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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아지랑이

"와 미친. 여름이었다."
차유진은 낄낄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반 애들이 옹기종기 창가에 모여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자그마한 머리통들이 오밀조밀 몰려있는 꼴은 마치 언젠가 마셨던 버블티의 타피오카 펄 같았다. 반에서 제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라곤 자신밖에 없었다.
작은 교실 창가에 스물댓 명이 다닥다닥 붙어 있으니 영 불편해 보였다. 그러나 막상 틈바구니에 끼인 애들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깔깔대기 바빴다. 서로 마구 눈치를 보면서도 터지려는 웃음을 참느라 볼이 빵빵했다.
이쯤 되면 가만히 앉아서 늘어져 있던 차유진도 슬슬 신경 쓰였다. 교실에선 운동장도 제대로 안 보였다. 서로 엇갈린 구름다리만 보였는데 그 탓인지 애들은 항상 불만이 많았다. 기왕이면 좀 더 탁 트인 정경이었더라면 좋았겠다면서. 지금 열광하는 꼴을 보면 믿기지도 않을 테지만. 열여덟이라서 그런가 애들 마음이 좀 제멋대로였다.
마침내 차유진이 몸을 일으켰다. 쨍한 햇볕이 열린 창틈으로 쏟아진 탓이었다. 눈이 부셔서 잠은커녕 눈을 붙이기도 힘들었다. 더위에 져서 끙끙 앓을 바에는 그냥 저 열기에 뛰어드는 게 나았다. 결심한 차유진이 두어 걸음 내디뎌 인파에 끼어들었다. 슬쩍 다가서기만 했는데 알아서 자리가 열렸다. 자연스럽게 땡큐, 하며 고개를 디밀자마자 주위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차유진 떄문은 아니었다.
구름다리에는 웬 모르는 여자애와 남자애가 있었다. 건너편 본관에서도 아이들이 다닥다닥 들러붙어 고개를 내민 채였다. 이름 모를 애들은 머뭇거리더니 손을 잡았다. 그러자 한층 격해진 환호와 욕지거리가 뒤섞여 날아갔다. 차유진은 단박에 상황을 파악했다. 서울이든 캘리포니아든 가장 재밌는 구경은 쌈박질과 고백인가 보다.
"여름이었다 진짜……."
옆에서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차유진은 고개를 들어 시퍼런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한 점 안 보였다. 매미 소리만 계속 울렸다. 진짜로 여름이었다.
01.
날이 더웠다. 복잡한 어른의 사정이란 명목 아래 돌연 한국에서 살게 된 여섯 살 먹은 유진 이그나시오 차의 인내심을 훅훅 깎아 먹기 최적화된 온도였다. 여기엔 풋볼 필드도, 톰앤 톰슨 아이스크림 전문점도, 하다못해 흔해 빠진 피자점 하나 없었다. 있는 거라곤 귀청 떨어지게 울어대는 징그러운 벌레들과 끝도 없이 펼쳐진 풀, 풀, 풀이 전부였다. 아. 그리고 드문드문 지어진 헐거운 집들도.
말하자면 마음에 들지 않는 것투성이란 소리였다. 형과 누나는 그곳 교육이 익숙할 거라는 핑계로 캘리포니아에 남았다. 동생인 가비에게 붙은 건 너무 어려서 타지 생활이 힘들 거라는 이유였다. 결국 애매하게 낀 유진만 한국 시골 마을에 아빠와 덩그러니 떨어졌다. 친구고 이웃이고 하물며 반려견까지 전부 두고.
게다가 아빠는 바빴다. 이 작은 시골 마을에서 뭐 그리 할 일이 많은지 아침 일찍 나갔다가 저녁 늦게 돌아왔다. 유진 이그나시오 차는 분명 또래에 비해 의젓했으나 그게 곧 온종일 혼자 남겨져도 괜찮다는 뜻은 아니었다. 하루 이틀은 참을 수 있었으나 매일 같이 넓게 난 마루에 앉아 다리 흔드는 일상은 유진에게는 너무나도 무료했다. 할 일을 찾기가 힘들었다. 옆집 김 씨 할머니네 비닐하우스에서 딸기 얻어먹는 게 유일한 낙이었으나, 그 짓도 일주일쯤 거듭하니 금세 질렸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시골 마을에 도착한 지 딱 한 달이 되던 날 유진이 발딱 일어난 까닭은.
해가 중천이었다. 어른들 말을 빌리자면 '완연한 낮이었다'. 매미는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목이 터지라 울어댔다. 옆집 사는 김 씨 할머니는 밭일하러 나가신 듯했다. 김 씨 할머니 댁을 제한다면 가장 가까운 집은 유진의 작은 걸음으로 오 분 거리에 있었다. 다른 말로 바꾸자면 김 씨 할머니가 아니면 완전 범죄를 저지르려는 유진 이그나시오 차를 막을 사람은 없다는 거였다! 유진은 신발을 꿰어 신고 모자를 푹 눌러썼다. 흥겨운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대문 밖에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주위를 휙휙 둘러보는 시선이 제법 매서웠다. 좋아, 올 클리어. 비닐하우스 안에서 어른들이 오가는 모습까진 뿌옇게 보였으나 길은 탁 트였다. 유진은 잠시 비닐하우스 눈치를 보다가 냅다 뛰기 시작했다. 유진은 자신이 무엇을 왜 하는지 정확히 알았다. 항상 그랬다.
그래서 유진은 알고 있었다. 이 울퉁불퉁한 길은 따라 쭉 걷다 보면 마을 입구나 다름없는 산등성이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또 그 산을 넘으면 도시가 나온다는 것까지. 유진은 자신이 홀로 캘리포니아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달이 넘도록 입에 대기는커녕 구경도 못 한 피자와 아이스크림 정도는 살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울퉁불퉁한 도로를 열심히 달리던 때까지 유진의 계획은 간단했다. 첫째. 도시에 간다. 둘째. 아이스크림과 피자를 산다. 셋째. 아빠가 돌아오기 전까지 마을로 돌아온다! 아빠는 매일 해가 진 후에 비척비척 들어왔으니 불가능해 보이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