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이 헤르츠 외계인
우리 별은 멀리서 보면 푸르단다. 래빈은 할머니의 잠잠한 목소리를 기억한다. 저 깊은 물 속에서 유유히 멀어지던 할머니. 뒤를 쫓아 어색하게 발장구치고 있노라면 불쑥 다가와 한가득 껴안아 주실 때의 온기는 여즉 생생하다. 아직은 조그마한 육지가 더 익숙하던 시절에도 곧잘 자신을 바다로 이끌던 할머니께선 때때로 래빈을 곁에 두고 숨죽여 속삭이시곤 했다. 그런데 래빈아, 우리 토깽아. 멀리서 보면 푸르른 별이 이 우주에 어디 우리 별 하나뿐이겠느냐.
기억 속 어린 래빈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갸웃거린다. 우리 별은 분명 푸르다. 사흘이면 육지 끝과 끝을 가로지를 수 있었다. 예전엔 땅이 지금보다 많았다고들 하지만 그건 정말로 옛이야기다. 그래서 웬만한 별은 우리 별만큼 파랗지 못할 텐데. 눈을 깜짝이며 할머니 이야기를 이해해보려고 노력하지만, 어린 래빈은 끝끝내 묻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할머님, 우리 별만큼 푸른 별이 또 있습니까?
그러자 기억 속 할머니는 어린 래빈을 보며 부드러이 웃으며 말씀하신다. 저 멀리엔 창백할 만큼 푸른 점이 있는데…….
오십이 헤르츠 외계인
래빈은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다가 잠기운에 탁한 눈동자를 드러낸다. 래빈은 초점을 맞추려 열심히 눈을 굴리다가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채 가시지 않은 잠기운 탓에 정신이 몽롱했다.
오늘은 유월 십팔 일. 지금은 아마 오전 다섯 시 사십이 분. 바닷물이 적당히 차가워 입수하기 좋은 시각이다. 래빈은 잠시 눈을 내리떴다. 찬 바닷물이 발등에서 일렁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오랜만에 꾸는 할머니의 꿈이다. 귓가에선 아직도 할머니의 먹먹한 소리가 진동하는 것만 같다. 래빈은 넋을 놓은 채 제 발을 내려보다가 하품했다. 어젯밤 열띤 작업 중 까무룩 잠들어서 그런지 주위가 엉망이었다.
래빈이 사는 별은 육지가 전체 행성의 5%밖에 차지하지 않는다. 예전에 조금 더 많았다고들 하지만 이미 수면에 잠긴지 오래였다. 사람도 적은 덕분에 영토 분쟁 따위는 없다. 하지만 물자는 항상 아슬아슬한 수위를 넘나든다. 생산하는 물자로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원로회에선 청년들을 이용해 물밑반을 꾸렸다. 간단히 말해 잠수해서 저 수면 아래 침몰한 자원들을 캐오라는 거였다. 십 대 후반부터 길면 삼십 대 초반까지의 청년들은 특별한 결격 사유가 없는 한 모두 물밑반 소속이었다.
올해로 스물넷을 맞는 래빈은, 그러나, 물밑반에 속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청년이었다. 래빈은 물밑반에서 잠수복을 겹겹이 껴입고 바닷속으로 잠수해 자원을 캐오지 않는다. 래빈은 대신 육지의 중앙에 놓인 커다란 센터에서 일했다. 말 그대로 육지 중앙(Center)에 있는 센터는 육지의 전반적인 중요 업무들을 처리한다. 말하자면 우두머리 같은 존재다. 래빈은 센터 소속 음악반 막내였다. 하는 일도 간단하다. 축제 따위에 쓰는 노래를 작곡하고 편곡하는 게 래빈이 맡은 일의 전부였다.
오는 삼십 일에는 래빈의 별에서 열리는 가장 큰 축제인 고래잡이 축제가 열린다. 덕분에 음악반은 물론이거니와 센터의 모두가 눈코 뜰 새도 없이 바빴다. 래빈에게 맡겨진 음악은 총 세 곡이었다. 편곡 하나, 작곡 둘. 일주일 전에 편곡을 끝냈다. 두 곡이나 작곡해야 하는데 마감일은 열흘이 남았다. 덕분에 래빈은 엊그제 밤을 꼬박 지새웠다. 어제도 새려다가 까무룩 잠든 것이다. 래빈은 악보와 필기구가 어지럽게 흩어진 책상을 바라보다가 얼굴을 손에 파묻고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작업이 순탄치가 않았다.
마감일은 코앞이고, 작업은 지지부진하고. 이번에 마감일 못 맞추면 진짜 지옥뿐이다. 별스러운 축제가 아니라 무려 고래잡이 축제였다. 까딱하다간 원로회에 쓴소리 듣다못해 바다로 몰아 넣어질 수도 있다. 그것만은 사양이었다. 래빈은 피곤한 눈두덩이를 꾹꾹 눌러 마사지하다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악보 위에 어지럽게 얽힌 음표들을 바라보다가 내쉰 한숨은 덤.
꿈에서 할머니가 나왔다. 작업은 미치도록 안 풀린다. 미칠 지경이었다. 자그마한 작업실 창문에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비스듬히 기울어 들어왔다. 일정한 파도 소리가 들렸다. 이 별에선 어디서든 파도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래빈은 고개를 틀어 창밖을 바라봤다. 파도치는 바다는 오늘도 고요하게 술렁였다.
나갈까.
래빈이 중얼거렸다. 작업이 이토록 안 풀리는데 그냥 붙잡고 있어 봤자 좋을 건 없다. 래빈은 책상에 흐트러진 악보와 바다를 번갈아 보다가 겉옷을 집고 발을 뗐다. 바다는 싫다. 잠수는 싫다. 수영도 싫고 입수도 싫었다. 하지만 모래사장을 걷는 건 간혹 래빈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곤 했으니까.
종종걸음으로 센터 가장자리를 둥글게 돌아 걸으면 샛길이 나왔다. 푸른 새벽에도 새하얗게 반짝이는 센터와 달리 시커멓게만 보이는 길이었다. 길쭉길쭉 뻗은 소나무들 덕분일지도 모른다. 래빈은 소나무들을 헤치며 거침없이 나아갔다. 저 멀리 파도치는 소리와 바람에 부스럭대는 솔잎 소리 따위가 뒤엉킨다. 이르게 일어나거나 자지 않은 센터 사람들이 떠들어 대는 소리가 왕왕 울리다가 사라졌다.
돌이 깔렸던 길은 점차 나아갈수록 고운 모래 입자로 변한다. 그맘때쯤 래빈은 신발과 양말을 벗었다. 맨발로 모래를 밟으며 나아갔다. 까끌까끌한 감각은 익숙하다. 신경 쓰이지 않는다. 파도치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짭짤한 소금기 어린 바람이 분다. 피부가 따끔거린다. 불어온 모래가 눈에 들어갔다. 눈이 따가워서 잠깐 비비느라 멈췄다. 파도의 포말이 부딪치는 소리가 영 아득했다.
그러다가 시야를 가리는 솔잎을 손으로 밀어 치우면, 마침내 보이는 것이다. 새벽을 맞은 바다, 포말이 이는 육지와 물의 경계선. 물밑반 몇몇이 잠수복 차림으로 모래사장에 앉아 발장난을 치고 있다. 래빈은 그들을 뒤에서 바라보다가 소리 없이 방향을 돌렸다. 물밑반은 고된 일이다. 래빈의 일이 쉽다고 할 순 없으나 물밑반 사람들에게는 쉬워 보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래빈의 존재는 물밑반 사람들에게 대개 고운 인식을 주진 못한다. 새벽부터 소리 높인 싸움의 주인공이 되고 싶진 않았으므로 래빈은 조심스럽게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어느 정도 멀어졌을 무렵부터 래빈은 해안선을 따라 자박자박 걸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폐부 속으로 짠 바닷바람이 소용돌이치며 쏟아진다. 하늘이 맑다. 깃털 구름이 펼쳐진 하늘은 채도 낮은 푸른색이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엔 물안개가 꼈다. 끝도 없는 바다를 바라보며 래빈은 걸었다. 머릿속에선 떠오를 듯 말 듯 일렁이는 악상들을 잡아채려 부단히도 노력하면서.
여섯 시네. 물이 많이 차지는 않겠어.
그러게요. 해류는 어떻대요?
평소랑 다를 바 없대. 그래도 좀 주의하라곤 하더라. 다 구역에서 요즘 급류가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는 모양이야.
멀리서 물밑반이 떠드는 소리가 날아들었다. 래빈은 그들의 소리에 괜히 귀 기울이다가 멈춰 섰다. 발등에서 포말이 새하얗게 부서진다. 물밑반 사람들은 소리 높여 깔깔 웃는다. 바람이 분다. 머리칼이 흩날린다. 숨이 흘러나왔다. 꼬불꼬불 소용돌이치더니 하늘로 솟았다.
오늘따라 유달리 바다가 어두운 것 같은데.
그래요? 들어가 봤어요?
어, 너 지각하기 전에 잠깐.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더라.
에이. 지각이라니. 저 지각한 적 없거든요.
우리 사이에서 제일 늦었으니 그게 지각이지 뭐냐.
지각은 맞춰진 시간에 늦는 거고요. 저는 그냥 제일 늦게 소집에 온 것뿐이고요. 엄연한 차이가 있죠.
그래라. 아무튼, 내가 이상한 소리 하긴 싫은데 좀 조심해라. 안이 조용하고 평소보다 좀 더 어두침침하니까, 눈에 불 잘 켜고 다니고.
물밑반의 시답잖은 대화를 듣던 래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바다가 어둡다니. 슬쩍 바라본 수면은 평소와 다를 바 없다. 아직은 희미한 햇빛이 수면 위에서 흐늘거릴 뿐이다. 역시 겉과 속은 다른 걸까. 멍하니 생각하던 래빈이 딱 세 걸음 디뎠을 때였다.
야. 잠깐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움찔대는 바닷물의 흐름이다. 시시덕거리던 물밑반의 목소리가 단숨에 낮아졌다. 래빈도 우뚝 섰다. 발등에서 찰랑거리던 바닷물이 쭈욱 밀려난다. 여태껏 조용하던 이유는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라는 것처럼 매섭게. 래빈이 눈을 휘둥그레 뜬 채 훌쩍 멀어진 해안선을 멍하니 바라봤다. 밀물일 시간이 아니다. 밀물이래도 이렇게까지 빨리 물이 빠지진 않았다.
두 번째 기시감은 밀려난 바닷물이 어느 순간 소용돌이치기 시작하는 광경을 목격하자마자 불쑥 솟았다. 저들끼리 장난치며 느슨한 분위기던 물밑반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래빈은 주위를 휙휙 둘러보다가 저도 모르게 두어 걸음 물러났다. 물밑반 사람들의 소리가 유달리 멀게만 느껴진다. 자신이 그새 이렇게까지 멀리 갔을 리는 없으니, 분명 저 소용돌이가 소리를 막는 것일 테다. 래빈이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저 급류에 휘말려선 안 된다. 잠수복도 없는 연약한 몸뚱어리가 소용돌이에 휘말렸다간 둘 중 하나였다. 갈기갈기 찢기거나 미개척 구역으로 휩쓸리거나. 그 결말은 결론적으로 죽음밖에 없다는 데에 공통점이 있었다.
그래서 래빈이 젖은 모래에 빠져든 발을 뺐다. 아직은 먼 곳에 있지만 언제 모래사장까지 닥칠지 모른다. 센터는 다양한 재앙에 대비해 터무니없이 튼튼하게 지어졌으므로, 최소한 센터까지는 가야 안전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래빈이 힘껏 뛰기 전 마지막으로 뒤를 돌았을 때, 래빈은 보았다.
급류가 빠른 속도로 회오리친다. 바다가 격동한다. 음유시인이 있었다면 거대한 신의 분노 따위의 말로 비유했으리라. 하지만 래빈의 날카로운 눈은 회오리 속에 있어선 안 될 것을 잡아챘다.
소용돌이가 갈라진 틈새에서 반짝이는 붉은 것. 물살에 휩쓸려 사정없이 흔들리는 저 힘없는 몸뚱어리는 분명 사람이었다.
사람이 왜 저기에 있지? 래빈이 입술을 감쳐 물었다. 오늘 새벽을 맡은 물밑반은 저들이 전부가 아닌던가? 왜 사람이 저기에 있지? 게다가 붉은 머리라니, 저렇게 튀는 외모라면 기억할 법도 하건만 붉은 머리 사람은 기억에 존재하지 않는다. 래빈은 기억을 헤집다가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저대로 놔뒀다간 저 사람은 틀림없이 죽는다는 사실이었다.
이봐요!
김래빈이 소리쳤다. 소용돌이 안의 사람은 그저 흔들릴 뿐 대답이 없었다. 급류 때문에 소리가 흩어졌는지도 모른다. 래빈은 다시 한번 힘껏 소리를 보냈다.
이봐요! 정신 차리세요!
묵묵부답이다. 래빈은 고개를 틀어 물밑반에게 소리쳤다. 저기 사람이 있습니다! 소용돌이 속에 사람이 있어요!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물밑반 사람들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흐름이 굴곡지며 소리가 흩어지는 게 맞는 듯싶다. 래빈은 점점 몸집을 키우는 소용돌이를 보며 주춤거렸다. 저대로 놔두면 죽을 텐데. 틀림없이 죽을 텐데. 구할 수 있을 때 구해야 하는데. 그런데.
바다는 싫다.
래빈은 5%밖에 되지 않는 육지에서 살다가 육지에서 죽으리라 결심한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몸이 떨렸다. 느껴졌다. 아무리 이를 악물고 몸에 힘을 줘도 사정없이 떨렸다. 바다는 싫다. 바다는 싫다. 저기에 사람이 있다. 소용돌이에 휘말려 흔들리는 사람이 있다. 죽을 것이다. 바다는 싫다. 바다가 삼킨 죽음이 너무 많아서 바다가 싫었다.
마침내 래빈은 입술을 악문 채 땅을 박찼다. 모래가 푹푹 파였다. 물살이 유달리 억세다. 물이 찼다. 여섯 시가 입수하기 좋은 시각이라며. 래빈은 제 몸의 떨림이 추위 때문인지 긴장 때문인지 모르겠다고 뇌까리면서도 꿋꿋이 나아갔다. 수영은, 입수는, 잠수는 거진 오 년 만이다. 자신은 영 없었으나 살리려면 어쩔 수 없었다. 무시할 수 없다. 두고 갈 수 없다. 사람이 휩쓸려 죽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래. 래빈은 그렇게 비정한 인간이 못 됐다.
그래서 래빈은, 크게 숨을 들이켠 래빈은 눈을 질끈 감고 소용돌이에 뛰어들었다.
바다가 유달리 어둡다는 물밑반 사람들의 말뜻을 이제야 알겠다. 정말로 캄캄했다. 하지만 조용하진 않았다. 소용돌이가 내는 쉭쉭 소리는 마치 잔뜩 긴장한 뱀이 나직이 으르렁거리는 것 같다. 래빈은 수면 위로 솟았다 잠수하길 반복하며 헤엄쳤다. 멀지 않았다. 가까워진다. 의식을 잃은 채 마구 흔들리는 붉은 머리 사람. 소용돌이 한복판에 있다. 래빈은 수면 위에서 마지막으로 크게 숨을 들이켜곤 힘차게 잠수했다. 그리고 소용돌이 틈을 파고들었다.
속이 뒤집힌다. 거죽과 내장이 뒤바뀌는 듯한 끔찍한 감각에 래빈이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꾹 다문 잇속으로 바닷물이 새어 들어온다. 입안이 텁텁하고 몰아치는 짠맛에 혀가 아린다. 래빈은 허우적거리면서도 끈질기게 나아갔다. 저 사람 역시 머리가 붉어. 눈은 무슨 색일까.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면서 간신히.
이윽고 뻗은 손에 상대의 팔뚝이 잡혔다.
래빈은 있는 힘껏 손을 당겨 상대를 끌어안았다. 몸이 찼다. 잠수복도 없이 물속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숨을 쉬는 것 같지도 않다. 가까이서 보니 입에 원통 같은 무언가를 물고 있었다. 물방울이 보글보글 끓는 걸 보아하니 산소통인 듯한데 별 쓸모는 없어 보인다. 래빈은 물살에 찢겨 얼얼한 손을 애써 놀려 원통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입을 맞췄다. 빈틈없이 맞물린 입술 사이로 숨을 불어넣었다. 참는 호흡이 남들보다 긴 편이므로 이러는 게 낫다. 비록 폐가 타는 것 같았지만.
이봐요. 입술을 떼고 상대의 입을 틀어막은 래빈이 애써 소리했다. 당신이 누군진 모르겠지만, 자살할 생각이셨더라면 이쪽으로 오지 말았어야 합니다. 여긴 사람들에게 발견되기 원체 쉬운 곳이라. 게다가 평소엔 물살도 약하고 수위도 제법 얕은 편인데……. 아, 그렇다고 당신이 자살 명소를 찾기를 바란다는 뜻은 아닙니다. 상대는 여전히 대답이 없다. 래빈은 부족해지는 숨에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비린 맛이 났다. 소용돌이 탓에 의식 없는 사람을 끌어안고 수면 위로 올라가는 건 불가능했다.
어서 일어나세요. 저 쓰러지면 당신이라도 정신 차려야 할 것 아닙니까.
래빈이 소리했다. 그리고 그게 바닷속에서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헉!
래빈은 단말마 닮은 소리를 뱉으며 눈을 번쩍 떴다. 시야에 새하얀 천장이 그득 찬다. 소독약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눈만 끔뻑이다가 손등과 연결된 수액을 발견했다. 래빈은 이곳이 천국이라거나 사후세계라기보단 병실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기절한 사람에게 수액 놓을 장소로 마땅한 곳이 병실밖에 더 있겠어. 래빈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려다가 욱신거리는 폐부를 붙잡고 거칠게 숨을 토했다. 아팠다. 온몸이 부서지는 것처럼 아팠다.
깼냐?
연신 콜록거리다 말고 들리는 불퉁한 소리에 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무실 담당인 박문대였다. 팔짱을 끼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눈빛에는 소리 없는 압박이 깃들었다. 래빈은 일으키려던 몸을 도로 눕힌 채 끙끙 앓았다. 그러자 박문대가 심드렁하게 소리한다. 나한테 할 소리 없어?
어떻게 된 겁니까?
어떻게 되긴. 근처에 있던 물밑반 애들이 네가 바다 들어가는 건 봤다는데, 바다에서 못 찾겠다고 지원 넣었다. 구역에서 한참 벗어나서 둥둥 떠다니던 거 이세진이 발견했고.
이세진 형님께서는…….
그래. 네가 입수했다던 구역이랑 완전 정반대 구역 담당이지. 이제 알겠냐? 너 소용돌이에 휘말려서 반대편까지 밀려갔어.
래빈이 입술을 깨물고 멋쩍게 웃었다. 그러자 박문대가 얼굴을 팍 찡그린다. 웃냐? 웃어? 너 웃음이 나와? 선아현이 네 꼴 보고 거의 쓰러질 뻔했어. 몇 없는 의사인 선아현을 생각하다 래빈은 저도 모르게 딸꾹질했다. 희게 질린 아현의 얼굴은 상상만 해도 죄책감을 쿡쿡 쑤신다. 제대로 사과드려야겠습니다. 우울하게 소리하자 박문대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너.
예?
혼자였으면 내가 별말을 안 하는데. 저건 또 뭐냐?
래빈은 박문대의 손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봤다. 마찬가지로 수액을 맞으며 눈을 감은 채 누운 붉은 머리 남자. 가슴이 고르게 오르내린다. 얼굴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영락없이 자는 모양새다. 안도감이 물 밀리듯 몰려왔다. 다행이다. 살았구나. 아무래도 늦지 않은 모양이었다.
소용돌이 안에서 발견했습니다. 내버려 두면 죽을 것 같아서요.
그러자 박문대가 눈을 찡그렸다. 남자와 래빈을 번갈아 보던 박문대가 나직이 소리했다. 어쩐지. 네가 미쳤다고 스스로 소용돌이에 뛰어들진 않았겠지. 숨죽인 소리는 어딘가 진절머리난다는 것처럼 들려서 래빈은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네가 그 미친 소용돌이에 뛰어든 게 쟤 때문이야?
때문이라고 말하기엔 어폐가 좀 있는 것 같습니다. 어, 당시에 저는 구조 요청부터 했지만 소리가 닿지 않았던 탓도 있고, 소용돌이가 발생한 건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일뿐더러…….
어쨌든 저 녀석 없었으면 안 들어갔잖아.
그렇긴…… 합니다만.
그럼 쟤 때문에 맞네.
박문대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척척 걸어가 곱게 눈 감고 자던 상대를 미친 듯이 흔들기 시작했다. 일어나. 일어나 이 자식아. 말릴 틈도 없었다. 거칠게 흔들리는 상대에 래빈이 식겁하며 소리했다. 문대 형! 아무리 그래도 환자를 그렇게 다루시면! 그러자 박문대는 흔드는 손을 조금도 멈추지 않은 채 태연자약하게 소리했다.
이 새끼 어제 깨서 음식 사 인분 처먹고 지금까지 내리자는 중이다. 환자 아니야.
예?
환자 아니라고. 그냥 게으르고 식탐 많은 외계인이지.
……예?
래빈이 놀라 눈만 끔뻑이는데 남자의 손이 움찔했다. 박문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마지막 피날레를 날렸다. 일어나. 찰싹! 경쾌한 소리와 함께 남자의 팔뚝이 벌겋게 물든다. 래빈은 눈을 부릅뜬 채 튕기듯 일어나는 남자를 보다가 입을 떡 벌렸다.
“Ouch! [아프잖아요!]”
봤냐? 외계인이라니까.
……예?
남자는 ‘말’을 했다. 귓바퀴를 타고 들어와 고막을 울리며 전달되는 이건 틀림없는 말이었다.
래빈은 그제야 박문대의 말을 이해했다. 게으르고 식탐 많은 외계인. 당연했다. 래빈이 사는 별에선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소리했다. 말은 전달 가능한 범위가 터무니없이 작으며 입을 움직여야 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잠수하는 시간이 육지에서 사는 시간보다 훨씬 많은 이곳 사람들에게 말은 사치이자 불필요한 존재였다. 그러니 말하는 저 남자는 정말로 외계인일 수밖에.
저 외계인 처음 봅니다.
그럼 나는 두 번째겠냐.
그러면서도 박문대는 태연하게 입을 열어 ‘말’했다.
“[야, 우리 막내가 너 때문에 죽을 뻔했는데. 어쩔 거냐.]”
“[으응? 우리 막내가 누군데요?]”
“[네 생명의 은인.]”
저기, 문대 형? 뭐라고 하시는 겁니까?
협박 중.
예?
남자는 박문대의 말을 경청하더니 뒤통수를 긁적였다. 어딘가 곤란한 기색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래빈은 박문대와 이름 모를 외계인이 대화하는 모습을 거의 경이로운 눈으로 관찰했다. 박문대가 좀 특이한 사람이긴 했다. 다재다능하고, 옛이야기도 많이 알고, 못하는 게 거의 없고. 그런데 외계인과 ‘말’도 나눌 수 있을 줄이야. 존경스러움이 뭍에 갓 올라온 물고기처럼 펄떡였다.
그리고 래빈은 박문대를 지나 외계인을 봤다. 입을 오므리고 펴기를 자유자재로 반복한다. 외계인의 말소리가 분명하게 들렸다. 그리고 들린다는 사실이 몹시도 괴상하게 느껴졌다. 어색하게 손을 들어 귀를 막아봤다. 소리가 한층 먹먹하게 들린다. 손을 뗐다. 다시 소리가 또렷해진다. 막는다. 먹먹하다. 뗀다. 또렷하다. 래빈은 귀에 손을 대다가 떼기를 반복하며 박문대와 외계인의 뜻 모를 대화를 ‘들었다’.
그러자 조금 뒤 박문대가 돌아보며 물었다. 너 뭐 하냐는데.
아. 음. 그, 듣고 있었습니다.
뭐를. 대화?
예!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만 귀를 막는 것이 제게 들리는 소리의 총량을 조절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단순히 귀를 막는 것으로도 소리를 조절할 수 있었기 때문에 보다 섬세하게 조절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 중이었습니다.
힘차게 소리하자 박문대가 눈을 데굴 굴렸다. 그는 외계인과 래빈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흠, 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더니 태연하게 소리했다.
너도 말해볼래?
저, 저 말입니까?
너 아니면 누구겠냐.
래빈이 눈을 끔뻑였다. 말이라니.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전부 소리만 해왔다. 말하는 법 같은 건 배우지도 않았다. 래빈은 어어, 하고 눈을 깜빡이다가 외계인을 쳐다봤다. 그리고 헛숨을 삼켰다.
외계인의 눈이 파랬다. 바다 색깔이었다. 파르스름한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외계인이 씨익 웃었다. 침침한 형광등에 날카로운 송곳니가 반짝였다. 외계인이 입을 열 때마다 꼭 공기가 진동하는 것만 같다. 외계인의 말은 처음 듣는 종류의 소리였다.
그래서 김래빈은 소리했다.
해, 해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우선 목에 힘을 줘. 소리를 뱃속에서부터 끌어올린다고 생각하면 편해. 발음은 혀로 하는 거야. 인사부터 해보자. 소리하는 대신 목에 힘을 주고, 공기를 끌어 올리고, 혀를 움직여서 발음해봐. 그럼 말이 나올 거야.
래빈이 박문대의 말에 따라 천천히 목에 힘을 줬다. 평소 신경 쓰지 않던 근육에 힘이 들어가는 느낌이 색다르다. 래빈은 외계인을 향해 시선을 똑바로 맞춘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언뜻 더듬거리는 목에는 핏대가 서 있었다.
그리고 래빈은 생전 처음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 아.”
“옳지. 그렇게.”
외계인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보기 좋게 새파란 눈에 얼굴이 시뻘게진 래빈이 비쳤다. 래빈은 목에 힘을 잔뜩 준 채 꾸역꾸역 발음했다.
“안녕하, 십니까.”
박문대나 외계인 같은 소리가 아니다. 그들처럼 매끄럽고 듣기 좋지 않았다. 자신의 소리와도 달랐다. 훨씬 거칠고 메말라서, 일견 소음이라고까지 생각할 수 있겠다 싶었다. 외계인의 눈이 더욱 동그래졌다. 뭔가 잘못 말했나 싶어 입술을 지그시 깨무는데 그가 해사하게 웃었다. 드러난 송곳니가 반짝였다.
“나도 안녕해요!”
말간 목소리가 귓가에서 부서지고 고막을 울렸다.
안타깝게도 래빈의 연약한 목은 인사 한 번으로 완전히 나가버렸기 때문에 다른 말을 전하진 못했다. 그래서 래빈은 침대에 걸터앉아 외계인과 박문대가 열심히 떠드는 장면을 구경했다. 외계인은 대화 도중 래빈을 몇 번 가리키고 제 입술을 툭툭 두드렸다. 박문대는 진짜 못 볼 꼴 봤다는 표정으로 래빈을 응시하다가 한숨 쉬었다. 싱글싱글 웃는 외계인에게 설렁설렁 말하는 모습에선 언뜻 연륜까지 느껴졌다.
외계인은 얼마간 떠들더니 다시 잠들었다. 두 눈을 곱게 감고 색색 숨을 내뱉는 외계인을 빤히 들여다보던 래빈은 이내 지척까지 다가온 박문대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외계인과 박문대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모른다. 그들은 래빈이 알지 못하는 언어로 대화했다. 하지만 그 대화 상당수에 제 이름 엇비슷한 발음이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그들이 자신에 관해 이야기했다는 사실 정도는 대강 예측할 수 있었다. 래빈은 아직 욱신거리는 팔뚝을 버릇처럼 만지작거리다가 박문대의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괜찮냐?
저 말입니까?
너 아니면 누구겠냐. 내가 저 녀석 걱정이라도 하리?
래빈은 나직이 웃었다. 박문대는 금세 외계인과 친해진 것처럼 보였다. 정을 안 붙인다고 냉정한 태도를 고수하지만 박문대만큼 정 많은 사람을 찾기도 어렵다. 적어도 래빈은 그렇게 생각했다. 래빈은 잠든 외계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박문대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쩐지 어두웠다.
안 괜찮아야 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전 무사히 구출되었고 다친 곳도 없으며…… 제대로 처치도 받은 것 같습니다만. 아. 그래도 몸은 아직 좀 욱신거립니다. 근육이 놀란 정도니 신경 쓰실 필요까지는.
그게 아니야.
그럼 뭘 말씀하시는…….
박문대가 머리를 짜증스럽게 흐트러트렸다. 살짝 열린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래빈은 어쩐지 어른에게 혼나는 어린애처럼 괜히 허리를 곧추세웠다. 뻐근한 어깨와 허리가 욱신거린다. 손끝을 꼼지락거리는데 뒤늦게 박문대의 소리가 들렸다.
너 바다 싫어하잖아.
아.
그래서 걱정한 거야. 바다 안 들어가겠다고 버텨서 물밑반도 안 거친 놈이 입수했다가 정신 잃고 입원까지 했으니까.
래빈은 소리 없이 시선을 떨궜다. 그렇긴 하지. 래빈은 바다가 싫다. 거기엔 침몰한 죽음이 너무 많다. 물속에서는 호흡할 수 없다는 사실이 래빈에겐 항상 끔찍하게만 다가왔다. 바다가 싫다. 잠긴 죽음이 너무 많다. 숨도 쉴 수 없다. 할 수 있는 건 가라앉는 일밖에 없을 것 같아서. 그래서 싫다.
래빈이 손끝을 꼼지락거렸다. 대답이 없자 박문대가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박문대는 알았다. 사정을 전부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이건 박문대 나름의 걱정일 것이다. 래빈은 알았다. 그래서 더더욱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몰랐다.
너 바다 몇 년 만에 들어간 거더라.
오 년……. 아니, 육 년이던가.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일일이 새어 보지를 않아서.
아직도 팔 월 오 일에 동그라미 치냐?
네.
아직도 작곡한 노래, 안 부르고?
네.
그러냐.
그렇습니다.
소리가 없다. 소리하지 않았고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들리는 건 오로지 외계인의 고른 숨소리뿐이다. 래빈은 고개를 떨궜다. 꼼지락거리는 손에 시선을 고정했다. 오른손 검지를 구부렸다가 핀다. 왼손과 오른손을 붙잡았다가 천천히 푼다. 서로 얽혔다가 풀려난다. 살이 스치는 감각이 생생하다. 손을 들어 손목을 짚으면 펄떡이는 맥이 느껴진다. 살아 있다. 래빈은 살아 있다.
그래서 래빈은 소리했다.
괜찮습니다.
그러냐.
네. 사실 들어가기 전에는 좀 무서웠습니다.
그 미친 소용돌이 보면서 안 무서울 놈이 어디 있냐.
무서웠는데, 아무도 안 와서. 그런데 저 외계인 씨가 자꾸 걸려서. 도무지 무시할 수가 없었습니다.
알아. 넌 그런 애니까.
그렇습니까?
그래.
래빈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마침내 고개를 들어 외계인을 쳐다봤다. 좋은 꿈을 꾸는 것 같다. 잠결에 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래빈은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나직이 소리했다.
바다엔 이미 충분히 많은 사람이 잠겨 있습니다. 제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꼴 보긴 싫습니다. 그것도 바다에서.
그래서 뛰어들었냐.
그래서 뛰어들었습니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박문대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침내 눈이 마주쳤다. 말간 시선이 래빈을 꿰뚫듯 바라본다. 래빈은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박문대는 그냥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등을 돌렸다.
너 진짜 못 말리는 놈인 거 아냐?
어……. 눈치가 구제 불능이란 소리는 들어봤습니다만.
어떤 새끼가.
예?
아니다. 됐다. 쉬어라.
네. 문대 형도 쉬십시오.
그래.
박문대가 나서기 전 커튼을 쳤다. 새하얀 커튼 너머로 외계인이 사라진다. 래빈은 하얀 커튼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침대에 도로 누웠다. 박문대의 걸음이 멀어진다. 불이 꺼졌다. 푹 쉬라는 배려일 것이다.
래빈은 천장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할머니 꿈을 꿨다. 악몽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오랜만에 누나가 보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래빈이 눈을 감았다. 어디선가 잠잠한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이튿날 외계인과 래빈은 원로회의에 불려갔다. 굳은 표정으로 둘러앉은 원로들에 자리가 가시방석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는 데에 온 인내심을 끌어다 쓰는데 외계인은 퍽 당당한 자세였다. 움츠리지도 않고 주위를 힐끔거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허리를 꼿꼿하게 곧추세웠다. 그리고 원로들과 천천히 눈을 맞추며 또렷하게 말했다. 해석은 박문대가 했다. 외계인이 열 마디 하면 박문대가 세 마디로 줄여서 해석했다. 요컨대 자신은 이 별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였다. 자신의 별은 훨씬 크고 육지도 많댔다. 그러며 원로들이 저들끼리 소리하는 틈을 타 래빈에게 장난스레 속삭였다. “내 별에도 바다는 많아.” 킥킥거리는 목소리가 귀에 닿자 김래빈은 파드득 떨었다. 귀에 숨이 닿는 감각이 영 낯설었다.
원로회는 래빈에게도 설명을 요구했다. 래빈은 자신이 겪었던 일을 침착하고 차근하게 설명했다. 고래잡이를 위해 준비하던 노래, 도통 풀리지 않는 작업 따위는 생략했으나 나머지는 상세히 전했다. 갑작스럽게 밀려가던 바닷물, 휘몰아치던 급류, 중심부에서 의식을 잃고 휘말렸던 외계인 씨.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구했다고 했다. 박문대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외계인만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외계인에겐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되새김질하다가 안도했다. 입 맞추어 숨을 전달했다는 세목도 생략했다.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원로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저들끼리 숙덕거렸다. 한껏 낮춘 소리를 전부 읽는 건 불가능했으나 단어들이 띄엄띄엄 들리긴 했다. 그들은 외계인의 처분과 김래빈의 처벌을 동시에 입에 올렸다. 그래도 사람을 살린 건데 처벌은 너무하지 않냐며 박문대가 끼어들었다. 원로들은 박문대를 탐탁잖은 눈으로 바라보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관심과 신경을 전부 끌고 간 외계인과 박문대의 환상적인 도움 덕분에 래빈은 경위서 한 장과 근신 일주일로 사건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래빈은 원로가 엄숙하게 쏘아 보낸 소리를 듣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만은 없었다. 문제는 직후 일어났다. 원로 중 하나가 눈을 치켜뜨더니 냅다 물은 것이다.
그런데 래빈 군. 바다에 못 들어간다지 않았나?
래빈은 대답 대신 입을 꾹 다물었다. 궁금해서 묻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원로회는 래빈이 물밑반이 아닌 센터 음악반에 소속된 것을 마뜩잖게 여겼다. 래빈도 그걸 알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어 생판 모르는 사람까지 구할 정도라면, 물밑반 작업 정도는 손쉽게 할 것 같은데.
사람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옮긴 행동입니다. 사람은 다급할 때면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하지 않나요. 그걸 일상적인 부분으로 끌고 오는 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래빈 군이 특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젊은이들이 많아. 우리가 곤란할 지경이라네.
그거 다 멋대로 지껄이고 보는 소리인 거 아시면서 그러십니까.
박문대가 심드렁하게 맞받아친다. 원로들은 래빈을 빤히 바라보다가 그냥 손을 휘휘 저었다. 래빈은 허리를 꾸벅 숙이고 돌아섰다. 나중에 문대 형님께 제대로 감사 인사드려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원로회의장 밖으로 나서는데 뒤에서 원로가 외계인에게 묻는 소리가 났다. 이름이 뭐지? 박문대가 소리를 말로 바꾸어 전했다. “[너 이름 뭐냐는데.]” 어딘가 피곤하고 성가시다는 표정이 역력한 박문대의 얼굴을 보면서 래빈은 외계인의 언어를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부탁하면 들어주시려나. 짧게 고민하는데 외계인이 힘차게 대답했다. 생전 처음 듣는 발음이었다.
“[내 이름? 음, ■. 그냥 ★라고 불러요.]”
문틈으로 스친 박문대의 얼굴에 짧은 망설임이 어렸다. 래빈은 일부러 문을 닫지 않고 미적거렸다. 외계인의 이름이 궁금했다. 그야 한동안 얼굴 맞댈 것 같은데 계속 외계인 씨라고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게다가 외계인이 제 입으로 발음한 이름은 몹시도 강렬한 울림을 지니고 있었다.
한참 고민하던 박문대는 이내 탐탁지 않다는 표정으로 소리했다.
우리 소리로는 완전히 표현할 수가 없는데요.
그럼 적당히 얼버무리게. 외계인의 정확한 이름 따위 알 필요 없네. 우린 그저 저 외계인을 칭할 호칭이 필요한 것뿐이야.
원로회의 불퉁한 대답에 박문대가 눈썹을 슬쩍 추켜 올렸다. 하지만 대꾸하는 대신 어깨를 으쓱인다. 잠시 고민하던 박문대는 싱글싱글 웃는 외계인을 힐끔거리더니 소리했다.
유진…… 이그나시오, 차. 그냥 차유진이라고 부르랍니다.
그 순간 외계인은 차유진이 됐다.
차유진의 등장에 작은 별은 떠들썩했다. 소리하지도 않는 외계인을 보겠답시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구김살 없는 성격에 객관적으로 보나 주관적으로 보나 잘생긴 외모는 폐쇄적인 뭇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기엔 최적이었다. 대화도 통하지 않았으나 생각이 긍정적이라는 태는 행동에서도 묻어났다. 유진은 그 존재가 알려진지 하루 만에 별 최고의 인기쟁이가 됐다.
유진은 원로회에 다녀온 다음 날부터 별을 들쑤시고 다니기 시작했다. 이틀 동안 수상한 사람은 아닌지 조사를 받았다고 했다. 통역을 맡았던 박문대가 질린 표정으로 원로회를 한참 씹던 것을 생각하면 제법 힘들었을 텐데, 차유진은 피곤한 기색은커녕 오히려 팔팔했다. 그 짧은 새 이쪽 별의 언어를 배웠는지 서툴게 말을 거는 차유진을 보면서 래빈은 사람의 존재가 이렇게까지 신기할 수 있구나 싶었다.
쟤 진짜 특이한 놈이야. 박문대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인사를 모두 맞받아치며 싱글벙글 웃는 유진을 바라보며 팔짱 낀 채 소리했다. 래빈은 곁에서 발맞추어 걷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합니다. 다른 별에 떨어졌다는데 저렇게까지 태연한 사람은 처음 봅니다.
너는 어떨 것 같냐? 네가 하루아침에 다른 별에 떨어지면?
어…… 잘 모르겠습니다. 좀 당황스럽지 않을까요. 적어도 차유진처럼 막…… 웃고 다닐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나도 그래. 근데 생각하는 거랑 실제로 체험하는 거랑은 좀 다르더라.
예?
아니. 아무것도 아냐.
래빈은 박문대를 가만히 바라봤다. 유진의 등을 노려보듯 응시하는 박문대의 눈이 번뜩였다. 래빈은 무어라 내뱉을 소리를 찾다가 관뒀다.
원로회에서 널 물밑반으로 보내버리고 싶어 하던데.
잠시 내렸던 침묵은 박문대가 다시 입을 엶으로써 사라졌다. 래빈은 박문대의 입에서 나온 화제에 어색하게 웃었다. 보일 반응이 웃음밖에 없어서 그랬다.
나랑 이세진이 언제까지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란 거 너도 알겠지. 원로회가 좀 빡빡하냐.
항상 감사드립니다.
오냐. 근데 난 이해할 수가 없다. 지금 축제에서 쓸 곡 중에서 팔 할은 네가 만든 거 아니냐? 네가 여기서 탱가탱가 노는 것도 아닌데 왜 바다에 못 보내서 안달이야.
신랄한 평가에 래빈이 머쓱하게 웃었다. 착실하게 걷는 발은 이제 모퉁이를 꺾고 돈다. 센터 사람들이 사는 거주 공간이 쭉 나타났다. 늘어진 방들에 앞서가던 유진의 발걸음이 멈춘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박문대에게로 걸어왔다.
“[어디로 가야 해요?]”
“[5-32.]”
“[아하. 고마워요.]”
뭐라고 한 겁니까?
방 어디냐고 물어봐서 대답해줬다.
아하.
너도 같이 쓸 거야.
아하. ……예?
원로들한테 못 들었냐?
태연하게 터진 폭탄 발언에 래빈이 눈을 홉떴다. 모, 못 들었습니다! 펄쩍 뛰며 대답하자 박문대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하여간 이놈의 노인네들은 다 제멋대로지. 원로회를 씹다 못해 갈아 마실 얼굴로 박문대가 방문 앞에 멈춰 섰다. 유진은 이미 문을 연 채 방안을 배회하고 있었다.
5-32. 앞에 붙은 번호 5는 이 방이 다인용이란 뜻이다. 어쩐지 일인용 방을 죄 지나친다 싶었다. 래빈은 널찍한 방안을 뛰어다니는 유진과 방문에 기댄 박문대를 번갈아 보다가 멍하니 소리했다. 왜, 왜. 대체 왭니까?
난들 아냐. 네가 발견했으니 돌아갈 방법 찾을 때까지 책임지라던데.
“잘 부탁해요!”
그게 어떻게 그렇게 됩니까? 저 마감일도 얼마 안 남았습니다! 게다가 소통도 잘 안 되는데……. 편리성을 생각했을 때 대화가 수월한 문대 형께서 맡아주시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습니까?
그 녀석이 널 지목했어. 너 아니면 싫다고. 본인이 우기는데 뭘 어쩌냐. 원로회가 저 고집불통 녀석을 살살 구슬릴 놈들이야?
“잘 부탁해요?”
왜 저를 지목했습니까?
그걸 나한테 물으면 알겠냐. 본인한테 직접 물어봐.
“음, 아니에요? 고맙습니다? 믿습니다?”
“[대화 중이야.]”
“[오, 알겠어요. 기다릴게요. 끝나면 말해줘요!]”
방금 그건 뭡니까?
네가 대답 안 하니까 자기 말이 틀렸나 의심하고 있었나 본데. 대화 끝나면 알려달란다.
박문대의 높낮이 없는 소리에 래빈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입을 다문 유진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새파란 눈동자가 반짝인다. 눈을 맞추고 있다가 어쩐지 낯뜨거워져서 고개를 돌렸다. 머릿속에선 원로회가 결정을 내리며 했을 법한 소리가 하염없이 맴돌았다. 원로회는 항상 래빈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이참에 고생 좀 하라고 유진을 제게 맡겼는지도 모른다…….
이럴 줄 몰랐다. 진짜 몰랐다. 외계인을 일개 개인에게 맡기면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어느 별에서 왔는지, 어떤 목적으로 왔는지, 어떻게 왔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데 민간인에 불과한 자신에게 일임해도 되는 걸까. 원로회의 결정인 만큼 거스를 순 없겠으나 영 마음에 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차유진과 래빈은 일단 덩치부터 차이가 났다. 짜임새 있게 붙은 근육을 보고 있노라면 괜히 팔을 쓸어내리게 됐다. 래빈이 몸에 자신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랬다. 틈틈이 운동도 하는데. 아무리 밤샘 작업이 많다지만. 유진이 돌아가겠다고 난동이라도 부린다면 래빈이 막을 수나 있을까. 영 자신이 없었다.
래빈은 마지막으로 항의하려다 지친 박문대의 얼굴을 보고 지레 소리를 삼켰다. 박문대도 래빈과 유진과 원로회 사이에 껴서 한동안 고생이 많았다. 자신의 투정 때문에 박문대를 더욱 피곤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항상 편의를 봐주시는데 이 정도도 참지 못하면 안 된다. 래빈은 입술을 꾹 감쳐 물고 비장한 표정으로 유진을 바라봤다. 그나마 키가 엇비슷해서 다행이다. 그마저 유진이 조금 더 크기는 했지만.
“잘 부탁해요!”
타이밍 좋게 차유진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래빈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목에 힘을 줬다. 또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잘 부탁합니다.”
“우리 이름 불러요!”
“예?”
“음, 그러니까. 너, 나?”
대화를 시작한 지 오 초 만에 래빈은 박문대를 바라봤다. 유진은 곧장 눈을 반짝이며 알 수 없는 언어를 유창하게 늘어놨다. 박문대는 기나긴 말을 대충 듣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리했다. 이름 알려달래. 이름으로 부르재. 분명 그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담은 것 같은데 가볍게 축소됐다. 래빈은 토 다는 대신 그냥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김래빈입니다. 편하게 불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 차유진이라고 불러요. 래빈.”
“네.”
정말 발음이 차유진 같았다. 비록 유가 아니라 유우에 가깝고, 진이 아니라 지읒과 시옷 사이 어딘가의 소리 같긴 했지만. 시답잖은 생각이나 하는데 유진이 불쑥 손을 뻗었다. 유진이 커다란 손으로 김래빈의 목을 감싼다. 래빈이 놀라 굳었다. 눈만 끔뻑이는데 박문대가 곁에서 흠칫했다. 분위기가 삽시간에 이상해진다. 당황한 래빈이 저도 모르게 유진을 빤히 바라보는데, 유진은 래빈의 목을 가볍게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힘 풀어요. 그러면 소리 더 좋아요!”
래빈이 눈을 깜빡였다. 목에 힘을 풀라는 뜻인가? 확실히 말은 조금만 해도 목이 금방 아프고 목소리가 더욱 형편없어졌다. 래빈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목에 힘을 뺀 채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말입니까?
너 방금 소리했다.
아.
“못하겠어요?”
유진의 질문에 래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시 목에 핏줄이 섰다.
“네. 아직은 조절이 어렵습니다. 조금 더 익숙해지면 해보겠습니다.”
“내가 도와줄게요! 같이 해요!”
“네.”
그 전에 당신이 돌아갈 확률이 더 높지만. 어쨌든 한동안 같이 지낼 테니 가벼운 약속 한두 개쯤은 해도 되지 않으려나. 래빈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유진이 웃었다.
“나 래빈이랑, 어, 말…… 해도 돼요?”
“예?”
“그러니까, 어, 그러니까.”
유진이 박문대를 힐끗거리다가 눈을 질끈 감는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고심하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더듬더듬 말하는 유진의 얼굴에 한층 신중한 기색이 깃들었다.
“편하게? 가볍게? 간단하게? 말해도 돼요? 요 빼고 싶어요.”
“반말하고 싶다는 말씀입니까?”
“반말?”
“이렇게 말하고 싶냐고, 차유진.”
조금 어색하게 말하자 유진의 얼굴이 훤해진다. 유진은 기다렸다는 듯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그게 반말이에요? 그럼 반말하고 싶어요. 요 붙이면 말이 길어지고 어려워요.” 잔뜩 상기된 목소리에 래빈이 눈썹을 좁혔다. 외관상 나이가 비슷해 보이긴 하지만 다른 별에서 왔으므로 어림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만난 지 겨우 일주일 남짓인데. 말을 놔도 되려나. 고민하는 태가 역력했는지 유진의 얼굴이 다시 시무룩해졌다.
“래빈은 싫어요?”
추욱 늘어져서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보는데, 오. 래빈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무표정하면 다소 차가운 인상인데도 표정을 정말 자유자재로 사용한다. 차유진 별의 사람들은 전부 저런가? 당혹스러움이 밀려들었다. 래빈은 저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더듬더듬 답했다.
“아, 아니. 음. 괜찮을 것 같습니다.”
“좋아, 김래빈!”
“예?”
“반말 좋아. 편해. 잘 부탁해!”
“아, 예.”
“김래빈도 반말!”
“아. 어……. 나, 나도 잘 부탁해.”
역시 영 어색하다.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때 딱 이 기분이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진은 그냥 들뜬 표정으로 히히 웃었다. 방문에 기대서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박문대는 십 년 치 기력은 다 쓴 표정으로 늘어져 있다가 비척비척 일어났다. 그리곤 래빈에게 소리했다.
나 간다. 자리 오래 비웠어. 선아현한테 의무실을 평생 맡겨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 네! 감사했습니다!
그래.
래빈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박문대는 질린 눈으로 유진을 힐끔 보더니 그냥 터벅터벅 걸어 나갔다. 유진은 박문대의 뒤통수에 대고 손을 흔들며 무어라 말했다. 아마 배웅 같았다.
이윽고 문이 닫혔다. 널찍한 방안에 둘만 남는다. 래빈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다인용 방을 둘러봤다. 육지가 작은 이 별에서 센터는 가장 큰 건물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일하는 사람을 수용하기에 좁은 편이라 래빈은 항상 작은 일인실에서 생활했다. 다인용 방은 원로들이나 나이 지긋한 노인들만 사용했다.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는 유진을 놔두고 래빈은 방을 기웃거렸다. 침실이 두 개였다. 비록 부엌과 거실이 완전히 연결된 구조였으나 침실이 마주 보는 형태로 두 개나 있다니. 퍽 사치스러운 방이었다.
유진은 별로 놀란 것 같지 않았다. 래빈은 이곳보다 육지가 넓다던 유진의 별을 상상하다가 관뒀다. 어차피 모르는 별이다. 알지도 못하는 별에 대한 동경심을 키우는 건 구역질 나는 기분이다. 모르는 별. 이름만 아는 별. 멀어서 보이지도 않는 별. 그리고 커지는 동경과 그리움 따위를 생각하던 래빈이 입술을 감쳐 물었다. 안 된다. 이래선 안 된다. 래빈은 주어진 상황에서 만족하며 살 것이다. 그러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러니까, 열셋의 여름에.
추락한 기분을 어떻게든 떨치려 래빈이 발을 옮겼다. 유진이 맴도는 맞은편 침실에 들어갔다. “거기 쓸 거야, 김래빈?” 유진이 고개만 쏙 내밀어서 물었다. 래빈은 고민하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쪽 침실 써. 어차피 똑같으니까.” 유진은 일언반구 없이 흔쾌히 대답했다. “알겠어!”
래빈은 느적느적 걸어가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매트리스가 푹신하게 몸을 받친다. 어쩐지 전부 현실감이 없었다. 그토록 싫던 바다에 들어가서 사람을 구했더니 그게 외계인이고. 이 작은 별에서 순식간에 인기쟁이가 된 외계인을 자신이 전담하게 되고. 침실이 두 개나 되는 사치스러운 방에서 머물게 되고. 래빈은 부드러운 매트리스를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유진의 방도 문이 열려 있다. 유진도 침대에 걸터앉아 래빈을 빤히 보고 있었다.
소리도 말도 없는 시선들이 허공에서 진득하게 얽힌다. 누구 하나 고개 돌릴 생각을 않았다. 그러다가 차유진은, 또다시, 버릇처럼, 씨익 웃는다. 다시금 드러난 송곳니가 희미한 빛에 점멸한다. 래빈은 그 자신감 넘치는 웃음을 보다가 밭은 숨을 삼켰다. 모르는 별에서 온 외계인. 내가 모르는 별. 그리고 동경. 부러움. 그리움. 너무나도 광막한 탓에 나 자신을 버리고까지 닿고 싶어지는…….
“나 궁금한 거 있어.”
유진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또렷하게 들렸다. 귓바퀴를 타고 들어와 고막에서 태동하는 진동. 차유진 별의 사람들은 모두 유진 같은 목소리를 지녔을까? 래빈은 멍하니 생각하다 목에 힘을 줬다. 그리고 힘차게 발음한다. “뭐가?” 그러자 유진이 뚜렷한 발음으로 묻는 것이다.
“이 별에서도 바다는 바다야?”
유진의 질문에 래빈이 마침내 고개를 돌렸다. 벽면에 자그맣게 난 창 너머 광활한 바다가 펼쳐진다. 수평선이 종이에 그려진 선처럼 죽 그였다. 끝은 보이지 않는다. 이 별엔 바다가 면적 95% 이상을 차지한다. 육지는 고작 5%밖에 되지 않는다. 그 5%에 3만여 명이 옹기종기 모여 산다. 물자가 항상 아슬아슬한 선에 머무는 탓에 원로들은 장정들을 모아 물밑반을 꾸렸다. 래빈은 머릿속에 떠다니는 정보들을 전부 밀어 넘긴 후 천천히 대답했다.
“응. 바다는 바다야. 네 별에서도 바다는 바다야?”
“크게 보면.”
“크게 본다는 건?”
“다 합쳐서 바다라고 불러. 그런데, 음, 구역? 분야? 장소? 나뉘어 있어서, 이름은 다 달라. 바다는 바다인데 이름이 많아.”
“이상하네. 결국엔 다 똑같은 바다인데.”
“맞아. 결국엔 물이고 바다고 하난데.”
유진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래빈은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다 말고 힐끔 곁눈질했다. 유진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날렵한 콧날과 어딘가 가라앉은 푸른 눈, 눈 위에서 흐드러진 붉은 머리칼 따위가 천천히 시야에 잡힌다. 입을 다물고 웃지 않으니 상당히 냉랭한 인상이다. 래빈은 버릇처럼 손을 들어 제 입매를 만지작거렸다. 인상 안 좋기론 래빈도 만만찮다. 그러고 보니 유진은 매번 웃는데. 나도 웃으면 분위기가 좀 풀어지려나.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는데 유진이 벌떡 일어났다. 매트리스의 스프링으로 추진력을 얻어서 거의 날 듯이.
“나 김래빈네 별에 있는 바다 궁금해!”
“어?”
“가볼래. 나 수영 잘해! 김래빈 나 데려가.”
“너 내가 처음 봤을 때 물에 휩쓸려 있었으면서 무슨 수영을 잘해.”
“그거 아니야! 나 수영 잘해. 진짜로 잘해. 물이 빨라서 그랬어. 원래는 안 그래!”
그리고 유진은 자신이 수영을 잘한다며 적극적으로 호소하기 시작했다. 자기가 살던 캘-리-포-니-아라는 곳에선 무슨 해변이 있는데, 거기서 서핑이라는 것도 했단다. 서핑이 뭐냐고 물으니 파도를 타는 거라고 대답했다. 파도를 왜 타냐고 물으니 바다랑 하나 되는 느낌을 받으려고 그런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래빈은 눈을 찡그리며 서핑을 상상하다 관뒀다.
“아무튼 안 돼.”
“왜!”
“네 별의 바다와 우리 별의 바다가, 같은 바다라고 불릴지언정 그 느낌까지 같으리라곤 장담할 수 없어. 위험성이 너무 커. 그리고…….”
“그리고?”
유진이 되물었다. 래빈은 눈을 맞추는 대신 고개를 떨궜다. 다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저 멀리 아득하게 파도 소리가 들린다. 이 별은 육지 어디서든 파도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게 진절머리나도록 싫은 적이 있었다.
“난 바다 안 들어가.”
“김래빈 나 구했잖아.”
“그거랑 이거랑 달라. 난 바다 안 들어가.”
입력된 행동만 반복하는 기계처럼 래빈이 말을 되풀이했다. 유진이 입을 다물었다. 침침한 전등에 눈이 반짝였다. 똑바로 바라봤다간 꼭꼭 숨겨놓은 마음마저 전부 까발려질 것만 같아 래빈은 시선을 피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항상 그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무심코 들었다.
“나는 바다 싫어. 안 들어가.”
유진은 대답 대신 래빈을 빤히 바라봤다. 래빈은 바다를 응시했다. 이 별 어디서든 보이는 바다, 그 수면 위로 햇빛이 깨지고 부서져 내렸다.
마감일이 코앞이다. 래빈이 작업실에서 사흘째 밤을 지새운 후 비척비척 나섰을 때 같은 음악반인 선영 누나는 비명을 질렀다. 우리 막내 꼴이 왜 이래! 너 물에 빠트리면 사람들이 시체인 줄 알겠다! 래빈은 애써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웃었다. 그러다가 웃지 말라고 쓴소리 들었다. 너 그 모양 그 꼴로 웃으니까 웬 범죄자 같다며.
그렇지 않아도 가뜩이나 촉박하던 마감일은 차유진이라는 거대한 변수가 끼어들면서 절반씩 훅 줄어들었다. 첫째 원인은 유진을 구하느라 제 한 몸 내던지고 이틀간 정신 못 차린 탓이요, 둘째 원인은 유진이 별에 적응하는 것을 상세히 관찰하기 위해 따라다니느라 또 사흘을 낭비한 탓이다. 이젠 진짜 일주일도 안 남았다. 그런데 작업은 여전히 지지부진했다. 래빈의 꼴을 보고 음악팀 선배들이 작곡 하나를 맡아주기로 약속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선배들이 나름의 계획과 일정이 있어 두 곡 모두 맡아주는 건 무리라며 사과했을 때 래빈은 펄쩍 뛰었다. 아닙니다! 한 곡이라도 맡아주셔서 너무 다행입니다! 래빈이 허리를 구십 도로 숙이며 외치자 선배들은 저들끼리 시선을 교환하다가 그냥 와락 웃었다.
덕분에 래빈은 곡 하나만 붙잡고 매달릴 수 있었다. 제 눈앞에 어지럽게 흐트러진 악보들을 바라보다가 래빈이 피식피식 웃었다. 이젠 헛웃음이 난다. 줄과 검은 콩나물을 너무 쏘아봤더니 이젠 눈이 아플 지경이다. 래빈은 보지도 않은 채 책상을 더듬거리며 아무 펜이나 붙잡고 검은 콩나물을 멍하니 그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음률이 느리게 지나간다. 평소라면 열정에 사로잡혀서 저것들을 옮겨적느라 바빴겠으나 오늘은 아니다. 세 번째 콩나물 머리를 그리고 색칠하다 말고 래빈은 책상에 엎어졌다. 졸음이 쏟아졌다.
축제가 머지않은 탓에 별은 전체적으로 붕 뜬 분위기였다. 당장 센터만 하더라도 그랬다. 작업실 밖으로 나가면 선임들이 삼삼오오 떠드는 모습을 어렵잖게 볼 수 있었다. 래빈만 아니었다. 평소보다 너그럽고 유한 분위기에 편승하지 못한 건 래빈뿐이었다. 선임들은 분명히 노력했다. 그냥 래빈이 마감일에 쫓긴다는 강박과 불안 때문에 작업실 밖으로 안 나온 탓이었다.
래빈이 얼마나 처박혀 있으면 외계인인 유진이 오히려 래빈보다 별의 분위기에 잘 섞인 수준이었다. 래빈은 책상에 엎드려서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머릿속에선 엊그저께 들었던 유진의 이야기가 천천히 재생되고 있었다. 래빈과 친하게 지내는 몇 안 되는 물밑반 사람이었는데, 유진이 냅다 바다에 데려달라고 조르는 바람에 난감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걔 수영 진짜 잘하더라. 난 우리 별 사람인 줄 알았어.
그렇습니까?
들어보니 걔네 별에도 바다가 많다네. 그래서 익숙하대.
래빈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바다에 같이 가자고 채근하는 유진을 거절하느라 부정하긴 했어도, 어차피 이 별의 바다든 그 별의 바다든 똑같지 않을까 싶어서.
래빈은 책상 위에 흐트러진 필기구를 손끝으로 툭툭 밀었다. 눈그늘이 짙게 진 얼굴 위로 깊은 그림자까지 덮이자 정말 사람 하나 죽인 몰골일 성싶었다. 피곤하다. 이거 완성 못 하면 이번에야말로 물밑반 행일 것이다. 그러니 해야 한다. 해야 하는데 안 된다. 환장하겠네. 차유진은 좋겠다. 무심코 든 생각에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왜 좋겠지? 외계인이라서? 하긴, 좀 부럽긴 하다. 다른 별에서 왔는데 이렇게 구김 없이 사람들과 친해지는 능력을 아무나 갖는 것도 아니고.
“김래빈 좀비 같아.”
그때 문득 들린 목소리에 래빈이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문 열리는 소리도 안 났는데 어느샌가 유진이 작업실에 들어와 있었다. 팔짱을 낀 채로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유진은 머리에 휘황찬란한 꽃을 단 채였다. 래빈은 저 꽃을 알았다. 축제 일주일 전부터 센터에서 나눠주는 기념품 같은 거였다. 꽃을 보자마자 또 마감일이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진짜 이럴 시간이 없는데. 래빈은 팔짱 낀 채 입술 비죽이는 유진을 보다가 건성으로 답했다.
“좀비가 뭔데?”
“좀비 몰라? 여긴 좀비 없어?”
“그런 거 없어, 바보야.”
그러자 유진이 입을 떡 벌린다. 휘둥그레진 눈을 보다가 웃음을 삼켰다. 어지럽게 흐트러진 악보와 필기구들을 정리하는데 유진이 다가와 책상에 걸터앉았다. 그리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럴 수가. 좀비가 없다니. 여기 너무 심심한 별이야.”
“심심하지 않아! 우리 별도 나름대로 재밌는 게 많아. 예를 들자면 이번에 열리는 고래잡이 축제라던지…….”
“I’m not talking about that! 그냥, 어, 다르단 거 알아. 근데 뭔가 되게 비슷했어. 그래서 좀비 없을 거라고 생각 안 했어.”
“그러니까 좀비가 뭔지 알려줘야 할 거 아니야, 바보야.”
유진이 입술을 삐죽였다. 래빈은 유진이 깔아뭉갠 악보를 꺼내느라 그의 옆구리를 필기구로 쿡쿡 찔렀다. 유진이 킬킬거리며 비켜 앉는다. 구겨진 악보를 펴고 정리하는데 유진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죽은 사람이 걸어 다니는 거. 무덤에서 막 기어 나오고…… 그런 게 제일 유명해. [오죽하면 유명한 영화 이름도 Walking Dead겠어.]”
뒷말은 못 알아들었다. 그런데 악보를 바삐 정리하던 래빈이 멈췄다. 잠시 입을 어물거리던 래빈이 입술을 지그시 다물었다. 한동안 조용하다가 래빈이 물었다. 생뚱맞은 질문이었다.
“무덤이 뭐야?”
“Hmm?”
“무덤에서 막 기어 나온다며. 무덤이 뭐야?”
“죽은 사람 묻은 땅 무덤이라고 해. 이 별엔 무덤 없어?”
“없어. 우리는 전부 바다에 흘려보내. 죽은 사람을 땅에 묻다니, 너희 별은 육지가 넓긴 한가 보네.”
유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 별에서 육지는 산 사람의 것이었다. 죽은 사람까지 품기엔 너무나도 작았다. 그래서 김래빈네 별에선 죽은 자를 바다로 흘려보냈다. 둥실둥실 떠내려 보내며 마음도 함께 보내는 것이다. 래빈은 시선을 돌린 채 악보를 들고 일어났다. 일전에 완성해둔 탑노트가 어디 있을 것이다. 며칠째 붙들고 있는 메인 멜로디 파트와 합쳐서 어떻게 들릴지 예상해봐야 했다. 부산스럽게 서랍을 뒤적이는데 문득 유진이 물었다.
“그럼 보고 싶을 땐 어떻게 해?”
세 번째 서랍을 열며 래빈이 대꾸했다. “바다로 가. 바다 가서 한동안 잠수하다 안 올라오는 사람도 있고, 올라오는 사람도 있고.”
“내 Grannie가 그랬는데, 무덤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 위해서 있는 거랬어. 외로워질 때마다 거기 가서 위로받으라고.”
“그래니?”
“할머니.”
“너도 할머니 계셔?”
“김래빈도 할머니 있어?”
있어가 아니라 계셔야, 높임말 써야지. 분명 말하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안 나왔다. 서랍에 빼곡하게 들어찬 종이들을 훑던 손이 멈췄다. 목이 말랐다. 그렇지 않아도 메마른 성대가 갈라지는 기분이다. 래빈은 마른침을 꼴딱 삼켰다. 그리곤 최대한 담담히 말했다.
“계셨어. 근데 내가 열세 살 때 돌아가셨어.”
“……미안.”
“아냐. 오래전 일이라서 이젠 별로 아무렇지 않아.” 거짓말이다. 래빈은 아무 소득 없이 서랍을 닫았다. 아무렇지도 않으면 바다가 싫지도 않았겠지. 래빈은 제 우울에 침몰하는 대신 고개를 들어 유진을 봤다. “네 할머니는?”
“우리 할머니 완전 건강해. 서핑도 가.”
“높임말 써야지.”
“서핑도 갑니다?”
“서핑도 가셔.”
“서핑도 가셔.”
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이 히죽 웃었다. 장난스러운 미소였다. 래빈은 히히 웃는 유진을 바라보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니 유진은 자신이 살던 별에 관한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돌아가려고 급급해하지도 않는다. 태평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일관할 뿐이다. 가족에 관한 이야기도 이번에 처음 들었다. 구김살 없이 밝은 주제에 제 이야기는 꼭꼭 숨겨서 하질 않았다.
어쩌면 그래서 물었는지도 모른다. 사람이 관심을 가지면 궁금해지기 마련이니까. 차유진이란 외계인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래빈의 관심사 안에 들어왔는지도 몰라서.
“너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
래빈의 질문에 유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태연자약한 반응에 지레 찔린 건 래빈이었다. 래빈은 유진이 다그치지도 않았거늘 저 혼자 줄줄이 이유를 뱉어냈다. “그렇잖아. 가족도 전부 네 별에 있고, 여긴 진짜 생판 낯선 곳이고. 나 같으면 돌아가고 싶을 텐데. 가족들 보고 싶지 않아? 외계 행성보단 아무래도 모행성이 낫지 않아?”
횡설수설하는 래빈을 두고 유진은 그냥 흠, 했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곤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더니 말하는 것이다. 글쎄, 하고.
“가족들 그리워. 보고 싶어. 그건 맞아.”
유진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래빈은 유진의 얼굴을 뜯어보듯 감상했다. 슬쩍 올라간 입꼬리, 웃느라 접힌 한쪽 애교살, 날카로운 눈매, 푸른 눈. 그러다가 유진이 너털웃음을 짓는다. 웃음과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여기서 살아도 괜찮을 것 같아.”
왜?
“난 김래빈네 별이 좋아.”
갑자기 얼굴이 쑥 다가왔다. 코끝과 코끝이 맞닿았다. 유진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더니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나 그냥 여기서 살까?”
진심이다. 래빈은 드물게도 말의 속뜻을 읽어냈다. 장난스러움 속에 진심을 숨겨놨다. 유진이 반응을 종용했다. “어때? 어떻게 생각해? 나쁘지 않지! 여기 사람들 다 나 좋아해.” 그러며 히히. “김래빈은 어때?” 어떻긴 뭐가 어때. 네가 여기서 왜 살아? 문득 할머니가 떠올랐다. 이 별이 아니야. 우리는 이 별의 사람이 아니야. 돌아갈 거란다. 래빈아. 이 할미는 언젠가 꼭 돌아갈 거야. 말문이 막힌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 것만 같다. 떨어지지 않은 입을 간신히 벌렸다.
“……사람의 본질까진 바꿀 수 없어. 너는 소리를 듣지 못하니까 우리 별에서 살면 살수록 어려운 일만 늘어날 거야. 게다가 사는 별을 바꾼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바보야! 네 별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리 별에선 애초에 우리 말고 다른 행성에 지성 있는 생명체가 사는지도 몰랐고…….”
“Wow. 김래빈 바보야.”
“바보는 내가 아니라 너겠지! 아무리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을 해. 네 별에 남아계실 가족들을 생각하면 넌 그런 말은 추호도 꺼내선 안 돼!”
“우우.”
“기다리실 거야. 다들 너 기다리실 거라고.”
그때 유진이 불현듯 물었다. 그새 장난기가 사라진 눈이 희미한 전등에 빛났다.
“김래빈도 기다려?”
래빈이 입을 다물었다. 저도 모르게 시선을 떨궜다. 단정하게 정리한 악보가 눈에 들어왔다. 머릿속에서 잠잠한 소리가 소용돌이쳤다. 잊을 수가 없는 소리였다.
날씨가 좋구나. ▲에 가기 좋은 날이야. 다녀오마, 래빈아. 할미 없다고 저녁 거르면 안 된다. 알겠지?
래빈이 눈을 떴다. 어스름한 새벽이 눈 위로 쏟아졌다. 꼭두새벽이거늘 센터 곳곳에서 울리는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잠시 눈을 깜빡이던 래빈이 몸을 일으켰다. 고래잡이 축젯날이었다.
이틀 전 최종 악보를 완성했다. 악기 연주자들과 합을 맞추어 세부사항을 조정한 게 바로 다섯 시간 전이었다. 래빈은 자신이 세 시간밖에 자지 못했음을 깨달았으면서도 눈을 비비며 비척비척 침실을 나섰다. 센터에서 사는 사람들은 고래잡이 축젯날이면 모두 이랬다. 다섯 시간 이상 자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러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세수하고 양치하고 옷을 갈아입은 래빈은 굳게 닫힌 건너편 침실을 응시했다. 유진의 침실이었다. 깨워야 할까? 축제는 보통 눈을 뜬 그 순간부터 시작한다. 유진은 그간 축제를 고대해왔다. 어젯밤에도 기대된다며 방방 뛰다가 잠들었다. 래빈은 유진의 방문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유진을 깨우는 것에 장단점을 머릿속으로 백스물한 가지씩 뽑았을 무렵 래빈은 결정했다. 역시 깨워야겠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꼭두새벽 같이 일어난 탓에 좀 적적한 탓이었다.
래빈은 조심스럽게 침실 문을 열었다. 잠가두지 않은 덕분에 문은 소리 없이 열렸다. 조그마한 침실 안엔 일인용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이불 더미가 고른 박자로 오르내렸다. 래빈은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침대 곁자리에 섰다. 그리고 가만히 내려다봤다. 잠든 유진이 거기에 있었다.
내리감은 눈 위로 래빈의 그림자가 짙게 일렁인다. 구김살 없는 얼굴이 편안한 표정으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잠들어 있다. 분명히 호흡한다. 떠들썩하던 소리가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창문 바깥엔 물안개가 자욱하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사위가 고요한 것만 같아서. 래빈은 유진을 내려다보다가 숨죽여 소리했다.
넌 어느 별에서 왔어, 차유진?
대답은 여느 때와 그렇듯 돌아오지 않는다. 잠들었을뿐더러 유진은 래빈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누구의 소리도 듣지 못한다. 유진이 알아들을 수 있는 건 목을 긁고 숨을 들이켜고 혀를 구부려 발음해야 하는 말뿐이다. 래빈은 그 사실을 안다. 안타깝다고 여긴 적은 없다.
네가 헤엄쳤던 바다가 궁금해. 네가 말한 무덤이 어떤 모습일지 보고 싶어. 네 별에선 그리움을 어떻게 견디는지 알고 싶어.
소리로만 전할 수 있는 감정이 있다. 말로만 전할 수 있는 감정이 있다. 래빈은 음과 소리를 일평생 다뤄왔으므로 말하는 순간 깨달았다. 소리로는 전달할 수 없는 무언가가 말로는 닿았다. 말로는 닿을 수 없는 무언가가 소리로는 전달됐다. 소리할 것을 말하면 그건 빈껍데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가끔은, 그저 껍데기에 불과하더라도 마음에 품고 싶어지는 것이 생기기 마련이라서.
네가 살던 별이 궁금해졌어.
그래서 래빈은 소리했다. 유진의 머리맡에 오도카니 서서, 스미는 새벽녘에 찬찬히 물들며. 이 별 어디서든 들리는 파도 소리만이 래빈을 위로하듯 밀려왔다가 쓸려 사라진다. 래빈이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내쉬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던 것도 같다. 남의 별을 궁금해해서는 안 되는데. 죽을 때까지 이 별에 처박혀서 살기로 맹세했는데. 말로 꺼내지 않은 것은 최후의 보루다. 말로 꺼낸다면 정말 돌이킬 수 없어질 것만 같아서 그렇다.
그때 유진이 눈을 떴다.
적막이었다. 유진과 눈이 마주친 순간 래빈은 얼어붙었다. 나쁜 짓을 하다가 걸린 사람처럼 할 말을, 할 소리를 잃었다. 잠기운이 채 가시지 않아 몽롱한 푸른 눈이 래빈을 향한다. 그러다가 유진이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려서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래빈이 침을 삼키며 소리했다.
들었어?
“김래빈 바보야……. 왜 안 깨워. 나 구경했어?”
들렸어? “막 깨우려던 참이었어, 바보야. 일어나. 축제 기대했잖아.”
“우우…… 졸려.”
안 들린 거 맞지? “더 잘래?”
“아니.”
돌이킬 수 없게 되긴 싫어.
유진은 까치집 된 머리를 손으로 대강 흐트러트리며 일어났다. 늘어지게 하품하더니 침대에서 비척비척 벗어난다. 두어 번 눈을 끔뻑이니 진득하게 눌어붙었던 잠기운이 싹 달아났다. 래빈은 거의 존경스러운 눈으로 조금만 기다리라는 유진을 구경했다. 부산스럽게 씻고 옷을 갈아입는 모습만 봐서는 오 분 전까지 꿈나라에 빠져 있던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었다. 네 별에 사는 사람들은 전부 그래? 고민하던 래빈은 조심스럽게 소리해봤다. 유진은 당연하게도 대답하지 않았다.
일어난 지 십 분 만에 준비를 끝낸 유진은 마지막으로 옷매무시를 가다듬은 후 래빈에게 달려왔다. “가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래빈의 손을 덥석 잡는다. 그리곤 방문을 벌컥 열고 뛰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부터 축제 준비로 바빠 예민하던 사람들이 질주하는 유진과 래빈을 보며 와락 웃음을 터트렸다. 래빈아, 조심해. 그러다 넘어진다. 네! 감사합니다! “차유진! 그러다 넘어져! 뛰지 말라니까, 바보야!” 정신없이 날아드는 소리에 전부 대답하며 차유진에게 경고까지 하려니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유진이 멈춰 섰을 때 래빈은 버릇처럼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여섯 시 삼십칠 분이었다. 바닷바람은 잔잔했고 축제를 즐기기 위해 센터로 모인 사람들로 앞마당이 북적였다. 래빈은 꽃과 산호로 화려하게 꾸민 센터를 멍하니 올려다봤다. 고래잡이 축제는 그다지 좋아한 적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열다섯 이후로는.
고래잡이 축제는 기본적으로 가족 단위로 즐기는 축제였다. 가족이라곤 누나 하나밖에 남지 않은 래빈에겐 좀 외로웠단 뜻이다. 게다가 하나뿐인 누나는 할머니가 타계하신 후 미개척 구역 탐사대에 지원했다. 그래서 일 년에 한두 번 보는 게 고작이었다. 누나가 탐사대에 합격해 훌쩍 떠난 열다섯 때부터 래빈은 고래잡이 축제를 매년 혼자 보냈다. 가족들로 붐비는 인파 틈바구니에서 이리 치이다 저리 치였다. 열여덟 때부턴 작곡한 노래를 조율하느라 방에 처박혀 있지도 못했다.
그러니까 달리 말하자면, 누군가와 함께 하는 고래잡이 축제는 거진 십 년 만이라는 거였다. 래빈은 조금 새삼스러운 눈으로 두 눈을 반짝이는 유진을 바라봤다. 하긴. 유진은 축제라면 뭐든 좋아할 것처럼 생기긴 했다. 혼자 다니면 외롭다고 칭얼대겠으나 쟤는 가만히 있어도 사람이 꼬이던걸. 그러고 보니 나는 왜 차유진이랑 같이 있는 거지.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뒤늦게 던진 래빈이 혼란에 빠질 무렵이었다, 유진이 냅다 래빈을 부른 건.
“김래빈! 나 봐봐!”
“왜?”
불쑥 손이 시야에 나타났다. 그리고 머리카락과 귓등 사이에 무언가 억센 것이 얽히는 느낌이 났다. 래빈은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렸다가 손을 들었다. 이게 뭔지는 몰라도 빼버릴 심산이었다. 그런데 유진이 올린 손을 냅다 잡았다. 그리곤 고개를 젓는 것이다. 단호하게.
“안 돼! 빼지 마.”
“이게 뭔데?”
“비밀이야. 음, 선물?”
그리곤 히히 웃으며 잡은 손을 이끈다. 래빈은 반대쪽 손으로 유진이 꼽은 무언가를 만지작거렸다. 엷은 섬유처럼 촘촘히 짜인 무언가가 손에 닿았다. 이게 진짜 뭐지. 한참 만지작거리며 유진의 뒤꽁무니만 졸졸 쫓는데 문득 낯선 것이 보였다. 유진의 귀에 무언가가 꽂혀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팔랑이는 그건 분명 꽃이었다.
고래잡이 축제에서 머리에 꽃을 꽂아주는 전통이 있기는 하지. 온종일 머리에 꽃을 꽂고 있다가 밤중에 바다로 흘려보내는 것이다. 그러면 나쁜 생각은 꽃을 타고 전부 바다로 흘러가다가, 깊은 바닷속에 잠든 고래가 꿀꺽 삼켜준다고. 래빈은 제 귓가에 꽂힌 무언가를 신중하게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확신했다. 이건 꽃이다. 유진은 래빈의 귀에 꽃을 꽂았다.
“꽂아줘서 고마워, 차유진.”
“으응?”
“꽃 말이야. 아니야?”
앞서가며 부산스럽게 사람들을 구경하던 유진이 뒤를 돌았다. 눈을 끔뻑이더니 고개를 갸웃한다. 래빈은 멈춰 선 틈을 타 근처 거울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오른쪽 귓가에 보라색 꽃이 꽂혀 있었다. 꽃을 꽂은 사나운 얼굴이 거울 너머 래빈을 쏘아봤다.
“김래빈 잘 어울려. 근데 진짜 안 어울려.”
“바보야, 그게 뭐야. 둘 중 하나만 해.”
“어쩔 수 없어. 어울리는데 안 어울리니까.”
그리곤 히히 웃는다. 래빈은 유진의 귀에 꽂혀 팔랑이는 꽃잎을 보다가 손을 뻗었다. 유진의 볼을 스치고 꽃잎에 닿는다. 붉은 꽃잎을 한참 만지작거리던 래빈이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안 어울려.”
“거짓말. 나 어울린댔어!”
“대체 누가?”
“어…… 이름은 몰라. 근데 어울린다고 했어.”
“예의상 한 말이겠지, 바보야. 너 안 어울려.”
“나 안 어울려?”
유진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래빈이 어어, 하고 뒷걸음질 쳤다. 얼굴 가까워. 불현듯 귀가 뜨거워졌다. 멀리서도 보이는 붉은 머리칼이며 반짝이는 눈동자. 잘생겼다. 차유진은 객관적으로 봐선 잘생겼다. 사실 꽃이 어울리는지 안 어울리는지는 그다지 중요치 않다. 얼굴이 잘생겼는데 꽃 하나 달았다고 뭐가 대수람.
얼굴을 한참 들이밀었던 유진이 왈칵 웃음을 터트린 건 그때였다.
“김래빈 얼굴 엄청 빨개!”
“가, 갑자기 가까이 오니까 그렇지, 바보야! 타인에게 양해도 구하지 않고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건 예의가 아니야! 상대가 불쾌할지도 모르는 일인데 너는 행동에 조심성이…….”
“우, 김래빈 잔소리.”
“야! 차유진!”
유진이 뛰기 시작한다. 빠르게 멀어지는 등을 멍하니 보던 래빈이 한 발 뒤늦게 땅을 박찼다. 거기 안 서냐고 고래고래 외치자 주위 이목이 쏠렸다. 유진이 뒤를 돌아 혀만 쑥 내밀었다. 달리기는 또 어찌나 빠른지 도무지 잡히지 않는다. 래빈은 주위 사람들에게 죄송하다고 소리하면서도 입으론 착실히 유진을 외쳤다. 익숙해진 센터 사람들은 이제 은은하게 웃기만 할 뿐 유진과 래빈의 술래잡기를 제지하지 않았다.
모든 게 평화롭기만 했다.
래빈은 꼭 붙잡았던 유진의 손을 잠시 놓고 종종걸음으로 발을 옮겼다. 저녁으로 먹을 식사를 사기 위해서였다. 아침은 유진이 샀고, 점심은 적당히 반반씩 냈으니 저녁은 자신이 사야 하는 게 당연했다. 유진이 좋아할 법한 음식들을 두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익힌 물고기에 이런저런 소스를 곁들여 먹는 음식을 골랐다. 유진이라면 분명 이것저것 시도해볼 거라 생각해 소스도 종류별로 구매했다. 먹을 것을 품에 한 아름 안고 뒤뚱뒤뚱 걸으며 래빈은 멀거니 생각했다. 좋아하려나? 좋아했으면 좋겠는데.
돌아왔을 때 유진은 자리에 없었다. 헤어졌던 곳에서 가만히 있으라고 신신당부했는데, 그새 어디로 샜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긴, 유진이 가만히 있으라면 가만히 있는 부류는 아니지. 래빈은 신경질을 내는 대신 익숙하게 발을 돌렸다. 유진은 분명 부산스럽고 정신없는 사람이긴 했으나, 식사를 사러 간 사람을 두고 멀리까지 나가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니 이 근처에 있을 터였다.
축제 부스들 사이를 조심스럽게 살피고 지났다. 수평선에선 아슴푸레한 여명이 지고 있었다. 바람이 불었고 고소한 음식 냄새와 바다의 짠 내음이 뒤섞였다. 래빈은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걸었다.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웃음소리가 귓가에서 아득히 부서졌다.
“……예요. 문대 형은 그럴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그리고 래빈은 들었다. 유진의 목소리였다.
“내가 그걸 몰라서 묻는 것 같냐?”
“아니면 왜요? 난 이해 못 하겠어요.”
물 밀리듯 사방에서 파도치는 소리 속에서 유진의 목소리만큼은 또렷하게 들렸다. 문대 형님과 같이 있나 본데. 래빈은 유진과 박문대가 함께 있을 법한 이유를 속으로 셈하다가 관뒀다. 둘이 무슨 사이인진 모르겠으나 유진이 마음 편히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래빈은 그들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을 심산으로 조심조심 다가갔다. 유진이 담담히 말한 건 그때였다.
“나는 지구에서 왔어요.”
어라.
래빈이 반사적으로 발을 멈췄다. 길거리에 우두커니 서서 눈만 끔뻑였다. 때마침 인파가 우르르 휩쓸리며 구석진 곳에 선 유진과 박문대가 시야에 잡혔다. 유진은 팔짱을 끼고 있었다. 유진의 뒤통수 너머 박문대와 눈이 마주쳤다. 박문대가 눈을 크게 떴다. 래빈이 멍하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여기 사람들은 지구 몰라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 큰일인…….”
“너 지구에서 왔어?”
유진이 화들짝 놀라며 뒤돌았다. 크게 뜨인 눈동자가 몇 번 깜빡이더니 곧 슬슬 시선을 피했다. 래빈은 손에 힘을 주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품에는 아직 유진에게 줄 생선구이가 있었다. 힘을 주었다간 완전히 못 먹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러면서도 래빈은 되풀이했다. “지구인이었어, 차유진?”
“나 기다렸어! 문대 형이 할 말 있다고 부른 거야. 그렇죠?”
“아니, 그렇긴 한데…….”
“그거 뭐야? Fish? 우리 밥 먹어?”
“난 지구가 싫어.”
입술을 지그시 깨문 래빈이 마침내 토해냈다. 목구멍에서 가시가 자랐나. 말 한마디 뱉는데 목이 찢어질 듯 아팠다.
유진이 입을 다물었다. 래빈은 눈을 찡그린 유진의 표정만 멀거니 바라보다가 발을 뗐다. 유진에게 다가가 그의 품에 음식을 떠밀었다. 유진의 손이 허공에서 헛돌았다. 유진은 질문하는 대신 입을 꾹 다물었다. 일자로 다물린 입술을 보다가 괜히 주먹을 쥐었다.
“나 먼저 갈게. 최종 점검해야 해.”
유진은 말이 없었다.
래빈은 직후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걷기 시작했다. 유진은 물론이거니와 박문대조차 래빈을 부르지 않았다. 음악반은 이르게 도착한 래빈을 반기다가 그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랐다. 래빈은 제 얼굴을 만지작거리다가 표정 관리를 포기했다. 원래 험악한 인상이니 그러려니 넘어가 주었으면 하기를 간곡히 바라면서.
래빈은 간단한 출석 확인 후 곧장 최종 점검에 돌입했다. 음이 엇나간 곳도 만족스럽지 않은 곳도 없다. 생각을 지우기 위해 더 몰두했으나 결과적으론 잘된 일이었다. 시계를 봤다. 공연까지 삼십 분 남았을 무렵 래빈은 악기 담당자들에게 허리를 꾸벅 숙이며 소리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센터에서 여는 공연은 고래잡이 축제의 가장 중요한 이벤트인 꽃 띄우기 바로 전 단계나 마찬가지였다. 이때의 분위기가 꽃 띄우기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상당히 중요했다. 래빈은 물론이거니와 음악팀 전체가 정신없이 움직였다. 첫 팀이 무대에 올랐다. 래빈은 무대 뒤를 뛰어다니며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며 모든 요소를 점검했다. 어쩌면 정신이 없기를 바랐는지도 몰랐다.
래빈 씨, 이 부분 조금 더 늘려서 연주하기로 한 거 맞죠?
네! 악보에 그려진 것보다 반 박자 더 늘려서 연주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래빈아, 세 번째 악보 여분 어디에 놨어?
악보 여분 시영 누님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연주에 방해되지 않도록 숨죽인 소리가 오갔다. 래빈은 마른침을 삼켰다. 무대에서 연주자들이 내려왔다. 연주자들 대신 원로회가 올라섰다. 그들이 소리했다. 가벼운 축사였다. 이 뒤론 래빈의 차례였다.
너 잘하는 거 알지?
뻣뻣한 태도를 긴장으로 받아들였는지 선임이 어깨를 툭 치며 소리했다. 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원로회의 축사는 래빈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끝을 맺었다. 래빈은 주먹을 꾹 쥔 채 무대로 올라가는 연주자들을 빤히 바라봤다. 괜찮을 것이다. 괜찮을 것이다. 정말로 괜찮을 것이다. 마감일에 쫓기며 완성하긴 했지만 미흡한 부분은 없었다. 몇 번이고 확인했다. 연주자들도 전부 숙련된 이들뿐이다. 그러니 괜찮다. 정말로.
매년 해왔는데 왜 이렇게 긴장되는지 모를 지경이다. 래빈은 바싹바싹 마르는 입안을 축이며 무대에 눈을 고정했다. 자리에 앉은 연주자들이 제각각 악기들을 정비한다. 이윽고 웅성거리던 소리가 전부 멎는다. 가장 첫 번째 연주자가 현을 튕기기 시작한 것이다.
잠잠한 선율이 울려 퍼지는 순간, 지난 시간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래빈은 유진을 떠올렸다. 항상 활력 넘치는 유진과 비슷한 곳이라곤 없는 선율이었다. 조용하고 부드러웠다. 큰 굴곡이 없었고 흐름이 매끄러웠다. 그런데도 래빈은 유진을 떠올렸다. 연주자들이 튕기는 선율과 파도 소리가 한 데 뒤섞이며 색다른 소리를 토해낸다. 음들의 폭포수 속에서 래빈은 유진을, 차유진을, 외계인을 떠올렸다.
진짜로 이러면 안 되는데. 자신마저 가버리면 누나야말로 정말 혼자가 된다. 남겨진 사람들이 얼마나 외로운지 래빈은 뼈저리게 알았다. 그러니 안 된다. 욕심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자꾸만 궁금해졌다. 호기심도 가지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하물며 그 ▲다. 할머니가 동경하신, 열셋 어느 날 돌연 할머니를 데려가 버린.
무대 너머 사람들을 봤다. 다들 소리 한 점 없이 무대를 응시했다. 개중 툭 불거진 머리통이 보였다. 어둠이 스미는데도 머리칼은 여전히 붉었다. 유진이다. 무대를 바라보던 유진이 어느 순간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외계인이라서 그런가? 유진은 항상 래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기민하게 알아채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유진이 입을 열었다.
이 별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소리했다. 말은 전달 가능한 범위가 터무니없이 작으며 입을 움직여야 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잠수하는 시간이 육지에서 사는 시간보다 훨씬 많은 이곳 사람들에게 말은 사치이자 불필요한 존재다. 래빈에게도 그렇다. 래빈에게도 그랬다. 유진을 만나기 전까진 그랬다.
“❦해.”
래빈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건 마치 사랑한다는 말처럼 들렸다.
이 별엔 도서관이랄 것이 없었다. 땅덩어리가 좁다 보니 모든 것이 적재적소였다. 한 마디로 여분의 공간이 거의 없다는 뜻이었다. 유진이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느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도 때울 겸 대충 들어가 앉아 있을 법한 공간의 부재는 제법 뼈아팠다. 게다가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정보를 얻기 위해 이 작은 센터를 서성일 땐 더더욱 도서관의 부재가 그리워지는 것이다.
유진은 구불구불한 센터 복도를 일정한 걸음으로 나아갔다. 이곳은 소름 끼칠 정도로 고요했다. 사실 별에 소음이라곤 바다가 파도치는 소리와 이파리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음 따위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고 느낀 적이 있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딱히 달라지진 않았다. 이 별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음성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대화했고, 유진은 그들의 대화를 듣지 못하므로 그는 항상 기이한 적막 속에 튕겨 나온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다.
하지만 그게 못 참을 만큼 불쾌한가? 그렇게 묻는다면 또 아니다. 시끌벅적한 대중 틈바구니에 끼어 여태껏 살아왔으나 유진은 나름대로 개인 공간을 중시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그 공간은 조용할수록 좋다. 원래 소음은 어쩔 수 없는 스트레스를 동반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숨죽였음에도 똑똑히 들리는 뒷말을 모르는 체하지 않아도 된다. 그건 상당한 이득이었다. 아무리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한들 가끔 사람은 수군거리는 소리만으로도 신경이 확 날카로워지곤 하니까.
유진의 주위로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하나같이 유진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귀에 들리는 소리는 없었다. 유진도 손을 들어 흔들었다. 구태여 말하진 않았다. 유진 나름의 배려였다. 사람들은 여전히 유진이 목소리를 내뱉을 때마다 흠칫흠칫 놀라곤 했다. 래빈이 곁에 있었더라면 아마 저들이 무어라 소리했는지 알려주었을 것이다. 사실 알려주지 않더라도 표정을 보면 내용이 대강 짐작이 갔다. 래빈은 사나운 인상과는 달리 포커페이스엔 재능이 없었다.
래빈. 구불구불한 복도를 지나 모퉁이를 꺾는다. 김래빈. 나이는 동갑. 험악한 인상과는 달리 천성이 다정한 사람. 래빈은 바다가 싫다고 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아마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자칫하면 말려 죽을 소용돌이까지 치는데 전부 거스르고 자신을 구했다. 자기 목숨 걸어서 남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드물지. 유진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래빈. 김래빈. 이름 모를 별에 사는 외계인.
“어디 가냐?”
제 세상에 푹 빠져 있던 유진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짝다리 짚은 채 삐딱하게 선 박문대였다. 사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별에서 말하는 사람은 김래빈과 박문대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래빈의 목소리는 이렇게까지 부드럽게 나오지 않았다. 유진은 박문대와 눈을 맞추며 어깨를 으쓱였다.
“도서관 찾아요. [여긴 왜 이렇게 구조가 복잡한지 모르겠네요. 길이 죄다 꼬불꼬불해서 내가 메이즈러너 출연진이 된 기분이에요. 도서관이 어디 있는지 알아요?]”
“[도서관은 왜?]”
“[찾아보려고요. 궁금해졌거든요.]”
“[뭐가?]”
유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박문대의 얼굴에선 감정을 읽어낼 수 없었다.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래빈과는 딴판이었다. 사실 이 별에서 가장 수상한 사람을 꼽으라면 그건 험악한 인상의 래빈도, 자신을 영 마뜩잖아하는 원로회도 아닌 저 무표정한 박문대일 것이다. 유진은 박문대의 눈을 빤히 바라보다가 웃으며 말했다.
“[이 별이 지구와 상당히 비슷한 것 같거든요. 아닌가요? 육지가 터무니없이 작다는 사실만 제외한다면 단어도, 말도, 생활 풍습도, 겉모습까지도 전부 닮았어요. 그러면 궁금해지는 게 당연하잖아요. 여긴 과연 별인가? 내가 소용돌이에 잘못 휘말려서 미래로 날아온 것 아닌가? 뭐 대충 그런 상상 말이에요.]”
“[네가 그런 상상을 할 부류 같진 않은데.]”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데 대화한다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살았더니 몽상가가 되더라고요. 월트 디즈니 따라서 유진 이그나시오라는 회사나 세우려는데, 어때요?]”
박문대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슬퍼하는 건지 비웃는 건지 짜증이 난 건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유진은 그냥 어깨를 으쓱이며 되풀이했다. “[그래서,] 도서관 어디 있어요?” 그러자 제 머리를 짜증스럽게 벅벅 긁던 박문대가 등을 돌렸다. 앞서 걷기 시작한 박문대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으며 유진은 생각했다. 이 별은 지구와 터무니없이 닮아있다.
유진이 그간 센터를 들쑤시고 다니며 놀기만 한 게 아니었다. 나름대로 이런저런 조사를 해봤다. 개중 가장 충격적인 건 물밑반 사람들이 유적이라고 부르는 존재였다. 바닷속 깊은 곳으로 잠수해 유진을 이끌기에 호기심이 동했다. 그래서 따라갔더니 물에 잠긴 아파트가 나왔다. 산호와 따개비가 다닥다닥 붙었고 벽은 갈라진 데다가 이미 해양생물의 아늑한 보금자리가 된 지 오래인 듯하지만, 분명히 아파트였다. 사람들은 그걸 일컬어 이파트나 아피트라고 불렀다.
끈질기게 눌어붙던 의구심은 그 시간부로 유진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혼란스럽다는 이유로 무시해왔던 의문점들이 눈에 속속들이 잡혔다. 첫째, 대화가 통한다. 이곳 사람들은 소리라는 매개로 대화하나 말로 바꾼다면 수월한 대화가 가능했다. 보통 외계 행성에 사는 외계인이라면 언어 체계도 완전히 다를 텐데. 풍습에 따라 잊힌 몇몇을 제외한다면 문법도 단어도 똑같았다.
그 외에도 이상한 부분은 넘쳐났다. 래빈이 그리는 악보가 지구의 악보와 엇비슷하다거나, 사람들의 외양이 꼭 지구인을 닮았다거나 하는 생각들. 거기까지 생각한 유진은 반사적으로 래빈을 떠올렸다. 날카로운 눈매, 진한 눈그늘, 뺨에 콕 찍힌 점 따위의 것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히다가 사라진다. 유진은 가볍게 고개를 저어 생각을 흐트러트렸다. 며칠 전 축젯날 래빈이 외친 말이 잠겼던 기억의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한 탓이었다.
“[너 지구에서 왔댔지.]”
그때 박문대의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유진은 박문대의 앞서가는 등을 보다가 가볍게 대꾸했다. “네!” 유진은 지구에서 왔다. 지구에서 태어나고 지구에서 살았다. 뼛속까지 지구인이었다. 그러자 박문대가 한참 말이 없었다. 유진은 박문대의 등만 가만히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이 별은 어디에 가든 잠잠한 파도 소리가 들린다. 그게 꼭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 있는 본가를 떠올리게 했다.
앞서가던 박문대는 이내 커다랗고 새하얀 대문 앞에서 멈춰 섰다. 티끌 하나 묻지 않은 백색 문은 거의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했다. 센터 크기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컸다. 유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별은 참 신기한 게 많았다. 의심할라치면 비현실적인 면모들이 고개를 쑥쑥 들었다. 유진은 재질이 무엇인지 감도 잡히지 않는 문을 만지작거렸다. 손끝에서 반질반질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만져졌다.
“[나도 지구에서 왔어.]”
그때 박문대가 담담히 말했다. 대문을 만지작거리던 유진의 손이 멈췄다. 유진이 고개를 돌렸다. 박문대의 표정엔 흐트러짐이 없었다. 거짓말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게다가 지금까지 봐온 바로, 박문대는 이런 식의 농담을 하지 않았다. 유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박문대를 바라보다가 그냥 웃었다.
“[그래요? 어느 나라?]”
“[한국.]”
“[오, 한국. 좋죠. 나도 재미교포예요.] 그래서 한국말도 할 줄 알잖아요. 이렇게.”
“내가 생각 정리하는 데에 도움이 됐던 정보들은 전부 그대로 있을 거야. 그런데 어디 가서 내가 알려줬다고 얘기하진 말고.”
“안 그래요. 이거 비밀인 거죠? 나도 눈치 있어요.”
“비밀…….”
박문대가 거의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무표정하던 표정에 급격한 피로가 깃들었다가 사라졌다. 유진은 눈썹을 슬쩍 올렸다가 관뒀다. 박문대에겐 박문대 나름의 싸움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 싸움에 유진이 동참할지 안 할지는 이 대문 너머에 있다는 정보에 달렸다. 박문대는 진저리난다는 표정으로 몸을 부르르 떨더니 잘근잘근 씹어 말했다.
“비밀이지. [하여간 그 빌어먹을 원로회.]”
“나 들어가도 돼요? 계속 여기 있을 거예요?”
“아니. 나 바쁘다. 내가 네 보모도 아니고 따라붙을 이유가 뭐 있냐.”
그새 심드렁해진 목소리로 박문대가 대꾸했다. 유진은 그냥 숨죽여서 킥킥 웃었다. 박문대는 대문과 유진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또 한숨을 내쉬었다. 땅 꺼지겠네. 시답잖게 생각하면서도 유진은 참을성 있게 박문대의 말을 기다렸다.
“다 읽고도 궁금한 게 남으면 나 찾아와. 의무실에 있을 거니까.”
“Yup.”
“김래빈한테는 바다에 갔다고 말해둔다. 그래도 너무 오래 있지는 마.”
“걱정 마요. 나 읽는 거 빨라요.”
“그래라. 간다.”
“고마워요!”
박문대는 손을 휘휘 젓고 몸을 틀었다. 그리곤 이내 멀어졌다. 작아지는 머리통을 바라보던 유진은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문을 열었다. 래빈. 김래빈. 지구. 이름 모를 별. 바다. 여기는 바다가 넓다. 이 별에서도 바다는 바다다. 이곳에서 사는 것도 나쁘진 않지. 사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 김래빈 전까지는.
대문은 소리 없이 비틀리며 열렸다. 자그마한 틈 사이로 몸을 구겨 넣고 문을 닫았다. 마침내 주위를 둘러봤을 때 유진은 반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커다란 공간은 텅 비어 있었다. 온통 희기만 해서 어디가 위이고 어디가 아래인지, 이 앞이 파였는지 아닌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정중앙에 덩그러니 놓인 정체 모를 상자만이 유진을 제외하면 유일한 빛이요 색채였다.
컴퓨터였다. 유진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얼마나 오랜 시간 이곳에 방치되었는지 모르나 저건 분명 컴퓨터였다. 비록 유진이 아는 컴퓨터와는 살짝 모습이 다르고, 다른 모습이 과거에서 온 탓인지 미래에서 온 탓인지 구분할 수 없었으나 아무튼 컴퓨터였다. 유진은 신중한 발걸음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세 걸음 나아갔을 무렵 검던 화면에 핏, 하는 소리와 함께 빛이 들어왔다.
-지구인을 인식합니다. 사 제로 사. 성함을 말씀해주십시오.
유진은 대답 대신 한 걸음 내디뎠다. 딱딱한 목소리가 되풀이했다. 성함을 말씀해주십시오. 그러나 이번엔 사족이 따라붙었다. 박, 문대, 님. 재방문하셨습니까? 여기서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 필요한 정보들을 얻었다는 박문대의 말이 떠올랐다. 주위에 정보를 얻을 만한 창구는 눈 씻고 봐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저 컴퓨터가 정말로 정보의 열쇠일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유진은 깊이 숨을 들이켜고 느리게 말했다.
“[.]”
-■. ■님, 반갑습니다. 저는 다중지구 설립 작전, 일명 M.E.F 담당 컴퓨터 메프. 메프입니다. 메프를 찾으신 이유를 말씀해주십시오.
“[……박문대가 뭘 검색했는지 알 수 있어?]”
-박, 문대, 님의 검색 기록 출력.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일. 이. 삼. 사…….
희미한 빛만 새어 나오던 화면에 로딩 창이 떴다. 유진은 혀로 입술을 축이다가 제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로딩 창이 생각보다 빠르게 올라간다. 현실감이 없었다. 당혹스러움으로 가득 찬 바다에 빠진 것만 같았다. 주위가 전부 당혹스러움으로 가득해서 이젠 당혹스러움 그 자체가 무엇인지도 잊은 듯한 기분.
-……팔십육. 팔십칠. 팔십팔. 팔십구.
놀란 건가? 그럴지도 모른다. 자신을 메프라고 소개한 컴퓨터가 앞서 말한 다중지구 설립 작전은 또 무엇인가. 들어본 적 없다. 이곳은 과거인가 현재인가 미래인가. 저 작전이라는 것은 과거에 일어난 일인가, 현재에 일어나는 일인가, 미래에 일어날 일인가. 메프는 딱딱하고 일정한 목소리로 발음했다. 구십칠. 구십팔. 구십구. 그리고 백.
-박문대 님의 검색 기록을 출력합니다.
화면에 기록이 떴다. 유진은 두어 걸음 다가가 컴퓨터 화면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리곤 차근차근 기록을 읽어내렸다.
소용돌이. 다 지역 소용돌이. 해류. 급류. 워프 홀. 연결점. 지구와 피스트리스의 연결점. 지구, 피스트리스, 연결. 사람이 연결점 타고 흘러들어올 수 있나? 최근 기록들은 전부 엇비슷했다. 아마 난데없이 나타난 유진 때문일 것이다. 유진은 기록들을 전부 훑다가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스크롤을 쭉 내렸다. 거기엔 딱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다중지구 설립 작전.
-다중지구 설립 작전에 대해 알고자 하십니까?
날카로운 직감이 시끄럽게 울렸다. 저것이 모든 일의 시발점이다. 그리고 동시에 말했다. 외계 행성으로 떨어지게 된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일 것이다. 유진이 속으로 뇌까렸다. 해결한다면? 해결하면 뭘 어쩌게? 돌아가기라도 할 거야? 메프의 질문이 텅 빈 공간을 메아리쳤다. 유진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응, 하고 발음하는데 문득 래빈이 보고 싶어졌다.
-다중지구 설립 작전에 대해 질문할 경우 출력하도록 안내된 사항이 있습니다. 실행하시겠습니까?
“[실행.]”
메프의 화면에 다시 로딩 창이 떴다. 이번엔 비교할 수도 없이 빠른 속도로 올라갔다. 로딩이 빙글빙글 돌다가 땡, 하는 경쾌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메프가 매끄럽게 말하기 시작했다. 직전의 딱딱한 목소리가 아닌 생기 넘치는 음성으로.
-다중지구 설립 작전, 일명 M.E.F 작전은 2034년 태양계에 존재하는 제0지구에서 각국의 협력 끝에 이뤄진 대규모 인구 분산 작전입니다. 오 년이라는 시간 끝에 M.E.F에 참여한 나라는 각각 지구와 환경이 엇비슷한 행성을 발견, 이후로부터 삼 년간 각국의 주민을 해당 행성으로 이주시키는 데에 성공합니다. 인류는 M.E.F 작전을 통해 다양한 행성에서 부족함 없이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행성을 일컬어 외행성이라고 칭하고자 합의합니다. 여기까지가 입력된 사항입니다.
“[그게 전부야?]”
-입력되지 않았으나 정보 습득 도중 발견한 후일담이 있습니다. 듣기를 원하십니까?
“[응.]”
그러자 메프는 잠시 말이 없었다. 무언가 지직거리는 소리만이 어렴풋이 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프가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의 생기 넘치는 목소리에서 다시 딱딱한 기계음으로 돌아온 음성이 어딘가 소름 끼쳤다.
-2051년 지구에 닥친 기근에 대응하기 위한 정상회의가 소집됩니다. 해당 회의에서 정상들은 각 행성에 흩어진 사람들에게 전달하던 물자를 최소한으로 축소하고자 했습니다. 행성의 대표자들은 모두 강하게 반대했으나 해당 계획은 실행되었습니다. 이후 2058년, 외행성을 둔 나라 중 한 곳이 물자 지원을 완전히 중단합니다. 2062년에는 외행성 중 팔 할이 지급되는 별도의 물자가 끊겼습니다. 개중 몇몇 나라는 외행성이 존재함을 은폐하기 위해…….
메프가 떠들었다. 유진은 가만히 앉아 메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2053년. 언제쯤일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유진은 3세기력 45년에서 왔다. 유진이 태어날 때부터 지구에서 사람들은 그런 날짜를 썼다. 2053년. 얼마나 오래되었는가. 생각보다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무심코 하다가 말았다.
-더 궁금하신 점은 있으십니까?
“[피스트리스 검색.]”
-피스트리스. 대한민국의 외행성. 육지가 15%밖에 되지 않는 작은 행성으로 바다의 해수면이 점점 높아짐에 따라 육지의 비율이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현 위치입니다. 2044년 총 이만, 삼천, 육백. 십일, 명이 이주 완료했습니다. 현재 인구는 삼만, 이천, 오백, 삼십이, 명입니다. 지난 시간 동안 바다가 많은 지형에 적응하기 위해 진화했다는 특이점이 존재합니다. 이는 지구에서 다양한 동물들이 사용하는 초음파와 비슷한 부분이…….
김래빈 있냐?
김래빈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처박았던 고개를 들었다. 초점이 나갔다가 돌아온다. 이지러지는 시야 속에서도 상대를 뚜렷하게 알 수 있었다. 퉁명스러우면서도 어딘가 다정한 소리로 래빈을 부르는 사람은 정말이지 드물었다. 박문대였다.
저 작업실에 있습니다!
아.
박문대가 빠르게 걸어왔다. 래빈은 닫혀 있던 작업실 문을 열어 박문대를 반겼다. 박문대는 예의 흰 가운 차림이었다. 좁은 작업실 바닥에 흩어진 종이와 악보와 필기구 따위를 훑던 박문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래빈은 그냥 멋쩍게 웃기만 했다. 축젯날 이후부터 작업실에 틀어박혔다. 고래잡이 축제가 벌써 사흘 전이니 사흘간 침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는 뜻이었다.
박문대가 곁자리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음에 눈을 살짝 찡그린 래빈은 도로 자리에 앉았다. 박문대는 다리를 꼰 채 책상에 턱을 괬다. 어딘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래빈은 괜히 손가락만 꿈질거렸다. 축젯날 때의 사건을 비난하고자 하신다면 래빈은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었다. 박문대가 버젓이 있는데도 그를 무시했으니까. 사과드려야지, 사과드려야지 하면서도 타이밍이 애매하다는 핑계로 작업실에 처박혔다. 실은 그냥 작업실 밖으로 나가기 두려웠을 뿐임을 래빈도 알았다.
래빈은 괜히 바짝 마른 입술을 축였다. 박문대는 턱을 괸 채 벽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얼굴인데 이상하게 눈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어딘가 멍하신 것 같기도 하고. 기분이 나쁘신가? 뇌까리던 래빈은 어리석은 자식에게 꿀밤이라도 놔주고픈 심정이 됐다. 당연히 기분이 나쁠 것이다. 사과도 안 하지 않았는가. 그것도 사흘 동안!
이틀 남았네.
예?
이틀 남았다고. 팔 월 오 일까지.
뜻밖의 소리에 래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책망하는 소리가 들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러나 기분이 좋아지진 않았다. 박문대가 담담히 발음한 팔 월 오 일이라는 날짜에 래빈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끝이 달력으로 향했다. 팔 월 오 일이라는 숫자 위에는 단정한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래빈이 사용하는 방에 걸린 달력이라면 어디든 팔 월 오 일에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래빈의 유구한 버릇 같은 거였다. 새로운 달력을 받으면 팔 월 오 일에 냅다 동그라미부터 치고 봤다. 무슨 색이든 상관없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펜으로 달력을 붙잡고 펜을 든 손에 힘을 줬다. 꾹꾹 눌러 원을 그리면 궤적이 선명히 남았다. 어느 땐 빨갛고 어느 땐 파랗고 어느 땐 노랗다. 팔 월 오 일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달력을 도로 걸 때면 래빈은 어느샌가 바다를 보고 있었다.
팔 월 오 일은 할머님 기일이었다.
이번엔 어쩔 거냐?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예년과 똑같지 않을까, 하고…….
누나는.
연락이 왔는데 그냥 거기서 기리겠다고 합니다.
그러냐.
네.
박문대가 입을 다물었다. 래빈은 눈을 느리게 깜빡이다가 고개를 들었다. 파도 소리가 들렸다. 밀려왔다가 쓸려가는 포말이 제 몸 부수며 내는 소리가 아뜩하게 맴돌았다.
할머니는 래빈이 열세 살 때 돌아가셨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실종에 가깝긴 했다. 날이 좋다고 나가셨다가 이튿날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으셨다. 래빈은 사흘째 되던 날 원로의 손을 잡고 소리했다. 할머니가 안 오십니다. 대대적인 수색이 이뤄졌다. 미개척 구역을 제외하곤 샅샅이 뒤졌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아무도 없었다. 제일 소리가 큰 사람이 나서서 있는 힘껏 소리를 쏘았으나 돌아온 대답도 없었다. 모든 수색을 중단했을 때가 꼭 팔 월 오 일이었다. 누나는 나이가 차자마자 미개척 구역 탐사반에 지원해서 훌쩍 떠났다.
일 년 후 열넷의 래빈은 할머니의 유품을 상자에 담았다. 그리고 깊은 곳까지 헤엄쳐 들어가 상자를 떨궜다. 둥실둥실 침몰하던 상자는 이내 빛조차 닿지 않는 곳으로 스며들었다. 그때도 꼭 팔 월 오 일이었다. 이후부턴 매년같이 팔 월 오 일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날씨가 좋구나. 래빈이 눈을 깜빡였다. 잔잔하고 고요한 할머니의 소리는 아직도 생생했다. 그때 래빈은 꿈을 헤고 있었다. 부드러운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할머니가 중얼거리셨다. ▲에 가기 좋은 날이야. 다녀오마, 래빈아. 할미 없다고 저녁 거르면 안 된다……. 할머니가 발음하신 ▲가 행성의 이름이라는 것을 이제 안다. 제가 발음한다면 아마도 지-구가 될 것이다. 지-구에 가기 좋은 날이야. 다녀오마. 회오리처럼 머릿속을 뱅뱅 휘도는 할머니의 한 마디.
김래빈.
네.
네 할머니와 차유진은 관련 없어. 차유진이 지구에서 왔고, 네 할머니가 지구에 다녀오겠다고 말씀하신 후 실종되신 건 정말이지 별개의 일이다.
네.
▲라는 공통점 하나로 차유진을 미워하지 마.
미워하는가. 래빈은 대답 대신 고개를 떨궜다. 지구에서 온 지구인 차유진. 지구로 가겠다며 사라지신 할머니. 바다가 싫은 이유. 팔 월 오 일. 래빈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손가락을 얽고 힘을 준다. 아직은 따끈하다. 살아 있었다.
미워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관계가 없다는 것 압니다. 정말 우연의…… 우연이 겹치고 겹쳐서 발생한 불상사라는 것도 압니다. 차유진은 잘못이 없습니다. 차유진은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그냥 뭔가, 좀.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르다. 래빈은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지-구를 좋아한 적이 없었다. 바다를 싫어하듯 지-구도 싫었다. 유진이 지-구에서 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울컥 솟은 건 분노나 배신감 따위가 아니었다. 유진이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나 그냥 여기서 살까? 장난기 어린 질문을 빙자한 진심. 그리고 항상 지-구를 동경하셨던 할머니.
할머니가 평생 ▲를 그리셨는데, 지구인이라는 차유진은 막상 우리 별에서 살고 싶다는 말이나 하니까……. 그럼 할머니께서는 대체 뭐가 되는 건가 싶어서. 그냥 그래서.
…….
죄송합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때 제 행동이 옳지 못했다는 사실을 압니다. 차유진에게도 사과하겠습니다. 문대 형님께도 사과드리려고 했는데, 일이 많아서. ……아니, 그냥, 작업실 나갔다가 차유진 만날까 봐 차마 못 나갔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래빈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꾸벅 숙였다. 박문대는 말이 없었다. 눈을 질끈 감은 그대로 간신히 숨만 내쉬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생각을 입 밖으로 내니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도 같았다.
야, 누가 보면 네가 뭐 대역죄라도 지은 줄 알겠다. 정중한 건 좋은데 이러진 마라, 부담스럽게.
죄송합니다!
아니 그러니까 일일이 사과하지 말라는 뜻이야.
네.
다시 앉아봐.
박문대가 한숨을 쉬며 소리했다. 래빈은 숙였던 허리를 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박문대는 이제 반대쪽 손으로 제 미간을 꾹꾹 누르고 있었다. 성가시다는 태가 팍팍 났다. 래빈은 괜히 또 눈치가 보여 안절부절못했다. 아무리 되짚어도 이건 백 퍼센트 래빈의 잘못이었다. 원래 잘못한 사람이 지레 겁먹고 찔리고 그런 거다. 입술만 잘근잘근 씹던 래빈에게 박문대가 소리했다.
내가 너희한테 이래라저래라할 생각은 없고. 너희도 엄연히 성인인데 둘 관계는 알아서 풀어야지.
네.
근데 딱 하나만, 하나만 말하자.
예?
“그건 딱히 네 잘못도 아니다.”
박문대가 말했다. 담담한 말이 래빈의 고막을 울렸다. 래빈은 박문대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입을 어물거렸다. 그러는 새 박문대는 거침없이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바다가 싫을 수 있어. 지구가 싫을 수도 있다. 싫은데 뭐 어쩌라고. 싫은 걸 억지로 좋은 체하고 가까이할 필요 없다는 뜻이야. 백 명 중 아흔아홉 명이 좋아하고 딱 한 명이 싫어하는데, 그 한 명이 너라고 내가 이상한 건가 생각할 필요도 없어.”
어, 저는, 딱히 그런 생각은…….
“그리고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났다고 해서 네가 그 사람이 사랑하는 모든 걸 억지로 사랑하지 않아도 돼. 취향 차이라는 말이 괜히 있겠냐.”
예?
“너 차유진 좋아하잖냐. 차유진도 너 좋아하고.”
어, 어떻게.
공연할 때 차유진이 너 보면서 고백까지 했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냐?
래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맙소사. 박문대가 알 줄 몰랐다. 아니, 애초에 그걸 들을 줄도 몰랐다. 차유진이 속삭였던, 사랑한다는 말과 비슷한 굴곡을 지닌 단어를 떠올리던 래빈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거 진짜 고백이었습니까? 소리하는데 어쩐지 달달 떨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럼 뭐라고 생각했냐.
아, 아니, 전 그냥…….
차유진 그 바보가! 진짜로 고백일 줄은 몰랐다! 진짜 몰랐다! 방금까지 심각하던 분위기를 깔끔하게 잊은 래빈이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가려진 시야 너머 박문대가 나직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지구 좋아할 필요 없고, 바다 좋아할 필요도 없어. 대신 조건 하나만 걸자.”
예?
“싫어할 거라면 다른 이유를 만들어라. 할머니 때문이 아니라. 죄책감 때문에 싫어하는 건 안 돼. 차라리 바닷물이 짜서 싫다고 해. 지구라는 발음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하거나.”
……어, 음.
죄책감 때문에 싫어하는 건 그냥 너 자신을 싫게 만들어. 그런 건 하나도 도움 안 되니까.
전, 음.
말했듯 네 잘못이 아니니까.
래빈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입술을 연신 축이다가 등허리를 곧추세웠다. 저들끼리 꼼지락거리던 손가락을 바라보던 래빈이 느지막하게 말했다.
“네.”
“그리고 차유진한테는 기왕이면 빨리 사과해라. 원래 사과랑 빚은 미룰수록 갚기 힘들어진댔어.”
얼굴은 진지했지만 목소리엔 장난기가 깃들었다. 래빈은 나직이 웃음을 터트렸다.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어쩐지 차유진이 보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할 말 다 했으니까 난 간다.
아. 네!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감사하면 또 싸우지 마라.
그, 그건 딱히 싸움이라기보단 제 일방적인……. 네! 알겠습니다!
오냐.
박문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을 휘휘 젓고 작업실 문을 열었다. 래빈은 벌떡 일어나 직각으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리고 한참 있다가 허리를 폈다.
자리에 앉아 무심코 돌린 시야에 팔 월 오 일이 잡혔다. 동그라미는 파란색이었다.
래빈은 해변에 드러누운 채 멍하니 생각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무슨 난리를 피우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할머니 기일은 예년처럼 조용하게, 혼자 우울에 침몰하며 기리려고 했다. 열넷인가 다섯 때부터 계속 그렇게 해왔으므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유진이 함께 보내주지 않을까 기대해보기는 했다. 그런데 축젯날 냅다 신경질을 부린 후 제대로 사과조차 하지 못했으니, 우리 관계는 이제 끝이구나 싶어 구태여 묻지도 않았다. 그냥 뼛속까지 자신을 침몰시키려는 농도 짙은 우울감에 허덕이며 눈물이나 좀 찍고, 겸사겸사 코드도 좀 찍고 하며 보낼 생각이었다. 그랬는데.
“김래빈 눕지 마! 체력 약하면 수영 못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왜 자기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쫄딱 젖어 있으며, 왜 차유진은 얕은 물 속에서 첨벙거리고 있으며, 왜 첨벙대는 차유진은 제게 삿대질하며 눕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는 것이며……. 래빈은 이해할 수 없는 점을 하나하나 꼽다가 관뒀다. 정신이 아득했다. 폐부가 쿡쿡 쑤셨다. 너무 오랜만에 숨을 참고 잠수한 탓이었다.
박문대와 대화한 게 바로 어제였다. 사과해야지, 하고 마음먹었으나 작업 중이던 곡은 마무리 지으려는 심산이었다. 그런데 오늘 새벽 유진이 작업실에 들이닥쳤다. 자신을 꺼리는 기색이라곤 티끌도 보이지 않은 채 래빈을 질질 끌고 나왔다. 사람은 빛을 받아야 한다느니 뭐라느니 떠들어대면서 말이다. 래빈은 물음표만 한가득 띄우다가 질질 끌려 나왔다. 정신을 차리니 바닷가에서 물에 첨벙첨벙 젖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대체 왜?
래빈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이것은 유진이 계획한 잔악한 복수인가? 그럴지도 몰랐다. 사과하지 않는 래빈이 답답한 나머지 그를 바닷속에 빠트려 괴롭히려는 계획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유진이 해맑게 웃는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뭐랄까, 래빈을 훈련 시키는 느낌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수영하지 않은 래빈은, 비록 기본기는 탄탄했으나 잠수 시간이나 다리 근육 같은 것이 많이 퇴화했다. 유진은 마치 그것들을 되돌리려는 것처럼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그 결과 래빈은 아침 여섯 시부터 지금까지 잠수와 발장구를 치다가 간신히 뭍으로 기어 올라왔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김래빈, 힘들어?”
“안 힘들겠어?”
“우우. 김래빈 체력 너무 약해.”
“네가 너무 좋은 거야, 바보야!”
저도 모르게 소리를 빽 지르자 유진이 히히 웃었다. 어느새 곁으로 올라온 유진도 등을 보이고 냅다 드러누웠다. 래빈은 가쁜 숨만 몰아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젠 해가 완연하게 뜬 하늘엔 구름이 여유롭게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미안해. 나 멋대로 생각했어.”
그때 유진이 말했다. 담담하고 높낮이 없는 목소리였다. 래빈은 하늘을 바라보다가 고개만 꺾어 유진이 누운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진도 래빈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래빈이 눈을 깜빡였다. 어, 가까워. 코가 맞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했다.
“……뭐가?”
“내일 김래빈 할머니 기일이라서, 김래빈이랑 할머니랑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아.
“이 별은 바다가 무덤이라며. 그래서.”
유진은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타오를 듯한 눈동자가 래빈을 가만히 응시했다. 래빈은 바짝 마른 아랫입술을 반사적으로 감쳐 물었다. 마른침을 삼키는데 유진이 담담히 말을 맺었다.
“김래빈이 수영 싫어하는 거 알면서도 그랬으니까 내가 나쁜 거야. Sorry.”
말을 맺은 유진은 이내 눈을 감았다. 래빈은 눈을 내리감은 유진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틀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바람이 퍽 청량했다. 눅눅하지도 않고 오히려 상쾌했다. 하늘이 푸르렀다. 바다도 푸르렀다. 파도 소리가 들렸다.
“누가 알려줬어?”
“문대 형이. 김래빈 어제오늘 좀 이상해서 물어봤더니 알려줬어.”
“그냥 나한테 물어보지.”
“김래빈 나 피했어. 그래서 못 물어봤어.”
“그건……. 그건 미안.”
“괜찮아! 나 신경 안 써. 근데 김래빈 나 싫어졌어?”
누워 있던 유진이 튕기듯 일어나 앉았다. 젖은 머리칼에 들러붙었던 모래알들이 래빈에게 우수수 떨어졌다. 급작스러운 습격에 래빈이 악을 질렀다. “야! 모래 떨어지잖아!” 우르르 떨어진 모래가 눈을 공격했다. 래빈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데굴데굴 굴렀다. 눈이 따끔거리며 눈물이 배어 나왔다. 모래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두 눈을 비비는데 따뜻한 온기가 뺨을 감쌌다. 눈을 질끈 감은 덕분에 시야가 깜깜한 래빈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러자 목소리가 들렸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괜찮아! 눈 살짝만.”
“사, 살짝? 뜨라고?”
“응, 살짝! 조금만!”
래빈이 욱신대는 눈을 간신히 떴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불투명한 시야가 드러났다. 그리고 동시에 뜨끈한 바람이 눈을 강타했다. 래빈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따끔거리는 느낌이 덜했다. 아, 됐다. 마침내 눈을 제대로 뜬 래빈이 고맙다고 말하려는 순간 헛숨을 삼켰다. 가까웠다. 아까보다도 더. 유진이 있었다. 말 그대로 코앞이었다.
유진이 눈을 감지도 않은 채 래빈을 빤히 바라봤다. 래빈은 눈을 깜빡이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목에 힘을 너무 주지 않았는데도 떨렸다. 왜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제 뺨을 감싼 유진의 손 위에 덮었다. 자연스럽게 손가락이 얽혔다. 파, 파도 소리가 왜 이렇게 시끄럽지. 멍하니 생각하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파도 소리가 아니라 심장 뛰는 소리였다.
“안 싫어.”
“응?”
“나 너 안 싫어해. 싫어진 적 없어.”
유진이 눈을 끔뻑였다. 래빈도 눈을 깜빡였다. 날카로운 눈동자가 래빈을 꿰뚫듯 강타했다. 래빈은 펄떡이는 심장을 막 삼킨 사람처럼 입을 연신 여닫았다. 그러면서도 숨을 꾹 참는다. 그러지 않으면 갓 낚은 생선처럼 힘차게 요동치는 심장이 목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 유진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래빈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유진의 손이 따뜻해서 다행이었다.
“미안해. 그렇게 막…… 내 감정을 일방적으로 털어놓고 가버리는 건 몰상식한 짓이었어. 사과 계속 미룬 것도 미안해. 네가 무슨 생각을 할지 몰라서, 그게 걱정되어서……. 나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눈치가 없다는 평가를 많이 듣기 때문에 오히려 좋지 않은 영향만 끼치게 될까 봐,”
“키스해도 돼?”
“어?”
“나 김래빈한테 키스하고 싶어.”
“어어?”
“해도 돼?”
“어, 어어…….”
아니 잠깐만.
래빈이 정정할 틈도 없었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유진이 훅 가까워졌다. 고개를 살짝 튼 채로 입술이 맞닿았다. 부드러운 입술은 채 마르지 않은 바닷물 덕분에 짠맛이 났다. 유진이 다물린 래빈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동시에 래빈의 머릿속에서 커다란 물음표가 떠올랐다. 잠깐만. 나 지금 차유진이랑 키스하는 거야? 아니 그보다 지구에서도 키스는 키스인 거야?
“잠, 차유, 차유진, 잠깐……!”
“응?”
래빈이 밀어내자 유진은 순순히 떨어졌다. 입술이 떨어지는데 쪽, 하는 외설적인 소리가 났다. 떨어진 유진은 그냥 눈만 깜빡이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아무렇지도 않은, 일견 평온하기까지 보이는 표정이었다.
“갑자기?”
“김래빈이 귀여웠어. 내 잘못 아니야.”
“이상한 핑계를 대면서 상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건 옳지 못한 일이야!”
“우우. 이제 안 귀여워.”
“차유진!”
래빈이 소리를 빽 내지른 것과 동시에 유진이 냅다 래빈에게 안겨들었다. 말이 안겼다지 그건 오히려 몸통박치기에 가까웠다. 갑작스러운 무게에 래빈은 본능적으로 유진의 등에 팔을 두르며 기우뚱 넘어갔다. 그리고 다시 철퍼덕. 모래사장에 파묻힌다. 래빈의 위에 올라탄 유진만 히히 웃었다. 입안에 잔뜩 들어간 모래를 질색하며 뱉어낸 래빈이 들러붙는 유진을 애써 밀어냈다.
이상하다. 몇 분의 씨름 끝에 유진 밀어내기를 완벽하게 포기한 래빈이 멀거니 누운 채 생각했다. 진짜 이상했다. 유진의 체온은 이곳 사람들보다 좀 더 높았다. 따뜻했다. 자신을 꼭 껴안은 유진의 품에 멍하니 안겨 있다가 조심스럽게 기대봤다. 유진이 웃음을 터트리더니 더욱 세게 안았다. 이상하지. 진짜 이상하지. 따뜻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기분이 좋았다. 그게 이상했다. 바로 내일이 할머니 기일인데. 이렇게 기분 좋으면 안 되는 건데.
“안 물어봐?”
“응? 뭘?”
“내가 지구 싫다고 한 이유.”
꼭 안긴 틈 너머 유진의 얼굴이 간신히 보였다. 유진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러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래빈의 목덜미를 파고들며 유진은 태연하게 말했다. “안 물어봐! 상관없어. 김래빈이 먼저 말하기 전까진.” 깔끔한 대답이었다. 래빈은 그냥 유진의 어깨에 무거운 머리통을 내려놨다. 벌써 마르기 시작한 옷자락에 얼굴을 비비며 래빈이 웅얼거렸다.
“조금 있다가 다시 연습할래. 수영.”
“그럴 거야?”
“내일 바다 들어가려면 열심히 해야 해.”
“도와줄게!”
“같이 가.”
“그래도 돼?”
“응. 같이 가자.”
“그러지 뭐.”
래빈과 유진은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햇볕은 따뜻했고 파도 소리가 잔잔했다. 바람은 느긋했고 아득히 들리는 소리가 그들을 부드럽게 감쌌다. 지척에서 들리는 심장 소리에 래빈은 깊이 숨을 들이켰다.
다음 날 래빈은 이른 아침 눈을 떴다. 유진이 바로 곁에 누워 있었다. 말똥한 눈을 한참 뜨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자 유진도 비척비척 일어났다. 까치집 닮아 산발인 머리를 대충 흐트러트려 주니 유진이 히히 웃었다. 래빈도 그냥 웃었다.
래빈과 유진은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잠수복을 받쳐입고 그 위에 헐렁한 티를 걸친 후에야 방을 나섰다. 센터를 둥글게 돌아 샛길로 향했다. 입을 꾹 다물고 말하지 않았다. 솔잎을 헤치고 나아갔다. 푸르고 광막한 바다가 낯익은 파도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래빈은 모래사장을 밟자마자 멈춰 섰다. 새벽 맞은 해변엔 물밑반 몇몇만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래빈은 그들을 방해하지 않고 천천히 걸었다. 유진이 발맞추어 따라왔다. 물가를 걸으며 멍하니 생각했다. 저기 어딘가에 할머니가 게실까. 아니면 지구별로 가신 걸까. 지구에 가시고 차유진을 우리 별에 보내준 걸까. 차유진네 별에서 환하게 웃는 할머니를 생각하니 어쩐지 웃음이 났다.
“들어갈까.”
“응.”
“어딘지 알아?”
“어디든 상관없어.” 어차피 바다는 바다니까.
래빈은 걸쳤던 티셔츠를 벗었다. 단정하게 접고 물에 젖지 않도록 물에 떨어진 곳에 정리했다. 유진도 곁에서 똑같이 했다. 잠수복에 이상이 없는지 꼼꼼히 확인한 후에야 래빈은 조심스럽게 물에 들어갔다. 발목에서 찰랑거리는 바닷물이 유난히 뜨겁게 느껴졌다.
“준비됐어?”
“응!”
“가자.”
풍덩! 귓가에서 수면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바닷물이 김래빈의 감각을 감싸 안았다. 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가 가라앉는다. 래빈은 얕은 수면을 박차고 더욱 깊숙이 나아갔다. 몸이 부유하는 듯한 기분은 퍽 오랜만이었다. 좁은 시야 너머 붉은 머리칼이 일렁였다. 유진은 앞서지도 뒤처지지도 않은 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따라왔다. 머리가 붉어서 다행이다. 새까만 바닷속이어도 유달리 눈에 띄는 색.
수영을 잘한다는 말이 빈말은 아니었다. 유진은 낯선 바다임에도 불구하고 익숙하게 물살을 가르고 헤엄쳤다. 부드럽게 나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이 꼭 잠잠하게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바다는 고요하지 않았다. 바닷속 생물들이 내는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울리고 공명하고 떨렸다. 래빈의 스치듯 지나친 유진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눈을 찡긋했다. 장난스럽고 여유만만한 태도였다.
네 별에도 바다가 있댔지, 차유진.
래빈이 소리했다. 당연하게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유진은 잠시 물속을 배회하다가 다가왔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내려가.’ 혹은 ‘내려가?’ 래빈은 고민 끝에 두 손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다행히도 물음표 붙은 질문이 맞았나 보다. 유진은 별다른 손짓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래빈이 유진을 빤히 바라보자 씩 웃으며 엄지와 검지를 둥그렇게 붙이기까지 했다. ‘난 괜찮아.’ 래빈은 유진이 전하고자 했을 뜻을 어림짐작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발장구쳤다. 바다는 어둡고 깊었다.
나는 네 별의 바다에도 가보고 싶어.
오랜만에 입수한 바다는 기억한 것보다 훨씬 단조로웠다. 물살이 급하지도 않았고 해류에 휩쓸리지도 않았다. 무언가를 집어삼키려는 것처럼 거대하지도 않았고 숨 막히지도 않았다. 한참을 내려가던 래빈이 어느 순간 멈춰 섰다. 유진은 주위를 헤매다가 눈을 깜빡였다.
할머니. 저 왔습니다.
먼 곳으로 소리를 쏘아 보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차유진도 같이 왔습니다. 지구에서 왔다고 합니다.
한참을 고민하던 래빈은 뒤늦게 한 마디 덧붙였다.
저도 지구의 바다에 가보고 싶습니다.
숨이 막혔다. 래빈은 입술을 감쳐 물고는 물살을 박찼다. 수면 위로 올라가는 발짓은 유진이 뒤따랐다. 이번엔 유진이 앞장섰다. 어느 순간부터 유진은 래빈의 손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 뜨거운 바닷속에서도 또렷하게 느껴지는 열감에 래빈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수면을 꿰뚫고 공기와 맞닿은 순간 래빈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폐부가 욱신거렸다. 숨을 고르는데 얼굴에 찬물이 닿았다. 살짝 벌어진 입으로 바닷물이 흘러들어왔다. 떨리는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는데 차유진이 말했다. 기다렸다는 것처럼.
“김래빈, 물속에서 뭐라고 했어?”
들었어?
“소리 말고 말로 해줘.”
아, 하고 목에 힘을 줬다. 짠 바닷물에 목이 갈라지며 통증이 일었다. 래빈은 눈을 찌푸리면서도 더듬더듬 발음했다. “어떻게 알았어?” 유진은 소리하지 못한다. 듣지도 못한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이 소리했음을 알았을까. 놀라서 말하는데 유진이 씩 웃었다.
“김래빈 나 볼 때마다 물 떨렸어. 그래서 알았어.”
그거야말로 생전 처음 듣는 소리였다. 수면 아래서 소리할 때마다 물이 떨리던가. 지금껏 모두가 의식하지 않았던, 의식하지 못했던 사실일 테다. 차유진이 최초였다. 그 미세한 진동을 알아챈 건 차유진이 처음이었다. 래빈은 눈을 깜빡이다가 생각했다. 네 목소리에 목울대가 진동하는 것처럼 내 소리에 물이 진동한 걸까. 그걸 내가 알고 네가 안 걸까. 그렇다면 정말 멋지지 아니한가.
래빈은 잠시 고개를 떨궜다. 머리카락에 고였던 바닷물이 뚝 떨어졌다. 말없이, 소리 없이 고민하던 래빈이 이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래빈의 목울대가 떨렸다.
“이런저런 얘기를 했기 때문에, 무슨 얘기를 했는지 정확히 특정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응.”
“그래도 기억나는 건…….”
헤엄치는 유진을, 생각보다 두렵지 않던 바다를 보며 들었던 생각. 무심코 내뱉었던 소리.
“지구의 바다가 궁금해.”
입을 빠끔거리다가 덧붙였다.
“지구에 가보고 싶어졌어.”
차유진이 웃었다. 래빈은 그냥 우두커니 떠다녔다. 말도 없이. 소리도 없이. 한참을. 유진은 말하는 대신 래빈을 꼭 껴안았다. 따스한 온기가 몸을 감쌌다. 래빈은 축축한 머리를 유진의 어깨에 기대며 깊이 숨을 쉬었다.
“나 다시 다녀올래. 넌 쉬어.”
“괜찮아?”
“괜찮을 것 같아.”
“나 기다려! 천천히 와.”
“너무 오래 기다리진 말고.”
“응!”
유진이 떨어졌다. 마지막까지 짓궂게 웃고는 해변으로 헤엄쳐갔다. 유진이 모래사장에서 일어나는 것까지 눈에 담은 래빈은 깊이 숨을 들이켰다. 그리곤 다시 잠수.
래빈은 이후 한참 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나 돌아갈 거야.”
아침 식사 도중 유진이 불현듯 말했다. 래빈은 밥을 크게 한술 뜨고 입에 집어넣다가 도로 뱉을 뻔했다. 넌 무슨 집에 돌아가겠다는 말을 아침 먹을 때 해, 바보야. 목 끝까지 솟은 말을 꾸역꾸역 삼킨 건 유진이 태연하게 발음한 말의 내용 때문이었다.
돌아간다는 건 아마 지구로 가겠다는 뜻이겠지. 숟가락을 쥔 래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어렸을 적부터 입안에 음식이 있을 땐 말하면 안 된다는 교육은 래빈이 입을 꾹 다물게 했다. 래빈은 입안의 내용물을 꼭꼭 씹어 삼켰다. 그러는 와중 유진은 턱을 괴고 래빈을 구경하다가 활짝 웃었다.
“문대 형이 알려줬어. 돌아가는 방법.”
형께는 존댓말을 써야지. 알려주셨다가 맞는 표현이야. “문대 형께서?”
“나, 여기 오기 전에 수영하고 있었어. 근데, 음, 휘말렸거든. 그러다가 정신 차리니까 이 별이었어.”
그건 알아. “그래서?”
“여기랑 이어져 있대. 김래빈이 나 찾았던 바다랑 내가 사는 바다랑! 그래서 돌아갈 수 있어.”
그래?
“그래서 나 돌아갈 거야.”
왜?
“나 김래빈 소리 듣고 싶어졌어.”
유진은 그러며 히히 웃었다. 래빈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분명 입을 한참 여닫다가 아무 말도 내뱉지 못하는 괴상한 짓을 저지를 것 같아서.
하긴. 당연한 거였다. 차유진은 이 별에 사는 사람이 아니니까. 다른 별에서 온 사람이었다. 외계인이었다. 유진이 래빈에게 외계인이듯 래빈도 유진에게 외계인이었다. 유진은 외계인들 틈바구니에서 한참을 산 것이다. 자연스러워서 잊고 있었던 사실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동시에 맥이 탁 풀렸다. 입맛이 싹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래빈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입만 빠끔거리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언제?”
“일주일 남았어.”
“일주일.”
“응! 일주일.”
너무 짧은 거 아니야? “잘됐네.”
지금껏 함께 지냈던 시간을 떠올리던 래빈은 그냥 생각을 떨쳤다. 지금 생각이 많아 봐야 쓸모없었다. 어차피 유진은 돌아갈 것이다. 외계인을 붙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냥 웃음만 불쑥 났다.
그때 생각에 잠긴 래빈에게 유진이 말했다. “그러니까 나 소원 들어줘.”
싫어. 래빈이 소리하며 말했다. “뭔데?”
“노래 불러줘!”
당연히 싫어. “나 노래 배운 적 없는데.”
“알려줄게. 난 배웠어!”
이상한 데서 고집부리지 마, 바보야. “……말하는 것과 노래하는 건 달라. 발성 기관은 존재하지만,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서 퇴화했을지도 몰라. 말은 할 수 있어도 노래 부르는 건 어려울 가능성이 커.”
“김래빈 목소리 좋으니까 괜찮아. 그리고 굳이 말 아니어도 돼!”
래빈이 입을 다물었다. 유진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자 그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조용히 되묻는데 유진이 밥을 크게 한술 떠서 입에 밀어 넣었다. 그리곤 말했다.
“김래빈이 소리해도 돼. 나 알아들을 수 있어.”
“어떻게?”
“음.”
유진은 잠시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말을 고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래빈은 수저를 내려놓고 기다렸다. 손끝을 가만히 꼼지락거리는데 유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말간 목소리였다.
“지구에선 김래빈네 사람들이 쓰는 소리, 초음파라고 해.” 유진이 태연하게 말했다. “그걸 들을 수도 있어. 귀로는 못 해. 그런데 기계 같은 거 쓰면 들려.”
래빈이 눈을 깜빡였다. 유진의 목울대가 울렁였다. 네가 내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정말 좋을 텐데. 나직이 소리하며 제 목울대를 만지작거렸다. 울렁이지 않았다. 말이 아닌 소리였으니 당연했다. 래빈은 입술을 사리물었다가 조용히 소리했다.
네가 지구로 가면 내 소리를 들을 수 있어?
“그러니까 나, 지구로 가면 김래빈 소리 들을 수 있어!”
유진이 대답했다. 따지고 본다면 그건 대답이 아니지만 래빈은 그냥 대답이노라 생각하기로 했다. 유진이 활짝 웃었다. 입꼬리를 잔뜩 끌어당긴 채 미소했다. 송곳니가 또 빛났다. 번쩍번쩍.
“사람마다 목소리 다 달라. 김래빈 목소리는 낮고 잔잔해. 아주 멀리까지 들려서 좋아.”
그렇냐고 되묻지조차 못했다. 유진은 가볍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덧붙였다.
“그래서 나 어디에 있든 김래빈인 거 알 수 있어.”
래빈은 입을 꾹 다물었다. 말을 끝맺은 유진이 눈을 반짝였다. “안 돼?” 침침한 부엌 전등에도 안광이 반짝반짝 빛났다. 래빈은 유진의 눈을 가만히 보다가 그냥 수저를 도로 들었다. 그리고 입속에 음식을 밀어 넣었다.
그냥 네가 안 가면 안 돼? 내 소리 안 들으면 안 돼? 내 목소리로 만족하면 안 돼?
“이별 선물 대신이면 안 돼?”
유진이 애처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물에 쫄딱 젖은 강아지처럼 눈을 빛냈다. 래빈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소리하는 대신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러자 유진이 웃었다. 아주 활짝. 송곳니를 드러내면서.
“부를게. 만들어서.”
“나 기다릴 거야.”
“너무 오래 기다리진 말고. 적당히.”
“Hmm. 그건 봐서!”
유진이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말했다. 래빈은 그냥 유진을 흘겨보다 말았다.
일주일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났다. 한 사흘쯤 후에 급류 형성이 시작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래빈은 그날 유진과 손을 맞잡고 바닷가를 걸었다. 처음엔 단순한 산책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 가서는 둘 다 쫄딱 젖었다. 발맞추어 걷던 유진이 장난스럽게 물을 튀긴 덕분이었다. 래빈이 곧장 반격하자 장난은 진흙탕 싸움으로 변했다. 쫄딱 젖어서 물살에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입을 맞췄다. 그리곤 또 눈을 맞추다가 웃었다.
또 사흘이 지났다. 래빈은 바닷가 등지에 앉아서 유진에게 악보를 보여줬다. 아직은 미흡하고 밑줄이 많이 그인 악보였다. 미완성이었으나 뼈대는 잡혔다. 이런 노래가 들리면 나인 줄 알아, 하고 말하니 유진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악보 안 보여줘도 김래빈인 거 알아.” 당당한 유진의 말에 그렇게 자만하지 말라고 잔소리했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그날은 해가 질 때까지 밖에 앉아 있다가 깊은 밤이 되어서야 방으로 돌아왔다.
딱 일주일째 되는 날 래빈은 꼭두새벽에 일어났다. 씻고 아침을 먹고 잠수복을 입었다. 유진과 입을 맞추고 혀를 섞다가 장난스럽게 이마를 부딪쳤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여상스러운 아침이었다. 키득키득 웃다가 서로 한참을 안고 있었다. 열기에 녹아내릴 때쯤이 되어서야 래빈과 유진은 방을 나섰다. 그리고 걷기 시작했다. 센터 가장자리를 둥글게 돌고 소나무 샛길을 가로질러서. 광막하게 드러난 바다,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을 잠시 구경하다가 겉옷을 벗었다.
“나 놓치지 마.”
“안 놓쳐!”
긴말은 필요치 않았다. 허리까지 잠기는 곳에서 래빈은 산소호흡기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몸에 힘을 풀었다. 몸을 뒤로 눕히자 수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풍덩! 적막 어린 바다를 깨트리며 두 외계인은 침몰했다.
바다는 여상스럽게 고요한 소음에 잠겨 있었다. 래빈은 틈틈이 멈춰 서며 유진을 살폈다. 래빈은 유진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아래로’ 혹은 ‘아래로?’ 유진은 래빈이 자신을 볼 때마다 엄지를 치켜들었다. ‘난 괜찮아’. 사실 엄지 든 게 정확히 무슨 뜻인진 모르겠으나 장난기 어린 표정을 보고선 대충 그 엇비슷한 뜻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어느 정도 깊숙이 들어간 순간 래빈은 해류의 흐름이 바뀌었음을 깨달았다. 그때와 같았다. 난데없이 휘몰아치던 급류, 숨이 벅찰 정도로 강하던 압력. 래빈이 이를 악물고 헤엄쳤다. 유진이 뒤따랐다. 그래도 역시 잠수복 입으니 한결 편하네. 다음번엔 꼭 챙겨입어야지. 사실 다음은 없을 가능성이 크지만 래빈은 시답잖게 그런 생각이나 했다.
그리고 마침내 래빈이 멈췄다. 뒤따라 오던 유진이 곁에서 자맥질을 멈췄다. 멀지 않은 곳에선 거대한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여기야.
래빈이 소용돌이를 가리켰다. 유진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겠어? 래빈이 소리했다. 유진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대답일 리는 없지만 그 또한 대답이노라 생각하기로 했다. 래빈이 조금 물러났다. 유진은 부드럽게 나아갔다. 소용돌이가 당장에라도 그를 집어삼킬 듯 팽창했다.
소용돌이에 휘말리기 직전 유진이 뒤를 돌았다. 희뿌연 물속에서 래빈과 눈을 마주쳤다. 유진은 웃으며 제 귀를 톡톡 두드렸다.
‘들려.’ 혹은 ‘들려?’
응.
래빈이 소리했다. 둘 중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부드럽게 쏘아 보낸 소리와 함께 유진은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리며 점멸했다.
*
해양연구원 I는 제 눈 앞에 펼쳐진 괴상한 그래프를 보며 허허 웃었다. 이런 X발. 선임이라는 자식이 이딴 그래프를 분석하라고 떠넘겼다는 사실에 복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내가 애쓰고 악써서 분석해놓으면 또 알맹이만 날름 챙겨가겠지, 그 썩을 놈. 흐름은커녕 공통점도 찾기 힘든 산발적인 데이터를 노려본단 I가 책상을 내리치려는 순간 문이 열렸다. 반사적으로 주먹에서 힘을 뺀 I가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고 안도했다. 동료 연구원 유진이었다.
모두가 유진이라고 부르는 연구원, 그 이름하여 유진 이그나시오 차.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 출신이라는데 왜 대한민국에 처박혀 있는지 모를 인재. 게다가 유진은 이 바닥에서 유명인사였다. 일 년이라도 이 바닥에 발을 담가봤다면 유진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십 년이 넘었던가. I는 유진을 단번에 유명인사로 만들어준 사건을 가만히 회상해봤다.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난 정체 모를 소용돌이가 있었다. 물놀이 중이던 사람들은 급하게 대피했으나 운이 더럽게도 없던 남자 하나는 휘말려서 그대로 실종됐다. 대대적인 수색 끝에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던 탓에 모두가 내심 남자가 죽었노라 생각했었다. 하필 실종자가 미국 국적이었던지라 외교 문제로까지 번질 뻔했기 때문에 더 난리였는지도 몰랐다. 그러다가 반년쯤 후에 다시 소용돌이가 생겼다. 매스컴에 두들겨 맞을 대로 맞은 정부 덕분에 두 번째엔 대응이 빨랐다. 아무도 휘말리지 않았다. 소용돌이가 잦아들었을 때 모두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이변은 바다가 잠잠해진 후에 생겼다. 반년 전에 실종됐던 미국 국적의 그 남자가 불쑥 수면에서 솟아난 것이다. 그것도 생전 처음 보는 재질로 만들어진 잠수복을 입고서.
그랬다. 한동안 매스컴을 뜨겁게 달궜던 소문의 미국 국적 실종자가 다름 아닌 유진이었다.
유진은 구조 후 곧장 미국으로 돌아가더니 두문불출했다. 인터뷰는 죄다 거절했고, 지인이니 친구니 하는 불분명한 정보가 퍼지다가 주작이라는 반박에 침몰하길 거듭했다. 사람들의 관심이 한창 절정을 찍을 무렵 유진은 딱 한 군데에 인터뷰를 나갔다. 그리고 채 식지도 않았던 관심에 냅다 기름을 부었다. 인터뷰에서 한 말들이 십여 년 흐른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라며 자자하니 말 다 한 것이다.
Q. 실종 처리되셨던 동안 어디에 계셨나요?A. 글쎄요. 바다가 아주 예쁜 곳이었어요. 돌아오기 아쉬울 정도로 말이에요.
인터뷰로 대형 폭탄을 터트린 유진은 이후 한국으로 날아와 사설 해양연구소에 입사했다. 그리고 당당히 요구했다. 나 초음파 연구할래요! 갓 입사한 새내기 주제에 당당히 주장하는 모습은 올 타임 레전드니 뭐니 하며 연구원들이 심심할 때 씹는 안줏거리였다.
올해로 유진은 입사한 지 삼 년이 됐다. 거기까지 회상한 I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유진을 뜯어 살폈다. 새빨간 머리, 새파란 눈, 대충 걸친 가운 따위가 눈에 부산스럽게 잡혔다. 유진은 느지막하게 일어났는지 연신 하품이나 해댔다. 어젯밤에도 늦게 잔 게 분명했다. 유진은 새로운 주파수의 초음파가 관측될 때마다 날을 꼬박 세며 무언가를 연구하곤 했다. 문제는 그걸 선임들한테까지 안 알려준다는 것이다. 일 년 차까지는 선임들이 간섭했다. 너 그러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눈치를 줬었다. 그런데 삼 년쯤 되니 선임이고 연구소장이고 그냥 내버려 뒀다. 쟤 하지 말라고 해봤자 말을 귓등으로 들어. 소장이 내린 심드렁한 선언에도 유진은 그냥 씨익 웃었더랬다.
I는 잠시 고민했다. 알아서 제 할 일 찾아가는 유진에게 말을 건네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유진은 새로운 주파수의 초음파라면 눈을 까뒤집고 달려들었다. 그렇다면 이 난해한 데이터를 분석하는 데에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유진이 새로운 주파수에만 집착해서 그렇지 실적은 굉장히 좋은 편이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I는 그냥 말 한 번쯤 붙여보고 싶었다. 그야 차유진이니까. 그 유명한 이그나시오 차니까. 삼 년 동기이거늘 제대로 대화해본 적이 손에 꼽았다는 사실까지 뇌까린 I는 한숨을 푹 쉬었다.
잠시간의 고민 끝에 I는 의자에 널브러지듯 앉아 모니터만 딸깍거리는 유진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어제도 늦게 잤어?”
“Hmm? 나?”
“응.”
유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젠 너무 바빴어. 선배가 나한테 이상한 거 줘서.” 유진이 말하는 이상한 것은 I의 손에 들린 이상한 것과는 달랐다. 그거야말로 선임이 귀찮아서 떠넘긴 잔업일 터였다. I는 속으로 유진에게 떠넘겼던 잔업이 엉망으로 처리되어 상부에 올라가고, 결국 그 선임이 팀장에게 쓴소리 들을 거라는 데에 얼마 전부터 나기 시작한 제 흰머리를 걸다가 말았다. 대신 다리에 힘을 주어 땅을 밀었다. 바퀴 달린 의자가 살짝 덜컹거리며 유진에게 가까워졌다.
“그, 네가 새로운 주파수 좋아한다는 거 알거든. 그래서, 어…… 물론 내 일을 떠넘기려는 건 아니고. 혹시 네가 관심이 있으면 같이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응.”
유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I는 살짝 틀어진 얼굴에서 일말의 희망을 읽고 잽싸게 서류를 유진의 눈앞에 들이댔다. 다급함과 당황스러움과 부끄러움이 한 데 뒤섞인 덕분에 혀가 풀렸다. 조리 있는 말 대신 횡설수설이 튀어나왔다. I는 제 귀가 벌게지는 것을 느끼며 속으로 뇌까렸다. 아 젠장. 망했네.
“……아무튼, 8월 16일이랑 9월 3일에 관측된 주파수인데……. 고래의 초음파라고 추측은 했지만 그게 전부야. 모습을 드러낸 적도 없고, 이 헤르츠의 주파수라면 같은 고래들끼리도 대화는 불가능할 테지. 너도 알다시피 오십이 헤르츠는 고래들끼리 소통하기에도 너무 낮으니까, 이 경우엔…….”
“[찾았어.]”
“응?”
쟤 지금 뭐라니? I는 순식간에 제 손에서 종이를 채간 유진을 허망하게 바라봤다. 유진은 정신없는 오십이 헤르츠의 데이터가 빼곡한 서류를 뚫어지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눈이 파랗게 타올랐다. Found it? 유진이 직전 중얼거린 영어를 되짚던 I가 눈을 찡그렸다. 찾기는 뭘 찾아?
그러나 I의 의문은 채워질 틈도 없이 새로운 의문에 밀려났다. 서류를 한참 노려보던 유진이 고개를 들어 대뜸 말한 것이다.
“이거 나 줘!”
“어?”
“내가 할래. 안 돼?”
“어, 그래도 돼?”
“내가 할 거야. 그래도 되지?”
“어, 어어. 그렇긴 한데.”
속을 썩이던 데이터고, 사실 선임도 제게 떠넘기듯 맡긴 거라 누구 손에 흘러 들어가든 상관은 없었지만……. I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유진을 살폈다.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건가? 얘 진짜 뭐지? 정체 모를 주파수만 찾아 격파하는 취미를 가진 변태? 유진이 안다면 질색할 괴상한 상상을 나열하며 I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환호하는 유진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리는 건 덤. 아무래도 상관은 없지 않을까. 어차피 쟤가 낯선 주파수 좋아한다는 건 연구소의 모두가 아는 사실인데.
“이거, 이거 녹음본 있어?”
“아. 어. 보내줄게. 기다려.”
I는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데이터를 컴퓨터에 옮기기 시작한 유진에게서 슬금슬금 멀어졌다. I에게는 할 일이 저 괴상한 데이터 말고도 산더미였다. 제 책상에 도착해 녹음본을 전송하는데 유진이 중얼대는 소리가 들렸다.
“[기다렸어, ✽. 나 알아봤어.]”
I는 유진이 중얼거린 단어에 눈을 찡그렸다. 그건 도무지 한국어 같지도, 영어 같지도 않았다. 가장 비슷한 발음으로 만든다면 아마 김-래-빈 정도가 될 것 같은데. 그렇다면 김래빈은 누구지? I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았다. 어차피 상대는 유진 이그나시오 차였다. 고민해봐야 본전도 못 건질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여기선 그냥 모르는 체하고 제 일에만 집중하는 게 최고였다. I의 눈이 서류에 빼곡히 그려진 주파수를 바삐 오갔다. 서류는 지난해 발신기를 붙였던 돌고래 무리의 경로가 수정된 것 같다는 정보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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