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고통과 찬란한 평화를 꿈꾼다
리뷰
사실 싯다르타를 읽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기억도 안 날 만큼 사소하다. 읽은 것도 제법 오래 전이라… 기억을 더듬어야만 한다. 일단 대충 생각나는 건 대체로 두 가지. 첫째, 기대했던 젊은 작가 책이 너무 실망스러웠다(이거는… 길게 한탄한 글이 있어서. 그런데 요즘은 또 생각이 좀 다르기는 해.). 그리고 둘째, 세문전을 언제 한번 읽어야 한다고 다짐하던 와중에 교보문고에서 싯다르타를 맞닥뜨렸다.
사실 그때 당시 나는 "언제 한번 세문전도 읽어봐야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뿐, 정확히 무엇을 읽겠다는 명확한 목표는 없었다. 교보문고에서 세문전을 주르륵 마주쳤을 때만 하더라도 뭘 사야 할지 고민했다. 후보군은 많았다. 유명한 1984, 유튜버가 추천해서 관심을 가졌던 헌등사, 기타 등등… 사실 원래는 헌등사를 사려고 했는데 품절이었다. 그럼 진짜 뭐 사지? 고민하던 때 마주한 게 싯다르타였다.
싯다르타. 일단 제목을 들어만 봤다. 불교에는 조예가 깊지 않은 터라 설명이 영 애매하기는 하지만… 부처 중 하나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런 내가 싯다르타를 구매하도록 이끈 건 뒷표지에 적힌 설명 문구 중 일부였다. "『싯다르타』는 헤세가 거의 일 년 반 동안 창작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심한 우울증을 앓다가 정신 치료를 받은 후 발표한 작품이다. 동서양의 정신적 유산을 시적으로 승화한 일종의 종교적 성장소설로 볼 수 있는데 영원을 향한 갈망과 인간의 내면을 깊이 파고드는 초월에 대한 의지를 단순하고도 서정적인 문체로 담아냈다." 이 내용을 보고서 정신 차려보니 결제한 뒤였다(…).
앞선 글들에서도 종종 언급했지만, 나는 우울증을 오랜 시간 앓아왔다. 기억하는 대부분의 순간에서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긴 시간 동안 앓느라 기억력도 많이 저하됐다). 자해나 자살 사고는 심심하면 불쑥 올라오는… 결도 안 맞고 성격도 우악스러운데 영 떨칠 수가 없는 친구 같은 존재다. 그래서인지 고난과 시련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결국에는 이겨낼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은 성장 소설들을 좋아한다. 그래서였다. 조금 천박한 어투로 표현하자면, "헤르만 헤세가 말아주는 성장 소설을 어떻게 참는데?"
감상을 가감없이 이야기하자면, 우선 초반부는 지루했다. 초중반까지는 내가 이걸 왜 읽고 있지, 하는 생각에 눈 뻑뻑 문질러가며 읽었다. 그런데 이해는 한다. 글이라는 게 원래 도파민 터지는 구간은 후반부에 몰아 있는 게 상당히 정석적인 구성이니까(애초에 기승전결 맞춰 쓰다 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고전 특유의… 여성관 같은 게 심심찮게 나오는데, 고전치고는 그래도 여성 캐릭터 사용이 굉장히 세련되었다고 생각한다. 눈살을 좀 찌푸릴 수는 있어도 이것 때문에 이 책 못 읽겠어요, 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나를 완전히 매혹한 건 중후반부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강가에서> 챕터 초중반 즈음. 너무… 너무 좋은 문장을 마주쳤다.
앞으로 나의 길이 나를 어디로 끌고 갈까? 그 길은 괴상하게 나 있을 테지, 어쩌면 그 길은 꼬불꼬불한 길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 길은 원형의 순환 도로일지도 모르지. 나고 싶은 대로 나 있으라지. 그 길이 어떻게 나 있든 상관없이 나는 그 길을 가야지. (싯다르타, 140p.g 중)
이 문장이 정말 심금을 울렸다. 그게 정확히 맞는 표현이다. 심금을 울렸다. 미래에 관한 고민을 항상 지니고 있었는데, 이 문장이 내 불안을 조금이나마 누그러트려 주었다.
두 번째로 좋았던 건 카말라의 죽음 파트였다. 이 부분은 지금도 오랫동안 머무르게 된다. 한참… 정말 한참을 바라보게 되는 문장이다.
"당신은 그것을 얻으셨나요?" 그녀가 물었다. "당신은 평화를 얻으셨어요?"
그러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그녀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이 보여요." 그녀가 말하였다. "그것이 보인단 말이에요. 나도 평화를 얻을 거예요."
"당신은 평화를 얻었소." 싯다르타가 속삭이는 소리로 말하였다. (싯다르타, 164p.g 중)
그냥… 마냥 존경스럽다. 어떻게 이런 문장을 쓰지?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냔 말이야 사람이… 어떻게 하면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 되지? 잔잔하고 평온하지만 심장에 퍼지는 울림에 몸 전체가 떨리는 기분이다. 이 부분에서 정말 한참을… 한참을 우두커니 있었다. 책장을 넘기기는커녕 다음 문장으로도 차마 넘어가지 못하고서.
평화를 얻고 싶었다. 오랫동안. 사는 게 너무 힘들었다. 지난했다. 너무 쉽게 지쳤고 그런 내게 단념은 지나치게 간편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막상 전부 포기하고 나니 내게 남은 게 없다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었다. 정말로, 진심으로, 평화를 원했다. 더는 힘들고 싶지 않았다. 아주 야트막하게 알 뿐이지만, 불교 사상에서는 삶이 고통이며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라고 들었다. 이게 정말이라면 나는 불교와 그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일 성싶었다. 그만큼 내게 삶은 고통스러웠다.
어렸을 적 꿈은 해파리, 고래, 새. 아무튼 간에 이 인간 사회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지금도 그런 마음이 아예 없다고는 못한다. 50억 부자가 될래, 해파리가 될래, 하면 고민할 정도로. 사회 부적응자다… 그렇다. 자본주의는 지나치게 가혹하고 사회는 불평등하며 내가 그 불평등의 수혜자라는 사실이, 의도하지 않더라도 많은 순간 자본의 착취에 가담하고 간접적으로나마 누군가를 죽이는 데에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도무지 견딜 수가 없다. 사회의 모든 것에 넌더리가 나는데 공황과 불안이 심해 광장에 나가지도 못한다. 할 수 있는 건 나 대신 투쟁하는 이들에게 소액이나마 돈을 보내면서 스스로 자위하는 일뿐이다. 사회의 일원으로 사는 데에 염증이 났다. (이렇게 쭉 적고 보니 진짜 사회 부적응자 같다… 맞긴 해.)
이것도 저것도 고통인 내가 진정 바라왔던 것이 평화라는 사실을, 이 대목을 읽으며 불현듯 깨달았다. 동시에 위로도 받은 것 같다. 삶이 고통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평화는 언젠가 오고야 만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설령 그것이 죽음이라는 형태를 입고 있더라도. 그리고 이 깨달음은 얼마 지나지 않은 <옴> 챕터의 두 번째 문단에서 해답을 제시하듯 길을 내보였다.
이 모든 단순하고 어리석은, 그렇지만 어마어마하게 강한, 억센 생명력을 지닌, 끝까지 강력하게 밀어붙여 확고한 자리를 굳히는 충동들과 탐욕들이 싯다르타에게는 이제 더 이상 결코 어린애 같은 짓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는 바로 그런 것들 때문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바로 그런 것들 때문에 사람들이 무한한 업적을 이루고, 여행을 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무한한 고통을 겪고, 무한한 고통을 감수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을 사랑할 수 있었으며, 그는 그들의 모든 욕정들과 행위들 하나하나에서 바로 생명, 그 생동하는 것, 그 불멸의 것, 범을 보았다. 그런 인간들은 바로 그들의 맹목적인 성실성, 맹목적인 강력함과 끈질김으로 인하여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고 경탄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싯다르타, 187p.g ~ 188p.g)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이유, 삶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바로 생명을 지녔기 때문이라는 것. 그러니까, 살아 있기에 고통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고통이야말로 우리를 생동하게 한다는 것.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이야기다. 나는 살아 있기에 고통스럽지만, 고통스럽기 때문에 살아 있으며 고통이 나를 살게 한다. 고통스럽게 살아내는 우리는 그 자체로 사랑할 가치가 있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저 대목은 문단이 상당히 두꺼운데, 그 문단을 통째로 밑줄 치고 싶었다. 되짚는 지금도 코가 찡해질 만큼 내게는 크게 와닿았다. 좋았다… 좋았다는 말밖에는 할 수 없다. 가장 좋아하는 책이 뭐냐고 묻는다면 싯다르타라고 자신 있게 답하게 되었을 정도로 좋았다. 고전에는 낭만과 감동과 교훈이 있다… 얘들아 그러니까 우리 같이 고전 읽자.
싯다르타를 시작으로 이런저런 세문전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사둔 건 많은데 완독한 건 별로 없다. 열심히 읽어야지. 나는 젊은 작가보다는 고전이 조금 더 취향인 것 같다. 고전이 고전인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잖아. 싯다르타는 그 "이유"를 내게 몹시 명확히, 아주 명징하게 알려주었다.
뇌를 지지고 싶어서 무턱대고 후기 쓸 책 없나 찾다가 시작한 글이었는데, 덕분에 마음이 조금 더 풍족해진 기분이다. 싯다르타를 고르길 잘했어. 마음이 자꾸만 갈라지고 삶이 너무 고통스럽다면 강력하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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