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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선향불꽃 上

소리가 컸다. 무슨 소린진 모르겠는데 아무튼 컸다. 브레이크가 고장이 난 차가 고속도로 달릴 때 내는 소음 같았다. 그렇다고 또 귀를 기울이면 제법 일정한 간격으로 밀려왔다가 쓸려 사라졌다. 소리의 근원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작게 난 창문 하나를 닫는다고 사라질 성싶진 않았다.
유진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스프링이 나간 매트리스에서 청하는 잠은 안락한 밤과는 거리가 멀었다. 침대 틀도 이불도 베개도 없었다. 그냥 매트리스에 안 입는 옷들을 구겨서 베개 삼았다. 삼 년쯤 그렇게 살았으면 익숙해질 법도 한데, 그보다 오랜 세월 아늑한 잠자리가 뭔지 알고 있던 탓에 매일같이 불만스러웠다. 상황을 타파할 타개책이 마땅치 않아서 더더욱 그런지도 몰랐다.
낡은 매트리스에 누워서 입만 비죽인다고 세상은 조금도 발전하지 않았다. 애초에 유진은 가만히 누워서 불평불만 쏟아내는 쪽이 아니었다. 뭐든 움직이고 보는 쪽이었지. 하지만 그마저도 슬슬 지쳤다. 혀 빠지게 움직이면 뭐해. 아무것도 안 바뀌는데.
삼 년이었다. 유진의 삶에서 그토록 무기력할 수가 없는 삼 년이었다. 가만히 누워서 아무것도 안 했느냐면 그건 아니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전부 했다. 답지 않게 발품도 팔았다. 그런데 돌아온 건 아무것도 없었다. 유진은 슬슬 현실을 인정해야 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서 도피하는 건 삼 년으로 족했다.
유진은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귀에 거슬리는 소음에 눈을 질끈 감아봐도 나아지지 않았다. 베개 대신 쓰는 천 무더기에 얼굴을 파묻었다. 눅눅한 먼지와 물 냄새가 났다. 곰팡내였다. 질색하며 내던졌다. 그러자 다시 소음이 울렸다. 진절머리났다. 그 망할 소리 좀 어떻게 하라고 윽박지를 기세로 창문을 열어젖혔다. 경첩이 달랑거리던 창문틀은 성난 손길에 덜걱거리더니 뚝 떨어졌다. 닦지 않아 뿌옇기만 하던 유리창은 중력에 이끌려 낙하하더니 틀과 어긋났다. 바닥에 충돌하자마자 유리는 박살이 났다. 소행성 충돌이야? 환장하겠네. 깨진 유리 조각을 지르밟고 유진은 창밖으로 고개를 디밀었다. 삼 년 전이었다면 꿈조차 꾸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그때의 유진은 뭐랄까, 발을 몹시 소중히 여겼으니까.
고개를 내민 창밖은 후덥지근한 열기로 가득했다. 별 조그만 창도 창문인지 안과 밖의 온도가 달랐다. 피부에 자잘한 물방울이 쭉 들러붙는 기분이었다. 최악이었다. 유진은 항상 습한 게 싫었다. 고향에서도 싫었는데 여기에 와선 더 싫어졌다. 지금은 우기였다. 비는 내리지 않았으나 청명한 하늘을 보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였다. 햇볕을 쬐지 못해 비타민 디가 부족한가. 별것이 다 신경에 거슬렸다. 유진은 고개를 내밀고 신경질적으로 입을 열었다가 꾹 다물었다. 소음의 원인을 알아버렸다. 그리고 그냥 견디는 수밖에 없으리란 것도.
일정하게 쓸리고 밀려가는 건 파도 소리였다. 꿉꿉한 하늘에 사람 없는 모래사장이 지척이었다. 진청색 물결은 모래사장에 밀려왔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저 멀리 검은 점처럼 보이는 배 두 척이 둥둥 떠다녔다. 유진은 여상 같은 바다를 보다가 할 말을 잃었다. 파도 소리를 듣고 기분이 나쁠 수가 있다니. 눈을 끔뻑였다. 뒤늦게 잊고 있던 감각이 유진을 일깨웠다. 유리 조각 밟은 발바닥이 따끔거렸다. 평생 봐도 부족할 거라고 생각했다. 파도 타고 바다에 몸 맡기는 행위를 있는 힘껏 즐기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도.
차유진. 열아홉. 여행 중 납치당해 외딴 페루 바닷가 마을에 떨어진 지 삼 년.
유진은 자신이 차근차근 미쳐가고 있음을 인정했다.

*

유진이 사는 지역은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변방의 바닷가 마을이었다. 산다기보단 어느 순간 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좁은 마을은 깎아지른 해안절벽 위에 아슬아슬 놓여 있었는데, 가끔 높은 곳에서 보면 마치 신이 장난치다 말고 건드린 장난감이 탁자 밖으로 떨어지기 직전의 모습을 표현한 현대 미술 같기도 했다. 낮에는 온통 바람이 불었고 우기에는 폭풍에 휩쓸리기 그렇게 좋았다. 장점이라면 마을 길이 구불구불하고 혼잡해 도망치기가 수월하다는 점이었다. 상대가 무엇이든 간에.
유진은 마을에 있는 유일한 학교에 다녔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구분이 없고 그냥 한 곳에 때려 박아 애들을 가르쳤다. 버젓이 학교라고 불리지만 이렇다 할 건물도 없었다. 그냥 폐건물 하나에 정의감 넘치는 청년 대여섯이 모여 꾸린 프로젝트에 가까웠다. 나이대 순으로 가른 A반 B반 C반이 있었는데 열아홉인 유진은 C반이었다. 열넷부터 열아홉까지가 C반에서 수업을 들었다. 유일하게 폐건물이 아닌 언덕바지 단칸집에서 수업이 이루어지는 반이기도 했다.
유진은 느지막하게 걸었다. 자신을 스쳐 지나는 사람들의 소음이 귓가를 먹먹하게 잠식하다가 사라졌다. 우기인 덕분에 날은 항상 꿉꿉했다. 볕이라도 들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럴 낌새는 눈 씻고 봐도 없었다. 유진은 지나가는 길에 허름한 대문 아무거나 붙잡고 고개를 불쑥 디밀었다. 안쪽에 걸린 시계가 보였다. 오전 아홉 시 사십사 분이었다. 지각이네. 단조롭게 생각한 유진은 이내 태평하게 으쓱이곤 느적느적 발을 옮겼다. 사실 학교니 수업이니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았다. 유진이 꾸준히 수업에 참여하는 건 오로지 남아도는 시간과 공짜 밥 때문이었다.
“이그나시오.”
자신을 호명하는 소리에 발을 끌며 걷던 유진이 고개를 들었다. 키가 훤칠한 여자가 담장 너머 유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노였다. 삼 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뭐 하는 여자인지 몰랐다. 가끔 시장에 나오고 가끔 바다로 나가고, 대부분 집안에 틀어박혀서 정말 드물게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이한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아는 게 없었다. 부르라며 알려준 우노도 진짜 이름은 아닐 터였다. 유진과 우노는 오며 가며 인사만 나누는 사이였다. 유진이 먼저 말을 걸진 않았다. 우노도 치대기에는 너무 염세주의자였다. 어쩌다 보니 말을 텄을 뿐이었다. 정말 어쩌다 보니.
“왜요?”
“지각이지 않니?”
“오, 미안해요. 내가 지금 시계가 없어서 그런데, 지금 몇 시죠?”
능청스러운 유진의 대답에 우노의 짙은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우노는 면면으로 봐선 기껏해야 스물네댓이 분명한데 묘하게 늘그막 노인네 같은 분위기를 풍길 때가 있었다. 우노가 잠시 기다려, 하고 심드렁하게 말하더니 집안으로 발을 옮겼다. 유진은 굳게 잠긴 대문을 가만히 바라봤다. 처음엔 짙푸른 색으로 칠해졌을 게 분명했으나 지금은 빛이 바랬다.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져서 흉한 뼈대까지 드러냈다. 가장 구석진 곳엔 페인트 튄 자국이 검붉게 남아 있었다. 저 대문을 넘는 이들은 전부 마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 알았다. 그마저도 마을 사람들 얼굴을 전부 외우고 나서야 알았지만.
우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설렁설렁 걸어 나왔다. 지각이지 않냐고 지적한 사람 주제에 한가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돌로 쌓은 담장에 다시 팔을 얹어 기대더니 높낮이 없는 무심하게 말했다. 열 시 십육 분이네. 유진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건넛집에서 보고 온 시간과는 거의 삼십 분이 넘게 차이가 났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몰랐다. 아마 우노 쪽이 맞을 거였다. 건넛집에 사는 사람은 누군지도 몰랐으니까. 애초에 그 집에 사람이 사느냐 묻는다면 그건 또 별개의 이야기겠지만.
“지각은 학생이 가지기에 적합한 태도는 아니지.”
“오, 지금 내게 충고하는 건가요? 당신이?”
“충고가 아니라……. 그냥 심심한 여자의 미친 헛소리 정도로 받아들여.”
“이미 그러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듣기에도 다소 신랄한 말투였다. 우노는 대답 대신 고개만 기울였다. 유진은 잠시 고민했다. 이대로 우노를 지나쳐 학교로 가느냐, 아니면 우노의 담장에 달라붙어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느냐. 고민은 짧았다. 결심은 빨랐고. 유진은 발을 뗐다. 우노의 담장이 만든 흐린 그림자 속으로 냉큼 들어가 앉았다. 담장을 뒤덮은 담쟁이 넝쿨이 자꾸만 뺨을 간질였다.
“이젠 가지도 않을 셈이야?”
“내가 학교에 가야 하나요?”
“질문을 질문으로 응수하는 건 몹시 영리한 방법이지. 하지만 상대의 화를 돋울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해.”
“필요할 때에는 충분히 고려하고 있어요. 당신 말마따나 미친 여자의 헛소리에 맞장구치는 데에 그런 고려가 필요할까.”
우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담장 아래에 쪼그려 앉은 탓에 우노의 얼굴이 보이지도 않았다. 유진은 팔을 괸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지대를 계단식으로 쌓아놓은 이름 모를 마을에서 우노의 집은 거의 맨 꼭대기에 있었다. 덕분에 항상 마을을 내려다볼 수가 있었다. 얼기설기 짜 맞추어 집이라고 우기는 시설들로 그득 찬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어쩔 수 없이 옛날 생각이 났다. 그마저도 고작 삼 년 전이지만. 유진이 우노의 집 근처에서 주로 하는 일은 간단했다. 감회에 푹 빠졌다가 좁쌀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굽어살피고는 가망 없는 현실에 한숨 짓는 거였다. 신파적인 일이었다.
“미친 여자라곤 하지 않았어. 심심한 여자라고 했지.”
한참의 침묵 끝에 우노가 내놓은 대답은 퍽 심드렁했다. 말꼬리를 잡는 사람 특유의 아집은 귀 닦고 다시 들어봐도 없었다. 그냥 심심하니까 아무 말이나 늘어놓는 것 같았다. 조금씩 동했던 유진의 흥미가 순식간에 꺼졌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긴 하지. 공기가 찝찝할 정도로 찐득거렸다. 물 먹은 장작에 불씨를 놓으면 금세 꺼질 수밖에 없는 법이다. 유진은 할 말 없으면 나 이만 갈게요, 중얼거리곤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가지 마, 이그나시오.”
우노가 중얼거렸다. 눈을 내리깐 우노의 얼굴 위론 짙게 그림자가 졌다. 속내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유진은 담장에 기댔던 등을 일으켜 고개를 내밀었다. 우노가 유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체 모를 여자의 목소리가 묘하게 유진의 귓가에 눌어붙었다. 뭐라고요? 눈을 깜빡이며 되묻자 우노가 되풀이했다.
“가지 마. 네게 좋을 게 없어.”
“지각은 학생의 본분이 아니라면서요?”
“가지 마. 후회할 거야. 후회는 언제나 느린 법이란 걸 또다시 깨닫고야 말 거야.”
대화가 아니었다. 우노의 독백에 유진이 말을 덧붙이는 수준밖에 안 됐다. 유진은 눈을 찡그리며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었다. 우노가 가지 말라고 해도 갈 수밖에 없었다. C반엔 꽃밭에 사는 녀석들과 머저리밖에 없었으니 유진도 달갑진 않았다. 그래도 우노와 하릴없는 대화를 나눌 바엔 또래 틈바구니에서 선생의 욕이나 들어먹는 편이 나을 거였다. 특히 우노가 마침내 정신을 놓아버린 것처럼 행동한다면 더더욱. 허울뿐인 학교는 아무리 뭣 같아도 무상급식만큼은 꼬박꼬박 줬다.
유진이 두어 걸음을 떼는데 뒤에서 우노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노는 유진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떠나는 유진을 부르지도, 붙잡지도 않았다. 대신 나직이 숨죽여 허밍 했다. 노래였다. 생전 처음 듣는 선율이었다. 음악에 일가견이 있지는 않고 삼 년 동안 강제로 디지털 디톡스 생활을 했으니 그새 유명해진 노래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상당히 유명세를 치렀겠구나 싶었다. 우노의 성의 없는 흥얼거림에도 멜로디는 귓가에 쫀득하게 달라붙었으니까.
“어때?”
노래를 부르다 말고 우노가 대뜸 물었다. 허리를 뚝 잘라낸 듯 선율이 멎었다. 유진은 혀끝에서 맴도는 묘한 아쉬움을 구부려 삼키며 말했다. 글쎄요. 등을 돌렸다. 우노의 덥수룩한 앞머리 너머 검정 눈동자가 지독하게 빛났다.
“사람들이 좋아했겠네요. 멜로디가 재밌으니까. 빌보드에라도 올랐을 것 같은데.”
“글쎄, 오르긴 했지. 빌보드가 아니라 갑판이지만.”
우노가 중얼거렸다. 이번엔 유진 차례였다. 등을 돌렸던 유진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지극히 염세적인 태도로 우노가 웅얼거렸다. 점점 내려가는 머리가 문득 쿵 소리를 내며 돌담에 박혔다. 으. 유진은 질색하며 한 걸음 물러났다. 마침내 돌아버려서 자해하는 사람을 지켜보는 취미는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노는 새된 소리를 흘리며 말했다. 우울한 투였다.
“메노르가 만든 거야.”
“메노……. 누구요?”
“메노르. 내……, 우리 막내.”
“당신한테 동생이 있었어요?”
황당한 목소리로 되묻자 우노가 킬킬 웃었다. 몇 년은 자르지 않아 기다란 머리칼이 부스스 흔들렸다. 유진이 눈을 찡그렸다. 우노는 대개 인생에 회의적인 태도를 고수했으나 가끔 보면 정신을 놔버린 것처럼 횡설수설을 늘어놓았다. 유진은 뜻 모를 말을 웅얼대는 우노를 두고 가버릴 셈으로 다시금 등을 돌렸다. 또다시 우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유진을 잡는 게 분명한 말투였다.
“동생이 아니라 막내야. 막내는 동생이 될 수 없지만 동생은 막내가 될 수 있는 거야. 그냥 그런 거야, 이그나시오.”
“우노. 술 아니면 약, 둘 중에 뭐 했어요? 아니면 둘 다 했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답니다, 꼬마 신사님. 그냥 좀 슬퍼서 그래. 슬퍼서. 차라리 내 동생이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유진은 잠시나마 잊고 있던 소음이 다시 귓바퀴에 감돌기 시작했음을 깨달았다. 지리멸렬한 파도 소리. 귓바퀴를 맴돌다가 미끄러져 들어와 고막을 둥둥 울리는. 동시에 함께 묻어놓았던 짜증스러움이 훅 솟았다. 목덜미가 흘러내린 땀과 물방울 덕분에 찝찝했다. 신경질적으로 땀을 훔쳤다. 우노가 고개를 들었다. 시꺼먼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유진을 바라봤다.
“나는 차라리 이 노래가 완전히 침몰해버렸으면 좋겠어. 아무도 모르게. 바닷속 깊은 곳으로 말이야.”
뜻 모를 우노의 중얼거림에 유진은 눈이나 굴렸다. 메노르를 아낀다면서 저건 또 무슨 저주람. 이해할 수 없는 여자. 우노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질척한 바람에 흔들린다. 얼굴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우노가 말을 이었다.
“이 선율은 물속에 잠겼을 때 들어야 가장 아름답거든. 메노르는 모르지만. 그 애는 많은 것을 모르지만…….”
“그래요?”
“완성본 듣고 싶지 않아? 그 애가 만든 건 나 따위가 지껄인 허밍보다 훨씬 훌륭해.”
유진은 말없이 걷기 시작했다. 우노가 뒤에서 웅얼거렸다. 정말이야, 이그나시오. 그 애는 정말 천재야. 한참 있다가 풀썩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때야 유진은 뒤를 돌아봤다. 돌담에 기대어 있던 우노가 없었다. 바닥에 쓰러졌겠거니 하며 다시 발을 옮겼다. 거짓말쟁이 같으니라고. 술인지 약인진 모르겠으나 뭐든 간에 취해 있는 게 분명했다. 대낮에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어. 유진은 혀만 끌끌 차며 비척비척 발을 옮겼다. 이제 갈 곳도 없으니 진짜 학교행이었다.

단칸집은 벽면이 하얗고 지붕은 빨갰다. 마을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있는 덕분에 일이 년쯤 오르내리면 다리에 근육이 생겼다.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웠으나 선생들은 죽어도 빨간지붕 단칸집을 C반 교실로 해야겠다며 고집했다. 유진이 C반에 속하기 훨씬 이전부터 빨간지붕 단칸집은 C반 교실이던 모양이었다. 아이들은 불만이 많았으나 폐건물보다는 훨씬 쾌적했기 때문에 토로하는 녀석은 또 없었다. 유진은 수업을 어디서 하든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서 입을 다물고 있는 쪽이었고. 물론 한여름 우기에 언덕바지 오르고 있으면 다 관두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솟기는 했지만.
더워 죽겠네. 유진은 흐르는 땀을 연신 훔치며 잔디를 짓밟았다. 빨간지붕 단칸집이 코앞이었다. 잠시 허리를 숙여 숨을 골랐다. 공기가 무거웠다. 물먹은 솜처럼 묵직해서 호흡하기가 어려웠다. 자신이 살던 곳엔 제아무리 우기가 와도 이렇게까지 습하진 않았다. 아니 애초에 거기선 학교라고 불리는 교실이 이딴 외딴 언덕에 덩그러니 있지도 않았다. 원래 살던 곳에서는 많은 것이 달랐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유진은 입술을 짓씹었다. 알싸한 고통이 입술에서 느리게 퍼졌다. 원래 쓸데없는 상념을 끊어내기엔 고통만 한 게 없었다. 유진은 생각의 고리를 끊으며 다시 한 걸음 내디뎠다. 아침에 지르밟은 유리 조각에 입은 상처가 발바닥을 사정없이 쑤셨다.
이상함을 눈치챈 건 지척에 다가와서였다. 열한 시는 족히 되었을 법한데 밖에 나온 애들이 없었다. 시간표가 규칙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알았다. 학생도 적고 선생은 더더욱 적어서 등교 시간만 정해졌을 뿐 하교 시간마저 제각각이었다. 그래도 열한 시 무렵이면 점심 휴식 시간을 맞아 높은 언덕을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녀석들이 한두 명쯤 있었는데. 그런데 오늘은 없다. 언덕 가르며 뛰어다니는 녀석들 대신 검은 지프 두 대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낡아빠진 구형 모델이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설렁설렁 걷던 유진이 멈췄다. 눈이 가늘어졌다. 상표명을 칼 같은 날붙이로 박박 긁어 없앤 지프들은 번호판도 붙어 있지 않았다.
이거 뭔가 이상한데. 마을은 터무니없이 작았고 사람들은 전부 가난했다. 지프 타고 다닐 만한 재력을 가진 사람은 대개 그들의 자식을 이딴 학교에 보내는 대신 마을을 떠났다. 유진은 얼굴을 굳히고 손으로 지프를 쓸었다. 손끝으로 울퉁불퉁하고 뜨거운 쇠가 닿았다. 볕에 잔뜩 달궈진 표면에 손끝이 붉게 부풀었다. 몇 번이고 찌그러지고 펴지기를 반복한 모양새다. 흠집이 잔뜩 났고 군데군데 둥그런 모양으로 구멍까지 뚫려 있었다. 유진은 슬쩍 안을 들여다봤다. 불안감보단 호기심이 먼저 동했다. 텅 빈 지프 안은 다 터진 가죽 의자와 새까만 싱자 몇 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건 또 뭐야?”
목덜미가 죽 당겨진 건 그때였다. 감히 말하건대 그런 취급은 생전 처음이었다. 짐짝도 아니었다. 그냥 길거리에서 발에 채는 돌멩이를 치우듯 성의 없고 무관심한 손길이었다. 손은 작은 편이 아닌 유진의 뒷덜미를 움키고 그대로 들어 올렸다. 옷깃이 늘어나며 숨이 막혔다. 반사적으로 숨 막히는 소리를 뱉으려다 꾹 삼켰다. 대신 눈을 찡그렸다. 얼굴 절반이 흉터로 뒤덮인 남자였다. 유진은 눈을 내리감는 척하며 남자를 훑었다. 키가 컸다. 근육질이었다. 무엇보다 허리춤에 매인 게 거슬렸다. 들지도 않는 햇빛에 반딱거리는 건 분명 총이었다.
“웬 쥐새끼가 살금살금…….”
총을 가진 거친 남자. 팔뚝에는 입이 찢어질 듯 벌린 늑대인지 개인지 모를 동물 문신이 있었다. 유진은 침착하게 남자를 바라봤다. 지프의 주인인 듯했다. 어쩐지 지프에 상처가 많다 했더니만. 남자가 가진 총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저 지프는 아마 총격전을 몇 번이고 거치고도 살아남은 영광의 용사, 뭐 그쯤 될 터였다. 유진은 반항하는 대신 얌전히 두 손을 들었다. 남자가 허, 하고 눈을 찌푸렸다.
“너 뭐냐? 어디서 누가 보낸 놈이지?”
거기에 대해선 할 말이 별로 없는데. 유진이 할 말을 찾는 대신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목덜미를 채간 남자의 인상이 점점 더 험악해졌다. 이젠 목덜미가 아니라 멱살을 잡을 기세였다. 빨간지붕 집에 왜 이런 사람이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학교는 마을 사람들에게 인식이 제법 좋았다. 게다가 마을 치안이 아무리 안 좋다고 한들 총 들고 다니는 사람은 드물었다. 문신까지 있는 걸 봐선 진짜 무슨 조직인가. 예전에 봤던 B급 누아르 영화를 상상할 때 뜻밖에도 구원의 손길이 내려왔다.
“이그나시오!”
선생인 말라깽이 피에트로였다. 어정쩡한 자세로 문간에 선 피에트로의 눈이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얼굴 가득 수 놓인 주근깨는 당혹스러움마저 숨겨주진 못했다. 피에트로 뒤에서 남자와 비슷한 차림의 일행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어림잡아도 여섯 명이었다. 유진은 그냥 대롱대롱 매달린 채 피에트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피에트로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 애를 아시오?”
“아, 압니다. 제가 말씀드렸던 친구가 바로 그 친구…….”
피에트로가 말을 흐렸다. 남자는 마침내 목덜미를 놨다. 유진은 풀썩 바닥에 꽂히듯 섰다. 숨을 잔뜩 들이켜고 목을 매만지고 있자니 남자의 시선이 꽂혔다. 따끔거릴 정도로 적나라한 눈이었다. 남자뿐이 아니었다. 피에트로 뒤에서 느지막하게 나온 일행 역시 유진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유진은 움츠러드는 대신 목을 꺾었다. 기민한 눈치는 상황을 순식간에 파악했다. 피에트로가 저 남자들에게 자신을 소개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마 유진을 직접 만나지 못했던 남자는 눈앞에 나타난 진짜 유진의 모습이 눈에 차지 않는 모양이고.
“생긴 게 꼭 샌님 같은데. 힘은 좀 쓰나?”
그건 질문이라기보단 독백이었다. 유진도 그걸 알았다. 그래서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지그시 다물고 있자 남자의 시선이 더욱 집요해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히 훑으며 지독하게 뜯어 살폈다.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피에트로 뒤에서 걸어 나온 둘은 저들끼리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유진은 그냥 와우, 하고 말았다. 모두의 관심 대상이 되는 건 퍽 오랜만이었다. 거의 삼 년 만이라 어색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남의 것에 기웃거리기나 하고 말이야. 우리는 호기심 많은 쥐새끼를 키울 생각은 없소, 피에트로.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냥 기계 부품 같은 거야. 생각이나 호기심은 사치지.”
“이그나시오는 할 수 있습니다.”
뭘요? 유진은 묻는 대신 피에트로를 가만히 바라봤다. 허옇게 뜬 피에트로의 얼굴은 거의 기절하기 직전처럼 보였다. 유진은 피에트로와 남자를 번갈아 훑었다. 뭔진 몰라도 피에트로가 을, 남자가 갑이었다. 눈치 없이 말을 꺼냈다간 위험할 거라는 본능적인 수준의 감각이 유진의 입을 틀어막고 혀를 굳혔다. 남자는 얼굴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곁에 서 있던 여자가 한발 빨랐지만.
“마떼오, 시간이 없어. 판단은 우리 몫이 아니야.”
이름이 마떼오인가 보네. 그래도 제법 이름 같은 이름이었다. 남자는 여자의 말에 고개를 반쯤 돌렸다가 혀를 찼다. 하지만 군말 없이 지프에 올랐다. 그러자 기다리던 다른 일행들은 일사불란하게 갈라져 지프 두 대에 몸을 실었다. 여자와 마떼오란 남자가 가장 우두머리인 모양이었다.
“피에트로, 우린 당신 안목을 믿겠소. 하지만 선장님의 신뢰는 무조건적이지 않다는 사실만 일러두지.”
떠나기 직전 여자가 말했다. 얼음장 같은 목소리였다. 가엾은 말라깽이 피에트로는 그 말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라며 더듬더듬 대답하는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려서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지프 한 대가 먼저 떠났다. 다른 한 대는 느지막하게 출발했다. 유진이 발을 뗐다. 피에트로 옆에 서서 지프를 가만히 바라봤다. 시동이 걸린 지프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디로?”
“메노르에게.”
여자와 마떼오의 목소리가 지프 소음에 묻혔다. 익숙한 단어였다. 메노르. 유진은 순간 조금 전 우노를 떠올렸다.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저들이 말하는 메노르는 우노가 말했던 메노르와 같을까? 그럴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메노르가 특이한 단어도 아니고. 그냥 막내라는 스페인어일 뿐인데. 지프가 먼지 바람을 일으키며 떠났다. 유진은 피에트로 대신 교실 앞마당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지프 바퀴에 뭘 씌워놓은 건지 모르겠지만 뚜렷한 바퀴 자국이 잔디를 짓밟고 흙을 뒤집어엎으며 자상처럼 남았다.
어쩐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지프 두 대가 언덕 아래로 사라지고 나서야 다른 선생 하나가 고개를 내밀었다. A반 담당인 소피아였다. 소피아가 다가와 피에트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때까지 피에트로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소피아의 손길에 화들짝 놀란 피에트로는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유진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피에트로가 불안해하든 말든 까놓고 말해서 별 상관이 없었다. 어찌 되었든 자신이 어떤 상황에 휘말린 것 같고, 그 시발점이 바로 피에트로라는 사실만이 확실했다. 유진은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자신도 모르게 진행되는 일을 극도로 싫어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휘말리는 건 납치 한 번으로 충분했다.
“피에트로. 난 설명이 필요한데요.”
“이그나시오. 왜 이렇게 늦었지?”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저들은 총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리고 당신이 저들에게 나를 추천한 것 같은데.”
피에트로의 얼굴에 서서히 안색이 돌아왔다. 허옇게 질렸던 얼굴이 푸르스름하게 변하더니 이내 노랗게 떴다. 영락없이 토기를 참는 얼굴이었다. 유진은 눈을 찡그리며 물러났다. 피에트로는 말이 없었다. 입술을 꾹 문 채 땅만 내려다봤다. 유진은 소피아에게 눈을 돌렸다. 소피아 역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시선을 피했다.
적막이 감돌았다. 열린 문틈 사이로 아이들이 빼곡히 모여 있었다. 입을 꾹 다문 그들은 가만히 유진과 저들의 선생을 살폈다. 유진은 C반에서 최연장자였다. 열아홉이니 당연했다. 또래는 없었다. 모두에게 형이고 오빠였다. 선생을 빼면 최연장자라는 사실이 튀어나오려는 고함을 억눌렀다. 말간 눈을 보면 자연히 떠올랐다. 집에 있을 동생. 동생도 딱 저 또래였다.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윽박을 삼켰다. 대신 유진은 팔짱을 꼈다. 유진의 눈이 점점 가늘어지는데 피에트로가 고개를 치들었다.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마저 선명히 보였다. 웃음도 안 난다. 유진이 입을 여는 순간 피에트로가 힘차게 말했다.
“점심시간이다, 얘들아! 오늘의 점심은 무엇이죠, 소피아 선생님?”
전혀 안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밥을 먹었다. 맛이라곤 없었다. 채소는 썼고 얼마 있지도 않은 고기는 질겼다. 밥투정은 취미가 아니었으나 터지려는 불만을 씹어 삼키기엔 밥맛이 너무 별로였다. 유진은 꾸역꾸역 입속으로 음식을 밀어 넣으며 턱을 괬다. 소피아는 몇 분 전 돌아갔다. 어린아이들뿐인 A반을 너무 오래 비웠다며 언덕 아래로 사라졌다. 그리고 말라깽이 피에트로.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점심시간 동안 유진을 죽도록 피해 다니는 피에트로만 남았다.
어차피 하교할 때까지 얼굴 진득히 붙이고 있어야 할 텐데. 피할 바에는 속 시원하게 털어놓는 편이 나을 거란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유진이 알기론 피에트로는 스물둘인가 셋이었다. 비슷한 나이대의 우노를 떠올렸다. 둘이 합쳐서 평균을 내면 딱 좋을 것 같은데. 염세주의자에 거리낌이 없는 우노와 낯 가리고 문제를 회피하려 드는 피에트로. 시답잖은 생각이었다. 유진은 음식을 큼직하게 떠서 입에 집어넣었다. 맛은 여전히 없었다. 그래도 무언가를 씹는 행위가 머릿속을 환기해줘서 다행이었다.
유진은 시커먼 그들이 누구인지, 뭐 하는 작자들인지 관심을 갖고 싶지도 않았다. 총을 가지고 있으니 그냥 건달은 아닐 테고, 선장이라 했으니 뱃사람이겠거니 추측할 뿐이었다. 총 가진 뱃사람이라면 딱 한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았으나 그 가능성은 필사적으로 외면했다. 열여섯 나이에 돌연 납치당한 자신의 인생이 어디까지 극적으로 치달을지 시험하고픈 마음은 전혀 없었다. 눅눅한 매트리스와 곰팡내 나는 천 무더기를 떠올렸다. 유진은 애당초 자신이 이런 삶을 살리라고 상상도 못 했다. 사랑 듬뿍 주는 가족 틈에서 사랑 듬뿍 받고, 모자란 관심은 인파 틈에서 채우며 승승장구할 줄 알았지. 그 엇비슷한 인생을 십육 년 동안 살아왔으니 어쩌면 당연한 생각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모두의 관심을 등에 업은 셀럽 대신 유진은 웬 페루 바닷가 마을에서 웃기지도 않은 수업을 받았다. 그러다가 이젠 웬 해적들이 주목하기 시작했단다. 헛웃음도 안 나왔다. 이따위 플롯이면 막장 시트콤에서도 채택 안 해줄 텐데 제 인생은 그냥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유진이 숟가락을 내려놨다. 다소 큰 소리가 났다. 식탁에 둘러앉은 애들이 슬쩍 유진을 바라봤다. 반대편 식탁에 앉아 있던 피에트로가 몸을 흠칫 떨었다.
애매한 기 싸움은 하교 시간까지 이어졌다. 기 싸움이라기보단 피에트로가 유진을 기 쓰며 피하는 거에 가까웠지만. 유진은 그냥 느긋하게 기다렸다. 여유가 있다거나 태평한 건 아니었다. 그냥 언젠가 내뱉겠거니 하는 마음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자신에게 관심 보인 그 남자가 해적이라는 추측까지 도출해낸 지금, 제 인생이 어디까지 나락으로 처박힐지 제대로 감이 안 잡혔다. 팔자에도 없는 해적질을 하고 싶진 않았다. 유진은 이래 봬도 불법적인 일은 딱 질색이었다. 그런데 뭐, 해적들이 총 겨누면서 명령하면 그냥 까라는 대로 까야지 별수 있나. 불가항력의 일이었다. 그게 싫었다.
유진은 차분히 기다렸다. 마지막 학생이 돌아가고 난 빨간지붕 집에 들어앉아 가만히 손가락을 두드렸다. 오 분쯤 기다리자 피에트로가 터덜터덜 걸어왔다. 집에 가지 않은 유진을 발견하고 흠칫했으나 놀란 것 같진 않았다. 피에트로는 유진의 앞에 앉는 대신 그를 지나쳐 걸었다. 그리고 옷장을 열어 겉옷을 껴입었다.
“이제 슬슬 말해줄 때도 된 것 같은데요, 피에트로.”
“…….”
“내가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죠?”
옷매무시를 가다듬던 피에트로가 멈칫했다. 침묵은 얼마 가지 않았다. 단추를 전부 잠근 피에트로가 뒤를 돌며 입을 열었다.
“말이 좀 길어질 것 같은데.”
“내게 남는 건 시간이에요. 신이 묻는다면 내 시간 좀 가져가라고 부탁하겠어요.”
유진의 중얼거림에 피에트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침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라보 데 누베를 알고 있지?”
유진은 하루 동안 많은 가능성을 상상했다. 개중엔 유진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 차악, 최선, 차선 따위가 있었다. 하지만 단언컨대 피에트로가 내뱉은 저 한 마디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유진의 얼굴이 매섭게 굳었다. 피에트로는 유진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들이 내게 찾아왔어. 얼마 전 시가전이 있었는데, 그때 잃은 선원들의 수가 제법 된다고 말이야.”
“…….”
“그들은…… 내게 선원으로 쓸 법한 인재가 없냐고 물었지. 그래서 나는…….”
“나를 지목했고요. 좋아요. 잘 알겠어요.”
“이그나시오. 이건 기회야. 라보 데 누베는 제 선원들을 아끼기로 유명하잖니.”
“당신 말이 맞아요, 피에트로. 그들은 자신의 선원을 끔찍하게도 아끼죠. 대체 가능한 부속품이 아니라.”
유진이 딱 잘라 말했다. 피에트로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유진은 저 면상에 주먹이라도 내리꽂고 싶은 마음을 꾹 집어삼켰다. 멀대 같은 얼굴, 주근깨 콕콕 박힌 피부, 바보같이 감쳐 문 입. 무엇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라보 데 누베. 이름 모를 바닷가 마을 어디서든 바다를 보면 시꺼먼 점이 두 개 보였다. 그건 배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태풍이 치나 산바람이 부나 커다란 배 두 척은 항상 거기에 둥둥 떠다녔다. 마을 사람들은 항상 배를 봤다. 어디서든 보였다. 배를 잊지 않았다. 잊을 수 없었다. 수평선에 떠오른 배 두 척은 해적 라보 데 누베의 상징이었다. 무슨 일이 있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물살에 흔들리는, 악몽 같은 배 두 척.
라보 데 누베는 마을의 법이요 정의이자 두려움과 경배의 대상이었다. 그들의 선장 미친개 페로 로꼬의 존재를 마을 사람들은 단 한 번도 잊지 않았다. 잊어선 안 됐다. 그리고 그건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사정없이 떨리는 눈을 보자 부글부글 끓던 속이 훅 잦아들었다. 뒤늦게 피부에 달라붙는 질척한 습기가 거슬렸다. 화를 낼 힘도 없었다. 유진은 뺨을 벅벅 닦으며 물었다.
“그들이 당신에게 무얼 약속했죠?”
사실 대답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허울 좋게 계약이나 선원 따위의 말을 운운했겠으나 이건 단순한 거래였다. 유진을 라보 데 누베에 넘기면 라보 데 누베는 이름뿐인 학교를 지원할 것이다. 피에트로는 바로 며칠 전 분필마저 떨어져 간다고 유진에게 한탄했다. 이 마을에서 학교를 제대로 운영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도 어려웠다. 그래서 선생들은 그냥 쉬운 선택을 했다. 하늘의 별을 따지 않았다. 그들은 별을 통째로 팔아넘겼다.
빨간지붕 단칸집을 고집하는 이유도 그제야 알겠다. 유진은 조소를 참지 못하며 피에트로를 지그시 바라봤다.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손을 조급하게 쥐었다 펼치며 떨리는 입술을 마구잡이로 짓씹는다. 가장 우스운 점을 꼽으라면 유진은 아마도 피에트로의 떨리는 동공을 지적할 거였다. 저건 죄책감이 아니라 불안감이었다. 학생 팔아넘기는 일에 죄악감을 느끼기보다는, 그래, 어쩐지 유진이 도망치면 어쩌나 고민하는 듯한.
“한두 번이 아니네요.”
“뭐?”
“어쩐지. 정의감만으론 뭐든 제대로 될 리가 없지.”
그렇잖아도 새하얗던 피에트로의 얼굴이 더더욱 희게 질렸다. 유진은 그냥 코웃음 쳤다. 무상급식은 아마도 학생들을 모으기 위한 수단이었을 테고. 필기구들은 어느 정도의 간략한 투자였을 것이다. 하기야 그렇지. 제아무리 라보 데 누베라고 한들 중간다리 없이 사람을 어떻게 끌어들여? 맛대가리도 없는 무상급식에 정신 팔렸던 제 과거를 손가락질하며 유진은 입술을 지그시 삼켰다. 안쪽 여린 살이 완전히 헐 때까지 잘근잘근.
여기서 몇 명이 라보 데 누베에게 팔려나갔는지는 모른다. 적어도 유진이 처음은 아니라는 사실만이 확실했다. 피에트로는 무어라 말을 중얼거렸으나 유진에게 닿지 않았다. 유진은 헛숨을 삼키고 그냥 벽에 등을 기댔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탄탄대로인 줄 알았던 인생이었다. 정신 차리니 그냥 나선형으로 꼬불꼬불 꼬인 삶이었다. 아는 욕을 전부 짓씹으며 몸을 일으켰다.
“페로 로꼬에게 잘 보이면 돼.”
“미친개에게 사랑받는 게 빠를까요, 물어뜯기는 게 빠를까요? 오, 너무 어려운 고민이네요. 나는 고심 끝에 후자에 걸겠어요.”
“페로 로꼬는 너 같은 아이들을 좋아한댔어.”
유진은 그냥 대꾸를 관뒀다. 피에트로가 음울하게 중얼거리는 말엔 영양가가 하나도 없었다. 그냥 무한한 고리 같았다. 피에트로는 지껄였고 유진은 내버려 뒀다. 피에트로의 죄책감을 씻겨줄 마음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유진은 그냥 말없이 빨간지붕 집을 박차고 나왔다. 무슨 생각으로 어떻게 언덕을 내려갔는지 몰랐다. 가슴이 터질 듯 뜨거우면서도 머리는 얼음물에 담근 것처럼 차가웠다. 라보 데 누베는 선원을 구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구하려는 것은 선원이 아닌 대용품이었다. 잘 쳐봐야 일회용품이었다. 싸움이 일어나면 최전선에 서고, 죽으면 유감이고 안 죽으면 운 좋은 정도의 취급을 받는 총알받이. 그들은 선원 축에도 들지 못했다. 차라리 라보 데 누베가 유진을 진짜 선원 후보로 여기고 있다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유진의 발걸음이 거칠어졌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찢어진 발바닥이 욱신거렸다. 유진에게 살아있음을 잊지 말라는 것 같았다.
마을을 헤집고 다닐 마음조차 안 들었다. 유진은 반나절 전 자신이 아무 생각 없이 거닐었던 거리로 돌아왔다. 집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것들이 얼기설기 놓인 거리를 비집고 다녔다. 자신의 거처로 돌아갈 셈이었다. 유진은 그곳을 집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 낡아빠진 판잣집은 단 한 번도 유진에게 집인 적 없었다. 유진의 집은 바다 너머에 있었다. 갈 수 없는 곳을 꾸역꾸역 집이라고 불렀다. 그 사실이 오늘따라 뇌리에 박혔다.
모퉁이를 도는데 시퍼런 대문이 보였다. 우노의 집이었다. 유진은 대문을 가만히 노려보다가 훌쩍 담장 위로 올라갔다. 우노는 마당에 없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려서 집안에 기어들어 갔겠거니 싶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우노가 마당에 쓰러져 있다가 집안으로 기어갔든 땅으로 꺼졌든 하늘로 솟았든 유진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유진에게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우노. 나와봐요. 우리 잠깐 얘기 좀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적막한 집안에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유진은 얼기설기 쌓아 올린 담장 위에서 비틀비틀 균형을 잡아 앉았다. 목소리를 높였다. 우노! 나와보라니까요! 당돌한 목소리가 적막한 집을 왕왕 울렸다.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유진은 마침내 이 미친 여자가 뒤통수로 넘어져 코 박고 죽었나 의심하기 시작했다. 염세주의자 우노라면 이상할 일도 아닐 것 같았다.
그러나 인기척이 났다. 유진의 목소리가 점점 신경질적으로 변하자 누군가가 굳게 닫혔던 현관문 너머에서 기웃거린 것이다. 날카로운 유진의 눈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닦지 않은 건지 디자인인지 모를 불투명한 유리 너머 인영이 울렁였다. 망설이는 기색이 다분했다. 유진은 유리를 노려보다가 담장에서 뛰어내렸다. 허락받지 않은 행동이었으나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우노에게 물어야 할 것이 있었다.
“나 들어가요, 우노. 안에 있는 거 다 알아요.”
유진이 성큼성큼 마당을 갈랐다. 넓지도 않은 마당은 세 걸음이면 충분했다. 현관문 문고리를 꽉 쥐었다. 그리고 흠칫 놀랐다. 열기가 남아 있었다. 누군가가 조금 전 고리를 쥐었다는 뜻이었다. 설마 그 드문 손님이 하필 오늘 우노를 찾아왔다는 건가. 유진의 마음속에 자그마한 머뭇거림이 고개를 내밀었다. 망설임이라기보단 본능적인 경고에 가까웠다. 유진은 딱 삼 초 기다렸다. 순간적인 감정을 갈무리하기에 그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문고리를 돌렸다. 방해물 하나 없이 수월하게 열렸다. 문을 잠그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우노 같은 여자의 집에 무단 침입할 대담한 사람은 유진 말고 없었다. 유진은 천천히 머릿속에서 상념을 밀어 지웠다. 그리고 한 걸음 내디뎠다.
“우노. 물을 게 있어서 왔어요.”
집안은 고요했다. 잠시 보았던 인영이 거짓말이라는 것처럼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불이 꺼져 있었다. 누군가 끈 게 아니라 그냥 수명이 다해 꺼진 듯했다. 퀴퀴한 곰팡내와 알코올, 그리고 정체 모를 약초 냄새가 났다. 어딘가 음산하기까지 한 집안에 유진이 눈을 찌푸렸다. 그때였다.
“……이그나시오.”
마침내 찾던 사람이 나타났다. 우노였다. 우노는 벽에 기대어 비스듬히 선 채 유진을 가만히 응시했다. 온몸이 시꺼멨다. 어둠과 우노를 구별할 수가 없었다. 유진은 눈을 찡그리며 한 걸음 내디뎠다. 따지고 들 셈이었다. 왜 내게 학교에 가지 말라고 했어요? 왜 좋을 게 없다고 그랬어요? 당신은 뭘 알죠? 날카로운 질문들이 혀끝에서 쏘아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질문들이 입 밖으로 쏘아져 나가는 일은 없었다. 우노가 나직이 킬킬거린 것이다. 비상한 유진의 눈치는 무언가 심상찮음을 잡아챘다. 그건 웃음이라기보단 오히려 체념한 사람 특유의 한숨처럼 들렸다. 유진이 한 걸음 내디뎠다가 본능적으로 움찔했다. 지독한 술 냄새가 났다. 술이라기보단 그냥 날것의 알코올 향이었다. 유진은 할 말을 잃은 채 우노를 바라봤다. 우노는 웃음을 그치지 않은 채 더듬더듬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정말로 그럴 필요 없어. 내게 물으러 왔니? 내가 무얼 아느냐고?”
“우노. 당신…….”
“아무것도 몰라. 오, 세상에. 나는 아는 게 없어, 이그나시오. 아는 게 있었다면, 빌어먹을, [이 꼴이 되지 않았을 거야.]”
유진이 입을 다물었다. 우노의 입에서 낯선 언어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건 스페인어가 아니었다. 영어도 아니고. 하지만 유진은 그 언어를 알았다. 발음이 부정확하고 횡설수설하는 우노의 말을 곧이곧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유진은 확신했다. 우노는 한국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질문했다. 우노는 어떻게 한국어를 아는가. 페루 변방 바닷가 마을에서 제 삼의 언어로 배우기엔 부적합하지 않은가.
한참을 지껄이던 우노가 마침내 풀썩 주저앉았다. 벽에 기대어서도 연신 낄낄거렸다. 아예 정신을 놔버린 게 분명했다. 유진은 눈을 찌푸리다가 느리게 다가갔다. 미우나 고우나 우노와는 아는 사이였다. 눈앞에서 죽도록 내버려 두면 꿈자리가 사나울 게 분명했다. 유진은 우노가 대체 무슨 술을 처마셨길래 이렇게까지 술 냄새를 풍기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생수를 가져와 머리에 들이부을 작정이었다. 우노를 안전한, 이를테면 침대 같은 곳에 던져놓은 후에.
일어나라며 우노를 부축하려는 순간 억센 손아귀가 유진의 팔뚝을 쥐었다. 말라비틀어질 것처럼 생긴 주제에 악력이 상당했다. 유진은 찌릿한 통증에 반사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그때 고개를 처박고 웅얼거리던 우노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우노의 눈이 시퍼렇게 빛났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으로 번들거렸다. 유진이 본능처럼 뒤로 물러나려 하자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눈을 마주친 채로 우노가 말했다. 한국어였다.
“[도와줘.]”
“도와주려는 거라고요, 우노. 그러니까 이것 좀 놓고 말해요.”
“[내가 아니야. 막내를 도와줘.]”
“그게 무슨 헛소리,”
“[도망쳐.]”
“…….”
“메노르는 안 돼…….”
그리고 풀썩. 우노가 그대로 쓰러졌다. 마른 등이 불규칙적으로 오르내렸다. 유진은 그 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 변방의 마을엔 마땅한 의사도 한 명 없었다. 있는 거라곤 약초꾼 하나와 민간요법에 통달한 늘그막 노인네 하나였다. 둘 모두 쓸 만한 도움을 줄 것 같진 않았다. 생각이 바뀌었다. 이 음침한 집안에 냉수가 있을 리도 없었다. 발이 빠른 유진이 전속력으로 질주한다면 여기서 시장까지 오 분이 걸렸다. 시장에서 쓴맛 나는 약초를 이것저것 사 와서 먹일 셈이었다. 운동화 끈을 질끈 묶는데 우노가 중얼거리지만 않았다면.
“가.”
우노가 중얼거렸다. 얼굴을 바닥에 처박은 채로 힘없이 웅얼댔다. 유진은 그게 무슨 헛소리냐며 눈을 찡그리려다 말았다. 우노가 우울한 투로 덧붙인 것이다.
“곧 있으면 손님이 올 거야. 이그나시오, 그들 눈에 띄지 마.”
“당신이 손님 맞이할 여력은 되고요?”
“그들은 내가 목구멍에 술을 처박든 에탄올을 처박든 상관하지 않아. 일만 제대로 한다면 말이지. 그러니 괜찮아. 하지만 네 경우엔 좀 다르지 않니.”
“당신이 일도 해요? ……우노, 대체 뭐 하는 사람이에요?”
기가 찬 유진이 몸을 폈다. 우노는 한참 말이 없었다. 대답하지 않을 셈인가 싶어 유진이 등을 돌렸다. 본인이 괜찮다는데 구태여 나서서 오지랖 부릴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지쳤다. 오늘 하루 이상한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났다. 유진은 지금이라면 빌어먹게 딱딱하고 스프링 나간 그 매트리스도 구름 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천 무더기에서 나는 곰팡내가 어떨지는 잘 모르겠지만.
현관문 문고리를 쥐는데 문득 뒤에서 우노의 목소리가 들렸다.
“물기둥이……. 빙글빙글 도는 물기둥이 있어. 이그나시오, 너는 불꽃이니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
“물기둥은 안 돼. 바다는 안 돼. 그건 그냥 안 되는 거야.”
유진은 그냥 문을 닫았다.

학교에 가지 않았다. 나흘째였다.
그 난리를 겪고도 학교에 가고픈 마음이 드는 게 이상했다. 피에트로에 대한 일말의 존경심은 그가 유진을 라보 데 누베에게 팔아넘긴 후 밑동까지 긁어 사라졌다. 어차피 이름뿐인 학교였다. 가봤자 유진이 전부 아는 것만 배웠다. 꾸역꾸역 갔던 과거가 바보 같아졌다. 유진은 나흘 동안 거처 안에 처박혀 있었다. 한 걸음도 나서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있다가 가끔 바다를 봤다. 폐인도 이런 폐인이 없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헛웃음이 났다. 삼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유진은 방보단 집이, 집보단 밖이 더 좋은 사람이었다.
우노가 어떻게 됐는진 몰랐다. 근황을 알아보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단지 파란 대문집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앉은 것 같지는 않으니 그냥 살아있겠거니 싶었다. 유진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몇 번 확인하고픈 마음이 솟기는 했으나 거처 밖으로 나가고 싶지가 않아서 관뒀다.
유진은 매트리스 위에 늘어져서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창밖에선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온종일 꾸역꾸역 하늘을 채우던 먹구름은 마침내 모든 울음을 토해냈다. 어저께부터 내리기 시작하더니 오늘까지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질질 짜댔다. 덕분에 지대가 낮은 집들이 침몰하고 난리가 났을 것이다. 실제로 큰일이 났는지는 잘 모르겠다. 유진의 거처는 지대가 높은 곳에 있었으므로 휩쓸릴 걱정은 덜했다. 폭풍만 오지 않는다면.
거기까지 생각하고 유진은 턱을 괴며 생각해봤다. 자, 이제 무얼 할 것인가. 이 망망대해에 덩그러니 놓인 기분은 뭘 어떻게 해야 사라질까. 마을 밖으로 도망친다는 발상은 불가능했다. 라보 데 누베와 엮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걸어서 나가다간 뒷덜미 잡힐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탈것을 빌리자니 빌려줄 사람이 있을까 싶고.
어떻게 봐도 타이밍이 안 좋았다. 라보 데 누베에 추천된 직후 탈출을 감행한다는 그림은 그들을 향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컸다. 그럼 그냥 곧이곧대로 라보 데 누베에서 총알받이 노릇을 하는 건? 상상만 해도 미친 생각이었다. 유진은 삶이 지겨웠으나 그렇다고 죽고 싶어 고사 지낸다는 뜻은 아니었다.
생각이 유려하게 이어지지 않고 자꾸만 뚝뚝 끊겼다. 귓가를 때리는 빗소리마저 유진을 방해하려고 작정한 것 같았다. 습기는 이제 피부에 맺혀 둥글게 떨어질 지경이 됐다. 신경은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졌다. 비타민 디가 부족했다. 그 누가 지금의 유진을 보고 확신의 프롬킹 불굴의 쿼터백 유진 이그나시오 차를 떠올릴까. 방에 처박혀서 자조적인 생각만 하는 녀석들을 전부 머저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역시 사람은 당사자가 되지 않으면 상대를 이해하기 어려운 법이었다. 유진은 제 이름 앞에 머저리라는 딱지를 새로 붙이며 멍하니 드러누워 있었다. 비가 멎을 때까지 나가지 않을 셈이었다.
하지만 유진 이그나시오 차, 열여섯 여름에 돌연 페루에 떨어진 이후로 인생이 마음대로 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그 공식을 증명이라도 하듯 삼십 분 뒤 유진은 쏟아지는 폭우에 우산 하나 없이 질주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배가 고픈데 먹을 게 없었다.
망할 허기 같으니라고! 하늘이 쏟아내는 날카로운 눈물은 살갗을 베어낼 것처럼 아팠다. 먹을 게 뚝 떨어지자 주린 배는 인내심이란 걸 몰랐다. 신이란 작자는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존재하는 게 틀림없었다. 유진은 험한 말을 잔뜩 씹어내면서 쏟아지는 빗줄기를 갈랐다. 폭우로 인해 시장은 문을 닫았을 거였다. 하지만 잘만 찾아보면 골목길 으슥한 곳에서 먹을 것 한둘쯤은 구할 수 있었다. 건강하진 않지만 배 채우기엔 적합한 것들. 유진이 노리는 건 그런 것들이었다.
그래서 마침내 시장이 열리는 작은 광장에 다다랐을 때, 유진은 망설임 없이 광장에서 뻗어나는 작은 샛길들로 발을 옮겼다. 이젠 뛰지도 않았다. 뛰어봤자 그냥 배만 더 고팠다. 젖든 말든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눅눅한 습기와 찐득한 온도가 불쾌지수를 설설 높이다가 이내 한계치를 돌파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는 뜻이었다. 유진은 샛길과 샛길을 오가며 기웃거렸다. 오늘따라 유난히 사람이 없었다. 굶주린 배는 먹을 것 달라고 아우성쳤다. 빗물이라도 받아먹으면 배가 부르려나 싶었다.
그러나 십 분 후. 유진은 마침내 포기했다. 사람이 없었다. 어떻게 된 모양인지 마을 사람들은 눈 씻고 봐도 없었다. 길가가 집이요 거처라고 주장하던 노숙자들마저 없었다. 그냥 사람들이 전부 증발한 것 같았다. 유진은 사람 찾기를 포기하곤 그냥 벽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폭우가 무거웠다. 머리에 고인 빗물 때문인지 자꾸만 고개가 내려갔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람. 이대로 빗물에 씻겨 사라지고 싶었다. 목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괜찮으십니까?]”
이상할 정도로 딱딱하고 어색한 어투였다. 번역기에 돌린 말을 더듬더듬 발음하는 것 같았다. 유진은 대꾸할 힘도 없어 그냥 힐끔 눈만 들어 올렸다. 그때 머리 위로 새까만 그림자가 졌다. 동시에 온몸을 사정없이 때리던 날카로운 눈물이 그쳤다. 상황 파악이 조금 늦었다. 그러니까, 제 눈앞에 선 누군가가 우산을 씌워주었다는 사실이 한발 늦게 머릿속에 박혀 들었다.
마침내 사람이었다. 유진은 거의 버릇처럼 입꼬리를 끌어올리려다 말았다. 짙게 그림자가 진 상대는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냥 목소리로 남자구나 싶었다. 유진은 천천히 대답을 궁리하다가 그냥 뱉었다.
“[음, 뭐. 보시는 대로?]”
꼬르륵. 타이밍이 좋은지 나쁜지도 모르겠다. 뱃고동이 울렸다. 쪽팔릴 여유도 체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유진이 멍하니 남자만 올려다보고 있는데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잠깐 말이 없었다. 이내 남자가 무릎을 굽혔다. 잘 차려입은 정장은 비싼 태가 났다. 무릎이 흙탕물에 젖어 들자 남자는 눈을 찡그렸다. 그제야 얼굴이 보였다. 유진은 머릿속에서 인상을 수정했다. 남자가 아니었다. 제 또래였다. 새까만 머리칼, 묘한 빛이 도는 눈은 매섭고 입은 꾹 다물었다. 사납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기다리십시오.]”
아, 또. 번역기 같은 말이었다. 유진은 엉겁결에 남자애가 건넨 물건을 받아들였다. 조금 전 씌워주었던 우산이었다. 이걸 왜 자기한테 주냐며 대꾸할 새도 없었다. 남자애는 유진이 우산을 건네받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냅다 폭우 속을 뚫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질 좋은 정장이 사정없이 젖어 드는 모습을 끝으로 남자애는 빗물 틈바구니에 녹아 사라졌다.
……뭐지? 유진은 우산만 든 채 덩그러니 남아 생각했다. 더듬더듬 내뱉은 스페인어는 명백한 기다림을 의미했다. 그런데 기다려서 뭐. 저 남자애가 뭐 하는 앤지도 모르는데. 마냥 기다리는 게 좋다고 할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유진은 피곤했다. 찬 빗물을 한참이나 맞고 있으니 머리가 무겁고 잘 돌아가질 않았다. 어쩐지 열이 오를 것 같은 불안한 감각만이 생생했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유진은 그냥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기다려야지 뭐. 어차피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 게 인생이라면 느긋하게라도 살아야지 어쩌겠어.
몇 분 지나지 않아 유진은 찰박찰박 구둣발 소리를 들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빗줄기 속을 노려보자 저 멀리서 몸을 옹송그린 남자애가 뛰어왔다. 순식간에 다가온 남자애는 허겁지겁 유진이 덮어쓴 우산 속으로 몸을 비집고 들어왔다. 졸지에 딱 붙었다. 그새 쫄딱 젖은 정장이 유진의 옷과 붙었다. 유진이 눈썹을 슬쩍 들었다. 남자애는 머리를 조심스럽게 털더니 이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비닐로 꽁꽁 싸맨 물체였다.
“[드십시오.]”
유진은 비닐로 싸인 그것을 받아들었다. 조심스럽게 비닐을 벗겨내자 먹음직스러운 빵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났다. 순간 피로고 뭐고 어이가 없었다. 유진은 남자애를 돌아봤다. 남자애는 허공을 사납게 노려보며 옷에서 물기를 짜고 있었다.
“[이거 나 주려고 갖고 왔어요?]”
유진이 말을 걸자 남자애는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 참. 따끈따끈한 빵을 어디서 구해왔는진 모르겠으나 생전 처음 보는 사람한테 베풀기엔 과도한 친절이었다. 유진은 빵을 만지작거렸다. 여기에 이상한 게 들어 있을 확률은?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으나 먹을 것을 눈앞에 둔 배는 마냥 그렇지도 않았다.
유진이 곧장 입에 넣지 않고 머뭇거리자 사내애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사납게 떴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는 유진과 빵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눈을 두 번 깜빡였다. 그리곤 아, 하는 것이다. 무언가 깨달은 사람처럼. 유진은 이번에도 남자애가 편한 대로 행동하게 놔뒀다. 그러자 그 애는 손을 뻗어 빵의 중심부를 뚝 뗐다. 그리곤 입안에 집어넣었다.
“[아무것도 안 들었습니다.]”
우물대며 뱉은 말에 유진은 그냥 웃고 말았다.
빵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학교의 맛없는 밥이나 밀어 넣던 유진에겐 달가울 정도로. 유진은 빵을 순식간에 삼키곤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가 그칠 기미를 안 보였다. 빵 하나는 유진의 배를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도 맛있는 걸 먹은 건 간만이니 외출은 성공한 셈 칠까. 속으로 멍하니 중얼거리는데 문득 누군가가 재채기를 했다. 남자애였다.
쫄딱 젖어서 몸을 웅크린 꼴이 영락없이 물에 젖은 생쥐였다. 물론 인상만 보면 생쥐가 뭐냐 성질 더러운 맹수지 싶지만. 배를 채우자 유진의 머리가 슬슬 돌아가기 시작했다. 유진은 오늘 웬 선의를 받았다. 갓 구운 빵은 빗속을 뚫고 가져오기엔 적합하지 않은 물건이었다. 이곳에서 선의는 보통 대가를 함께 가져왔다. 저 남자애가 무슨 생각으로 우산을 쥐여주고 빵을 가져왔는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유진은 빵과 우산의 대가로 장기를 뜯기고 싶진 않았고……. 그러려면 확실히 입 막아놓는 게 낫지. 게다가 젖은 꼴을 봐서 일대일로 붙었을 때 질 자신은 별로 들지 않았다.
그래서 마침내 유진은 결심했다. 몸을 웅크리고 넋 놓은 남자애 어깨를 툭툭 두드린 것이다.
“[이봐요.]”
“[예?]”
“[빵 고마워요. 보답을 해주고 싶은데. 혹시 옷 마를 때까지 내 거처에 가 있을래요?]”
“[어…….]”
“[물론 비가 쉽게 그칠 것 같진 않지만, 젖은 옷으로 자꾸 돌아다니면 감기 드니까요. 아, 싫으면 말아요.]”
남자애가 눈을 끔뻑였다. 어쩐지 반응이 한 박자씩 느렸다. 날카로운 인상과는 또 달랐다. 한참 끝에 남자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와우. 진짜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말이었다.
유진은 힘차게 몸을 일으켰다. 뒤집어썼던 우산이 흔들리며 고였던 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이크. 질색하며 물러난 유진이 몸을 가볍게 풀기 시작했다. 몸을 쭉쭉 늘리는데 뒤에서 어리둥절한 물음이 날아왔다. 뭐 하십니까? 힐끔 곁눈질해봤다. 남자애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깜빡이고 있었다. 사나운 눈매는 아무리 동그랗게 떠봤자 험악했다. 그래도 넋 나간 듯한 표정이 어쩐지 조금 바보 같아서 유진은 킥킥 웃었다.
“[거처로 가야죠.]”
“[어……. 그런데 몸은 왜 푸십니까?]”
“[내 거처는 걸어서 십 분 거리에 있고, 비는 한 서린 것처럼 쏟아지니까요. 우산 하나를 온전히 나눠 쓰기에 당신이나 나나 덩치가 좀 있잖아요?]”
사실 우산을 나눠 쓰려면 필연적으로 딱 달라붙어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은 거지만. 남자애는 유진의 말에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진중한 목소리는 거침없이 다음 질문을 뱉어냈다. 그런데 그게 몸을 푸는 것과 무슨 상관관계가 있습니까?
“[진짜 모르겠어요?]”
“[죄송합니다.]”
“[맙소사. 설렁설렁 걸어가면 쫄딱 젖을 텐데, 그럼 뛰는 것 말곤 방법이 없잖아요!]”
능청스러운 유진의 말에 남자애가 눈을 홉떴다. 아까도 동그랬는데 지금은 무슨 튀어나올 것 같다. 유진은 웃음을 참지 않았다. 잔뜩 키득거리며 버벅거리는 남자애의 팔을 콱 쥐었다. 쥔 옷자락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기 때문에 유진의 손바닥 역시 어김없이 끈적해진다. 그러나 어쩐지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듯해서. 한 손에 잡히는 손목은 이상하리만치 차가웠다.
“[뛰어요!]”
“어, 잠, 잠시만!”
유진이 힘껏 손목을 당겼다. 남자애는 저항 없이 끌려왔다. 우산이 비틀거리더니 뒤로 쏠리며 따가운 빗줄기가 온몸을 세차게 적셔온다. 뒤에서 들리는 괴성을 가볍게 무시한 채 유진은 달리기 시작했다. 욱신거리는 발 덕분에 절뚝절뚝 꼴사나웠으나 기분만큼은 최고였다.
유진과 이름 모를 남자애는 그렇게 폭우를 뚫고 뛰었다. 우산 하나는 건장한 남자애 둘을 보호하기엔 턱도 없었다. 중간에 우산은 두 번 뒤집혔다. 우산을 들고 있던 남자애는 우산이 뒤집히자마자 휘청이며 넘어갈 뻔했다. 유진이 그걸 잡고 다시 달렸다. 빗길이 유달리 미끄러웠다. 바람이 불 때마다 휘청거리는 남자애와 제 모습을 볼 때마다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마침내 폭우와의 승부에서 도망친 유진은 거처 안에 들어서자마자 문을 세게 닫았다. 옆에선 완전히 쫄딱 젖은 남자애가 허리를 짚고 숨을 고르는 중이었다. 온몸을 사납게 때리던 빗줄기가 사라지자 찝찝함은 배가 됐다. 유진은 겉옷을 훌렁훌렁 벗었다. 옷은 한동안 안 마를 거였다. 숨 고르던 남자애가 입을 연 건 그때였다.
“[그렇게, 뛰실 거라면……. 미리 말씀해주십시오.]”
“[오, 힘들었어요? 미안해요.]”
“[아닙니다…….]”
옆구리를 부여잡은 남자애가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핏, 하는 맥없는 소리와 함께 어둡던 내부에 불이 들어왔다. 눈썰미는 좋은가 보네. 유진은 벅찬 숨을 고르려 애쓰느라 일그러진 얼굴에 키득거렸다. 그러며 능숙하게 히터를 켠다. 유진보다도 나이 먹은 어르신이었지만 그럭저럭 성능은 좋았다.
“[히터 이쪽이에요. 여기에 옷 올려놔요.]”
“[실례하겠습니다.]”
몹시도 격식 있는 스페인어로 남자애는 겉옷과 양말 따위를 벗어서 조심스럽게 히터에 걸었다. 유진도 옷가지들을 널고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남자애는 자연스럽게 그 곁자리에 앉았다. 멍하니 일렁이는 주홍빛을 바라봤다. 남자애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유진은 남자애의 옆모습을 힐끔거리다가 눈만 데굴 굴렸다. 이름이라도 물어봐야 하나. 삼 년간의 경험으로 다소 냉소적이었던 사교성 세포가 뒤늦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혹시 이름, 알려줄 수 있어요?]”
“[아. 음. 죄송합니다. 어렵습니다.]”
“[어려워? 뭐가요? 말해주기가?]”
남자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눈이 다시 가늘어졌다. 뭔가를 고민하는 듯했다. 그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스페인어가 아닙니다.]”
“[나 영어 할 줄 알아요.]”
“[영어 아닙니다.]”
“[아하.]”
하긴. 밝은 데서 본 남자애는 동양인의 특징을 고스란히 갖고 있었다. 유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흔쾌히 말했다.
“혹시 한국어?”
그러자 남자애가 순식간에 고개를 돌렸다. 휘둥그레진 눈이 놀라움을 그대로 드러냈다. 진짜 꾸밈없는 애네. 아니면 이것마저 꾸며낸 반응이거나. 유진은 킥킥 웃었다. 조금 전 들었던 말이 익숙해서 일단 내뱉고 봤는데. 나름 도박이었으나 결과를 보니 성공인 듯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까 외쳤어요. 그쪽이. 잠, 음, 잠시만? 그렇게 말한 것 같아서.”
“제가 그랬군요…….”
그러며 남자애가 머쓱하게 뺨을 긁적였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갔다. 볼에 점이 하나 찍혀 있었다. 사나운 인생에 어울리지 않았다. 흠. 아무리 뜯어 살펴도 기껏해야 제 또래였다. 그런 주제에 저 비싼 정장은 뭐람. 뭐 잘못 걸린 건 아니겠지 싶어 고민하는데 남자애가 말했다. 조금 전보다 한층 밝은 투였다.
“김래빈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제 유진 차례였다. 곧장 인사하는 대신 유진은 고민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유진을 이그나시오로 알았다. 페루 사람들이 발음할 만한 이름 어절은 스페인어인 이그나시오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냥 유진이라는 이름을 쓰기 싫었는지도 몰랐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간에 삼 년 동안 유진 이그나시오 차는 그냥 이그나시오였다. 유진은 남자애를, 그러니까, 래빈을 가만히 바라봤다. 한국말이 가능하고 스페인어가 어색한 래빈.
그리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난 유진이에요. 차유진!”

눈을 떴다. 뻐근한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온몸이 쑤셨다. 오랜만에 느끼는 근육통이었다. 유진은 늘어지게 하품하며 기지개를 켜다가 주위를 둘러봤다. 텅 비어 있었다. 히터 위엔 아무것도 걸쳐져 있지 않았다. 고개를 내리자 멀지 않은 곳에 말리던 겉옷과 양말 따위가 단정하게 개어져 있었다. 눈을 깜빡였다. 현실감은 뒤늦게 돌아왔다.
래빈이 없었다.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이다가 문득 돌아본 창문 너머 하늘이 개어 있었다. 먹먹한 비를 쏟아낸 게 언제냐는 듯 말끔하고 청명한 하늘이었다. 유진은 끙차, 하는 앓는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발을 딛고 서는데 문득 이질감이 느껴졌다. 고개를 내리니 두 발에 단정히 붕대가 묶여 있었다.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겠고 이 붕대가 언제 감겼는지도 모르겠다. 유진은 뒤통수만 긁적이다가 조심스럽게 한 걸음을 내디뎌봤다. 통증이 확실히 덜했다.
비가 갠 마을은 옅은 물기가 남아 있었다. 창문 너머 물 냄새가 타고 들어왔다. 유진은 문틀에 기대어 섰다. 바람이 선선했다. 여전히 습기 어렸으나 비가 내리기 전보단 나았다. 볕에 바싹 마른 수준은 아니더라도 피부에 고일 것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유진은 제법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붕대를 두른 발은 바닥에 툭툭 두드리며 일정한 리듬을 만들었다.
고개를 돌리는데 문득 바닥에 낯선 종이가 보였다. 척 봐도 비싼 태가 나는 고급 종이였다. 다른 말로 유진의 헐거운 거처에 나돌아다닐 물건이 아니란 뜻이었다. 유진은 그것을 이리저리 돌려봤다. 깔끔한 글씨체가 적혀 있었다. 잠드셔서 깨우지 않고 갑니다. 감사했습니다. 추신. 발을 다치셨기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둘렀습니다. 여분의 붕대를 두고 가니 틈틈이 갈아주시기 바랍니다. 김래빈. 래빈이 남긴 메모였다. 유진은 종이를 가만히 만지작거리다가 유일한 서랍 안에 넣었다. 여분의 붕대를 놓고 갔다는데 그게 어디에 있는지는 몰랐다. 몸을 일으켰다. 비가 그치자 조금쯤 움직일 힘이 났다. 미루던 일을 처리할 셈이었다.
바싹 마른 옷을 껴입었다. 두껍게 발린 붕대 덕분에 양말 신기가 그렇게 어려웠지만 그냥 그러려니 했다. 오래간만에 받은 선의였다. 래빈과 다시 만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으니 단순한 호의라고 생각해도 될 거였다. 유진은 두꺼워진 발을 신발에 밀어 넣었다. 문을 열고 나섰다. 목적지는 우노의 집이었다.
우노의 집은 며칠 전과 다를 바 없었다. 고개를 빼꼼 내밀어 보니 마당에 발자국이 부산스럽게 찍혀 있었다. 비가 그친 후 누군가가 마당에 나왔다는 뜻이었다. 유진은 목소리를 높여 우노를 불러봤다. 우노! 나예요. 안에 있어요? 현관 안은 잠잠했다. 이번에도 반응하지 않나 싶은데 문이 빼꼼 열렸다. 틈바구니로 우노가 고개를 내밀었다. 답지 않게 머리를 깔끔히 정리한 채였다.
“이그나시오? 여기서 뭘 해?”
“당신이 죽었나 살았나 확인하러 왔어요. 멀쩡히 살아있네요.”
“그래서 유감이니?”
“그런 말은 추호도 꺼낸 적 없어요. 나 잠깐 들어가도 돼요? 물을 게 있는데.”
우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나 몸은 착실히 걸어왔다. 우노는 조심스럽게 대문을 열고 유진을 안에 들였다. 유진은 현관을 넘어 집안으로 들어섰다. 며칠 전과는 달리 깔끔해진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형광등을 새로 싹 갈았는지 내부가 훤했다. 혹시 폭우가 당신의 염세주의마저 쓸고 갔나요? 가볍게 농담을 건네자 우노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내 염세주의와 함께 네 우울도 같이 쓸고 간 모양이지, 이그나시오.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유진은 그냥 어깨를 으쓱였다.
“물을 게 뭐니?”
유진을 거실 소파에 앉히고 차를 대접한 우노가 침착하게 물었다. 유진은 음, 하고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깔끔한 탁상 위에 놓인 찻잔 두 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잔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렸다. 우노가 멀쩡히 살아있다는 사실은 이상한 안도감을 줬다. 그러나 안도감과 추궁은 별개였다. 유진은 여전히 우노의 태도가 영 이상했음을 알았다. 마치 유진에게 경고한 듯한 의미심장한 말도 기억했다. 유진은 머그잔을 기울였다. 입술에 뜨끈한 찻물이 닿았다.
그래도 오랜만에 만나는 거니까 분위기부터 풀까. 마침 적절한 대화 소재도 있었다. 유진은 찻잔을 내려놓고 태연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저건 뭐예요?”
“저거?”
탁상 위에 놓인 작은 나무 상자였다. 겉이 멀끔했고 먼지 하나 쌓이지 않았다. 기름 먹인 나무로 만들었는지 밝은 형광등 아래서 거의 보석처럼 반짝였다. 아무리 봐도 당신 집에 있을 법한 물건은 아닌 것 같아서요. 우스갯소리처럼 말하자 우노 역시 잔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한껏 여유가 돌아온 사람 특유의 부드러운 웃음이었다.
“선물이야.”
“누구요?”
“그건 비밀. 내 거기는 하지만 내가 쓰지는 않고. 나는 그냥 보관만 해주거든.”
“아하. 그래도 그냥 보관만 해준다기엔 너무 열심히 관리한 것 같은데요.”
우노는 그냥 어깨만 으쓱였다. 한결 편안한 분위기였다. 유진은 뜨끈한 찻잔을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잔을 기울였다. 입안에 적당히 달고 적당히 씁쓸한 찻물이 쏟아진다. 그것들을 꿀떡 삼켰다. 부드럽게 목을 넘어가고 뱃속까지 따뜻하게 해주는 것.
“며칠 전에, 비가 오기 전에 말이에요, 우노. 내가 지각하던 날에 당신이 나를 불렀잖아요. 기억해요?”
우노는 눈을 가늘게 떴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은 우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때 가지 말라던 말, 무슨 뜻이었어요?”
우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눈을 느리게 내리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했다. 유진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다소 흐트러졌던 우노의 표정에 다시금 무감함이 떠올랐다. 심드렁한 목소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렸다. 관심 없는 무생물에 말을 거는 듯 평온하면서도 무심한 목소리였다.
“말 그대로야. 가지 말라고. 너한테 좋을 것 하나 없으니까 한 말이지.”
“어떻게 알았어요? 내게 좋을 것 하나 없으리란 사실.”
“뻔하지 않니? 너는 명석한 아이야. 이딴 촌구석 학교에서 네가 배울 게 뭐가 있다고.”
“그것만이 아닐 텐데요.”
“과연 아닐까?”
유진이 눈을 찡그렸다. 우노는 웃지도 않은 채 멀거니 머그잔을 내려다봤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있는 표정이었다. 유진은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이럴 때는 마냥 재촉하지 않는 게 나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레카. 우노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지금 너한테 얘기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서 유감이야, 이그나시오. 하지만 네가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네가 궁금해할 것을 뭐든 알려줄게.”
“부탁이라면요?”
“도망쳐줘.”
우노가 담담히 중얼거렸다. 유진은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가 억지로 닫았다. 끼어들 틈이 아니었다. 우노의 눈은 진중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건 유진이 이제껏 본 우노의 눈빛 중 가장 제정신에 가까웠다. 도망치라는 말도 아니고 도망쳐달라니. 묘한 어감이었다.
“너는 라보 데 누베에게 팔려가기 싫겠지. 네 능력을 높이 산 페로 로꼬가 너를 정식 선원으로 채택할지도 모르지만, 글쎄, 그 전에 죽을 확률이 더 높으니까 말이야.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별로 추천해주고 싶지도 않고.”
역시 우노는 알았다. 빨간지붕 단칸집에서 일어났던 일. 유진의 시선이 점점 묘해지는데 우노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나한테도 그런 애가 있어.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는 애 말이야. 그 애는 바보 같을 정도로 순박해서 이런 곳에 어울리지 않아. 그 애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지만 나는 못 해. 우물 안에서 태어난 개구리가 어떻게 우물 밖을 알려주겠니.”
“…….”
“그런데 넌 달라. 비유하자면 너는 우물 밖에서 안으로 떨어진 개구리야. 너는 바깥세상을 알아. 그러니 너는 그 애에게 세계를 보여줄 수 있어.”
“우노.”
“부탁이야, 이그나시오. 그 애를 데리고 도망쳐줘.”
유진은 눈을 감았다. 한숨을 쉬었다. 우노가 방금 내뱉은 말은 기쁠 정도로 달가웠다. 이 지긋지긋한 마을에서 도망쳐달라니. 유진은 지금껏 몇 번이고 도망치고자 했다. 단지 번번이 실패했을 뿐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는 유진의 발목을 잡아끌어 그를 이 조그마한 바닷가 마을에 처박아 놓았다. 그런데 조력자가 나타난 것이다. 조건이 붙기는 했으나 그 정도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도 마냥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이유는, 그래. 아마 상대가 우노라서. 라보 데 누베와 관련이 있는 게 분명해진 우노라서.
유진이 대답하지 않자 우노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건 분노라기보단 슬픔에 가까웠다. 역시 안 되는 거니, 하고 가만히 되묻는 목소리가 축 처졌다. 유진은 눈을 찡그리다가 가만히 물었다.
“그 애라면, 당신이 말했던 메노르 말이에요?”
우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은 팔짱을 끼고 가만히 생각해봤다. 메노르. 막내. 정체 모를 그 녀석은 라보 데 누베의 정식 선원일 가능성이 컸다. 선원인 그 녀석이 페로 로꼬의 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유. 우노가 그를 페로 로꼬의 품에서 빼앗고자 하는 이유. 유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당신은 왜 그렇게 메노르를 아끼죠? 단순한 막내 아닌가요?”
“막내지. 그냥 막내야. 그 애는 여섯 살부터 라보 데 누베의 선원이었어. 내가 키운 거나 다름없지. 총 쏘는 법을 가르치고 단검 쓰는 법을 알려줬어. 선원으로서 가져야 할 교양, 몸짓, 관념, 하나하나까지 전부.”
그 말인즉슨 우노는 남에게 가르칠 만큼 저것들에 통달했다는 뜻이었다. 유진은 지독한 염세주의에 빠져 콱 혀 깨물고 죽고 싶어 하던 우노에게서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곤 눈썹을 슬쩍 올렸다. 총 쏘고 단검 쓰고. 선원으로서 가져야 할 교양과 몸짓과 관념은 타의 모범이 될 만하고. 삼 년 동안 관심도 없었던 우노의 정체에 서서히 윤곽이 잡혔다. 은퇴한 해적, 뭐 그런 비슷한 거겠지.
우노는 유진의 머리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도 모른 채 가만히 말했다. 목소리는 덤덤했고 조금 피곤한 것처럼도 들렸다. 눈그늘이 시꺼멓게 앉은 눈가 덕분에 더더욱 그랬는지도 몰랐다.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깨달았어. 그 애는 여기에 어울리지 않아. 그 애는, 뭐랄까. 총기 조립하는 법을 알려주겠답시고 전부 해체한 총을 바라보더니, 그걸 두드리면서 노래를 만드는 애야. 해적에게 신명 나는 노래는 필수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버텨 왔는데.”
“…….”
“어울리지 않아. 소금물에서는 살 수 없는 애야. 말라비틀어지고 말 거야. 나는 그런 꼴은 두 눈 뜨고 못 봐.”
잠잠한 목소리였다. 고민은 짧았다. 우노의 말에 의하면 그 메노르라는 작자는 해적질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해적질에 어울리지 않는다면 적어도 모범적인 사람이라는 뜻 아닐까. 유진은 사람을 가리며 사귀는 편은 아니었다. 그냥 마음에 드는 사람만 선 안에 들일 뿐 타인은 두루두루 사귀었다. 그러니 딱 그 정도 선만 지키며 함께 도망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지도 몰랐다.
“네가 도와준다고 한다면, 나는 네가 라보 데 누베에 팔려가지 않도록 도와줄게. 도망에 필요한 모든 건 내가 준비할 거야.”
우노가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유진으로선 손해 볼 게 없는 제안이었다. 유진이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자니 우노가 입을 다물었다. 이젠 유진 차례였다. 대답을 내놓을 시간이었다.
“얼마나 걸리죠?”
“길어야 반년이야. 라보 데 누베의 감시망이 서슬 퍼렇긴 하지만 오래 준비해온 게 있으니까.”
“어떻게 도울 셈이에요?”
“잘 아는 브로커가 있어. 부르는 것만 가져다 바치면 뭐든 해줘. 솜씨가 아주 좋아. 그에게 부탁할 거야.”
“배? 자동차? 트럭?”
“아마도 배일 거야. 설마 뱃멀미한다고 투정 부릴 셈은 아니지?”
우노의 장난스러운 타박에 유진이 콧방귀를 꼈다. 진심이냐는 되물음은 필요하지도 않았다. 유진이 마침내 팔짱을 풀고 머그잔을 들어 올릴 무렵 우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맞닿지 않는 시선이 마치 묻는 것 같았다. 그래서 대답은?
사실상 정해진 거나 다름없지. 유진은 비운 머그잔을 내려놓고 느리게 입을 열었다.
“조건이 있어요.”
“무슨 조건?”
“만에 하나 당신 계획이 페로 로꼬에게 들킨다면, 그래서 꼬리 자르기에 당하게 된다면…….”
유진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치밀하게 계획된 침묵이었다. 말을 잇는 도중 입을 다물면 간 작은 이들은 지레 겁먹곤 했다. 우노가 겁을 먹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느리고 끈질긴 침묵으로써 알리는 것이다. 이건 순수한 진심이라고.
“그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예요.”
이기적인 말이었다. 조건을 발음하면서도 유진은 자신이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페로 로꼬에게 계획을 들키면 관련자들은 줄줄이 색출될 것이다. 개중 유진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이렇듯 말을 꺼내는 이유는, 그래. 마음 놓지 말아 달라는 일종의 경고였다. 페로 로꼬. 라보 데 누베를 쌓아 올린 미친개. 한번 물면 뼈를 부러뜨리지 않고야 놓아주지 않는다고 소문이 자자한 공포의 선장.
그러나 우노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한 말을.”
유진은 망설임 없이 일어났다. 더 묻지 않을 거냐는 무언의 시선이 진득하게 따라붙었다. 유진은 현관문에 기대어 서서 손을 흔들었다. 내게는 시간이 많으니까요. 단조롭게 말하자 우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그건 몹시도 축복받은 일이지, 이그나시오. 동의할 수는 없었으나 말꼬리를 잡지는 않았다.
대문 밖으로 나서자마자 유진은 우뚝 멈춰 섰다. 고작 두세 걸음 뗐을 뿐인데 날카로운 감각이 무언가를 기민하게 알아챘다. 폭우가 쏟아진 덕분에 바닥은 온통 진흙탕이었다. 거기엔 낯선 사람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유진 것보단 작았고 우노보단 컸다. 진흙이 채 마르지 않았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지 않고 주위를 한참 맴돈 행세였다. 유진은 선명히 찍힌 발자국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가 당신에게 권유했습니까?]”
따발총처럼 쏘아져 나온 질문에 유진은 멍청하게 되물었다. 뭐요?
때는 잔잔한 산바람이 부는 저녁이었다. 폭우가 그친 후엔 장도 제대로 섰기 때문에 유진은 주린 배를 붙잡고 비척비척 시장으로 나섰다. 돈은 항상 부족했으나 품삯을 받을 방법은 어디에나 있었다. 비가 그쳤다고 붐비는 시장 틈바구니에서 심부름 값으로 산, 채소보단 고기가 많은 샌드위치를 질겅거리며 걷는데 누군가 대뜸 물어온 것이다. 그마저도 인파의 소음에 묻히기 직전 유진이 낚아챈 소리였다.
유진은 황당함을 금치 못하고 등을 돌렸다. 이게 웬 소리람. 취객과 마주하면 유진은 상대를 곱게 샛길로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물론 마주친 건 취객이 아니라 번듯한 정상인이었지만. 그래서 더 어이가 없었는지도 몰랐다.
“……래빈?”
“네. 차유진 씨.”
김래빈이었다. 폭우 속에서 만났던 그 애.
오늘은 고급 정장 차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유진처럼 바닥을 기어 다니는 아무 옷이나 주워 입은 차림도 아니었다. 익숙한 브랜드가 프린팅된 상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날카로운 래빈의 눈이 유진을 쏘아보듯 응시했다. 유진은 어처구니가 없어야 하는지 당황해야 하는지 잠시 고민하다가 말았다. 브랜드 옷을 입고 나돌아다니는 사람은 이 마을에 온 이래 처음 봤다. 배짱 한번 대단하다 싶다가도 인상 보면 알아서 설설 길 테니 그런 건가, 하는 태평한 생각만 들었다.
유진이 대답하지 않자 래빈의 고개가 묘하게 기울어졌다. 눈을 찡그린 래빈은 이내 두어 걸음 다가왔다. 거리가 가까워졌다. 사람들은 래빈이 걷는 대로 길을 비켰다. 지척에 다가선 래빈은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였다. 그가 당신에게 권유했습니까?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대뜸 묻는다기엔 너무 생뚱맞은 질문이었다.
“그가 누군데요?”
“그…….”
래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유진은 거기서 낭패감을 읽었다. 고민하는 것 같기도 했다. 샌드위치를 입에 마저 밀어 넣으며 래빈을 살폈다. 그러다가 발에 시선이 갔다. 유진보단 조금 작은 발. 그러고 보니 우노의 집 앞에 찍혀 있던 발자국도 꼭 저 크기였는데.
유진의 눈이 언뜻 가늘어짐과 동시에 래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굳은 결심을 한 사람 특유의 비장함으로 눈이 반짝였다.
“파란 대문 집에 사는 여성분을 말하는 거였습니다. 이름은……. 이름은 확실치 않아서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역시. 유진은 그냥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내게 자신을 우노라고 부르라고 했어요. 긴 머리를 귀신처럼 늘어트린 여자.”
“그분을 믿습니까?”
“음, 가끔?”
래빈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유진은 우노가 언젠가 했던 말을 가만히 곱씹어 봤다. 뭐랬더라. 질문에 질문으로 응수하는 건 아주 영리한 방법이지만, 상대의 심기를 거스를지도 모른다고 했던가. 그게 꼭 지금과 상황이 비슷한 것 같아 웃음이 났다. 물론 우노와는 달리 래빈은 자신에게 욕지거리를 내뱉을 것 같지 않았지만.
래빈은 입을 빠끔거리다가 이내 입술을 지그시 다물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 너머에서 묘한 감정이 떠올랐다. 유진은 눈을 가늘게 떠 래빈의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분노? 짜증? 성가심? 무엇도 아니었다. 부정적이라기엔 너무 애틋하고, 긍정적이라기엔 어딘가 사람 기분을 기이하게 만들었다. 유진은 뜻 모를 래빈의 감정에 고개를 갸웃하다가 문득 래빈의 질문을 떠올렸다. 그가 당신에게 권유했습니까?
“우노가 내게 무언가를 권유했어야 해요?”
“예?”
“당신이 그렇게 물었잖아요.”
눈을 가만히 맞추자 래빈이 이번엔 얼굴을 찡그렸다. 얼굴이 한층 험악해졌다. 유진은 워, 하는 괴상한 효과음과 함께 슬쩍 물러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래빈은 유진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만 끄덕였다.
“예. 당신께 무언가를 묻지 않았습니까? 당신의 의사를 묻는다거나, 부탁을 한다거나.”
“음.”
“했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요? 유진은 목젖까지 솟아오른 질문을 고이 삼켰다. 우노는 얼마 전 제게 부탁했다. 메노르를 데리고 도망쳐줘. 좁디좁은 이 페루 변방의 바닷가 마을에서 사라져줘. 유진은 승낙했다. 그러나 페로 로꼬의 손아귀에서 무사히 도망치려면 기본적인 비밀 유지는 필수였다. 그래서 아무 데에도 말하지 않았다. 우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보다도 철저했을 텐데. 그런데 래빈은 어떻게 알았는가.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는 래빈은 이제 거의 초조해 보였다. 늘씬한 손가락이 가만히 있질 못했다. 서로를 얽고 풀기를 반복하는 손가락들을 슬쩍 바라본 유진은 그냥 히히 웃었다. 이렇게까지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삼 년간 의심은 뼈에 새겨졌고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배신과 뒷말 따위는 유진을 지긋지긋하게 했다. 그래서 유진은 가볍게 되물었다.
“그랬다면요?”
“예?”
“우노가 내게 뭔가 부탁했다면? 그게 당신한테 큰일이에요?”
래빈이 잠시 고개를 떨궜다. 잠시 입을 빠끔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들었다. 두 눈이 빛나고 있었다. 굳건한 의지로 가득 찬 눈으로 래빈이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중요합니다.”
왜? 유진은 반사적으로 되솟는 질문을 잘근잘근 씹어 삼키며 대신 대답했다.
“그렇다면, 음, 그래요. 우노가 며칠 전 내게 뭔가 부탁했어요. 뭔지는 말 못 해요. 아주 중요한 비밀이에요.”
“당신은 승낙했습니까?”
유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뜻밖에도 래빈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건 한탄이라기보단 안도감에 가까웠다. 다행입니다, 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희미했다. 래빈은 진심으로 안도하고 있었다. 유진이 무슨 부탁을 받았는지도 모를 텐데. 몰라야 할 텐데. 유진이 묘한 눈으로 래빈을 바라봤다. 우노의 계획이 틀어지지 않았는지, 혹여나 쥐새끼 발견 못 한 건 아닌지 주의 깊게 따지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때 래빈이 고개를 느리게 들었다. 시선은 유진을 지나 어딘가에 꽂혔다. 동시에 광장 구석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인파가 내는 자연스러운 웅성거림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헛숨 삼키는 소리였다. 불규칙한 발소리가 산발적으로 흩어졌다. 소리만으로 알았다. 사람들이 물러나고 있었다. 유진이 반사적으로 뒤를 돌려는데 옷깃이 잡혔다. 성큼 다가온 래빈이 유진의 목깃을 잡았다. 뒤를 보지 못하도록 고개를 단단히 고정했다. 지척에서 사나운 눈이 번뜩였다.
“고개 돌리지 마십시오.”
래빈이 유진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얼굴을 가리려는 의도가 분명한 행동이었다. 귓가에서 사부작거린 목소리에 유진이 반사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누구예요? 숨죽여 묻자 래빈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나중에. 나중에 알려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우선 피해야 합니다. 단정하던 목소리가 헐떡였다. 불안해하는 기색이 가감 없이 드러났다. 유진은 망설이지 않고 걸음을 뗐다.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던 래빈 역시 부드럽게 뒷걸음질 쳤다.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졌을 무렵 래빈이 훅 물러났다. 대신 고개를 떨군 채 유진에게 눈짓했다. 유진은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뒤돌아보진 않았다. 뒤를 힐끔거리는 래빈의 얼굴 구석에서 조급함이 스멀거렸다.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그때 뒤에서 고성이 날아들었다.
“[거기, 후드 뒤집어쓴 놈! 멈춰!]”
정제되지 않고 거친 스페인어였다. 동시에 래빈이 흠칫 놀라며 몸을 굳혔다. 떨군 손과 손이 스쳤다. 래빈이 침을 꿀꺽 삼킴과 동시에 유진은 후드를 붙잡아 더욱 깊숙이 눌렀다. 뒤에서 누군가 말을 이었다. 빠른 스페인어가 비수처럼 날아왔다.
“[이봐. 내 말이 안 들려? 방금 후드 잡아 누른 너 말이야. 멈추고 얼굴을 보여.]”
“차유진 씨.”
“응?”
“신호하면 달리십시오. 거처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기왕이면 빙빙 돌아가십시오. 이후에 누가 찾아오든 문은 열어주지 마시고요.”
단단한 목소리였다. 떨리는 손과는 영 어울리지 않았다. 유진은 고개를 들어 래빈과 눈을 맞췄다. 비장하게 번뜩였다. 한없이 진지해서 숨이 막혔다. 성마른 목소리는 점점 크기를 키웠다. 다가오는 걸음 소리가 들렸다. 유진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되물었다.
“내가 잘 달리지 못하면요?”
“차유진 씨 달리기 빠른 거 압니다. 그냥 예전처럼만 뛰어주세요. 그러면 됩니다.”
당신이 말하는 예전처럼은 언제예요? 묻는 대신 유진은 가만히 생각했다. 유진은 아주 오랫동안 달린 적 없었다. 페루에 온 뒤로부턴 그냥 모든 게 설렁설렁 지나갔다. 집에 돌아가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어느 순간부터 유진의 아킬레스건을 물어뜯었다. 유진은 그냥 느적느적 발을 끌며 걷기만 했다. 그게 벌써 몇 년째 이어졌다. 달린 적 없었다. 달린 지 너무 오래됐다. 하물며 래빈과 처음 만났던 그 날에조차 발에 입은 상처 덕분에 제대로 뛰지 못했는데.
그런데 달리라고 말하는 래빈의 눈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빛나고 있어서.
그래서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만나면 우리 말 편하게 해요.”
쾌활하게 말하자 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습니다. 유진은 가벼이 승낙한 래빈을 향해 활짝 웃고 몸을 돌렸다. 그러니까 죽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죽지 않을 거라는 다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눈을 감았다가 떴다. 경기를 준비하기 전 으레 그랬듯.
“셋.”
나직한 목소리가 수를 셌다. 유진이 줄을 당겨 후드를 조였다. 달리는 도중 벗겨지지 않도록. 운동화를 내려다봤다. 낡고 해진 운동화의 신발 끈은 단단하게 묶여 있었다.
“둘.”
크게 숨을 들이켰다. 다리에 힘을 줬다. 근육이 딱딱하게 굳고 바닥을 디딘 발바닥까지 눌렸다. 붕대 감은 발에 힘이 들어갔다. 찢긴 살이 벌어지며 선명한 통증이 심장을 찔렀다. 잊히지 않는 고통과 벌어진 상처가 속삭였다. 너는 살아있다.
“하나!”
유진이 튀어 나갔다. 경기 시작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에 반응하듯이.
생경한 감각이었다. 우글거리던 인파는 어느샌가 상대 팀 선수들이 됐다. 후드를 꾹 누른 채 다리를 쭉쭉 뻗어 달렸다. 이번 전략의 핵심은 하나였다. 잡히지 않을 것. 도망칠 것. 안전한 곳으로 향할 것. 거처에 도착할 것. 오랫동안 느끼지 않았던 감각이 차츰 차올랐다. 상처가 벌어지며 비명을 지르는 발바닥. 부족한 호흡에 따끔거리는 목구멍. 무언가가 관통한 것처럼 아픈 옆구리. 고통, 고통, 고통. 살아있음을 끊임없이 되새기게 하는 고통.
뒤에서 악에 받친 고함이 날아들었다. 유진은 바삐 발을 돌리다가 슬쩍 고개를 틀어 돌아보았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남자가 있었다. 사람들은 남자 앞에서 헐레벌떡 물러났다. 그래서 더 잘 보였다. 남자의 앞을 가로막고 비키지 않는 마른 등. 김래빈이었다.
무슨 말이 들린 것도 같았다. 교과서적이고 딱딱한 스페인어였다. 유진은 귀 기울이는 대신 다시 땅을 박찼다. 세찬 맞바람이 불었다. 구석진 샛길로 들어갔다. 꼬불꼬불 이어진 골목길은 웬만한 현지인이 아닌 이상 몰랐다. 샛길과 샛길을 오가며 달렸다. 달리고 달리고 달렸다. 습기 하나 없는 시원한 해방감이 가슴을 꿰뚫고 지나갔다.
계단을 겅중겅중 올라 마침내 거처 앞에 다다랐을 때 유진은 반사적으로 허리를 숙였다. 발바닥부터 목구멍까지 아프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특히 발바닥이 축축했다. 붙던 상처가 다시 벌어지며 피가 나는 모양이었다. 낡고 녹이 슨 철문을 온몸으로 밀어 열고 엎어지듯 들어섰다. 문을 닫고 걸쇠를 단단히 잠갔다. 휑한 창문이 떠올랐다. 저긴 어쩌지 잠깐 고민했으나 관뒀다. 어차피 절벽께에 붙어 있어서 사람이 들어오기엔 마땅치 않을 거였다.
“으…….”
신발을 벗자마자 핏물 밴 양말이 보였다. 헛웃음부터 났다. 양말마저 벗자 온통 젖은 채 흘러내린 붕대가 드러났다. 제 역할을 잃은 붕대마저 풀면 보이는 건 피범벅 된 발. 피를 닦아내고 드러난 상처는 예상에서 한 치 벗어나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물다가 다시 터진 탓인지 그새 부풀었다. 곪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불쑥 고개를 디밀다가 사라졌다.
마땅한 소독약이나 깨끗한 붕대는 없었다. 그런 걸 살 바엔 샌드위치 하나 입에 욱여넣고 말았던 과거 탓이었다. 유진은 아주 짧게 과거의 자신을 혼내고는 벌렁 드러누웠다. 래빈이 말했던 여분의 붕대가 어디에 있을 법도 한데, 찾아 나서기엔 너무 지쳤다.
낡아빠진 매트리스가 목전이었다. 히터 위엔 여전히 말린 양말 한 짝이 달랑거렸다. 눅눅한 곰팡내가 났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숨이 부족해서 그래. 멍하니 뇌까렸다. 경기할 때도 이렇게까지 달리면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유진은 눈을 부러 질끈 감았다가 떴다. 방바닥에서 뒤척이자 페인트가 벗겨져 휑한 천장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온몸이 천근만근. 이렇게까지 달린 건 너무 오랜만이라서 자꾸만 웃음이 났다. 정리가 잘 된 잔디밭 대신 고르지 못한 돌바닥이었지만. 거친 태클이 들어오는 대신 사람들은 자신에게서 헐레벌떡 물러났지만. 믿음직한 팀원이라곤 래빈 한 사람뿐이었지만. 풋볼을 드는 대신 후드를 눌러 쓰느라 바빴지만. 그래도. 그런데도.
실없는 웃음만 짓다가 어느 순간 까무룩 잠들었다. 꿈에서 유진은 삼 년 전 모습이었다. 두꺼운 보호대를 겹겹이 껴입고 그 위에는 유니폼을 걸쳤다. 입에 마우스피스를 문 채로 헬멧을 썼다. 온몸이 땀에 젖어 눅진했고 숨을 뱉을 때마다 희게 부서지는 기분이었다. 사방이 소란했으나 유진의 세계는 몹시도 고요했다. 모든 소음을 잊게 하는 집중력. 손에 쥔 공의 감각만이 선연해지는 세상. 미약한 호루라기 소리가 시합의 재개를 알리는 순간, 뛰쳐나가고 부딪치고 구르고 달려나가며 유진은 박동했다. 호흡했다. 그토록 생생히 살아있을 수가 없던 때가 있었다.
터치다운! 몸을 날린 끝에 귓가를 울리는 판정. 유진은 벌떡 일어났다. 헬멧을 벗어 던졌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마구 나부꼈다. 팀원들이 달려와 몸을 부딪치고 유진을 깔아뭉갰다. 옆구리가 쑤셨다. 숨쉬기도 벅찬 폐부 사이로 웃음을 끌어올려 토해냈다. 스타디움이 함성으로 흔들렸다. 흔들리고 진동하다가 폭삭 무너졌다.
눈을 떴다. 깨진 창문 너머에서 햇볕이 비스듬하게 기울었다. 눈이 부시지 않았다. 누군가의 그림자가 볕을 막아주고 있었다. 몸을 일으키는 대신 눈을 깜빡였다. 손끝에 힘을 주고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내쉬었다. 복부가 팽창했다가 꺼지는 감각이 생생했다. 쏟아지는 빛줄기 사이에서 먼지 떠다니는 광경이 천천히 망막에 맺혔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가만히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있었다. 빛을 등진 건지 녹아든 건지 모르겠는 눈. 사납고 매서운 시선 속에 움튼 부드러운 영혼. 입술을 사리 문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가 어쩐지 울 것만 같아서 유진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잠긴 목소리가 나왔다.
“우리 말 편하게 해?”
그러자 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이 몸을 일으켰다. 언제 잠들었는지, 얼마나 잤는지 모를 일이었다. 몸이 찌뿌둥했다. 한바탕 뛰고 난 후 방바닥에서 잠들어버렸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래빈은 유진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가 천천히 손을 거뒀다. 뒤늦게 눈이 부셨다. 얼마나 오랫동안 손차양을 만들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유진은 머쓱하게 웃으며 고마워, 했다. 래빈은 그냥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본 문은 여전히 걸쇠가 걸려 있었다. 래빈이 들어오고 다시 잠갔나 싶었다.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돌렸다. 래빈은 유진의 발을 보고 있었다. 눈을 떼지 않았다. 거의 노려보듯이 응시하는 시선에 유진은 그냥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들어왔어?”
“창문으로.”
“What the…….”
기상천외한 대답이었다. 유진은 깨진 후 내버려 둔 창문을 바라봤다. 창문 너머는 거의 깎아지른 절벽이나 다름없었다. 뭘 어떻게 해야 저기로 들어오지? 경악한 유진과는 달리 래빈은 담담했다. 무던하다기보단 그냥 유진의 발에 정신이 팔린 것 같았다. 유진은 끙, 앓는 소리를 내고 래빈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제야 시선이 맞았다.
“괜찮아. 금방 나아!”
“저대로 두면 덧날 거야. 금방 낫는다는 확신을 가지기엔 좀 이르다고 생각해.”
마침내 래빈이 움직였다. 품속에서 소독약과 붕대, 거즈 따위를 바리바리 꺼냈다. 소독약을 뜯어 유진의 발에 붓기 직전 래빈은 고개를 들지도 않고 말했다. 따가울 거야. 참아. 단조로운 말이었다. 유진은 응, 했다. 대답이 돌아오자 래빈은 망설이지 않았다. 쏟아지며 발바닥을 적시는 따끔한 액체. 유진이 고개를 들었다. 래빈이 미간을 잔뜩 일그러트린 채 상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감쳐 문 입술이 꼭 울음을 참는 것 같아서.
약을 바른 후 깨끗한 거즈를 덧댔다. 발에 붕대를 감고 매듭짓는 능숙한 손길에 유진은 입을 다물었다. 사리 문 입술과 움찔대는 콧볼. 벌게진 눈가가 천천히 눈에 들어왔다. 데굴데굴 떨어진 햇빛이 래빈의 눈가에 맺혔다. 그리고 떨어졌다. 꼭 눈물 같았다.
“미안해.”
뭐가? 눈도 맞추지 않은 채 중얼거린 래빈에 유진은 대꾸를 삼켰다. 스타디움을 깨부쉈던 꿈속 환호가 꼭 잔상처럼 남았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환호가 아니었다.
파도 소리였다.
가방 어디 있어?
어? 네가 챙긴 거 아니었어?
무슨 소리야. 내가 네 가방을 왜 챙겨?
열여섯의 유진 이그나시오 차는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친구들끼리 오랜만에 비행기 타고 놀러 왔는데 여행 가방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도난 신고라도 해야 하나? 뺨을 긁적이는데 친구들이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지 말고, 유진, 차라리 한 번 더 둘러봐. 뒤늦게 나왔는지도 모르잖아. 누군가 말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자 옆에서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이번엔 여자애 목소리였다. 맞아. 게다가 유진, 네 가방은 백 미터 밖에서 봐도 네 거야. 누가 훔쳐 가도 금방 눈에 띄고 말걸. 유진은 결국 장난스러운 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음, 그래. 그러면 밖에서 기다려.
나는 찾다가 갈게. 아, 차라리 숙소에서 볼까?
편한 대로.
너무 길어진다 싶으면 숙소로 먼저 가 있어. 만일 정말 누군가 내 가방을 훔친 거라면 산타 할아버지께 가방 돌려달라고 소원까지 착실히 빌고 돌아가야 하니까.
그래, 그래. 대신 유진, 너무 늦지는 마. 우리 여섯 시간 뒤에 패러글라이딩 있어.
설마 여섯 시간이나 늦겠어. 먼저 가!
그들은 헤어졌다. 손을 흔들고 갈라졌다. 유진은 안으로, 그들은 바깥으로. 커다란 공항을 누비며 유진은 이곳저곳을 들쑤셨다. 붉은색 여행 가방. 동생과 누나가 마구잡이로 붙여 놓은 스티커 덕분에 멀리서도 눈에 확 띄었다. 정말 어디 갔담. 열여섯의 유진 이그나시오 차는 잠시 고민했다. 정말로 도난 신고를 해야 하나.
도무지 찾을 수가 없어 안내센터로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누군가 열여섯의 유진 이그나시오 차와 부딪혔다. 어깨가 거세게 흔들리는 순간 유진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미식축구 쿼터백인 열여섯의 유진 이그나시오 차는 누군가와 부딪혔을 때 쉽사리 밀리는 법이 없었는데도. 아. 짧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검은 정장을 깔끔히 차려입은 여자였다. 머리를 높이 올려 묶었는데도 길이가 허리까지 내려왔다. 유진은 곧장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런. 미안해요. 앞을 제대로 봤어야 했는데.
괜찮아요?
네, 물론 저는 괜찮답니다. 그쪽이야말로 괜찮아요?
나도 괜찮아요. 그런데 이건 당신 건가요?
부딪힌 여자가 바닥을 가리켰다. 시선이 자연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손에 꾹 쥐고 다녔던 여권과 비행기 표가 거기에 있었다. 유진 이그나시오 차는 사람 좋게 웃어 보이며 허리를 숙였다. 고마워요. 놓쳤나 봐요. 여권 끝을 집으려는 순간이다. 단단하고 억센 손길에 목덜미를 강하게 압박했다. 일어서려는 유진을 그대로 짓누르는 손길에 유진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이봐요? 불길한 감각이 뱃속에서 느글거리고.
찾았다.
여자가 나지막이 중얼거린 그 말을 끝으로 유진은 튕기듯 일어났다.
폐부가 욱신거렸다. 숨을 거칠게 몰아쉰 탓이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푹 젖었다. 이불을 말아쥔 손은 제멋대로 움찔거렸다. 빌어먹을. 쌍욕을 혀로 굴려 발음한 유진은 느리게 손을 들어 젖은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지독한 갈증이 일었다. 채 동이 뜨지 않은 새벽은 바람이 몹시 찼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페루. 바닷가. 마을. 거처. 산발적인 정보가 머릿속을 꿰뚫고 침몰하길 반복했다. 누군가 마리오네뜨의 줄을 끊어낸 것처럼 몸에서 힘이 탁 풀렸다. 그대로 스르르 넘어가 매트리스에 몸을 파묻는다.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유진은 씨근거리는 숨을 애써 잠재웠다.
그냥 꿈이야. 페루 바닷가 마을 한복판에서 유진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중얼거렸다.

*

유진은 고개를 비쭉 내밀어 주위를 살폈다. 저들끼리 모여 삼삼오오 떠드는 무리가 두셋 정도 있었다. 하나같이 남루한 옷을 걸쳤다. 남들을 필요 이상으로 주의 깊게 살핀다거나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사람은 없었다. 유진은 그제야 만족스럽게 웃으며 발을 디뎠다. 옆에서 함께 기웃거리던 래빈이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유진은 잠깐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다물었다. 주위를 자꾸만 둘러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주위를 지나치게 신경 쓴다는 뜻이고, 주위를 지나치게 신경 쓰는 사람이라면 신경 쓸 만한 요소를 지녔다는 의미였다. 그건 다른 말로 바꾸자면 찔리는 게 있다는 사람이라는 반증이었다. 소란을 피하려면 남이나 주위에 관심 많은 사람은 피하고 보는 게 나았다. 그 일련의 과정을 설명해주려다가 맹한 래빈의 얼굴을 보곤 그냥 어깨만 으쓱였다.
“여기 조용해서 좋아.”
래빈이 눈을 찡그렸다. 전혀 조용하지 않았다. 저들끼리 떠들어 대는 소리로 구석진 골목이 왕왕 울렸다. 하지만 래빈은 되묻는 대신 그래, 하고 말았다. 아마 저 작은 머리통 속에선 차유진은 귀가 안 좋은가 하고 제멋대로 이해했을 것이다. 유진은 구태여 정정하지 않았다.
유진과 래빈은 만났다. 자주. 더는 학교에 가지 않는 유진이 시간 때울 겸 자주 만날 수 있겠냐 물으니 래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연락처를 교환할까 했으나 유진에겐 핸드폰이 없었다.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도 어떻게든 만나졌다. 심심할 때 광장을 어슬렁거리다 보면 어느샌가 다가온 래빈이 등 뒤를 툭툭 건드렸다. 그러면 놀러 나갔다. 대충 그런 식으로 며칠을 살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비슷한 절차를 밟았다. 잔심부름을 끝내고 품삯을 받은 유진이 하릴없이 광장만 헤는데 누가 뒤통수를 툭툭 두드린 것이다. 뒤돌아보니 래빈이었다. 가벼운 후드 차림인 래빈은 눈을 말갛게 끔뻑이며 긴히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거처에서 이야기하자니 시간이 없다고 거절했다. 그래서 이 구석진 곳에 흘러들어왔다. 사람이 많지만 그만큼 많은 정보가 이 인파 틈바구니에서 산화하니 괜찮았다.
유진과 래빈은 자연스럽게 벽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쪼그려 앉은 채로 서로 하릴없이 손장난이나 치다가 킥킥거렸다. 래빈은 첫인상과는 다르게 사람이 순했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성격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다가도 모를 지경이었다. 페루의 바닷가 마을은 무법지보다 딱 한 걸음 멀었다. 하루하루 고비는 아니어도 하루걸러 하루쯤은 고비였다. 유진이 살아남을 수 있던 건 그가 태생적으로 운이 좋기 때문이요 쿼터백 시절 배웠던 몸 쓰는 법과 그냥 기민하게 태어난 눈치의 필사적인 합작이었다. 그렇다면 래빈은? 저 순하고 눈치 없는 애는 어떻게 살았지? 생각하다가 눈이 맞으면 그냥 아 얼굴 보고 상대가 지레 겁먹어서 살았나 보다 하는 거다.
“김래빈은 진짜 얼굴 고마워해야 해.”
“뭐?”
“그래, 그런 표정. [그런 표정 없었으면 김래빈 일찌감치 태평양에서 물고기 밥 됐을걸.]”
“한국말로 해, 바보야.”
“김래빈 여기서 몇 년을 살았는데 아직도 스페인어 못해?”
킥킥거리며 되묻자 래빈의 눈이 가늘어졌다. 옹송그리게 모은 입술이 삐죽인다. 유진은 솔직히 래빈이 스페인어에 능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저렇게 말하는 건, 그러니까, 반응이 웃겨서. 할 말 잔뜩 있다는 눈으로 노려보면서도 결국 아무 말도 뱉지 못한다는 게.
그런데 진짜 궁금하긴 했다. 래빈은 이 바닷가 마을에서 대체 몇 년을 살았을까. 차유진은 삼 년 살았다. 삼 년 동안 적응했다. 원래 유학은 최소한 일 년 반은 넘게 가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며 살았다. 그런데 래빈은 가끔 보면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건 흥정 같은 건 추호도 못 하며 어리바리하다 싶으면서도 꼬부랑 길 찾는 건 그렇게 능숙했다. 얘 진짜 뭐 하는 애지. 매일 궁금하고 매일 집어삼키는 질문이다.
입만 우물거리던 래빈은 대답 대신 지그시 응시했다. 형형한 삼백안이 유진을 노려보듯 응시했다. 유진은 개의치 않고 어깨만 으쓱였다. 자신을 죽일 듯이 쏘아보는 것 같은 건 그냥 살벌한 인상 탓임을 알았다. 저 작은 머리통 속에선 실은 시답잖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나 생각하고 있을 게 뻔했다. 예상대로 입을 연 래빈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했다.
“사람이 보는 앞에 대고 그런 질문을 하는 건 실례야, 차유진.”
“음, Okay. 그래서 이유는?”
“……많이 써보질 않아서 그래. 게다가 나도 노력은 해봤는데 좋아하지 않으셨어.”
“누가?”
래빈의 얼굴에서 낭패감이 깃들었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까의 집요한 시선이 거짓말처럼 래빈이 고개를 휙 돌렸다. 그냥 그런 게 있어. 바보 같은 김래빈은 거짓말도 잘 못 했다. 얼버무리려는 태가 확실한 말에 유진은 기꺼이 넘어가 주기로 했다. 뭐 언젠가 말해주겠지. 사실 말 안 해도 상관없고. 태평하게 손이나 배며 기댄 유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런데 할 말 뭐야?”
“아.”
눈을 깜빡이며 묻자 래빈이 고개를 돌렸다. 손가락을 마주 얽고 만지작거린다. 아랫입술을 질겅거리는데 뺨이 움찔거렸다. 할 말을 아주 신중하게 고르는 사람 특유의 조심스러움이다. 유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흠, 하고 말았다. 이럴 땐 기다리는 게 상책이다. 괜히 자극했다간 나올 말도 들어갈 때가 있었다.
그래서 유진은 기다렸다.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 하는 태평한 마음으로.
장마를 막 지난 페루의 바람은 선선했다. 여름의 말미다. 가을의 초입이라기엔 아직 더운 감이 있었다. 유진은 빨간 후드티를 가볍게 팔랑거려다. 올해는 장마가 짧았다. 비가 한 번 쏟아지고 말았다. 사실 페루의 여름은 그다지 습하지 않고 오히려 선선하다는 걸 생각한다면, 물기가 피부에 찐득하게 달라붙던 이번 여름이야말로 이상 기후였는지도 몰랐다.
유진은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뭉게구름이 캔버스에 발리다 만 물감처럼 드문드문했다. 한국에선 왜, 그런 말도 있다던데. 하늘은 높고……. 뭐였더라? 눈을 찡그리며 고민하다 말았다. 가을 하늘이 높은 건 한국뿐만이 아니려나. 작년 가을은 어땠더라.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이제부턴 좀 달라지겠지. 희끄무레한 세상에서 나도 함께 희미해지기만 하는 게 어디 사는 건가. 방황하던 유진의 시선은 결국 래빈에게 닿는다. 결국엔 고심하는 래빈이 종착지다. 유진은 숨죽여 키득거렸다. 눈을 찡그린 래빈은 거의 사람 하나 죽일 법한 표정이었다. 물론 그냥 진지하게 고심하고 있다는 걸 알지만.
함께 있을 때마다 세상이 또렷해지는 사람이 있다. 어쩌면 유진에겐 래빈이 그런 사람인지도 모른다. 왜일까 고심해 보면 답은 쉽게 나왔다. 그야 래빈이 빗줄기 뚫고 왔으니까. 한 번 쏟아진 폭우에 쓸려 사라지지 않고 걸어왔으니까. 매서운 소나기 속에서 꿋꿋하게 제 갈 길 간다는 건 은근히 어려운 일이다.
“차유진.”
그때 래빈이 말했다.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눈을 깜빡이며 응, 하자 래빈이 고개를 돌려 눈을 맞췄다. 살짝 시선을 빗겨 떨어트리면 뺨에 찍힌 점이 움찔거린다. 래빈이 입을 여닫을 때마다 움찔움찔.
“너는…… 어쩌다 여기 왔어?”
그러나 오, 래빈이 뱉은 말은 의외의 것이다. 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몇 번 끔뻑였다. 래빈이 어디 남의 개인사를 캐묻고 다닐 사람인가? 만난 지는 한 달쯤 됐으나 유진은 알았다. 래빈은 매사 진지한 사람이다. 상대방에게 한없이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게 거의 습관이었다. 가끔은 좀 숨 막힐 정도로 진중한 태도가 몸에 뱄다. 그리고 유진과 래빈은 모두 알았다. 페루 바닷가 마을에서 사연 없는 사람이 없다는 점. 남의 개인사를 가볍게 묻고 다니면 다음 날 가볍게 마실 나갔다가 가볍게 바다로 던져질 수도 있다는 것까지.
유진은 잠시 놀라 눈만 깜빡였다. 대답이 곧장 돌아오지 않자 래빈은 맞췄던 눈을 슬쩍 피했다. 손가락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데에서 어쩐지 뼈저린 후회가 느껴졌다. 아니야. 못 들은 거로 해, 하며 대충 얼버무린 래빈은 몸을 구부려 워커를 묶은 끈만 만지작댔다. 그러고 보니 워커 신었네. 여기 계단 많고 가팔라서 발 아플 텐데. 하릴없는 생각이나 하던 유진은 이내 고개를 돌려 벽에 머리를 기댔다.
“오고 싶어서 온 거 아니야.”
“어?”
“난 이런 마을 있는지도 몰랐어.”
다소 담담한 말투다. 유진의 말에 래빈은 처박았던 고개를 들었다. 유진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깜빡거리지도 않는다. 여름의 말미. 비는 내리지 않고 공기가 습하지 않다. 다만 하늘이 높지도 않아서. 유진은 깊은 곳에 응어리졌던 옛이야기를 뱉어내는 대신 크게 숨을 들이켰다. 아직은 하늘이 낮다. 내뱉었다간 짓눌릴 게 분명하다. 그러니 아직은 안 됐다.
“그냥 어쩌다 보니까 여기 있게 됐어.”
“어쩌다 보니.”
“응. 어쩌다 보니까.”
정말로. 어쩌다 보니까. 유진은 시간이 돌린들 자신이 무언가 바꿀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 여행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삼 년 전에 여행 가방을 잃어버리지 않았더라면. 친구들에게 숙소에 먼저 가 있으라고 하지 않았다면. 수많은 가정은 전부 시간 낭비고 현실 도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뭐, 사람이 마음먹는 대로 살 수 있는 건 아니니 유진도 많이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가능성이 있었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일말의 희망. 불꽃 하나만 있다면 유진은 얼마든지 자리를 박차고 나설 수 있는 사람이라.
그때 래빈이 다시 말했다. 근데, 차유진.
“여기가 그렇게 싫어?”
뜻 모를 질문이다. 유진은 눈을 깜빡이며 래빈을 바라봤다. 래빈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왜 저런 눈으로 보는 거지? 저건 마치……. 유진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가 이내 어깨만 으쓱했다. 싫냐니. 그거야 당연하지. 유진은 두고 온 것이 있었다. 아주 많았다. 스스로 이곳에 온 것도 아닐뿐더러 이 빌어먹을 바닷가 마을에서 해적까지 될 뻔했는데 좋을 리가.
그래서 유진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하고 단조롭게 말했다. 그야 사실이니까. 사실을 사실이라고 말하는 데에 무슨 망설임이 있다고. 김래빈은 안 그래? 유진은 오히려 되물었다. 부메랑처럼 되돌아온 질문에 래빈은 어, 글쎄, 하며 어물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 래빈은 어쩌다 여기 왔어?”
유진이 물었다. 래빈은 눈을 조금 동그랗게 뜨더니 으음, 하고 신음했다. 갸웃한 고개는 이내 빗겨나간 시선과 함께 땅을 본다. 유진은 벽에 기댄 채 가만히 래빈을 기다렸다. 래빈은 바보 같을 정도로 정직한 사람이다. 말하기 싫다면 싫다고, 말하고 싶다면 싶다고 말했다. 유진이 눈을 깜빡였다. 눈을 빠르게 끔뻑이던 래빈은 이내 유진을 힐끔거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섯 살 때.”
“오.”
“여섯 살 때 왔거든, 여기. 그래서 사실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응.”
“어쩌다 오게 됐는지는 몰라.”
래빈이 입을 달싹인다. 하고픈 말이 있는 것도 같았다. 눈치를 본다기보단 말이 나오지 않는 듯했다. 엉킨 채 만지작거리던 손이 천천히 멈췄다. 음, 하고 머뭇거리던 래빈이 마침내 입을 연다. 마른 목소리가 나왔다.
“나 어렸을 때, 그러니까 여기 오기 전에. 한국에서 살았거든.”
“응.”
“거기서 할머니랑 할아버지랑……. 누나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넷이서 같이 지냈다는 것만 기억나.”
“돌아가고 싶진 않아?”
래빈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맞아 들었다. 입이 살짝 벌어진다. 그러더니 아무 말도 뱉지 못하고 다물렸다. 그게 대답이다. 유진은 알았다. 입을 여닫음으로써,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시선을 피함으로써 래빈은 대답했다. 래빈이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같이 갈래?”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래빈은 돌아보지 않았다. 어디를 가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냥 바닥만 바라보다가 입을 빠끔거린다. 유진은 몸을 움직여 래빈의 곁에 다가갔다. 불가능한 건 없어. 자기가 말하면서도 코웃음이 나는 말들이다. 하지만 유진은 내색하지 않았다. 때때로 비현실적이고 조건 없는 위로가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라서.
“[어디로 가니?]”
그러나 대답한 건 래빈이 아니라 낯선 목소리였다.
유진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웬 늘그막 노인이었다.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했는데 겉모습과 어울리지 않게 몸짓은 꼿꼿하고 우아했다. 허리를 쭉 펴고 선 채 유진과 래빈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위가 쥐 죽은 듯 고요하단 사실은 뒤늦게 알았다. 저들끼리 숙덕거리기 바쁘던 취객들마저 슬슬 자리를 피한다. 유진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다가 노파와 래빈의 가운데에 은근슬쩍 끼어 섰다. 뭔가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가긴 어딜요?]”
“[간다고 하지 않았니? 함께 가자고.]”
부드러운 스페인어가 물 흐르듯 나온다. 일견 다정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였다. 노인이 입꼬리를 끌어올려 싱긋 웃었다. 유진도 마주 웃었다. 몸을 옹송그린 채였던 래빈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게 더 이상했다. 낯선 이가 다가와 말을 걸었을 때 래빈이 저렇게까지 아무 반응도 하지 않는다니. 하물며 노인이다. 유진은 일부러 더욱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우리는 어디든 갈 수 있죠. 치기 어린 약속인걸요!]”
“[어디든 갈 수 있다니. 낭만적인 말이야.]”
“[아직 어리니까요. 물론 당신이 늙었다는 말은 아니지만.]”
“[오, 아니지. 나는 늙었어. 죽을 날 받아놓고 사는 거나 다름없단다.]”
그러다가 노파가 눈을 접어 웃었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호, 호, 호. 무슨 영화에 나오는 귀부인처럼. 유진은 그냥 어깨를 으쓱였다. 한 걸음 뒤에서 래빈의 숨소리가 들렸다. 잔뜩 밭고 조급한 호흡.
“[이 늙은이가 오랫동안 살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다면, 그건 아마도 세상의 진리일 거란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다정하게 말을 건다. 노파는 한 걸음도 다가서지 않았다. 대신 유진이 주춤 물러났다. 날카로운 직감이 귀 아프게 외쳐댔다. 위험하다. 저 여자는 위험하다. 버릇처럼 후드티에 손을 닦았다. 벌써 축축해진 탓에 기분이 영 별로였다.
“[세상의 진리요.]”
“[그래. 이를테면, 한 번 떠난 배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엎은 물을 도로 담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음.]”
노파가 눈을 깜빡였다. 고개를 갸웃하더니 눈동자를 데굴 굴린다. 이윽고 눈이 맞았다. 노파가 헬쭉 웃었다. 얼굴에 진 주름이 한층 깊어지더니 또렷하게 파였다.
“[한 번 붙은 불꽃엔 꺼지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정도일까.]”
유진의 얼굴이 굳었다. 뒤늦은 깨달음이 밀물처럼 몰아닥쳤다. 그러고 보니 저 노인. 유진과 래빈이 한국어로 나눈 대화에 대답했다. 그렇다는 건 한국말을 할 수 있다는 뜻인데. 기어코 스페인어로 말을 걸었다는 건 누군가를 위한 배려인가? 유진의 시선이 떨어졌다. 자연스레 래빈에게 닿았다. 몸을 옹송그린 채 고개를 처박은 래빈.
“늦지 않게 돌아오렴, 아가.”
낯선 억양의 한국말이 날아든다. 구부렁하던 래빈의 몸이 흠칫했다. “[만나서 반가웠단다.]” 작별이다. 유진은 깨달았다. 단정한 스페인어는 분명한 작별을 발음한다. 유진도 웃으며 대답했다. “[안녕히 가세요.]” 노인은 그저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떠나는 발걸음엔 망설임이 하나 없고.
마침내 노인이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유진은 곧장 래빈과 눈높이를 맞췄다. 어깨가 떨린다. 가볍게 입고 나온 셔츠 위로 불거진 손마디가 시허옇게 질려 있었다. 김래빈. 이름을 부르자 래빈은 고개를 저었다. 뭐가 싫어? 물어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유진이 입술을 씹었다. 저 사람 알아? 그러자 이윽고 돌아오는 침묵.
“김래빈. 말해야 알아.”
“…….”
“저 사람 누구야? 김래빈 저 할머니 알아?”
“…….”
“저 할머니가 김래빈 알아?”
유진이 래빈의 어깨를 세게 붙들었다. 고개를 떨궜던 래빈의 떨림이 점차 잦아든다. 불안정하던 호흡도 어느샌가 가라앉는다. 들숨. 그리고 날숨. 떨리지 않으나 평온하지도 않다. 유진은 이 리듬을 알았다. 중요한 경기에 나서기 직전 팀원들은 대개 이렇게 호흡했다. 거대한 무언가 앞에서 자기 자신을 가다듬기 위한 호흡법. 그리고 어쩌면 지대한 결심을 했을 때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한.
“차유진.”
마침내 래빈이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붉었다. 날카로운 눈동자가 유진을 꿰뚫듯이 눈을 맞춰왔다. 래빈이 손을 뻗었다. 옷자락이 말려든다. 우당탕 이끌려 이마가 맞닿았다. 숨이 지척이었다. 뜨거운 숨을 내뱉고 마시는 래빈이 이마를 맞댄 채 유진의 뺨을 감쌌다.
“내가 바보 같은 말을 했어. 넌 떠날 거야.”
“……김래빈?”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떠날 거야.”
“…….”
“돌아갈 거야. 캘리포니아로.”
“…….”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내가 캘리포니아에서 왔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
내뱉지 않은 의문은 맞닿은 이마의 열기에 타들어 간다. 유진은 입술을 깨문 채 느리게 대답했다. 응. 그럴 거야. 나는 떠날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갈 거야. 그러자 래빈이 웃었다.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나직이 웃었다.
아프다. 유진은 래빈의 손 위에 제 것을 가만히 겹치며 생각했다. 붕대 감은 발이 아팠다. 그래서 꼭 살아있는 기분이었다.

유진. 뭘 그리 바리바리 챙겨? 그냥 대충 눈에 보이는 거만 집어. 사람은 어찌 됐든 적응하게 되어 있어.
내가 너 같은 줄 알아? 여행 한번 갈 때마다 칫솔 하나씩 사서 지금 집에 칫솔 다섯 세트 있는 분께서 하실 말씀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야. 그거랑 이거랑 같아? 너는 쓸데없는 것까지 바리바리 챙기고. 나는 자유 여행 추구자니까 그 구분은 근본부터 틀려먹었어.
딱히 다르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지난번에도 칫솔 좀 그만 사라고 엄마한테 혼났잖아.
유진. 너 어째 누나한테 가면 갈수록 말대답이 늘기만 한다?
말대답이 아니라 맞는 말이겠지.
아, 내 이름 부르면서 달려오던 어린 나초는 어디에 간 걸까.
유진이 느리게 눈을 뜬다. 어렴풋한 꿈결에서 간신히 벗어난 의식 저 너머에서 호쾌한 웃음이 들린 듯도 하다. 삐걱거리는 매트리스 위에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이 웃음소리를 안다. 누나는 무언가 진정 즐거울 때마다 상쾌하고 높은 웃음을 벼락같이 터뜨리곤 했다. 이젠 어땠는지 잊은 줄만 알았는데 아니었다.
식은땀에 젖은 몸을 바람이 감쌌다. 땀이 마르면서 몸이 으슬거렸다. 창문 열고 잤나 싶어 고개를 들었다가 아, 내가 깼지, 하고 머쓱하게 뒤통수만 긁적이는 것이다. 여름 말미의 밤은 다소 추웠다. 반소매 차림으로 자는 건 역시 너무했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근처에 있던 후드를 아무거나 뒤집어썼다.
벌써 며칠째였다. 삼 년 전 두고 온 것들의 꿈. 오늘은 누나가 나왔다. 유진에겐 가족이 있었다. 할머니, 엄마, 아빠, 형, 누나, 동생. 그리고 골든래트리버 여섯 마리. 삼 년이었다. 고작 삼 년 안 봤는데 어떻게 생겼는지 떠올리기가 힘들었다. 소름이 돋은 팔을 느리게 쓸어내리다가 유진은 가볍게 심호흡했다. 음. 꿈에서 누나는 얼굴이 안 보였다. 기억나는 건 오로지 그 호탕한 웃음소리. 그리고 어쩌면 그거면 충분한지도 몰랐다.
고개를 돌렸다. 집안의 유일한 시계가 삐딱하게 걸려 있었다. 침침한 어둠 속에서 짤깍짤깍 초침 흐르는 소리만 들린다. 두어 걸음 다가갔다. 새벽 두 시 사십육 분. 유진은 시계를 빤히 바라보다 천천히 걸음을 돌렸다. 뼈대만 남은 창가에 몸을 기댔다. 슬슬 진짜로 바꿔야 하는데. 유리창. 아무리 깎아지른 절벽과 맞닿아 있어 누군가 쉽사리 들어오지 못한다지만 사람이 사생활이란 게 있으니까. 그런 시답잖은 생각만 하는데 문득 자그마한 소음이 들렸다. 툭툭. 대문 두드리는 소리였다.
“나야, 이그나시오.”
익숙한 목소리. 우노다. 유진은 문을 살짝 열고 고개만 슬쩍 내밀었다. 이상한 제안을 받아들인 지 한 달이 꼬박 지났다. 뒤늦게 얼굴을 비춘 우노는 어딘가 초췌해 보였다. 단순히 어둠 속이라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르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꺼먼 여자는 눈그늘까지 새까맣게 물들인 채 유진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이 새벽에?”
“소개해주려고 왔어. 잠을 깨웠다면 미안해.”
“소개라면?”
우노가 두어 걸음 물러나 손짓했다. 유진은 여전히 문을 완전히 열지 않은 채 사각지대에서 일렁이는 그림자를 응시했다. 예민한 감각이 솜털처럼 삐쭉 솟았다. 우노가 인제와 배신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낯선 타인에 대한 경계심은 이제 뼛속 깊이 각인처럼 남았을 뿐이다. 상대도 그걸 아는지 별말이 없었다.
“안녕.”
우노보다 대여섯 살은 더 먹었을 법한 남자였다. 얼굴보다 탄내가 먼저 났다. 뒤늦게 남자가 입에 연초를 물고 있음을 깨달았다. 얼굴 반을 뒤덮은 수염 덕분에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유진이 남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우노에게 시선을 돌렸다. 웬만한 성인 남자보다도 키가 큰 우노 옆에 있으니 남자는 거의 땅딸막한 난쟁이처럼 보였다.
“씽코야. 내가 전에 말했던 브로커.”
“또스, 뜨레스, 꽈트로는 어디 있고 씽코가 나와요?”
“다 죽었어.”
“농담하려거든 좀 재밌게 해요.”
“농담 같니?”
“…….”
“농담이야.”
하하. 재밌네요. 유진은 신경질적으로 대꾸하고 땅딸막한 남자를 빤히 응시했다. 이 오밤중에 선글라스는 왜 꼈담. 여러모로 스타일이 확고한 사람이다. 입에 문 연초에는 불도 안 붙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 탄내는 아마도. 유진은 천천히 그를 위아래로 살피다가 문을 열었다. 살짝 발을 내디뎌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해요, 씽코. 이그나시오예요.”
“나도 잘 부탁해. 우노에게 얘기 많이 들었어.”
“정말로요?”
“아니. 이번에 처음이야.”
“당신도 농담엔 재능이 없네요.”
“농담하면서 살아올 삶이 아니어서 그런지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
씽코가 웃었다. 입꼬리를 살짝 끌어당기고 나직이 하, 하, 했다. 맞잡은 손은 거칠었고 군데군데 굳은살이 박였다. 뭐 하느라 생긴 굳은살인지는 묻지 않을 것이다. 유진은 천천히 손을 떼고 다시 물러났다. 다시 우노에게 시선을 던진다. 우노는 새까만 거리를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자고 있었으면 어쩌려고 이 새벽에 왔어요?”
“안 자고 있을 줄 알았어.”
“나한테 감시라도 붙였어요?”
“아니. 원래 남의 집에선 맘 편히 못 자는 법이니까.”
그렇긴 하네요, 하고 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입을 꾹 다물었다. 여상 같은 우노의 담담한 목소리가 묘하게 거슬렸다. 연초를 입에 문 씽코는 선글라스 테만 만지작대고 있었다. 기이한 침묵이다. 용건 끝났으면 가지 그래요. 제가 들어도 날 선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러자 우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맞는다. 여전히 지독하게 새까만 눈동자다.
“서두를게, 이그나시오. 그러니 너도 마음의 준비는 일찌감치 마쳐놔.”
“왜요?”
“……메노르가. 부탁했어. 빨리 떠나고 싶다고.”
유진은 말을 얹는 대신 문에서 물러나 팔짱을 꼈다. 몇 걸음 멀어졌다고 우노의 얼굴이 읽히지 않았다. 앞머리를 덥수룩하게 기른 우노의 시선만이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의중 모를 여자. 미쳤는지 제정신인지 모를 사람. 유진은 우노의 인상을 천천히 혀에 굴리다가 가만히 대꾸했다.
“나는 메노르와 함께 이곳에서 도망쳐야 하는데 그의 얼굴조차 몰라요.”
“그러니.”
“내가 만일 그를 끝까지 알아보지 못하고 나 혼자 떠나면 어쩌려고 소개도 안 해줘요? 날 그렇게 믿어요?”
그러자 우노는 말이 없다. 잠시 입만 여닫다가 여린 한숨이 들렸다. 겹겹이 쌓인 피로를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농도 짙은 감정 범벅인 날숨이다. 그러다 대답하는 목소리는 산뜻하고 망설임이 없었다. 뜸을 들인 게 거짓말인 양.
“두 가지 이유가 있어.”
“뭔데요?”
“첫째. 나는 너를 아주 잘 알진 않지만 전혀 모르지도 않지. 필요한 순간이 왔을 때 너는 네게 도움을 구하는 사람을 무시하고 혼자 나아갈 만큼 이기적이지 못해. 그건 네가 정의롭다는 게 아니야. 딱 보통 사람만큼의 양심이 여전히 네게 있다는 뜻이야.”
과연 그럴까. 유진은 대답 없이 우노를 지그시 바라봤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하냐는 질문은 하지 않는다. 제게도 보이지 않는 양심이 우노의 눈에는 보였을까. 오히려 유진은 되묻는 순간 깨달았는데도. 필요한 순간 나는 누군가를 구할 수 있을까. 위험한 순간 나는 나만의 안위가 아닌 타인의 안위에도 신경 쓸 수 있을까. 고대하던 것이 눈앞에 있을 때 나는.
“그리고 둘째.”
이번에야말로 우노는 멈칫했다. 고민하는 듯하다가 입을 어물거렸다. 우노의 고개가 기울어 떨어졌다. 목소리는 더더욱 늦게 따라왔다. 한숨 같은 말이었다.
“네가 메노르를 절대 버리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야.”
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가만히 서 있던 씽코가 입을 연 것도 그때였다. 느긋한 목소리로 동이 트는군, 중얼거렸다. 유진과 우노의 고개가 동시에 수평선으로 향했다. 동은커녕 일말의 빛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지적하지 않는다. 아무런 말을 덧붙이지 않는다. 그저 입을 꾹 다물고 한숨 같은 진심들을 꾸역꾸역 집어삼킬 뿐이다.
“노력할게요.”
그것만이 유진이 내놓을 수 있는 확답이다. 중얼거리자 우노가 비식 웃었다. 그러지 않아도 돼. 담담한 한마디 대답엔 짙은 피로가 누덕누덕 끼어 있어서. 그럼 잘 자, 하고 건네는 인사에 유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문을 닫는다. 부산스럽던 발소리가 소리 없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비척비척 매트리스로 돌아왔다. 이젠 스프링도 꺼진 매트리스에 몸을 날린다. 푹 꺾이며 고개가 이상하게 처박혔다.
너는 메노르를 절대 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 한마디엔 기이할 정도의 확신이 담겼다. 마치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 거라 다짐하듯이. 유진은 알았다. 우노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페로 로꼬의 서슬푸른 감시 아래에서 대담하게 브로커를 섭외하지. 이곳에서 탈출할 계획 같은 걸 세우지. 웬만큼 간이 크지 않고야 할 수 없는 일들을 우노는 연달아 해냈다. 유진은 알았다. 어쩌면 진정 위험한 건 페로 로꼬가 아니라 우노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만일 우노가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악마라고 하더라도. 유진은 어쩔 노릇이 없다. 탈출하려면 지금으로서는 우노의 계획이 최선. 자신은 우노가 하라는 대로 하면 될 테고…….
누나의 웃음소리가 어쩐지 귓가를 왕왕 울린다. 유진은 이를 악물고 마른 옷에 얼굴을 파묻었다. 자신은 돌아갈 것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돌아가리라 마음을 먹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유진은 심호흡한다. 숨을 고르고 심장을 가라앉힌다. 박동하는 심장과 빠르게 도는 피가 무엇 때문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눈을 감았다. 그러나 잠이 오는 일은 없었다.
동이 트자마자 유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발에 붕대를 감고 곧장 문을 열어젖혔다. 상쾌하고 짭짤한 바닷바람이 불었다. 유달리 날이 추웠다. 드문드문한 나무엔 푸름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른 낙엽이 머리 위로 우수수 떨어졌다. 유진은 머리를 대충 털며 거리를 나섰다. 날밤을 지새운 탓인지 눈꺼풀이 영 무거웠다.
익숙한 걸음으로 광장에 향했다. 다다르자마자 구석진 자리에 자리 잡은 차유진은 이내 늘어지게 하품했다. 졸려. 두 눈을 벅벅 비볐다. 눈이 붉게 충혈됐을 게 뻔하지만, 뭐. 사실 아무래도 상관은 없었다. 볼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유진은 벽에 머리를 기대고 잠시 심호흡했다. 졸음을 쫓으려면 심호흡만큼 좋은 것도 없으니까…….
“……차유진!”
유진은 자신을 부르는 큰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흘러내리던 몸이 반사적으로 튕기며 거세게 진동한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머리가 찡하고 아팠다. 아으. 나직이 앓으며 관자놀이를 쿡쿡 누르는데 조금은 차가운 손이 뺨에 닿았다. 너 괜찮아? 어쩐지 평소보다 조금 더 험악해진 듯한 래빈이었다.
“김래빈?”
“너 길바닥 아무 데서나 자면 어떡해. 큰일 나.”
“나 잤어?”
오. 유진은 헛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좀 피곤하다 싶었는데 냅다 잠들 줄은. 귀중품 같은 건 없었으나 이런 광장에서 잠들었다간 밑천까지 탈탈 털려 먹힌대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래도 입었던 옷 그대로 입고 있긴 하네. 불행 중 다행이다. 옷매무시를 가다듬자 무릎 꿇고 눈 맞추던 래빈이 몸을 일으켰다. 오늘도 어김없이 편안한 후드티 차림이었다. 겨드랑이에는 묘한 공책을 끼고 있다는 점이 유일한 차이랄까.
“그거 뭐야?”
유진이 옷을 털고 일어나며 물었다. 래빈은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가 이따가 말해줄게, 하고 대충 얼버무린다. 유진은 구태여 캐묻지 않았다. 대신 힘차게 기지개를 켜고.
“잠 다 깼으면 가자.”
“응.”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사이좋게 발맞추어 걷기 시작했다.
거처로 돌아가는 동안 유진과 래빈은 긴말을 나누진 않았다. 그네들 사이는 이제 침묵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쯤 됐다. 유진은 피로에 연신 하품했고 래빈은 품에 낀 공책 끄트머리를 자꾸만 만지작거렸다. 계단을 오르고 헐거운 대문을 넘어 현관문을 닫을 때까지. 계속. 좀 쌀쌀한 감이 있어 늙은 히터를 만지작거리는데 그제야 래빈이 말했다. 있잖아, 차유진. 유진은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응?
“너 가사 잘 지어?”
“Ha?”
“좀……. 안 풀리는 부분이 있어서. 같이 상의해도 괜찮을까 싶어서 가져왔거든.”
“김래빈 노래도 만들어?”
“그냥 취미로. 오르골로 조금…….”
“멋지다.”
아, 마침내. 낡은 히터가 털털 소리를 내며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유진은 그 앞에 털푸덕 주저앉고는 손짓했다. 뒤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던 래빈이 그제야 다가와 앉았다. 품에 있던 공책을 조심스레 펼치자 새까맣고 단정한 글씨가 시야에 가득 차올랐다. 오. 아무래도 말마따나 무언가 가사인 듯했다.
“어디? 나 멜로디 들어야 해.”
“당장 들려줄 수는 없는데……. 딴, 따라라, 하면서 좀 스윙 느낌 나게 구현해보고 있거든.”
래빈이 가볍게 흥얼거리며 공책 한 부분을 짚었다. 여기. 어감을 맞추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 돼서. 뒤통수를 긁적이는 래빈을 바라보던 유진은 그냥 킥킥댔다.
“나 근데 김래빈보다 한국어 못하는데.”
“한국어 아니어도 돼. 스페인어나 영어도 괜찮아.”
“Hmm.”
유진도 따라서 흥얼거려봤다. 박자감을 중요하게 잡으면서 라임을 넣으면 좋을 것 같은데. 그렇지? 그래서 이런저런 시도를 해봤는데 영 마음에 안 차더라고. 그래서. 앞뒤 가사를 쭉 읽었다. 가사만 봐서는 부드러운 사랑 노래 같기는 한데, 멜로디랑 같이 생각해 보면 사랑보다는 이별에 가깝게 다가온다. 손가락 두드리는 소리가 일정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유진은 눈만 깜빡이다가 음, 음, 가볍게 목을 가다듬고는.
“Maybe We shall dive, into the sorrow night…….”
“…….”
“Until the last, we shall slip, just into the sorrow light…… 같은 느낌은.”
공책에 시선을 집중했던 차유진이 고개를 든다. 김래빈?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내뱉은 의아함은 얼마 가지 않아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어쩐지 넋을 놓고 있던 김래빈이 퍼뜩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아, 응. 응. 좋다. 뭐라고 했지? 그거 그대로 반복해달라며 펜을 드는 손이 살짝 떨린다. 유진의 날카로운 눈은 천천히 래빈의 얼굴에 꽂혔다. 얼굴은 평소처럼 희고 창백한 주제에 귀는 시뻘겋고.
그러고 보니 김래빈. 공책 한 권을 가사로 꽉 채울 만큼 작사에 일가견 있는 김래빈이 작업이 영 안 풀린다며 영어 가사를 부탁하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 점점 가늘어지는 차유진의 시선이 슬쩍 공책으로 떨어졌다. 역시. 적힌 가사들은 전부 한국어다. 기껏해야 스페인어 한두 마디만 간간이 있지. 갑자기 영어를? 나한테? 바닥을 두드리던 박자가 점점 빨라진다. 공책에 향하던 시선은 다시금 들려 래빈의 얼굴로 향하고.
“김래빈.”
“다시. 다시 한번만. 너무 빨라서 못 들었어.”
“이거 듀엣이야?”
바삐 움직이던 손이 뚝. 흘러나오던 음악의 등허리를 끊어낸 것처럼 움직임이 순식간에 멎는다. 고개를 처박은 래빈은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유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가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오, 마이, 갓.
“진짜?”
“…….”
“진짜로? 이거 듀엣이야? 김래빈이랑 나?”
조금은 침착하던 목소리에 서서히 열기가 깃들었다. 말이 점차 빨라졌다. 오 마이 갓. 오 마이 갓! 눈을 홉떴다는 것도 모른 채 차유진이 냅다 상체부터 들이밀었다. 진짜로? 노래는 전부 들어보지 못했으나 짧은 흥얼거림만으로도 유진은 알았다. 이건 좋은 노래였다. 아주 좋은 노래! 유진의 시선을 필사적으로 피하던 래빈은 끈질긴 지분거림에 결국 소리를 꽥 질렀다. 기어코 눈은 안 마주치면서.
“그냥 항상 너랑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해왔을 뿐이야! 딱히 듀엣으로 상정하고 만들진 않았지만 구상 과정에서 빈 부분이 생겼고 채울 사람은 나밖에 떠오르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들린 걸 거고!”
“그게 듀엣 아니야?”
“아니……!”
래빈이 그제야 고개를 팩 돌렸다. 그리고 마주쳤다. 시선이. 코앞에서. 유진은 순간 터지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얼빠진 래빈의 눈동자에 비친 제 모습이 마치 신기한 장난감을 받은 꼬마애를 닮아서.
“이거 멋져.”
“……너한테 더 잘 어울릴 거야.”
“나중에 완성하면 들려줘. 같이 부르자.”
응? 부러 목소리를 끌자 래빈이 한숨을 푹 쉬었다. 유진을 밀어내는 손길이 어쩐지 조금은 부드럽다. 옷깃을 팔랑거리는 래빈의 시선이 공책에 꽂혔다. 유진은 히히 웃으며 펜을 뺏었다. 그리곤 흥얼거렸던 가사를 그대로 옮겨적는다. 조금 우울한 분위기지만 뭐 어때. 나중에 고치면 되지. 마침표까지 착실하게 찍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래빈은 여전히 공책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부를 거지?”
한참 후에야 래빈은 눈을 맞추지 않은 채 대답했다.
“응.”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사흘이 되던 날 씽코는 홀로 유진의 집에 들렀다. 적어도 이런 걸 준비해놓으면 편하다며 준비물을 줄줄 읊고는 또 훌쩍 떠났다. 그리고 또 하루. 이틀. 사흘. 준비물은 다 챙겼냐며 우노가 기웃거렸다. 누가 보면 당장 내일 떠나는 줄 알겠다며 코웃음 쳤지만 우노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방까지 밀고 들어오더니 구석에 던져놓은 배낭을 보며 비식 웃었다.
그리고 다시 하루. 이틀. 사흘째 되던 날 유진은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래빈이 안 보였다. 광장에 가면 하루걸러 하루쯤 보였는데 벌써 열흘이 되도록 없었다. 유진은 그날 해가 떴을 때 광장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며 시간을 허비했다. 결국 래빈은 못 만났으나 씀씀이 좋은 상인에게 공짜 샌드위치를 얻어먹었으니 아주 실패한 외출은 아니었다.
그날 밤 유진은 매트리스에 누워 있었다. 깊은 잠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졸고 있었다. 십 분이라는 시간만 더 주어졌다면 금세 꿈나라에 빠졌을 터였다. 하지만 세상은 유진에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꾸벅꾸벅 졸던 유진은 대문을 두드리는 다급한 소음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대문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철판이 당장이라도 부서질 듯 덜그럭거렸다. 밖에서 누군가가 목소리 높여 그를 불렀다. 이그나시오! 일어나, 이그나시오! 우노였다. 생전 들어본 적 없는 다급한 목소리로 우노가 유진을 부르고 있었다.
순간 머리에 찬물이라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유진은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켜 문으로 달려갔다. 경첩이 거의 뜯어진 대문을 박차고 열자 땀에 젖은 우노가 무너지듯 쓰러졌다. 억센 손이 유진의 양어깨를 파고들었다. 왜 그래요, 하고 물을 새도 없었다. 곧장 뒤를 돈 우노가 유진을 이끌고 뛰기 시작한 것이다.
“잠깐, 기다려요. 우노. 우노! 무슨 일이에요? 왜…….”
“조용히 해. 입 다물어, 이그나시오. 말하지 마.”
“설명을 해줘야 입을 닥치든 말든 할 거 아니에요!”
유진이 목소리를 높이려던 찰나에 우노가 모퉁이를 꺾었다. 파란 대문이 눈에 들어왔다. 우노의 집이다. 우노는 대문을 박차고 들어가 유진을 질질 끌었다. 다 버려진 창고 입구를 막은 널빤지를 맨손으로 뜯어내곤 유진을 막무가내로 밀어 넣었다. 안에선 녹슨 쇠와 곰팡내가 진동했다. 그제야 손을 뿌리친 유진이 우노를 돌아봤다. 씨근거리는 숨으로 당장이라도 쏘아붙일 것처럼.
그러다가 할 말을 잃었다. 땀에 젖은 머리칼이 달라붙은 얼굴. 그 위에 번진 파리한 미소.
저 멀리서 벼락같은 고함이 들린 순간 유진은 깨달았다. 페로 로꼬. 그리고 그의 해적. 라보 데 누베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 했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하루아침에 라보 데 누베가 쫓아왔냐고, 도망치려는 계획은 어쩔 거냐고 물으려 했다. 당신이 그토록 애정하는 메노르는 어디에 있냐고. 씽코는 대체 뭘 하고 있냐고 하나하나 꼬치꼬치 캐물으려 했는데.
“……당신 죽어요?”
입을 열자 생뚱맞은 소리가 튀어나온다. 목소리가 떨렸다. 목이 따끔거렸다. 단숨에 우노의 집으로 올라서서가 아니다. 한숨도 쉬지 않고 뛰어서가 아니라. 목구멍에 무언가 꽉 막힌 듯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땀에 푹 젖은 채 우노는 그냥 웃었다.
“기다려요. 우노.”
“이그나시오. 부탁 하나만 할게.”
“당신이 죽는다곤 말 안 했잖아요.”
“메노르를 부탁해.”
“버리지 못할 거라는 게 이런 뜻이었어요?”
“나는 널 믿어.”
우노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깊은 곳에 들어가 있어. 아무도 널 찾지 못하게. 억센 손길이 유진을 밀었다. 손이 미는 대로 두어 걸음 물러난다. 그러자 문이 닫혔다. 덜컹. 걸쇠가 잠기는 동시에 들이닥치는 소음.
어둡다. 시끄럽다. 쿵쿵거리는 심장이 귓가를 가득 메운다. 짜고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머리가 어지럽다. 숨을 쉴 수가 없어. 바깥에서 고함과 총성이 울렸다. 문이 몇 번이고 덜컹거렸다. 그러다가 마침내 찾아오는 적막.
“쥐새끼 한 마리도 놓치지 마!”
거친 목소리. 유진은 불현듯 떠올린다. 제 목덜미를 들어 잡았던 남자. 당신 말버릇인가요, 사람을 쥐새끼라고 부르는 건? 와중에도 생뚱맞은 질문만 멍하니 떠오른다. 숨이 밭았다. 가슴이 답답하다. 축축한 손바닥을 옷자락에 문질렀다. 우노. 우노는 어떻게 됐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유진은 천천히 두어 걸음 물러났다. 나가선 안 된다. 지금 나가 봤자 개죽음밖에 더 당할까. 유진은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고 언제나 그렇게 살아왔다.
그때 문이 덜걱거렸다. 누군가 거세게 부딪친다기보단 닫힌 것을 열기 위한 소리였다. 유진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깊이. 깊이 들어가자. 아무도 찾지 못하게. 발을 돌린다. 짙은 쇠 비린내가 난다. 그 틈바구니로 몸을 구겨 넣고 숨을 죽였다. 끼이익, 낡은 경첩이 죽어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섰다.
저벅. 저벅. 구둣발 소리가 일정하다. 빛 한 점 없어 상대를 볼 수가 없었다. 대신 탄내가 났다. 화약 냄새였다. 아. 유진은 우습게도 그 순간 불꽃놀이를 떠올렸다. 언젠가 바닷가에서 가족과 함께 보았던 화려한 불꽃놀이. 검은 밤하늘을 가득 메우고 제 몸을 터트리던 화약들의 향연.
“……아.”
올려다본 곳엔 불꽃 대신 잠잠한 눈이 있었다. 엇물리는 시선. 상대가 눈을 깜빡인다. 입이 벌어졌다. 얼굴 위로 쏟아지는 것은 뜨거운 빛이 아닌 서늘한 그림자. 곁엔 박장대소를 터트리는 누나와 형 대신 쇠 비린내 나는 정체 모를 것들뿐이고.
“[거기 뭐가 있어?]”
누군가 다가오며 묻는다. 상대는 한참을 입을 다물다가 끝끝내 대답한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전히 딱딱하고 틀에 박힌 스페인어. 그럼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어서 나와. 다소 거친 말이 쏟아지지만 그는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듯 눈만 깜빡이고.
“……여기 있어.”
다정한 말을 속삭인 채 느리게 떠난다.
문이 닫혔다. 유진만이 남았다. 유진은 그제야 느리게 입을 틀어막았다. 심장이 뛴다.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슬프지 않다. 당혹스럽지도 않다. 당황하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은 처음부터 짐작하고 있었는지도 몰라서.
래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