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GRB

사건의 지평선

<span class="sv_member">o-ri</span>
o-ri @admin
2025-11-29 21:39






제 이름은 김래빈. 나이는 아마도 스물여섯. 여기는 제4지구 기억보관소.

이 모든 기록을 저장하기에 앞서 듣고 있을 당신이 명심해야 합니다. 바로 이 녹음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을 거라는 점입니다.

저는 미래를 예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거나, 아니면 미래에서 온 당사자라거나 하는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지 않습니다. 때문에 당신이 오래된 녹음이라는 제 말을 의심할 여지는 충분합니다. 하지만 저는 확신합니다. 셈하자면 조금 과장해 천문학적인 시간이 지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확신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제가 현재 녹음을 남기는 제4지구 기억보관소는 블랙홀 속이기 때문입니다.

훗날의 당신이, 혹은 당신들이 블랙홀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식견이 다소 짧고 설명에 능하지 않아 블랙홀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이론적으로 설명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혹여 당신께서 블랙홀이 무엇일까 궁금해할지도 모르니 남깁니다. 절대적인 기준은 결코 아님을 다시금 명시합니다.

제게 블랙홀이란 별의 잔해입니다. 폭발한 별이 남기는 흔적 같은 것입니다. 빛조차 빨려 들어가 출구 없는 어둠을 뱅뱅 돌게 만드는, 한때 이곳에 별이 존재했음을 알리는 발자취입니다. 블랙홀마저 소멸한다면 그제야 별은 모두에게서 잊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께선 또다시 의문을 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4지구 기억보관소는 엄연한 지구의 한 장소일진대 어떻게 폭발한 별의 잔해가 남아있느냐며 따지고 들지도 모릅니다. 세상이 한 번쯤 망할 확률이 몹시 높으나, 천문학적인 확률로 그러지 않고 인류가 끝없이 발전했다면, 게다가 이 기록을 발견한 당신이 천체물리학 관련 종사자라면 더더욱 말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그 질문, 의심, 혹은 추궁에 이렇게 되묻겠습니다.

천문학적인 시간이 흐른 그때의 지구엔 여전히 초능력자가 있습니까?

이상한 질문이라 생각할지 모릅니다. 초능력자의 씨가 마르고 그들이 존재했음을 알리는 기록마저 말소되어, ‘초능력자’의 존재가 무엇인지를 두고 싸워댈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오히려 당신들이 초능력자란 무엇인가, 하는 주제로 열띤 토론을 벌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존재 자체가 잊혔다는 사실마저 망각 되었다는 증거니까요.

그렇습니다. 저는 초능력자의 존재가, 그들이 살아 있다는 증거 하나하나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소실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로소 제4지구 기억보관소에 있습니다.

방금 제 발언으로 인해 초능력자란 존재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면, 부디 바라건대 다시 잊어주십시오. 당신께서 살아가는 세상이 어떠한 모습으로 빚어졌는지 저는 아는 바가 없으나 어떠한 형태로든 초능력자란 존재는 모두에게 해가 될 뿐입니다. 그들은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자들인 동시에 누구보다도 절실한, 그저 하나의 인간이자 존재일 뿐인, 모순적인 두 가지 속성을 품은 채 아득바득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들으셨다면 짐작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일 당신 머릿속에 제가 앞서 언급한 블랙홀에 관한 궁금증과 그 대답이 떠올랐다면, 그렇습니다. 아마도 정답일 겁니다.

제4지구 기억보관소에 남은 블랙홀은 별의 흔적이 아닙니다. 그건 별이라고 비유되었던, 그러나 기어코 진짜 별이 되어버린, 한 초능력자의 잔해입니다. 제가 기억보관소를 뒤집어엎으면서까지 녹음기를 찾아낸 이유 또한 그에게 있습니다.

제 이름을 잊어도 좋습니다. 제 나이를, 제가 녹음을 남기는 이 장소를, 이 녹음 자체를 까맣게 잊어버려도 좋습니다. 다만 부디 청컨대 기억해주십시오. 제4지구 기억보관소에서 폭발해 죽어버린 초능력자, 혹은 인간, 혹은 별이라고도 불리던 그를.

그의 이름은 차유진. 사망 당시 나이는 스물넷. 사망한 장소는 제4지구 기억보관소.

지금부터 저는 제가 기억하는 그의 모든 것을 녹음합니다.



초능력자는 차유진과 제가 열 살 무렵에 처음 나타났습니다. 연도를 말씀드린다면 피차 편하겠으나 아마 제가 사용하는 달력과 당신이 사용하는 달력은 큰 차이가 있을 것 같으므로 생략하겠습니다. 사실 시간을 세는 단위조차 다를 가능성 역시 있습니다만, 이는 당신을 기점으로 과거에 사는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므로 제 기준에 맞추어 설명하겠습니다.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자신을 초능력자라고 밝힌 최초의 능력자는 샘 스미스였습니다. 다소 평범한 이름을 지닌 샘은 언론 앞에서 초능력자의 존재를 공표하곤 초능력자 공동 보호 위원회를 설립했습니다. 그의 능력까진 기억나지 않으나 아마 그다지 쓸모있는 능력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샘 스미스는 차유진과 제가 열다섯이 될 무렵 암살당했으니까요.

저는 열네 살 당시 음악에 한창 빠져 있었고, 바다를 건너 전학 왔다는 차유진은 제 음악을 몹시도 좋아해 주었습니다. 첫 만남 자체는 데면데면했습니다. 사실 지금에 와서 생각하자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저와 차유진은 모든 면에서 상반되었기 때문입니다.

차유진은 빨갛게 물들인 머리카락을 고수했습니다. 나이가 몇인데 벌써 염색이냐며 타박을 들어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차유진은 항상 사람들을 이끌고 다녔고, 전학 오기 전에는 미식 축구부에서 쿼터백을 맡았다고 합니다. 미식 축구와 쿼터백에 관한 설명은 자신이 없으므로 생략하겠습니다만, 스포츠의 일종에서 주장을 맡았다고 생각해주시면 되겠습니다.

반면 저는 다릅니다. 당시 저는 제 세계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에 교우 관계가 넓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제 입으로 말하기엔 좀 뭣하지만, 인상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닌지라 아이들이 설설 피하기도 했습니다. 차유진은 전학 온 지 일주일 만에 전교생에게 얼굴과 이름을 알렸습니다. 저는 졸업 직전까지도 저 음침한 애는 누구냐는 소리를 심심찮게 들었습니다.

물과 기름 같던 차유진과 제가 친해지게 된 계기는 사실 사소합니다. 앞서 말했듯 작곡에 한참 빠졌던 제가 피아노로 자작곡을 치는 모습을 차유진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엉성하기 그지없는 노래지만 차유진은 그런데도 눈을 반짝이며 좋아했습니다. 저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턱이 낮은 창문가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제목 뭐야? 진짜 좋다!” 하며 히히 웃음을 터트리던 모습을요.

당시 차유진과 저는 열넷이었고, 초능력자의 존재가 정식으로 공표된 지는 어언 사 년이 지난 채였습니다. 또한 차유진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전학을 와 한국말이 서툴렀고요. 참고로 미국은 제5지구에 속합니다. 현재 사용하는 지도를 설명하기엔 말이 너무 길어질 것 같으니 당신께서 직접 추측해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다시 이야기를 재개하겠습니다. 솔직히 말해 차유진의 첫인상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았습니다. 열넷이나 먹은 주제에, 비록 지금 생각하면 열 살이든 열네 살이든 거기서 거기지만 그때 당시엔 제가 상당한 어른인 줄 알았기 때문에, 해사하게 웃는 차유진은 좀 바보 같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좋게 말하면 너무 순수해 보였고 나쁘게 말하면 어린애 같았습니다. 참고로 나잇값 못한다는 말은 차유진을 일평생 따라다닌 말입니다. 그러니 딱히 제 첫인상이 틀리진 않았다, 이 말입니다.

처음 만난 그날은 땅거미가 뉘엿뉘엿 지던 여름이었습니다. 우렁찬 매미 소리마저 잦아드는 저녁에 차유진은 창문을 넘어 음악실로 침투했습니다. 그리곤 외쳤습니다. “나도 알려줘!” 열넷의 김래빈은 퍽 당황한 채로 피아노에서 손을 뗀 채 대꾸했지요. “뭐를?” 차유진은 당당하게 피아노와 저를 번갈아 손가락질하더니, “그거.”라는 불분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제 자작곡은 피아노 초급자가 배우기엔 상당한 난이도가 있었던지라 저는 거절했습니다. 첫인상도 그다지 좋지 않은 데다가 성격까지 가벼워 보이니, 엮이면 귀찮아지기 십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생각이 아예 틀리진 않습니다. 저는 그날의 만남으로 인해 차유진과 지독하게 얽혔으니까요. 하지만 후회하느냐 묻는다면 그 또한 아닙니다.

하지만 차유진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거절하면 자연스럽게 흥미를 잃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차유진은 끈질기게 제게 피아노를 가르쳐달라며 요구했습니다. 한참을 씨름하다가 먼저 포기한 건 저였습니다. 차유진은 고집이 몹시 셌거든요.

저는 차유진을 옆자리에 앉히고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알려주고 흰 건반과 검은 건반의 차이점을 짚어줬습니다. 그리고 가볍게 떴다 떴다 비행기를 연주해준 후 마디마디씩 가르쳐주었지요. 차유진은 놀랍도록 흡수가 빨랐습니다. 경비 아저씨께 인제 그만 돌아가라는 권유를 세 번째 받았을 무렵엔 떴다 떴다 비행기를 완전히 익혀버렸으니까요.

그날 이후로 차유진은 매일 저녁 음악실로 찾아왔습니다. 서너 시쯤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모여 축구나 농구를 몇 판씩 벌인 후 땀에 젖은 채 음악실 문을 열었습니다. 좁은 피아노 의자에 붙어 앉으면 눅진한 땀 냄새가 났습니다. 스치는 살은 땀으로 끈적했으나 기분이 나쁘진 않았습니다.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났습니다. 차유진은 처음 음악실로 넘어온 그 날부터 정확히 한 달하고도 일주일 후 제 자작곡을 능숙하게 칠 수 있게 됐습니다. 어긋난 박자도, 잘못 친 건반도 없이 깔끔하게 마지막 음에서 손을 뗐을 때 차유진은 저를 바라봤습니다. 저도 차유진을 보았습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모든 준비가 한 달하고 일주일 전에 끝났다면, 시작은 그날이었습니다. 차유진과 저는 한참을 바라보다가 거의 동시에 손을 뻗었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뒤통수를 부여잡고 서툴게 입술을 맞대고, 달뜬 숨을 들이켜고 뱉기를 반복하던 그 날엔 배경음악처럼 희미한 풀벌레 소리가 났습니다.

처음 입술을 부딪친 이후 차유진과 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차유진은 십 분이라는 짧은 쉬는 시간 동안 저를 보기 위해 계단을 한참 오르내렸다는 점입니다. 저 역시 점심시간 때 차유진을 보기 위해 급식을 거르고 운동장 벤치에 앉아 있는 날들이 늘어났다는 점일까요. 차유진은 따사롭고 권태로운 낮의 햇살 속에서도 폭발적인 에너지를 내며 뛰어다녔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납니다. 돌이켜 보자면 열넷, 열다섯의 우리가 가장 행복했을 것 같습니다. 고민이랄 것이 별로 없었으니까요. 기껏 해 봐야 가까운 고등학교에 배정받느냐 마느냐가 관건이었을 뿐입니다.

차유진과 저는 열여섯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관계는 친구라는 이름보단 애인이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렸습니다. 차유진은 가까운 공학에 지원서를 넣었고 저는 조금 더 먼 사립에 지원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지원했던 고등학교에서 떨어져 차유진과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불합격 문자를 받고 넋을 놓은 절 보며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못하던 차유진의 얼굴이 생생합니다.

사건은 열일곱 초봄에 터집니다. 까놓고 말해서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수많은 신호가 있었습니다. 기억나는 것을 몇 가지 말해볼까요. 첫째, 앞서 말했던 최초의 초능력자 샘 스미스가 암살당합니다. 제1지구에 속하는 어느 나라의 짓이었습니다. 둘째, 샘 스미스의 암살 사건 이후 초능력자 공동 보호 위원회와 국가 사이의 알력 싸움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초능력자는 국가들이 엄선해 키운 군대를 순식간에 뒤집을 힘이 있었고, 보호 위원회는 그런 초능력자들의 신임을 등에 당당히 업은 채였으니까요.

뉴스는 연신 위원회와 국가 간의 충돌을 보도했습니다. 사람들은 다소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초능력자들의 위치는 애매해지기 시작했고요. 그들 다수가, 비록 국가에 속하나 동시에 초능력자 공동 보호 위원회에 가입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위원회 간부들과 국가들의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하자 초능력자들은 이도 저도 못 한 채 싸우는 둘 사이에 끼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열여섯 한겨울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 같은 이야기는 그냥 별나라 이야기였습니다. 초능력을 발현하면 위원회에 빼앗기기 싫은 국가가 나서서 곧장 데려간다는 소문도, 국가에서 데려간 초능력자들은 전부 인간이 아닌 하나의 자원처럼 사용되다가 버려진다는 가십조차, 전부 말입니다. 열여섯의 저는, 열여섯의 김래빈은 아직도 한창 음악에 빠져 있었습니다. 당시 제 곡들은 인터넷 사이에서 심심찮게 인정받고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차유진까지 응원하니 거리낄 것이 없었습니다.

열일곱 초봄까지 저는 차유진과 제가 어엿한 어른이 되어 함께 음악 관련 종사자가 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차유진에겐 눈부신 재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눈을 뗄 수 없는,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모른다는 말을 간과한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벚꽃이 흐드러지고 개나리가 만발한 계절에 차유진은 초능력을 각성했습니다.

중력 조작이라는 초능력을 처음 들었을 때 생각보다 많이 놀라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오히려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차유진 근처에 다가갈 때마다 빨아당기는 듯 느껴졌던 무형의 힘에 이름이 붙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차유진은 캘리포니아에 사시는 가족들께 결과를 통보한 후 곧장 저를 찾아와 말해주었습니다. 초능력을 각성했으며 그 이름이 중력 조작이라고요. 환하게 웃는 차유진의 뒤로 태양이 번쩍이고 있었기 때문에, 저는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떨궈야 했습니다.

차유진은 제게 결과를 알린 후 정확히 사흘 뒤 자퇴했습니다. 얻어듣기론 능력 등급이 터무니없이 높아 평범한 일상을 영위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시한폭탄을 꽉 막힌 고속도로 위에 던져놓는 것과 비슷하다며 말입니다. 차유진은 집을 비우고 정부 기관에 들어가기 전날 저를 찾아왔습니다. 눈을 마주쳤고 이마를 맞댔습니다. 서로를 끌어안고 연신 입을 맞추었습니다. 땀 때문에 끈적하지도, 희미한 풀벌레 소리도 없었습니다.

정부 기관에 들어간 후 얼굴을 볼 수 없게 된 차유진을 위해 저는 꼬박꼬박 편지를 썼습니다. 답장은 세 장에 한 번꼴로 돌아왔습니다만 괜찮았습니다. 처음 받았던 답장에 적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편지는 초능력자들을 자극하는 요소가 없는지 꼼꼼한 확인을 거친 후 자신에게 닿기 때문에, 답장은 물론이거니와 확인조차 생각보다 훨씬 느릴 거라고요. 좀 실망했지만 곧 잊었습니다. 차유진이 준 답장은 아기자기한 손글씨로 편지지 다섯 장을 꽉 채운 채였기 때문입니다. 차유진의 글씨체가 평소에 얼마나 큰지 생각한다면 기함할 만합니다.

그렇게 삼 년 정도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직접 얼굴을 맞대진 못했으나 제 쪽에선 차유진의 근황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뉴스 속보에 자주 나왔기 때문입니다. 붕괴하는 고층 건물을 통째로 들어 올려 사람들을 대피시키거나, 홍해를 가르는 대신 한강을 가른다거나. 뉴스 속 차유진은 여전히 웃고 있었고, 여전히 반짝반짝 빛났으며, 여전히 머리가 새빨갰습니다.

제가 차유진과 얼굴을 맞대어 만난 건 헤어진 지 꼬박 삼 년 하고도 석 달이 흐른 후였습니다.

우선 말하자면, 저는 차유진이 자퇴한 후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차유진이 입소한 정부 기관에 들어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한 번 정부 기관에 속하게 된 초능력자는 죽을 때까지 일반인이 될 수 없다는 게 정설이었던 까닭도 있습니다. 사실 그렇게 죽도록 공부한 이유는 별것 없습니다. 차유진이 떠난 직후 완성한 곡이 하나 있었는데, 그 곡은 열다섯 때 시작해 완성하면 들려주기로 새끼손가락을 단단히 얽었기 때문입니다. 한 번 한 약속을 깨트릴 수는 없는 노릇이잖습니까?

스물한 살이 된 저는 연구원으로서 당당히 정부 기관에 입소했습니다. 차유진과 친분이 있음을 알리자 차유진 전담팀에 배정됐습니다. 당시엔 단순한 배려라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다릅니다. 제가 차유진 전담팀에 배정된 이유는 ‘가장 쉽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여러모로.

스물한 살이 되고, 정부 기관에 입소하고, 차유진 전담팀에 배정된 직후 저는 차유진과 재회합니다. 병실이라는 이름을 단 연구실에서 온몸에 주렁주렁 관을 매단 차유진과. 팔뚝에 멍울이 잔뜩 진 차유진은 지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습니다. 차유진은 저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렸습니다. 저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턱 막히던 숨과 반사적으로 깨문 아랫입술. 바들바들 떨리던 손안에서 보고서가 말려 들어가던 것까지.

차유진과 저는 한참이나 대화하지 않았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차유진 쪽에서 대화를 거부했습니다. 말을 붙여볼까 싶으면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도망치는 차유진을 잡으러 열일곱 번째로 기관 복도를 달리다가 엎어졌을 때 저는 그냥 포기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직 곡을 들려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음 날 연구실에서 만난 차유진에게 또다시 말을 걸었습니다. 차유진은 입술을 사리물고 등을 보였습니다. 좀 섭섭했지만, 뭐, 그럭저럭 익숙해진 터라 새삼스럽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선임 연구원분들이 우르르 연구실을 나서고, 저 혼자 남아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던 때에 차유진이, 열여덟 번이나 저를 무시한 차유진이 말을 건 것 아니겠습니까. “김래빈 맞지?”라며 운을 뗀 차유진은 제가 기억하는 것보다 한층 능숙한 한국어로 느리게 말했습니다. “여기서 볼 줄은 몰랐어.”라고.

그래서 저도 대답했습니다. “너 보려고 온 거야, 바보야.” 사실 사람 말을 열여덟 번이나 무시했으면서 냉큼 말을 거는 모습에 좀 화가 나기도 했으나, 거진 사 년 만의 대화였으므로 일단은 넘어갔습니다. 다음에 날 잡고 사람을 무시하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해주려는 마음으로요.

차유진은 그날 제게 이유를 물었습니다. 뉴스에서도 보고 편지도 나누는데 왜 굳이 여기에 들어왔냐며 답지 않게 낮은 목소리로 질문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솔직하게 대답했습니다. “약속 지키려고. 열여섯 살인가, 열다섯 살인가. 완성하면 너한테 들려주기로 했던 노래를 다 만들었거든. 설마 잊어버린 거야?” 그러자 차유진은 눈을 깜빡이더니 웃었습니다.

이후부터 차유진과 제 관계는 다시금 순탄해졌습니다. 차유진은 제가 아는 활발하고 거침없는 녀석으로 돌아왔고, 우리는 가끔 몰래 입술을 맞대거나 혀를 얽었고, 또 가끔은 다급한 손으로 서로의 몸을 훑었습니다. 찐득한 땀도 잔잔한 풀벌레 소리도 없었지만 괜찮았습니다. 차유진은 전담팀이라는 이유로 저를 자신의 거처에 자주 불렀고, 차유진의 침대에 누워 창밖에 드리우는 어스름한 새벽을 바라볼 때면 아무래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곤 했습니다.

다시 순탄한 궤도를 찾아간 차유진과 저와는 달리, 위원회와 국가 사이의 갈등은 최고조를 거듭 갱신했습니다. 어느 국가는 제 국적의 초능력자들에게 위원회 탈퇴를 강요했다가 강한 반발에 맞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초능력자들과의 온건한 관계를 선전하기 위해 인기 좋고 잘생긴 데다가 강하기까지 한 차유진이 차출되었습니다. 온갖 영상과 광고에 인터뷰까지 찍고 초능력을 펑펑 사용한 후 지친 몸을 이끌어 연구실로 향했습니다. 연구실에선 온갖 관을 주렁주렁 매달고 뭐가 들었는지 모를 주사를 맞거나 피를 한 다발씩 뽑히거나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지만 정부는 아마도 초능력자와 초능력을 보다 자세히 알기 위해 차유진을 이용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동안 차유진은 많이 지쳤던 것 같습니다. 강하게 작용하던 중력이 점차 옅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깨달은 사람은 유감스럽게도 제가 아닙니다. 연구 도중 일어난 작은 사고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자신이 들어 올리지 못한 자동차를 빤히 보던 차유진은 그냥 히히 웃었습니다. 전 아직도 차유진이 짓궂게 웃으며 한 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자동차 너무 무거워. 김래빈이 들어줘.” 이백 층이 넘는 건물을 손가락 하나로 번쩍번쩍 허공에 들어 올리던 차유진의 입에서 나왔다곤 상상도 못 할 말이었습니다.

차유진은 천천히 중력을 잃어갔습니다. 공식 석상에서 초능력을 사용해달라는 질문에 거절의 답을 두어 번 내뱉자 이젠 아무도 권유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차유진은 여전히 온갖 영상과 광고에 인터뷰를 찍었습니다. 여전히 장난스럽게 웃고 다녔고 여전히 머리가 빨갰습니다. 다만 저를 자신의 거처로 부르는 일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끊겼습니다.

차유진과 제가 아슬아슬하게 스물셋의 끄트머리에 머물 무렵엔 차유진은 자동차는커녕 길가에 놓인 돌멩이 하나 들어 올리지 못했습니다. 일반인과 다름없어졌음에도 차유진의 팔뚝에선 여전히 멍울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차유진은 스물셋의 끝에서도 바보 같이 웃었고, 새빨간 머리를 좋아했고, 마찬가지로 끝나가는 스물셋 위에 선 김래빈과 손을 단단히 잡은 채 산책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스물셋의 김래빈은 차유진을 위해 자투리 시간을 내어 곡을 썼습니다. 고대하던 약속 또한 지켰습니다. 그리고 매번 새로운 약속을 발음했습니다. 새로운 노래, 새로운 약속, 새롭게 얽히는 새끼손가락의 반복이 바로 차유진과 김래빈의 스물셋을 장식하는 커튼콜이었습니다.

그리고 스물넷의 첫해를 맞자마자 차유진의 중력은 갑작스럽게 돌아옵니다. 제가 상상한, 아니, 상상하지조차 못했던 가장 최악의 방식으로.

여기까지 들은 당신이라면 아마 이 이야기의 결말을 어렴풋이 짐작했을지도 모릅니다.

차유진의 몸에서 강하게 박동한 중력은 온 도시를 집어삼켰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그보다 많은 사람이 다쳤습니다. 이른바 폭주였습니다.

급하게 파견 온 초능력자들에 의해 강제로 진압된 차유진은 직후 제4지구 기억보관소에 갇힙니다. 하필이면 기억보관소인 이유는 간단합니다. 여러 사람의 소중한 기억을 보관하기 위해 설립된 기억보관소는 터무니없이 튼튼하게 지어졌을뿐더러, 근방에 남은 멀쩡한 건물이 기억보관소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제 또한 생겼습니다. 초능력이 사라졌다가 다시 생기는 일은 지금까지 학계에 보고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연구원들에겐 차유진을 ‘연구’할 의무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중력이 마구 폭주하고 있으니 가까이 다가갈 엄두조차 못 내는 것입니다. 정부에선 우주비행사도 보내고 초능력자도 보냈습니다. 모두 고깃덩어리가 되거나 그 비슷한 상태로 돌아왔습니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었는지 기관장은 저를 불렀습니다. 스물넷의 김래빈을요. 초조해하는 스물넷의 김래빈을 코앞에 둔 채 연구부장의 컴퓨터와 연결된 스마트 패드를 건넸습니다. 스물넷의 김래빈은 고민 끝에 패드를 받았습니다. 이유는 별것 없습니다. 스물셋에서 넷으로 넘어가기 직전 작업 시작한 곡이 있었는데, 그것을 들려주기로 차유진과 새끼손가락을 단단히 얽어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스물넷의 김래빈은 그렇게 제4지구 기억보관소로 들어갔습니다.

이곳은 얼음장같이 춥습니다. 처음 들어왔을 무렵엔 너무 추워서 하는 수 없이 보관된 기억들로 불을 땠습니다. 잿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기억들을 보며 가슴 한구석의 양심이 쿡쿡 찔렸으나 어쩔 수 없었습니다.

차유진은 기억보관소 가장 구석에 처박힌 채 나오지 않았습니다. 기억보관소는 몹시 넓었으나, 우습게도 차유진이 지닌 질량은 기억보관소의 크기를 가볍게 상회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 걸음 내디디고 둥둥 떠다니다가, 어느 순간 바닥에 처박혀 엉금엉금 기어가는 신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기억보관소 안의 중력은 불완전한 차유진의 중력처럼 제멋대로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음, 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차유진이 제멋대로인 게 하루 이틀도 아니었던지라.

차유진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동안 저는 패드를 통해 바깥과 연계된 일을 했습니다. 제4지구 정부에선 초능력자에 관한 사람들의 기억을 남몰래 추출해 제게 보냈습니다. 그러면 저는 그들의 기억을 차곡차곡 쌓아서 정리했습니다. 지금도 손에 둥글게 잡히던 기억구슬의 감촉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전부 블랙홀에 휘말려 깨졌거나 제가 불태워 먹었지만 말입니다.

차유진을 찾은 건 기억보관소에 진입한 지 꼬박 일주일이 지난 후였습니다. 기억구슬을 한가득 안고 정리할 공간을 찾아 깊숙이 들어갔는데, 글쎄 차유진이 구석에 쓰러져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처음에 그가 죽은 줄만 알았습니다. 축 늘어진 채 아무리 흔들어도 일어나질 않아서. 주위의 중력은 이상하리만치 평범했고 그 사실은 제 불안감을 지나치게 자극했습니다. 저는 그래서 패드와 기억구슬들을 전부 내던지고 차유진을 한참 흔들었습니다. 일어나라고 소리를 빽빽 지르면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차유진은 깨어났습니다. 깊은 잠에 빠졌던 사람 특유의 몽롱한 시선으로 저와 눈을 맞추더니 히히 웃어댔습니다. 품에 가득 차던 차유진의 온기에 눈물이 났던 것도 같습니다.

차유진과 저는 이후로 제법 즐겁게 지냈습니다. 패드와 구슬들은 차유진을 깨우기 위해 던졌다가 강한 중력의 영향권에 들어가 박살이 났습니다. 차유진은 잔해를 보다가 입맛을 쩝쩝 다셨고 저는 잔해들을 땔감으로 사용했습니다. 둥그렇게 타들어 간 흔적을 찾으신다면, 바로 그곳에서 결딴 난 패드와 구슬 조각들이 잿가루 되었음을 명심하시면 됩니다.

패드가 부서졌으므로 저는 더는 바깥과 연락을 주고받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 근황을 찾으러 기억보관소로 진입하는 사람 또한 없었습니다. 아마 지레 죽었으리라 짐작한 것 같습니다. 사실 이상한 생각은 아닙니다. 차유진의 중력은 평범한 일반인인 제가 감당하기엔 터무니없으니까요.

그러나 저는, 아마 당신께서도 추측하셨다시피, 죽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당시엔 말입니다. 대신 함께 지내며 차유진과 곧잘 입을 맞췄습니다. 질척하게 혀를 얽고 서로의 몸을 더듬었습니다. 희미하게 들리는 신음에 얼굴을 붉히기도 하고 맞댄 이마의 열감에 입술을 깨물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릅니다. 아마 두어 달은 족히 흘렀을 겁니다.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누워 있던 날 차유진은 문득 말했습니다. “여기서 노래를 만들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저는 차유진의 실없는 소리에 퍽 익숙했기 때문에, 대답하는 대신 그의 품을 파고들기를 선택했습니다. 가벼운 웃음이 터진 후 얼마간 조용하더니, 이내 억눌린 귓바퀴를 타고 소리가 흘러들어왔습니다. “나 잊을 거야?” 저는 아마 고개를 저었던 것 같습니다. 바보야, 하며 무어라 대꾸했던 것도 같습니다. 실은 차유진의 품 안이 퍽 따스했기 때문에 졸음이 밀려왔던지라 당시의 상황이 자세히 기억나진 않습니다만, 어쨌든.

꾸벅꾸벅 조는 저를 보며 차유진이 웃었던 듯도 합니다. 제가 기억하는 마지막은 고막을 살짝 울리고 흩어져버린, 차유진이 말한 것인지 제가 들은 환청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는 희미한 한 마디일 뿐입니다. 그마저도 영어로 중얼거렸기 때문에 뜻을 유추하기가 어려운.

눈을 떴을 때 저는 암흑 속이었습니다.

그리고 불현듯 깨닫고 말았습니다. 폭발한 별이, 죽은 초능력자가, 인간이, 그러니까 차유진이, 블랙홀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저는 이후의 이야기를 알지 못합니다. 위원회와 국가 간의 알력 싸움이 어떻게 끝났는지 역시 알지 못합니다. 제4지구에 있던 초능력자에 관한 기억구슬들이 전부 박살이 나버린 후폭풍이 어땠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아는 것은 단 하나, 거대한 폭발을 일으킨 차유진이란 별의 죽음이 제4지구 기억보관소를 통째로 집어삼킨 블랙홀이 되었다는 사실뿐입니다. 그러니 이제 바깥 상황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졌습니다. 블랙홀이 소멸하기까진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테고, 저는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천천히 죽어갈 테니까요.

지금도 블랙홀은 소용돌이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을 발견한 당신은 부디 초능력자란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사는 세상엔 초능력이라는 어휘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 말을 해독할 때 거듭 반복되는 초능력이라는 단어를 두고 표기법에 관한 언쟁이 일어나길 간곡히 바랍니다. 초능력이 없었더라면, 같은 가정 자체가 없기를, 부디,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그리고 차유진이라는 이름 석 자만은 하늘에 걸리고 땅에 묻히고 바람에 날리며 어린아이가 가리키는 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반복합니다. 제 이름은 김래빈. 나이는 스물여섯. 여기는 제4지구 기억보관소.

이 모든 기록을 저장하기에 앞서 당신은 명심해야 합니다. 이 녹음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오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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