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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상대성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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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 @admin
2025-11-29 22:27

래빈은 눈을 떴다.

아니, 눈을 감았는지도 모른다. 눈꺼풀이 안구를 덮었는지 드러냈는지 래빈으로선 확신할 수가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시야가 열렸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보였다. 보이기 시작했다. 초점이 맞지 않아 희끄무레하던 세상이 느리게 또렷해지는 감각. 그래서 래빈은 속으로 생각했다. 눈꺼풀이 들린 건 확실하다. 그런데 이게 내 의지인지 눈꺼풀이 뜯겨나가 그냥 보이게 된 건지 확신할 수가 없다. 여상스러운 태도로 래빈은 눈을 깜빡여봤다. 이번엔 확실한 의지가 깃든 움직임으로.

안구를 덮는 근육에 힘이 들어가더니 깜빡, 깜빡, 세상이 퓨즈 나간 전구처럼 점멸한다.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래빈은 그제야 자신의 가설을 고쳤다. 음. 눈을 뜬 게 맞는 듯하다. 눈꺼풀이 뜯겨나간 거라면 시야가 덮일 리도 없으니까.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니까. 그래서 래빈은 조금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몸을 일으켰다. 손과 발에, 그리하여 전신에 힘을 주고 조금씩 움찔거리다가 허리를 접어 앉았다. 주위를 둘러봤다. 열린 시야 속엔 먼지가 그득히 앉은 낡은 오두막이 들어찬다. 잠들기 전과 달라진 점은 그다지 없다. 아마도. 기껏해야 깨끗하게 닦아놓았던 가구 위에 먼지가 하얗게 보일 정도로 쌓였다는 점일까. 손을 들어 손가락을 만지작거린다. 손가락과 발가락 움직임은 멀쩡하다. 몸을 느리게 늘려본다. 어디 엇나가거나 부러진 곳은 없고.

마침내 땅을 딛고 일어선 래빈은 느린 걸음으로 나아갔다. 벽에 걸린 거울이 희뿌옜다. 잠들기 직전에 닦았는데. 중얼거리며 소맷단으로 거울 표면을 박박 문질렀다. 간신히 드러난 반질반질한 표면에 얼굴이 비친다. 새까만 머리와 형형한 삼백안. 짙은 눈그늘과 퀭한 인상.

김래빈이다. 주름 하나 없이 멀끔한 스물네댓의 인상.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음, 여전히 달라진 건 없다. 거울을 한참 노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틀었다. 아주 오랫동안 잠든 탓에 정신은 여즉 몽롱했다. 잠기운이 눅진하게 들러붙은 눈을 깜빡거리며 생각한다. 내가 왜 깨어났는가. 누군가 자신을 깨운 것도 아니고. 나무로 만든 가구들이 삭아 무너지지 않은 걸 보아 시간이 그리 오래되지도 않은 듯한데.

그러다 래빈의 예민한 귀가 커다란 소음을 잡아챘다. 멍하니 눈만 끔뻑이던 래빈이 발을 끌며 걸어갔다. 창문 너머 고개를 슬쩍 기울인다. 오. 아마도 소란스러운 바깥이 제 평온한 잠을 방해한 원인인 듯했다. 영화라도 찍나? 시답잖은 생각에 뺨만 긁적이다가 도로 걸음을 물렸다. 사실 밖에서 운석이 떨어지든 공룡이 되살아나든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관심도 없고.

래빈은 대신 침대맡에 도로 걸터앉았다. 여전히 조금은 어색한 다리를 자맥질하며 가만히 생각했다. 올해는 몇 년일까? 자신이 기억하는 마지막은, 그래, 이 낡은 오두막을 짓고 지친 몸을 이끌어 침대 위에 쓰러지듯 눕는……. 그때 세상은 제법 고요했다. 권태롭다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다른 말로 바꾸자면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의 잠을 깨울 만큼 거슬리는 소란은 없었다는 뜻이다.

쿵. 쿵. 무언가 거대한 힘이 제 몸을 견디지 못한 채 마구잡이로 흩어지고 발산하는 소리와 닮았다. 아니지. 래빈은 눈을 끔뻑이다가 가만히 고개를 기울였다. 누군가가 문을 거세게 두드리는 소리 같기도 하다. 누가 노크하는 건가? 그렇지만 이 오두막은, 래빈이 기억하기로 몹시 외진 곳에 있어 사람 발걸음 하나 닿지 않을 텐데. 물론 아주 오래전 이야기니까. 그새 개발되었을지도 모르지만 래빈이 기억하기로 세계는 대대적으로 개발을 멈추는 형편이었고.

시답잖은 생각이나 뭉게뭉게 떠오를 때다. 오두막이 거칠게 진동했다. 그건 마치 손속 없는 지진을 닮았다. 굳건하던 벽과 땅이 흔들리고 침대에 걸터앉았던 래빈은 균형을 잡지 못해 굴러떨어졌다. 볼썽사납게 바닥에 엎어져 있다가 진동이 잦아들 즈음에야 일어선다. 무릎과 손바닥이 얼얼했다. 묵었던 먼지들이 진동을 따라 들썩여 집안이 자욱했다. 래빈은 밭게 콜록거리며 손을 휘저었다. 뭔가 일이 있나. 넘어진 게 우스워 머쓱하게 뒤통수나 긁적였다. 어느샌가 가느스름해진 눈으로 래빈은 멋쩍게 생각한다. 그러니까, 보통 이런 진동과 노크 소리를 동반한 커다란 소음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 하나쯤은 있었는데.

“[미친, 여기에 사람이 있었어?]”

웬 시뻘건 사람이 현관문을 박살 내며 데굴데굴 굴러왔을 때 비로소 래빈은 깨달았다. 아, 그렇지. 폭발음. 세간에선 저런 소음을 폭발음이라고 불렀다! 속이 다 시원하네. 래빈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도로 침대로 향했다. 아주 오랜만에 깨어나긴 했으나 별로 좋은 상황은 아닌 것 같으니까 이만 잠들어야겠다. 바닥에 처박힌 채 앓는 소리를 뱉는 사람이 영 눈에 밟히긴 했다. 그래도 뭘 어떡해. 래빈은 의사가 아니었다. 치료 도구도 없었고. 저 사람도 어디선가 날아와 벽에 처박힌 것치곤 사지 멀쩡해 보였으니 알아서 걸어 나가겠지 싶다. 래빈은 태평하게 이불을 들어 올리고 아늑한 침대에 몸을 밀어 넣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러려고 했다.

“[이봐요! 지금 정신 나갔어요?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도망칠 생각도 안 하고!]”

“어, 아니. 저기.”

“[애초에 지상에 사람이 왜 있어? 이런 데다가 오두막 짓고 사는 거 불법이에요. 목숨 아깝지도 않아요?]”

머리 새빨간 남자가 래빈의 목덜미를 잡아채고 당기지만 않았더라면, 래빈은 푹신한 침대에 몸을 눕히고 눈을 감았을 거다. 무겁지도 않은지 래빈을 종잇장인 양 들어 올려 뛰쳐나가는 남자에게 래빈은 자신은 괜찮으니 내버려 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이 사람 뭐지? 목덜미 잡힌 채 달랑거리던 래빈은 멍하니 생각한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 잡지? 그보다 속도는 또 왜 이렇게 빠르고? 게다가 뭔 소린지 모르겠는 언어는 꼭 예전에 들었던 영어와 비슷한 생김새였다. 여기 사람들은 아직도 영어를 쓰나?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래빈이 상대의 손아귀를 뿌리치고자 마음을 먹은 직후였다.

터무니없이 거대한 소음이 귓전에 꽂힌다. 머리가 아찔해지는 굉음이었다. 동시에 손아귀가 절로 풀렸다. 바닥에 나뒹굴며 래빈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아 그러니까 괜찮다고 했는데! 오랜만에 구른 흙바닥에선 여전히 탄 맛이 났다. 래빈은 한참을 구르다 간신히 멈췄다. 눈물 머금으며 몸을 일으키는데 멍멍한 귀에서 무언가가 주르륵 떨어진다. 피였다.

환장하겠네……. 깨자마자 혹사당한 고막이 나 더는 못해 먹겠다며 내린 파업 선언이었다. 둔한 몸에 따끔거리는 통각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래빈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생채기를 둘렀다. 그러게 나 그냥 집 안에 있겠다니까. 정신이 아득해져 천천히 돌아보는데, 오. 래빈은 그 순간 그냥 머리 때리고 기절하고 싶어졌다.

콘크리트 무더기 사이에서 남자가 엉금엉금 기어 나오고 있었다. 형형한 푸른 눈을 미끄러지듯 지나쳐 그 뒤에 펼쳐진 광경을 본다. 무너졌다. 깔끔하게. 저 오두막 지으려고 래빈이 몇 번 죽었다가 살아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래빈 본인도 잊어먹었는데. 어설픈 솜씨로 짓기는 해도 제법 튼튼하다 자부했었는데 이게 이렇게 무너지네. 저거 다시 지으려면 또 얼마나 걸릴까. 아찔해진 정신에 관자놀이만 문지르다 고개를 들었다.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싶어서.

뭐 별 도움은 안 됐다. 청명한 하늘이 아니라 커다란 비행물체가 있으면 하늘 보고 싶은 사람으로선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으니까.

이쯤 되면 아무리 세상이 미쳐 돌아가도 관심 없는 래빈조차 생각하게 되는 거다. 내가 잠든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첫째. 래빈이 잠들기 전에 사람들은 손에서 불 같은 걸 내뿜지 못했다. 둘째. 래빈이 잠들기 전까지 하늘에 저런 괴상한 비행물체는 없었다. 그리고 셋째. 래빈이 잠들기 전까지 지구엔 동식물과 인간이 그럭저럭 뒤섞여 살았다. 다른 말로 바꾸자면 저런 뼈다귀로 얼기설기 조합한 후 살점만 대충 붙인 듯한 괴생물체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남자의 머리칼이 바람에 일렁였다. 머리카락이라기보단 불길처럼 보이는 그것은 바람결을 따라 불티까지 뱉어낸다. 남자의 전신에서 형형하게 터져 나오는 불길들이 망설임 없이 괴생물체로 쏘아지는 광경을 바라보며 래빈은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추측건대 남자는 저 괴생명체와 싸우고 있는 듯하다. 화려하게 타오르는 불길이 괴생물체의 몸에 들러붙어 살점을 녹이고 휑한 골조를 드러내길 거듭 반복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 눈 앞에 펼쳐진 게 쌈판이라는 거지. 래빈은 자신의 불운에 경애를 청하며 슬금슬금 물러났다. 괜히 복잡한 일에 끼어들고픈 마음은 없다. 제법 오랫동안 살면서 체감한 점은, 대충 모른 척하고 설설 피하며 사는 게 훨씬 편하다는 거다.

래빈이 소리 없이 물러날 때였다. 발광하며 몸을 뒤틀던 괴생물체가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크기는 래빈의 몇 배나 되는 주제에 또 잽쌌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눈을 끔뻑이던 래빈은 저절로 남자를 바라봤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적어도 래빈보다는 잘 알 테니까. 눈이 마주쳤다. 새파란 눈이 순식간에 커지며 그가 입을 쩍 벌렸다. 공기가 진동한다. 다음 순간 래빈은 깨달았다. 아, 뭐라고 외쳤나? 래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입 모양을 읽으려 애썼다. 고막이 터진 탓에 말 한마디 제대로 들을 수가 없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입으론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 한 걸음 내디뎠을 때였다.

얼굴 위에 짙은 그림자가 졌다. 어라. 하늘 위에 비행정이 떠다닌대도 이렇게까지 진한 그림자를 내진 않았는데. 동시에 정수리가 묵직해졌다. 축축하고 무거운 무언가가 위에서 쏟아진 탓이다. 래빈은 느리게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떨어진 것을 쓸어내린다. 진득한 점액질 같은 것이 손가락 마디마디에 들러붙었다. 어쩌면 이건 살점이다.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주쳤다. 눈. 아니, 저건 눈인가? 어쩌면 단순히 교감 신경인지도 모른다. 비록 자신과 비슷하게 눈꺼풀을 깜빡이고 있으나 눈꺼풀이 무언가를 덮었다 드러내는 게 곧 눈을 깜빡인다는 사실과 직결죄디 않음은 래빈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흰 뼈가 보인다. 드러난 골조는 흉하다 못해 역겨웠다. 눈을 마주치기 위해선 고개를 한껏 꺾어야 했다. 래빈은 눈을 깜빡였다. 이번에는 자신의 의지임이 확실한 행동이다. 깜빡, 깜빡. 괴생물체도 눈을 깜빡인다. 깜빡. 깜빡. 예민한 청각이 무언가 나직한 울음을 잡아챘다. 그건 앓는 소리를 닮았다. 낡은 콘크리트 바닥에 돌을 맞대고 득득 긁는 것도 같다. 세간 사람들이 이 소리를 뭐라고 부르더라.

너를.

래빈은 희끄무레한 울음 너머 뭉그러지듯 내뱉은 말에 귀 기울였다. 드문드문하고 떨리는 소리였으나 래빈은 분명히 알아들었다. 너를. 나는 너를.

나는 너를 죽일 수 없다.

그렇겠지. 래빈은 놀라는 대신 느리게 수긍한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러며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아마도 입일 공간이 쩍 벌어진다. 벌어진 아가리, 그 깊은 곳은 지독한 냄새를 풍겼다. 비리고 씁쓸하고 짙은 악취. 농도 깊은 슬픔이다. 그렇다면 저 안엔 슬픔으로 가득 찼을 테고.

나는, 너를, 죽일 수, 없다.

괴생물체가 휘두른 뼈다귀에 복부를 관통당하는 순간 래빈은 기이한 소리의 정체를 깨달았다. 사람들은 보통 그걸 흐느낌이라고 불렀다.

몸이 무너진다. 복부를 관통한 뼈다귀가 쑥 빠져나가고 래빈은 맥없이 쓰러진다. 들판 위로 쏟아진다. 바닥에 머리가 부딪친다. 밀려드는 흙에선 쓴맛이 났다. 이런 것도 오랜만인데.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감각에 눈을 끔뻑였다. 깜빡. 깜빡. 뼈다귀가 고개를 숙인다. 눈이 가까웠다. 반질거리는 안구에서 점액질 액체가 후드득 떨어졌다. 나는. 너를. 죽일 수……. 꺽꺽대며 되풀이하는 한마디에 래빈이 중얼거렸다. 알아. 아는데.

그들 사이에 기이한 침묵이 내리던 순간이다. 뼈다귀가 우뚝 멈췄다. 마른 들판을 가로지르며 솟아난 불기둥이 뼈다귀와 래빈을 가로막았다. 동시에 어디선가 훌쩍 날아온 남자가 불기둥을 파고들어 자리 잡는다. 래빈은 가물가물해지는 시야 너머 똑똑히 보았다. 불티 흩뿌리며 타오르던 머리칼이 시꺼멓게 물드는 광경. 새파랗던 눈이 노랗게 물들며 희번득하게 빛나는 모습. 이내 시선은 쓰러진 래빈을 빗겨나가 뼈다귀에 꽂히고.

“[이 빌어먹을…….]”

세상이 다시금 진동한다. 어마어마한 압력. 혹은 중력. 래빈은 본다. 수명이 닳은 전구처럼 깜빡거리는 의식 속에서도. 남자가 길게 그어 내린 허공이 갈라지는 풍경. 커다랗고 새까만 구멍이다. 그곳에서 비롯된 거대한 압력. 수만, 수억 개의 거센 손이 당신을 잡아끄는 듯한 인력. 뼈다귀가 길게 울부짖는다. 아니, 커다랗게 흐느낀다. 속절없이 이끌려 구멍 속에 떨어지기 직전까지 뼈다귀는 웅얼거린다. 너를 죽일 수 없다. 나는 너를 죽일 수 없다. 너를 죽일 수 없어 이다지도…….

뼈다귀를 탐욕스럽게 삼킨 구멍이 마침내 그 아가리를 다물었을 때.

“[젠장, 이걸 어떡해? 문대 형, 형! 민간인이…….]”

자신을 향해 다급히 달려오는 남자를 보며 래빈은 가만히 생각한다. 어느새 볕 좋은 날 빛나는 금싸라기처럼 변한 남자의 머리칼. 거센 바람에 거침없이 일렁이는 금발이.

뭐든 어울리는구나.

그리고 눈을 감는다. 지독한 졸음이다.



김래빈.

김래빈.

……김래빈.

너를 죽일 수 없다.

래빈은 자신을 부르는 속삭임에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낯선 천장이다. 아늑한 오두막의 적갈색 대신 모르는 공간의 하양. 코끝에선 진한 소독약 냄새가 어른거렸다. 래빈은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언제 또 잠들었지. 이번엔 또 얼마나 잠든 거지. 주위를 둘러봤다. 적어도 시설들은 전부 멀끔하니 자신이 누운 이곳은 최근까지 사람 손을 탄 게 틀림없는데.

습관적으로 기억을 더듬는다. 갓 떠오르는 것은, 그래. 정체 모를 뼈다귀. 복부를 꿰뚫리고 쓰러지던 자신. 서글픈 목소리로 되뇌던 한 마디. 나는 너를 죽일 수 없다. 말이 이어지려던 찰나 래빈과 뼈다귀 사이를 막아서던, 새까맣고 새빨갛고 샛노란 남자.

“깼습니까?”

래빈은 느리게 시선을 돌렸다. 남자가 있었다. 다른 남자. 미간을 좁히고 가늘어진 눈으로 멀찍이서 자신을 살피는 남자. 새까만 머리칼이 불지도 않는 바람에 흔들린다. 사람. 사람이다. 래빈은 느리게 고개를 돌리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시선은 여전히 남자에게 고정된 채다. 남자와 자신의 거리를 가볍게 가늠했다. 전속력으로 달려도 삼 초쯤 걸릴 거리. 그리고 잘 훈련된 사람이라면 삼 초 동안 수 가지 일을 해낼 수 있다.

그러나 래빈은 그냥 눈을 내리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남자의 말을 기다렸다. 자신을 구속하는 물체 같은 건 없었다. 경험에 따랐을 때 낯선 사람을 구속하지 않는 건 대개 두 가지 이유였다. 첫째. 방심. 애가 대충 깡말라 보이고 자신들에겐 무기가 있으니 구속할 이유가 없다는 판단. 둘째. 확신. 구속해봤자 자신들에게 이점이 없을 것을 아는 자들의 결정. 이번엔 전자일지 후자일지.

그때 남자가 다시 입을 연다. 여전히 삼 초 거리. 다가오지도 멀어지지도 않은 채. 날카로운 시선이 날아와 꽂힌다. 래빈은 그저 가만히 호흡에 집중했다. “차유진이 그러는데, 당신이…….” 들숨. 그리고 날숨. 더더욱 가늘어지는 눈. “당신 복부가 완전히 꿰뚫렸다고 하던데. 관통상이라고.”

아, 그랬다. 정말로 그러했다. 래빈은 고개를 내리고 상처를 살피는 대신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들어 복부를 만지작거린다. 아물었다. 아니, 상처가 붙었다기보단 그냥 원상태로 복구되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남자의 질문에 래빈은 확신한다. 구속이 없는 이유는 아마 후자일 것이다. 확신. 그리고 동시에 눈을 내리깔았다. 떠오른다. 거대한 구멍. 새까만 공간의 균열. 벌어지고 커지다가 이내 뼈다귀를 꿀꺽 삼켜내던 그것. 그 안에서 느껴지던 거대한 소용돌이. 화려한 화염. 그보다 뜨겁고 눈 아프게 반짝이던 불을 래빈은 아주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

“궁금하실 게 많으시리란 걸 압니다.”

그래서 입을 여는 것이다. 말하는 법을 까먹었으면 어쩌지 아주 잠깐 고민하다가 말았다. 다행스럽게도 목소리가 진동한다. 공간을 울린다. 상대방도 알아들은 듯하다. 그러면 된 거니까.

“부탁이 있습니다.”

“무엇이?”

“그분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차, 유진. 낯선 이름을 발음해본다. 남자의 표정은 여전히 굳건하다. 바뀌지 않는다. 래빈은, 아주 오랜만에, 목구멍이 따끔거리는 갈증을 느낀다. 이것은 단순한 목마름이 아니다. 이름 붙이자면 아마 갈급하는 감정쯤 될 것이다. 다른 말로 바꾸자면 절박함. 필사적인 바람 따위의.

어째서입니까, 하고 남자가 묻는다. 지금은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하고 대답한다. 마모된 심장이 느리게 태엽을 감는다. 찰칵, 찰칵. 낡아빠지고 고장 난 심장은 이제 더는 세차게 박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래빈은 흥분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은 채 덤덤히 말했다. 하지만 한 번만 만나게 해주신다면 무슨 일이든 협조하겠습니다. 약조 드립니다. 그러자 남자의 표정이 묘하게 변한다. 눈썹을 슬쩍 올린 것이 꼭 탐탁잖은 것처럼 보였으나 굳게 다물린 입은 어쩐지 무언가를 지그시 삼킨 듯이 보여서.

마침내 남자가 입을 열어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시간이 조금 걸릴지도 모릅니다. 워낙 바쁜 애라서.”

“얼마가 걸리든 상관없습니다.”

제가 듣기에도 덤덤한 목소리다. 래빈은 조금 머쓱해진 마음에 뒤통수를 긁적이다 덧붙였다. 시간, 많습니다. 저는. 그러자 남자는 비로소 고개를 돌려 무언가를 꺼낸다. 주먹만 한 기계다. 무언가를 꾹꾹 누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편하게 계십시오. 그 말에 래빈은 선선히 몸을 누였다. 세계가 뒤집힌다. 조금 어지러운 것도 같다. 눈을 감지 않으려 얼굴에 힘을 줬다. 지금 잠들면 또 언제 깰 줄 알고.

그러며 래빈은 가만히 생각했다. 뼈다귀의 한 마디. 나는 너를 죽일 수 없다. 뼈다귀가 어떤 감정을 담아 말했는지 래빈은 알지 못한다. 래빈은 항상 타인의 감정을 읽는 일에 서툴렀다. 다만 래빈은, 만일 뼈다귀가 안타까움과 미안함을 담아 말을 전했다면, 그에게 슬퍼할 필요 없노라 말해줄 걸 그랬다며 느리게 호흡한다. 당연한 일이다. 아주 오랫동안, 몹시 많은 것들이 래빈을 죽이려 했다. 그리고 전부 실패했다. 래빈은 잠시 고민하다 몸을 뒤척였다. 그러니까 어쩌면 뼈다귀의 말은 몹시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가능성이란 것을 발견한 지금이 더 드문 상황이니까.

얼마 있지 않아 문이 벌컥 열렸다. 누군가 날 듯이 들어온 순간 래빈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자꾸만 몰려오는 졸음에 눈꺼풀이 무거웠으나 감지 않는다. 입안 여린 살을 잘근잘근 씹으며 졸음을 쫓아냈다. 와중에도 밝고 큰 목소리가 파업 끝낸 고막을 울렸다.

“나 왜요?”

“찾는 사람이 있어서.”

“나요? 누가요?”

“네가 구한 사람. 그 민간인.”

“그 사람 살아 있어요?”

경악에 가까운 내지름에 대답은 한 발짝 늦게 돌아왔다. 어. 저 안쪽에.

래빈은 허리를 빳빳하게 곧추세웠다.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함이다. 아주 옛날옛적에, 그러니까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살아계시고 누나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았던 시절에. 래빈은 배웠다. 좋은 첫인상은 모든 것을 쉽게 한다. 그러니 바른 몸가짐과 단정한 말씨를 사용해라. 누나는 옆에 누워 있다가 키득거리며 덧붙였더랬다. 맞아, 래빈아. 너는 특히나 더 그래야 해. 안 그러면 사람들이 오해해. 아주 그리운 기억들이다.

래빈은 제 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에 숨을 들이켰다. 얼굴에 힘을 풀었다.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면 열에 아홉은 지레 겁을 먹어서다. 최대한 순한 인상. 래빈이 손을 다소곳이 겹쳐 모을 무렵 작은 머리통이 불쑥 나타났다. 아. 자그마한 탄성이 잇새를 비집고 나온다. 잘 익은 볏짚 닮은 머리칼이 후드득 흔들리고.

“What the……. [당신 괜찮아요?]”

낯선 언어가 빠르게 귓속에 꽂혔다. 자신은 무어라 하지도 않았는데 아차 싶었는지 상대가 허겁지겁 말을 바꿨다. 그러니까, 괜찮아요? 이번엔 알아들었다. 익숙한 언어였다. 괜찮냐는 건 무슨 뜻이지? 래빈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을 덮은 이불을 치우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맨발이 바닥에 닿는다. 차가웠다.

“Wait, [당신 그렇게 움직이면 안 돼요. 심하게 다쳐서…….]”

“괜찮습니다.”

“[당신 상처를 보고도 그 말을 믿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그는 대단한 머저리일 거예요.]”

무슨 소리지? 래빈은 반사적으로 얼굴을 기울였다가 만다. 사실 눈앞의 그가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는 래빈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래빈은 부디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얘기해달라 부탁하는 대신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상대의 얼굴이 사라지고 새까만 워커와 하얀 바닥만이 보인다. 머리맡에서 끝이 구부러진 탄성이 울렸으나 래빈은 반응하지 않는다. 그는 대신 짐짓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탁이 있습니다. 차유진 씨.”

“부탁?”

여전히 끝이 올라간 물음이다. 래빈은 두 손을 공손히 모으며 허리를 숙이는 행위가 여전히 정중한 행동이기를 바랐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래빈이 알던 예의와 예절은 여러 번 바뀌었다. 곤욕을 치렀던 적이 한두 번 있으나 오늘만큼은 그래선 안 된다.

다행스럽게도 차유진은 불쾌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유진은 단지 되물었을 뿐이다. “부탁 뭔데요?” 래빈은 짐짓 유진이 지었을 법한 표정을 상상해봤다. 고개를 갸웃했으려나. 샛노란 눈동자는 마치 언젠가 보았던 벌꿀을 닮았다. 전체적으로 날카로운 인상인데 눈을 동그랗게 뜨면 제법 순해 보일 테지. 시답잖은 생각들이다. 래빈은 가볍게 심호흡하고는 묵은 말을 꺼낸다. 아주 오랫동안 내뱉고 싶어 안달 났던 문장. 이젠 어떤 심경으로 처음 떠올렸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잔뜩 빛바래고 먼지가 쌓였다. 헤져서 껍데기만 간신히 남은 낱말의 연속.

“저를 죽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낡은 심장이 딸깍딸깍 태엽을 감는다. 침묵이 사뿐 내려앉았다. 차유진은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바닥에 단단히 꽂혔던 발이 비스듬히 짝다리를 짚었다. 래빈은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눈이 마주친다. 눈썹을 올린 채 가느스름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매서운 인상이다. 굳게 다물린 입은 한참이나 말을 뱉지 않을 것만 같아서. 그래서 래빈은 침착하게 입을 열고자 했다. 자신의 지난한 세월을 설명한다면 그도 분명 제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 때문에.

그러나 차유진이 빨랐다. 아무 말도 뱉지 않을 듯 지그시 다물린 입이 거침없이 열리더니 날선 말을 뱉어낸 것이다.

“Okay. 확실하게 할 거 있어요.”

“네.”

“나는 사람 죽이는 취미 없어요.”

래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도 죽는 취미는 없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말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차유진은 그저 눈을 찡그렸다. 나직하게 무언가 씨근거리는 것도 같다. 그런데 못 알아들어서 그냥 모르는 체했다. 래빈이 눈만 끔뻑이며 기다리자 차유진이 고개를 팩 돌렸다. 등을 돌린 그가 빠른 영어로 무어라 내뱉었다.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만 한숨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거절당했음은 안다. 말로 하지 않아도 드러나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니까. 다만 래빈은 포기하지 않는다. 다소 무례한 일이라는 자각은 있으나 그보다 더한 열망 따위가 래빈을 느리게 잠식했다. 래빈은 하여간 오래 살았다. 오래라는 말도 부족할 정도로 아주 길게. 몹시 오랜만에 찾아온 희망이었다. 차유진은. 그렇기에 쉽사리 포기하기가 힘들었을 뿐이고.

“차유진 씨가 사용하신 능력을 보았습니다. 까만 구멍을 여셔서 괴생물체를 흡수하는 것 말입니다.”

“Ha?”

“죽인다는 어감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정정하겠습니다. 제게 한 번만 그 능력을 사용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어디까지나 가벼운 시험 정도로 생각해주신다면.”

“[문대 형. 단단히 미친 사람을 연구소에 들인 거예요, 내가? 맙소사.]”

차유진이 과장되게 한숨을 쉬었다. 내리깔고 내젓는 고개와는 달리 시선은 여즉 날카로웠다. 래빈은 그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손만 꼼지락댔다. 질색하는 상대를 억지로 설득하는 건 래빈에게 역시 껄끄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래빈은 안다. 조그만 가능성이라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 때문에 껄끄러움은 혀뿌리 너머 목구멍 깊숙한 곳으로 욱여넣어 삼키는 것이다. 삶은 지리멸렬하다. 호흡은 외롭고. 녹슨 심장은 멈추지도 못한 채 고장 난 태엽을 감았다가 풀기만을 반복했지. 아주 오랫동안.

그래서 래빈은 한 걸음 다가선다. 인기척을 느낀 차유진이 고개를 돌렸다. 다시금 시선이 맞닿는다. 버릇없는 짓임을 앎에도 관둘 수 없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저는 아주 오래 살았습니다. 지금이 몇 년인지는 모르겠으나 정말로, 몹시 긴 삶을 살았습니다.”

침착한 목소리. 형형하게 번뜩이던 유진의 눈이 차츰 가라앉는다. 동정이나 슬픔이라기보단 무신경함에 가까운 시선임을 안다. 그러나 래빈은 차분히 숨을 골랐다. 말을 잇는다. 오롯한 사실에 묵은 감정 한 숟갈 떠서 내놓았다.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한 번이라도 좋습니다.”

대답은 오래 걸리지 않고 돌아왔다.

“[그렇게 죽고 싶거든 다른 사람 찾는 걸 추천할게요. 그 사람에겐 사람 죽이는 취미가 있기를 간곡하게 바라죠.]”

조금도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래빈은 알았다. 그만큼 확고한 거절은 또 없으리라.



지난 며칠간 래빈이 알아낸 사실이 있었다. 첫째. 지상은 래빈이 괴생물체라고 불렀던 괴물, 일명 이모션에 의해 잠식당했다. 둘째. 그렇기에 사람들은 하늘 위에서 살기 시작했다. 셋째. 자신이 있는 이곳은 하늘 위 사람들의 구심점이나 다름없는 연구소다. 그리고 넷째. 어쩌면 가장 중요한 정보. 차유진처럼 특이한 능력을 쓰는 사람들의 힘은 강렬한 감정을 기반으로 한다.

마지막 사실은 깨달은 래빈은 또 며칠간 고심했다. 강렬한 감정을 기반으로 한다는 건, 즉 그들의 실수를 유도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래빈은 쿡쿡 찔리는 양심을 붙든 채 배정받은 임시 숙소 침대에서 한참을 굴러다니다가 마침내 결심했다. 죄송합니다, 차유진 씨. 그런데 역시 저는 죽어야겠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이 꼴이 났다.

일. 래빈은 복도를 걷다가 반대편에서 차유진이 모니터에 정신 팔린 채 걸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이. 모니터를 가득 채우는 화려한 영상에 정신 팔린 차유진이 자신의 공격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삼. 그래서 차유진을 향해 있는 힘껏 돌진했다! 그러나 사. 차유진이 예상했다는 듯 몸만 살짝 비틀어서 피하고 말았고. 결론적으로 오. 덕분에 래빈만 땅을 데굴데굴 굴렀다.

엎어진 채로 잠깐 숨을 고르던 래빈은 이내 익숙하게 무릎을 털고 일어난다. 음. 차유진 놀라게 해서 그의 감정을 요동치게 하기 일흔여덟 번째 작전 실패다. 차유진은 안 그런 것 같으면서도 눈치가 기민했다. 욱신거리는 무릎만 꾹꾹 눌러 마사지하는데 문득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래빈은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 불퉁하게 물었다. 왜 웃어?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대답이 돌아온다. 김래빈 바보 같아서.

“설마 내가 진짜 그런 거에 놀랄 것 같아?”

래빈은 처음 만났던 날 이모션과 싸우던 차유진의 현란한 움직임을 잠깐 떠올리다 말았다. 딱히……. 그때 차유진은 무슨 아파트 삼 층 높이를 훌쩍 뛰어오르고 보이지도 않는 채찍 닮은 공격을 능숙하게도 피하고 여하간 인간 탈출한 것 같은 움직임을 보였지. 래빈은 그날의 화려한 싸움을 떠올릴 때마다 사람 범위 벗어난 건 쟤나 나나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만 한다. 와중에 차유진은 여전히 심드렁한 목소리로 래빈에게 말을 걸었다.

“무릎 아파?”

“어. 비 오려나. 관절이 쑤셔.”

“김래빈 나 그 말 고…… 고절? 고전? 한국어에서 배웠어.”

“너 고전 국어도 배웠어? 대체 왜?”

차유진은 대답 대신 어깨만 으쓱였다. 래빈은 한쪽 눈썹을 슬쩍 올리다가 그냥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간 알다가도 모르겠다. 자신을 싫어하는 듯 행동하다가도 정신 차리면 어느샌가 발맞추어 걷고 있다. 이유를 물어보면 특유의 맹랑한 표정으로 뱉는 것이다. “그냥?” 그러면 래빈은 또 할 말이 없어진다. 그냥 하고 싶다는 사람한테 뭔 트집을 잡아.

그네들은 심지어 말까지 놨다. 까놓고 말하자면 래빈이 차유진의 할머니의 증조부의 조상쯤 될 텐데도 차유진은 거리낌이 없었다. 오히려 가끔 놀려먹기까지 했다. 이를테면 방금처럼. 새파랗게 어리면서 말이 많다고 투덜거리면 김래빈 조상님이야? 물으며 두 번 절하려는 거다. 차유진이 제 앞에서 꼭 두 번 절했을 때 래빈은 극대노 하면서 그의 등짝을 짝짝 갈겼다. 아. 그때 비트가 참 멋졌지……. 아련한 표정을 짓는 래빈을 회상에서 일깨운 건 어깨를 툭 치는 손길이다.

“김래빈 또 딴생각해.”

“안 해.”

“해. 방금 이상한 생각 하는 표정이었어.”

“그게 뭔데 바보야.”

“있어. 멍 때리는 표정.”

그러며 유진이 입술을 비죽인다. 뜻 모를 행동이다. 래빈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다가 그냥 고개나 내젓고 말았다. 이럴 때 보면 진짜 애였다. 비록 차유진이 소개하기론 본인은 스물여섯쯤 됐다지만. 뭐 래빈은 거기에 곱하기 백쯤 살았으니 웬만한 사람은 그냥 전부 애로 봐도 되는 거 아닌가. 또다시 하릴없는 구렁으로 빠지려는 래빈을 일깨우는 건 어김없이 차유진이었다.

“나 졸려.”

가벼운 한마디에 래빈은 눈만 끔뻑이다가 멍청하게 되물었다. 그래? 머쓱하게 뒤통수만 긁적이며 고개를 돌린다. 순식간에 변하는 차유진의 태도는 어림잡기가 쉽지 않았다. 이 나이 먹고 새파랗게 어린 애한테 휘둘리다니. 조금 아득해지려는 정신에 머리를 짚으면서도 래빈은 착실히 고개를 돌렸다. 날렵한 콧날, 우묵한 아이홀 사이에 자리한 금색 눈동자가 이른 햇살에 반짝이다가 구부러지고…….

“그렇게 봐도 싫어. 안 해줄 거야.”

“묻지도 않았어, 바보야.”

“김래빈 계속 나한테 그런 것만 부탁하면서.”

뭐 틀린 말은 아니다. 일흔여덟 번이나 실패했다는 말은 즉 일흔여덟 번이나 시도했다는 뜻이니까. 래빈이 눈만 데굴데굴 굴리자 유진이 콧방귀를 뀐다. 그리곤 제멋대로 척척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넋 놓고 서 있던 래빈은 아차 싶어 잽싸게 걸음을 옮겼다. 야, 차유진! 같이 가! 입 밖으로 말을 내뱉자마자 또 의아해진다. 어라. 내가 차유진이랑 왜 같이 가지? 다만 당장 떠오르는 답이 없어 대충 한구석에 밀어 치워두는 질문이다.

나란히 걸으며 래빈은 떠올린다. 사실 래빈과 유진이 처음부터 이렇게 스스럼없이 굴지는 않았다. 이곳에 온 지 벌써 한 달쯤 되어갈 테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가볍게 굴기 시작한 건 일주일이 좀 안 됐다. 래빈은 창밖 펼쳐진 유백색 구릉을 눈에 담으며 가만히 생각했다. 그때 차유진은 래빈이 얼굴을 비쳤다 하면 표정을 있는 대로 구겼다. 불쾌하기 짝이 없다는 태를 팍팍 내며 보란 듯이 자리를 피했다. 래빈에게도 달가운 경험은 아니었으나 일희일비하기에 그는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을 뿐이었고.

관계의 양상이 순식간에 뒤바뀐 건 꼭 일주일 전이다. 그때 래빈은 최신형 모니터를 만지작대고 있었다. 지상은 위험하니 머물 곳 없으면 당분간 연구소에 있으라는 연구소장의 뜻에 따라 잔류하며 얻어낸 전리품이었다. 이 시대의 모니터는 참 신기했다. 거의 종이처럼 팔락거리며 완전히 투명해서 건너편에 있는 손의 손금까지 다 보였다. 크기도 크지 않고 완전히 구겨도 사용에 문제가 없어서 아무렇게나 주머니에 욱여넣고 다닐 수가 있었다. 기술의 발전이란! 가장 최근에 만져본 전자기기라곤 21세기의 노트북이 전부인 래빈에겐 신세계였다.

그래서 래빈은 모니터를 한참이나 가지고 놀다가 발견하고야 말았다. 저 구석에 처박혀 있던 작은 기타 모양 앱. 푸른색 아이콘에 홀린 듯 누르자마자 뜬 화면에 깨달았다. 그건 작곡 앱이었다. 그리고 래빈은, 다만 잊고 있었을 뿐이지 한때 21세기를 떠들썩하게 했던 작곡가였고. 단지 모든 것이 퍼즐처럼 딱딱 맞아떨어지는 기가 막힌 우연이 일어났을 뿐이었고.

자신의 시간이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언젠가부터 자연스레 놓았던 작곡이었다. 돈이 부족했다면 악보라도 팔아 생계를 유지하려 들었겠으나 유감스럽게도 래빈은, 정말, 빈말이 아니라 몹시도 인기가 많았다. 저작권료는 시대를 가리지 않고 들어왔다. 그리고 저작권들이 만료될 무렵부턴 돈 따윈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졌고. 어느 순간부터 래빈은 잠만 잤다. 작곡이고 뭐고 전부 놓아버린 채로 죽은 듯이. 혹은 죽고 싶다는 듯이.

그래서 눈 앞에 펼쳐진, 낯설지만 정감 가는 화면을 본 순간 문득 참을 수가 없어졌다.

그저 우연에 우연이었을 뿐이다. 작곡을 그만두었을 무렵엔 보이지 않던 희망에 마음이 들뜬 것도. 아주 오랜만에 만지는 가상 악기들에 신이 난 래빈이 뚝딱뚝딱 곡 하나를 짜낸 것도. 어쩌다가 지나가던 유진이 그 모습을 봐버린 것도. 평소엔 냅다 피하기 바쁘던 차유진이 걸음을 멈추고 래빈에게 다가가 이게 네가 만든 거냐고 물은 것까지. 전부.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래빈은 순간 울컥했다. 아니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길래 고작 노래 하나 들었다고 갑자기 이렇게 잘해줘? 그날 만든 곡은 익숙지 않은 앱과 낯선 가상 악기와 빛바랜 감으로 인해 엉망에서 딱 한 걸음 멀어선 질이었다. 다음 날부터 유진은 제법 친숙하게 굴기 시작했고 시발점이 될 만한 일은 작곡 외엔 도통 떠오르질 않는다. 래빈은 얼굴을 있는 대로 구기며 끙끙 앓는 소리를 내다 고개를 팩 돌렸다. 언젠가 유진이 제게 그런 것처럼. 대신 래빈은 차유진처럼 상대를 피하는 대신 물었다.

“차유진.”

“응?”

“노래가 마음에 들었어?”

“Ha?”

느닷없는 질문에 차유진이 입만 헬쭉 벌렸다. 당장이라도 그게 뭔 이상한 소리냐며 타박할 듯한 표정에 래빈은 눈만 데굴 굴린다. 그러며 뒤늦은 설명을 덧붙이는 것이다. 아니, 들어봐.

“너는 나 싫어하잖아.”

“…….”

“나 보이기만 하면 대놓고 피하다가 갑자기 노래 한 곡 들었다고 친근하게 구니까. ……만일 그렇다면, 차유진. 무언가 계기가 있다고 해서 사람에 대한 태도를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바꾸는 건 옳지 못한 일이야. 무엇보다 타인에겐 기본적으로 예의 바른 태도를 지니는 게…….”

“김래빈은 처음 보는 사람이 죽여달라고 쫓아다니면 예의 바르게 할 수 있어?”

“…….”

김래빈, K.O. 할 말 없어진 래빈은 그냥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다. 그러자 옆에선 또다시 콧방귀 뀌는 소리가 들렸다. 김래빈 진짜 이상해. 타박과 투정을 반반 섞은 듯한 투덜거림도 추가. 래빈은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내가 죄인이다. 스멀거리는 자괴감에 몸부림치려던 때 차유진이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김래빈 노래가 마음에 든 거는 맞아.”

래빈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유진은 그를 바라보지 않는다. 앞만을 올곧게 응시하며 태연히 어깨만 으쓱. 눈을 찌푸린 래빈이 무어라 입을 열려던 차였다. 그러니까, 설마 진짜로 노래 한 곡 들었다고 이렇게 친근하게 구는 거냐며 꼬치꼬치 캐묻기 직전 일어난 일.

거센 진동이 일었다. 꼭 래빈의 잠을 방해했던 오두막의 지진과 닮았다. 방심하던 래빈이 균형을 잃음과 동시에 단단한 팔이 그의 허리를 잡아챈다. 뜨겁다. 허리에 닿은 손이 따뜻하기보단 뜨거웠다. 잠깐, 차유진! 이거 놓으라고 달싹이지만 차유진은 들은 체도 않은 채 고개를 휙 돌렸다. 시선의 끝에는 크게 난 창이. 유백색 구름을 흐트러트리며 날아오르는 새까만 세계가.

“뭐야?”

“몰라!”

차유진이 아마도 비속어일 무언가를 씨근거린다. 유진의 시선을 따라 마찬가지로 창밖을 바라보던 래빈은 그 순간 들었다. 자그마하게 쉭쉭거리는 나지막한 울음. 어쩌면 몸을 뒤틀며 내뱉는 신음과 닮은 것. 괴음은 뭉그러지고 녹아내리다가 한데 뭉치더니 하나의 언어가 되고.

래빈은 이 언어를 익히 들어보았다.

아닌 와중에 떠오른 새까만 밤이 크게 요동친다. 진동은 멎지 않고 점차 진폭을 넓힌다. 래빈은 떨어질 생각을 버린 채 차유진의 옷깃을 쥐어뜯듯 잡았다. 동시에 귀청을 찢어낼 듯 날카로운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래빈은 이 소리 또한 안다. 경보였다. 괴물이 나타났다는 경고이자 어서 전투태세로 들어가라는 명령이었다. 설마. 래빈은 떨리는 눈으로 창밖 어둠을 응시했다. 위아래로 느긋하게 날갯짓하는 그것. 마침내 드러나는 날카롭고 흰 부리는 꼭 언젠가 보았던 갈비뼈를 닮았다. 생생한 붉은빛으로 번득이는 눈은 자신을 똑바로 직시하고.

“Holy…….”

차유진이 신음처럼 탄성을 뱉는다. 새빨간 시선이 래빈에게 날아와 꽂혔을 때, 그리하여 사이렌과 사람들의 고함을 뚫고 머리를 울리는 진동에 정신이 아득해졌을 때.

래빈은 깨닫는다.

나는, 어찌하여, 너를…….

이모션이었다.

어찌나 큰지 날갯짓 한 번 할 때마다 세상의 낮과 밤이 바뀌었다. 와중에 래빈은 속 편하게도 생각한다. 오, 까마귀를 닮았다. 대신 크기를 한 곱하기 백 배, 아니, 천 배쯤 하면 될 것 같은데. 어쩌면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생각인지도 모르지만.

다만 세상은 언제나 그렇듯 래빈과 같은 속도로 흐르지 않는다. 침침한 어둠과 밝은 낮을 오가는 그 경계 속에서 눈만 깜빡이던 까마귀가 그 부리를 느리게 열었다. 쩍 벌어지는 희고 날카로운 갈비뼈 속에는 끝도 보이지 않는 심연만이 일렁인다. 뭉그러진 목소리는 여전히 래빈의 머릿속에서 속삭였다. 나는 어찌하여 너를. 다만 래빈이 되물을 틈도 없다. 까마귀가 목을 젖힘과 동시에 유진이 거칠게 래빈을 밀친 탓이다. 놀랄 틈도 없었다. 데굴데굴 구르다가 벽에 머리를 박자 알싸한 고통이 일었다. 곧장 고개를 치든 래빈이 차유진을 향해 입을 달싹였으나 안타깝게도 항의할 틈 역시 없었다.

고막을 찢을 듯 울리는 괴성과 함께 벽에 쩍 금이 간다. 갈라지는 틈새로 스미기 시작한 날카로운 공기는 훌쩍 물러난 차유진이 이 가는 소리를 시작으로 연구소 안을 헤집기 시작했다. 공기가 빨려 나가는 생생한 감각. 점차 숨이 밭아지는 아찔한 느낌에 래빈이 비틀비틀 일어섰다. 연구소의 고도는 심각하게 높지 않았으나 그다지 낮지도 않다. 이 상태에서 벽에 난 작은 금이 일으킬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김래빈! 뛰어! [오른쪽으로 직진해!]”

시뻘겋게 물들기 시작한 차유진이 외친다. 까마귀는 다시금 고개를 젖히고 제 부리를 쩍 벌렸다. 래빈은 우두커니 서서 눈을 깜빡인다. 나는 어찌하여 너를. 눈꺼풀을 내리고 올리는 그 짧은 틈. 차유진이 사라진다. 몸이 훅 부유하는 감각이 가장 먼저 찾아든다. 한발 뒤늦게 차유진이 자신을 들쳐멨음을 깨닫고.

저 멀리서 다시금 괴성이 연구소 벽을 찢어 내렸다. 래빈은 순식간에 돌아가는 상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눈만 연신 깜빡인다. 빠르다. 시간의 흐름이 너무 빠른 건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깜빡. 자신은 어느샌가 낯선 방안에 던져진다. 깜빡. 여기 있으라고 외치는 아스라한 목소리. 깜빡. 불티만 남기고 사라지는 차유진. 그리고 다시 깜빡. 투명한 벽면 너머 까마귀의 부리를 묵직하게 차올리는 차유진의 머리가 새빨개서.

나는 어찌하여 너를 죽일 수 없는가.

마침내 문장에 마침표가 찍혔을 때 래빈은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래빈아. 다정한 부름이다. 그래서 래빈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음을 알았다.

이건 아주 오래된 이야기. 까마득하나 기록 한 줄조차 남지 않을 평범한 일상. 그래서 기억하는 건 오로지 래빈뿐인 대화들. 가담항설로조차 남지 못한 자그마한 편린을 래빈은 아주 오랫동안 간직해 왔다.

너는 조금 힘들지도 몰라. 상냥한 말이다. 악문 턱을 바르르 떨면서도 기어코 제 등을 감싸며 도닥이는 사람이 있다. 래빈은 다감함이 무엇인지 저 사람에게서 배웠다. 어떻게 머리를 쓰다듬어야 마음이 편해지는지, 어떻게 타인의 이름을 발음해야 곡선 진 듯 부드럽게 들리는지. 래빈의 이름에는 둥그런 글자 하나 없으나 저 사람이 제 이름을 부를 때면 꼭 모든 것이 둥글기만 한 것 같았더랬다.

그러니 원망하지도 않을 것이다. 래빈은 그의 부름에 대답하는 대신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혀를 구부려 발음해본다. 원, 망. 둥그런 동시에 뾰족한 말. 꼭 제 마음을 닮았다. 당신처럼 모난 곳 없이 발음하고픈데 자꾸만 툭툭 튀어 나가는 날카로운 조각들이. 래빈이 고개를 떨궜다. 시야가 추락한다. 일렁이는 바닥은 언젠가 보았던 유백색 구릉을 닮았다.

앞으로 어떤 현실이 펼쳐질지는 몰라. 하지만 너만큼 비현실적인 존재는 또 없겠지. 알아. 난 알아. 모를 수가 없어. 부드러운 말들이다. 흉으로 남을 상처조차 내지 못하는 말들. 그러나 래빈의 낡아빠진 태엽 심장 구석구석에 스며 녹슨 기계장치들을 엇나가게 하는 원인. 래빈은 저 사람의 말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을 꺼내 전부 재조립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에 휩싸이곤 한다. 낱낱이 뜯어 분해하고 이곳저곳 파고들었을 저 둥근 말들을 전부 꺼내서…….

눈을 감는다. 그리고 뜬다. 다시 감고 다시 뜬다. 그 짓을 몇 번씩 반복한다. 눈을 한 번 감을 때마다 주위는 순식간에 일그러지고 이지러진다. 쉴 새 없는 변화다. 래빈은 따라가지 못한다. 덩그러니 남겨진다. 항상 그러하다. 정해진 궤도에서 튕겨 나온 위성처럼. 규격에 맞춘 상품들 사이에서 탈락한 모조품처럼. 얼기설기 얽힌 골조와 내장과 그 위를 덮은 얇은 가죽과 아무튼 무엇인가가 몇 번씩이나 흩어지고 뭉치는 기분. 감내한다. 아니지. 버티고 참는 것이 아니다. 응당 그렇게 해야 하므로 래빈은 그저 숨을 들이쉬고 내쉴 뿐이다. 고작 그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이러아는ㄴ 폭발. 검은 점을 코앞에 둔 지금에야 래빈은 입을 연다.

나 여기 있어.

말을 했는가. 성대가 떨리고 진동이 전해졌는가. 래빈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입을 열고 입술을 빠끔거리며 혀를 움직였다. 다시금 되풀이한다. 나 여기 있어. 등을 돌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 등만 보이는 세상이 대답했다.

알아, 래빈아.

나 여기 있어.

모르지 않아.

그런데 왜?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대신 작은 등은 한 걸음 멀어진다. 래빈은 우두커니 선 채 입만 빠끔거렸다. 내 옆에 있으면 안 돼? 한 걸음 내디디려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시선을 떨군다. 어느샌가 녹아든 발이 있다. 흐물흐물 녹아버려서 유백색 바닥과 구분할 수가 없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려 본다. 아무 감각이 없다.

안 돼, 래빈아.

…….

어떻게 네 곁에 사람이 머물 수 있겠니.

…….

하지만 옆이 비는 것 정도로 너는 죽지 않으니까. 오두막에서 혼자 잠든다고 네가 죽어버리는 것도 아니니까.

…….

그러니까 괜찮지 않을까.

래빈은 입을 다문다. 목구멍에서 울렁이는 말이 있다. 아니야. 옆자리가 비었다고 사람은 죽지 않는다. 하지만 고작 그뿐이다. 래빈은 안다. 알기에 입을 연다. 입을 빠끔거리다가 고개를 떨군다. 떨어진 것이 시선뿐인지는 잘 모르겠고. 사실 이젠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서.

미안해.

목소리가 뭉그러진다. 누구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제가 발음한 건지 상대가 발음한 건지. 그도 아니면 고작 환청인지.

미안해. 내가 미안해.

래빈은 혀를 굴려 발음해봤다. 미, 안, 해. 둥글고 뾰족한 말. 동그란 껍질 속에 숨은 수만 가지 비수들.

미안해.

그리고 래빈은 눈을 뜬다.

시야가 뿌옜다. 뺨을 타고 뜨거운 것이 떨어졌다. 손으로 가볍게 뺨을 훔친다. 물기가 묻어났다. 비가 오나. 멍하니 몸을 뒤척이다가 무심코 깨달았다. 잠들었다. 잠들었다가 깨어난 게 분명하다. 몽롱한 머리며 무거운 눈꺼풀까지 전부 래빈이 꿈에서 막 깨어났음을 알렸다. 가벼운 두통이 일었다. 관자놀이를 찌르르 울리는 듯한 통증.

느리게 걷히는 시야는 낯선 천장을 비췄다. 하늘색 톤 천장은 래빈이 누운 곳이 어디인지 감조차 못 잡게 했다. 구석에 거미줄이 있지도 않고 멀끔한 모습이니 사람 손이 탄 것만은 확실한데. 그런데 주위에 들리는 인기척이 없어서. 래빈은 멍하니 손을 들었다. 가슴께를 짚는다. 힘을 뺀 손이 피부 너머 움칫거리는 미세한 진동을 잡아채고.

“김래빈?”

목소리가 들렸다.

래빈이 고개를 돌렸다. 눈을 홉뜬 남자가 거기에 있었다. 아. 저도 모르게 나직이 탄식한다. 반쯤 열린 문틈에서 새어드는 바람. 그에 맞추어 찬찬히 일렁이는 머리칼은 금싸라기 닮은 노란색. 벌꿀 같은 눈동자가 흔들린다. 언뜻 푸르게 물드는 듯하다가도 곧 떨구는 고개에 시선이 빗겨나가고 말아서.

그러니까, 차유진이었다.

래빈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무어라 말을 내뱉는 대신 두 손을 깍지 꼈다. 손끝에 올라온 거스러미를 만지작거린다. 손톱조차 자라지 않았다. 래빈은 느리게 사고한다. 차유진. 마지막 기억은 그가 커다란 까마귀의 머리채를 뜯어 쥐던 모습이었는데. 억세고 거대한 깃털 속을 파고들어 불길을 쏟아붓던 차유진이 시야에서 어른거린다. 래빈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려 눈을 깜빡였다. 순간 어지럼증을 느꼈던가? 그도 아니라면 형용할 수 없는 졸음이 몰려왔던가? 래빈은 확신할 수 없다. 급작스럽게 잠에 빠지는 일은 되도록 사양하고 싶은데. 한 번 잠든 몸뚱어리는 깨어나는 것도 불규칙해서. 눈 감았다가 뜨니 몇백 년 뒤였다는 일은 더는 겪고 싶지 않다.

사고의 흐름은 유속을 만난 물길처럼 빠르게 흐른다. 눈을 감았다가 뜨니 몇백 년. 래빈은 고개를 들어 차유진을 본다. 달라진 것 없는 모습. 머리가 살짝 긴 것 같기는 하지만 그 정도야 뭐. 이목구비가 좀 달라졌나? 아닌가? 뿌연 기억 속에서 차유진의 얼굴을 간신히 떠올리던 래빈은 무심코 입을 열어 뱉었다. 차유진.

“너 차유진 맞아?”

“허?”

“차유진의 아들이라거나, 손주라거나, 후손이라거나……. 만일 그렇다면 저기, 혹시 지금이 몇 년도입니까?”

“다섯 달 만에 깨서 한다는 말이 그거야, 김래빈?”

다섯 달. 반년이 조금 안 되는 시간. 아, 세상에. 래빈은 괜히 물 밀려오는 안도감에 느리게 한숨 지었다. 굳은 줄도 몰랐던 몸이 천천히 늘어진다. 손을 들어 얼굴을 파묻곤 어깨를 늘어트렸다. 와중에 오래된 심장은 여전한 박자로 쿵쿵. 어쩐지 머리가 어지럽다. 래빈이 생각하기에 이건 차유진 탓이었다. 뭐 그때 던지듯 밀쳐서 벽에 머리 박은 것 때문은 아니고.

그때 침대 곁자리가 푹 꺼졌다. 흐물흐물 녹아내리던 래빈은 표정에 물음표 띄울 새도 없이 스르르 기울었다. 그리곤 툭. 머리에 누군가의 어깨가 닿는다. 래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얼굴을 있는 대로 구긴 유진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심지어 내뱉은 말은 더 가관이다.

“김래빈 왜 약한 척해?”

“내가?”

“김래빈 왜 나한테 기대? [와, 나 지금 진심으로 소름 돋았어.]”

“한국말로 해, 차유진. 그리고 넋 놓고 있는데 네가 앉았으니 무게 중심이 쏠려서 자연스레 기대게 된 것뿐이야! 약한 척이라니…….”

기대고 있을 마음도 안 들게 한다. 있던 마음도 싹 뺏어가네. 래빈은 씩씩대며 보란 듯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맞닿았던 살결이 훅 떨어진다. 차유진이 웃음 터트리는 소리가 선명했다. 호탕한 웃음에 래빈이 또 눈을 부라렸다. 왜 또 웃는 거냐, 사람을 눈앞에 두고 그렇게 웃는 건 예의 없는 짓이다, 아니 김래빈이 먼저 웃겼으니 웃는다……. 시답잖은 이야기들이 산발적으로 터지다가 사그라들고. 결국 남은 건 불편하지 않은 침묵.

그러다가 어느 순간 유진이 입을 열었다.

“잘 잤어?”

여상스러운 질문이다. 잘 잤냐는 말. 그건 안부 인사다. 평소와 같은 하루를 시작하는 말이기도 하고. 그래서 래빈은 잠시 이해할 수 없었다. 잘 잤냐니. 죽음을 닮은 잠에서 깨어난 래빈에게 잘 잤냐고 물은 사람은 아주 오랫동안 없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래빈은 곧장 대답하는 대신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안부 인사를 들은 게 얼마 만이더라. 가늠하지 못한다. 어쩐지 마른 눈이 쿡쿡 쑤셨다.

대답하지 않으나 유진은 채근하지 않았다. 대신 숨죽여 나지막한 선율을 흥얼거렸다. 화려하다기보단 소박하고 잔잔한 음들의 향연이나 래빈은 알았다. 그날, 얇은 최신형 모니터 뒤로 찬란한 유백색 달빛이 스미던 밤. 낯선 가상 악기들을 두드리며 만들어냈던 악보 네 마디. 유진은 그 네 마디를 마치 자신의 노래인 양 능숙한 솜씨로 흥얼거렸다.

잘생긴 얼굴이다. 유진이 아마 자신과 비슷한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아이돌을 했겠지. 적어도 연예계 종사자였으리라 감히 추측할 수 있다. 차유진이 아니면 누가 연예인을 해, 싶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래빈은 느리게 시선을 떨궜다. 낯선 침대. 낯선 천장. 낯선 바닥의 짜 맞춘 나뭇결을 천천히 훑는다. 그러며 입을 열었다.

“꿈을 꿨어.”

“무슨 꿈?”

“별로 재밌지는 않았어.”

“내 꿈은 안 꿨어?”

래빈은 잠시 입을 닫았다. 눈을 감고 노래를 흥얼거리던 차유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유들하게 풀어진 얼굴과 입술이 그린 부드러운 곡선. 눈이 반짝인다. 벌꿀 닮은 눈동자. 깜빡일 때마다 햇빛이 산란한다. 눈이 부셨다.

“응. 안 꿨어.”

단조롭게 대답한다. 차유진이 입술을 비죽였다. 그게 뭐야, 하고 투덜거린 듯도 했다. 하지만 래빈은 차유진의 태도를 지적하지 않는다. 모아 잡은 손을 잠시 꼼지락대다가 가만히 중얼거렸다. 음, 뭐랄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 차유진이 고개를 갸웃했으나 래빈은 더는 말하지 않기로 한다.

왜냐하면 래빈의 꿈에 나오는 것들은 전부 기억뿐이니까. 기억은 곧 과거니까. 그리고 래빈에게 과거란…….

차유진은 캐묻는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말을 잇는 대신 훌러덩 드러누웠다. 푹신한 매트리스가 다시금 요동친다. 래빈은 유진을 따라 눕는 대신 고개를 비틀어 그를 내려다봤다. 팔을 베개 삼아 누운 유진이 눈을 데록데록 굴리다가 문득 시선을 맞춰왔다.

“궁금한 거 없어? 다섯 달이나 잤는데.”

“……음.”

“아는 거면 대답해줄게.”

유진의 말에 래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궁금한 거라. 그제야 뒤늦게 의문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한다. 무릎을 톡톡 두드린 래빈은 잠시 고민하다가 천천히 운을 뗐다.

“그 까마귀는 어떻게 했어?”

“까마귀?”

“나 잠들기 전에 싸우던……. 커다란 이모션 있잖아. 새 모양.”

“Oh. 내가 이겼어.”

짤막하게 대답한 차유진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래빈은 고개만 절레절레 젓고는 다시 눈을 굴린다. 가장 큰 고비였을 이모션을 이겼다면야.

“여긴 어디야?”

“내 방!”

“……내가 왜 네 방에 있어?”

“김래빈 처음 쓰러졌을 때 의…… 의무실? 거기로 보냈어. 근데 김래빈이 안 일어나서 내가 데려왔어.”

그러며 차유진이 눈을 반짝이며 덧붙였다. 싫어? 래빈은 대답을 내놓는 대신 말을 얼버무리며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다. 아니, 싫은 건 아닌데. 정말로 싫은 건 아닌데, 뭐랄까. 이런 경험은 너무 오랜만이라서 무슨 감정을 느껴야 할지 감이 안 잡힌다. 얼굴만 괴상하게 일그러트리고 있는데 차유진이 킥킥거렸다.

“나 김래빈 기다렸어. 일어날 때까지.”

“나를? 왜?”

“일어날 줄 알았으니까?”

“어떻게?”

“그냥 알았어. 그래서 기다렸어.”

단조로운 말이다. 키득거림과는 어울리지 않는 무게기도 했다. 다섯 달. 그리 길지 않다. 래빈이 살아온 날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하다. 그러나 차유진이 말한다. 김래빈 늦잠 잤어. 다섯 달이나 자면 어떡해. 그 투정 닮은 장난스러운 말에 다섯 달은 마치 억겁처럼 변하고. 고작 다섯 달이 무려 다섯 달이 되고. 차유진이 발음하는 다섯 달은 그런 묘한 느낌이 묻어나서.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가? 래빈은 가만히 고민해본다. 고작 다섯 달과 무려 다섯 달. 같은 기간이지만 어떤 감정을 품느냐에 따라, 어떤 사람이 어떻게 발음하느냐에 따라 이다지도 다르다. 그렇다면 래빈이 살아온 시간은 또 어떨까. 대답이 없자 차유진의 시선이 따라왔다. 날카로운 눈매와 어울리지 않게 둥그런 눈동자가 묻는 듯했다. 왜?

그래서 래빈이 물었다.

“왜 기다렸어?”

어쩌면 확신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차유진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의문을 품은 것 같기도 했으나 동시에 사냥감을 잡아채기 직전 고양잇과 맹수들이 으레 짓는 표정을 닮았다. 날카롭게 번득이는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래빈은 천천히 덧붙였다.

“내가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나를 기다리는 건 다소 무모한 일이야. 품었던 희망이 보답받지 못할 때 사람은 몹시 힘들어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 기약 없는 기다림이었을 텐데.”

그런데 왜 기다렸어, 차유진?

차유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샐쭉한 표정을 지은 그는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가볍게 말했다. Okay. 나 그런 거 몰라. 김래빈 어려운 말 써.

“나 심심했어. 김래빈 없어서.”

“…….”

“보고 싶었어. 그래서 기다렸어!”

깔끔한 대답. 이어지는 환한 웃음. 드러난 송곳니가 침침한 형광등에 빛난다. 몸이 잘게 움직일 때마다 금싸라기 같은 머리칼이 반짝반짝. 마치 그게 아무 일도 아니라는 양, 너무나도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발음하는 사람처럼 차유진은 말한다. 보고 싶었어. 그래서 기다렸어. 그래서 래빈도 홀린 듯 되풀이한다. 고작 다섯 달. 무려 다섯 달. 그 두 단어가 낡아빠진 심장에 매달리며 느껴지는 묵직함 때문에.

래빈은 그냥 궁금해졌다.

네가 있었더라면 나는 찰나를 살았을까.



왜 있잖은가. 오래된 책이나 동화들에 으레 들어가곤 하는 문장. 사실 래빈 기준으로 오래면 웬만한 고전에조차 나오지 않는 종류들이겠으나 어쨌든. 래빈은 멍하니 천장만 올려다보며 익숙하고 틀에 박힌 문장을 뇌까려본다. 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이걸 영어로는 뭐라고 하더라. 앤드, 데이……. 아니 몇 세기 넘게 살았으면서 외국어 하나 못하면 어떡해. 이 상태로는 아마 회사 면접 봐도 국제화 시대에 자회사가 추구하는 인재는 다양한 외국어가 가능한 어쩌고저쩌고의 말에 의거해 탈락할 게 뻔하다. 거기까지 생각한 래빈은 또 그냥 푹 한숨 쉬었다. 국제화 시대가 다 뭐냐. 요즘 세대는 하늘에서 산다.

벌어진 잇새에서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명백한 도피성 생각들이 그렇잖아도 뻑뻑한 사고를 온통 방해한다. 한숨을 너무 많이 쉬었더니 이제는 옆구리가 아팠다. 래빈은 머리를 비우는 대신 꾸물거리며 이불을 파고들었다. 그러다가 코끝을 어지럽게 간질이는 진한 체향에 지레 놀라 파드득 떤다. 얘는 여기서 대체 뭘 하길래 차유진 냄새가 이렇게 나? 괜히 무안해져 눈에 힘만 주다가 아, 얘 여기에 거의 오 년 살았댔지, 하고 혼자 이해하는 거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난리 났다.

끝끝내 이불에 얼굴을 파묻기로 결정한 래빈이 스르르 무너졌다. 이불 꺼지는 소리가 흩어진다. 래빈은 이불에 얼굴 파묻은 채로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차유진 냄새. 주먹 꽉 쥔다. 애꿎은 이불만 퍽퍽 때리다가 또 한숨.

그러니까 뭐가 문제냐면, 차유진이 문제였다.

깨어난 지 이틀이 지났다. 아니, 사흘인가? 사실 며칠 지났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정신없는 시간이었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차유진과 몇몇 연구원들의 강권에 따라 래빈은 정밀검사를 거쳤다. 거의 몇백 년 만에 피를 뽑고 엑스레이를 찍고 아무튼 별짓을 다 했다. 이거 굳이 해야 하냐는 질문에 차유진은 단호히 대답했다. 반년 가까이 잠들다 깬 사람을 두고 멀쩡할 거라고 생각 안 해. 김래빈은 그 말을 듣고 눈만 데구르르 굴렸다. 아니 그야 평범한 사람은 몇 세기씩 못 사니까 그렇지. 평범한 사람은 복부가 관통당해도 삼십 분이면 수복되지 않으니까 그렇지……. 할 말은 많았으나 그냥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어쩐지 기분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아서 그랬다.

결과는 일주일쯤 후에 나온다고 했다. 그래. 거기까진 좋았다. 그러니 너는 알아서 쉬고 있으라는 총괄 연구원의 말에 차유진이 자신을 냉큼 방으로 들고 온 것까지도 괜찮았다. 문제는 어디서 생겼냐면. 방문을 단단히 잠근 차유진이 최신형 모니터를 디밀면서 이제 작곡할 거지, 하고 익숙하게 말을 붙였을 때부터.

얼떨결에 최신형 모니터를 받아들었더랬다. 투명한 액정 위에 비친 점과 선과 면들을 빤히 바라보다가 손도 한참 놀렸다. 뚱땅뚱땅 음악 만드는 게 재밌어서, 래빈은 자신이 생전 이 표현을 쓸 줄 몰랐으나 정말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헉 설마 세상 또 망한 거 아냐 싶어서 고개를 퍼뜩 들었을 때. 차유진 너무 조용한데 사고 쳤거나 죽은 거 아니야 싶어서 다급히 시선을 올렸을 때.

눈이 마주쳤다. 차유진이랑.

노란 눈이 말갛게 반짝였다. 형광등 불빛을 따라 가만히 점멸하는 눈은 래빈에게서 떨어지질 않은 채였다. 차유진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주친 눈꼬리가 부드럽게 곡선을 그렸다. 셋. 둘. 하나. 미치도록 느리게 가는 시간 속에서 차유진이 천천히 입꼬리를 들어 올리고. 살짝 벌어진 입 사이로 송곳니가 드러나고. 흐드러진 검은 머리칼 끄트머리가 살풋 빨갛게 물들더니…….

으아아악! 이불에 얼굴 파묻었던 래빈이 또다시 팔딱거렸다. 주먹 쥐고 이불을 세차게 두드리다가 지레 진 빠져서 숨이나 헥헥댔다. 뜨끈하게 열이 오른 머리가 믿기지가 않았다. 아니 그니까. 당시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고장 난 심장이 마구잡이로 펌프질해댔다. 나 진짜 울고 싶다……. 이 정도 나이 차이면 연하가 아니라 손주를 넘어서 후손인데? 래빈은 낡고 지친 얼굴로 축 늘어진다. 옆구리가 쿡쿡 쑤시는데도 기어코 한숨을 내뱉었다.

차유진 너 왜 나 그런 눈으로 봐? 아니. 이게 아니지. 그런 눈이라는 말은 다소 추상적이기 때문에 원하는 대답을 듣기 어렵다. 차유진 너 왜 나 보면서 머리 물들였어? 이건 또 뭐야. 신종 고백? 너 왜 나 보면서 얼굴 붉혀가 아니라 머리 물들여야? 아니 애초에 내가 왜 이런 고민을 하지? 문제가 차유진이 맞아? 아니. 아니. 이게 아니라.

“…….”

눈을 깜빡이던 래빈은 느리게 몸에서 힘을 풀었다. 웃음도 안 났다. 괴상한 속도로 박동하며 펌프질하는 심장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동안 태엽이 엇나간 것처럼 느리고 일정하게 뛰던 주제에. 인제와 엔진을 고친 것처럼 미친 듯이 질주하는 심장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게 두려움인지 흥분인지. 그도 아니면 제삼의 감정인지. 오랜만에 맞는 거센 반응은 되려 래빈을 당혹스럽게 했다.

이런 감정을 일컫는 말이 하나쯤은 있었을 텐데. 지금은 모르겠다. 이 감정을 정의하면 그네들의 관계가 딱 그만큼이 될까 봐 두려운 건지도. 정의한 감정 하나 말고는 전부 잘라낼 것만 같아서 무서운지도. 래빈은 애꿎은 이불만 말아쥐었다. 아니지. 어쩌면 진짜로 무서운 건.

그날 래빈은 체감했다. 제멋대로 흐르던 시간을. 피부로 와닿고 살에 돋은 털을 스치듯 지나쳐 소름이 오소소 돋게 만든 그것. 래빈의 시간은 시종일관 느리고 굼벵이 같았으나 그날만큼은. 마구잡이로 늘어지고 줄어들다 이리저리 튀어버리는 시간에 속절없이 휘말리며 래빈은, 어쩌면 생전 처음으로, 느꼈다. 이건 위험하다.

한껏 차분해진 래빈이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이불에서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래. 그날 심장은 제어를 잃은 듯이 박동했고 래빈은 머리가 아찔할 지경이었다. 궤도를 이탈한다면 꼭 그런 느낌일까. 래빈은 지금껏 자신이 엇나간 위성 같다 여겼으나 그날 처음으로 의문을 품었다. 어쩌면 자신은 나름대로 일정한 궤도에 머물러 있었지 않았나, 하고. 그러지 않으면 이다지도 불온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맞닥뜨리고 당황하지 않았을 테니까.

래빈은 언젠가 입안에 머금었던 질문을 떠올렸다. 네가 있었더라면 나는 찰나를 살았을까. 그저 껍데기뿐이던 질문에 알맹이가 채워지기 시작한다. 네가 있었더라면 나는 어땠을까. 김래빈은 하나의 오롯한 존재다. 타인에게 기생해 살아갈 필요가 없는 어엿한 하나의 형태였다. 그러나 차유진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가 자신을 향해 웃을 때마다, 래빈이 좋아하는 것들을 이미 안다는 양 건넬 때마다 래빈은 생각하게 됐다. 네가 있었더라면. 그날, 그때. 시간을 지나 아주 오래전. 내가 아직은 사람이라 굳게 믿었던 시절. 누나가 나보다 나이가 많았던 때. 다소 권태로웠으나 그럭저럭 살 만하던 그 순간들에 네가 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나는 일순간을 살았을까. 그랬더라면 지금쯤 나는 골조마저 삭아 들어 한 줌 흙조차 되지 못했을까. 날짐승들의 앞발에 파헤쳐지고 칼바람에 흩어지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까. 그랬을까. 나는.

의미 없는 생각들이다. 다음 순간 래빈은 밭은 숨을 억지로 집어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고작 사람 하나가 곁에 있다고 고장 난 시계가 제대로 굴러갈 리가. 짤깍거리며 감기는 태엽은 어쩌면 애초부터 고장 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럴 리가 없다. 언젠가 다감함을 알려주었던 그 사람이 나직이 속삭였다. 래빈아. 래빈아.

네 곁에 어떻게 사람이.

홀로 오롯한 존재다. 래빈은 홀로선 존재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그는 되풀이한다. 혼자여야 하는 것. 누군가를 곁에 두어서는 안 되고. 정을 주어서도 안 되고. 제 시간은 언제까지고 느리게 흐르다가 지리멸렬한 궤도 속을 표류해야 하며…….

래빈은 그래야만 한다. 애초에 그렇게 태어났으니까. 그의 아주 기초를 이루고 그를 발아하게 한 씨앗조차 세상에서 가장 오롯한 존재이리라. 그러니 그 또한 그래야 할진대.

그러고 싶지가 않아.

홀로 오롯하고 싶지 않다. 불완전해도 좋으니 둘이고 싶다. 홀로 오롯할 바에는 불안한 둘이고파서.

웃기지도 않은 일이다. 눈을 내리감은 래빈이 나직이 신음했다. 쨍한 두통이 관자놀이를 엄습했다. 생각이 유려하게 이어지지 않는다. 일정하게 맥동하던 심장의 박자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다. 호흡이 흐트러지며 숨이 꽉 막히는 감각 한가운데에서 래빈은 생각했다. 길이 뚝뚝 꺾이고 똑같은 곳을 뱅뱅 맴도는 기분이다. 밭은 숨이 폐부를 짓눌러 터트릴 것만 같다. 그런데도 래빈은 자신이 죽지 않을 것을 알아서.

어쩐지 목이 말랐다. 지독한 갈증이다. 그는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몸에 휘감겼던 이불이 팔랑팔랑 떨어진다.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지르밟으며 나아갔다. 오, 그는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체향 묻은 이불 따위 그에게 하등 도움 될 것 없으므로. 둔해진 머리는 오히려 나직이 속삭인다. 너는 누구도 죽일 수 없다. 너는 누구도 죽일 수 없어야 한다. 그건 아주 나지막한 읊조림이다. 손톱으로 칠판을 긁을 때 나는 기괴한 끽끽거림을 닮았으나 분명한 언어의 구조를 지녔다. 그는 천천히 방문을 열었다. 거실 소파에 걸터앉아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한 차유진의 뒤통수가 가장 먼저 보인다. 텔레비전은 그가 듣도 보도 못한 시사 프로그램이 영어로 송출되고 있었으나, 글쎄, 그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건 오직 그뿐이니까.

다만 인기척에 차유진이 고개를 돌린다. 그와 눈을 마주치고 태연스레 물어온다. 생각 끝났어? 팔을 기대고 몸을 틀어 앉는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말간 눈동자가 반짝반짝. 꼭 언젠가 올려다봤던 태양을 닮은.

“김래빈?”

심장이 뛴다. 온 세상 중력이 그를 지르밟고 잘근잘근 씹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느낌. 머리가 어지럽다. 그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젓는다. 의뭉스러운 표정을 짓던 차유진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것도 그때다. 유진이 눈을 살짝 찡그린다. 자신을 향한 잰걸음에 맞추어 그는 헐떡인다. 괜찮아, 김래빈? 영 어색한 사람의 말이 귓바퀴만 뱅뱅 맴돌다가 고막을 울리지 못한 채 흩어진다. 그는 아주 잠시, 유진이 누구에게 무어라 말했는지 고심한다. 다만 고개를 들었을 때 그따위 생각은 아무래도 상관없었음을 깨닫고는 그저 가볍게 머리를 털어버리는 것이다.

눈앞에 사람이 있었다. 뜨거운 체온을 가진 하나의 생물. 눈을 깜빡인다. 몸이 흔들린다. 훅 가까이 다가온 노란 눈이 잔뜩 일그러졌다. 부르겠다고? 누굴? 말간 금빛이 시야에 가득 차오른다. 견딜 수 없어 눈을 돌렸다. 그런데도 잔상처럼 진득하게 눌어붙어서. 숨이 꽉 막혀서. 간신히 호흡한다. 이내 뜨거운 것이 품에 가득 차며 나직한 목소리가 속삭인다. 괜찮아. 괜찮아, 김래빈. 숨 쉬어. 숨을.

내 이름이 래빈이야? 뱉은 것도, 삼킨 것도 같은 말.

몸을 가득 메우는 체온이 있다. 사람의 온기라고는 믿을 수 없이 뜨겁다. 조금이라도 더 붙어있다가는, 아, 그는 직감한다. 타버리고 말 테다. 불살라지는 온기에 몸을 뒤틀다가 한갓 재 한 줌이 될 것이다. 그래선 안 된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그는.

왜냐하면 그는 죽어선 안 되니까.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해야 하니까.

꼭 죽을 것만 같아 그는 손을 들었다.

광폭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뜨겁던 것이 훌쩍 멀어졌다. 동시에 제 몸도 날아가 벽에 부딪힌다. 등허리가 아렸다. 어깨가 쓰라리고. 잘못 부딪힌 게 틀림없다. 그래도 뭐 어때. 어차피 나을 거다. 회복력은 좋으니까. 이까짓 상처가 그를 죽일 수도 없으니까. 그래서 그는 대신 고개를 든다. 목표가 생겼다. 그제야 세계를 뒤틀던 두통이 잦아든다. 그는 결심했다.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사람 따위 존재해선 안 된다. 그러니 그는 죽일 것이다. 바다를 들이부어서라도 타오르는 불길을 꺼트릴 것이다. 잿더미를 잘근잘근 밟아 마지막 불씨 하나까지도 지르밟을 것이다.

잔뜩 범람하는 금싸라기. 훌쩍 멀어진 채 홉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불길. 먼지가 자욱해 표정을 읽기가 어렵다. 시끄러운 사이렌이 울렸다. 끄면 좋지만 죽을 듯이 울려 봐야 신경 좀 쓰이고 만다. 그러니까 우선은 목표에 집중하기. 그는 숨을 고른다. 천천히 발끝까지 힘을 주고 느리게 도사린다. 건너편에 선 불길이 입을 연다. 입술을 빠끔거리며 무언가를 발음한다. 들리지 않는다. 듣고 싶지 않다. 해피 엔딩. 그리고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도사렸던 몸을 일순 편다. 날 듯이 튕겨 나가는 순간. 흠칫 물러나는 몸짓부터 새빨갛게 물들어가는 머리칼 따위가 느리게만 보였다.

그의 시간은 언제나 느려야 한다.

“김래빈!”

몰려오는 발소리. 희끄무레한 외침. 허공을 찢어낸다.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소파가 두 동강 나며 튀어 올랐다. 유진이 고개를 젓는다. 진정해!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 그는 고개를 젓는다. 벌꿀 같던 눈동자 끄트머리가 새파랗게 물들기 시작한다. 움직이지 마, 김래빈. 점차 단단해지는 목소리. 굳어가는 표정. 시선을 내린다. 잔뜩 경직된 손끝에서 불티가 튀기 시작했다.

나의 시간은 언제나 느려야만 해.

섬찟한 화염이 그를 덮치는 순간까지도 그는 생각한다.

그리고 모든 것의 암전.



연구소가 뒤집혔다. 수석 연구원 박문대는 제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보고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지상을 점령한 이모션들 덕분에 전 세계 사람들이 부유하는 건물로 이주한 지 벌써 백여 년이 다 되어 가는데. 그동안의 권태로움을 비웃기라도 하듯 대형사고가 터졌다. 주위에서 시끄럽게 질러대는 비명이나 고함 따위조차 아득하다. 박문대는 마른침만 되삼키다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차유진.”

“문대 형. [나 좀 도와줘요. 그를 옮겨야 해요. 이대로 놔두면 위험할 거예요.]”

“[네가 누굴 옮길 상태냐 지금?]”

말이 날카롭게 튀어 나갔다. 날 선 모국어에 차유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부스스 웃는 것이다. 혼돈이나 다름없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미소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나는지도. 박문대는 질끈 주먹을 쥐었다. 매캐한 탄내 때문인지 머리가 아팠다.

“[이게 대체 뭔 난리야.]”

“[몰라요. 확실한 건 이대로 놔뒀다간 위험할 거라는 사실이죠. 그도, 우리도. 그러니 서둘러야 해요. 부탁할게요.]”

차유진이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오른쪽 옆구리를 짚고 밭은 숨을 들이켰다. 박문대는 눈을 가늘게 떠 차유진을 살폈다. 옆구리 쥐고 있는 걸 보니 갈비뼈 몇 대는 우습게 나갔을 거고. 최악의 경우 부러져서 폐를 찌르고 있을지도 모르고. 묘하게 무게 중심이 왼쪽으로 쏠린 걸 보아 오른쪽 다리도 멀쩡한 것 같지는 않고. 이마는 찢어진 데다가 잘생긴 얼굴엔 피가 덕지덕지 말라붙었다. 검댕까지 착실히 묻히니 영락없는 환자였다.

박문대의 시선이 절로 떨어졌다. 구석 벽면에 쓰러지듯 누운 채 눈을 내리감은 사람. 엉망진창인 차유진과는 다르게 그냥 숯검댕 조금 묻은 정도였다. 누가 보면 이 난리 속에서 평온하게 잠이나 자는 거냐며 오해하기 딱 좋겠네. 아무리 뜯어봐도 어디 부러지거나 긁힌 부분 한 군데조차 찾기가 힘들었다. 박문대는 말없이 차유진을 지그시 바라봤다. 지레 찔린 양어깨를 으쓱인 차유진이 절뚝절뚝 잠자는 숯의 왕자님한테 걸어가는 꼴을 보다가 박문대는 입을 열었다.

“……뭐냐?”

“김래빈이에요.”

“[내가 그걸 물은 것 같아?]”

“[김래빈은 그냥 김래빈이에요. 문대 형도 알잖아요.]”

땀이나 눈물이 아니라 피가 떨어졌다. 코에서 흘러나와 인중과 입술을 적시고 떨어지는 핏물에 차유진이 아차차, 했다. 어울리지 않게 가벼운 목소리다. 박문대의 눈이 점점 더 가늘어졌다. 차유진은 조금 과장해 이 연구소에서 실력 일이 등 다투는 베테랑이다. 이모션들 상대로도 꿀림이 없던 녀석이 이런 꼴이 됐다고. 하물며 상대는 상처 하나 없이 그냥 잠든 듯하고. 저 코피는 아마 차유진이 무리해 능력을 끌어다 썼음을 알리는 증거일 테다.

그러나 박문대는 꼬치꼬치 캐묻는 대신 삐딱하게 짝다리를 짚었다. 차유진을 십여 년간 봐온 결과 내린 결론이다. 유진은 빨리 실토하라고 압박하면 할수록 말을 빙빙 돌렸으니까.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기어코 래빈을 부축한 유진이 또 절뚝절뚝 다가왔다.

“[부탁이 있어요.]”

“[이번 일 덮어달라는 거면 나는 못 해준다. 덮고 말고 할 규모가 아니잖아.]”

“[아니에요. 물론 가능했더라면 좋았겠지만, 그런 무리한 걸 부탁하진 않아요! 아무리 문대 형이라도 이 정도 난리를 아무도 모르게 묻는 건 무리겠죠.]”

어쩐지 울컥하는 마음에 눈썹만 비쭉 올리자 차유진이 와하하 웃었다. 넉살 좋네. 살 만한가 봐? 와우. 문대 형 지금 티베트 여우 닮았어요. 장난하지 말고. 몇 번 시답잖은 만담이 오간다. 그러다가 차유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요. 느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유진은 고개를 돌렸다. 눈을 감은 채 늘어진 김래빈의 목덜미에 느리게 얼굴을 파묻고는 숨을 들이켰다. 자잘한 생채기에 눈을 찡그리면서도 래빈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은 부드럽기 그지없어서.

“[정밀검사 결과 말이에요. 최대한 빨리 알려줘요.]”

“…….”

“[그리고 결과 나오면 나한테 가장 먼저 보여줘요. 다른 사람들 말고 나한테. 김래빈보다도 먼저 말이에요.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죠?]”

부탁해요, 하고 차유진이 발음한다. 박문대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십여 년쯤 태만하게 살았다고 이런 시련을 맞는 건가. 그런데 대놓고 투덜거리지도 못하겠다. 김래빈을 지나 자신과 시선을 맞추는 차유진의 시선이 터무니없이 굳건해서. 그리고 지그시 바라볼수록 그 속에 꼭꼭 숨긴 불안감이 서서히 발아하고 있어서.

그래서 박문대는 대신 천천히 말했다.

“[……너 얘 별로 안 좋아했잖아.]”

목소리가 갈라진다. 소란에 몰려든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음이 느리게 커진다. 차유진은 그냥 애매하게 웃었다. 입꼬리를 올리고 뒤통수를 긁적이더니 어깨를 으쓱인다. 동시에 밭은 숨이 터져 나왔다. 켁켁. 역시 폐에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다니까. 무심코 드는 생각에도 차유진은 그냥 웃을 뿐이고.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사람에겐 계기라는 게 있기 마련이잖아요? 짧게 사는 인생이니까 그냥 매사 솔직하기로 결심했고 그에 충실했을 뿐이죠.]”

유창한 말이다. 거리낌도 망설임도 없는. 일견 유쾌하기까지 들리는 문장을 킥킥대며 발음하던 차유진의 시선이 천천히 김래빈에게 돌아간다. 부드러운 영어는 잠잠한 비행운을 남기며 선회해 박문대에게 날아가고.

“[김래빈과 있을 때면 시간이 몹시 느리게 가요. 어느 순간부터 그랬어요.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몰라요. 김래빈이 만드는 노래는 보통 삼 분 육 초쯤 되니까요. 나는 그 삼 분 육 초에 갇혀 있는 거나 마찬가지거든요.]”

“[너는…….]”

“[무슨 느낌인지 알겠어요? 나는 아직도 그 삼 분 육 초에 갇혀 있어요. 지금은 아마 일 분 십삼 초쯤 됐으려나.]”

“…….”

“[그리고 일 분 십삼 초는 무언가가 바뀌기엔 충분한 시간이죠.]”

일분. 그리고도 십삼 초.

박문대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차유진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은 귓바퀴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미꾸라지인 양 사라진다. 허겁지겁 달려온 보안팀이 개판이 된 방안과 엉망진창인 차유진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입을 떡 벌렸다. 능청맞게 웃는 차유진을 뒤로하고 박문대는 천천히 물러났다.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아차, 문대 형. 그리고 하나만 더 부탁할게요.]”

박문대는 고개만 반쯤 돌렸다. 차유진이 눈을 샐쭉 접으며 말했다. 로운리니스 말이에요, 하고 운을 튼 차유진은 망설임 없이 말을 이었다.

“[가장 최초의 이모션이 로운리니스였다는 낭설을 같이 조사해줄 수 있을까요?]”

“[감이 잡히는 거라도 있어?]”

“[뭐 그렇죠. 내가 하고 싶은데 보다시피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아파요, 하고 차유진이 입을 빠끔거린다. 박문대는 고개만 내젓곤 한숨을 쉬었다. 버릇을 잘못 들여도 단단히 잘못 들였다. 그런데도 거절할 수가 없다는 게 제일 환장하겠는 지점이라.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 유진은 또 웃었다.

“[로운리니스들은 등급이 올라갈 때마다 점차 사람과 비슷한 모습을 취하곤 하잖아요.]”

“…….”

“[그것도 함께 고려해줘요. 고마워요.]”

너는 어쩌면 정답보단 확신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박문대는 목구멍까지 솟은 말을 잘근잘근 씹어 삼키곤 마침내 발을 돌렸다.

인파 틈으로 녹아 사라지는 박문대에게서 시선을 돌린다. 차유진은 대신 흘러내리려는 김래빈을 도로 끌어올렸다. 눈을 감은 채 고른 숨을 들이마시다가 내쉰다. 미간을 찡그리지도, 앓는 소리를 내지도 않는다. 평화롭게 잠든 거나 다름없어 보였다. 그래서 더 안 어울렸다. 유진은 헛웃음을 지으며 찬찬히 방을 살폈다. 오 년 조금 안 되는 시간 동안 지냈던 방이다. 웬만해선 말끔하게 지내려고 노력까지 했다. 인제 와선 아무 쓸모도 없게 됐지만.

방안에 남은 건 거의 없었다. 파스텔 색조 벽지는 검댕이 묻어 얼룩덜룩하고 바닥엔 잿더미가 함박눈처럼 쌓였다.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데다가 벽면과 바닥이 움푹움푹 패여 있기까지. 무너지려는 벽을 간신히 지탱한 기둥을 괜히 자랑스럽게 바라봤다. 기둥 친구. 오 년 동안 고마웠어. 짐짓 아련한 표정을 짓는데 보안팀 사람이 다가와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괜찮으십니까?”

“나 괜찮아요.”

“그분은 저희가 구속하겠습니다. 차유진 씨는…….”

“구속을 왜 해요? 누가 하랬어요?”

“어, 그야……. 연구소 내부에서의 능력 사용은 금지되어 있으며…… 공격당하신 것 아닙니까?”

보안팀 사람이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차유진은 순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구속되는 게 맞기는 하지. 말마따나 연구소 내에서의 능력 사용은 정말 부득이한 상황이 아닌 이상 금지되어 있고. 다짜고짜 공격한 건 김래빈, 다짜고짜 공격당한 쪽은 차유진이니까. 그러니 래빈이 구속당하는 게 맞기는 한데.

“괜찮아요. 나 아현 형한테 갈래요. 김래빈도 나랑 같이 가요.”

구속당한 김래빈을 어떻게 대우할지는 눈에 선하지 않나? 차유진은 부러 활짝 웃으며 말했다. 상대가 뭐라고 반응하든 간에 밀고 나가면 쉽사리 말을 얹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다. 왜, 한국말에는 그런 표현도 있지 않은가. 웃는 얼굴에……. 뭐더라. 침 못 뱉었나, 화 못 내던가. 아무튼 그거. 모르는 사람들은 차유진을 일컬어 대책 없다고 말하겠으나 그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건 치밀하게 계산된 행동이다. 오히려 제멋대로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을지도 모르지. 차유진은 쿡쿡 쑤시는 옆구리를 부여잡고 쓰러진 김래빈을 어깨에 들쳐멨다. 어, 하는 얼빠진 소리를 뒤로하고 화려하게 작별 인사.

“나 갈게요! 부탁해요!”

그러며 차유진은 가볍게 발을 옮긴다. 인파를 헤치고 나아간다. 사람들은 차유진과 어깨에 늘어진 김래빈을 힐끔거릴 뿐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뒤에서 보안팀 사람이 차유진의 이름을 몇 번 불렀으나 그마저도 얼마 가지 않아 끊겼다. 모퉁이를 꺾어 돌아 비상계단에 들어가고 나서야 차유진은 무릎을 꿇었다. 온몸이 욱신댄다. 조금 전부터 숨쉬기도 불편했다. 김래빈은 의외로 힘이 셌다. 깡말라 보이는 주제에 어디서 난 힘인지도 모르겠다. 타격 하나하나가 제법 아프구나 싶었는데 어디 잘못 부러진 게 틀림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차유진은 늘어진 래빈을 힐끔 곁눈질했다. 뜻 모를 타이밍에, 알지도 못하는 이유로 자신에게 공격을 감행한 김래빈.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솜털이 삐쭉 솟았다. 급작스럽게 느껴지던 날카로운 살기. 순간적으로 세상이 새빨갛게 물든 듯 차유진을 뒤흔들던 위기감. 내지르는 손발 하나하나는 분명히 유진의 심장을 노렸다. 김래빈이었는가. 숨과 함께 침몰하며 차유진은 래빈을 살폈다. 눈을 감고 색색 호흡하는 김래빈은 여기에 있다.

차유진은 래빈이 허공을 찢어발길 때마다 느꼈던 섬찟한 감각을 알았다. 손과 발길질을 따라 길게 남은 궤적은 스치기라도 하는 순간 들불처럼 몸을 집어삼켰을 것이다. 유진은 안다. 모를 수가 없다. 이런 능력을 쓰는 부류는 지상에 잔뜩 있었다.

“……로운리니스.”

이모션의 한 종류. 등급이 높아질수록 괴상하리만치 사람의 겉모습을 의태 하는 녀석들. 김래빈이 그를 밀친 순간 차유진은 우습게도 로운리니스를 떠올렸다.

어쩌면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김래빈의 정밀검사 결과를 알고 싶었던 건. 최초의 이모션이 나타난 건 까마득한 세월도 전이라지만, 그걸 고려하고서라도 그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는 아무도 특정하지 못했다. 게다가 인제 보니 신경 쓰이는 낭설도 한두 개가 아니다. 박문대에게 읊어주었던 소문을 그대로 곱씹으며 차유진은 난간에 몸을 기댔다. 가쁜 숨을 차분히 고른다. 가슴이 아프다. 갈비뼈가 나가서 그렇다. 범람하는 감정 때문이 아니라.

아주 어릴 적. 아직은 능력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던 시절에. 눈을 내리감은 차유진은 가만히 떠올렸다. 할머니에게서 오래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차유진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일선에서 활약하시던 할머니는 차유진이 능력 다루는 법을 익히게 만든 일등 공신이셨다. 그런 분이 뭐라고 하셨더라. 눈을 감으면 세상이 까맣다. 하지만 이것이 진정한 암흑이 아님을 그는 알고.

나초, 보려무나. 우리의 힘은 우리의 감정으로부터 비롯된다. 뿌연 안개 속에서 할머니가 말씀하신다. 일곱 살. 아니, 여덟 살이던가. 어린 차유진은 할머니 무릎에 드러누운 채 눈을 초롱초롱 빛낸다. 그때는 힘을 잘 다루지 못한 덕분에 머리카락은 제멋대로 색을 바꿔댔다. 할머니 무릎에 누웠던 그때는 또 무슨 색이었더라.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어. 사람은 감정을 표출하지 않고서는 살지 못하거든. 그런데 옛날에, 할머니의 할머니가 태어나기도 이전에 말이다…….

“[……권태롭던 시기가 있었어.]”

가만히 발음해본다. 할머니의 다정한 목소리가 가벼운 웃음을 뿌리며 긍정하는 것만 같다. 그리고 이어진 말은? 할머니가 무어라 하셨더라?

본인의 감정을 정의할 수 없으니 혼란스러울 뿐이지. 살고자 하던 사람들이 날것의 감정을 토해내니 그 파편이 꿈틀거리다 이모션이 된 게야. 어리석었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는 괴물일 테지만 그들에게는 그거 감정의 편린이었을 뿐인데?

그리하여 태어난 최초의 이모션이 로운리니스라지.

느리게 눈을 떴다. 여전히도 고이 눈을 감은 채 호흡하는 래빈이 곁에 있었다. 손을 뻗는다. 부들부들한 머리칼이 손끝에 감겼다가 떨어졌다. 만약의 이야기야. 차유진은 가만히 속삭였다. 정말 만약의 이야기인데, 김래빈…….

삼 분 육 초짜리 음악에서 이제 막 반을 지났다. 일 분 이십오 초. 네 오선보 위에 음표를 그리는 건 나. 그런데도 길이를 정해놓은 채 단호히 끊어내는 건 너.

차유진이 한숨을 삼켰다.

박동하는 심장이 그렇게 이상했다.



래빈이 눈을 떴을 때 그는 혼자였다.

이상한 일도 아니다. 몸은 물먹은 솜처럼 눅진했기 때문에 손 하나 까딱하기도 힘들었다. 온몸의 감각이 둔했으나 래빈은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부터 했다. 손목과 발목을 단단히 억누르는 두툼한 쇠를 알아챈 까닭은 아니다. 박제품처럼 침대에 고정된 꼴을 상상하곤 헛웃음이 나서도 아니고.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에 집중한다. 희멀건하게 하얀 천장이 시야에 들어차며 뿌옇게 이지러졌다.

마지막에 너는 뭘 하고 있었는가. 누군가 낯선 목소리로 물어온다면 래빈은 답할 수 있었다. 불길을 보고 있었지. 그 품이 너무 뜨거워 물을 끼얹으려 했지. 네가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나는……. 파르르 떨리던 속눈썹은 이내 힘없이 시야를 가렸다. 래빈은 멍하니 눈을 감은 채 뇌까렸다. 죽고 싶었다. 오래된 이야기는 아니다.

차유진은 괜찮으려나. 주먹 끝에 닿던 생경한 불길을 똑똑히 떠올릴 수 있었다. 제 몸을 몇 번이고 녹이고 살라 먹은 불길은 제 생명까진 앗아가지 않았다. 이쯤 살면 래빈도 알았다. 죽일 생각과 제압할 생각으로 퍼붓는 공격의 차이. 래빈은 버릇처럼 몸을 뒤척이려다 마디마디를 세게 짓누르는 압력에 눈만 찡그렸다. 차유진이 휘두른 모든 공격에 살의는 없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 우스운지도 모른다. 래빈은 차유진을 죽일 심산이었으니까. 하물며 부라린 시선에조차 살기를 그득 머금었는데.

오래도록 살아왔다. 지치고 낡았다가 그런 감상마저도 들지 않을 만큼. 눈을 깜빡이던 래빈은 들리는 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꺾었다. 누군가 걸어 들어온다. 침침한 내부에 빛이 들어왔다. 그제야 주위가 보였다. 사면에 창문 하나 없이 매끄러운 철로 단단히 감싼 이 상자 같은 곳. 래빈은 놀라지 않는다. 오히려 주춤한 건 발을 들인 사람이었다.

“……깨셨습니까?”

“예.”

그리곤 잠시 침묵. 래빈은 상대를 채근하지 않는다. 이 답답한 구속을 풀어달라고 윽박지르지도 않는다. 대신 지그시 바라만 봤다. 자신이 저지른 짓을 생각한다면 이런 처우가 부당하다고 주장하기도 모호했다. 다행스럽게도 상대는 머뭇거리다가 곧이어 입을 열었다.

“차유진이 거세게 항의하고는 있습니다만……. 그래도 당분간은 이곳에서 지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일이 좀 커져서요.”

“괜찮습니다.”

“기억은 나시나요?”

“예.”

“어디까지?”

그 질문에 래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억나지 않는 일은 거의 없다. 불길에 닿지 않으려 몸을 움츠리는 순간,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차유진의 형형한 눈빛을 마지막으로 필름이 끊겼다는 사실까지 선명히 떠올랐다. 불길을 끄려 했거늘 꺼진 건 제 의식이다. 조금은 우스워서 하릴없이 웃음이나 흘리는데 상대가 느리게 말했다. 정밀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를 토대로 추측한 결과가 있는데.

래빈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지리멸렬한 몇 세기의 삶이 지금 여기서 뒤바뀔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아무것도 변치 않을 것이다. 살짝 비틀어 튼 고개로 래빈은 상대를 가만히 바라보며 발음했다. 무엇입니까? 어쩌면 래빈에겐 정답이 아니라 확신이 필요했다. 아주 오랫동안 누구도 자신에게 줄 수 없던 그것.

“최초의 이모션이 로운리니스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어쩌면 그렇기에 래빈은 놀라지 않았다.

유려한 말은 부드러운 선율이 되어 래빈을 감쌌다. 최초의 이모션. 규격 외의 로운리니스. 회복력이 좋다는 특성은 억겁의 시간을 지나며 몸을 부풀리더니 죽음이라는 개념마저 집어삼켰다. 갓난쟁이던 시절 사람 손에 길러진 탓에 그들에게서 사람의 말과 감정과 이성을 학습했고. 그러나 수명마저 사람을 닮을 순 없는 노릇이라 어느 순간 덩그러니 남아버렸고.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으니 그저 사람이라 생각했을 테고. 어긋나는 시침과 분침과 초침을 사람의 시계에 맞추어 쥐어뜯으니 결국엔 태엽이 고장 나 버렸을 따름이고. 죽음을 삼켜버린 개념이 되어 홀로 오롯이 존재했을 테고. 그러며 또 덩그러니 남아버렸을 테고.

“이모션의 기반이 되는, 어쩌면 우리의 심장과 뇌를 닮은 건 강렬한 감정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핵을 이루는 감정에 따라 이모션의 이름을 붙였고요.”

상대의 목소리가 한없이 느렸다. 래빈은 그의 말에 경청하면서도 손끝까지 힘을 줬다. 근육이 움찔거리며 까딱이는 손가락의 감각. 살아 있음을 여실히 알리는 건 그러한 것들.

“폭주……한 이유도 그와 결을 같이 합니다. 핵이 되는, 당신을 지배해야 하는 가장 커다란 감정이 흔들리기 시작하니 존속의 위기라고 판단한 거겠죠. 자연스럽게 그 대상을 제거하고자 했을 거고요.”

“…….”

“차유진을 사랑합니까?”

그 고요한 질문에 래빈은 느리게 눈을 감는다. 글쎄. 사랑이라는 건 좀 더 부드럽고 달콤하고 시원한 감정 아닌가. 이렇게 눅눅한, 썩어 문드러지기 직전의 골조를 지탱하기 위해 갖다 붙이는 질척한 진흙 닮은 감정조차 사랑이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 래빈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러나 입을 열었다.

“그 전에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만.”

“네.”

“제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습니까?”

상대는 잠시 고민하는 듯 눈을 찡그렸다. 느리게 벌어진 입은 엇박자로 말을 뱉어냈다.

“두 달하고도 반.”

짧다. 이것도 근간이 무너진 여파일까. 래빈은 순순히 대답을 내놨다. 감사합니다. 다만 질문엔 대답하지 않고. 모르는 체하며 자연스럽게 넘기고. 어쩐지 이모션들이 날 보며 이상한 소리나 하더라. 애써 가벼운 생각으로 머릿속을 그득 채우며 래빈은 가만히 숨을 내뱉었다.

“차유진은 괜찮습니까?”

“네. 열흘 전에 완치 판정받았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니요.”

“저를 내보내 주십시오.”

상대의 대답은 들은 체도 하지 않은 채 래빈이 말했다. 몹시 예의 없는 짓임을 하염없이 상기했으나 어쩔 수 없다. 상대는 직후 아무런 말도 뱉지 않았다. 오히려 다행이지. 래빈은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가벼운 숨을 쉬듯 말을 이었다.

“구속을 풀어달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전처럼 연구소를 자유로이 누비도록 해달라는 말은 더더욱 아닙니다. 저를 이 연구소에서 내보내 주시면 감사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땅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높낮이 없는 목소리였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눈앞의 인영이 이지러지길 반복한다. 상대는 드문드문 숨만 삼키다가 되물었다. 어째서입니까? 그러자 래빈은 잠시 입을 다문다. 할 말은 많았으나 할 수 있는 말은 또 적어서 그랬다.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잘 보이지도 않는 얼굴에서 뜻을 읽어낼 수 있을 리가 없기 때문에.

“이곳에 있어 봐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았습니다.”

“…….”

“이곳에 계속 머물다간 말마따나 폭주할 가능성만 커질 겁니다. 사상자를 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

“그러니 돌아가겠습니다. 땅으로.”

상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래빈은 잠시 숨을 골랐다.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아무것도. 이 연구소에서 몇십 년, 몇백 년을 지새운들 아무것도 변치 않으리란 사실을 알았다. 거대한 균열. 모든 것을 집어삼키던 커다란 암흑. 래빈은 장담할 수 없었다. 눈 앞에 펼쳐진 블랙홀 앞에서 제가 무얼 할 수 있을는지.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에 휘말린 결과가 이렇다. 차유진으로 말미암아 김래빈은 결심한다. 죽지 않을 것이다. 지금껏 그래왔듯.

그때 상대가 말했다. 의외네요.

“차유진에게 부탁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을 죽여달라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바뀐 것 맞습니까? 이대로 가다간 당신보다도 이 별에 먼저 마침표가 찍힐 텐데.”

지구가 멸망하면 래빈은 아마 우주를 부유할 것이다. 맨몸으로 유영하며 얼고 터지고 무너지고 재정립되기를 반복하며 끝끝내 살아갈 것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어둠에 표류하면서도 기어코 떠올리겠지. 언젠가 보았던 균열, 그 틈의 진정한 암흑. 그러다가 언젠가 그마저도 잊을 것이다.

전부 괜찮습니다, 하고 대답하자마자 상대가 불쑥 물었다. 두려운 건 아니고요?

“차유진이 당신을 죽이게 될까 두려운 것 아닙니까?”

“…….”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남겨지는 건 두려워하는 듯하던데.”

“…….”

“당신을 죽이고 남겨질 차유진이 두려운 건 아닙니까?”

래빈은 대답하지 않는다. 지긋한 눈으로 상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자세를 바로 했다. 텅 빈 천장, 그 위 어두컴컴한 그림자가 일렁이는 모습만을 가만히 바라본다. 대답하지 않고 대화를 회피하는 건 무례한 일일 텐데도 래빈은 그렇게 한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침묵이 침잠하고 한참 뒤에서야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알지 못한다. 일그러진 시간 감각은 눈을 한번 뜨고 감을 때마다 무너지고 재정립되길 반복했다. 빛 한 점 들지 않았기에 몇 번의 낮이, 몇 번의 밤이 지났는지조차 몰랐다. 래빈은 철로 만든 이 작은 상자 안에 박제된 사람처럼 그 호흡마저 삼키고 눈을 감았다. 시간이 흐른다. 사실 얼어버린 것도 같았다.

래빈이 감은 눈을 떴을 때 그는 상자 바깥이었다. 죽음 같은 졸음을 애써 몰아내려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렸다. 낯선 천장이다. 흰색으로 칠한 벽지와 군데군데 묻은 그을음 따위를 가만히 살폈다. 몸을 짓누르던 구속은 사라졌다. 딱딱하던 바닥에 한참 누워 있던 탓에 욱신대던 허리는 부드러운 매트리스가 감쌌다. 몸을 조금씩 뒤틀 때마다 귓전에서 사부작거리는 건 분명한 베개 소리고. 제 위를 덮은 건 흙이나 관 뚜껑이 아니라 열기 그득한 이불.

인기척은 없었기에 래빈은 가만히 생각해봤다. 정말로 두려운 것은.

갈피 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부유한다. 점을 찍고 느리게 이어 나온 삐뚤빼뚤한 모양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정말로 두려운 것은, 그러니까.

남겨지는 것. 래빈은 그 한 마디가 가지는 의미를 알았다. 그건 길을 막은 거대한 바위를 깨트리기 위해 천으로 한없이 닦는 일을 닮았다. 지리멸렬하고 고루하며 숨이 막힌다. 함께하던 시간을 떠올리면 때때로 호흡을 거두게 되며 때때로 몸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내뱉는 숨 하나하나가 아깝고 박동하는 심장을 꺼내 분해해 재조립하길 몇 번이고 반복하고픈 마음에 휩싸이게 되는.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자그마하게 난 구멍 사이로 몸을 욱여넣으면서도 어째서 구멍이 났냐며 괜히 손끝으로 지그시 눌러보게 되는 것.

래빈은 안다. 남겨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김래빈.”

래빈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반응하지 않았다. 이불을 헤집고 일어나지도 몸을 뒤척이지도 않았다. 대신 눈을 감았다. 이대로 잠들어버리길 바랐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깊은 숨과 함께 의식이 끊겨 아늑해지기를. 차분한 발걸음과 함께 훌쩍 가까워진 소리가 발음했다. 김래빈. 눅진하게 들러붙어 숨통을 압박하는 목소리다. 래빈은 눈을 힘껏 닫으며 깊이 숨을 들이켰다. 눈을 뜨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 찌그러진 미간을 살살 펴주는 손길에 속절없이 떠지는 눈꺼풀이.

“안 자면 안 돼?”

시야에 한가득 들어차는 샛노란 세계 같은 것들이.

미간을 부드럽게 문지르던 손은 내려가 래빈의 것과 얽혔다. 손에서부터 퍼지는 뜨끈한 열기가 있다. 힘을 주는 손길에 래빈은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눈높이를 맞춰 침대에 걸터앉은 유진이 히히 웃었다. 래빈은 그 순간 대답하지 않은 질문을 떠올렸다. 차유진을 사랑합니까?

“생각보다 오래 걸렸어. 몸 안 아파?”

“내가 물을 말이야. 상처는 어때?”

“나 다 나았어! [흉터도 안 남았으니까 걱정하지 마.]”

래빈은 이어진 말을 해석하려 괜히 눈이 굴렸다. 그러다가 별 소용이 없으리란 사실을 알고 그냥 괜찮겠거니 넘어가는 것이다. 빠르게 훑은 차유진은 정말 불편한 곳이 없어 보였다. 래빈은 잠시 시선을 떨궈 맞잡은 손을 바라봤다. 손이 작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차유진은 저보다 살짝 더 컸다.

“김래빈 문대 형한테 땅으로 갈 거라고 했어?”

불현듯 발화한 주제에 래빈은 반사적인 대답을 꾹 삼켰다. 차유진의 표정은 읽기가 어려웠다. 섭섭한 것도, 서운한 것도, 화가 난 것도, 실은 아무렇지 않은 것도 같다. 차유진의 얼굴을 뜯어 살피던 래빈은 이윽고 느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갈 거라고 했어. 그러자 차유진이 기다렸다는 듯 물어온다. 갈 거야? 그에 대한 대답조차 정해져 있기에 래빈은 망설임 하나 없이 입을 열었다.

“응.”

“왜?”

“여기 있으면 민폐만 끼칠 테니까. 내가 이모션인 사실을 깨달은 이상 연구소에 있는 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가는 것과 진배없어.”

“안 보내줄걸.”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바보야.”

“알아. 내가 들었어.”

뜻밖의 이야기였다. 래빈이 눈을 동그랗게 뜨니 그제야 차유진의 얼굴에 변화가 생겼다.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 것이다. 답지 않은 반응이다. 무슨 소리를 들었길래 그래. 최대한 담담히 묻자 반응은 즉각 왔다. 맞잡은 손에 힘을 준 차유진은 잠시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마침내 대답했다.

“김래빈 안 죽으니까. 상처도 금방 낫고 하니까.”

“응.”

“그래서 그……. 미, 미끼? 방패? 그걸로 쓴댔어.”

“아하.”

“내가 싫다고 했는데 안 된대.”

이어진 말은 매끄럽기 그지없었으나 안타깝게도 영어였다. 씨근거리는 숨소리 속에서 래빈은 눈만 굴렸다. 음. 차라리 못 알아들은 게 나았는지도. 차유진은 말이 서툴렀으나 어디까지나 외국어인 탓이었다. 저 유려한 말은 아마 결정권자들에 대한 쌍욕 같은 게 아닐까. 순식간에 은은해진 래빈은 그냥 삐걱삐걱 고개를 돌렸다. 음. 역시 못 알아들은 게.

사실 내용 자체는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았다. 래빈은 아주 오랫동안 살아왔으며 수많은 이름이 붙었다가 떼어지길 반복했다. 개중에는 실험체나 고기 방패쯤 되는 것들도 충분했고. 세상만사에 지쳐서 깊은 산에 오두막 짓고 거기에 기어들어 가기 전까지 일선에서 공격 처맞고 수복되는 것조차 래빈의 삶의 한 편린이긴 했다. 그래서 새삼스럽진 않다. 별로 아무렇진 않은데.

“그런 건 싫어.”

차유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차라리.”

“응.”

“차라리…….”

차라리?

차유진이 입을 다문다. 래빈은 기다렸다. 한 치 흔들림 없는 눈동자들은 저들끼리 낱낱이 얽매이고 휘말린다. 래빈은 기다릴 수 있다.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다. 래빈에겐 시간이 많았으니까. 언제나처럼. 차유진이 천천히 손을 들었다. 어깨를 꽉 잡고 가볍게 끌어들였다. 가슴이 맞닿는다. 살가죽 너머 두근거리는 심장이 느껴졌다. 일정하고 힘찬 박동. 살아 있는 사람의 그것.

“내가 못 없애는 이모션 없어.”

차유진이 느리게 말한다. 귓가에서 울렁이는 숨결과 내뱉는 낱말들이 뭉그러지더니 녹아내린다. 아, 열기 탓이다. 새빨간 머리가 일렁이는 탓이다. 래빈은 눈을 가만히 내리깔았다. 네가 못 죽이는 이모션은 없다. 그렇구나. 하기야 그렇겠지. 시간마저 제멋대로 구부리고 늘리는 차유진이 뭔들 못할까. 차유진이 없애지 못하는 이모션은 없다. 그래서 너는 나를 죽일 수 있다. 놀랍진 않다.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부터 했다. 이유는 모른다. 코끝이 찡하고 눈두덩이가 뜨거운, 목구멍이 간질거리고 신음해야 할 것만 같은 이 감정을 뭐라고 부르는지 래빈은 알지 못한다. 너무 오랫동안 너무 느린 시간을 살았더니 많은 것을 망각했다.

푹신한 침대. 기운 몸뚱어리 두 개. 가슴을 맞붙이고 서로의 박동에 귀 기울이는 존재도 둘.

뜨거운 심장이 박동했다. 숨이 막혔다. 김래빈은 괜찮아도 나는 안 괜찮아. 파묻혀 불분명한 목소리가 간신히 닿았다. 그러니까 김래빈.

“차라리 내가 김래빈 죽여줄게.”

그 순간 래빈은 생각한다. 웃기지도 않지. 내 감정은 항상 알다가도 몰랐으나 지금 뱃속에서 느글거리는 이것이 행복이 아님은 알 듯해서.

그래서 래빈은 그냥 눈을 감았다.



권태롭던 시기가 있었다.

표출하지 않던 감정의 파편들이 튀어나와 하나의 존재가 되던 멸망의 초입. 어느 순간 눈을 뜬 로운리니스와 그를 거두었던 인간 가족. 제 존재도 모른 채 무럭무럭 자라던 규격 외 괴물과 죽을 때까지 비밀을 지켰던 사람들 같은 이야기.

“[그게 진짜일 줄은 몰랐어요.]”

차유진은 싱거운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손에 든 서류들은 대충 어깨너머로 던져놓은 채 침대에서 뒹굴거리던 차유진이 대뜸 입을 열었음에도 상대는 태연했다. 그러냐? 거의 기계 같은 대꾸 한마디만 날아왔으나 차유진은 실망하는 대신 입을 열었다. 반응이 차갑다고 토라지기에 그는 상대를 너무 잘 알았다.

“[그야 낭설이잖아요. 검증되지 않은 가설이었고요. 그런데 실화인 데다가 상대가 아직도 실존할 줄은 정말,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로운리니스는 회복력이 좋으니까.]”

“[그럼 땅에 있는 것들도 가만히 내버려 두면 막 이천 년씩 살까요? 오, 그건 별로 달갑지 않은데.]”

“[모르지.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는 규격 외라는 이름이 붙었으니까 그가 특별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고.]”

“Hmm.”

차유진은 턱을 괴고 입술을 비죽였다. 모니터 뒤로 얼굴을 가린 상대의 손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시답잖은 이야기로 그를 방해할 수도 있겠으나 지금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차유진은 그냥 몸을 뒤척여 던졌던 서류를 주워 왔다. 최상단에는 익숙한 얼굴이 자신을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최초의 로운리니스가 김래빈일 줄 누가 알았겠어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하물며 본인까지도. 차유진은 쓰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모션이라 불리는 괴물들과 인류는 아주 오랫동안 싸워왔다. 차유진의 할머니의 할머니 세대부터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으니 몇 세기에 걸쳤대도 과언이 아니다. 차유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래빈의 사진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다가 손끝으로 점을 쿡 누른다.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사진이니까 당연하지만.

“[얼마나 살았을까요?]”

“[몰라. 적어도 하루 이틀은 아니었겠지. 우리가 가늠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하기도 어려울 테고.]”

“[보자마자 대뜸 죽여달라기에 어이가 없었는데.]”

“[이제는 안 그러냐?]”

“[내가 먼저 말했어요. 없애주겠다고.]”

군데군데 비던 공백을 채우던 타자 소리가 멎는다. 차유진은 키득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모니터 너머에서 상대가 걸어왔다. 팔짱을 낀 채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낯익은 얼굴에 차유진은 그냥 어깨를 으쓱였다. 따가운 시선이 묻고 있었다. 진심이냐? 그에 대한 대답이었다.

“왜?”

“[글쎄요?]”

“사람 죽이는 취미 없다며. 네가 네 입으로 그랬잖아.”

“[오, 그런 더러운 취미는 지금도 없어요.]”

“원로들이 한 제안 때문이야? ……내가 분명 철회하게 할 테니까 기다리라고 했는데, 너는 기어코…….”

“그거 때문 아니에요.”

박문대의 눈이 가늘어졌다. 박문대는 기억했다. 차유진이 김래빈의 처우를 두고 어떻게 싸워댔는지. 원로들은 그를 고기 방패로 쓰고자 했으나 차유진은 자신이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으르렁댔다. 차유진을 설득하기에 거듭 실패한 원로들이 내놓은 해결책이 그거였다. 둘 중 하나를 골라라. 하나. 최초의 이모션을 인류의 방패로 쓴다. 둘. 차유진이 최초의 이모션을 제거한다. 김래빈이 완전히 이성을 놓고 폭주했을 때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 없을 거라는 두려움 속에서 도출해낸 선택지들이었다.

박문대는 차유진에게 기다리라고 했다. 무용한 피를 손에 묻히게 하는 건 달갑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최초의 이모션은 규격 외의 로운리니스였고, 그가 까딱하다 폭주한다면 수습하기 몹시 어려운 일일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박문대는 동시에 기억했다. 차유진을 사랑하냐는 질문에 말없이 고개를 돌리던 김래빈을. 그보다 확실한 대답은 없을 거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양 입을 지그시 다물던 그를.

시간은 좀 걸릴 테지만 원로들을 설득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을 테다. 그런데 불쑥 찾아온 차유진이 기어코 말한 것이다. 자신은 김래빈을 죽일 거라고. 웃기지도 않는 일이다. 박문대는 지금 제 컴퓨터 화면에 켜져 있을 마흔한 장 분량의 리포트를 떠올리며 입술을 비틀었다. 말이 곱게 나가질 않았다. 리포트 때문이 아니라 영 바보처럼 구는 차유진 때문에.

“그러면 왜.”

차유진은 눈만 굴리다가 훌쩍 일어나 앉았다. 글쎄요. 왜일까요. 힐끔 내려다본 김래빈의 얼굴은 여전히 험악했다. 사진인데도 이렇게까지 날카롭게 보인다니. 키득거리며 뺨에 찍힌 점을 간질이다 태연히 말했다.

“[마지막에 남겨지는 건 김래빈이라고 생각할 테지만, 사실 마침표를 찍지 않는 한 굴레에 빠지는 건 우리 둘 모두에 해당하는 말이에요. 마치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뫼비우스의 띠처럼요.]”

“…….”

“[빠르게 흐르는 시간을 알아버린 김래빈은 몹시 느린 시간을 살 테고. 영영 채워지지 않을 삼 분 육 초를 코앞에 둔 채 죽어버릴 나는 마지막까지 피네를 듣지 못한 게 아쉬울 테니까요. 그러지 않기 위한 최선책인 거죠.]”

차유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덧붙였다. 그리고 말이에요.

“[문대 형이 봤어야 해요. 그때 김래빈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읏차. 가볍게 몸을 튕긴 차유진이 바닥을 디디고 섰다. 상대는 또 말없이 그를 바라본다. 나 가요. 손을 젓고 발을 떼려는 차유진을 잡는 말이 있었다. 너는 그걸로 만족하냐? 가볍던 걸음이 잠시 멈칫했으나 차유진은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더할 나위 없이요.]”

그 말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

익숙한 복도를 헤집으며 다다른 곳에서 차유진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안은 묘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으나 그게 누군가의 존재를 증명하는 온기임을 알았다. 가볍게 콧노래를 흥얼거린 차유진은 굳게 닫힌 방문을 열어젖혔다. 큼직한 방에는 그만큼 커다란 침대 하나만 덜렁 놓였다. 그 위에 이불이 고르게 오르내리는 것을 보며 차유진은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갔다. 곁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조심스럽게 디밀면, 아, 보였다. 눈 감은 채 숨을 내쉬는 김래빈.

호흡이 퍽 얕아 꼭 죽은 것처럼 보인다. 피부는 창백했고 이불을 덮었음에도 체온은 잘 오르지 않는다. 차유진은 손끝으로 래빈의 뺨에 찍힌 점을 지그시 눌렀다. 평화롭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바보 같아. 키득거리던 차유진은 꾸물꾸물 이불을 파고들어 래빈을 빤히 응시했다.

래빈은 잠이 많았다. 아주 오랫동안, 한 번도 깨지 않고 계속 내리 자기만 했다. 벌써 사흘짼가. 이마를 덮은 앞머리를 슥슥 치워주며 차유진은 가만히 생각해봤다. 이거 시위야, 김래빈? 내려 보내주지 않으면 멸망이 도래하고 새 생명이 움트고 그 생명마저 늙어 죽을 때까지 깨어나지 않겠다는 협박? 그러나 김래빈 성격에 그럴 리가 없음을 안다. 그래서 차유진은 되레 여유롭게 웃는 것이다. 오히려 조금쯤 기꺼웠다. 잠이 들면 래빈의 몸은 생명 유지를 위한 최소한을 제외하고 전부 멎어버린다. 그렇기에 잠든 래빈은 로운리니스로서의 자아조차 억눌린다는 거였다. 어쩌면 김래빈 나름대로 오래오래 함께하고 싶다는 표현인지도 모르고? 어울리지 않게 속내를 가늠하며 차유진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래도 얼른 깼으면 좋겠다. 한번 잠들면 옆에서 트럼펫을 불든 심벌즈를 치든 깨지 않는 래빈을 막연히 기다리는 일은, 빈말로도 감히 즐겁다고 말할 수 없었다. 얼른얼른 일어나, 바보야. 뺨을 톡톡 두드린 차유진이 입술을 삐죽였다. 내가 너 죽여주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곧장 잠들어버려서. 동시에 가만히 생각해보는 것이다. 있지 김래빈. 혹시 죽기 싫은 거야?

하기사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차유진은 래빈의 태도를 볼 때마다 간혹 궁금했다. 죽고 싶은 건지 그냥 이렇게 살기가 싫은 건지. 아마 후자 아니려나. 기껏 죽여주겠다고 했는데 냅다 잠든 꼴을 보니 후자일 가능성이 더 크지 않으려나. 모르겠다. 적막 어린 방안엔 두 사람분의 숨소리로만 가득 찬다. 일정하고 옅은 소음에 귀 기울이고. 잠든 래빈을 바라보며 차유진은 스스로 물었다. 그런데 정말로, 왜?

사랑이라는 거는 함께 살고 싶어지는 거 아니었다. 같이 발맞추어 걷다가 한날한시에 죽기 바라는 거 아니었어? 차유진은 자신이 그다지 로맨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으나 사랑하면 죽여주겠다는 괴상한 가치관을 가지지도 않았다. 원로들의 협박이 거슬리긴 했으나 시간만 있다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고. 타인이 지은 표정 한둘 가지고 충동적으로 결정 내리는 사람도 아닌데.

그런데 왜 나는. 그런데 왜 너는.

정답이 나올 것 같지가 않아서 차유진은 그냥 김래빈의 목덜미에 얼굴이나 파묻었다.

시간이 흘렀다.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김래빈은 가끔 깼고 대부분 잠들어 있었다. 눈을 뜰 때마다 흐리멍덩한 눈으로 차유진을 응시하던 래빈은 간간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중얼거렸다. 차유진은 그것이 이모션들의 언어임을 알았으나 구태여 지적하진 않았고. 형용할 수 없는 말을 뱉어내고 낭패감에 물드는 얼굴을 보며 그냥 웃기. 만일 본인이 자각하지 못했다면 말을 돌리기. 래빈이 깨어날 때마다 차유진은 내심 그가 말을 번복하길 기다렸다. 생각해봤는데 죽는 거 꼭 좋지만은 않은 듯해, 하고 말을 꺼내길 바랐다. 하지만 래빈은 대개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다가 몽롱한 시선을 맞추었기 때문에. 한 달하고도 반이 지나던 시점에 와서 차유진은 포기했다.

또 시간이 흘렀다. 알 수 없는 말만을 중얼거리던 래빈은 간혹 손을 뻗어 차유진의 목을 가만히 그러쥐었다. 힘을 주기도, 손톱으로 긁어내리기도 했으나 말을 꺼내기도 전 본인이 흠칫 놀라 손을 거뒀다. 떨리는 동공을 바라보다 손을 뻗어 눈을 가리곤 입이나 맞추는 게 일상이 됐다. 입술이 부르틀 때까지 숨을 나눌 때마다 김래빈은 머뭇거리는 손을 목에 두르곤 했다. 그러다가 또 어느 순간 까무룩 잠들었다. 잠든 김래빈의 얼굴만 한참 뜯어보다가 멍이 들거나 피가 난 목을 이리저리 비춰보며 음, 그래도 심하진 않네, 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

시간은 멈추지도 않고 흘렀다. 때는 겨울이었다. 전부 바싹 말라버리는 계절이 왔다. 하늘 높이 떠 있는 연구소는 사시사철 추웠고 눈 내리는 광경을 보기 어려웠으나 아무튼 겨울이었다. 일주일의 끝 무렵 래빈은 깨어났다. 깊은 잠에서 몸을 일으키고 질척한 수마를 눈물처럼 떨구며 방안을 배회했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차유진이 래빈을 발견한 건 바로 그때였다.

“김래빈?”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도 래빈은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오랫동안 창밖을 바라봤다. 두꺼운 소재로 마감한 하나뿐인 창문 너머엔 짙푸른 하늘이 있었다. 너르게 깔린 구름은 마치 언젠가 보았던 들판을 닮았다. 래빈이 답하지 않자 차유진은 천천히 걸어가 래빈의 곁에 섰다. 어깨가 가볍게 부딪혔다.

“김래빈, 뭐해?”

초점 없는 시선은 맞닿지조차 않는다. 살짝 벌어진 잇새로 알 수 없는 웅얼거림이 튀어나왔다. 오랜 잠 끝에 깨어나 부스스한 머리칼이 어디서 불어왔는지 모를 바람에 흔들렸다. 마른 몸 위에 덮인 옷자락이 사부작거린다. 그림자가 기울더니 눈을 깜빡이는 래빈 위로 쏟아졌다. 바싹 마른 입안을 침으로 축이다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블랙홀 안엔 뭐가 있어?”

희미한 중얼거림이다.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묻는 여상스러운 목소리였으나 차유진은 따끔거리는 목울대를 지그시 눌러야만 했다. 아득한 고도에서 숨쉬기가 어려운 건 처음이었다. 그건 왜 물어? 인제와 무서워지기라도 했어? 차라리 그렇다고 답해주기를 바라게 되는 질문들은 지그시 삼키고. 차유진은 그냥 어깨만 으쓱이다 짐짓 태연하게 대꾸했다.

“나도 몰라. 안 들어가 봤어.”

“아무래도 어둡겠지?”

“아마도?”

“그래도 따뜻하겠지. 너는 품이 따뜻하니까.”

차유진의 입이 꾹 닫혔다. 뭐? 성대를 울리고 튀어나와야 했을 한마디가 혀뿌리를 지나쳐 녹아 사라진다. 래빈은 평온했다. 얼굴을 일그러트리지도, 붉히지도, 하물며 손끝 하나 까딱하지도 않는다. 그저 멍하니 창밖을, 겨울 하늘을, 너른 구름밭을, 그 아래 있을 아득한 무덤을 가만히 헤아리다가 눈을 감을 뿐.

“가자, 차유진.”

“…….”

“내려가자.”

때가 도래했음을 알았다. 최초의 이모션이,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살아온 규격 외의 괴물이 살고 싶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차유진은 무심코 주먹을 꾹 쥐며 숨을 삼켰다. 김래빈은 그저 높낮이 없는 가만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자는 것도 질렸어. 그리고.”

그리고?

“……땅에 눈 쌓이면 예뻐.”

본 적 있어? 가벼운 질문에 차유진은 고개를 젓는다. 아니. 본 적 없어. 아니, 있기는 한데 김래빈이랑 본 적은 없어. 그제야 무표정하던 얼굴에 변화가 일었다. 입술이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더니 푸스스 웃는다. 예쁠걸. 진짜로. 내가 살던 곳은 강원도였는데, 물론 너는 어딘지 모르겠지만, 거기는 산골이라서 겨울만 되면 눈이 엄청나게 내렸거든……. 차분한 목소리는 답지 않게 옅은 열감을 띈다. 차유진은 말을 끊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응. 빠르게 가속한 시간이 만들어낸 열기는 김래빈의 목소리에 깃들었으나 그를 온전히 녹일 만큼은 되지 못해서.

“눈 내릴 때마다 누나랑 같이 눈사람도 만들고, 눈싸움도 하고 그랬거든.”

“알려주면 안 돼?”

“뭐를?”

“눈싸움. 눈사람.”

마침내 시선이 맞는다. 느리게 고개를 돌린 래빈이 차유진을 가만히 바라봤다. 새까만 눈동자. 빛 한 점 들지 않는 구석진 지하실을 닮았다. 로운리니스들도 꼭 이런 눈을 했지. 그러나 래빈의 눈은 눈꺼풀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서서히 색이 옅어지고는 해서. 그래서 싫지만은 않았는데.

“안 돼.”

“…….”

“나중에 찾아보지도 마. 별로 재미없어, 바보야.”

재미의 문제가 아닌데도. 차유진은 그러나 더 매달리지 않는다. 그저 깔끔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시선을 돌릴 뿐이다. 곁눈질로 바라본 래빈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이 무덤 될 땅을 향해 하염없이 추락하는 듯해서.

그래서 차유진은 내뱉지 못한 말을 혀끝에 굴리고 머금다 삼켰다.

알려주면 안 돼?

눈싸움. 눈사람.

그렇게 나랑 더 있으면 안 돼?



땅은 추웠다. 어느샌가 소복이 쌓인 눈은 밟을 때마다 묘한 소리를 냈다. 두껍게 껴입었음에도 찬바람은 어떻게든 옷 사이를 파고들었다. 차유진은 괜히 몸을 움츠리고 과장되게 콜록거렸다. 추워! 투정 부리듯 투덜대자 앞서 걷던 래빈의 걸음이 멎는다. 이내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래빈은 목에 둘렀던 목도리를 풀어 제 목에 걸었다. 추위로 벌게진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단호한 손길이었다.

땅에 사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시피 했기에 발자국 하나 없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순백 동토는 절경이었다. 이모션들조차 밟지 않은 눈 위로 김래빈과 차유진의 발자국이 차례로 찍혔다. 손끝이 아슬아슬하게 스쳤으나 맞잡지는 않는다. 어깨가 연신 부딪쳤으나 또 멀어지진 않고. 온기가 느껴지되 떨어지면 금세 식는 애매한 거리를 둔 채 차유진과 김래빈은 걸었다. 목적지는 래빈의 오두막이었다. 그러니까, 첫 만남 때 차유진이 모우닝과 싸우느라 화려하게 말아먹은 거기.

왜 하필 오두막이냐고 물으니 거기가 가장 아늑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아늑하다는 건 곧 가장 정 붙인 장소라는 뜻이었으므로 차유진도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래빈은 뭔가 할 말이 더 남은 듯 미간을 찌푸렸으나 닫힌 입이 도로 열리는 일은 없었다. 차유진은 뜨거운 숨이 하얗게 부서지며 하늘로 올라가는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히히 웃었다. 추웠다. 세상에 꼭 둘만 있는 듯했다. 그게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았고.

고개를 돌린 곳엔 김래빈이 있었다.

“김래빈 안 추워?”

“괜찮아. 강원도는 이것보다 더 추웠거든. 여긴 따뜻한 편이라고 생각해.”

“강원……, 거기 사람 살 수 있어? 어떻게 여기가 따뜻해?”

“산골이라고 했잖아, 바보야. 산속이니까 당연히 춥지.”

차유진이 나직이 키득거렸다. 래빈은 가쁜 숨을 들이켜고 내뱉는 데에 집중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옮겼다. 눈이 높게 쌓이진 않았으나 눈밭을 걷는 건 퍽 오랜만이었다. 눈이 오는데도 땀이 났다. 땀방울이 마르며 몸이 차게 식는 감각이 생생하다. 아, 그러니까. 죽은 몸은 이것보다 더 차가우려나. 래빈은 죽은 사람의 체온을 떠올리려다가 말았다. 죽은 사람을 만진 건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이젠 제가 묻어주었던 사람이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 됐지만.

저 멀리 눈 쌓인 잔해가 희끄무레하게 일렁였을 때 래빈의 걸음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발맞추어 걷던 차유진도 덩달아 느려졌다. 어깨와 머리 위로 수북이 쌓인 눈 때문일 거였다. 묵직하게 짓누르는 압박감에 걷기가 힘든 탓이리라. 래빈은 입술을 지그시 사리 물며 눈을 깜빡였다. 눈이 사방을 덮으면 소리도 희미해진다. 그리하여 적막으로 가득 차는 것이다. 래빈은 뜬눈으로 지새운 겨울보다 잠든 채로 보낸 겨울이 훨씬 많았으나 여전히도 기억했다. 오롯한 혼자가 되어 맞았던 가장 첫 번째 겨울. 지독하리만치 고요해서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던 그 지리멸렬한 계절을.

이젠 추위도 서글픔도 안녕이다. 쩍쩍 마르는 갈증과 주린 배와 가물거리는 눈꺼풀과도 작별이다. 눈을 뜨고 감을 때마다 쉴 새 없이 변하는 태풍 속에서 홀로 서 있는 것과의 영원한 이별. 래빈은 항상 영원이라는 말을 싫어했으나 이번만큼은 기꺼이 제 모든 이별 앞에 영원이라는 단어를 붙일 심산이었다.

그러다가 차유진을 바라본다. 제가 영원토록 사라진다면 남겨질 사람.

삶의 말미다. 남겨질 모든 것들에 결론 지을 때가 왔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위해서. 정리하지 못한 관계가 어떻게 독이 되고 송곳이 되어 남겨진 이들을 덮치는지 래빈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렇기에 비로소 래빈은 날숨을 뱉는다. 희게 부서지는 숨이 하늘로 올라가 서리는 모습을 가만히 올려다본다. 숨이 부서져 내리는 눈발 속에서 래빈은 존재한다. 차유진과 함께.

“여기면 돼.”

잔해 위에 두툼하게 덮인 눈을 털어내고 앉은 래빈이 말했다. 차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숨을 들이켜고 내쉰다. 차유진이 손을 뻗었다. 손끝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발갛게 언 뺨에 닿을 듯 아슬하게 흔들리는 불길을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여전히 따뜻하기만 해서.

“김래빈.”

“왜?”

“내 생각에 지금은 이 분 십칠 초 정도 된 것 같아.”

뜻 모를 소리였다. 래빈은 눈을 끔뻑였다. 무슨 소리냐고 타박하기에는 차유진이 너무 진지했다. 시선을 단단히 맞춘 차유진은 일견 엄숙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로 발음했다. 삼 분 육 초에 끝나는 거 알아. 그러니까 김래빈.

“일 분도 안 남았어.”

“…….”

“아주 잠깐이야. 아주 잠깐만 기다리면 나도 가.”

“…….”

“그때는 같이 노래 부르자. 눈싸움도 하고 눈사람도 만들자. 그때는 알려줘야 해.”

단단한 말이다. 발갛게 언 뺨에 감각이 없다. 시야만이 부예졌다. 흩날리는 눈발이 바람 때문인지 자꾸만 시야를 흐려서 그런 것일 테다. 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때는 가르쳐줄 수 있다. 그때는. 아마 자신의 시간은 몹시도 느리게 갈 테지만, 오, 어쩌면 차유진을 떠올리는 시간이라면 일 분쯤이야 순식간에 흘러 가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차유진의 머리가 시꺼멓게 물들기 시작한다. 어디선가 느닷없는 돌풍이 불어닥쳤다. 세차게 휘몰아치는 눈보라, 언 뺨을 찢어발길 듯 질주하는 칼바람. 그 속에서 느리게 아가리를 벌리는 허공. 빛 한 점 들지 않는 블랙홀이 서서히 팽창하며 김래빈이 선 대지를 슬금슬금 침범하고.

비로소 찾아드는 온전한 암전은 꼭 언젠가 안겼던 다감한 품의 온기를 닮아서.

그래서 마지막 말을 내뱉지 않은 채 래빈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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