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된 불행과 와닿는 위로 포스터

조형된 불행과 와닿는 위로

과잉 무지개
★★☆☆☆
관람일 2025-11-10
국가 한국
장르 소설
감독 김용재

리뷰

과잉 무지개. 사실 큰 관심은 없었다. 트위터에서 바이럴 타는 걸 본 적이 있었는데… 이전 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했던가?) 나는 사실 트위터에서 바이럴되는 소설들, 특히 젊은 작가 소설들에는 큰 관심이 없는 편이다. 조각난 문장으로 알티를 태우고 이 문장이 너무 좋다고 호들갑을 떨어서 무슨 내용이길래?하고 샀더니… (이하 생략). 아무튼, 과잉 무지개의 첫 인상도 그랬다. 아, 이거. 트위터에서 알티 탔던 그거. 그런데 왜 샀냐? 이야기가 길다. 간단하게 축약하자면 울분이 차올라서 책을 무한 매입하던 와중에 눈이 마주쳤다(…).


총평부터 내리자면, 일단 읽기 쉽다. 킬링 타임용으로 괜찮을 것 같다. 그렇다고 내용이 아주 납작하거나 지나치게 가볍지도 않다. 전하려는 메시지가 확고했고, 그 명확한 주제 의식이 내게는 위로가 되어서 눈물이 좀 고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한텐 거기까지였다. 주제 의식에 크게 공감한 건 내 현재 상태나 내가 겪어온 과거가 있기에 일종의 트리거로 작용했기 때문이지, 절로 눈물이 날 만큼 절절한 글이라서는 아니라는 게 내 평이다.


내용은 간단하다. 자살하려던 주인공이 모종의 사건을 겪고 하나의 제안을 받는다. 백 일 후 고통 없이, 그리고 자신을 사회에 환원(장기 이식 등의 방식으로)하는 대신, 백 일 간 주인공에겐 매달 일정한 금액이 지급된다. 그뿐이 아니다. 무려 수천에 달하는 빚도 갚아준다! 이러한 제안에 주인공이 응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여기까지 보면 대강 견적이 나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도 대충 그랬다. 이런 글에서 주인공은 마지막에 가서 죽지 않는다. 죽으면 안 되는 것에 가깝다. 당연하다. "살다 보면 괜찮아진다", "삶에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주제 의식을 드러내기 위해 몇 만자를 썼는데, 마지막에 주인공이 죽는 것은 자신이 힘겹게 쌓아 올린 서사를 전면으로 부정하는 일이다. 과잉 무지개도 마찬가지였다.


백 일 동안 여러 사건을 겪으며 주인공은 성장한다. 간절히 바라던 죽음을 부정한다. 살고 싶어진다. 살 힘을 얻고, 희망을 얻는다. 그리고 결말부에 다다라서 자신이 쟁취한 결실, 살고자 하는 마음을 입 밖으로 냄으로써 그것을 취한다. 전형적인 성장 서사다. 우울증을 깊이 앓았고, 현재도 그 영향을 끊임없이 받는 사람으로서, 주기적으로 삶에 회의감을 느끼는 대상자로서,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위로…도 조금쯤 얻은 것 같기도 하다. 실제로 눈물도 고였으니까.


하지만 눈물이 고인 것치고 내가 이 소설을 냉정하게 평가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문장력. 둘째, 인위적인 사건. 셋째, 아쉬운 결말. 차례차례 이야기해 보겠다.


첫째로, 문장력. 서술문에서는 크게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힘을 주고 빼는 강약 조절도 괜찮았다고 본다. 하지만 대사. 대사가 지나치게 인위적이다. 이게 문체라고 해야 할지… 서술을 잘 읽다가 대화에 진입하는 순간 약간 몰입도가 깨진다. 이것이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이 사람들이 어디까지나 캐릭터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 같은 대화문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대화는 소설에 몰입도를 부여하는 역할도 수행해야 하는데, 과잉 무지개는 그런 면에서 볼 때 다소 아쉬웠다.


구성 자체는 빈틈없이 짜여 있다고 생각한다. 대화가 구성의 한 요소로 충실하게 일한다. 하지만 그뿐이다. 대화란 결국 캐릭터와 캐릭터의 담화다. 캐릭터들이 가장 직접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는 장치다. 대화에서 캐릭터성이 보여야 한다는 건 너무나도 당연하고 기초적인 일이다(대화로 캐릭터성을 잘 살리는 작가로는 백덕수 작가가 있겠지). 하지만 과잉 무지개에서 대화는 캐릭터가 아닌 작가의 말로 보였다. 캐릭터들이 하고자 하는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의 입을 빌려 작가가 말하는 것 같았다.


그게 무슨 문제냐고 되물을 수도 있겠다. 실제로 소설이라는 건 결국 캐릭터를 빌려 작가가 주제를 전달하는 매체니까. 그러나 대화는 캐릭터의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의견을 담은 캐릭터를 조성하고, 그 캐릭터가 글 속에서 살아 숨 쉬는 것으로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과잉 무지개는 아쉽다. 캐릭터가 자신의 의견을 대화로써 표출하는 것이 아닌, 대화를 나눌 때마다 작가가 대뜸 전면으로 나서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둘째, 인위적인 사건. 무엇을 의도했는지는 잘 알겠다. 이 글은 정말로 치밀하게 짜인 글이다. 구상에 많은 힘을 썼으리라고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주제 의식을 강조하기 위한 일련의 흐름이 지나치게 인위적이라는 생각이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A라는 캐릭터는 초콜릿을 싫어한다. 그렇지만 모종의 사유로 초콜릿을 먹어야 한다는 목표가 있다. 이때 작가는 A가 초콜릿에 거부감을 가지는 것을 묘사하고, 그 거부감을 차차 누그러뜨리는 모습을 묘사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쓴다. 초콜릿 향을 입힌 음식을 먹기, 초콜릿이 소량 함유된 음식을 먹기, 초콜릿 함유량을 천천히 늘리기 순으로 사건을 진행할 수 있겠다. 그러다가 마지막 결말에서, A는 초콜릿 하나를 완전히 먹음으로써 자신을 가로막았던 고난인 초콜릿을 뛰어넘는 것이다.


하지만 과잉 무지개에서 조성된 사건들은 그러지 않는다. 과잉 무지개를 구성하는 사건들은 지나치게 굵직하다. 물론 주인공에게는 도전과 좌절이 필수적이다. 주인공은 자신을 가로막는 고난을 이겨내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실패하고, 그 과정에서 단단해지며 점진적으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형태를 그린다. 과잉 무지개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내가 인위적으로 느꼈던 것은 바로 이 "주인공에게 부여되는 거듭되는 고난"이다.


할머니가 왜 죽어야 했나? 유기견 보호소는 왜 불타야 했고? 터진 사건은 크지만 그 사건을 십분 활용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이를테면, 할머니의 죽음을 통해 단순히 삶의 소중함뿐 아니라 죽음에 관한 고찰이 함께 나왔다면 어땠을까. 유기견 보호소가 불탄 사건이 주인공에게 무엇을 주었나. 푸름이를 바라보며 삶에의 미련을 가지게 된 것까지는 이해하지만, 그것과 보호소가 불탄 사건은 별개의 것이다. 푸름이가 좋은 주인을 찾아가게 된 사건으로의 활용? 고작 그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유기견 보호소를 통째로 불태우는 건 수지타산에 안 맞지 않은가?


사건은 그 크기가 커질수록 응당 그에 맞게 활용해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그건 결국 사건을 낭비하는 일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잉 무지개는 많이 아쉽다. 지나치게 큰 사건을 부여하지만 그것을 골수까지 활용했다는 인식을 주지 못한다. 그렇기에 사건은 이질적이고 인위적으로 다가온다. 온전히 활용하지 못했기에 유난히 툭 불거져 보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쉬운 결말. 이것은 두 번째와 결을 같이 한다. 일종의 반전을 노린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기야 한다. 하지만 반전이라는 건 결국 떡밥이 있어야 성립한다. 과잉 무지개는 결말(이 모든 건 죽고자 하는 사람들을 회생시키기 위한 절차였으며, 대부호가 뒷돈을 대어주고 있다)을 위해서 무슨 떡밥을 뿌렸나? 단 한 번이라도 이것과 관련된 이야기를 수면 위로 공고히 한 적 있던가? 내가 기억하는 한은 없다.


게다가 대부호가 대어주는 뒷돈으로 빚을 갚아주고, 백 일 동안 일정한 금액을 부여하며 삶의 의지를 되찾을 수 있게 돕는 단체라는 발상은 너무 유치하지 않은가? 만약 그 단체에 연락했는데, 빚이 수백 억이라서 갚아주지 못할 지경이라면? 그럼 그냥 죽게 둘 건가? 뒷돈을 대어주는 대부호에게 온전히 의지한다면, 그 대부호들이 손을 끊는 순간엔 어떻게 되는가? 우리나라 연금처럼 주식 투자로 돈을 마련하나? 판타지로 갈 거라면 완전한 판타지로, 현실적으로 갈 거라면 완전한 리얼리즘으로 가야 하는데, 어중간하다. 그리고 그 어중간함이 몰입도를 깨트린다.


어느 정도 틀이 잡혀 있다고는 하지만, 그런데도 전형적이다. 게다가 갑.튀.조(갑자기 튀어나온 조직)라는 인식을 지울 수가 없다. 소설을 진행하며 중간중간 관련된 말을 떡밥처럼 뿌려놔 윤곽을 잡게 했더라면 어땠을까. 반전이야 좋지만 예고 없는 반전은 땅에서 갑자기 물고기가 튀어나오는 격이다. 연못에서 예기치 못한 순간 물고기가 튀어나와야 사람들이 깜짝 놀라지, 땅에서 물고기가 튀어나오면 당혹스럽기만 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내게 과잉 무지개는 '뭘 말하려는지는 알겠지만 방식과 결말이 아쉬운' 글이 되겠다. 뜯어볼수록 아쉬운 구색이 드러난다고 느낀다. 하지만 킬링 타임용으로는 정말로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추천/비추천을 나눈다면 우선은 추천한다. 시간이 빌 때 붙잡고 가볍게 읽기 괜찮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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