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사라져버린 이후 나는 전율하는 모든 순간들에게
묵념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어요
타인의 일기 중, 박서영
유리창 산산이 부수고
아아 창공을 날고 싶다
그러나
미치지 않고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춤 중, 박경리
가령 이런 것이다
몇이 모여 오랜만에 종이배를 접어보지만
한 명도 제대로 접지 못할 때
나는 종이배에 적힌 문장들과 함께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종이배를 접지 못하여 중, 박서영
정확한 버스 노선을 따라가는 당신 뒤에서
이해할 수 없는 꽃송이들, 눈송이들, 흰 주먹들이 떨어진다
어떻게 녹아내려야 하고 멈춰야 하고
사라져야 하는가
어떻게 이별하고 잊어야 하고 퇴장해야 하는지
계속 물었는데 아무도 답이 없다
미행 중, 박서영
축복으로 주어진 삶이 아니더라도
꺼진 불씨가 남긴 재가 절망한 손끝을 더럽히는 날에도
삶이 기만하여 희망이 자취를 감추고
죽음의 온화한 바람만이 안락한 벼랑 끝으로 손짓할지라도
생명이 내내 찾아 헤맬 포옹이 소멸 속에서
다정히 기다릴지라도
사랑하는 이들이여
내 죽음의 모습은 온유로 나아가
더 이상 몰아치지 못하는 바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중, 윤희준
해명할 수 없는 은빛 벽 뒤편으로
세계가
정적처럼 안장되었다
일생의 대화는 허공의
먼지처럼 날고, 슬픔은
제 무게를 가누며 가라앉는다
그리움은 일생만큼 길다
마지막 순간
다 자란 슬픔을 짐 지워 보내리라
소리는 지상에 머물고,
삶은 떠나가고…
그리운 모습으로 중, 윤희준
우리는 상처투성이였고, 지쳤고, 엉망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남았다. 세상에 마지막 남은 하나가 되었지만 복수를 할 수 없는 흰바위코뿔소와 불운한 검은 점이 박힌 알에서 목숨을 빚지고 태어난 어린 펭귄이었지만, 우리는 긴긴밤을 넘어, 그렇게 살아남았다.
긴긴밤 중, 루리
“날 사랑하지 마. 그건 네 불행이야. 알겠니? 넌 내 울타리야. 너는 나의 형제야.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야. 운명을 거역하지 마. 날 사랑하지도 마.”
남기야, 제발 날 사랑하지 말아. 그건 네 날개를 완전히 꺾어버리고 마는 짓이야.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중, 양귀자
찬란한 것.
어슴푸레하게 밝은 것.
그늘진 것.
안경을 쓰지 않은 채, 그 몇 가지의 표현으로 바꿀 수 없는 미세한 조도의 차이를 관찰하며 며칠째 누워 있어.
이해할 수 없어.
네가 죽었는데 모든 것이 떨어져 나갔다고 느껴진다.
단지 네가 죽었는데.
내가 가진 모든 기억이 피를 흘린다고, 급격하게 얼룩지고 있다고, 녹슬어간다고, 바스라지고 있다고 느낀다.
희랍어시간 중, 한강
그 쓸쓸한 몸은 이제 죽었니.
네 몸은 가끔 나를 기억했니.
내 몸은 지금 이 순간 네 몸을 기억해.
그 짧고 고통스러웠던 포옹을.
떨리던 네 손과 따스한 얼굴을.
눈에 고인 눈물을.
희랍어시간 중, 한강
너와 함께 내가 보낸 그 긴 시간 동안, 그 어떤 질문과 대답, 어떤 인용과 암시와 논증보다 절실하게 너에게 건네고 싶었던 말은 어쩌면 정작 이런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어.
우리가 가진 가장 약하고 연하고 쓸쓸한 것, 바로 우리 생명을 언젠가 물질의 세계에 반납할 때, 어떤 대가도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언젠가 그 순간이 나에게 찾아왔을 때, 내가 이끌고 온 모든 경험의 기억을 나는 결코 아름다웠다고만은 기억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렇게 남루한 맥락에서 나는 플라톤을 이해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라고.
그 역시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라고.
완전한 것은 영원히 없다는 사실을. 적어도 이 세상에는.
희랍어시간 중, 한강
이상하다.
언젠가 꼭 이런 밤을 겪은 것 같다.
비슷한 수치와 당혹감을 느끼며 이 길을 걸었던 것 같다.
그때에는 그녀에게 말이 있었으므로, 감정들은 더 분명하고 강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몸속에는 말이 없다.
단어와 문장들은 마치 혼령처럼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보이고 들릴 만큼만 가깝게 따라다닌다.
그 거리 덕분에, 충분히 강하지 않은 감정들은 마치 접착력이 약한 테이프 조각들처럼 이내 떨어져 나간다.
그녀는 다만 바라본다. 바라보면서, 바라보는 어떤 것도 언어로 번역하지 않는다.
눈에는 계속해서 다른 사물들의 상이 맴ㅈ히고, 그녀가 걷는 속력에 따라 움직이며 지워진다. 지워지면서, 어떤 말로도 끝내 번역되지 않는다.
희랍어시간 중, 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