안 와.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
“같이 갈래?”
잔뜩 힘을 준 입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긴장한 태가 역력하다. 내뱉는 숨 한 점마저 흔들리고. 유진이 두려워하는 건 기어코 남고야 말 후회가 아니다. 결전의 시간이 도래했을 때 이곳에 남을 래빈을 생각하며 머뭇거릴 자신도 아니다. 구태여 꼽자면, 그래, 정말로 두려운 건…….
“응.”
고개를 끄덕이며 발을 뗐다. 래빈이 떨리는 숨을 한가득 쏟아냈다. 엄청나게 긴장하고 있었나 보네. 사실 겉모습으로 다 드러났기 때문에 별로 새삼스럽진 않지만. 유진은 키득거리며 뱃전으로 걸어갔다. 래빈은 서둘러 걸음을 재촉하더니 유진보다 먼저 배에서 뛰어내렸다. 유진이 뱃전에 오른발을 올렸을 때 래빈은 냅다 손을 건넸다. 말간 눈이 끔뻑였다.
“이거 뭐야?”
“무드.”
“Wow.”
유진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와락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래빈이 손을 홱 거뒀다. 네가 나더러 무드 없다며! 꽥 내지르는 소리에 유진은 더 크게 웃었다. 해가 졌다는 사실이 그렇게 아쉬웠다. 분명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뻘게졌을 거다. 유진의 웃음이 텅 빈 부두를 쩌렁쩌렁 울렸다. 바보 소리가 몇 번씩 오간다. 끝끝내 터지려는 웃음을 참으려 입술을 악문 유진이 훌쩍 뱃전으로 뛰어올라 씨익 미소 지었다. 손부채로 얼굴을 바삐 부치던 래빈이 힐끔 곁눈질한 것도 그때였다.
“왜 안 내려와?”
“김래빈이 손 안 줬잖아.”
“웃은 게 누군데!”
“손 줘. 무드 있게.”
씨근거리던 래빈의 숨소리가 점차 가라앉는다. 나직한 바다 울음 사이로 침몰하곤 뭉그러진다. 부두에 우두커니 선 래빈이 뱃전 위에 올라선 유진을 올려다봤다. 눈이 맞는다. 입을 몇 번 여닫은 래빈은 이내 말없이 손을 든다. 천천히 올라온 고운 손은 유진의 눈높이보다 조금 낮은 곳에서 멈추고.
“With pleasure.”
유진은 기꺼이 손을 잡고 뱃전에서 내려섰다.
맞잡은 손은 찼다. 날 선 가을바람과 서늘한 바다의 합작일 것이다. 걸음을 뗐다. 잡은 손에 힘을 주곤 천천히 손가락을 얽었다. 발맞추어 걷던 래빈이 곁에서 흠칫 떨었으나 손을 놓지는 않았다.

널따란 모래사장은 과연 고요했다. 찾아온 손님은 일정하게 밀려왔다 모래를 쓸고 사라지는 파도뿐이었다. 바람은 적당히 시원했고 습기에 눅눅하지도 않았다. 모래를 밟을 때마다 들리는 가벼운 사부작거리는 소리마저 불청객처럼 느껴질 정도의 정적. 어깨를 나란히 한 래빈이 긴 숨을 뽑아냈다.
“안 추워?”
“추워.”
“겉옷 가져올 걸 그랬어. ……내 거라도 줄까?”
“김래빈 그거 벗으면 감기 걸려.”
“너는 그대로 있으면 감기 걸려, 바보야.”
“나 바보 아니야! 지금까지 한 번도 걸린 적 없어. 감기.”
“거짓말.”
래빈이 눈을 가늘게 뜨며 투덜거린다. 진짠데. 눈썹만 슬쩍 올렸던 유진은 그냥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이러나저러나 어찌 됐든 걱정이었다. 유진은 항상 필요 이상으로 신경 쓰는 일을 달갑잖게 여겼으나, 뭐, 근래의 경험을 토대로 생각했을 때 말 몇 마디로 래빈의 잔소리를 멈추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지. 비록 지난 몇 년간은 개소리도 그런 개소리가 없다고 생각해왔으나 슬슬 무슨 뜻인지 알 것만 같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유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래빈을 향해 샐쭉 웃으며 문장을 덧붙였다. 단: 굳이 피하고 싶지 않을 때 한정.
둘은 말없이 모래사장을 걸었다. 느긋한 걸음으로 발을 깊이 파묻었다가 차올리길 반복했다. 슬쩍 뒤를 돌아보면 깊이 파인 발걸음이 나란히 남아 있었다. 고요한 밤을 맞아 부드럽게 밀려드는 파도는 그들의 발자국에 다다르지 못한 채 쓸려 돌아간다. 지긋한 적막이 나앉았다. 눈을 감고 귀 기울이면 파도 소리 틈바구니를 가르고 들리는 래빈의 숨소리. 옅게 떨린다. 추위 탓이려나. 사실 래빈은 의외로 추위에 강한 것 같던데.
힐끔 바라본 곳에는 작은 머리통이 있었다. 저 먼 곳 어딘가에 고정된 시선은 한 치 흔들림이 없다. 짧은 들숨. 그리고 날숨. 숨과 숨 사이의 간격이 터무니없이 넓게만 느껴져서. 단단히 잡았던 손에서 힘이 풀리며 서서히 떨어진다. 새끼손가락만 간신히 얽힌 채 달랑거렸다. 목울대가 연신 꿈틀댄다. 하고픈 말을 이것저것 전부 삼켜대는 양. 유진은 래빈이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았다. 너르고 광막한 바다에서 시선을 고정할 법한 곳은 한 군데밖에 없으니까. 그 빌어먹을 라보 데 누베.
기왕 나온 나들이였다. 그 끝을 우울로 장식하고픈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유진은 힘없이 떨어지려던 손을 힘주어 낚아챘다. 넋을 놓은 듯 멍하던 래빈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팩 꺾어 자신을 바라본다. 눈이 마주침과 동시에 유진이 활짝 웃었다. 잽싸게 뒷걸음질 칠 때까지도 래빈은 눈만 빠르게 끔뻑이고 있었다.
젖은 모래가 푹신하게 발을 감싼다. 푹 빠진 발등이 모래를 한 움큼 흩뿌렸을 때 비로소 래빈이 입을 떡 벌렸다. 멍하던 눈동자에 단숨에 힘이 들어갔다.
“야, 야, 차유진! 하지 마!”
하지만, 뭐, 유진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손을 힘주어 당김과 동시에 몸을 휙 돌린다.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린 래빈이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광경이 느리게 펼쳐졌다. 이를 악문 래빈의 부리부리한 시선이 유진에게 사정없이 꽂힌다. 야, 차유진……. 입이 빠끔거리며 유진의 이름을 발음할 때 유진은 태연히 생각했다. 오, 입은 다무는 게 좋을 텐데. 정말 당연한 말이지만 바닷물은 짰다.
래빈이 그대로 고꾸라지며 바다에 처박히는 순간 유진은 먼 곳이나 응시하고 있었다. 음. 밤바다 정경이 참 아름답군요.
어차피 복사뼈를 적실까 말까 하는 깊이였다. 곧장 튀어 올라 잔소리를 퍼부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래빈은 한동안 그대로 엎어져 있었다. 간헐적으로 부글부글 끓으며 올라오는 공기 방울이 아니었더라면 유진은 아마 래빈이 삼십 센티도 되지 않는 수위에서 익사했나 의심했을 거였다. 뻣뻣한 통나무처럼 코 박은 자세 그대로 엎어진 래빈은 파도가 두세 번 밀려들 때까지 그대로였다. 김래빈? 이제 슬슬 무서워질 지경이 된 유진이 신코로 옆구리를 쿡쿡 찔러도 대답이 없다가.
“What the!”
모래 속에 파묻혔던 손이 맛조개인 양 튀어나와 제 발목을 잡아챘을 때 유진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놀라 펄떡이는 제 꼴도 활어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은 모른 채로.
발목을 단단히 잡은 손에 힘차게 펄떡이던 유진도 덩달아 중심을 잃고 우당탕 무너졌다. 코와 입으로 짠물이 밀려 들어왔을 때 유진은 곧장 머리를 치들고 숨부터 몰아쉬었다. 대충 걸쳤던 후드티에 바지에 신발에 양말까지, 고작 한 번 미끄러져서 넘어졌다고 죄다 쫄딱 젖었다. 가을밤을 맞은 바닷물은 얼음장보다 딱 두 배 따뜻했다. 추워! 괴성을 지르며 몸을 바로 일으켰다. 축축하게 늘어져 몸에 딱 달라붙는 옷은 바람이 불 때마다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가웠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쳤다. 김래빈이랑. 어느샌가 몸을 일으킨 래빈은 눈을 부릅뜨고 유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유진도 눈을 피하지 않고 똑같이 래빈을 응시했다. 삼. 이. 일. 래빈의 입이 살짝 벌어지더니 그 새로 웃음이 튀어나왔다.
“……나 웃겨?”
“아니, 그게 아니라.”
“김래빈이 나 빠트렸어.”
“잠깐, 바보야! 그렇게 따지면 날 먼저 빠트린 건 너잖아, 차유진!”
“몰라! 김래빈 바보야!”
“왜 내가 바보가 되는 건데! 논리에 전혀 맞지 않는 말을 하는 네 쪽이 더 바보야!”
유진이 얼굴을 와락 찡그렸다. 입술을 잔뜩 내밀고 래빈을 빤히 바라보다가 흥, 하고 고개를 팩 돌렸다. 씩씩거리던 래빈이 왜 그런 반응이냐며 우다다 쏘아붙였으나 유진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대신 유진은 찬 바다에 손을 담갔다. 그리고 힘차게, 온 바다를 들어 올리겠다는 당찬 포부를 안고 물을 열심히 튀겼을 뿐이다.
유진이 물을 튀기자 래빈이 참지 않고 덤벼들었다. 좌로 구르고 우로 구르며 해안선에 제 흔적들을 뚜렷하게 남겼을 무렵 유진과 래빈은 둘 다 진이 빠져 있었다. 덕분에 십 분이 지난 지금 그들은 휴전 협정을 맺었다. 얼굴을 적시고 지나가는 파도에 몸을 맡긴 채 흔들거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바닷물 덕분에 따가워 눈도 제대로 못 뜰 지경이었으나 어름어름한 시야 너머 희끄무레한 달빛이 부서지는 것만은 선연했다.
“추워.”
“나도.”
유진은 물살에 흔들리던 몸을 일으켜 앉았다. 몸이 으슬으슬한 것이 자칫하면 감기에 제대로 걸리겠구나 싶었다. 찰박거리는 소리와 함께 래빈의 머리통도 쑥 올라왔다. 잠시간 서로를 마주 보며 넋 놓고 있다가 비척비척 일어났다. 그리곤 말 한마디 없이 마른 모래사장으로 향했다. 그들 몸에서 떨어진 물이 모래사장에 진한 자국을 남겼다.
모래사장에 나란히 어깨를 붙이고 앉았다. 바람은 매서웠고 빛이라곤 하늘에 걸린 희뿌연 달이 전부였다. 파도가 철썩이는 소음이 잔잔하게 적막을 메운다.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숨죽인 웃음소리가 간간이 들리다가 잦아들었다. 제대로 된 대화가 발화한 건 순간 튀어 오른 래빈 덕이다. 아 맞다, 하며 잊었던 무언가를 떠올린 사람 특유의 감탄사와 함께 허겁지겁 몸을 일으킨 래빈이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든 것이다.
“차유진. 너 불꽃놀이 해본 적 있어?”
“본 적은 있어. 해본 적은 없어. 왜?”
“아까 시장에서 샀거든. 이거.”
래빈의 품에서 라이터 하나와 기다란 막대기 두 개가 나왔다. 길고 얇은 철심을 닮았는데 끝부분엔 천인지 뭔지를 동여매 놓은 꼴이었다. 유진은 래빈이 건네는 대로 받아들곤 꼬챙이를 하늘로 들어 올려 보였다. 이게 뭐지. 유진이 아는 불꽃놀이는 커다란 원통 안에 화약을 담아서 쏘아 올리는 화려한 종류였다. 이런 건 처음 봤다.
물놀이 하느라 젖어서 불이 붙으려나 모르겠어. 어딘가 침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도 래빈은 착실하게 라이터를 켰다. 몇 번 탁탁 부싯돌 부딪치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옅은 바람에 흔들리는 주홍색 불꽃에 래빈의 얼굴까지 물든다. 그거 여기 대봐, 하고 래빈이 손짓했다. 유진은 곧이곧대로 꼬챙이를 가만히 기울였다. 래빈의 얼굴에선 눈을 떼지 않은 채. 열기가 지척이어서 그런지 눈 깜빡임이 평소보다 빨랐다.
“오!”
꼬챙이 끝에서 불꽃이 튄다. 얼굴을 들이밀던 래빈이 화들짝 놀라 물러남과 동시에 유진이 꼬챙이를 치들었다. 작은 화약이 발화하며 불티처럼 이리저리 날린다. 자그마한 불꽃놀이를 수십 개 모아놓은 것처럼 수 놓이는 광경에 유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스파클링이야.”
래빈이 제 몫의 꼬챙이에도 불을 붙이며 말했다. 거의 노랗게 빛나는 불꽃 두 개가 적적한 모래사장에서 힘껏 타올랐다. 신기해. 예쁘지. 응. 꾸물꾸물 다가온 래빈이 곁에 쭈그리고 앉았을 때 유진은 불꽃을 하늘 높이 치켜들며 말했다.
“예쁘다.”
온 세상 별이 여기 다 모인 것 같아. 멍하니 중얼거리자 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달아오른 막대를 천천히 움직이니 환한 궤적이 남는다.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왼쪽 위로 갔다가 대각선 아래로. 그다음엔 처음 시작점으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별을 그리는데 차분한 래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산 거 전부 네 거야.”
“…….”
“씽코한테 들었어. 우노가 너한테 부탁했다면서. 메노르를 데리고 도망쳐달라고.”
유진은 대답하지 않는다. 부드럽게 별을 그리던 궤적은 이내 천천히 돌며 온갖 도형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별과 원과 네모. 뜨끈한 열기가 얼굴을 홧홧하게 만들어 유진은 숨을 꾹 참았다.
“그럴 필요 없어, 차유진.”
찰나의 침묵. 유진은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무릇 눈을 마주치지 않아야만 할 수 있는 말들이 있기 마련이라서.
“넌 돌아가면 뭘 할 거야?”
느리게 나온 말에 유진은 가만히 고민해봤다. 그러게. 돌아가면 뭘 할까. 우선은 푹신한 침대에 몸을 맡길 것이다. 너무 오랫동안 스프링 나간 매트리스에서 몸을 혹사했으니까. 푹 자고 일어나면 바다에 나가서 파도를 탈 거고. 개들과 산책도 할 거고. 가족과 잠깐 놀러도 갈 거고.
“나도 몰라.”
그러나 유진은 말하지 않는다. 사실 거짓말도 아니다. 돌아간다는 말을 써도 될까 싶을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까. 유진은 평화로운 일상이 무엇인지 잊었다. 깼을 때 몸이 찌뿌둥하지 않은 아침과 창문을 내다봤을 때 보이는 미소 띤 인파를 잊었다. 하지만 두렵지는 않다. 뭐든 오래 걸리기 마련이니까.
래빈은 말이 없었다. 막대기 끝에서 시작된 불꽃이 차츰 내려오더니 중간 언저리에서 맴돌았다. 처음부터 빛도 많이 수그러든 게 그렇게 아쉬워 입맛만 다셨다. 곧 있으면 완전히 꺼질 것이다. 의미 없이 막대기만 휘적거리는데 래빈이 말했다. 있잖아, 차유진.
“나는 싱어송라이터 해보고 싶어.”
“Hmm.”
“작업실도 가져보고 싶고, 무대에도 서 보고 싶어. 작곡 프로그램을 사고 밤을 지새워가면서 작업하고 싶어.”
말간 불꽃이 훅 꺼진다. 열기가 사라진다. 달아올랐던 얼굴에 찾아드는 건 날 선 추위. 유진은 막대기를 떨어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래빈의 불꽃은 여전히 붙어 있다. 화려하게 타오르는 빛을 빤히 바라보던 래빈이 웃으며 말했다.
“네 덕분이야.”
“…….”
“너는 망설일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 그래도 말해주고 싶었어. 너랑 있으면서 한순간도 진심 아닌 적 없다고.”
유진은 부러 입을 열지 않았다. 야금야금 막대기를 사르는 불꽃에 시선을 고정한 래빈이 있다. 얼굴을 반쯤 덮은 주홍빛은 일렁이며 짙은 음영을 만든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바람에 속눈썹이 흔들릴 때마다 조금씩 짙어지는 검정.
“너와 함께 가면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가 동행한다면 탈출이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을 내렸어. 세 번째 기회는 정말로 얻기 어려울 거야.”
입을 달싹이던 래빈이 담담히 말했다.
“나도 꼭 갈 거야. 한국.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러니까 혼자 가, 차유진.
작별 인사는 아주 나중에 할게.
래빈이 고개를 돌렸다. 마침내 시선을 마주한다. 부드럽게 웃는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유진은 안다. 래빈은 강한 사람이다. 자신이 없었어도 래빈은 언젠가 꿈을 찾았을 것이다. 언젠가는 결심하고 언젠가는 페루의 좁은 바닷가 마을을 벗어났을지도 모른다. 래빈은 차유진 하나 없다고 인생을 장례식처럼 보낼 사람이 아니다. 제 입으로 말한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사람이기도 했다. 고지식할 만큼 우직한 사람.
“아니야.”
그래서 차유진은 입을 열었다. 잠잠이 발화한 빛무리가 흩어진다. 침침한 주홍빛이 얼굴을 가득 메우는 모습이 꼭 언젠가 보았던 동을 닮아서. 유진은 그제야 씽코의 말을 이해했다. 아, 정말로. 트고 있었다. 동이. 작고 연약하지만 분명하게. 어둠을 가르고 서서히 고개를 내미는 자그마한 까치놀이 그네들 위로 한 겹 덮이면 비로소 찾아올 온전한 이별. 그리하여 맞은 작별은 아프지도 슬프지도 않겠지.
“김래빈은 나 없어도 똑같이 했을 거야. 나 알아.”
래빈이 고개를 푹 숙였다. 어둠에 파묻힌 등이 파르르 떨린다. 유진은 손을 뻗지 않았다. 토닥이며 위로하는 대신 입을 열었다. 난 알아. 모르지 않아. 사실은 모를 수가 없다. 누군들 모를까. 한 번이라도 김래빈의 세계를 엿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는 언젠가 땅이든 바다든 뭐든 박차고 나섰으리라. 새파랗게 물드는 지평선 그 끄트머리를 훌쩍 넘어 선율이 되고 노래가 되었으리라. 언젠가 보여주었던 공책이 그 증거였다. 거의 새까맣게 보일 정도로 음표와 가사를 끄적여놓은 그것.
그래서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을 깨물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갈게. 나 갈게. 돌아갈게. 입 밖으로 꺼낸 모든 말에 물기가 묻어난다. 그리하여 유진은 떠올린다. 유난히 습하던 이번 여름. 지나간 줄 알았던 습기는 제 몸에 스며들었다가 단어라는 형태가 되어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김래빈도 와. 나중에 캘리포니아 공연하러 와.”
“응.”
“나 꼭 보러 갈게. 그때 만나면 잘 있었냐고 물어봐. 그러면 나 잘 있었다고, 김래빈도 잘 지냈냐고 물어볼게.”
“응.”
“우리 작별은 그때 하자. 캘리포니아 바다에서 하자.”
“응…….”
이마가 맞닿는다. 불에 덴 듯 뜨거운 열감이 찾아들었다. 타오르던 불꽃이 사그라들어 찾아오는 최후의 어둠. 뿌연 달빛만이 흐리게 반짝이는 바닷가. 언젠가 꾸역꾸역 쥐어 삼켰던 바다를 토해냈다. 어김없이 짰다.

유진은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육지에 나갔던 날 래빈이 사재낀 짐들은 전부 유진의 커다란 배낭 안에 차곡차곡 정리되어 들어갔다. 래빈은 리볼버를 만지작거리는 유진에게 여분의 총알을 쥐여주었다. 굳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래빈에 유진은 활짝 웃었다. 긴말은 필요치 않았다.
날이 지나면 지날수록 감시가 삼엄해졌다. 유진의 거처는 페로 로꼬의 명령에 따라 래빈의 방에서 지하실로 옮겨졌다. 유진은 굴하지 않았다. 래빈이 주었던 마스터키는 유진의 신발 깔창 밑에 도사리고 있었다. 래빈은 씽코와 유진 사이를 바삐 오가며 그들의 말을 서로에게 전해주었다. 그리하여 씽코는 유진이 배 지하실에 거의 감금되다시피 했다는 사실과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호시탐탐 때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하여 유진은 씽코가 십이 월 십칠 일을 계획 삼고 있으며 접견 장소는 그때와 같은 절벽 위임을 알았다.
십이 월 육 일. 결전의 날이 열흘 조금 안 남았을 무렵 페로 로꼬는 돌연 유진을 불렀다. 그때 유진은 곰팡내로 찌든 지하실 바닥에서 빈둥거리며 머릿속으로 화창한 캘리포니아 바다를 상상하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얼굴이 험악해지는 마떼오를 따라 선장실에 들어서자 페로 로꼬가 인자한 웃음과 함께 유진을 맞이했다. 어서 오렴. 부드러운 목소리가 다정한 할머니의 그것과 닮아 유진은 웃음을 금치 못했다.
“우리가 그렇게 평온하게 대화 나눌 사이던가요?”
“네가 라보 데 누베의 선원이니 당연하지. 나는 모든 선원을 내 자식처럼 생각한단다.”
“Wow. 전혀 미안하지는 않지만 그거 좀 역겨운 소리네요. 내 가족은 따로 있거든요.”
“누군들 없겠니?”
능글맞은 페로 로꼬의 말에 유진이 팔짱을 꼈다. 짝다리를 짚자마자 곁에 섰던 마떼오의 헛기침이 날아든다. 유진은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똑바로 서. 숨죽인 날짐승 같은 으르렁거림이 이어졌으나 유진은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페로 로꼬를 빤히 응시하며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 페로 로꼬, 우리가 무슨 대화를 할 거라면 방해꾼은 없었으면 좋겠네요. 혹시 알아요. 내가 갑자기 수틀려서 나도 예상하지 못하는 짓을 저지를지. 페로 로꼬는 그냥 웃었다.
“협박에 능해졌구나. 처음 데려올 때만 하더라도 웬 고양이 새끼였는데.”
“나를 불러놓고 시답잖은 소리나 할 거라면 나는 그냥 그 더럽고 시궁창 냄새나는 감옥으로 돌아가겠어요.”
“네가 그런다면 굳이 막지는 않겠지만, 이그나시오, 우리 사이엔 아직 할 얘기가 남았단다.”
페로 로꼬는 유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가볍게 말을 이었다. 마떼오, 나가보렴. 선장의 충직한 개는 말을 덧붙이지 않는다. 그는 대신 유진을 죽일 듯 노려보더니 느리게 물러났다. 문 닫히는 소리가 널찍한 방을 짧게 울린다. 유진은 그제야 의자를 끌어와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이에요?”
“요즘 마을이 소란스럽더구나. 웬 쥐새끼가 자꾸만 들쑤시고 다니는 꼴에 완전히 지쳐서 말이야.”
페로 로꼬가 연초를 꺼내 물었다. 유진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이 배에서 비밀을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걸 페로 로꼬에게 들키지 않는 건 더더욱 힘들었고. 그렇기에 유진은 더더욱 태연하게 행동했다. 그래서요? 신랄하게 되묻자 페로 로꼬가 고개를 살짝 꺾었다.
“재밌는 일이 벌어질 것 같아서 그런단다. 이전에 한 번 일어났던 일이 또 반복되려고 해.”
“기승전결이 모두 똑같은 일은 없어요.”
“과연 없을까?”
유진이 입을 다물었다. 가늘어진 눈이 페로 로꼬를 샅샅이 살폈다. 여전히 의중 모를 노인네다. 회색 눈이 유진을 향해 둥글게 접혔다.
“나는 쥐새끼가 싫단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살금살금 다가와 애써 모아놓은 곡식을 전부 갉아먹고 배를 못 쓰게 만들지. 쥐약을 아무리 쳐도 계속 생기기에 아예 바다로 들어온 건데. 쥐새끼는 어디서든 있더구나.”
“…….”
“에둘러 표현하는 것도 이젠 지쳤어. 이제 어쩌면 좋을까 싶어 너를 불렀단다. 너는, 그러니까……. 육지에서 산 세월이 그토록 길잖니.”
페로 로꼬가 눈을 접으며 웃는다. 유진도 눈을 마주치며 활짝 미소 지었다. 커다란 배가 물살에 흔들리는 것마저 생생하게 느껴진다. 갉아먹은 곡식과 못 쓰게 된 배. 유진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평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포기해요.”
“무엇을?”
“쥐를 그렇게 싫어하는 짓 말이에요.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은 그냥 깔끔하게 포기하는 게 최선이죠.”
“그렇게 생각하니?”
“그렇게 생각해요.”
페로 로꼬가 눈을 느리게 내리깔았다. 권태로운 하품 같은 것이 잇새를 비집고 나오나 싶던 순간이다. 매서운 눈길이 날아와 꽂혔다. 금수 닮은 눈이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시선이었다. 유진은 나직이 입술을 삼켰다. 가볍게 한숨을 뱉었다.
“내 손에 들어온 것을 순순히 보내준 적은 없단다.”
“그렇겠죠.”
“내가 제법 잘 대해주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이곳에 온 후로 불편한 점이 별로 없기는 했어요.”
“그런데 뭐가 문제니?”
“뭐가 문제인지 모른다는 게 문제 아닐까요?”
페로 로꼬의 얼굴에 마침내 금이 간다. 눈썹을 꿈틀거린 페로 로꼬가 느리게 손을 뻗었다. 탁자 위에 올린 손가락이 일정한 속도로 부딪히며 소음을 낸다. 유진은 꿰뚫으려는 듯 날카로운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되레 눈에 힘을 주고 입매를 굳혔다. 피할 필요가 없음을 알았다.
“유진 이그나시오 차.”
“…….”
“네게 준 기회만 벌써 세 번째구나.”
그제야 유진이 빙그레 웃었다. 입꼬리를 끌어당기고 짐짓 상냥한 표정을 지었다. 음, 그렇죠. 그냥 그렇게 생각하세요. 능청맞게 대답하자 페로 로꼬가 천천히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입을 굳게 다문 채 입을 열지 않는다. 한참이나 서슬푸른 침묵이 흘렀다. 바닷새 우짖는 소리만이 아뜩하게 울린다. 유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창밖을 바라본다. 하늘 위에는 움푹 파인 달이 걸렸다. 흐린 달빛은 물결에 닿지도 못한 채 흩어지고.
오르골 소리가 어울리는 밤이다. 유진은 언젠가 누군가가 연주했던 태엽 오르골을 떠올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세상에 어쩔 수 없는 일들이라는 게 있기 마련이죠. 인제와 모든 걸 돌이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
“당신의 메노르가 이다지도 제멋대로일 거라고 상상조차 못 했나요?”
페로 로꼬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그 애는 좀 특이한 아이였거든. 해적질엔 도통 어울리지 않는. 시간만 나면 종이에 구멍이나 뚫는 바보 같은 짓이나 하고 말이야. 유진이 눈을 가늘게 뜨며 웃는다. 동의해요. 어울리지 않죠.
“그 점이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지.”
“그 점이 가장 멋지죠.”
동시에 내뱉은 말에 유진은 활짝 미소 지었다.
페로 로꼬는 말을 잇지 않는다. 턱을 가만히 만지작거리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유진을 노려볼 뿐이다. 유진은 태연하게 어깨만 으쓱였다. 그러다가 문득 묻는 것이다. 오, 페로 로꼬. 당신은 김래빈이 만든 노래를 들어본 적 있어요? 페로 로꼬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유진은 딱 잘라 덧붙인다. 메노르 말고. 김래빈 말이에요.
“그 애의 이름은 항상 김래빈이었어. 발음이 어려우니 메노르라고 붙여주었을 뿐이지.”
“당신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김래빈은 김래빈인 동시에 메노르였어요. 내가 말하는 건 오롯한 김래빈이고.”
“…….”
“기회가 된다면 꼭 들어봤으면 좋겠네요. 메노르가 아닌 김래빈이 만든 노래 말이에요.”
페로 로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눈을 살짝 찡그릴 뿐이다. 느리게 턱을 괸 페로 로꼬는 이내 눈을 내리깔았다. 유진은 차분히 기다렸다. 페로 로꼬가 무슨 말을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문득.
“메노르가 널 돕고 있음을 알아.”
유진은 놀라지 않는다. 페로 로꼬는 눈을 맞추지 않은 채로 무덤덤하게 내뱉었고 유진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깔끔한 인정이다. 페로 로꼬는 유진에게 시선 한 점 던지지 않은 채 무심히 말을 이었다. 네가 만일 성공적으로 도망쳤을 때, 너를 도운 메노르가 무사할 것 같니? 유진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인다. 몇 번이고 생각해본 일이었다.
“무사하지 않으면요?”
“…….”
“당신이 메노르를 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요. 물론 대체품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지만 당신에게 김래빈은 그만큼 가벼운 가치를 지닌 존재가 아니죠.”
잠시 침묵. 눈을 내리깔았던 페로 로꼬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짙은 피로감이 덕지덕지 눌어붙은 눈으로 페로 로꼬는 유진을 지그시 응시했다. 유진은 입꼬리를 천천히 말아 올린다. 이곳에 남을 김래빈이 무사하리라는 확신은 다름 아닌 페로 로꼬가 주었으니까.
“김래빈은 당신과 라보 데 누베를 침몰시키고 한국에 돌아갈 거예요. 난 알아요. 그게 싫었다면 당신은 애초에 김래빈을, 나를, 이곳에 데려와서는 안 됐죠.”
말을 마친 유진은 몸을 일으켰다. 페로 로꼬는 그를 붙잡지 않는다. 가벼운 걸음으로 등을 돌린 유진은 이내 선장실 문고리를 쥐어 비튼다. 나서기 직전 페로 로꼬가 문득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실은 알고 있었어. 그 아이가 지은 라보 데 누베의 노래는 바닷속에서 들었을 때 퍽 아름다운 울림을 지니거든.”
“아하.”
“본인은 모르는 것 같지만. 그래서 난 항상 그 노래가 싫었어.”
유진은 그저 웃을 뿐이다. 문이 연다. 그 틈새로 굳은 표정의 래빈이 서 있었다. 유진은 곁에 선 마떼오를 가볍게 무시하며 래빈에게 걸어갔다. 가볍게 떨리는 눈으로 유진과 페로 로꼬를 번갈아 바라보던 래빈은 이내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함께 발맞추어 걸었다. 이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모퉁이에서 한번 꺾고 습한 감옥에 향하는 동안 래빈은 말이 없었다. 유진도 구태여 입을 열지는 않았다. 힐끔 바라본 래빈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연신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다. 간헐적으로 입을 우물거리다가 여닫기도 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했으나 유진은 언제나 그랬듯 재촉하지 않는다.
래빈이 입을 연 건 유진이 제 손으로 창살을 열었을 때였다. 이제는 평범한 현관문처럼 알아서 여닫는 창살 경첩이 소름 끼치는 울음을 냈을 무렵에.
“괜찮아?”
“Hm? 뭐가?”
불현듯 내뱉은 주제에 래빈은 또 말이 없었다. 유진은 눈만 깜박거리다가 창살을 열고 들어가 앉았다. 미간을 찡그린 래빈도 몸을 수그리자 눈높이가 맞는다. 유진은 태평하게 기지개나 켜며 래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김래빈은 역시 공연 같은 거 다닐 때 대본 같은 거 쥐여주는 게 낫겠다. 시답잖은 상상이 머릿속에 뭉게뭉게 피어날 즈음에서야 래빈은 말을 이었다. 결정을 바꾸는 건 아니지?
“무슨 결정?”
“돌아가는 거.”
“Nope. Never.”
단호하게 끊어내자 눈을 찡그렸던 래빈의 얼굴이 비로소 평온해졌다. 좀 걱정했어. 한숨처럼 중얼거린 래빈은 이내 무릎을 가슴팍에 끌어모으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선장님은 회유에 능하시니까……. 흐려지는 말끝엔 진득한 피로가 눌어붙었다. 그제야 유진은 한발 늦게 깨달았다. 시간은 거의 새벽 한 시에 다다랐을 것이다. 래빈은 밤을 지새우는 날이 대부분인 주제에 잠은 또 많았다. 이래저래 신경 쓸 일들이 산더미인 근래엔 더더욱 피곤할 터였다. 유진은 눈을 데록데록 굴리다가 몸을 끌고 와 창살에 붙였다. 창살 너머 손을 뻗으니 래빈의 머리에 꼭 닿았다.
“뭐 해, 바보야.”
“김래빈 재우려고. 졸리잖아.”
“나 여기서 자면 안 돼…….”
“괜찮아. 누구 오기 전에 깨워줄게!”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는다. 새까만 머리칼이 손가락 틈새를 파고들어 흐트러졌다. 우리 언젠가 꼭 이러지 않았어? 왜 있잖아. 김래빈 팔 다쳤을 때. 키득거리며 속삭이자 한발 늦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랬지. 그랬어. 유진은 피로에 억눌린 목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이며 래빈의 목덜미를 문질렀다. 그날 래빈이 입었던 상처는 이제 말끔하게 아물었다. 옅은 흉터가 남기는 했으나 고작 그뿐이었다.
나직이 숨죽인 유진은 가볍게 흥얼거렸다. Rockabye, dear, on the shore……. 숨죽인 노랫소리가 습기를 잔뜩 머금은 채 캄캄한 지하실을 맴돈다. 눈을 느리게 깜빡이는 래빈이 멍하니 물었다. 이거 무슨 노래야? 잠기운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목소리에 유진은 가볍게 웃었다.
“나 어릴 때 할머니가 매일 불러줬어. 머리 쓰다듬으면서.”
“자장가야?”
“아마? Lullaby가 한국말로 자장가가 맞으면.”
“너 노래 잘하네…….”
몽롱한 목소리가 차츰 잦아든다. 유진은 히히 웃으며 부드럽게 머리를 쓸어내렸다. 가물거리던 눈이 초점 없이 흔들리다 유진과 마주친다. 반쯤 감긴 눈은 결국 눈꺼풀 뒤로 사라질 때까지 유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고.
흔들리는 머리칼을 갈무리하며 유진은 가만히 뇌까린다. 있지, 김래빈. 김래빈은 무슨 자장가를 들으면서 자랐는지 기억해? 고른 숨을 들이쉬고 내뱉는 래빈은 그러나 대답이 없다. 차라리 다행이지. 유진은 찬찬히 손을 거두며 느리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차라리 다행이다. 사실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나중에 직접 들으면 되니까. 훗날 우리가 눅눅한 지하실이 아닌 땅에 두 발을 디디고 선 채로 만나는 날 물으면 되니까.
유진은 눈을 감았다. 바닷새 울음조차 들리지 않는 밤이다.

종이 치지도 않았거늘 눈이 떠졌다. 이른 새벽이었다. 폐부에 쏟아지는 공기는 얼음장 같았다. 완연한 겨울이다. 몸을 일으키며 이불을 걷었다. 숨이 희게 부서지는 꼴을 가만히 바라보던 유진은 신발 깔창 밑에서 마스터키를 꺼냈다. 두꺼운 창살 너머로 손을 뻗는다. 어스름한 새벽빛에 시야가 어두움에도 손은 한 번도 헛돌지 않는다. 자물쇠에 열쇠를 밀어 넣고 이리저리 돌리니 머지않아 잠금 풀리는 소리가 났다. 바닥에 떨어진 자물쇠를 구석에 밀며 유진은 가볍게 몸을 풀었다. 결전의 날이다.
새벽을 맞은 배는 고요하다. 유진은 지하실의 두꺼운 문을 젖히고 나섰다. 이상하리만치 아무도 없다. 놀라지는 않는다. 아마도 래빈의 도움일 것이다. 또스나 뜨레스나 꽈트로의 도움이 살짝 가미되었는지도 모르지. 하릴없는 생각이나 하면서 텅 빈 복도를 성큼성큼 갈랐다. 계단을 오르기 직전 유진은 반대쪽 길을 힐끔 곁눈질했다. 고요한 선장실. 굳게 닫힌 문. 해일이 덮치기 직전의 바다가 가장 적막한 법임을 유진은 안다.
계단을 뛰듯이 올랐다. 갑판을 오를 때까지 방해물은 없었다. 새벽같이 맞는 바닷바람에 뺨이 발갛게 얼어붙었다. 작은 보트를 내리는데 뒤에서 다급한 걸음이 들렸다. 내가 할게. 너는 가서 타. 어느샌가 다가온 래빈이다.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새하얀 입김이 되어 흩어진다.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갑판을 훌쩍 넘어 밧줄을 단단히 쥐었다. 차가워진 손은 감각이 옅었으나 유진은 능숙하게 배에서 내려 보트에 올랐다.
“중간에 바꿔 탈 거지?”
“응.”
“지난번에 거기?”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트가 수면에 닿자마자 과감히 뛰어내린 래빈이 운전대를 잡았다. 적막 어린 바다에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 물살을 가르기 시작한 보트 난간을 꾹 잡은 유진이 라보 데 누베의 배를 힐끔 돌아봤다. 여전히 아무도 없다. 누구도 그들을 붙잡지 않는다.
부두에 다다르자마자 래빈은 유진에게 배낭을 던져주었다. 등에 메는 대신 대충 휘어잡은 유진이 잰걸음으로 걷기 시작한다. 유진은 서둘러 발맞추는 래빈이 언젠가 보았던 낡은 리볼버가 쥐었음을 알았다. 저 안에 든 것은 고무탄이 아니라 총알일 것이다. 그렇기에 유진은 더더욱 발을 빨리했다. 쿵쾅거리는 심장이 거의 아뜩하게 귓가를 울렸다.
마을을 지나 광장에 다다랐을 무렵이다. 해가 뜨지도 않은 이른 새벽, 말 한마디 없이 발을 재촉하던 두 도망자는 나직한 소음을 듣는다. 그건 마치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심판의 호루라기 소리를 닮았다. 모든 적막은 지금 여기에서 무너지리라 선언하는 커다란 외침과 같다. 탄창이 돌아가고 안전장치가 풀리며 내는 딸깍거림. 유진과 래빈은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저 고개를 돌린다. 서로를 본다. 눈이 맞는다. 리볼버를 쥔 손은 떨리나 마주친 래빈의 눈은 굳건하다. 목울대 너머 침이 넘어간다. 래빈이 리볼버를 하늘 높이 들어 올리고. 유진은 이를 악물고.
“달려, 차유진!”
빈 오선지에 첫 음표를 그리는 건 어김없이 래빈이다.
유진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대로 땅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총이 격발하는 지리멸렬한 소음이 연신 터지나 유진은 앞만을 본다. 풍경이 빠르게 스친다. 심장이 터질 듯 박동한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는 감각. 근육이 긴장해 단단해지는 느낌. 발끝까지 힘을 주며 땅을 박차나가는 이 기분. 입이 벌어진다. 밭은 숨을 토해낸다. 머리가 어지럽다. 아문 발바닥은 아무런 고통을 주지 못한다. 터지는 폭약 소리와 함께 유진은 선언한다. 그러니 너희도 언젠가 아물 것이다.
보랏빛 하늘. 꼬불꼬불한 미로 같은 마을. 가파른 계단. 뛰어오른 비탈 위에 놓인 빨간지붕 집. 지르밟는 길에 여실한 발자국을 남기며 유진은 뛰쳐나간다. 몸이 가볍다. 두렵지 않다. 온몸이 맥동하며 피가 빠르게 도는 감각에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아득한 의식 속에서도 들리는 가파른 호흡. 마을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파도는 꼭 언젠가 들었던 환호 같아서.
총탄 소음이 멀어진다. 좁은 골목을 파고들어 달려나갔다. 어둡고 좁다란 길목 끝의 빛을 향해서. 멀지 않은 곳에서 자신을 뒤따르는 발소리가 있다. 유진은 더욱 박차를 가했다. 달릴 수 있다. 고통은 없다. 찢어졌던 발이 아물었으니 유진이 멈출 이유 또한 없다.
그리하여 시야에 함뿍 번지는 빛, 빛, 빛.
절벽 끄트머리에 허리를 꼿꼿이 폈다. 세찬 바닷바람이 얼굴을 엉망으로 때리는 것마저 기꺼웠다. 거친 호흡을 토해내며 유진은 옆구리를 꾹 짚었다. 머리가 어지러울 만큼 달린 건 퍽 오랜만이다. 이 외딴 바닷가 마을에 다다라서는 꼭 두 번째였다. 그러며 유진은 다시금 깨닫는다. 아, 그때도 래빈은 제게 달리라고 했었지. 많은 것이 변했으나 전혀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떨리는 숨을 내뱉고 유진은 뒤를 돌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허리를 숙인 채 호흡을 고르는 래빈이 있었다. 그 너머 짙푸른 하늘과 너른 들판이 펼쳐진다. 아스라이 코를 자극하는 탄내를 덕지덕지 묻힌 래빈은 이내 몸을 일으켰다. 눈이 맞는다. 또다시.
“내려갈 수 있겠어?”
“응.”
그리고는 잠시 침묵. 들고 있던 리볼버는 대체 어디에 둔 건지. 래빈이 두어 걸음 다가선다. 손을 뻗는다. 뺨을 훔치자 그제야 욱신대는 통증이 찾아들었다. 스쳤나 봐. 괜찮을 거야. 담담한 목소리에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아픈지도 몰랐어. 네가 맞아, 김래빈.
“괜찮을 거야.”
단단한 말.
래빈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너는 괜찮을 거야. 나직이 속삭이듯 부서지는 낱말이, 문장이, 감정이 있다. 여리고 미약하나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다. 확신 어린 목소리로 래빈이 되풀이했다. 괜찮을 거야. 너도, 나도. 약속한 대로야. 우리는 작별하지 않을 거야. 유진도 고개를 주억인다. 그들은 작별 인사를 건네지 않을 것이다. 차유진과 김래빈은 작별하지 않는다.
먼젓번 폭격으로 인해 무너진 절벽은 뛰어내리기 알맞은 높이다. 낮지도 높지도 않다. 저 멀리서 보트 하나가 물살을 가르고 다가왔다. 운전대를 잡은 건 어김없이 선글라스를 낀 씽코. 씽코가 거칠게 손짓했다. 어렴풋한 고함이 소용돌이치는 바다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렸다. 어서 뛰어! 시간이 없어! 유진은 깊이 숨을 들이켠다. 배낭을 단단히 고쳐매고 마침내 고개를 치든다. 쿵쾅거리는 심장. 저 멀리 아뜩한 바닷바람. 아찔할 정도로 매서운 파도와 짙푸르러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까지.
“가, 차유진.”
한 걸음 물러난 래빈이 말한다. 머뭇거림이나 미련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서 유진도 물러난다. 나 갈게! 입가에 머금는 환한 미소. 입꼬리를 한가득 끌어올리고, 눈을 둥글게 말고, 결국 끝끝내 눈을 피하지 않고. 조각조각 깨지는 파도 소리가 꼭 환호 같아서.
“차유진!”
등을 돌린다. 다시금 다리에 힘을 준다. 흙과 잔디를 짓밟고 박차 나선다. 낮은 절벽 끄트머리에서 발이 떨어지는 순간 래빈이 외쳤다.
“나중에 보자!”
작별 인사 안 하기로 했잖아! 온몸이 붕 뜨는 아찔한 감각 속에서 유진은 폐부 속 잠들었던 웃음을 토해낸다. 대답은 나중에. 오랜만이야 김래빈, 하고 말할 수 있도록. 잇새로 꼭꼭 삼키고 그저 웃으면서.
거친 바람이 옷자락을 찢어발긴다. 머리칼이 칼바람에 흔들린다. 아뜩한 낙하. 바닷새들이 우르르 솟아오르며 흔들리는 시야. 귀를 가득 메우는 환호와 찬란한 정경 속에서.
아, 그는 보았다.
동이 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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