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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선향불꽃 中

동이 텄다. 굳게 닫힌 창고 안으로 비스듬히 햇빛이 기울어 들었다. 밤중에 그 난리를 겪고도 하루는 기어코 시작했다. 유진은 한참이나 앉아 있었다. 어두컴컴한 창고 안에서 벽에 등을 기대고 가만히 있었다. 발바닥이 욱신거렸다. 한 달이나 지났는데. 다 아물었다고 생각한 상처들이 다시 쓰리다. 멍하니 발끝만 노려보다가 어느 순간 몸을 일으켰다. 배가 고파서였다.
문을 밀어 열었다. 걸쇠는 다시 잠겨 있지 않았으나 힘주어 여니 널빤지가 우지끈 부러지며 떨어졌다. 결딴난 나무 조각을 발로 툭툭 치며 걸었다. 낮이었다. 하늘은 여전히 낮았으나 더는 여름이라고 할 수 없었다. 여름은 끝나고 가을이 왔다. 헐렁한 후드 속에 차가운 가을바람이 비집고 들어섰다.
난장판이었다. 집 창문은 전부 깨졌고 벽 군데군데가 둥글게 파여 있었다. 버려진 탄피와 탄창이 굴러다녔다. 돌담은 무너졌다. 마을 아래가 훤히 보였다. 이 난장판이 일어났는데 사람 하나 찾아오지 않았다. 유진은 두 동강 난 채 버려진 플라스틱 의자를 발로 밀어치우며 천천히 걸었다. 밟히는 흙은 젖어 있다. 밤새 비는 내리지 않았다.
“우노.”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완전히 부러져 너덜거리는 현관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여전히 침침하고 음침했다. 탄약 냄새가 진동했다. 창문이란 창문은 전부 이가 나갔는데 왜 환기가 안 됐지. 시답잖은 생각이나 하면서 비척비척 걸어 들어갔다. 우노. 목소리가 울린다. 대답은 없고.
흔적도 없었다. 유진은 텅 빈 거실에 멍하니 서 있다가 도로 집을 나왔다. 배가 고팠다. 뭐라도 먹지 않으면 이대로 쓰러질 것만 같아서.
계단을 밟아 내려간다. 모퉁이를 꺾는다. 비척비척 걸어 거처 앞에 다다랐다. 제 거처도 우노의 현관문과 별다르지 않았다. 완전히 뜯겨나간 문이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뒹굴었다. 그냥 지나쳐서 들어갔다. 물건이란 물건은 전부 뒤엎어놨다. 곱게 싸뒀던 배낭은 통째로 없어졌다. 그런데 별생각은 안 들었다. 어차피 잃어버렸다고 슬플 정도로 애착 가진 물건은 없었다.
다만 유진은 그냥 궁금했다. 래빈. 라보 데 누베의 일원일 래빈. 그는 왜…….
배고프다.
유진은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었다. 한 것도 없는데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이상하지. 문을 나설 때만 하더라도 한낮이었는데. 계단을 내려갔다. 광장으로 향했다. 남은 상인이 얼마 없었다. 아무나 붙잡고 돈을 쥐여줬다. 상인이 유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아무 샌드위치나 건넸다. 무어라 말한 것도 같은데 사실 뭐였는지 기억은 안 나고.
퍼석하고 마른 빵에 시들한 채소. 싸구려 고기에 잔뜩 뿌려댄 향신료. 우물우물 삼키고 목구멍 너머로 밀어 넣는다. 꼭꼭 씹어 꿀떡꿀떡 삼킨다. 탈이 나지 않도록 천천히. 목이 멨다. 배가 부르니 이번에는 물이 마시고 싶었다.
“이그나시오.”
유진은 그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라는 걸 한발 늦게 알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거기엔 씽코가 서 있었다. 어젯밤의 난리를 저 혼자 피해갔는지 여상 같은 몰골이었다. 하다못해 아무 연관 없던 상인들까지 수척한 얼굴이었는데. 유진이 눈을 맞추자 씽코는 물고 있던 연초를 깊이 빨아들였다.
“따라와.”
유진은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닫았다. 딱히 별 의미는 없을 것 같아서. 순순히 발을 뗐다. 씽코는 복잡한 길목을 요리조리 거닐다가 어느 순간 무심히 말했다. 계획은 변하지 않아.
“출발은 예정했던 대로 일주일 후야.”
“…….”
“우노가 이미 대금을 치렀어. 돈을 받은 이상 나는 너희를 책임지고 이 바닷가 마을 밖으로 데려가야 하고.”
“할 말은 그게 다예요?”
“할 말은 이게 다야.”
씽코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은 걸음을 멈췄다. 씽코도 함께 멈췄다. 고개를 돌린다. 반질반질한 선글라스에 제 얼굴이 비쳤다. 무심하게까지 느껴지는 맹한 얼굴. 멍청한 표정이다. 눈만 끔뻑이다가 그냥 대답했다. 알겠어요. 변하지 않겠죠. 계획이 어디 하루 이틀 들여 짜였을까. 더 할 말은 없죠, 하고 묻자 씽코는 글쎄, 하고 답했다.
“우노가 마지막에 뭐라고 했어?”
씽코의 질문에 유진은 가만히 떠올린다. 우노. 우노가 뭐라고 했더라. 메노르를 부탁해. 땀에 젖어 있었지. 숨을 몰아쉬다가 그를 창고로 밀어 넣었다. 사실 그다음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나서. 유진은 제 손만 만지작대다가 무심히 대답했다. 메노르를 부탁한다던데요. 내가 중간에 버리고 갈까 봐 두려웠나 봐요. 그러자 씽코가 나직이 웃었다.
“마지막으로 한 말은 그게 아닐 텐데.”
“우노가 마지막으로 뭐라고 했는지가 그렇게 중요해요?”
“중요하지 그럼. 사람의 유언인데 어떻게 안 중요하겠어.”
“유언을 남길 만한 상황이 아니었어요.”
“마지막에 남기는 말은 뭐든지 유언이 되는 거야.”
그러니까, 이그나시오. 네게 묻자. 우노의 유언이 뭐야?
유진은 눈을 데굴 굴렸다. 우노의 유언이라. 메노르를 부탁한다는 말만이 고막을 울리고 뇌리에 박혔다. 그게 유언이 아니면 뭐가 유언이라고. 관자놀이가 욱신거린다. 유진이 한숨을 쉬었다. 피곤했다. 고작 열흘 만에 무언가가 쉴 새 없이 뒤바뀌었다. 세상 모든 것은 돌이킬 수 없다지만 수습할 수도 없는 일이 이렇게 연달아 일어나도 되는 건지. 신이 있다면 나를 단단히 미워하는 게 틀림없어. 속으로 투덜거린 유진은 그냥 중얼거렸다.
“깊이 숨으랬어요. 아무도 못 찾게.”
“오호라.”
“유언이라면 그게 유언이겠죠.”
씽코는 잠시 말이 없었다. 유진은 제 손만 바라보다가 탁탁 털었다. 빵 부스러기가 바닥에 떨어진다. 여전히 목이 말랐다. 배는 고프지 않았으나 무언가 있다면 입에 욱여넣고 싶었다. 물 있어요? 유진이 담담히 묻자 씽코가 아니, 하고 운을 뗐다.
“유언 못 이뤘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결국 너를 찾았잖아. 그 애가.”
“요즘은 남한테 감시 붙이는 게 유행이에요? 아니, 그보다. 당신이 래빈을 어떻게 알아요?”
씽코가 어깨를 으쓱였다. 거의 얄밉게까지 느껴지는 행동에 유진의 눈이 가늘어진다. 그러자 씽코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손을 내저으며 뭘 그런 눈으로 봐, 했다. 유진은 그냥 팔짱을 꼈다. 씽코가 래빈을 안다는 것. 저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움트기 시작했다. 내가 씽코를 믿을 수 있나? 하지만 그를 믿지 않는다면 유진은 누구를 믿어야.
“실력 있는 브로커가 되려면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파악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있어야 하지. 나는 그저 최선을 다해 노력했을 뿐이야.”
“그래요.”
“날 믿으라고는 하지 않아, 이그나시오. 사람이 사람을 쉽게 믿어서 되겠어. 적어도 이 마을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로는 빵 한 조각 사지 못할 거야. 네가 믿을 건 우노가 내게 건넨 대금이란다. 그게 어디 한두 푼 하는 줄 알아?”
유진은 대답 대신 손만 저었다. 나도 당신 믿으래도 안 믿어요. 딱 잘라 말하자 씽코는 뭐가 그리 웃긴지 또 키득거렸다. 할 말은 이걸로 끝이야. 정말로 끝. 선글라스를 슬쩍 내려 눈을 맞춘 씽코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럼 일주일 후에 보자. 네가 육 피트 아래에 묻혀 있지만 않다면. 저주하는 거예요? 아니, 명복을 비는 거지. 그게 저주잖아요. 말했잖아, 나는 농담에 재능이 없단다. 능청스러운 말과 함께 씽코는 휘적휘적 걸어 모퉁이 너머 사라졌다.
덩그러니 남은 유진이 발을 돌렸다. 배도 찼고 목은 여전히 말랐다. 가만히 걸으며 유진은 생각해 봤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로는 빵 한 조각 사지 못하는 곳. 일견 냉정하게까지 들리는 말이지만 틀린 구석 하나 없다. 삼 년 동안 유진은 그렇게 살았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만 같았다. 돌아가지 못한다면.
그러나 유진은, 동시에 기억했다. 쏟아지는 장맛비 사이를 뚫고 갓 구운 빵을 품은 채 달려오던 애. 좁은 우산 너머 어깨를 맞붙이고 뜯어먹었던 빵. 빗속을 나란히 달렸던 순간. 페루 바닷가 마을의 여름은 보통 습하지 않았다. 장마가 오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유달리 찐뜩하게 눌어붙던 습기 따위가.
전부 바보 같아서 그래. 유진은 멍하니 뇌까린다. 신뢰라는 말이 무게를 잃어 솜털보다도 가벼워진 곳에서. 어떻게든 확신을 주려던 사람. 이마를 맞대고 너는 돌아갈 거라고 거듭 중얼거리던 남자애. 믿음을 믿던 김래빈.
뭐 하고 있을까. 우리가 볼 날도 고작 일주일이 남았는데.
만나고 싶었다. 물을 것이 있으니까.
모퉁이를 돈다. 계단을 오른다.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거처로 돌아갈 생각은 아니고. 멍하니 걸으며 유진은 결심했다. 래빈에게 물을 것은 여전히 많다. 하지만 래빈 쪽에서 유진을 찾아오지 않는다면 만날 일은 요원하다. 그렇다면 대체재를 찾는 수밖에. 다음에 만나면 연락할 방도 정도는 만들어놔야겠다고 다짐하며 유진은 언덕을 오른다. 다행스럽게도 유진에겐 훌륭한 대체재가 있었다.
그리하여 유진은 거의 두 달 만에 언덕바지 학교에 도착했다. 변한 것 하나 없이 평화로운 광경이다. 저들끼리 둘러앉아 바람이나 쐬는 태평한 모습에 유진은 그냥 웃었다. 저 애들은 잘못이 없지. 잘못이 있다면 아마 선생에게 있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피에트로.”
멀대 같은 얼굴이 반갑기는 또 처음이네. 유진은 그냥 느긋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상대의 얼굴이 시허옇게 물드는 건 추호도 신경 쓰지 않으면서.
“……이그나시오.”
“물을 게 있어요. 대답해줄 수 있죠?”
이건 이미 질문이 아니다. 유진은 후드에 손을 집어넣은 채 가만히 기다렸다. 피에트로의 얼굴은 시뻘겋게 물들었다가 이내 누렇게 변했다. 수많은 감정이 훅훅 지나치더니 결국 체념이 머문다. 고개를 끄덕인 피에트로는 유진을 구석진 곳으로 이끌었다. 아이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이다.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행동이었다.
“누군가가 죽었다는 사실은 들었어. 네 짓이니?”
“그게 어떻게 내 짓이 될 수 있겠어요? 나는 힘없는 열아홉 꼬맹이일 뿐인데.”
“이그나시오. 나를 속일 생각은 말아. 그들이 나를 찾아왔었어.”
“라보 데 누베가요.”
“그래. 라보 데 누베가 나를…….”
그러다가 피에트로가 입을 다물었다. 눈을 빠르게 깜빡이던 그는 이내 눈을 홉뜨곤 주춤주춤 물러났다. 저 멍청한 머릿속에선 또 무슨 헛상상을 하고 있을까. 유진은 구태여 정정하지 않은 채 입을 다물고 그를 지그시 바라봤다. 때론 침묵이 가장 효과적일 때가 있으니까.
주위를 휙휙 둘러보던 피에트로는 이내 숨을 잔뜩 죽인 채 숙덕거렸다. 설마 네가 그런 거니? 조금 전 질문과 별 다를 바 없었으나 묘한 뉘앙스가 달랐다. 전자는 네가 그 죽음에 관여되었냐는 듯한 질문. 후자는, 글쎄. 네가 네 손으로 죽였냐는 물음쯤 되겠지. 유진은 대답 대신 눈을 찡그렸다. 피에트로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어쩐지! 너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를…….”
“라보 데 누베와 접촉할 방법이 필요해요.”
“오, 내게 물을 생각일랑 마라. 그쪽이야말로 너를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어. 광장에 나가서 십 분쯤 휘젓고 다니면 그들이 널 찾으러 올 거야.”
“나는 접촉할 방법이 필요해요. 그들 손에 죽을 방법이 아니라요.”
피에트로가 입을 다문다. 닿은 시선이 떨렸다. 입술부터 손까지 안 떨리는 곳이 없었다. 말라깽이 피에트로. 가엾은 피에트로. 유진은 이제 그에게 화가 난다기보단 그냥 안쓰러웠다. 중간에 끼어 이도 저도 못 하는 꼭두각시 피에트로.
“이건 경고일 뿐이야, 이그나시오.”
마침내 피에트로가 말했다. 새하얗게 질린 몰골로 더듬더듬 발음했다. 이건 정말이지 경고일 뿐이야. 마른침을 삼키며 피에트로가 시선을 떨어트린다. 유진은 말하지 않았다.
“페로 로꼬는 너 같은 아이를 아낀다고 했지.”
“그 말은 또 듣고 싶지 않아요.”
“아니, 들으렴. 이건 중요한 이야기야.”
피에트로가 숨을 들이쉰다. 그리고 내쉰다.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헤진 앞치마에 손을 연신 훔치며 피에트로가 더듬더듬 말했다. 페로 로꼬는 너 같은 아이들을 좋아해. 그래서 그는 어린아이들을 제 곁에 두고 키우곤 하지…….
“……그런 페로 로꼬가 유달리 아끼는 아이가 있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애지중지 키웠지. 아마 자신이 죽으면 다음 선장 자리는 그 애에게 넘기려고 준비까지 마쳤을 거야. 페로 로꼬가 제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애야. 유일한 역린이라면 역린인 셈이야.”
“…….”
“어찌나 애지중지하는지 세간엔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았지. 그래서 다들 그 애를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메노르.
유진은 자신이 그 단어를 내뱉었는지 삼켰는지 감조차 잡지 못했다. 다만 피에트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을 뿐이다. 메노르. 라보 데 누베의 사랑받는 막내. 이제 알겠어? 네가 누구와 도망치려 했는지? 피에트로가 묻는다. 유진은 입을 다물었다.
사기당한 기분이네. 유진은 그냥 조소한다. 평범한 해적인 줄 알았지. 페로 로꼬가 금지옥엽 키운 애일 줄은 몰랐지. 이젠 화내거나 따질 힘도 없다. 미간을 지그시 누른 유진은 그냥 한숨만 쉬었다. 쭈뼛거리던 피에트로가 말했다.
“알았다면 이제 죽은 듯이 살아, 이그나시오. 나는 너를 여전히 내 제자라고 생각해. 내 제자가 그들 손에 죽는 건 사양이야.”
허튼소리. 제자를 팔아넘기는 스승이 어디 있어. 목구멍 끝까지 솟은 말은 그냥 지그시 삼킨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것들은 유진을 피곤하게 한다. 매일같이 변화를 거듭하던 시기가 꼭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문득 떠올렸다. 씽코. 준비된 계획. 일주일 후에 자신은 이곳을 떠난다. 메노르는 페로 로꼬의 사랑받는 자식. 라보 데 누베의 모든 관심을 받는 막내. 그런 이와 동행한다면 덜미 잡힐 확률이 높지. 씽코에게 말할까. 혼자 떠나겠다고.
그러나 우노의 말이 또 귓가를 맴돌아서. 메노르를 부탁해.
부탁하긴 뭘 부탁해요. 오히려 내가 메노르한테 잘 부탁한다고 말해야 할 꼴인데.
유진이 깊이 숨을 들이켰다. 날숨은 아주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다.

사흘이 지났다. 나흘째 되는 날 유진은 배낭을 새로 샀다. 거기에 씽코가 읊어줬던 물건들을 또 그대로 담았다. 이번엔 매트리스 아래에 숨겨놨다. 같은 물건을 세 번씩이나 사기엔 돈이 부족한 탓이었다.
광장으로는 자주 내려가지 않았다. 피에트로의 말이 뇌리에 박힌 탓도 있었으나 어쩌면 그냥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유진은 래빈과 주로 광장에서 만났다. 광장에 내려갔다가 래빈을 만날까 봐. 문제를 회피하는 건 자신답지 않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으나 내가 하는 행동이 나다운 거 아닌가, 하고 넘겼다. 적적하고 권태로운 날들이다. 답지도 않게.
닷새째 되는 밤이었다. 완연한 가을을 맞은 마을은 이제 낙엽 밟히는 소리만으로 기척을 잡아챌 수 있었다. 바람은 점점 날이 섰고 해는 금세 졌다. 밤 아홉 시에서 열 시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유진은 멍하니 누운 채 이틀 후의 일을 상상하고 있었다. 최악과 최선. 차악과 차선. 그리고 내려야 할 결정 따위의.
낙엽 밟히는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마른 이파리들은 바닥에 떨어진 채 카펫을 이뤘다. 세상에서 가장 요란스러운 카펫을 누군가가 비척비척 밟아 걷고 있었다. 유진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밤 늦게 귀가하는 누군가겠거니 하고 말았다.
발소리가 문 앞에서 멈췄을 때 유진은 몸을 일으켰다. 한참이나 서성이는 소리였다. 바람에 날린 낙엽들이 무언가에 부딪혀 툭툭 떨어진다. 아마도 사람일 테지. 유진은 가만히 기다렸다. 어디선가 주워온 기다란 각목이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었다. 여차하면 그걸 꼬나쥐고 문을 열 셈이었다.
그러나 정체 모를 누군가는 다시 걷기 시작한다. 한참을 서성인 주제에 또 미련 없이. 바삭바삭. 낙엽 밟히는 소리가 어렴풋해진다. 마침내 들리지 않게 되고 나서야 유진은 천천히 문을 열었다. 고개만 빼꼼 내밀어 주위를 살폈다. 어두웠다. 달조차 뜨지 않은 밤이다. 희끄무레한 별빛이 으스러진 낙엽들을 비춘다. 점점이 떨어진 진득한 것들이 있었다. 피였다.
걷기 시작했다. 핏자국이 있었기 때문에 행적을 되짚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째서인지는 몰랐다. 피를 흘린 채로 문 너머 가만히 서 있었을 누군가. 자국이 남을 정도로 피를 흘리면서 끝끝내 도움을 청하지 않고 사라진 사람. 어쩌면 그냥 무료했는지도.
“…….”
그리고 마침내 핏자국이 끊긴 곳에 다다랐을 때. 유진은 아찔해지려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애썼다.
우노의 집이었다. 여전히 엉망인. 그새 누군가가 다녀와 치우지도 않았다. 어쩌면 당연하다. 라보 데 누베 소속 해적이었을 우노. 라보 데 누베에게 원한을 산 우노의 집을 누가 치워준다고. 현관문 너머 누군가가 일렁였다. 유진은 무너진 돌담을 가볍게 쓸었다가 걸음을 내디뎠다.
집안 공기는 여전히 탁했다. 온갖 곳이 뚫리고 구멍 난 주제에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새 가라앉은 먼지가 걸음걸음마다 자욱하게 피었다. 유진은 손을 대충 휘휘 저으며 걸었다. 뜨문뜨문하던 핏자국은 이내 문이 닫힌 안방 앞에서 끊겼다. 손을 들었다.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똑똑.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아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침대에 걸터앉은 사람이 있었다. 깨진 창문 너머 달빛 한 점 없는 밤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는 뒤통수. 유진은 느리게 걸어가 곁자리에 앉았다. 오래된 침대가 앓는 소리를 냈다.
“다쳤어?”
아주 오랜만에 유진은 한국말을 발음했다. 상대는 대답이 없다. 반응도 없었다. 기절한 건 아닌가 싶어 가만히 고개를 돌렸다. 어디서 시작됐는지 모를 희끄무레한 빛이 일렁였다. 어둠에 묻힌 눈동자가 느리게 깜빡였다.
“안 다쳤어?”
생뚱맞은 질문이다. 잠긴 목소리가 물어오자 유진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 괜찮아. 너는? 여전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대화가 아니었다. 유진은 대답을 듣기를 포기했다. 대신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찢어진 옷자락이 축축했다.
“어디 갔었어?”
“……일이 있었어. 말도 없이 미안해.”
“김래빈 다쳤어.”
“그냥 실수한 거야.”
“괜찮아?”
“응.”
잠잠하다. 느리게 침몰하는 것만 같다. 유진은 가볍게 숨을 들이켰다. 나 집에 붕대 있어. 김래빈이 준 거 아직 남았어. 그러자 마침내 래빈의 얼굴이 돌아간다. 눈이 맞았다. 멀뚱한 얼굴이 끔뻑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 나중에 너 써. 유진은 고개를 젓는다. 지금 붕대 필요한 건 래빈이야. 그러자 래빈은 또 한참 말이 없다가.
“우노가 너한테…….”
“나한테?”
“너한테 뭐라고 했어?”
유진은 잠시 생각한다. 그러나 결국엔 글쎄, 하고 입을 닫았다. 우노. 유진. 페로 로꼬. 래빈. 몇 번 가늠하다가 호흡한다. 흐르던 피는 천천히 굳으며 상처를 덮었다. 비릿한 피 냄새가 풍기지만 곧 사라질 것이다. 래빈은 말이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눈이 마주쳤다. 어딘가 몽롱하고 피로한 눈이 미끄러지듯 시선을 피하다가 도로 유진에게 향한다. 어쩌면. 그 순간 차유진은 무심코 생각했다. 어쩌면 말이에요. 정말 혹시나 하는 이야기인데…….
“김래빈, 노래 들려줘.”
그래서 유진은 입을 열었다. 김래빈은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차유진은 조심스레 그에게 기댄다. 코끝에서 사라지지 않는 비린내에 숨을 들이켜며. 밤이다. 자욱하게 피어난 먼지가 권태로운 바람에 흔들렸다. 깨진 유리창 파편마다 달이 하나씩 담겼다. 달이 많은 밤이다. 별보다 달이 많아서 온 세상이 달 천지가 됐다. 차유진은 입을 빠끔거리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김래빈. 김래빈. 대답해봐. 부드럽게 맥동하는 심장 소리는 선명하거늘 차유진은.
“싫어?”
래빈은 여전히 창밖을 바라봤다. 짙게 내려앉은 눈그늘 위, 흐린 빛에 흔들리는 눈동자가 말갛게 반짝거렸다. 축 늘어진 어깨나 가볍게 그러쥔 손. 온전히 기대었음에도 꾹 다문 입. 아릿한 통증이 네게도 말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너는 살아있는가. 유진은 괜히 발을 꼼지락댔다. 발바닥에 깊이 났던 자상이 내게 속삭였듯 네 팔에 난 상처도 네게 다정히 말을 붙이고 있을까. 너는 살아있노라고.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반응은 조금 늦게 왔다. 한참 말이 없던 래빈이 마침내 입을 열었을 때 유진은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스미는 어둠과 달빛과 그 속에서 꽃 틔우는 그림자를 보고 있었다. 래빈은 입을 열어 몹시도 차분하고 느린 말을 숨처럼 뽑아냈다. 말끝마다 조금씩 긴 숨을 삼키는 버릇. 그게 꼭 우노를 닮았다. 그래서 유진은 말없이 손을 뻗었다. 그러쥔 래빈의 양손 위에 제 것을 단단히 얽었다.
“……무슨 노래?”
“아무거나 상관없어. 김래빈이 들려주고 싶은 거.”
“나는…….”
김래빈이 입을 다문다. 방에 피어난 먼지 틈바구니에 숨어든 침묵은 어김없이 내려앉았다. 단단히 맞잡았던 손이 쑥 빠져나간다. 제 팔에 새겨진 상처를 더듬던 래빈의 고개가 푹 떨어졌다. 유진은 묻지 않는다. 대신 조금 떨어졌다. 기다랗고 고운 손가락이 벌어진 살과 피와 얹힌 딱지를 하염없이 머금다가 어느 순간 그 아래로 내려가고.
바지 주머니에서 꺼낸 건 구겨진 종이였다. 꼬깃꼬깃 구긴 종이는 피 묻은 손으로 만지자 금세 또렷한 흔적을 남겼다. 기다란 종이엔 뜻 모를 구멍들이 불규칙적으로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걸 천천히 들어 올린다. 구멍 사이로 달빛이 한 줌 가득 떨어졌다. 짙은 그림자를 내며 래빈의 얼굴 위로 흐드러졌다. 검은 달이 점점이 피어난 얼굴로 래빈은 유진을 보고, 아, 그 틈에서 가장 오롯한 두 눈동자. 지독한 피로와 무기력함에 푹 젖어 들었으나 결코 빛나기를 멈추지 않는 저 눈이.
“들려주고 싶었어.”
아마도 우노에게. 유진은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래빈은 종이를 쥔 손을 떨어트렸다. 검붉은 흔적이 거뭇거뭇 남은 종이 끄트머리를 하염없이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만든 건데. 완성이 거의 가까웠는데. 우노한테 제일 먼저 들려주려고 했는데. 그런데 그 직전에. 그 직전에 우노가 나한테 와서……. 그리고 침묵. 입을 굳게 다문다. 내뱉었을 말을 전부 삼킨 채 종이만 만지작거렸다. 그래서 유진은 부러 래빈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괜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들려줘. 나한테라도.
래빈이 고개를 들었다. 숨을 삼키려는 듯 빠끔거리던 입은 굳게 닫히나 고개는 천천히 주억거렸다. 응. 말끝이 느리게 떨린다. 유진은 말하지 않았다. 대신 유진은 기다렸다. 래빈이 몸을 일으켰다. 가벼운 현기증이 이는 듯 비틀거렸으나 두 다리로 땅을 단단히 짚어 섰다. 느리게 걸음을 떼는 래빈의 뒷모습을 보며 유진은 기다렸다. 아주 차분하게. 빈 옆자리를 가볍게 그러쥐어 만지작거렸다. 상처가 있던 쪽의 이불엔 옅은 물기가 남았다.
래빈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돌아왔다. 손에는 작은 태엽 상자를 든 채였다. 유진도 익히 아는 물건이었다. 우노는 저 상자를 거실 탁상 위에 올려놓았었다. 우노의 집에 초대된 적은 얼마 없었으나 그럴 때마다 항상 자리를 지켰다. 먼지가 쌓이고 멈춰버린 집에서 유일하게 맥동하는 물건 같았다. 어쩌면 우노 본인보다도 더. 유진은 래빈이 그걸 바닥에 내려놓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애지중지하던 거였다. 우노와 말을 튼 지 얼마 되지 않은 유진조차 알았다. 그 난리가 있었는데도 흠집 하나 나지 않은 채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는 점조차 유진에게 알리는 듯했다. 우노는 저 물건을 몹시도 아꼈다. 어쩌면 자기 자신보다도 더.
래빈은 익숙한 손짓으로 상자를 조작했다. 꾸깃꾸깃 구겨진 종이를 애써 손으로 펼치더니 입구를 열고 통 속에 끝을 감아 넣었다. 일련의 손동작은 퍽 능숙했기 때문에 유진은 또다시 알아차렸다. 저건 우노의 물건이되 우노의 것이 아니었으리라. 우노의 집에 보관했으나 주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비스듬히 기운 흐리멍덩한 빛이 래빈의 위로 데굴데굴 떨어졌다. 속눈썹에서 미끄럼틀 타고 내려와 인중까지 굴러 내리는 빛은 기어코 입술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다. 유진은 상자를 매끄럽게 조작하는 래빈의 손에서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어느샌가 부드럽게 곡선 진 입술과 살짝 붉어진 눈가.
어쩌면 우노가 아낀 건.
“오르골이야.”
살짝 달뜬 래빈의 목소리가 유진을 상념에서 일깨웠다. 퍼뜩 깨어난 유진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바닥에 다리를 모으고 앉자 래빈이 차분히 설명을 이어갔다. 여전히 말 틈마다 조금씩 숨을 삼켜댔으나 목소리엔 옅은 열기가 어렸다. 그게 마음에 들었다.
“오르골 악보는 이렇게…… 긴 종이에 구멍을 뚫어서 만들 수가 있거든. 나는 전문적인 기계나 프로그램이 없으니까 우노가 이런 방식을 추천해줬어.”
“응.”
“이렇게 손잡이를 돌리면.”
래빈이 작은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한 바퀴가 돌 때마다 작게 달그락거린다. 세 바퀴가 돌았을 무렵 작고 경쾌한 선율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느리고 부드러운, 그러나 동시에 높고 낮은 음표를 능숙하게 타고 지나고.
달과 깨진 유리. 자욱한 먼지와 오르골. 그리고 차유진과 김래빈.
김래빈이 눈을 내리깐 채 웃고 있어서. 속눈썹 끝에 매달렸던 달빛이 일렁일렁 흔들리다가 어느 순간 뚝 떨어져서. 동그란 자취를 남기며 그렇게 바닥에 스며들어서.
그래서 차유진은 생각했다. 어쩌면 우노가 아낀 건 태엽 상자가 아니라…….
노래가 멎는다. 기묘하게 흔들리던 달빛은 래빈이 고개를 들자 그림자에 가려 사라졌다. 머뭇머뭇 시선을 맞춘 김래빈은 제 뺨을 만지작거리다 머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조금 전보단 확실히 살아있는 사람 같은 반응이었다.
“오르골 하나만으로 만들어서 조금 미흡한 부분이 있기는 해. 언젠가는 완성을…….”
문장은 완성되지 못한 채 추락한다. 김래빈은 멈칫거리다가 느리게 되풀이했다. 그러니까, 완성을. 그러나 끝끝내 말을 끝맺진 못하고. 다만 입술을 꾹 짓누른 채 한숨만 폭 쉬었다가 고개를 들며 묻는 것이다. 마음에 들었어? 그 한마디에 차유진은 그제야 웃으며 대답했다.
“응.”
“…….”
“김래빈이 이거 완성했으면 좋겠어. 분명히 멋질 거야!”
래빈이 고개를 떨궜다. 감싼 손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유진은 손을 뻗는다. 손끝으로 래빈의 손등을 노크하듯 가볍게 두드린다. 그러다가 깊이 깍지를 얽어 끼는 것이다. 느리고 떨리는 시선이 올라와 허공에서 부딪쳤다. 유진은 환하게 웃으며 침착하게 말했다. 급한 불은 끈 것 같으니까. 우선은 중요한 것부터.
“김래빈 안 어지러워? 피 많이 흘렸어.”
“괜찮아. 그렇게 위험한 상처는 아니야.”
“진짜?”
“응.”
전혀 안 믿겨. 유진은 입을 삐죽이다 몸을 일으켰다. 래빈의 어리둥절한 시선이 뒤따랐다. 얕은 숨을 들이켜고 내쉬는 래빈을 보며 유진은 어쩌면 안심했는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괜찮아 보여서.
“나 김래빈한테 묻고 싶은 거 많아.”
“대답해줄게. 할 수 있는 거면.”
“그럼 그 전에 김래빈 상처부터 치료해.”
“응.”
“밥도 먹어. 물도 마시고.”
“응.”
“한숨 푹 잔 다음에 물어볼 거야.”
래빈은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
“그래.”
그래서 유진은 맞잡은 손을 가볍게 끌어당겼다. 여전히 이상하리만치 차갑다. 몸을 일으키곤 비틀거리는 래빈을 단단히 부축했다. 그리고 다시 집을 나온다. 계단을 내려선다. 유진의 집, 래빈이 한참이나 서성거렸던 그 대문을 지나서. 래빈을 매트리스에 앉히곤 붕대를 꺼냈다. 쓸 만한 약이 없어 배낭을 뒤졌다. 민간요법에 통달했다는 노인이 만든 항생제 연고를 듬뿍 펴 바르고 붕대를 단단히 조여 맸다. 래빈은 그동안 입 한 번 벙긋하지 않았다.
유진도 구태여 입을 열지 않았다. 상처를 닦기 위해 벗긴 옷. 그 아래 드러난 목덜미에 새겨진 새까만 문신. 아가리를 쩍 벌린 들개의 형상. 유진은 이 문양을 알았다. 그래서 놀라지 않는다. 묻지도 않는다. 이 문신 하나로 떠오른 수많은 의문이 가라앉았다.
붕대를 매듭짓고 유진은 물러났다. 래빈은 여전히 넋을 놓은 듯했다. 어깨에 칼에 베인 듯 남았던 손바닥만 한 자상. 정확히 들개의 몸통을 가로 지은 상처를 가만히 떠올리다 만다. 어쩌면 중요한 건 그게 아닐지도 몰라서.
“안 물어?”
먼저 입을 연 건 래빈이었다. 물을 거 많다며, 하고 운을 뗀 래빈은 어느샌가 고개를 돌려 유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간 눈이 반짝반짝. 날카롭고 매서운 시선이다. 유진은 흠, 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궁금한 거야 많다. 라보 데 누베인 거 왜 속였어? 아니지. 래빈은 속인 적 없다. 단지 말하지도 않았을 뿐. 그러니 질문도 달라져야지. 그런데 라보 데 누베인 걸 왜 말하지 않았냐고 묻기엔, 글쎄. 답은 너무 자명해서.
그래서 유진은 입만 삐죽이다 그냥 웃었다. 궁금한 거 많다며. 래빈이 말하자 유진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궁금한 건 여전히 많다. 그냥 묻지 않기로 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졌어. 가볍게 말하자 래빈의 눈이 가늘어졌다가.
“……타인을 그렇게 쉽사리 신뢰해선 안 돼. 하물며 난…….”
나는 라보 데 누베인데. 래빈은 제가 내뱉은 말에 스스로 놀란 듯 울상이었다. 험악하게 구겨진 얼굴을 뜯어 살피다가 유진은 그냥 비식비식 웃었다. 그러자 곧장 뒤따르는 고성.
“웃지 마! 너는 이게 우스워? 내가 라보 데 누베라는 건 네가 해적과 이미 밀접하게 엮인 관계라는 뜻이야. 그리고 이 마을에서 라보 데 누베가 가지는 위치를 생각한다면, 너는 이미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말해도 이상할 것 없어!”
“알아!”
“근데 왜 웃어?”
“김래빈 얼굴 진짜 무서워서.”
“무서운데 웃는다는 건 어불성설이야!”
“어불? ……설?”
“그러니까,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라고.”
“아하.”
이거 무슨 대화지? 유진은 깊이 생각하는 대신 그냥 실실거리기로 한다. 저 혼자 역정 냈다가 저 혼자 진지해졌다가, 아무튼 바쁜 래빈을 살피기에도 바빴다. 래빈은 눈을 찡그리며 답답하다는 듯 몸을 들썩이다가 또 움찔했다. 아야야, 하고 어깨에 손을 올린다. 상처가 쑤신 게 틀림없다. 그런데 와중에 도끼눈 뜨고 쳐다보는 건 관두지를 않고. 진짜 웃긴 애다. 보면 볼수록 더. 조금 전 우노의 집에서 오르골을 만지작거리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그때 래빈은 조금 더 우울하고, 가라앉아 있었고, 어딘가 피곤해서 당장이라도 흩어질 것처럼 굴었지. 오르골 하나 돌렸다고 그새 회복한 게 웃기는데. 웃기기는 하는데.
그래서 유진은 시원하게 웃었다.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방음이 잘 되지도 않으니 숨죽여야 할 텐데 오늘 밤은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통쾌한 웃음이 거처를 넘어서 온 동네를 쩌렁쩌렁 울린다. 화들짝 놀란 래빈이 옆에서 조용히 하라며 등을 마구 때리다가 또 아야야, 했다. 그래서 더 웃었다. 땅을 치며 웃었다. 꼭 누나처럼 웃었다.
“너 울어?”
유진은 당황이 역력한 래빈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우는 게 아니다. 너무 웃었더니 눈물이 고인 거였다. 익숙하게 눈가를 훔치며 아이고, 아이고, 앓는 소리도 내봤다. 밤중에 그렇게 시끄럽게 웃으면 주위에 민폐라고 입으로 따발총 쏘아대던 래빈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진짜 우는 거 아니지, 하는 말에 유진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로 우는 게 아니었다. 울긴 왜 울어. 이렇게 기분이 좋은데.
진짜로 우는 거 아닌데. 우는 거는 아닌데.
“그냥, 음.”
“그냥?”
“[우리가 다른 곳에서 만났더라면 좀 더 좋았을 것 같아서.]”
“한국말로 해. 정 못하겠으면 스페인어로 하던가. 나 영어는 몰라.”
“김래빈 바보라고.”
“나는 바보가 아니야, 바보야!”
무조건 반사처럼 래빈이 역정을 냈다. 유진은 그냥 웃었다. 땅을 치고 데굴데굴 구르면서. 속에 뭉그러졌던 감정이 전부 웃음이 되어 흘러나오는 것처럼. 그냥 웃었다. 계속 웃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숨이 밭아질 지경이 되어서도.
오르골 하나 돌렸다고 괜찮아진 것 같은 너한테 음악이 가지는 의미는 어떨는지 알 것만 같아서. 혼란스럽게 이지러지고 뭉개지는 감정들 틈바구니에서 네가 어떻게 생존해왔는지 알 듯해서. 우노와 파란 대문 집과 침침한 거실과 그 위에 먼지 하나 없던 오르골이 너한테 무엇이었을지 알 법해서. 그런 너를 보며 혼자 있을 땐 쓰일 일도 없을 오르골을 매일같이 닦아댔을 우노의 심정을 모를 수가 없어서.
그러는 동시에 궁금해져서 슬펐다. 우리가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어땠을까. 내가 너를 한국에서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네가 나를 샌디에이고에서 만났더라면? 그랬더라면 우리는 무엇이 달라졌을까. 우리는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까.
나는 캘리포니아 햇살 아래서 웃는 너를 볼 수 있었을까.
야자수 이파리 그늘을 등지고 깊이 호흡할 수 있었을까.
바다를 보며 미래를 꿈꿀 수 있었을까?
모를 일이다. 사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상황이 사람을 만든다. 적어도 유진은 그렇게 생각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평범한 세상에서 만난 유진과 래빈은 지금의 그들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관심도 없다. 중요한 건 지금. 현재.
래빈이 눈을 깜빡였다. 진득한 졸음이 묻는 눈으로 가만히 고개를 까딱였다. 유진은 래빈의 눈 밑에 그려진 짙은 그늘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김래빈. 어? 어제 얼마나 잤어. 그러자 래빈은 잠시 말이 없다. 고민이라기보단 잠깐 존 것 같은 모양새다.
“바빠서…….”
“왜?”
“하루빨리 완성하고 싶었어. 그런데 조급해지니까 자꾸만 실수해서. ……우노한테 빨리 들려주고 싶어서 어쩔 수가 없었어.”
“며칠이나?”
“……이틀 정도? 아니. 사흘?”
“김래빈이 기계야?”
“나는 사람이야!”
“사람인데 왜 잠을 안 자?”
황당하다는 듯 되묻자 래빈이 입을 다물었다. 유진은 부러 눈을 가늘게 떴다. 래빈이 설설 시선을 피한다. 피를 흘려서 그런지 평소보다 얼굴이 창백하다. 그래서 피로로 벌건 눈이 유달리 툭 튀어나오게 보이는 듯도 했다.
“자, 김래빈.”
“나 몰래 나온 거야. 빨리 돌아가야 해.”
“몇 시간 정도는 괜찮아.”
“안 괜찮을지도 몰라.”
“아냐. 괜찮아. 내가 세 시간 있다가 깨워줄게.”
“세 시간?”
“응. 세 시간.”
래빈이 잠시 얼굴을 찡그렸다. 흘러내린 옷깃을 끌어 올린 래빈은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딱 세 시간이야. 더 오래는 진짜 안 돼. 유진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맡겨만 둬.
꾸벅꾸벅 졸던 래빈은 천천히 매트리스에 누웠다. 부득불 바닥에서 자겠다는 것을 환자는 매트리스에서 자라며 우긴 결과였다. 왼쪽 어깨를 대고 누운 래빈의 숨소리가 느리게 안정된다. 유진은 머리맡에 기대어 앉아 가만히 창밖을 바라봤다. 그때 래빈이 말했다. 졸음 잔뜩 묻은 가물한 목소리로.
“나 실은 생일이 십일 월인데…….”
유진은 기다렸다. 단조로운 호흡만이 이어진 말을 대신했다.

날이 밝았다. 유진은 그날 새벽부터 눈을 떴다. 차마 잠이 오지 않아 말똥한 정신으로 매트리스 위만 굴러다녔다. 씽코는 혹시 모를 잡음과 추적을 예방하기 위해 오늘 하루 집 밖을 나가지 말라고 일렀다. 유진은 그 말을 착실히 따랐다. 온종일 집안에 틀어박혀 있었다는 뜻이다.
단단히 걸어 잠근 걸쇠는 문 앞에서 누가 서성이든 열지 않았다. 오늘따라 유진을 찾는 사람이 이상하리만치 많아서 더더욱 성가셨다. 이그나시오, 샌드위치 먹지 않을래? 이그나시오, 부탁이 있단다. 이그나시오, 품삯을 두 배로 줄 테니 심부름 좀 해 다오. 이그나시오. 이그나시오. 이그나시오. 해가 기울어 수평선 너머에 비칠 때쯤 유진은 이그나시오라는 이름만 들어도 넌더리가 날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날이 진다. 결전의 시간은 그때부터다.
모든 탈출이 그러하듯 유진과 메노르 역시 가장 으슥한 시간을 노렸다. 베테랑 브로커인 씽코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 마을이 워낙 굽이지고 미로처럼 얽혀 있는 덕분에 배를 댄 곳까지 나가는 일은 어렵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라보 데 누베의 세력은 애초에 바다에 포진되어 있기도 했다. 그러니까 배에 오르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야. 문제는 바다를 넘어가는 거지. 씽코는 자못 진지한 투로 지도를 짚으며 말했더랬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지도는 얼룩덜룩 이가 빠진 채였기 때문에 제대로 알아보기도 힘들었지만.
“메노르와는 해안절벽에서 만나기로 했어. 여기서 주의할 점. 신호는 무조건 발끝을 두 번 두드리고 박수 한 번 치는 거야. 신호는 바뀌지 않아. 서로가 서로임이 확실해진 후에야 출발할 거야. 그러니까 기억해둬.”
지도를 짚으며 빠르게 설명하던 씽코가 선글라스 낀 눈으로 유진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러며 짓씹듯이 되풀이하는 것이다. 명심해, 이그나시오. 발끝으로 두 번, 박수로 한 번. 메노르를 구별하는 건 네 몫이야.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발끝으로 두 번, 박수로 한 번. 이렇게 흔한 행동을 신호로 삼아도 되나? 눈을 찡그리며 묻자 씽코는 오히려 이런 게 잘 먹힌다며 대답했다.
“일종의 허점을 찌르는 거지. 이렇게 평범한 행위는 신호가 아닐 거라고 생각하거든.”
“만일 메노르가 반응하지 않는다면요? 그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럼, 글쎄.”
잠깐 뜸을 들인 씽코는 이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끼리라도 출발해야지. 대금은 이미 받았어. 준비도 끝났고. 약속 시각까지는 기다릴 테지만 그 이상 대기하는 건 우리한테도 위험하니까.”
그 말에 유진은 가만히 떠올렸다. 급하게 숨을 몰아쉬던 우노. 그 틈바구니에서 비집고 나온 한 마디. 메노르를 부탁해. 그건 유언이다. 머리를 길게 늘어트리고 느적느적 발을 끌며 걷던 여자의. 유진에게 유일한 희망을 안겨준 사람의 유언.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단호하게 대답하며 유진은 생각을 정리했다. 그들은 메노르를 약속 시각까지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그가 오지 않는다면. 신호에 반응하는 사람이 끝끝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유진은 씽코의 배에 오를 것이다. 미련 없이. 여들없는 걸음으로. 그리고 그렇게 끝끝내 바닷가 마을을 떠나리라.
그리하여 태양이 떨어진 저녁. 유진은 배낭을 짊어지고 문을 나섰다.
땅거미 진 바닷가 마을은 평소와 다름없다. 고요하고 적막하나 파도 소리에 온갖 절규와 고함과 몸부림이 묻히는 곳. 유진은 평소보다 더 신중하게 걸음을 옮겼다. 곧장 오지 마. 빙글빙글 돌다가 이곳저곳 들러서 와. 만일 누가 뒤를 밟는 것 같으면 이 미로 같은 지리를 이용해야 해. 씽코의 조언을 거듭 곱씹으며 유진은 발을 움직였다. 위로 솟았다가 아래로 솟았다가. 옆으로 꺼졌다가 바닥에 뛰어내렸다가. 뒤를 쫓는 걸음은 없는 듯하다. 그때 비로소 약속 장소로 향했다.
바닷가 마을의 항구와 부둣가는 전부 라보 데 누베가 꽉 잡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 마을에서 탈출구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은 거의 항구뿐이니까. 유진이 지금까지 감히 탈출을 시도하지 못한 것도 그 이유였다. 보도로 걸어가기엔 첩첩산중이다. 드문드문 오가는 트럭에 얻어타는 건 말도 안 됐다. 그들 모두가 라보 데 누베 소속 해적이기 때문이다. 그럼 자연스럽게 남는 건 배편인데, 뭐, 보다시피 해적은 원래 바다에서 살아서. 유진은 지난 삼 년간 이곳이 완전히 고립되어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씽코가 항구와 부둣가에서 멀리 떨어진 해안절벽 어드메에 배를 댈 수 있는 공간을 찾아낸 것이다. 비록 부둣가나 항구보다 많이 위태롭고 썰물과 밀물의 차이가 심해 오래 버틸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깎아지른 해안절벽에 딱 붙어 있기 때문에 배에 타는 방법도 기상천외했다. 그냥 타이밍 맞춰서 잘 뛰는 거였다.
“뒤따라온 사람은?”
“없어요. 혹시 몰라서 빙빙 돌았는데 아무 기척도 없었어요.”
“보아하니 그런 것 같긴 하네. 수고했어.”
유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짝다리를 짚고 비딱하게 선 씽코는 연신 선글라스를 문질거렸다. 거의 오 분에 한 번씩 손목시계를 훔쳐보고 선글라스 테만 만지작거리길 반복했다. 유진은 손목시계가 없었다. 이런 마을에선 낡아빠진 손목시계도 귀중품이었으니 진작에 팔아먹었다. 그래서 씽코 근처에 붙어서 기웃거렸다. 지금 몇 시예요? 십사 분 남았어. 기다려. 알겠어요. ……지금 몇 시예요? 십 분 남았다. 네. 그리고 또 반복.
“삼 분 남았어. 뛸 준비 해.”
씽코가 냉정히 말했을 때 유진은 천천히 몸을 풀기 시작했다. 발끝으로 두 번. 박수 한 번. 손이 근질거린다. 저 멀리 어둠 속에 녹아든 지평선을 노려보다가 쭉쭉 몸을 폈다. 쿼터백 시절 배운 스트레칭이 고스란히 배어났다. 너 무슨 운동선수 같네. 곁에서 시간을 훔쳐보던 씽코가 불현듯 말했다. 유진은 그냥 그래요, 하고 말았다.
“십 초.”
구. 팔. 칠. 유진은 속으로 나직이 수를 셌다. 얼굴 모를 메노르. 누군지도 모르는 해적들의 막내. 같이 도망쳐달라던 우노. 메노르를 부탁해. 유언이 뭉게뭉게 구름처럼 머릿속을 퍼지다가 이내 쏟아지는 빗줄기에 녹아 사라졌다.
육. 오. 사. 선글라스를 꼈던 씽코가 중얼거렸다. 저게 뭐지? 유진은 고개를 돌렸다. 지평선이 아니었다. 씽코는 수평선을 보고 있었다. 저 멀리서 무언가 아슴푸레한 것이 물살을 타고 흘러온다. 등을 돌린 채 시선을 떼지 않던 씽코가 중얼거렸다. 물러나, 이그나시오.
그리고 삼. 이. 일. 모든 것은 순간에 일어난다.
불빛이 번쩍였다. 폭죽이 터졌다. 스위치를 눌러 불을 켜듯 하늘이 점멸한다. 동시에 서 있던 대지가 거센 파도처럼 울렁였다. 유진은 이 감각을 안다. 서핑할 때 탈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파도를 만나면 서프보드는 이렇게 흔들리곤 했다.
“젠장! 뛰어, 이그나시오!”
굉음 사이로 선글라스를 벗어 던진 씽코가 거칠게 짓씹는다. 유진은 그 순간 땅을 박차고 뛰기 시작했다.
“라보 데 누베야!”
어디선가 아득한 노래가 울린다. 유진은 그 노랫소리마저 알았다. 어느 날엔가 담벼락에 기댔던 우노가 흥얼거렸던 노래. 그 위로 쏟아지던 볕뉘. 빌보드가 아니라 갑판 위에 올랐다던 바로 그 선율.
그게 라보 데 누베의 노래였구나. 절벽이 무너지고 바다로 쏟아지는 순간, 쩍쩍 갈라져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균열에서 도망치며 유진은 불현듯 깨닫는다. 라보 데 누베의 노래였어. 그 아름다운 선율이. 어울리지 않아. 유진은 입술을 짓씹고 나아간다. 우노의 말을 그제야 이해한다. 메노르. 당신이 지은 노래 한 곡만으로도 알겠어. 당신은 라보 데 누베와 어울리지 않아. 우노가 왜 당신을 애지중지했는지 알겠어. 어째서 내게 그런 부탁을 했는지…….
땅이 갈라진다. 박혀 있던 흙더미와 돌이 거세게 요동치는 대지에 따라 이리저리 튕겨 나왔다. 배낭은 어느샌가 머리를 감싸고 있다. 달린다. 다리를 쭉쭉 펴고 뜀박질한다. 그리고 다음 순간 유진은 자각했다. 도망치고 있다. 자신은 도망치고 있었다. 비단 라보 데 누베가 아니다. 많은 것으로부터. 달리고 달리고 달린다. 죽지 않기 위해 도망친다. 발바닥이 욱신거렸다. 이미 아물고 붙은 상처가 다시금 터지는 것처럼. 밤하늘에 불꽃이 터지듯이. 그냥 그렇게.
세상이 진동했다. 거친 파동에 유진의 몸이 하늘로 솟구쳤다. 이를 악물고 몸을 옹송그렸다. 바닥에 처박히는 순간 입술을 짓씹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난다. 달려나간다. 온몸이 부서지듯 아프다. 어디선가 우노의 목소리가 들렸다. 메노르를 부탁해. 지금 내가 메노르를 안 기다려서 저주라도 했어요, 우노? 목구멍이 따끔하다. 씽코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절벽에서 뛰쳐나와 마을로 숨어들었다. 꼬부랑 길을 누비고 마을을 가로질렀다가 내려오길 몇 번이나 반복했다. 옆구리가 터질 것만 같다. 사실 갈비뼈 몇 개가 나간 것 같기도 한데. 포탄 터지는 소리가 아스라하게 부서진다. 그런데도 마을은 소란 하나 없었다. 얼기설기 지은 판잣집 밖으로 나서는 사람 하나 없다. 적막이라기보단 텅 빈 공허였다.
공허의 뱃가죽을 갈라 그 틈새에 몸을 욱여넣는다. 유진은 그늘지고 구석진 모퉁이에 몸을 구겨 넣고 거친 숨을 가다듬었다. 분명 몇 번이나 땅에 처박혔는데 아프지가 않다. 아드레날린 때문일 것이다. 내일이면 골골 앓다가 콱 죽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지. 머리를 보호했던 배낭은 다 터져서 내용물이 반 넘게 사라졌다. 유진은 배낭 속에서 진통제 하나를 꺼내 씹어 삼켰다. 진통제는 가장 아래에 처박아놓길 잘했다고 스스로 칭찬하면서.
라보 데 누베다. 그건 분명 라보 데 누베였다. 유진은 차가운 벽에 머리를 박고 냉정하게 생각하려 애썼다. 우노의 죽음. 우노는 아마도 계획이 들통났기 때문에 죽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씽코는 어째서 날짜를 바꾸지 않았는가. 사고의 흐름이 유려하지 않았으나 미심쩍은 부분은 손쉽게 손에 잡혔다. 우노는 어째서 죽었는가. 씽코는 어째서 계획을 강행했는가. 메노르는 어째서 나타나지 않았는가.
답할 수 있는 물음이 없다. 그래서 유진은 눈을 내리깔았다. 저 멀리서 발소리가 들렸다. 일정하지 못하고 드문드문한 걸음이다. 운동화가 아니라 구둣발 소리였다. 이 마을에서 구두 신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유진은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으키려고 했다. 머리가 띵하니 어지러워 곧장 욕이나 지껄였지만.
희끄무레한 달이 빛의 전부였다. 유진은 벽을 짚고 몸을 지탱했다. 머리가 어지럽다. 피를 그렇게 많이 흘리진 않았으니 아마 고통 때문일 것이다. 숨을 들이켜고 내쉬었다. 괜찮다. 조금 지나면 진통제가 몸에 돌기 시작할 거였다. 그러면 아드레날린이 닳아 없어진대도 통증이 심하진 않을 테고. 사실 자신 없지만. 귀가 먹먹하다. 제대로 된 소리가 닿지를 않았다.
한 걸음 내디딘 순간 누군가가 모퉁이 너머에서 불쑥 나타났다. 달을 등진 인영이다. 역광 때문에 누군지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유진이 눈을 찡그렸다.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제 것인지 상대 것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어디선가 쨍한 이명이 들렸다. 그래도 귀를 울리는 게 라보 데 누베의 노래가 아니라 다행이다. 멍하니 뇌까리는데 상대가 다가왔다. 딱 한 걸음.
“……차유진.”
그 한마디에 유진은 깨닫는다. 아, 다시 래빈이다. 라보 데 누베 소속 해적이자 제 친구 김래빈. 그제야 옷차림이 보였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고급 정장. 구두까지 착실하게 신은 와중에 넥타이까지 검은색으로 맸다. 꼭 상복을 입은 것처럼만 보여서.
오늘이 내 장례식인가? 차유진은 나직이 조소한다. 래빈의 얼굴 위로 창백한 달빛이 쏟아졌다. 오늘따라 달빛이 차갑다. 그래서인가. 너는 꼭 우는 것만 같다.
“미안해.”
“김래빈 맨날 사과해. 근데 왜 사과하는지는 말 안 해줘.”
“…….”
“사과하는 거 중요한 거 아니야. 사과한 다음에 똑같은 일로 사과할 일 안 만드는 게 중요한 거야.”
들숨. 그리고 날숨. 시린 달빛 너머 래빈의 눈이 떨린다. 유진은 그냥 벽에 머리를 완전히 기댔다. 새까만 정장. 꼭 상복 같은 그것. 어쩌면 그냥 저승사자일지도 몰라. 저승사자들은 새까만 낫을 들고 치렁치렁한 검은 옷 입고 다니는 게 정석 아닌가? 하긴, 요즘 저승사자들도 편하게 살아야지. 어떤 시댄데. 하릴없는 생각이나 뭉게뭉게 떠오르다가 침몰한다. 유진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니까 지난번에 못 물은 거 지금 물을래.”
래빈이 입을 빠끔거린다. 유진은 눈을 깜빡이다가 입을 연다. 또렷한 목소리. 서툰 한국말임에도 오해할 리가 없는.
“김래빈, 왜 나한테 미안해?”
질문은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기어코 발화해 몸에 불을 붙인다. 한 번 뱉은 말은 도로 주워 삼킬 수 없다. 래빈의 얼굴이 굳는다. 시선이 떨어진다. 고개를 떨군다. 꾹 쥔 주먹으로 아무 말도 내뱉지 않는 래빈이 있었다.
유진은 재촉하지 않는다. 여느 때와 같이. 재촉하는 것이 언제나 능사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야말로 래빈은 끝끝내 말이 없다. 입술을 잔뜩 사리 문 채 바닥만 노려보다 고개를 들었다. 어느샌가 까맣게 굳어버린 얼굴로 가만히 유진을 응시했다.
“차유진. 미안해. 약속 못 지킬 것 같아.”
“뭐가?”
“듀엣.”
“안 부를 거야?”
“부를 거야.”
입을 달싹이던 래빈은 조금 후에 덧붙였다.
“……아주 나중에.”
유진은 래빈을 그저 바라만 봤다. 손을 엮어 잡고 꿋꿋하게 시선을 맞춘 래빈. 그의 뒤로 쏟아지는 은빛은 꼭 바다에서 깨지는 윤슬을 닮았다. 들이켜고 내쉬는 숨 하나하나가 전부 떨리고 있음을 왜 너는 모를까. 그러나 유진은 다가가지 않고. 다감하게 어깨를 감싸며 괜찮을 거라고 속삭이지 않고. 그저 가만히 벽에 기대어 래빈의 말에 귀 기울일 뿐이라서.
“진작 말했어야 했어. 내 이기심 때문에 네가 다쳤어. 말뿐인 이야기는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을 내가 잠깐 잊고 있었나 봐.”
유진은 찬찬히 경청한다. 뜻 모를 이야기다. 래빈의 얼굴이 흐리게 반짝였다. 눈에서 달이 비쳤다. 그러다가 사라졌다.
“내가 널 돕게 해줘, 차유진. 나 혼자로는 안 돼. 너 혼자여도 안 돼. 너도 알잖아. 너는 돌아가야 하지만, 오늘은 너 혼자서 그 목표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어.”
“…….”
“네가 날 도우라고 하진 않아. 내가 이 말을 꺼낸 이유는 네게 도움을 받고 싶다거나, 도와달라고 요청하고자 함이 아니야.”
래빈이 성큼 다가왔다. 눈이 맞는다. 어지러운 머리, 뜨거운 열감을 가르며 찬기가 훅 끼쳤다. 동시에 코끝을 간질이는 매캐한 탄내. 우노의 집에서도 진동했던 이것은 틀림없는 화약 냄새.
“이건 네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나를 이용하란 뜻이야.”
래빈이 발음한다. 어디선가 아득한 총소리가 울린다. 유진은 반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다 터진 입술은 여린 살이 드러났다. 유진은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손을 들어 제 입을 가렸다. 이용하라고. 래빈. 라보 데 누베의 해적.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어디선가 분주한 발소리가 들렸다. 일정하지 못한 구둣발 소리다. 진득하게 눈을 맞추던 래빈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젖혔다. 유진의 시선도 함께 따라갔다. 이어지는 거친 외침. [쥐새끼를 찾아!] 쩌렁쩌렁 외치는 목소리에 뒤따르는 대답은 한둘이 아니다. 그렇잖아도 창백하던 래빈의 얼굴이 더욱 희게 질리고.
유진은 그들이 자신을 찾고 있음을 알았다.
숨을 들이켠다. 다시 내쉰다. 할 수 있는 것. 할 수 없는 것. 불가항력의 일. 해야만 하는 일. 아득해졌던 머릿속이 차츰 굴러가기 시작한다. 태엽을 얽고 구르기 시작한다. 유진은 차분히 숨을 골랐다.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페로 로꼬. 라보 데 누베. 언젠가 라보 데 누베는 자신을.
유진이 래빈을 바라봤다. 시선이 얽혔다. 그리고 웃었다.

도망자를 색출하려 바닷가 마을이 뒤집히고 꼬박 이틀이 지났다. 그날 누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해변에 밀려온 시체는 없었다. 광장을 헤집고 다니던 꼬마애도 자취를 감추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냥 여상 같은 삶을 이어나갔다. 슬픔에 젖지 않는다. 두려움에 몸서리치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냥 살았다.
마을을 배에서 보는 건 나름 색다른 경험이다. 유진은 갑판 위에 기대어 가만히 마을을 바라봤다. 깎아지른 해안절벽. 그 위에 아슬아슬 얹힌 마을. 이틀 전 발포한 포탄으로 인해 절벽 한군데가 완전히 무너져 물안개 낀 아침이면 다소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긴다. 유진이 가볍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빌보드가 아니라 갑판에 오른 라보 데 누베의 노래다.
“[이그나시오! 페로 로꼬가 찾는다.]”
자신을 호명하는 목소리다. 유진은 슬쩍 등을 돌려 뒤를 곁눈질했다. 바닷바람이 싱거웠다. 흐릿한 마을에 눈길을 던졌다가 유진은 느적느적 걷기 시작했다. 선장의 방은 가장 깊숙한 곳에 있다. 계단을 밟아 내려가고 한참을 뱅뱅 돌았다. 유진이 지나치는 복도마다 시선이 눅진하게 따라붙었다. 빈말로도 긍정적이라 말하지 못할 관심들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숨죽여 숙덕거렸다. 어째서 죄인이 밧줄 하나 없이 우리 배를 걸어 다니지? 어째서 그는 감옥 밖에 있지? 유진은 일일이 대답하지 않는다. 때때론 냉정한 무시야말로 모든 질문의 답이 될 수 있어서.
굳게 닫힌 문 앞에 섰다. 고요하다. 마른 나무 냄새와 지독한 탄내가 났다. 작은 문을 지키고 선 여자는 유진을 힐끔 바라봤으나 입을 꾹 다물었다. 현명한 판단이다. 문지기가 함부로 입 놀렸다간 다음 날 물고기 밥 되기에 십상이니까. 유진은 입을 열었다. 조금쯤 냉소적인 말투가 튀어나왔다.
“[나예요.]”
문은 말없이 열렸다. 문틈으로 유진은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소리가 옅다. 사위를 가득 메운 탓에 되레 터무니없이 작게 느껴졌다. 래빈은 부러 눈을 뜨지 않은 채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나무로 만든 침대 틀, 푹신한 매트리스 위에 얹힌 채로. 벽을 향해 등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눈을 떠도 어차피 잘 짜인 나무 문양만 보일 거였다. 그래도 래빈은 눈을 뜨지 않는다. 감각에 할애할 수 있는 신경은 정해져 있다. 청각에 오롯한 힘을 쏟으려면 나머지 네 감각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래빈은 아주 어렸을 적부터 배웠다.
파도 소리가 아니다. 밀려들었다가 녹아 사라지는 이것. 오히려 고요하다. 눈을 감아야 비로소 출렁이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이불을 쥔 래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울리지도 않게 부드럽다. 고급스러운 이부자리에 손바닥을 천천히 문지르다가 깊이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내쉰다. 그제야 눈을 떴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다가 눈꺼풀이 들린다. 시야를 가득 메운 건 여느 때와 다름없는 광경. 여상 같은 날이다.
래빈은 가볍게 눈을 깜빡인다. 몸에 힘을 주고 허리를 곧추세우며 발을 땅에 디디는 모든 행동은 권태롭게까지 느껴졌다. 손과 발끝에까지 힘을 주고 확실하게. 셔츠 단추를 일일이 채우고 넥타이를 꽉 맨다. 몸에 맞춘 정장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맣다. 너는 무채색이 어울리는구나. 다정하게 속삭이던 말이 있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그는 이렇게까지 주름이 지지 않았다. 래빈은 그가 자신을 보며 짓던 부드러운 미소를 좋아했다. 어리석게도.
살짝 열린 창문 너머에서 짜고 습한 바람이 날아들었다. 바닷새들이 낮게 활공하며 끼룩끼룩 우짖었다. 겉옷을 걸치려던 래빈이 잠시 멈칫한 것도 그때다. 한참 머뭇거리던 래빈은 이내 발을 돌려 창문으로 향한다. 고개를 내밀진 않는다. 햇빛에 잘 말린 옷이 아침부터 젖는 건 사양이기 때문이다. 대신 래빈은 호흡했다. 두 뺨 가득 숨을 부풀려 넣었다. 그리고 느리게 뱉었다.
짙푸른 바다. 말간 햇볕이 수면으로 떨어져 부서진다. 어찌나 깊고 넓은지 깨진 빛은 반짝이지도 못한 채 침몰한다. 그 위를 바닷새들이 몇 번이나 스치고 지나쳤다. 눅눅한 물비린내가 난다. 지독한 기름 냄새도 뒤섞였다. 아마 배의 연료일 것이다. 습하고 거센 바람이 불어닥쳤다. 눈이 저절로 파르르 떨린다. 눈꺼풀을 연신 깜빡이다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짭짤한 소금기가 눈을 바싹 마르게 한다. 축축해진 눈가를 가볍게 찍어 닦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른 아침이건만 물안개 하나 끼지 않았다. 희끄무레한 구름만 유유자적 흘렀다. 주사위를 탁자 위에 던지듯 구름 알갱이를 흩뿌린 것만 같은 모양새다. 래빈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목이 아팠다. 눈이 부시지는 않다. 쨍한 햇빛이 눈에 닿기도 전 굴곡진 그림자가 래빈의 얼굴을 덮은 탓이다. 래빈의 눈이 깜빡일 때마다 흐트러졌던 구름은 점차 뭉치다가 어느샌가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완연한 가을이다. 하늘은 높고 푸르다. 래빈은 어렸을 적 할머님이 중얼거리셨던 사자성어를 가만히 떠올렸다. 천고마비. 하늘이 높고 말이 살이 찌는 계절. 하지만 사위가 물이니 말이 살 수 있을 리가 없다. 래빈은 잠시 고민하다가 가볍게 날숨만 뱉었다. 말이 아니다. 가을은 비로소 무르익은 과실의 계절이다. 라보 데 누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일 년 내내 관심을 쏟았던 일들 대부분이 가을을 맞이하면 결과를 뱉어낸다. 딱 알맞게 여문 결실들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계절. 래빈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정정한다. 하늘이 높고 해적이 살을 찌우는 계절이다.
어디선가 쨍한 종이 두 번 울렸다. 가만히 물결에 휩쓸려 떠다니던 바닷새들이 우르르 날아올랐다. 래빈은 깃털을 흩뿌리며 날아오르는 새들을 가만히 바라보다 등을 돌렸다. 가야 할 시간이다. 방을 나서기 직전 벽면에 걸린 거울을 들여다봤다. 단정하게 묶은 넥타이. 그 위에 걸친 새까만 재킷. 가볍게 묶은 꽁지머리. 퀭한 눈. 사나운 인상이 산발적으로 눈에 들어오고.
김래빈. 열아홉. 아무도 모르는 이유로 페루에 도착한 여섯 살 때부터 해적 두목의 양아들 노릇을 한 지 벌써 십삼 년.
래빈은 차근차근 계절이 바뀌었음을 인정했다.

*

“[잘 잤어?]”
래빈은 낯선 타국의 언어에 고개를 들었다. 제 앞에 식판을 내려놓은 남자는 숟가락을 꽉 움킨 채 래빈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진심으로 안부를 묻기보단 뭔가 뜯어 살피는 듯하다. 래빈은 눈을 깜빡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페루에서 십삼 년이나 살았는데 아직도 스페인어가 서툴렀다. 그 탓에 대답은 항상 한 박자 늦게 나오곤 했다.
“[네. 잘 잤습니다.]”
“[다행이네. 난 아닌 밤중에 갑판 들쑤시고 다니던 쥐새끼 잡느라 온몸이 쑤실 지경이야.]”
남자, 마떼오는 마침내 숟가락으로 식사를 퍽퍽 퍼먹기 시작했다. 숟가락질이 어찌나 거친지 주위까지 수프가 튀었다. 래빈은 그를 지적하는 대신 입을 지그시 다물었다. 마떼오가 거칠게 중얼거린 말이 무슨 뜻인진 거의 이해했다. 말대로라면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을 거였다. 라보 데 누베의 일등항해사나 다름없는 마떼오의 심기를 거스르는 건 누구라도 사양하고 싶은 일이다. 두목의 총애를 받는 래빈이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애초에 래빈은 저보다 나이 많은 사람을 지적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래빈은 그냥 시선을 떨어트렸다. 멀건 수프 안에는 생선과 온갖 해물이 둥둥 떠다녔다. 요리사가 급히 처리해야 할 해산물이 이었대도 믿을 만한 모습이다. 맛은 그렇게 훌륭하진 않았으나 못 먹을 정도도 아니다. 래빈이 수프를 멍하니 휘적거리다가 입에 밀어 넣었다. 일단 뭐든 먹고 생각해야 하는 법이니까. 아침나절부터 시끄러운 식당 속에서 래빈은 묵묵히 숟가락질을 반복했다.
그때 그릇을 깨끗이 비운 마떼오가 숟가락 꼬나쥔 주먹을 식탁에 내리쳤다. 소음이 진동하며 식탁이 흔들린다. 소란스럽던 주위가 순간 차게 가라앉았다. 가볍게 달떴던 분위기에 찬물을 쏟아부은 마떼오가 으르렁거렸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동자가 희번득하게 뒤집혔다.
“[육지에서 데려온 쥐새끼가 글쎄 온 배를 헤집고 다녔어. 내가 직접 그놈을 선창 쇠창살 너머로 던져넣고서야 조용해졌지.]”
래빈은 마른침을 삼켰다. 마떼오의 시선은 래빈에게 닿지 않는다. 대신 래빈을 제외한 모두에게 사정없이 꽂혔다. 목소리를 잔뜩 내리깔고 음울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어울리지도 않게 식당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래서 묻겠다. 어젯밤 죄수 담당이 누구지?]”
침묵은 찰나였다. 누군가가 삐걱삐걱 몸을 일으켰다. 얼굴이 시허옇게 질린 안경 쓴 남자였다. 이름은 들어본 적 없다. 안경은 거의 백지처럼 하얘진 얼굴로 또박또박 말했다. [접니다.] 그러자 마떼오의 눈썹이 비쭉 솟았다.
“[무얼 하느라 죄수를 제대로 감시하지 않았지?]”
“[선장님께서 긴히 이르실 말씀이 있다고 하시어 자리를 비웠습니다. 그 직후 탈출한 것으로 보입니다.]”
“[탈출이냐? 탈출이 맞아?]”
매서운 질문에 안경은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마떼오는 입을 열다 말고 래빈을 힐끔 눈짓했다. 래빈은 마떼오와 눈이 마주친 순간 눈을 깜빡였다. 뜻 모를 시선이다. 래빈이 먼저 시선을 피했다. 고개를 떨궈 묽은 수프만 바라봤다. 마치막 한 방울까지 싹싹 비우고 몸을 일으켰다. 조급한 태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그러는 와중 마떼오는 숨죽인 목소리로 스산하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건 탈출이 아니지. 오히려, 그래. 단순한 외출이야. 그 쥐새끼 같은 놈이 내게 덜미를 잡히는 순간 뭐라고 했는지 알아?]”
“[모릅니다.]”
“[달이 참 예쁜 밤이라고 했어! 그게 어디 탈출하다 걸린 놈 입에서 나올 말인가?]”
래빈은 그 말을 끝으로 발을 돌렸다. 가야 할 곳이 생겼다. 마떼오는 래빈을 잡지 않는다. 그 누구도 식당을 걸어 나가는 래빈을 부르지 않았다. 일정한 구둣발 소리가 울린다. 제 뒤로 식당 문이 닫히자마자 래빈의 걸음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닫힌 문 뒤로 미처 숨기지 못한 고성이 날아든다. 고함에서 도망치듯 래빈의 걸음이 가빠졌다. 지하로 향하는 마지막 대문을 열어젖힐 때쯤엔 거의 뛰고 있었다.
이 바보가! 짓씹은 입술이 파리하다. 마떼오가 말한 그 쥐새끼의 정체는 이 배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다. 오히려 그래서 더 경악스러웠다. 래빈은 바로 엊그저께 그를 붙잡고 신신당부했던 것이다! 가만히 있어야 해. 눈 밖에 나는 행동을 해선 안 돼. 내가 어떻게 수습할 수 없는 일들을 저질렀다간 진짜 물고기 밥이 될 거야. 알겠어? 너 그때 알겠다고 고개 끄덕였으면서! 래빈은 얼굴에 경악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를 쓰며 모퉁이를 돈다. 그 노력이 오히려 얼굴을 더 사납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죽어도 모른 체.
선창 지하에는 딱 두 갈래 길이 있었다. 한쪽은 선장의 방이고 다른 쪽은 감옥이다. 그 두 갈래 길은 조명마저 달랐다. 선장의 방으로 향하는 곳은 언제나 새것으로 갈아놓은 덕분에 훤하고 반대쪽은 촛불마저 없다. 래빈은 망설임 없이 껌껌한 복도를 가로질렀다. 제 뒤를 뒤따르는 걸음이 없음을 확신하곤 굳게 닫힌 철문을 열었다. 문조차 잠겨 있지 않았다. 맙소사!
감옥에 들어서자마자 래빈이 목소리를 높였다.
“차유진!”
“왜?”
그리고 대답은 어깨 옆에서 들렸다.
흐아아악! 괴상한 소리와 함께 튀어 오른 래빈이 뒷걸음질 치다가 벽에 머리를 박았다. 욱신거리는 뒤통수를 부여잡고 끙끙 앓는 소리를 내니 익숙한 목소리가 웃음을 여과 없이 그대로 쏟아냈다. 호탕한 웃음이 음침하고 어두운 감옥을 쩌렁쩌렁 울린다. 김래빈 바보 같아! 깔깔거리며 내뱉은 유진의 말에 래빈이 또 훌쩍 뛰었다.
“너 왜 여기 있어! 마떼오가 너를 분명 가뒀다고…….”
“김래빈이 줬잖아. Master Key. 그걸로 열고 나왔어.”
어깨를 으쓱인 유진이 손가락을 들었다. 검지에 꿰어 들어간 열쇠가 짤랑짤랑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래빈은 어벙하게 아, 그랬지, 하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주기는 했지. 그랬지. 차유진이 이 배에 처음 오른 날 이거 마스터키야, 하고 넙죽 쥐여줬다. 그런데 이렇게 틈만 나면 쓸 줄은 또 몰랐지.
“내가 아니라 마떼오나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어쩌려고 여기까지 나와 있었어? 안 그래도 마떼오가 단단히 화가 났었는데.”
뒤통수를 문질거리며 래빈이 말했다. 유진은 대답 대신 흐음, 하고 뜻 모를 감탄사만 뱉었다. 래빈은 닫힌 문을 힐끔 바라봤다. 철문은 매우 두꺼워 안에서 소리가 빠져나가지 못한다. 그러나 반대로 바깥쪽 소리가 들리지도 않았다. 문 열리면 바로 보이는 이곳은 주로 간수의 휴식 공간으로 쓰였다. 래빈은 잠시 고민하다가 유진의 손을 덥석 잡아끌었다. 유진은 순순히 따랐다.
“어디 가?”
“안에. 누가 왔을 때 우리 둘이 같이 있는 모습을 들키면 곤란해지는 건 너야.”
“우우. 나 저 안에 싫어. 춥고 습하고.”
“감옥이니까 당연하지, 바보야. ……조금만 참아. 내가 선장님께 최대한 부탁드리고 있어.”
그러자 유진이 알겠어, 하고 짧게 대답했다. 이상하리만치 순순한 태도였다. 래빈은 그에 대해 잠깐 고민하다 말았다.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차유진도 사람이니 온종일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을 테니까.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감옥을 훤히 누볐다. 아주 낯설지 않은 방에 차유진을 밀어 넣고 살창을 살짝만 닫았다. 이거 힘주면 열려. 알지? 나 간다고 해도 오늘 하루만이라도 이렇게 있어. 창살 바로 건너편에 엉덩이 붙이고 앉은 유진은 대답 대신 괴상한 소리만 냈다. 응, 같기도 하고 으응, 같기도 했다. 대충 알겠거니 싶어서 래빈은 마찬가지로 창살 밖에 주저앉았다.
“너 맞지? 마떼오가 말한 사람.”
“마떼오가 뭐라고 했는데?”
“밤중에 쥐새끼가 갑판에 올랐다고. 자꾸 들쑤시고 다니는 바람에 한숨도 못 잤다면서……. 어제 간수 맡으셨던 분이 혼나고 계셔. 그보다 차유진, 마떼오한테 걸렸을 때 달이 아름다운 밤이라고 인사했다며. 내가 누누이 말했지만 마떼오에겐 그런 가벼운 농담은 통하지 않아! 적발되었을 때는 우선 일차적으로 도망치고 보는 게.”
“Okay. 김래빈 말 많아.”
“말 끊지 마! 넌 하나도 진지하게 안 듣고 있잖아!”
유진은 대답 대신 와하하 웃었다. 뭐가 웃겨! 캐묻자 김래빈 화내는 게 웃기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사람 화내는 게 뭐가 웃기냐니까 사람 화내는 건 안 웃기단다. 근데 김래빈 화내는 건 웃겨. 키득거리며 이어진 말에 그냥 말문이 막혔다. 여기 공기가 아주 탁해서 그런가? 아니면 뭐 잘못 먹었나? 진지하게 눈을 찡그리는데 차츰 웃음이 잦아든다. 그러다가 금세 잔잔해진 목소리가 다정히 말을 붙였다.
“나 잘 지냈냐고 물어봐. 그런 거 말고.”
“그런 거라니……. 나는 네 신변을 위해 제일 중요한 질문들이라고 판단했어.”
“괜찮아! 그러니까, 음. 여기 있을 때마다 김래빈 나한테 평범한 거 물어봐. 잠 잘 잤냐, 밥 맛있었냐, 그런 거. 난 그런 거 말해줄래.”
냉정하리만치 느껴질 정도로 단호하다. 래빈은 눈을 깜빡거리다가 어어, 어, 하고 대충 말끝을 흐렸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냐는 물음은 목구멍 속으로 꾸욱 삼킨다. 그러자 창살 너머 유진이 히히 웃었다. 밤눈이 어두운 래빈은 유진이 보이지 않았으나 상상은 갔다. 입꼬리를 샐쭉하니 올려서 송곳니를 드러낸 채로 웃었겠지. 히히. 눈이 접히면서 한쪽 눈 애교살이 두툼하게 접혔을 테고.
“안 어두워?”
다음 순간 래빈은 무심코 묻는다. 유진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익숙해지면 괜찮아,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우습게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고양잇과 맹수들이 밤눈이 얼마나 밝은가에 대한 고찰이다. 차유진이 좀 날카롭게 생기긴 했지. 그래도 어둠 속에서 눈이 빛나는 건 짐승이나 가능한 일인데. 래빈은 괜히 눈동자를 데굴 굴려본다. 역시. 어둠 속에 스민 유진은 목소리와 희끄무레한 인영뿐이다. 오히려 다행인가?
시답잖은 생각만 하는데 문득 유진이 말하는 것이다. 근데 그건 왜 물어? 말간 목소리다. 그래서 래빈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별건 아니고.
“네 표정이 안 보여서 좀 답답해. 어두워서 그런가 봐.”
“Hmm.”
“촛불이라도 가져올게. 잠깐만 기다려.”
래빈은 몸을 일으켰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으키려고 했다. 땅을 짚고 몸을 반쯤 일으켰을 무렵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거친 힘이 래빈의 손을 잡아당기지 않았더라면 일어섰을 것이다. 어, 하는 멍청한 탄성과 함께 래빈은 우당탕 넘어간다. 와중에 맞닿은 손이 이상하리만치 뜨거웠다.
“김래빈. 내 표정 보고 싶어?”
“……차유진! 사람을 말없이 당기는 건 위험한 일이야. 하물며 이렇게 어두운 데에선…….”
“나 못 봐서 답답해?”
약간의 숨소리가 섞인 목소리다. 래빈은 쏘아붙이려던 말을 꼴딱 삼켰다. 어둡다. 여전히 차유진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단단히 맞잡은 손의 열기가 타오르는 듯 손바닥을 잔뜩 적셔서.
“만져봐.”
거의 속삭이듯 유진이 말한다. 엉켰던 손이 느리게 올라가더니 툭. 닿는다. 말랑한 살결이다. 그게 차유진의 얼굴임을 깨닫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촛불 필요 없어. 담담히 중얼거리는 유진은 손을 움직였다. 엉겨 붙은 유진과 래빈의 손이 천천히 그의 얼굴을 더듬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유진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래빈의 단단한 손끝이 유진의 얼굴을 차츰 훑었다. 아직은 말랑한 볼. 살짝 올라가면 느껴지는 단단한 광대. 더 올라간다. 말캉한 애교살. 감은 눈. 기다란 속눈썹이 손가락을 간질이고. 부드러운 눈썹과 단단한 이마까지 닿는다. 그리곤 도로 쭉 내려오고. 우묵하게 깊은 아이홀. 높은 콧대. 미끄럼틀처럼 흘러 내려오면 닿는 인중. 그 아래에 맞붙은 입술.
버석하게 말라 갈라졌다. 부드럽다거나 축축하지 않았다. 물을 마시지 못해서 그런가. 입술을 지그시 누른다. 그러자 다물렸던 입술이 열린다. 그제야 뜨겁고 축축한 숨이 새어 나오고. 손에 닿았다가 흐느러지고. 그러다가 래빈은 깨닫는다. 어라. 이거 좀 위험하지 않나. 손가락이 깊은 곳으로 푹 꺼지는 듯한 느낌과 동시에 느껴지는 건 말랑하고 뜨거운…….
“아!”
날카로운 통증에 래빈이 반사적으로 손을 거둔다. 손가락 끝이 축축했다. 동시에 와하하 웃음이 터졌다. 차유진이다. 머리가 얼얼해서 생각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축축한 손가락만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차유진! 남의 손가락을 멋대로 깨물면 어떡해!”
창살 너머 유진은 그러거나 말거나 바닥을 치고 웃어댔다. 래빈은 목구멍까지 뜨거워진 기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번에야말로 래빈을 붙잡는 손길이 없다. 오히려 유진은 숨넘어가게 웃기 바쁘다. 그래서 래빈은 괜히 성을 냈다.
“너 진짜 이번에도 나와서 갑판 배회하면 책임 못 져, 바보야!”
그 말을 끝으로 래빈은 잰걸음으로 지하 감옥을 벗어난다. 촛불 하나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손끝에 남은 열감에 들이켠 숨은 한참이고 내쉬지 못한 채.

책임 못 진다고 했나요? 제가? 래빈은 힘없이 머리를 벽에 처박았다. 쿵, 하는 둔탁한 소음과 함께 알싸한 고통이 스멀스멀 맴돈다. 누군가 봤더라면 마침내 미친 거냐며 수군거렸을지 모르지만 다행스럽게도 여긴 래빈의 방안이었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안에는 래빈밖에 없었다. 그래서 래빈은, 허겁지겁 몸을 일으키며 있지도 않은 타인에게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대신, 그냥 눈을 질끈 감았다. 살짝 벌어진 잇새에선 앓는 소리를 닮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틀 전이었다. 차유진이 자꾸만 나돌아다니기에 그러지 말라고 단단히 엄포를 놓은 게 고작 이틀 전이었다. 차유진은 그동안 자신의 충고를 들은 체도 하지 않으며 창고를 들쑤시고 부엌에 들어갔다가 내쫓기곤 갑판에 올라서서 영화 찍다가 발각당했다. 눈만 데굴데굴 굴리는 유진을 앞에 앉혀두고 이유를 물으니 돌아온 대답도 가관이었다. 심심해서. 물론 차유진도 차유진 나름대로 생각이 있을 테니 정말로 온전히 놀기 위해선 아니었을 테다. 애가 좀 바보여도 그렇게까지 멍청하진 않았으니까.
그런데 나는 왜 이러고 있지? 래빈은 지친 숨을 꾸역꾸역 삼켜냈다. 차유진이 온 배를 들쑤시고 다니는 동안 김래빈은 무얼 했느냐면. 첫째. 차유진이 들쑤신 창고에 들러서 자재 정리를 도왔다. 둘째. 부엌에 들어갔다가 내쫓긴 차유진을 대신해서 사과하고 다녔고. 셋째. 갑판에 올라선 차유진의 등을 짝짝 갈기면서 내려왔다. 쉽게 말해서 뒤처리하고 다녔다는 뜻이다. 차유진은 아주 벌건 대낮에 대담히 탈옥하고 돌아다니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아무도 없는 밤에 활동하는 건 또 아니었다. 목격자는 언제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란 소리였다. 그리고 목격자들에게 아무리 애원해봐야 페로 로꼬의 귀에 닿지 않는 건 불가능하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차유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마스터키를 뺏어야 하나 서른두 번째로 심각하고 고심하던 래빈은 그냥 몸을 일으켰다. 차유진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렇잖아도 예민하게 벼려진 감각은 지속되는 스트레스에 파업을 일으키기 직전이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생각이 잘 돌아가질 않는다. 이런 때일수록 냉철하게 사고해야 하거늘 혼잡한 머릿속을 봐선 무리였다. 래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하나뿐인 서랍을 열었다. 두꺼운 종이 여럿과 펀치 기계, 잡다한 문구류가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종이 한 장을 집었다. 날이 잘 갈린 종이를 들어 길고 일정하게 자른다. 종이 잘리며 사각대는 소리가 귓가에서 사부작거렸다. 래빈은 일견 지루하게 보일 수 있는 이 과정을 좋아했다. 종이를 자르고 얇은 테이프로 이어붙이면 그건 악보가 된다. 흐린 빛에 이리저리 비춰보다가 펜으로 점을 찍기 시작했다. 나직한 흥얼거림이 배경처럼 깔리던 순간이었다.
“뭐 해, 김래빈?”
차유진이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자리에서 공중 부양하는 마법을 선보이는 김래빈을 두고 차유진의 관심은 종이에 완전히 쏠려 있었다. 놀란 가슴 부여잡는 래빈을 두고 차유진은 종이를 톡톡 두드렸다. 이거 그거야? 오르골. 래빈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팔뚝을 쓸어내렸다. 래빈이 다쳤을 때의 이야기였다. 제멋대로 육지에 들락날락한 일이 페로 로꼬의 귀에 들어가며 래빈은 아주 잠깐 일선에 나가게 됐었다. 평소라면 다치지 않았을 테지만 정신은 힘차게 흩뿌린 모래알처럼 마구잡이로 흐트러져 있었다. 자연히 집중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넋 놓고 있다가 칼에 베였었지. 지금은 아물어 흔적만 어렴풋이 남았지만.
래빈은 진하게 남은 흉터가 있을 곳을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마따나 오르골 악보였다. 문을 잠가놨는데 차유진이 어떻게 들어왔을까 하는 의문은 잠시 고개를 내밀다가 사라졌다. 그럼 그렇지. 차유진의 허리춤에 매달린 마스터키는 이름대로 거의 모든 것의 대답이 되어주었다. 그래서 래빈은 열 올리는 대신 고개를 돌려 하던 일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일정한 간격으로 찍히는 점들을 보며 유진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때도 꼭 밤이었는데. 육지에서 맞는 밤은 바다에서 맞는 밤보다 훨씬 건조했다. 점을 찍는 사인펜이 점점 느려졌다. 우리네 사이도 그러했다. 지금보다 훨씬 건조하고 거리가 멀었다. 그날 너는 내게 몇 번이고 기댔으나 고작 그뿐이었고. 래빈은 눈을 내리깐 채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날 너는 내 상처를 붕대로 감쌌으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고 가라는 말에 순순히 응한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이다. 우습게도 나는 네게 무언가가 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서.
“김래빈!”
다급한 차유진의 부름에 래빈이 퍼뜩 고개를 돌렸다. 반사적으로 돌린 시선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차유진이 잡혔다. 왜? 멍하니 되묻는데 그보다 먼저 손에 열기가 닿았다. 차유진이 냅다 손을 뻗어 그러쥔 것이다. 적당히 힘을 주는 손길에 래빈은 순순히 따랐다. 사인펜 쥐었던 손이 허공에서 흔들렸다. 당혹감에 눈을 깜빡이는데 유진이 입술을 비죽이며 고갯짓했다.
“펜 다 번졌어.”
“아.”
“김래빈 딴생각했어?”
시선을 떨궜다. 어렴풋한 빛에 일렁이는 종이엔 사인펜이 큼지막하게 번져 있었다. 새까만 점을 시작으로 스멀스멀 범위를 넓히는 잉크에 래빈은 입술을 감쳐 물었다. 손끝으로 잉크를 지그시 눌렀다. 축축한 액체가 시커먼 색으로 묻어났다. 김래빈? 의아한 물음에 래빈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괜찮아. 정말로 괜찮았다. 어차피 잉크가 좀 번진 수준으론 연주를 듣는 데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어차피 음을 좌지우지하는 건 종이에 뚫릴 구멍들이었다. 점은 오로지 구멍을 위한 이정표밖에 되지 않았다.
래빈은 힘주어 손을 빼냈다. 일견 매몰차게 느껴질 정도로 매서운 손길이었다. 허공에서 떠돌던 유진의 손은 맥없이 떨어졌다. 유진의 얼굴을 볼 엄두가 안 나서 고개는 못 들었다. 래빈은 종이에 번지는 잉크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그러니까 문제는 잉크에 번진 종이가 아니었다. 어쩌면 전부 잉크 잘못인지도 몰랐다. 길을 알려주는 것에 만족해야 하는데. 주제도 모르고 종이에 꾸물꾸물 번져가는 잉크 탓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엔 아무런 소득도 없이, 그저 새까맣게 넓어지기만 할 뿐 종이엔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하고. 어쩌면 그 사실 자체가.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김래빈? 왜 그래?”
김래빈은 알았다. 차유진이 얼마나 빛날 수 있는 사람인지. 이 좁은 방안에 쥐새끼처럼 숨어들 사람이 아님을. 침침한 달빛을 받으며 고작 종이에 잉크 번지는 것 정도를 걱정할 그릇이 아님을. 한낮의 태양 아래에서, 땀에 잔뜩 젖은 차유진이 들어 올리는 트로피는 또 얼마나 빛나는지를. 금색으로 번쩍이는 트로피에 반사된 차유진은 또 어떻게 웃는지를. 알았다. 전부 알았다.
그래서 래빈은 잠시나마 바랐는지도 모른다. 네가 고작 물살에 흔들리는 잔물결이기를. 복사뼈를 스치고 가는 포말에 불과하기를.
바보 같은 일이었다.
사인펜을 내려놨다. 뚜껑을 덮고 펀치 기계를 들었다. 묵직한 무게에 손목이 아렸으나 괘념치 않았다. 종이를 들고 점을 찍은 대로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은 아무런 말도 뱉지 않았다. 곁에서 차유진의 시선이 따끔따끔 닿았으나 꿋꿋하게 종이만 노려봤다. 마침내 차유진이 몸을 일으켰다. 구멍을 반쯤 뚫었을 때 유진은 태평한 걸음으로 가 침대에 앉았다. 매트리스 꺼지는 소리가 났다. 여전히 돌아보지 않았다.
마지막 구멍을 뚫었다. 펀치 기계를 내려놓고 아릿한 손목을 꾹꾹 주무를 때까지 유진은 말이 없었다. 래빈은 밭은 숨을 꾹 밀어 참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르골은 옷장 구석에 고이 모셔놨다. 아주 예전 우노가 선물한 오르골은 보물 이 호였다. 옷장 문을 열고 어두운 구석을 더듬거리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답지 않게 차분하고 담담한, 어쩐지 조금은 슬픈 것처럼 들리는 다정한 물음이었다.
“내가 오는 거 싫어?”
그럴 리가. 네가 오는 게 싫었다면 널 애초에 라보 데 누베에 데려오지도 않았겠지. 네가 오는 게 싫었더라면 너를 만나러 광장에 들락거리지도 않았을 테고. 만일 김래빈이 차유진을 싫어했더라면 차유진은 여전히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 있었을 것이다. 거기서 여전히 강아지 여섯 마리와 대가족과 함께 살았을 테고, 여전히 등 번호 십이 번을 달고 미식축구 경기에 임했을 거였다. 싫지 않아, 하고 래빈은 조용히 웅얼거렸다. 오히려 너무 좋아서 문제였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오르골을 찾아내 품에 안았다. 책상에 가져와 앉고는 입구를 열었다. 여러 번 손을 탄 입구는 나사가 헐렁해져 쉽게 열렸다. 태엽에 종이를 감는 손이 조금씩 떨렸다. 부품을 넣어 상자 안에 끼워 맞추는데 뒤에서 유진이 또 물었다. 그건 무슨 노래야? 래빈은 익숙하게 입구를 닫고 오르골을 들었다. 흔들리는 불에 이리저리 비추면 작은 금색 상자는 금세 빛을 산란하며 반짝이곤 했다.
“나도 몰라. 그냥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어.”
차유진이 말이 없었기 때문에 래빈은 그냥 손잡이를 돌렸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첫 음이 소리를 잔뜩 죽인 바다로 제 몸을 던지는 순간이다. 첫 번째,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여섯 번째 음표가 날아올라 하늘로 처박혔을 때 래빈은 손잡이를 쥔 채 그대로 굳었다. 손이 아프도록 주먹 쥔 채 눈을 질끈 감았다. 뒤에서 유진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어오는 소리가 어렴풋했다. 김래빈? 왜 안 해? 좋았는데. 래빈은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러나 혼란스럽던 생각을 정리하기에 고작 여섯 개 음이면 충분했다. 저도 모른 채 찍어낸 음표들이 마구잡이로 튀어나와 하늘을 받치고 바다에 뛰어들고 어느 순간 겨울이 되어 침몰하고.
미, 솔, 솔. 그리고 미, 솔, 미.
거칠게 악보를 쥐어뜯었다. 깔끔하게 찢어진 악보를 꾸깃꾸깃 구겨 쓰레기통에 던졌다. 숨이 찼다. 고개를 돌렸을 때 어느샌가 다가온 유진이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시선을 피했다. 아니야. 유진은 모를 것이다. 유진은 음악에 그다지 큰 조예가 없었으니까. 단음계라던지 장음계라던지, 그에 따른 알파벳이라던지. 하나도 모를 것이다. 래빈은 입술을 깨물고 머리를 짚었다. 유진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다만 쓰레기통을 차분히 바라볼 뿐이고.
“왜 그래?”
“잊어, 차유진. 아무것도 아니야.”
“악보 막 버리는 거 김래빈 답지 않아.”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래빈은 거친 걸음으로 다가가 유진 앞에 섰다. 흔들리는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고 짓씹듯이 끊어 말했다. 아니야. 유진은 여전히 평온한 얼굴이다. 눈썹을 조금 찌푸렸으나 그나마 얼마 가지 않았다. 스르르 풀리는 미간과 떨리지 않는 눈과 새까만 동공.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래빈은 꼭 울고 싶어졌다. 뭐가 아니야? 눈을 피했다. 래빈은 항상 그랬다.
“김래빈. 나 몇 번이나 말했지만, 말 안 하면 몰라.”
“그냥 전부 모르는 거로 해. 아무것도 아닌 거로 하자.”
“내가 뭘 잘못했어?”
“아니.”
“그럼 김래빈. 나한테 뭐 잘못했어?”
입을 다문다.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다.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차마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김래빈은 그냥.
“내가 뭘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는 거야?”
어쩌면 익숙할 질문에 래빈은 실소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김래빈.”
“차유진, 아무것도 안 바라니까. 나 진짜 아무것도 안 바라니까.”
“…….”
“그러니까 그냥 묻지 마.”
부탁이야.
한숨처럼 내쉰 말은 형체 없이 부서졌다.

바라는 게 있니?
지금보다도 더 어리던 시절 이야기다. 래빈에겐 꿈이 있었다. 원하는 것과 바라는 것이 있었다. 여섯 살 때까지 래빈은 온화한 조부모님과 조금 짓궂지만 다정한 누나와 함께 자랐다. 그들은 래빈에게 곧잘 묻곤 했다. 래빈이는 어떻니? 그러면 어리던 래빈은 영 가누기도 힘든 몸으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좋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죄송합니다. 이것보단 저게 나을 것 같습니다. 할머니는 어느 날엔가 래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하셨다. 우리 토깽이는 참, 주관이 아주 뚜렷하이 좋아.
말만 하렴. 뭐든 주마. 온화한 목소리. 다감한 물음이다. 그러나 래빈은 대답하지 않는다. 고개를 저으며 괜찮습니다, 한다. 지금으로 만족합니다. 이거면 됩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누군가와 약속한 것처럼 그 짧은 몇 마디를 되풀이한다. 그러면 상대는 그렇구나, 알겠단다, 생기거든 말해 다오, 하는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래빈은 그날은 영영 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래빈은 자신이 언제부터 원하는 것을 입 밖에 내지 않게 되었는지 알았다.
“[아가?]”
돌연 들리는 목소리에 래빈은 화들짝 놀라 허리를 곧추세웠다. 상냥한 어투였으나 래빈은 곧장 고개를 들고 죄송합니다, 외쳤다. 상대는 느긋하게 손을 저으며 대답한다. 아니란다, 아가. 그런데 무슨 일 있니?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스페인어다. 래빈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하려다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스페인어로 말을 거셨다면 스페인어로 대답해야 한다. 몇 없는 규칙이었다.
“[괜찮습니다. 잠시 생각에 빠졌습니다.]”
“[피곤한 거니? 잠을 못 잤어?]”
“[아닙니다. ……정말 아닙니다.]”
그러자 상대는 잠시 말이 없다. 매캐하게 타오른 연초를 책상에 탁탁 두드릴 뿐이다. 부슬부슬한 재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봉긋하게 쌓인 잿더미에 시선을 고정하는데 선장, 페로 로꼬가 온화하게 웃었다.
“[내가 너를 많이 아낀다는 사실을 알고 있겠지.]”
“[예. 항상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래빈은 말과 함께 허리를 가볍게 숙여 보였다. 그러자 페로 로꼬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린다. 이해할 수 없는 스페인어가 페로 로꼬의 잇새로 빠르게 새어 나온다. 래빈은 반응하는 대신 마른침을 꾹 삼키며 자세를 바로 했다. 등 뒤로 맞잡은 손이 축축했다.
“[한데 이번 요구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구나.]”
그리고 벌어진 입에선 나온 말에 래빈은 깊이 심호흡했다.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다. 그러므로 래빈은 당황하지 않는다. 단지 박동하는 심장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호흡을 진정시킬 뿐이다.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안다. 몇 번이고 상상하며 뱉을 말과 삼킬 말을 정해놨다. 맞잡은 손이 차갑다. 땀이 배어 나와 축축하다. 그렇지만 래빈은 눈에 힘을 줬다. 의자에 기대어 앉은 페로 로꼬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그 아이가 죄인임을 너도 알고 있겠지, 아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나더러 그 아이를 우리의 일원으로 들이라 부탁했을꼬.]”
잘 짜인 함정 같은 질문이다. 래빈은 마른침을 삼키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것은 흡사 미로다. 한 걸음 잘못 내디디면 푹 꺼져 목숨 잃게 될지도 모르는. 그러나 결국 건너가야만 하는 길. 래빈은 페로 로꼬의 회빛깔 눈과 시선을 맞추며 침착하게 입을 연다. 차유진의 웃음을 상상하면서.
“[이그나시오의 능력은 전반적으로 몹시 우수합니다. 게다가 가족과 멀리 떨어져 있는 동시에 가족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는 점은 라보 데 누베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큰 약점입니다. 운동선수 출신이니 몸으로 하는 일엔 금방 적응할 겁니다.]”
페로 로꼬는 한참 말이 없었다. 입을 지그시 다문 채 곰방대만 책상에 툭툭 두드렸다. 일정한 리듬이 래빈의 귓가를 파고들어 고막을 울린다. 래빈은 입술을 연신 짓씹다가 떨리는 숨을 골랐다. 맞지 않았던 페로 로꼬의 눈동자가 소리 없이 올라가 래빈을 직시한 것은 그때다. 눈이 마주쳤다. 차게 가라앉은 눈은 노파가 아닌 해적 선장 페로 로꼬의 눈이다.
“[전부 핑계처럼 들리는구나. 내 착각이니?]”
래빈은 이 단조로운 물음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아주 잘 안다. 몇 번이고 떠올렸다. 페로 로꼬는 철저한 인물이다. 냉혈한이며 손속 없이 잔인한 사람. 그러나 동시에 래빈에겐 묘한 온화함을 보인다. 그건 사랑이라기보단 일그러진 미련을 닮았다. 페로 로꼬는 인정하지 않을 테지만 그에게 약점을 하나 꼽으라면 래빈의 존재였다. 래빈 그 자신이 아니다. 래빈의 존재. 래빈의 위치. 래빈이 죽는대도 페로 로꼬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테지만 래빈의 존재가, 그의 위치가 사라진다면 페로 로꼬는 힘겨워할 것이다. 고심 끝에 도출해낸 결론이었다.
그렇기에 래빈은 떨리는 몸에 힘을 준다. 천천히 입을 연다. 자신이 저지른 실수는 자신이 수습해야 한다. 그것에 누군가의 목숨이 달렸다면 더더욱. 래빈은 지난 두 번의 실패 끝에 자신이 직접 움직여야 함을 깨달았다. 그러니 피하지 않는다. 물러나지 않는다. 래빈에겐 목표가 있었다. 설령 그것이 그 자신을 죽이게 된다고 하더라도 래빈은.
“[핑계입니다.]”
순순히 시인하자 페로 로꼬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그 한마디를 뱉고 입을 꾹 다물자 의자에 늘어졌던 페로 로꼬가 느리게 허리를 펴 상체를 기울였다. 밝은 전등에 음울한 하늘을 닮은 눈이 번뜩였다. 피식자를 눈앞에 둔 포식자의 눈이다. 래빈은 그 눈을 가만히 직시했다. 페로 로꼬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다. 어디 더 지껄여보라는 허락이다. 그제야 래빈은 입을 열었다.
“[핑계가 맞습니다. 저는 단지…….]”
들숨. 날숨과 함께 말을 뱉는다. 떨리지 않아 다행이다. 래빈은 송곳 같은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당신께서 제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바라는 게 있냐고.]”
“[오호.]”
“[저는 이그나시오가 제 산하에 들어와 일을 배우길 바랍니다.]”
페로 로꼬는 잠시 말이 없다. 눈썹을 슬쩍 올리곤 얼굴을 느리게 기울였다. 날카로운 시선이 래빈을 꿰뚫는다. 의중을 캐묻는 듯한 시선이다. 하지만 래빈은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눈치 없기로 소문 난 래빈이라고 한들 페로 로꼬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고 있음은 어렵잖게 예상할 수 있다. 그러니 더더욱 입을 열지 않았다. 래빈은 지켜야 했다. 이그나시오라고 불리는 차유진을. 그에게 돌려주어야만 한다. 유진 차라는 이름.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서의 꿈. 먼 곳에서 그를 찾고 있을 가족 같은 것들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래빈은 감히 포기할 수 없다. 피할 수도 없다. 도망쳐서는 안 된다. 숨을 내쉬고 뱉을 때마다 솜털이 삐죽삐죽 서는 기분이다. 억겁 같은 침묵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얼마나 시간이 지난 지 모르겠는 무렵. 대답 대신 문이 울렸다. 누군가 문을 두드린 것이다. 뒤따르는 목소리에 래빈은 순간 페로 로꼬를 잊고 고개를 휙 돌렸다.
“[나예요.]”
차유진이다. 어두운 창살 너머에 도사리고 있어야 할. 시선이 절로 페로 로꼬에게 향했다. 페로 로꼬는 눈을 접어 웃더니 입을 열었다. 능숙한 스페인어가 튀어나왔다.
“[들어오렴.]”
문이 열리고 유진이 들어섰다. 래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눈썹이 슬쩍 올라가지만 다행스럽게도 아는 체는 하지 않았다. 유진은 익숙하게 페로 로꼬 앞에 섰다. 나란히 한 어깨가 가볍게 부딪힌다. 자연스럽게 뒷짐 지고 선 유진은 페로 로꼬와 눈을 맞췄다. 래빈은 알아듣기 힘든 빠르기의 스페인어로 대화가 몇 번 오갔다.
그리고 마침내 페로 로꼬가 래빈을 본다. 이를 악다문 덕분에 턱이 얼얼할 지경이 되어서야. 어딘가 나른한 표정으로 몸에 힘을 푼 페로 로꼬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축축하고 찬 손 위로 뜨거운 열기가 덮인다. 돌아보지 않으려 목에 힘을 줬다. 차유진의 손이다. 뒷짐 지고 선 유진이 손을 맞잡아왔다.
“[이그나시오는 과연 쓸 만한 인물이지. 내가 그걸 모르는 건 아니란다.]”
“[예.]”
“[그리고 나는 한번 뱉은 말은 지키는 사람이야. 말이 가벼워서야 라보 데 누베의 선장으로서 체면도 못 지키지. 암. 입이 가벼운 사람은 중책을 맡을 수 없어. 맡아선 안 돼.]”
두근. 두근. 심장이 뛴다. 래빈은 페로 로꼬의 말에 귀 기울이려 애쓰면서도 천천히 손을 폈다. 처음엔 손가락이다. 손가락 두 개가 가볍게 맞물린다. 구부려지고 얽힌다. 그러더니 손가락이 천천히 올라갔다. 깍지를 끼고 얽히더니 더 나아간다. 손목과 맥을 짚고선 멈춘다. 맥 위에 얹힌 유진의 손가락이 뜨겁다. 심장이 이어진다. 함께 같은 박자로 박동한다. 래빈은 힘주어 유진의 손을 잡았다. 머리가 아찔한 열기. 벌써 가을이건만 여름은 여즉 래빈의 곁에 눌어붙었다.
“[그리고 나는 몹시 반갑구나. 네가 무언가를 바란다고 말해준 것이.]”
페로 로꼬가 웃는다. 심장이 뛴다. 저도 모르게 호흡을 삼켰다. 온화한 웃음이 번졌다. 속이 울렁거렸다. 뱃멀미 때문은 아니다.
“[얼마든지 좋단다, 아가. 라보 데 누베의 일원으로서 이그나시오를 교육하도록.]”
지옥의 아가리가 열렸다. 다다른 곳엔 나락이 아닌 바다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래빈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광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래빈은 가벼운 숨을 들이켠다. 항상 눈치 없다는 소리를 들어먹었으나 그 말이 누군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을 알아채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래빈이 나쁜 건 인간관계에서의 감정 파악이지 상황을 가늠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비로소 래빈은 가벼이 숨을 골랐다. 육지에 발을 디디고 꼬부랑 길을 거쳐 광장에 닿았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때부터 래빈은 거리를 두고 자신을 따라 걷는 발소리를 알고 있었다.
품 넓은 후드티 속에 손을 밀어 넣는다. 짧고 작은 리볼버 한 정이 잡혔다. 장전한 지 오래되어 총알이 몇 개나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텅 비진 않았을 테니까. 최악의 경우엔 위협용으로라도 써야지. 래빈은 또다시 제 뒤에 따라붙는 발소리를 가만히 들으며 발을 옮겼다.
광장을 벗어난다. 애초에 육지에 오른 이유는 유진이 해산물이 아닌 빵이 먹고 싶다고 칭얼거린 탓이다. 밥투정 부릴 바에는 그냥 바다에 빠져서 물고기 밥이나 되어버리라는 신념을 가진 요리사였다. 갓 구운 빵을 받아내기란 바다에 버린 상자가 젖지 않은 채 배로 돌아올 확률보다 희박하다. 이런저런 핑계를 쥐어 짜내서 기껏 육지에 왔는데. 여기서 자신이 납치라도 당했다간 유진이 당할 취급은, 음. 상상하지 말자. 래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점점 발을 빨리했다. 애초에 페로 로꼬는 래빈이 육지로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모퉁이를 꺾어 돈다. 계단을 성큼성큼 올랐다. 비탈진 길을 온전히 누비다가 또 그림자 속으로 냉큼 숨어들었다. 상대는 지치지도 않는지 끈질기다. 민간인들이 보는 틈에서 총을 꺼내고 싶진 않았다. 상대의 발걸음이 조금도 느려지지 않자 래빈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어쩌면 좋지. 복잡한 머리가 팽팽 돈다. 그러며 발은 착실히 나아갔다. 위로, 위로, 위로. 육지에서 맡는 바닷바람은 묵은 물 냄새보단 짠 소금 냄새가 더 강했다.
그리고 마침내 래빈은 멈춰 선다. 복잡한 심경으로 걷다 보니 어느샌가 닿은 도착지가 눈에 퍽 익숙해서.
눈앞에선 경첩이 뜯어진 파란 대문이 있었다. 삐걱삐걱 앓는 소리를 내며 휑한 바람에 흔들린다. 그 너머엔 여전히 난장인 마당이 있다. 래빈은 입술을 살짝 짓씹었다가 손을 뻗었다. 뜯어지려던 대문을 잡아 세우고 깊이 숨을 들이켠다. 품에서 리볼버를 꺼내 총구를 바닥으로 하고 뒷걸음질 쳤다. 마당에 들어서면 천천히 들어 자세를 잡는다. 언젠가 우노가 알려주었던 방식이다.
“[저를 따라왔다는 것을 압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용건을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래빈은 덧붙였다.
“[저는 싸움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제야 상대가 반응했다. 유달리 짙다 싶던 곳에서 그림자가 일렁일렁 일그러져 나왔다. 모자를 푹 눌러 쓴 데다가 선글라스까지 껴 얼굴을 완전히 감춘 땅딸막한 남자였다. 멀끔한 옷을 입은 데에 반해 손과 발은 달달 떨며 가만히 놔두지를 못한다. 래빈은 침착하게 총구를 그에게 겨눴다. 상대는 익숙하다는 듯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떨리는 손발과는 어울리지 않게 태연한 투였다.
“[그렇다기엔 너무 무서운 걸 내게 겨눈다고 생각하지 않아?]”
“[온전히 저의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공격하지 않으신다면 저도 방아쇠를 당길 생각은 없습니다.]”
“[협박이 능숙하구나.]”
“[부탁드리겠습니다. 용건이 무엇입니까?]”
남자는 선글라스 낀 얼굴로 래빈을 지그시 바라봤다. 사실 래빈은 그가 자신을 보는지 제 뒤쪽에 자리한 집을 보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짙게 선팅한 선글라스 탓이다. 눈알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파악할 수가 없으니 괜히 심장이 뛰었다. 래빈은 여전히 기억한다. 제게 리볼버를 쥐여주며 잡는 법을 가르쳐주던 우노가 했던 말. 상대의 시선을 따라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
그러다가 남자가 입을 열었다. 덥수룩한 수염에 가린 입이 우물우물 말을 뱉어냈다.
“[잘하는구나, 스페인어.]”
“[예?]”
“[한마디도 못 하는 줄 알았지. 그 애는 항상 네가 스페인어에 서툴다고 했거든.]”
남자가 한 걸음 다가섰다. 오히려 물러난 건 래빈이다. 아랫입술을 질끈 짓씹은 래빈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총구 너머 조준점에 완벽히 남자의 이마가 잡힌다. 심장이 뛴다. 래빈은 사람을 상대로 총을 조준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우노의 덕택이다.
하지만 우노는 죽었다. 풍파를 가로막아주던 낡은 널빤지마저 사라졌다. 남은 것은 책임져야 할 실수뿐이다. 그래서 래빈은 망설이지 않는다. 망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다가오지 마십시오. 용건을 말해주세요. 그러지 않으면 쏘겠습니다.]”
“[이것 봐. 이래서 남이 해주는 말은 믿을 수가 없다니까. 나는 네가 무슨 꼬꼬마 어린앤 줄 알았단 말이야.]”
“[당신이 말하는 그 애라는 건 누굽니까?]”
남자가 일순 입을 닫았다. 덥수룩한 수염 너머로 입이 자취를 감춘다. 래빈과 남자 사이엔 대여섯 걸음이 남았다. 래빈은 침착하게 한 걸음 물러났다. 입술이 바짝 마른다. 총알이 비는 건 달갑지 않은 일이다. 결국엔 페로 로꼬의 귀에 들어갈 테니까. 래빈은 어느 상황에서 어떻게 자라왔든 간에 거짓말이 서툴렀다. 페로 로꼬가 상대라면 더더욱. 방아쇠에 걸친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굳은 몸으로 한 점 떨림도 없이 상대를 조준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노가 래빈에게 알려준 긴장이다. 그래서 래빈은 그렇게 했다.
“[있었지. 하나.]”
그때 남자가 말했다. 어딘가 담담하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네게는 무슨 이름을 가르쳐주었는지 모르겠다. 이름이랄 것이 많아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어. 이름이랍시고 알려준 것들조차 세상천지 흔해. 나는 그 애가 죽은 후로 광장에 내려가질 못하겠다. 언뜻 들리는 말들이 전부 그 애 이름뿐이라서.]”
래빈의 팔이 점점 떨어졌다. 아, 설마. 수그렸던 몸을 느리게 편다. 남자가 깊이 눌러썼던 모자를 벗었다.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가 말했다.
“[하지만 아마도 너는 나를 씽코라고 알겠지. 그 애는 네게 우노라는 이름을 가르쳐주었을 테고.]”
“[당신이…….]”
“[우노가 내 이야기는 많이 하든?]”
래빈은 리볼버를 완전히 내렸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선다. 그리곤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씽코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이런 만남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가만히 중얼거린 목소리가 난장판인 마당을 가볍게 훑는다. 래빈은 마른침을 삼켰다. 숨이 떨린다. 인제와 우노와 관련된 사람을 만날 줄 몰랐다. 하물며 그게 씽코일 줄은 더더욱.
“만나서 반갑다고 하면 믿을래?”
“한국말 아십니까?”
“네가 우노에게 스페인어 배웠다며. 나도 배웠어. 한국말.”
어눌한 발음으로 말을 붙인 씽코는 이내 머쓱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스페인어만큼 편하지 못하지만. 래빈은 그냥 고개를 끄덕인다. 저도 한국어만큼 편하지 않습니다, 스페인어. 씽코는 허허 웃으며 다가오더니 대충 합의 보자고 키득거렸다. 그러면 래빈은 또 알겠습니다, 하고.
“[여기 자주 왔니?]”
우노의 집. 래빈은 수분이 전부 말라 딱딱하게 굳은 땅에 신발 앞코만 비비적거리다가 한발 늦게 대답한다. 예. 가끔. 가끔 왔습니다. 그러자 씽코는 태평한 몸짓으로 주저앉으며 말했다. 나도 가끔 왔어. 우리 왜 못 만났을까? 할 말이 없으므로 래빈은 그냥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곁자리에 앉았다.
“[우노가 나한테 부탁했거든. 여기서 탈출하게 해달라고. 웬 꼬마 놈 둘을.]”
“……예.”
“[그래서 부러 넉넉하게 기간을 잡았지. 이런 건 철저하게 준비할수록 준비 기간이 늘어나는 법이니까. 그런데 어느 날 대뜸 날 부르더니 일주일 안으로 준비할 수 있냐고 묻는 거야.]”
래빈은 알지 못하는, 어쩌면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무릎을 세워 품에 끌어안은 래빈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곁에 앉은 씽코는 여전히 심드렁한 말투다. 어쩌면 이런 면에서 씽코와 우노는 닮았다. 지독한 염세주의자. 당장 십 초 후에 죽는대도 그렇구나, 하고 넘겨버릴 것만 같은 태연함. 우노는 정말로 그러했다. 도망은커녕 활짝 웃다가, 눈만 맞추고 인사하듯 입꼬리를 끌어올리다가 그냥 그렇게. 거기까지 생각한 래빈이 물을 털어내 듯 고개를 젓자 씽코가 말했다.
“[하지만 원인은 그게 아닐 테지. 결국 언젠가는 들켰을 거야. 촉발제가 될 수는 있어도 원인은 될 수 없는 느낌인 거야, 알겠니?]”
“조금은…….”
“[그러니까, 꼬마야. 내가 하려는 말은 참 별 게 아니고.]”
씽코가 가볍게 숨을 들이켠다. 내쉬는 숨이 희게 부서졌다. 래빈은 차분히 기다렸다. 씽코의 말이 이어지기를. 그가 말을 끝맺기를.
“[이그나시오가 어디 있는지 알지?]”
뜻밖의 이름이 나오지만 래빈은 놀라지 않는다. 그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어쩌면 기다려온 말인지도 몰랐다. 래빈이 시선을 틀어 곁에 앉은 씽코를 응시했다. 짙은 선글라스가 가린 얼굴. 표정을 읽을 수 없으나 어쩐지 정겨운 저 얼굴이.
“[이그나시오는 이 마을을 나갈 거야. 우노가 그렇게 결심했으니까. 그러기를 바랐으니까.]”
“네.”
“[그리고 우노가 바라는 것이 곧 메노르의 바람이었겠지.]”
“……네.”
말은 한참 이어지지 않는다. 마침내 씽코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을 때 래빈은 그의 뒷모습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수평선을 향해 가볍게 기지개를 켠 씽코는 여상 같은 목소리로 말한다. 이제 돌아가는 게 어떻겠니. 시간이 많이 지났어. 래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몸을 일으킨다. 훅 밀려드는 짠 내음에 머리가 어지러운 것도 같고.
“[이건 선물이란다. 이그나시오에게 전해줘.]”
“감사합니다.”
“잘 가. 다시 오지는 마.”
씽코가 안겨준 종이상자를 품에 안은 채 래빈은 계단을 걸어 내려간다. 문득 뒤돌아보았을 때 씽코는 깨진 현관문 안으로 발을 들이고 있었다.
다시 광장을 지나쳐 부두로 향할 무렵 래빈은 품에 안은 상자를 슬쩍 열어봤다. 빵이었다. 따끈한 것을 보아 갓 구운 게 틀림없었다. 그걸 가만히 내려다보던 래빈은 이내 종이를 꾸깃꾸깃 접어 후드 주머니 속에 구겨 넣었다. 주머니가 툭 튀어나오긴 했으나 손을 함께 꽂아 넣고 있으면 별말 하지 않을 것이다. 걸린대도 어차피 빵이니까 상관없을 테고. 래빈은 잰걸음으로 부두에 대어진 작은 배에 올랐다. 운전대에 기대어 있던 여자가 몸을 일으킨 것도 그때였다.
“[일찍 오셨군요.]”
이사벨라였다. 마떼오와 더불어 일등항해사이자 페로 로꼬의 앞잡이를 맡은 여자. 길게 늘어진 머리를 모아 묶은 이사벨라는 툭 튀어나온 래빈의 앞주머니를 보고 눈썹을 슬쩍 올렸다. 래빈은 부러 모르는 체 고개를 끄덕인다. 이사벨라는 페로 로꼬의 충직한 하인이었다. 페로 로꼬의 신임을 받는 래빈에게도 깍듯했으니 먼저 캐묻는 일은 없을 터였다.
예상대로 이사벨라는 구태여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래빈이 자리에 앉아 난간을 잡자 출발하겠습니다, 하고 배의 엔진을 당겼을 뿐이다. 요란한 소음과 함께 바다가 갈라진다. 하얗게 이는 포말을 흔적처럼 남기며 래빈과 이사벨라는 육지에서 점차 멀어진다. 돌아가는 것이다. 배로. 그네들은 육지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호흡하다 수장당할 운명이니까.
어느덧 육지가 자그마한 놀잇감으로 보일 지경이 되었을 무렵이다. 바다를 가르던 배가 멈춰 섰다. 넋을 놓고 육지만 바라보던 래빈이 고개를 돌렸다. 배는 아직 멀리 있었다. 최고 속도로 오 분은 더 가야 할 터였다. 천천히 속도를 줄여 멈춘 것을 보아 엔진이 고장 난 것도 아닐 텐데. 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래빈의 손이 초조하게 서로 얽매였다. 식은땀이 삐질삐질 흐른다. 그러면서도 래빈은 담담하게 물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이사벨라는 잠시 대답하지 않는다. 등을 돌린 채 가만히 서 있다가 마침내 시선을 마주했다. 새까만 눈동자가 래빈을 꿰뚫듯 지나갔다. 래빈을 뜯어 살피는 듯한 시선이다. 주머니 속 종이상자를 만지작거리던 래빈이 그 아래 깔린 리볼버를 쥔 것도 그때였다. 래빈의 삶은 지난하진 않았으나 안온하지도 않았다. 목숨의 위협이 될 만한 분위기를 잡아채는 것은 눈치라기보단 하나의 감각에 가까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래빈은 들었다. 예민한 청각은 요란한 바닷바람과 우짖는 바닷새 사이에서 안전장치 풀리는 소리를 잡아챘다.
이사벨라는 손을 등 뒤로 한 채로 래빈을 가만히 바라봤다. 저 손 뒤에 무엇이 있을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그건 이사벨라도 마찬가지일 테니 아예 확률이 없는 싸움은 아닐 테고. 그렇지만 애정 받는 일등항해사 이사벨라를 죽인 래빈이 무사히 생존할 수 있는가? 아니, 애초에 이사벨라는 왜 총을 장전했을까. 래빈의 머리가 팽팽 돌아간다. 원체 좋은 청각이 딸깍거리는 미세한 소리를 들은 것도 그때다.
“[고민 중입니다. 당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당신을 죽이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해는 마시고요.]”
“[죄송하지만 못 믿겠습니다.]”
“[믿지 마십시오. 그가 그리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해적들 말은 믿지 말라고. 그러며 자기 말도 의심하라고 덧붙였을 텐데요. 그런 사람이니까요, 그 지독한 염세주의자 씨는.]”
신랄한 말이다. 래빈은 반쯤 알아듣고 고개를 느리게 주억거렸다. 그러자 이사벨라가 눈을 데굴 굴린다. 정말이지 흥미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듯. 마침내 팔짱을 낀 이사벨라의 손에는 피스톨 하나가 쥐여 있었다.
“[이것도 당신이 조립한 거지요. 한 삼 년 전인가에.]”
“…….”
“[이번에 새로 물량이 들어옵니다. 페로 로꼬께서는 그걸 당신에게 일임하시려 합니다.]”
총기 조립은 래빈의 특기 중 하나였다. 야무진 손으로 그렇게 빨리 조립할 수 없다며 몇 번이고 칭찬받았다. 보통 라보 데 누베가 사용하는 밀반입 총기는 전부 분리되어 온다는 걸 생각한다면 조립이 가능한 래빈에게 맡기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테다. 그러나 래빈은 입을 빠끔거렸다. 제 손에 들어올 수많은 총기. 목표가 생긴 지금 그건 하나의 거대한 유혹이었다.
“[당신과 당신의 그……. 쓸데없이 활발한 친구 있잖습니까. 그 친구한테까지 권한이 내려갈 것 같아서.]”
이사벨라가 래빈을 가만히 응시했다. 새까만 눈이 묻고 있었다. 유혹에 넘어가 목숨을 내어줄 테냐?
래빈은 입술을 깨물고 천천히 도로 자리에 앉았다. 이사벨라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페로 로꼬께서는 자신감에 차 있으십니다. 라보 데 누베는 무너지지 않겠지요. 예, 저도 그리 믿습니다. 무너지지 않게 할 겁니다. 하지만 당신과 그 꼬마를 생각하면 또 상황이 달라집니다.]”
“[……페로 로꼬께서는 잔정 때문에 라보 데 누베가 무너지게 두실 분이 아니잖습니까.]”
“[그렇지요. 압니다. 하지만 사전에 방비하는 게 어디 나쁜 일입니까?]”
이사벨라가 입을 다문다. 래빈은 대답하는 대신 한숨을 씹어 삼켰다. 그건 권태롭거나 피곤한 사람이 내뱉은 숨이 아니다. 오히려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 어떻게든 내지르는 날숨에 가깝다. 래빈은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사벨라는 어느샌가 뒤를 돌았다. 멈췄던 엔진이 우렁찬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후회할 짓은 하지 마십시오.]”
이사벨라가 단호하게 말한다. 그래서 래빈도 입을 열었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건 조금의 거짓도 섞이지 않은 날것의 진심이다.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래빈은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이사벨라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래빈은 눈을 감았다. 가볍게 숨을 골랐다. 후회할 일을 너무 많이 만들었다. 그러니 이제는 만들지 말자. 몇 번이고 다짐한다. 저지른 일들을 수습하는 데에 있어 무언가를 후회하지 말자고.
가슴께가 무겁다. 바다를 통째로 끌어 담은 것만 같아서 래빈은 입술을 삼켰다.

차유진이 또 탈출했단다. 또! 자리를 비운 게 고작 반나절이었는데! 그새 또! 심지어 이번에도 마떼오한테 걸렸다는 사실을 얻어들은 래빈은 뒤통수 잡고 넘어갈 뻔했다. 너는 대체 뭐가 문제야! 사자후 내지르려는 래빈의 입을 대뜸 막은 건 단단하고 길쭉한 유진의 검지였다.
“No, 들어! 들어봐, 김래빈. 나 이유 있어!”
“그 이유가 설마 내가 한 모든 경고와 주의를 무시하고 갑판을 서성이다가 마떼오에게 걸려 물고기 밥이 될 뻔한 위기를 감수할 만큼 대단한 건 아니겠지!”
“우?”
“변명하지 말라는 소리야, 바보야!”
래빈은 씩씩대면서도 유진을 차근히 뜯어봤다. 어디 얻어맞은 것 같지는 않고. 사지 멀쩡하니 그건 나름대로 다행이고. 그래도 밝은 곳에서 살게 됐다고 얼굴에서 들뜬 빛이 꺼지질 않는다. 래빈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가 유진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펄쩍 뛴 유진이 억울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가볍게 무시하며 래빈은 전리품을 내려놨다. 씽코가 준 따끈한 빵이 든 종이상자였다.
페로 로꼬에게 간언 아닌 간언을 한 후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래빈이 한 일은 유진의 거처를 감옥에서 제 방으로 옮기는 거였다. 어두운 곳에 계속 뒀다간 사람이 미치기 딱 좋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래빈은 무엇인지 모를 죗값을 치르기 위해 구금되었다가 어둠 속에서 차근히 미쳐가던 죄수들을 많이 보았다. 유진을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게다가 본인도 틈만 나면 여긴 싫다고 칭얼거렸으니 행동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래빈은 한 걸음 물러나 종이상자에 관심을 기울이는 유진을 빤히 살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종이상자를 만지작거리는 게 꼭 고양이를 닮았다. 깜빡거리는 눈동자가 상자를 스치듯 지나쳐 래빈에게 닿았다. 눈이 마주치자 유진이 웃었다. 눈을 접고 활짝. 그러더니 성큼성큼 걸어오는 것이다. 훌쩍 가까워진 유진은 손을 뻗어 래빈의 팔을 잡고 힘차게 흔들었다.
“빵 고마워!”
내가 산 게 아니라는 말은 구태여 하지 않았다. 래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가 의뭉스러운 태도였는지 유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캐묻지는 않는다. 대신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갔다. 상자 앞에 앉고는 빵을 꺼낸다. 거기까지 보고 래빈은 등을 돌려 옷장으로 향했다. 옷을 갈아입을 심산이었다. 후드티 차림으로 돌아다니다가 마떼오에게 걸리면 한 소리 들을 터였다. 리볼버를 꺼내어 탁상 위에 올려놓고 후드를 벗는데 문득 유진이 말을 걸었다. 묘하게 달라진 목소리였다.
“이거 누가 줬어?”
“뭘 말이야?”
“빵. 김래빈이 산 거 아니지.”
확신에 찬 목소리다. 받쳐입은 검은 반소매 티셔츠를 쭉쭉 당기던 래빈이 문득 등을 돌렸다. 유진은 빵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힘주어 가른 빵은 두 동강이 난 채 김만 모락모락 피워낸다. 눈을 깜빡이던 래빈이 한 걸음 다가오자 유진이 고개를 젓는다. 오지 말란 뜻이었다.
“뭐 이상한 거라도 있어?”
“Umm…….”
“나도 받은 거기는 한데, 그분께서 뭔가 약을 넣으셨다거나 하진 않으리라고 생각해.”
“그런 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
유진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빵과 래빈을 번갈아 바라보던 유진은 이내 어깨를 으쓱이고 만다. 뜻 모를 행동이다. 래빈은 고개만 갸웃하다가 진짜 뭔데, 하고 물었다. 그러자 유진은 크게 가른 빵 한 쪽을 입에 덥석 넣곤 우물거렸다. 한 치 거리낌 없는 행동이었다.
“아무것도 아냐. 나중에 알려줄게.”
“차유진.”
“아무것도 안 들었어! 진짜로. 나 먹어보면 알아.”
실없는 웃음이 터진다. 래빈은 유진의 얼굴만 노려보다가 휙 고개를 돌렸다. 하여간 웃음도 많지. 생각도 없고. 바보 같은 차유진. 입만 삐죽이며 빠르게 옷을 갈아입었다. 넥타이를 꼼꼼히 매고 재킷을 걸쳤다. 그때까지 유진은 조용했다. 빵에 정신 팔린 게 틀림없었다.
마침내 옷매무시를 가다듬은 래빈이 등을 돌렸다. 그새 드러누운 유진은 책상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래빈은 잰걸음으로 다가가 유진의 머리맡에서 허리를 숙였다. 단정히 감은 눈이 시야에 들어온다. 구김살 하나 없는 얼굴이다. 아직 앳되던 시절의 유진도 이런 표정을 지었을까. 래빈이 아는 최초의 유진은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웃고 있다. 땀에 젖은 채 스포트라이트의 주인공이 되어. 물결치듯 쏟아지던 사람들의 찬사와 환호가 꼭 파도 소리 같다고 생각했더랬지. 거기까지 떠올린 래빈은 손을 뻗어 유진의 뺨을 툭 건든다. 그제야 유진이 눈을 떴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눈이 맞았다.
“일어나. 우리 가야 해.”
“어디?”
“너도 라보 데 누베의 일원이잖아. 해야 할 일을 해야지.”
유진은 잠시 말이 없다. 래빈은 느리게 허리를 폈다. 한발 늦게 유진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빨간 후드티를 빤히 바라보던 래빈은 손을 뻗어 옷을 탁탁 쳤다. 구겨졌던 옷자락이 펴진다. 유진은 시종일관 뚱한 표정으로 래빈을 바라보다가 실없는 소리나 했다. 나 안 가면 안 돼? 되겠어, 그게? 어이가 없어 되묻자 또 하릴없는 칭얼거림이 뒤따른다. 래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괜찮아. 크게 문제 될 일은 아니야. 좀…… 단순 노동이랄까. 오히려 생각 정리하는 데에 도움이 될 거야.”
“뭔데?”
슬쩍 시선을 피하며 래빈은 느리게 대답한다. 총기 조립. 유진이 질린 듯한 괴상한 소리를 내는 것을 뒤로한 채 래빈은 그를 이끌고 방에서 나왔다.
이사벨라의 말이 맞았다. 반나절 만에 들어온 커다란 상자 두 개 안에는 낱낱이 분리된 피스톨과 리볼버가 담겨 있었다. 각각 오십 정씩. 전부 합해 백 정. 조립하는 건 온전히 유진과 래빈의 몫이다. 래빈은 상자가 있을 창고까지 걸어가며 멍하니 생각했다. 총 백 정. 자신의 손에 넘겨진 무기들. 조립은 섬세한 작업이다. 래빈은 경험이 있어 조립에 능숙했으나 그건 즉 손쉽게 고장 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아예 망가트리진 못해도 오발탄이 나도록 조정할 수는 있을 거였다. 손이 축축하다. 버릇처럼 옷자락에 닦고 있는데 뒤에서 유진이 말했다. 그런데 김래빈. 이거 나한테 맡겨도 돼? 고민하는 대신 말했다. 응.
어차피 너한테 맡기나 나한테 맡기나 아무것도 변하진 않을 거야. 하고픈 말을 꾹 삼킨다. 차유진이 제 눈앞에 살아있는 상태로 존재하는 한 래빈이 내릴 결정은 모두 그를 최우선시할 것이다. 래빈은 그래야 했다. 어리석었던 건 어린 자신일진대 고통받은 건 차유진이니까. 그러니 책임도 져야지. 이젠 거의 버릇처럼 되뇐 래빈이 모퉁이를 꺾어 돌았다. 창고 문이 닫혀 있었다. 그 앞엔 이사벨라가 기대어 서 있고.
“[별 건 아니고요. 그냥 인수인계 확인차 왔습니다.]”
“[음. 아무도 안 물어봤어요.]”
“[이그나시오, 내가 당신이라면 이럴 땐 닥치고 있겠어. 내 피스톨 안에는 내가 심사숙고해서 끼운 탄창이 있으니까.]”
“[와우. 멋진 협박이네요. 나도 나중에 써먹어도 되죠?]”
거기서 래빈은 거의 기다렸다는 것처럼 유진의 옆구리를 퍽 쳤다. 반사적으로 돌아본 유진의 얼굴이 억울하다는 듯 일그러진다. 래빈은 한 발 나서서 이사벨라와 유진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러며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감사합니다, 이사벨라. 인수인계는 확실히 받았습니다. 피스톨 오십 정, 리볼버 오십 정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맞습니까?] 그러자 이사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맹수 같은 시선은 래빈이 아닌 유진에게 진득하게 눌어붙은 채로.
“[서른한 번째로 확인했습니다. 오십 정씩 전부 합해 백 정이 맞습니다.]”
서른한 번이나 확인했으니 빼돌릴 생각을 말라는 엄포였다. 래빈은 거의 엄숙하다시피 한 몸짓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팔짱을 끼고 짝다리 짚었던 이사벨라는 그제야 떠났다. 모퉁이를 떠나기 직전까지 유진을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은 채로. 유진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당당히 응수하는 모습을 보며 래빈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기세만 두고 보면 아주 용호상박이었다.
“이사벨라한테 너무 적대적으로 굴지 마, 바보야. 그러다가 너 진짜 큰일 나.”
창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단단히 잠근 후에야 래빈이 말했다. 유진은 그냥 익숙한 멜로디만 흥얼거리며 나무 상자를 아무거나 끌고 와 걸터앉는다. 그러더니 래빈을 빤히 살피는 것이다. 창고 한가운데에 놓인 상자를 뜯어 부품들을 낱낱이 확인하는데 시선이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시험 삼아 리볼버 하나를 대강 맞춰보던 래빈은 결국 포기하고 고개를 들었다. 날카로운 눈과 시선이 맞는다. 왜? 묻자 유진은 그냥 어깨를 으쓱였다.
“익숙한 것 같아서. 그거.”
“아.”
유진이 고갯짓했다. 래빈은 반사적으로 시선을 내렸다. 방금 제 손으로 조립하고 해체한 리볼버 한 정이 있었다. 거진 십 년 동안 해온 일이라 그런지 손짓이 그렇게 빠를 수가 없었다. 래빈은 부품을 해체해 가지런히 늘어놓은 리볼버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뭐. 덧붙일 말을 찾으려 애쓰고 있는데 이번에도 유진이 입을 열었다.
“안 어울려.”
“총기 조립하는 거에 어울리는 사람이 어디 있어.”
“누가 가르쳐줬어?”
느닷없는 질문에 래빈이 멈칫한다. 눈을 내리깔았다. 여섯 살짜리 꼬맹이를 라보 데 누베에 데려온 건 페로 로꼬다. 그러나 꼬맹이가 한 사람 몫을 하기까지 키운 사람은 따로 있었다. 그에겐 많은 이름이 있었으나 유진과 래빈 사이에서 통용되는 건 간단한 숫자 하나다.
“우노가.”
“Oh.”
“우노가 가르쳐줬어.”
유진이 몸을 일으킴에 따라 낡은 상자가 끼익 울었다. 그게 꼭 우노의 집에 걸려 있던 파란 대문이 내는 소리 같아 래빈은 숨을 삼켰다. 유진이 걸어와 래빈의 손을 잡아끈다. 래빈은 힘을 주는 대로 끌려갔다. 정신 차리니 상자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나란히 놓은 어깨가 배의 흔들림에 따라 부딪히고 멀어지길 반복했다.
“우노랑 친했어?”
“응.”
“많이?”
“응. ……많은 걸 가르쳐주셨어.”
그렇구나, 하고 유진이 대답한다. 래빈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한번 시작한 이야기는 봇물 터지듯 잇새로 술술 새어 나간다.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얘기다. 하물며 그 장본인인 우노에게조차 꺼내지 않았던, 묵고 오래되어 빛바랜 추억 같은.
“나한테 누나가 있었다고 했잖아. 한국에서 살 때. 아주 어렸을 때.”
“응.”
“……닮았다고 생각했어. 물론 누나가 진짜로 우노는 아닐 테지만.”
아, 그래. 래빈에겐 가족이 있었다. 사랑하는 조부모님, 가끔 밉지만 친구처럼 놀았던 누나. 이제는 그 얼굴마저 흐릿한 사람들. 망망대해에 떨어진 래빈은 우노를 보며 제 누나를 떠올렸다. 우노와 래빈의 누나가 닮은 점이라곤 새까만 눈과 머리밖에 없었는데도. 래빈의 누나가 페루 바닷가 마을에서 해적질이나 하고 있지 않을 테도. 그런데도 래빈은.
“어쩌면, 음…….”
잠시 머뭇거리던 래빈이 느리게 말했다. 어쩌면 그러지 않고는 못 견딜 것 같아서였는지도 몰라. 온통 모르는 사람들뿐이었으니까. 그런데도 나는 살고 싶었으니까. 대답은 한참 돌아오지 않는다. 래빈은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냥 그런 거야. 뒤늦게 얼버무리니 그제야 반응이 돌아왔다. 손과 손이 닿았다. 느린 손길이 조심스럽게 손가락 마디마디를 만지작거리다 얽혔다.
“나 김래빈 누나 보고 싶어.”
“나는 네 가족분들을 뵙고 싶은데.”
“김래빈 누나도 김래빈이랑 닮았어?”
“아마도. ……사실 잘 기억은 안 나.”
“나는 엄마 닮았대. 형이랑 누나는 아빠 닮았어. 동생은 반반.”
“상상이 안 가.”
“상상 안 해도 돼. 나중에 직접 봐!”
“그럴까.”
“응. 김래빈 나랑 약속해.”
“약속.”
고개를 돌린다. 유진이 코앞이었다. 코끝이 서로 부딪힐 것만 같은 거리다. 말간 눈동자가 눈이 시릴 정도로 번쩍인다. 터지듯 강한 안광이 래빈을 꿰뚫듯 지나간다. 그래서 래빈은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알고 있었다. 유진의 가족이 어떻게 생겼는지. 유진은 자신이 어머니를 닮았노라 이야기했으나 래빈은 동의하지 않는다. 유진은 오히려 할머니 쪽과 판박이였다. 유진의 어머니와는 눈매가 달랐다.
지그시 깨문 입술이 아프다. 비린 통증이 일었다. 목구멍이 주먹이라도 집어넣은 것처럼 숨이 꽉 막혔다. 유진에겐 가족이 있었다. 조부모님과 부모님. 형과 누나와 동생. 그리고 개는 여섯 마리나 키우고. 유진은 모를 테지만 래빈은 생각보다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안다. 그러나 입술과 함께 그 모든 말들을 지그시 삼키고. 그냥 가만히 유진의 눈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약속해.”
너를 반드시 그분들 곁에 돌려 보내줄게.
그러자 유진이 눈을 접어 웃었다. 어린 래빈이 사랑하던 웃음이다. 괜히 눈가가 시큰거렸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려는데 부드러운 손이 뺨에 닿았다. 이마가 맞닿는다. 뜨거운 열기가 전해졌다. 정말로 코앞이다. 뜨거운 숨이 닿았다가 사라진다. 래빈이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언젠가 이 순간을 바란 적도 있었던 듯하다. 그때 래빈은 치기 어렸고 순수했다.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손에 무엇을 쥐었는지, 그걸 어떻게 휘두를지 가늠도 못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 자신의 위치. 제 손에 쥐어진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렇기에 비로소 래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갑작스럽고 거친 움직임에 흠칫 굳은 유진과 성큼성큼 멀어졌다. 잘 해체해놓은 부품들에 다가가 천천히 그것들을 쥐었다. 차갑다. 심장 없는 그것들은 햇빛이 비스듬한 낮임에도 서늘했다. 그 감각을 되새기며 천천히 조립을 시작했다. 손이 떨린다. 들이쉬고 내뱉는 모든 호흡이 떨렸다.
“방법 알려줄게, 차유진. 이리 와. 간단하니까 한두 번 해보면 감 잡을 거야.”
다행스럽게도 목소리는 떨리지 않는다. 등진 유진이 무슨 표정일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굳이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래빈은 시선을 부품들에 고정한 채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일정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걸음. 그리고 마침내 제 앞에서 멈춰 서는 발소리.
“듣고 있어.”
담담한 말이다.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래빈은 숨을 삼켰다. 늘어진 부품들을 천천히 들어 하나씩 짜 맞춘다.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총알까지 넣지는 마. 본체만 완성하고 저 상자에 담는 거야. 어렵지 않아. 하나도 어렵지 않아. 차라리 조금 어려웠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십여 년의 경험 끝에 이젠 눈 감고도 조립할 수 있게 됐다. 래빈은 순식간에 조립이 끝난 리볼버 두 정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마침내 시선을 들었다. 눈을 찡그린 유진이 거기에 있었다. 완성한 리볼버를 뜯어 살피는 듯한 시선.
“어렵지 않지? 어차피 금방 끝날 거야.”
“응.”
“끝내고 밥 먹으러 가자.”
힘내서 쥐어 짜낸 한 마디에 유진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어진 말은 없다. 래빈은 새로운 몸체를 집어 들었다. 손끝에 닿는 싸늘한 냉기에 어쩐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시간은 느리듯 빠르게 흘렀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함께 아침을 먹고 창고로 가고. 낮 동안 총을 조립하다가 또 실없이 떠들고. 처음 몇 번 실수하던 유진은 사흘쯤 되었을 무렵엔 래빈만큼이나 손이 빨라졌다. 쉴 새 없이 떠들면서도 순식간에 척척 조립한 총은 흠잡을 곳이 없었다.
한 달쯤 지났을 때 래빈은 유진을 데리고 갑판에 올랐다. 육지에서 연습하면 더 좋을 테지만 페로 로꼬가 허락할 리 없어 선택한 차선책이었다. 갑판 위에서 저들끼리 바쁘던 선원들은 래빈과 유진을 보자마자 설설 피했다. 그들을 지휘하던 마떼오는 탐탁잖은 눈으로 유진을 노려보더니 이유를 물었다. 래빈은 곧이곧대로 대답했다. 라보 데 누베의 정식 선원이 된 지금 유진이 총 쏘는 법도 몰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떼오가 불만 많은 눈으로 유진과 래빈을 번갈아 바라봤기 때문에 래빈은 덧붙였다. 페로 로꼬께서도 허락해주셨습니다. 그제야 마떼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래빈은 유진을 돛대 너머로 데려갔다. 잔물결에 휘청거리는 뱃머리에 가만히 서서 자신의 리볼버를 꺼내 보여주었다. 유진은 리볼버와 래빈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눈썹을 슬쩍 올렸다. 래빈은 시선을 맞추는 대신 망망대해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사격 연습이야. 너도 라보 데 누베의 일원이니 이 정돈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
사실 이유는 그뿐이 아니다. 래빈은 정리 중 리볼버 한 정이 사라졌음을 알았다. 사격 훈련을 결심한 것도 그래서였다. 쏘지도 못하는 걸 갖고 있어 봐야 그냥 고물 덩어리일 뿐이다. 본인을 보호할 수단 하나쯤은 있는 게 좋겠지. 유진도 해적선 위에서 총을 갈길 만큼 바보는 아닐 테니까.
유진은 래빈을 빤히 바라보다가 흠, 하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래빈은 익숙하게 리볼버에 고무탄을 장전했다. 탄창이 돌아가는 소리가 선명하다. DAO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일일이 해머를 당길 필요는 없어. 담담하게 말하며 몸체를 가볍게 쥐었다. 발은 어깨만큼 넓히고 한 손은 몸체에, 한 손은 반대쪽 손을 받치는 용도야. 차근히 설명하고 총구를 저 먼 곳에 겨눈다. 한쪽 눈을 감아서 조준점을 목표물에 고정하고. 숨을 참고. 방아쇠를 당기면.
탕! 지리멸렬한 소음과 함께 탄창 돌아가는 소리가 어렴풋이 울렸다. 곁에 서 있던 유진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래빈은 총구를 바닥에 내리고 유진을 돌아봤다. 미간을 묘하게 찌푸린 모습이 영 못 미더웠다. 쏘지도 못할 거면 왜 가져간 거야? 묻고 싶었으나 꾹 삼킨다. 갑판엔 사람이 많으니까. 그래서 래빈은 대신 제 리볼버를 건네줬다.
“자세 잡아봐. 도와줄게.”
“무거워.”
“손목에 무리 안 가게 조심해.”
유진이 찡그린 얼굴 그대로 총을 들었다. 래빈은 크게 돌아 유진의 뒤로 다가갔다. 한 번 눈으로 본 게 다일 텐데도 쥐는 자세가 제법 태가 났다. 래빈이 손을 뻗었다. 이러니까 꼭 영화 같다는 생각만 멍하니 하면서.
“팔 조금만 더 굽히고. 발 살짝 좁혀봐.”
“응.”
“손목에서 힘 빼고. 너무 힘주면 다쳐.”
“이렇게?”
“응.”
말하는 것마다 곧잘 따라 한다. 래빈은 유진의 손 위에 제 것을 겹쳤다. 뜨끈한 온도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진다. 총을 감싼 유진의 손을 다시금 덮고 힘을 준다. 조준점을 맞춘다. 밀착한 가슴에 문득 불안해졌다. 아, 심장 너무 뛰는데. 모르겠지? 흘깃 곁눈질한 유진은 조준점 너머만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에 래빈은 또 안심한다. 다행이다. 차유진은 몰라야 하니까.
“쏘기 전에 숨 참고. 흔들리면 안 되니까.”
“응.”
“준비됐으면 방아쇠 당겨.”
유진이 숨을 들이켠다. 일순 심장이 멎는다. 일. 이. 삼. 그리고 귀가 먹먹해지는 소음.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른다. 빙글빙글 나선형으로 올라가다가 바람에 흩날려 사라진다. 반동에 비틀거리던 유진은 이내 느리게 총구를 바닥에 내렸다.
“괜찮아?”
유진은 한참 후에나 대답했다. 아마도? 고개를 들자 여전히 얼굴을 찡그린 채다. 근데 딱히 또 하고 싶지는 않아. 단호하게 말한 유진이 총을 도로 건네줬다. 래빈은 그걸 바라보다가 곧이곧대로 받았다.
“오늘은 이만할까?”
“나 할 말 있어.”
“무슨 말?”
“방에 가서 할래.”
래빈이 탄창을 열었다. 두 발 쏘고 남은 고무탄 세 개를 손에 털어 넣고 다시 도로 닫는다. 물 흐르듯 능숙한 손길이다. 고무탄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래빈이 고개를 들었다. 유진과 눈이 마주친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을 잔뜩 찌푸렸다.
“그래.”
그래서 래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유진은 그제야 뒤통수에 손을 올리고 휘파람을 불었다. 손목 안 아프냐고 물으니 그럭저럭 참을 만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다행이네. 래빈은 리볼버를 처음 쐈을 때 제대로 잘못 잡아서 손목이 나갔다. 구태여 말하지 않자 유진은 태평하게 그렇지 뭐, 하고 말았다. 갑판을 가로질러 아래로 내려가는데 마떼오의 시선이 진득하게 따라붙었다. 래빈은 최선을 다해서 무시했다.
복도를 누빌 때까지 유진은 하릴없는 소리나 쏟아냈다. 따끈따끈한 빵이 맛있었다며 다음번에도 그 사람한테서 받아오면 안 되냐고 태평하게 묻기까지 했다. 그게 되겠어, 바보야? 그리고 큰 소리로 말하지 마! 슬쩍 눈치를 보자 유진이 곧장 입을 삐죽 내밀었다. 김래빈 진짜 바보야. 눈치 없어. 그 말에 또 벌컥 화를 냈다. 눈치 없는 건 내가 아니라 너야, 바보야!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복도를 울리다가 괜히 흠칫하고.
그러나 실없는 소리는 문을 닫고 방에 들어섰을 때 멎는다. 유진은 뜻 모를 노래를 흥얼거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래빈은 문을 꼼꼼히 잠그곤 겉옷을 벗어 정리했다. 그래서 할 말이 뭔데? 옷장에 옷을 걸며 묻자 유진이 대뜸 뜬구름 잡는 소리를 했다.
“김래빈은 여기가 좋아?”
“뭐?”
“그러니까, 해적 하는 거 좋아?”
“그게 무슨 소리야?”
어처구니가 없어 뒤를 돌았다. 의외로 유진은 웃음기 없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래빈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걸어갔다. 그건 내가 할 소리라는 말은 꾹꾹 삼켰다. 대신 다른 말을 뱉었다.
“왜 그런 소리를 해?”
마치 나를 탈출시켜줄 것처럼. 이어진 말은 내뱉지 않는다. 대신 래빈은 유진의 곁자리에 앉았다. 푹신하진 않아도 딱딱하지도 않은 매트리스가 무게에 쑥 꺼진다. 유진과 어깨가 가볍게 부딪힌다. 유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주머니를 뒤적였다. 나온 건 쪽지였다. 모르는 사람의 글씨체로 적힌 작은 쪽지.
“빵 먹다가 찾았어.”
우노는 포기하지 않았으니 나도 포기하지 않으마. 담담한 한 문장이다. 그러나 래빈은 깨달았다. 불현듯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따끈한 빵을 건네주던 씽코. 래빈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유진을 바라본다. 유진은 쪽지를 빤히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올린다. 그리하여 시선이 얽힌다. 먼저 고개를 돌린 건 래빈이다. 언제나 그렇듯.
“이게 네 질문과 무슨 상관이 있어?”
“상관있어. 씽코한테 말하면 한 사람 정도는 같이 도망칠 수 있으니까.”
과연. 래빈은 입을 가만히 여닫을 뿐이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말이 나오지 않는다. 쥔 쪽지가 손아귀 손으로 구겨져 사라진다. 래빈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러나 유진은 단단한 목소리로 말해온다. 나 고민 많이 했어, 김래빈. 솔직한 목소리가 날아든다. 비수처럼 심장에 꽂혔다.
“나 김래빈이랑 여기 나가고 싶어.”
“…….”
“나랑 약속했잖아. 가족 보러 가기로.”
“난…….”
“난 진심이었어. 김래빈은 아니야?”
래빈은 대답하지 않는다. 손이 떨렸다. 말려든 종이 감촉만 선명하다. 가쁜 숨을 내쉬는 대신 래빈은 천천히 종이를 입안에 밀어 넣었다. 한동안 물고 있다가 그냥 꿀꺽 삼켰다. 목구멍이 따갑다. 종이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고개를 돌렸을 때 유진은 여전히 래빈을 바라보고 있다. 날카로운 시선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우리는 성공하고 말리라는 자신감에 가득 찬 것만 같은. 래빈은 무심코 생각한다. 선장의 눈이다. 자신의 배를 스스로 운전하는 사람의 눈. 제 몫의 운명을 제가 개척할 수 있음을 아는 사람의.
하지만 래빈은 고개를 젓는다. 반짝이는 사람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미워할 수가 없는 사람. 래빈이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니까, 차유진. 네가 모르는 이야기가 있어. 그걸 알게 된다면 너는 내게 이런 권유도 하지 않을 테지. 그러니 래빈은 맘 놓고 고개를 끄덕일 수 없다. 그거야말로 이기적인 일이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면 래빈은 아마 후회할 것이다. 또다시.
“왜?”
유진이 묻는다. 그건 가장 궁극적인 질문이라고 래빈은 문득 생각했다. 그러게. 왤까. 마른 입술을 가만히 물어 삼켰다. 고개를 들었다. 눈을 찡그린 유진이 물어온다. 김래빈은 여기에 있는 게 좋아? 그게 김래빈이 원하는 일이야? 그 한 마디에 오, 우습게도 래빈은 그리운 목소리를 떠올린다. 오래전 이야기다. 지금보다도 어리던 시절.
“너 혼자 가. 사람이 많아질수록 발각될 위험이 커져.”
“지난번엔 혼자였는데도 들켰잖아.”
“너는 캘리포니아에 가족이 있겠지만 내 가족은 여기에 있어. 너는 돌아갈 곳이 있지만 내겐 이 배가 바로 돌아올 곳이야, 차유진.”
“거짓말.”
송곳처럼 툭 불거진 한 마디다. 래빈이 입술을 사리 물었다. 유진은 래빈을 몰아세우지 않는다. 추궁하지도 않고 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대신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거짓말이야, 김래빈.
“보고 싶잖아. 할머니랑 할아버지. 누나도.”
“난…….”
“돌아가고 싶잖아. 한국.”
차유진의 말은 때때로 상처를 헤집는 비수가 된다. 래빈은 느리게 고개를 젓는다. 아니야. 그게 아니라. 내가 하려는 말은 그게 아니라. 하지만 유진은 기다리지 않는다. 멈추지도 않는다. 눈을 똑바로 맞춘 채 발음한다. 아니야? 진실을 토해내라고 끊임없이 가해지는 압박은 마치 어린 시절 먹었던 사탕처럼 달큼해서.
“나는…….”
“그게 김래빈이 바라는 거 아니야?”
마침내 숨이 터진다. 밭은 숨을 내쉬고 나야 래빈은 자신이 숨을 참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고개를 젓는다. 정신이 멍하다. 다정한 손길이 뺨에 닿았다. 끌어당기는 손길에 속절없이 이끌린다. 이마를 맞댔다. 닿은 부분이 열감으로 뜨거웠다.
“할 수 있어. 돌아갈 수 있어, 김래빈. 돌아가고 싶다고 얘기하면 돼. 그거면 돼.”
그 순간 래빈은 참지 못한다. 목구멍 끝까지 솟았던 말은 마치 역겨운 토기처럼 밀려든다. 잇새로 말이 새어 나온다. 입술을 짓씹어도 이미 늦었다.
“나는 그러면 안 돼.”
“…….”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러면 안 돼. 너한테 내가 그러면 안 돼.”
느리게 떨어진다. 온기가 멀어진다. 뺨을 스치고 떨어지는 손길에 입술을 짓씹었다. 잠시간의 침묵 후에야 유진이 물었다. 뭘?
“내가 무언가를 바라면 안 돼.”
“…….”
“그게 너와 관련되어 있다면 더더욱 안 돼.”
“…….”
“그러니까 혼자 가, 차유진. 돌아가.”
“…….”
“돌아가서 다시는 오지 마.”
유진은 대답하지 않는다. 가늘어진 눈으로 래빈을 빤히 바라볼 뿐이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피가 쏠린 탓에 제대로 사고할 수가 없다. 한없이 축축한 침묵이 가라앉는다. 잠잠한 잔물결 닮은 고요함이다. 그러다가 유진이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알아?”
입속으로 바닷물이 밀려드는 기분이다. 래빈은 눈을 질끈 감았다. 대답하지 않자 침묵은 이어지고. 끝없는 침몰에 정신이 아득해질 무렵 래빈은 가만한 발소리를 들었다.

아무것도 바라지 마.
제 어깨를 붙들고 하염없이 울리던 소리가 있다. 절대로. 아무것도. 무슨 일이 있어도. 바라지 마. 바라선 안 돼. 너는 뭐든 얻을 수 있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더더욱 아무것도 바라서는 안 돼. 어린 래빈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한다. 어떤 무게를 지니는지는 더더욱 모른다. 그러나 제 어깨를 붙들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갈라지고 젖어 들었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네. 아무것도 바라지 않겠습니다. 그제야 우노는 어린 래빈을 품에 가득 안고 무너지듯 중얼거린다. 어쩌다가 네가 여기에 와서.
래빈은 떠올릴 수 있다. 페로 로꼬는 래빈의 존재를 아꼈다. 페로 로꼬에게 래빈은 사랑스러운 자식쯤 될 것이다. 원하는 것이 있니? 페로 로꼬는 어린 래빈을 곁에 앉힌 채 끊임없이 묻고는 했다. 바라는 것이 생기거든 뭐든 알려주렴. 이 할미는 네게 뭐든 주고 싶단다. 그건 꼭 래빈이 아주 어렸을 적 받았던 애정과 닮아 있었다. 페로 로꼬는 어린 래빈에게 할머니였다. 피가 이어진 조부모님과는 쓰는 말도 생김새도 다르지만 결국엔 할머니였다. 그렇기에 래빈은 아무런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랑하게 대답했다. 네! 아무것도 모르기에 비로소.
흥미가 떨어질 즈음이었다. 라보 데 누베에서의 일들이 일상이 되어갈 때쯤이었다. 권태로웠다. 재미를 들린 일이 거의 없었다. 부러 티를 내진 않았으나 숨길 수 없는 무료함이 행동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다. 그때 페로 로꼬는 래빈에게 선물을 하나 주었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비디오테이프였다. 매사 조용한 래빈에게 이런 놀이는 어떻냐며 권유하려 가져온 테이프 안에는 미식축구 경기가 담겨 있었다. 래빈은 감사한 마음에 테이프를 몇 번이고 돌려봤다. 사실 취향은 아니었으나 페로 로꼬의 마음을 무시할 수가 없어서 그랬다.
테이프를 다섯 번쯤 돌려봤을 때 페로 로꼬는 새로운 테이프를 갖고 왔다. 이번엔 좀 새것이었다. 캘리포니아에서 떠오르는 신인 선수가 있다더구나. 그 아이의 경기야. 다정한 말과 함께 건넨 테이프를 재생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래빈은 별생각이 없었다. 미식축구가 지닌 뜨거운 열기는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래빈에게까지 닿았으나 그게 곧 경기를 즐긴다는 뜻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테이프를 넣고 재생했을 때 생각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열기가 아니다. 거기엔 별이 있었다. 잔인하리만치 반짝이는 별. 시선을 빨아들이는 새까만 블랙홀.
유진 이그나시오 차. 나이는 고작 열셋. 또래보다 키나 몸집이 큰 것도 아닌데 필드에 서기만 하면 모두의 이목을 끌어당기는 선수. 십이 번을 등에 짊어지고 필드를 누비는 쿼터백. 점수를 한 번 딸 때마다 카메라는 세리모니하는 유진을 커다랗게 담았다. 땀에 젖은 채로 주먹을 하늘에 높이 들어 올리고. 입에서 터졌을 환호는 그보다 거대한 함성에 짓눌려 사라진다. 쏟아지는 소리가 마치 파도 소리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불빛과 함성과 파도와 바다와 우주 사이로 번쩍이는 별. 유진 이그나시오 차. 열셋의 래빈은 비디오가 끝날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이후 래빈은 유진에 대한 정보를 모았다. 캘리포니아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 생기거든 쪼르르 달려가 유진에 관해 물었다. 일 년이 지났다. 래빈은 유진이 실은 한국계 미국인이며 조부모님과 부모님과 형과 누나와 동생과 개 여섯 마리까지 함께 사는 대가족임을 알았다. 미들턴 중학교에 다니며 프롬킹을 몇 번씩이나 거듭한 인기쟁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자유분방한 성격에 머리를 몇 번씩이나 염색했다는 사실도. 그맘때쯤 시작한 작곡에서조차 유진을 떠올렸다. 열넷의 래빈은 서툰 손길로 유진을 떠올리며 블랙홀이란 이름이 붙은 노래를 수십 개나 찍어냈다.
그 무렵 래빈의 보물 일호는 악보 무더기였다. 유진의 경기 영상들을 볼 때마다 무럭무럭 자라는 악상을 기록한 종이들.
그 아이가 마음에 드니? 열다섯 끝 무렵 페로 로꼬가 문득 물었을 때조차 래빈은 유진의 경기 영상을 보고 있었다. 종이를 앞에 펼쳐두고 간간이 끄적이다가 고개를 들었다. 유진 이그나시오 차 말입니까? 그러자 페로 로꼬가 고개를 끄덕이고. 다정한 물음에 래빈은 고민하다가 말했다. 네. 마음에 듭니다. 거기까진 괜찮았다. 그러나 래빈은 조금 전까지 유진의 경기를 보고 있었다. 머릿속엔 필드를 뛰는 유진을 보며 떠올린 악상들로 어지러웠다. 그래서 래빈은 말을 덧붙였다. 언젠가 한 번 꼭 만나고 싶습니다! 그러자 페로 로꼬가 웃었다. 그렇구나.
유진이 납치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건 이듬해 여름이었다.
지역 뉴스에서 촉망받던 쿼터백 유진 이그나시오 차의 실종 소식을 보았을 때 래빈은 벼락같이 깨달았다. 아무것도 바라지 말라던 우노의 말. 그때는 알지 못했던 무게가 폐부를 짓누르고 심장을 끌어당겼다. 뒤에서 소리 없이 다가온 페로 로꼬가 웃으며 말한 것도 그때였다. 조금만 기다리렴. 이제 만날 수 있겠구나. 이유를 묻자 당연하다는 듯 대답이 돌아왔다. 그야 네가 바랐잖니.
삼 년이었다. 우노에게 부탁해 유진의 상황을 살폈으나 아무것도 하지 않은지 삼 년. 라보 데 누베와 연결된 학교의 선생이 새로운 일원으로 유진을 추천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야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 수습해야 한다는 사실. 돌려보내야 했다. 페로 로꼬에게 부탁할 수는 없었다.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는 자신을 붙잡아준 건 우노였다. 도와주겠다는 말에 래빈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마저도 어리석은 짓이었음을 뒤늦게 알았지만.
그러다가 마침내 대면한 유진은 지독한 피로에 휩싸인 듯했으나 여전히 반짝이는 사람이어서.
래빈은 가만히 발을 옮겼다. 잔물결에 흔들리는 배에 몸을 실은 채 정처 없이 떠돌았다. 머리가 어지럽다. 뱃멀미 때문일 것이다. 늦은 밤이었다. 갑판에 오르지 않은 건 달빛이 너무 밝아서였다. 가을을 맞은 바닷바람은 칼날 같음을 알기 때문이기도 했다. 래빈은 비틀비틀 모퉁이를 돈다. 잠에 젖은 건지 밤에 젖은 건지 모르겠다. 경비를 선 몇몇 말단들은 래빈을 붙잡거나 말을 걸지 않았다. 그들에겐 그럴 권한조차 없다. 그래서 래빈은 멍하니 배 안을 서성였다.
어느덧 십일 월이다. 유진이 이곳에 온 지 꼬박 사 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래빈이 비틀비틀 계단을 올랐다. 방에 두고 온 유진이 조금쯤 걱정되었다. 그새를 못 참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으면 어쩌지. 마스터키를 쥐여주긴 했는데 그걸로 온갖 곳을 들쑤시고 다니면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데. 멍하니 중얼거리면서도 계속 발을 옮긴다. 어쩐지 머리가 멍했다. 그러다가 멈췄다. 고개를 꺾어 바라본 곳엔 웬 거울이 덩그러니 있었다.
얼굴이 비친다. 래빈은 천천히 들어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차유진은 뜨거웠다. 체온이 낮은 편인 래빈에겐 더더욱 뜨겁게 느껴졌다. 고작 이마가 닿았을 뿐인데도 여전히 열기가 선명하다. 어쩐지 이상한 밤이다. 공기가 서늘하게 가라앉았고 들이쉬고 내쉬는 숨소리가 유달리 크다. 정신이 멍하다. 심장이 뛴다. 그건 어쩌면 희미한 직감을 닮았다. 모든 것이 무너지기 직전 정신을 차리라고 가만히 읊조리는 감각 따위의.
어디선가 숨죽인 목소리가 들린다. 익숙한 목소리다. 낯설지 않은 스페인어를 발음한다. 한없이 다정하게 속삭인다. 래빈은 이제 안다. 한때 할머니라고 믿고 따랐던 사람은 그저 해적 두목에 불과하다. 그가 아무리 래빈을 아끼고 사랑한대도 래빈은 그를 온전히 사랑할 수 없으리라. 발을 뗀다. 머리가 어지럽다. 나직한 말소리를 향해 걷는다. 이상하리만치 사람이 없었다.
너도 알잖니.
무엇을요?
대답하는 목소리 또한 익숙하다. 래빈의 걸음이 느려졌다. 왜 쟤가 저기에 있지. 유진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왔을 텐데. 의문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사라진다. 무언가에 단단히 취한 것처럼 발걸음이 휘청거렸다. 졸리다. 무심코 생각했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이건 졸린 게 아니라.
진정 모른다고 말할 테니?
당신이 무엇을 위해 나를 불렀는지 모르겠는데요.
이그나시오. 그게 네 이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페로 로꼬도 당신의 이름이 아닐 테죠.
오, 그건 모르는 일이지.
다정한 말투다. 그리하여 발화하는 이야기가 있다. 페로 로꼬가 말한다. 언제나처럼 다감하게.
네가 왜 이곳에 떨어졌는지 궁금하지 않니, 유진?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서 촉망받는 쿼터백이었던 네가. 연고도 없는 페루에.
아.
래빈이 우두커니 선다. 눈앞에는 닫힌 문이 있다. 열어야 한다. 열어서, 유진의 귀를 막고 그를 끌고 나와야 한다. 아니라고. 그게 아니라고. 호소하고 고개를 저어야 한다. 그런데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래빈은 그저 고개를 떨군다. 문고리를 바라본다. 손끝으로 건드린 문고리가 차갑다. 그런데도 정신은 돌아오지 않고.
바랐기 때문이지.
누가?
왜 우노가 너를 탈출시키려 했는지 나는 알고 있단다.
……어째서?
우노는 명석한 아이지만 현명하진 못했지. 주인을 두 명이나 섬기는 개는 필요 없는 법이거든.
목이 아프다. 머리가 어지럽다. 옆구리가 욱신거린다. 밭은 숨을 간신히 삼킨 래빈이 마침내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당기려는 순간 페로 로꼬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발음하는 한 치 거짓 없는 진실.
메노르가 바랐기 때문이야.
…….
메노르가 너를 원했기 때문에 너는 이곳에 있다.
대답은 한동안 돌아오지 않는다. 문고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고요한 밤이다. 파도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일렁이는 물살 속에 휩쓸리듯 래빈은 숨을 삼킨다. 한참의 침묵. 고요한 심해가 갈라지듯 뒤늦게 되돌아오는 물음.
항상 궁금했는데요.
…….
메노르가 누구죠?
묻지 않아도 알 텐데.
…….
네게 필요한 건 의문이 아닌 확신이구나.
발소리가 들린다. 희미한 소리다. 래빈이 쥐었던 문고리를 놓았다. 주춤거리며 물러난다. 눈을 깜빡인다. 주위가 고요하다. 대화만이 선명하다. 심장이 떨린다. 가쁘게 맥동하는 심장. 누군가 목을 틀어쥔 것처럼 숨을 쉴 수가 없다. 래빈이 한 걸음 물러났다. 동시에 문이 벌컥 열렸다. 아무런 전조 현상도 없이. 마치 모든 것이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문간에 선 페로 로꼬가 눈을 접으며 웃었다. 선명한 주름이 한층 깊어진다. 페로 로꼬가 문에서 비켜섰다. 래빈이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눈이 마주친다. 선명한 시선이 날아와 꽂힌다. 경악에 물들지도, 눈을 홉뜬 채 얼어붙지도 않았다. 그저 지긋한 시선이다. 그런데도 래빈은 머리가 얼얼한 충격에 몸부림쳤다. 숨이 막혔다. 거대한 바닷물이 덮치듯이 몰아치는 기분. 그제야 소리가 물 밀리듯 밀려온다. 밤바다의 물결. 희미한 바닷새의 우짖음. 배의 삐걱거림. 가쁜 숨소리. 페로 로꼬가 웃는다. 한없이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서 오렴, 메노르.]”
열두 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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