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와 불
시작하기에 앞서
1. 위 글은 치건(@RaeY_M7)님의 의 3차 창작물입니다. 밑줄 처리가 된 제목을 클릭하시면 해당 게시글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2. 작중 종교적인 소재가 짙게 사용되었습니다. 의도적으로 고증을 지키지 않은 부분이 존재하며, 현실에 존재하는 특정 종교의 성경을 인용했으나 해당 종교를 비난•비판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습니다.
3. 24년 2월 17일~18일 개최된 유진래빈 교류회 BLACK RABBIT HOLE에 발간한 회지이며 중고 거래를 금지합니다.
*
00.
Though it linger, wait for it;
it will certainly come and will not delay.
늦어지는 듯하여도 너는 기다려라.
그것은 오고야 만다. 지체하지 않는다.
- 하바쿡 예언서 2장 3절 中
01.
발소리를 들었다. 소음에 채이지 않은 또렷한 걸음이다. 뒤꿈치가 닿을 때마다 또, 앞굽이 닿을 때마다 각. 공간은 넓고 울림을 의도하여 설계되었다. 아주 미세한 소음조차 매끄러운 대리석을 타고 겹겹이 부딪히고 떨리고 진동하며 제 몸집을 키우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많은 성당이 으레 그러하듯 앞면엔 커다란 십자가, 옆면은 성경 구절을 묘사한 스테인드글라스, 뒷면은 커다란 문 세 개와 상층 예배실로 이루어진 이곳에서 김래빈은 발소리를 듣는다.
또.
“그 외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임하시고…….”
각.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당하시며…….”
또.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
각.
“…….”
“…….”
“…….”
“……기도합시다.”
02.
우선적으로 말해야 할 것은. 김래빈은 신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인생이 팍팍하고 밥 한 그릇 배불리 먹기 위해서 외상을 내는 게 일상인 그네들 삶에 신자도 아니면서 주일마다 성당에 가는 건 조금 별스러운 일이기야 했다. 미사가 끝나면 수녀회에서 만들었다는 군것질이나 참기름 따위는 권유하는 족족 고사하니 목적은 구걸도 아니요, 영성체는커녕 하는 일이라곤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우두커니 일어나 있는 것이니 신실한 기도도 아닐 테고. 이 난잡한 도시에서 성당에 꼬박꼬박 다닐 사람은 첫째, 더러운 짓 저지르고 다니다가 늘그막 되어 덜컥 두려워진 자칭 회개자였고, 둘째, 그냥 배가 곯은 지나가던 행인이나, 셋째, 그도 아니면 어떠한 인연에 이끌렸다고 주장하는 신도다. 김래빈의 행색은 모로 보나 첫째가 아니었으며 먹을 것은 사양하니 둘째도 아니고, 인연에 이끌렸다고 주장하기엔 입 한번 뻥긋하지 않으니 셋째조차 아니었다. 그렇다면 저 창창하고 젊은 청년은 당최 늙은이뿐인 미사에 뭣 하러 참석하는가. 김래빈 본인은 알지 못할 테지만 그 자신의 존재는 성당 사람들의 기묘한 카르텔 속에서 제법 뜨거운 감자였다.
만일 성당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용기가 있었다면. 그래서 미사를 끝마치고 비틀비틀 계단을 내려가 골목길 어둠에 녹아 사라지는 김래빈을 붙잡아 물었더라면. 그들은 아마 이런 대답을 들었을 것이다.
“딱히 목적은 없습니다. 혹시 신자도 아닌 사람이 미사에 참여하는 게 불쾌하셨습니까?”
이어지는 말은 아마도 그렇다면 시정하겠다, 하지만 구석에 잠깐이나마 앉아 있을 수 있게 해준다면 고맙겠다, 따위일 것이다. 충실한 신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인간은 신자가 아니면서도 미사에 참여하고자 하는 김래빈의 근면 성실한 면모에 몹시 감동할지도 모른다. 그는 이 갸륵한 청년에게 교리를 전파하고자 혹시 세례를 받을 생각은 없느냐 권유하고, 김래빈은 세례와 영성체라는 그 행위 자체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으나 고민 끝에 한 마디 물어보았을 수도 있었다.
“영성체를 받으면 지옥에 가지 않습니까?”
03.
“너 영성체 받을래?”
차유진은 국수를 입에 넣었던 그대로 뱉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수가 그릇에 다시 철퍽, 하고 떨어지며 국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야 더럽게 그걸 다시 뱉어? 앞자리를 차지한 김래빈이 타박하며 휴지를 건넸으나 차유진은 멍청하게 입만 벌린 채 받지 않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받을 정신머리가 없었다. 너는 무슨 영성체 받을 거냐는 말을 외상 낸 국수 먹을 때 하니. 차유진이 받지 않은 휴지로 뺨에 튄 국물을 벅벅 닦는 김래빈은 제 반응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좀 어이가 없었고.
“나 이거 뭔지 알아. 이거 아닌 밤중에 봉창이야.”
“아닌 밤중에 홍두깨겠지. 봉창은 무슨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고 할 때 쓰는 거고.”
“어. 그거 두 개 다야.” 차유진은 의자에 걸쳐 놓았던 다리를 바닥으로 툭 떨어트리며 상체를 쭉 디밀었다. 거리가 돌연 좁혀졌다. 김래빈이 얼굴을 팍 찡그렸다. 험악하게 찡그린 눈을 빤히 들여다보던 차유진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김래빈 영성체 뭔지 알기는 해?”
“신부님이 설명해 주셨어. 축성을 내린 빵을 받아먹음으로써 죄를 씻는 일종의 의식이라고.” 김래빈은 국수를 젓가락으로 휘휘 저으며 대답했다. 어째 입맛이 없어 보였다. “그럼 내가 그것도 모르고 너한테 제안했을까 봐?”
되묻는 목소리가 불퉁했다. 차유진은 그럼 밥 먹다가 대뜸 영성체 받지 않겠냐는 권유를 받은 제 심정은 어떻겠냐고 물으려다가 관뒀다. 말꼬리를 잡아봐야 유치한 다툼밖엔 안 될 것이다. 대신 차유진은 국수 그릇을 슬쩍 미루고 턱을 괬다. 국수를 먹지 않고 젓기만 하던 김래빈이 눈을 치켜뜨더니 왜, 하고 물었다.
“김래빈 또 왜 그래?”
“내가 뭘?”
“맨날 이래. 자기가 이상한 소리 해놓고 자기가 기분 안 좋아져.”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 너야말로 이상한 소리 그만해. 그리고 턱 괴지 마. 식탁 위에 팔꿈치 올리면 복 달아난다.”
차유진은 코웃음으로 대꾸를 대신했다. 김래빈은 아니라고 했지만 차유진의 눈을 속일 순 없었다. 차유진은 김래빈의 바보 같은 면모를 속속들이 알았지만, 스스로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을 거리낌이 없이 뱉어대는 게 가장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그렇게 말하고 아무렇지 않으면 몰라. 본인 말에 본인 스스로 상처받고는 종종 시무룩해졌다. 그걸 재밌다고 콕콕 찔러보면 또 엉뚱한 데에서 폭발이 일어나곤 했고. 눈을 부리부리하게 뜬 김래빈이 잔소리 폭탄을 터트리기 직전. 차유진은 두 손을 들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김래빈 진짜 성가셔.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차유진은 우물우물 말을 뱉어내는 김래빈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게 성당 가지 말랬잖아. 신부님 김래빈한테 이상한 소리나 하고.”
“이상한 소리 안 하셨어. 차유진, 국수 다 부는데 안 먹을 거면 왜 지금 먹자고 한 거야?”
“애초에 나한테 영성체 말은 왜 한 거야?”
“그냥 궁금했을 뿐이야. 싫으면 그냥 싫다고 얘기하면 될 것을 왜 이렇게 꼬투리를 잡아.”
“김래빈이 먼저 잡고 있어.”
“내가 뭘?”
이것 봐. 완전 아무것도 모르고. 차유진은 짐짓 불퉁하게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입을 댓 발 내밀면 김래빈은 또 눈을 찡그렸다. 눈치는 연옥 화마에 불탄 주제에 제가 조금이라도 삐진 티를 내면 금세 슬쩍 기색을 살폈다. 어렸을 때부터 형제니 뭐니 하면서 붙어 다닌 탓인가. 김래빈은 좀, 뭐랄까. 항상 차유진의 보호자처럼 행세했다. 잘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매번 본인은 어른이고 차유진은 꼬꼬마 아이인 것처럼 굴어댔다.
지금도 그랬다. 저 표정. 누가 봐도 영락없이 불만이든 실망이든 뭐든 간으로 가득 찬 낯이었다. 제 불퉁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은 데다가 기껏 한 제안까지 거절당한 결과물이 저거였다. 보호자 노릇을 할 거라면 적어도 기분을 숨기는 법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나. 차유진은 험악하게 일그러진, 그래서 되레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표정을 빤히 보다가 국수 그릇을 끌고 왔다. 김래빈이 한 말 중에서 가장 쓸모 있는 말은 국수가 불고 있다는 한마디밖에 없었다.
“안 해. 영성체.” 차유진은 젓가락을 새로 뜯으며 말했다. “그리고 영성체 받고 싶다고 받을 수 있는 거 아니야. 그거 공부해야 해. [공부하기 전에는 세례도 받아야 하는데, 그건 또 얼마나 절차가 복잡한지 알아? 신부님이 뭐라고 했는진 몰라도 나 영성체 받을래요, 하면 바로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김래빈은 대답하지 않았다. 제 그릇에 담긴 국수를 우울하게 내려다보는 꼴이 비 맞은 처량한 들짐승 같았다. 처량한, 과 들짐승이라는 말이 공존할 수 있나. 아니지. 애초에 김래빈의 꼴은 비 맞은 처량한 짐승의 귀엽고 가여운 느낌이라기보다는, 뭐랄까. 공포영화에서 퓨즈 나가기 직전의 가로등 밑에 선 살인마와 비슷한 모습이지. 차유진은 장마철 밤에 가로등 아래서 자신을 기다리던 김래빈을 보고 기절할 뻔했던 기억을 떠올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보이는 것처럼 산다는 말은 싫어했다. 김래빈이 그 산증인이라서 더더욱 그랬다. 그들은 비록 어렸을 적부터 유혈과 살인과 불법적인 일에 휘말려 여태껏 생존해 왔으나 그건 삶이라고 부를 법한 인생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차유진은 김래빈이 제 목숨 건사하기도 힘든 이 각박한 도시에서 종종 내비치는, 동정이라기엔 얄팍하고 구원이라기엔 하잘것없는 선의를 알고 있었다. 사탕을 쥐어 돌려보낸 아이의 등을 좇는 시선이나 외상은 곧 무전취식이나 다름없는 도시에서 꼬박꼬박 돈을 갚는 행위 같은 것 말이다. 차유진은 김래빈의 행동을 자못 미련하다고 생각했고, 가끔 조금 답답했으며, 사는 데에 요령이 없구나 싶은 동시에, 또 한구석으로는 내심 좋아했다. 조금 더 솔직해질까. 우습지만 차유진은, 김래빈이 오직 그럴 때만을 살아있다고 정의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주일마다 낡아 자빠지려는 성당에 나가는 것도 그런 하릴없는 행동의 일환인 줄 알았다.
거기서 무슨 말을 들었길래 너는 내게 영성체를 받으라고 하는 걸까. 권유의 형태였으나 김래빈의 입에서 나온 이상 이미 답이 내재 되어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김래빈은 차유진이 알겠다고 할 때까지 은근히, 그 불살라진 눈치를 힐끔힐끔 보다가, 차유진이 기분 좋아 보이는 때를 노려서 슬쩍 또 주제를 꺼내 들 거였다. 차유진은 내리깐 김래빈의 시선을 집요하게 살폈다. 어떤 대화가 어떻게 발화할지 예측하는 것이 지난한 설득의 가장 첫 번째 단계였다.
김래빈은 식사 시간이 끝날 때까지 주제를 다시 꺼내지 않았다. 그들은 주로 항구와 일에 관련한 얘기를 나눴다. 거기서도 또 한 번 충돌이 있었다. 김래빈은 차유진이 항구에 나가는 걸 싫어했다. 안전하지 않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항구는 다양한 조직의 소위 밥줄이 긴말하게 얽히고설킨 곳이라 도시의 그 어떤 구역보다도 살벌하기는 했다. 하지만 콕 집어서 위험하다고, 그러니 너는 항구에 나가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김래빈의 말은 어불성설이었다. 차유진이 가지 않으면 김래빈이 갔다. 김래빈은 마치 차유진에게 쏟아붓는 모든 위험성이 본인만을 콕 집어 비켜 갈 거라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들은 충돌했고, 언쟁을 벌이다가, 식탁을 정리하고 소파에 앉았다. 이야기는 중단된 채였다. 차유진은 김래빈이 삯과 함께 받아온 초콜릿바 한 개를 입에 물고 있었다. 싸구려 초콜릿의 단맛과 눅눅한 견과류는 간식이라는 구색만 간신히 맞춘 맛이었다. 한 입 크게 베어 물고 우물거리는데 김래빈이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릎을 가슴팍까지 끌어 올리고 머리를 기댔다. 등을 돌리고 있는 탓에 얼굴이 반만 보였다.
“진짜 안 할 거야?”
김래빈이 그렇게 물었다. 차유진은 김래빈이 빠트린 주어가 무엇인지 알았다. 잠깐 잦아들었던 말다툼이 막 다시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단호하게 끊어놓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이 사항이 터무니없다는 사실을 논리 있는 까닭으로 설득해 아예 생각을 바꿔야 했다. 번거롭고 귀찮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앞으로 김래빈에게 지독하게 시달릴 생각을 하면 또, 뭐 지금 삼십 분 들여서 앞으로 한 달을 구한다고 생각하면 되지, 싶어지는 것이다. 차유진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굳이 대답해야 해?]”
“차유진. 네가 왜 그렇게 고까워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분명히 너를 위해서 제안하는 거야.”
“[그게 왜 나를 위한 건데? 믿지도 않는 신을 부르짖으면서 한 시간 동안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반복하는 행위의 어디가 나를 위한 거야? 오, 설마하니 김래빈이 내 다리 근육을 걱정해 준 건 아닐 테고 말이야.]”
김래빈이 한숨을 쉬었다. 철없는 아이를 대하는 것처럼 피곤하다는 기색이 역력한 날숨이었다. 차유진은 반쯤 기대어 있던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린애로 보는 것도 적당히 해야지. 이런 일로 또 싸우고 싶지 않다는 생각과 김래빈에게 우리가 더는 열댓 살 꼬마 애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못 박고 싶다는 충동이 동시에 일었다. 눈을 부라리는데 김래빈이 말했다. 지친 목소리였다.
“그래도 너는 잘살아야 할 거 아냐.”
04.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쏟아지는 빛살 가운데에 우두커니 앉은 채. 김래빈은 가만히 반추한다. 그는 사실 이 성당을 갈비뼈를 훤히 드러낸 고래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커다란 고래가 성당을 통째로 물어 삼킨 게 아닐까, 하고. 그게 아니고서야 성당에만 들어와 앉으면 사방이 먹먹하게 들리는 까닭을 설명할 수 없다.
주일 미사였다. 평소와 다른 게 없었다. 김래빈은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다가 미사가 시작하기 삼 분 전 수녀의 권유로 자리를 옮겼다. 똑같이 구석진 곳이었으나 볕이 잘 들었다. 눈을 내리깔면 검은 바지 위로 스테인드글라스의 형형색색이 일정한 파형을 가지고 일렁거렸다. 녹색, 다홍색, 파란색, 흰색. 다시 녹색, 다홍색, 파란색, 흰색. 다시 녹색, 다홍색, 파란색, 흰색……. 설교를 듣다가 김래빈은 고개를 들었다. 영성체를 권유한 주임 신부가 단상 위에 서 있었다.
“늦어지는 듯하여도 너는 기다려라.”
주임 신부가 말했다. 허벅지 위에 얌전히 놓아둔 손이 움찔했다.
“그것은 오고야 만다. 지체하지 않는다.”
신자들이 구절을 암송했다. 분위기가 엄숙했다. 기도합시다. 신부는 말을 끝마치고 침묵하더니 천천히 자리로 걸어 들어갔다. 여기저기에서 숨죽인 주기도문이 들렸다. 허벅지 위의 손이 천천히 손아귀로 말려 들어갔다. 기도합시다. 주임 신부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영성체 권유는 감사하나 동생이, 그러니까 차유진이 원하지 않는다고 전달했다. 미사 직전의 일이었다. 주임 신부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뜨고는 말했다.
죄를 씻는 방법을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며 신께서도 알지 못하는 자를 벌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방법을 들었으며 앎에도 행하지 않음이란 명백한 죄이며 신께서는 죄지은 자들을 천국에 들이지 않습니다.
우습게도 김래빈은 그때 차유진이 아닌 자신을 생각했다. 죄지은 자들은 들어갈 수 없는 천국. 엄밀히 말하자면 차유진 그 자신에겐 죄가 없지 않나. 물론 척박한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런저런 짓을 저지르고 다녔다지만. 그건 삶이라기보단 생존이라 죄라고 일컫기 힘들지 않을까. 하지만 김래빈은. 얇게 다물린 입술이 달싹였다. 푹 숙인 시선 끝에서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살이 어름어름 흔들렸다.
하지만 김래빈은 다르다.
김래빈은 죄를 지었고. 도망쳤고. 거짓을 고했으며 위선을 떨었다. 그리하여 기다리고 있다. 차유진에게는 말하지 않은 이런저런 것들을. 대비하고 있다. 역시나 이야기하지 않은 많은 것들을. 차유진이 알게 되면 떠날 테고 김래빈은, 적어도 아직은 함구하고 있으니 이 또한 하나의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지옥을 불태운다는 발상 자체가 어리석었다. 지옥이란 특정한 장소나 상황이 아니다. 그저 일개 현상일 뿐이다. 불태웠다고 생각하니 남은 잿더미가 지옥이 됐다.
우스운 건 이 모든 사실을 알고도 같은 선택을 하겠느냐 묻는다면. 김래빈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일 거라는 사실이다.
차유진에게 한 말은 진심이었다. 그래도 너는 잘살아야 할 거 아냐. 앞 뒷말은 전부 잘라 삼켰으나 그 한마디만으로도 차유진은 제 말의 진의를 깨달았을 터였다.
주임 신부가 일어난다. 단상으로 나와 서서 말한다.
“기도합시다.”
사람들이 우르르 일어난다. 김래빈도 따라 일어선다.
죄를 사해달라는 기도문 따위는 뱉지 않았다.
00.
내가 김래빈을 때려눕힌 뒤에.
네 돈을 훔치고.
네 이름으로 빚까지 진 다음에.
도망가 버려도.
00.
그것은 오고야 만다. 지체하지 않는다.
00.
나 농담하는 거 아니야.
06.
“[요즘 쥐새끼가 자꾸 깔짝깔짝 신경 쓰이게 한단 말이지.]”
“[쥐새끼?]”
차유진은 상자에 처박았던 허리를 펴고 물었다. 동료라기엔 연이 얕고 아예 모르는 사이라기엔 다소 친밀한, 세간에선 지인이라 불릴 법하나 서로는 그냥 이름을 곧 관계로 지칭하는 D였다. D는 항구 외곽을 독점하다시피 한 중형 조직의 말단 조직원이었다. 차유진은 D의 조직의 밥줄을 간 크게 건드렸다가 도주하는 과정에서 D를 처음 만났다. 그때 D와 차유진은 사이좋게 묵사발이 되었으나 차유진은 어찌저찌 도망쳤다. 며칠 후 조직의 우두머리가 차유진을 마음에 들어 한다며 찾아온 게 그들의 제대로 된 첫 만남이다. 사정을 들은 김래빈이 목을 잡고 넘어갈 뻔한 탓에 거래는 제대로 성사되지 못했지만.
뭐 어쨌든. D는 우두머리의 명령에 따라 차유진에게 잔심부름을 종종 맡겼다. 말이야 잔심부름이지 가끔은 이걸 외부인인 나한테 시킨다고, 싶어지는 일들도 있었다. 물론 보수는 대개 짭짤한 데다가 김래빈과 함께 생활하는 차유진으로선 구태여 거절할 이유가 없었지만. 딱히 김래빈을 먹여 살리는 건 아니어도 돈은 많을수록 좋았다. 김래빈은 항상 어딘가 조금씩 부족하게 벌어왔으니까.
그러고 보니 그것도 이상하네. 김래빈도 심부름 솜씨로는 도시에서 차유진과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차유진을 애용하는 조직과 사람이 항상 있었듯이 김래빈을 찾는 조직과 사람은 언제든 있었다. 김래빈은 차유진더러 위험한 짓은 하지 말라고 잔소리하면서도 저 자신의 몸을 던지는 데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그런 주제에 벌어오는 돈은, 물론 액수만 두고 본다면 작지 않았으나 맡은 일을 생각한다면 어딘가 한구석씩 부족했다. 차유진의 눈이 일순 가늘어졌다. 어딘가 뒤가 구리다는 생각을 이제야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듣고 있어? 유진.]”
“[아.]”
D의 부름에 차유진이 고개를 들었다. 나무상자 위에 아무렇게나 앉은 D는 차유진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차유진은 상념을 잠시 옆으로 밀었다. 아무리 말단이라지만 중형 조직의 일원으로서 모은 정보는 들어두어서 나쁠 건 없었다. 말을 계속하라고 고개를 끄덕이자 D는 크게 한숨을 삼켰다.
“[곤란해.]”
“[뭐가?]”
“[흔적이 없으면 크게 상관이 없어. 너도 알다시피 우리 보스는 쥐새끼들 처리엔 열을 안 올리시잖아. 먼저 이를 드러내지만 않으면 우리도 적당히 넘어가는 편이란 말이지.]”
그런데, 하고 D가 잠시 말을 끊었다. 차갑게 일그러진 얼굴에서 살의가 언뜻 비쳤다가 사라졌다.
“[자꾸만 들쑤셔. 적당히 모르는 체하고 넘어가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게. 상부도 슬슬 기분 나쁜 티를 내고 있어. 너도 알잖아, 유진. 이런 일에 갈려 나가는 건 우리야.]”
차유진은 D가 그 자신과 본인을 한 데 묶어 우리라고 표현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랑 네가 왜 우리야. 이 도시에서 우리로서 묶일 수 있다면 그건 차유진과 김래빈이어야 한다. 차유진은 D의 얼굴을 힐끔 곁눈질하다가 시선을 내렸다. 거스러미가 올라온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데 D가 다시 말했다.
“[도와주겠어?]”
“[내가?]”
“[여기에 너 말고 누가 있겠어.]”
거기까지 듣고 차유진은 일어섰다. 뒷말은 전부 자르면 필요한 정보는 알맹이만 남는다. 근래 외지인이 도시에 들어섰다. 겁도 없이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니는 모양이다. 그러다가 도시에서 내로라하진 않지만 모르는 척하지도 못할 만큼 적당한 크기의 중형 조직에 미움을 샀다. 김래빈한테 당분간 으슥한 골목은 좀 피해 다니라고 해야겠다. 차유진이 상자 뚜껑을 도로 덮자 D가 덩달아 일어섰다.
“[안 할 거야?]”
“[D,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조직의 일원이 아니야.]”
“[보스가 아주 좋아할 텐데.]”
“[나는 너무 끈질긴 사람은 별로라서.]”
와. 내가 뱉었지만 정말 판에 그린 듯한 바람둥이 같은 대사군. 차유진은 킬킬거렸으나 D는 얼굴을 굳힌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기세엔 전에 없던 위협이 서려 있었다. 보스를 함부로 이야기하지 마. 낮게 깔린 으르렁거림에 차유진은 두 손을 들고, 눈을 한번 굴리고, 짐짓 장난스럽게 말한다. 아무렴 그렇고말고. 속으로는 조금 웃었다. 저 혼자 기대하고 저 혼자 좋아하고서는. 그 상대의 거절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게 누구인데.
걸음을 돌린다. 일은 끝냈으니 삯을 받고 떠나면 될 일이다. 벗어두었던 겉옷을 걸치는데 발치에 검정 봉투가 날아왔다. 철퍽 소리를 내는 게 꽤 무거워 보였다. 내용물을 힐끔 확인했다. 지폐 무더기와 귤 두 개였다. 귤을 넣어놓고 이렇게 던지면 어떡해. 물러서 돈 젖으면 책임질 건가. 하지만 두 개를 챙겨준 배려심에 감읍했으니 지적하진 않기로 한다. 신발 끈까지 질끈 묶고 일어서자 D가 말했다.
“[어쨌든 조심해. 조만간 청소부 녀석들이 오가기 시작할 거야.]”
“[또 일손이 필요하면 불러.]”
일이 없으면 부르지 말라는 뜻이다.
D는 대답 대신 손을 저었다. 차유진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가볍게 뛰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가야지. 오늘은 미적거리지 않고 곧장 출발했다. 아마 미사를 마친 김래빈과 비슷한 시간에 집에 도착할 것이다. 저녁은 뭘 먹는 게 좋을까. 또 국수를 사 갔다간 외상 좀 그만 내라며 김래빈에게 잔소리를 들을 텐데. 하지만 이 도시는 그 잿빛 색채만큼이나 둔한 미각의 소유자라 먹을 만한 것은 국수와 낡아빠진 편의점을 제하면 전멸한 수준이다. 아무거나 먹고 싶진 않았다. 아무렴 사람이 밥은 제대로 먹어야 하지 않는가.
모퉁이를 꺾었다. 그리고 멈췄다. 걸음뿐이 아니다. 의식과 사고와 호흡마저 멈췄다. 지직거리는 가로등 그 아래 김래빈이 서 있었다. 혼자가 아니다. 누군가와 함께다. 검정 옷을 입은 사내는 김래빈의 머리를 쓰다듬고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다. 그가 무어라고 말했는지 김래빈이 웃는다. 억지로 짓는 미소라기엔 과하게 편안하다. 김래빈이 입을 열어 말한다. 들리지는 않으나 이번엔 등 돌린 사내 쪽이 움찔움찔 웃었다.
따끔한 감각에 고개를 내린다. 검정 봉지를 쥔 손등이 새하얗게 일어난 채였다. 손목을 돌렸다. 드러난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반달처럼 남은 붉은색 흔적을 가만히 더듬다가. 다시 고개를 들면.
깜빡. 깜빡.
아하하.
깜빡.
그렇습니까?
깜빡. 깜빡. 깜빡.
그렇지만요.
깜빡.
제 동생은 잘살아야 하니까요.
07.
“왜 이렇게 늦었어?”
차유진은 대답하는 대신 봉지를 건넸다. 다 무른 귤 두 개와 두툼한 지폐 무더기가 안쪽에서 덜렁거렸다. 김래빈은 귤을 꺼냈다. 봉지는 옆에다가 던져뒀다. 어차피 차유진이 알아서 굴리든 밥을 사든 간에 쓸 돈이었다. 귤껍질을 까는데 차유진이 비척비척 소파로 가더니 앉았다. 털썩 소리가 유난히 컸다.
“차유진.” 돌아보지도 않는다. 김래빈은 뱃속에서 불유쾌한 감정이 똬리 치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신부님이랑 친해?”
생뚱맞은 질문이었다. 김래빈은 눈을 찡그리며 가까이 다가갔다. 차유진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눈을 마주쳤다. 심통 맞은 표정이라도 지었을까 싶었는데 아무렇지도 않았다. 흥분도, 짜증도, 무엇도 보이지 않는 낯이었다. 매끄러운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김래빈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덜컥 겁이 났다. 왜 나한테 그런 표정을 지어? 불현듯 떠올린 질문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이해할 수 없는 낱말로 점철되어 있었으나 김래빈은 그 모든 것을 일일이 헤아릴 여유가 없었다.
“무슨 신부님?”
“아직도 성당 가?”
“가지, 그럼……. 차유진, 네가 하는 말을 도무지 이해하지를 못하겠어. 신부님하고 아직 친하냐는 게 무슨 의미야?”
“그 신부님은 아직도 우리더러 지옥 갈 거래?”
마침내 김래빈의 표정이 굳는다. 자각하기도 전에 날것의 문장이 목구멍 속에서 역류해 튀어나왔다.
지옥에 가는 게 왜 우리야.
00.
나 농담하는 거 아니야.
00.
늦어지는 듯하여도 너는 기다려라.
00.
도망가 버려도.
09.
나한테 우리는 항상 우리였는데. 김래빈한테는 아니었어?
그게 아니야.
아니면 뭔데? 내가 영성체 받기 싫다고 해서 그래? 나만 지옥 가는 거야? 성당 꼬박꼬박 가는 김래빈은 천국 가고?
그게 아니라니까.
나도 묻잖아. 아니면 뭔데?
차유진.
10.
이제 내가 죄인이라서 싫어?
00.
“…….”
“…….”
“…….”
“그리고 당분간 골목길로 다니지 마.”
“…….”
“…….”
“…….”
“기도합시다.”
11.
문을 열었을 때 손님과 눈이 마주쳤다. 소파에 앉아 있는 뒷모습이 퍽 낯익었다. 손끝에서 까딱까딱 흔들리는 나이프는 조도 낮은 거실 조명등에 흐리게 빛났다. 김래빈은 아주 잠시 이대로 뒤를 돌아 문을 닫고 도망쳐야 하는가 고민했다. 인기척을 느꼈을 텐데도 뒤 한번 돌아보지 않는 모양새에서 여유를 느낀 까닭은 아니었다. 여기서 쓰러지면 차유진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생각할 여지가 너무 많아서였다.
“[오랜만이다, 요 발칙한 꼬맹아.]”
남자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리고 김래빈은 도망치지 않기로 결심했다.
아는 얼굴이었다.
12.
“[내가 지옥에 가기를 원해요?]”
사람이 드문드문 있는 성당 안을 목소리 하나가 꽉 메운다. 바오로 신부는 두 손을 정갈하게 모아 십자가를 향해 절했다. 서두르지는 않았다. 손님을 기다리게 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지만. 정작 중요한 건 손님 또한 집주인을 재촉할 수 없다는 것임을 알기에.
신중하게 성호를 긋고 뒤를 돌아보면. 그제야 눈이 마주친다. 벽면에 박아둔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내리쬔 빛이 남자 위를 함빡 덮고 있다. 잘생긴 얼굴 위에서 일렁이는 색색들이 빛이 퍽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면서 늙은 신부는 입꼬리를 느리게 올렸다. 그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를 알고 있었다. 최근 들어 미사를 꼬박꼬박 참여하던, 아직은 세례를 받지 않았으나 관심만큼은 지대해 보이던 청년의 동생이었다. 이름이 뭐더라. 유, 뭐였는데. 유리? 유셉? 유…….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김래빈이 요즘 들어 자꾸 지옥 타령하길래요. 혹시 신부님이 그렇게 말했나 싶어서.]”
남자는 팔짱을 꼈던 팔을 풀고 몸을 바로 했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눈에서 불만을 읽어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동생이 영 뻣뻣한 태도라더니. 사실이었군. 안타깝게도 바오로 신부는 이런 살벌한 도시에서 본당 신부로 십여 년째 재직 중인 베테랑이었다. 새파랗게 어린 청년 하나에 겁을 집어먹기엔 그가 겪은 시련은 너무나도 크고 다양했다.
“[글쎄요.]” 신부는 느긋하게 대답하며 옷매무시를 다듬었다. 다음 미사까진 사십 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시간이 아주 많은 건 아니나 적당히 담소를 주고받을 정도는 되었다. 보아하니 이 청년도 시간을 오래 끌 성싶진 않았다. 가늘어진 청년의 눈이 신부를 느리게 훑어내렸다. 그리고는 한숨이 이어졌다.
“[김래빈이 회개했으면 좋겠어요?]”
“[모든 인간은 삶을 살아가며 죄를 짓습니다. 그러니 특별히 김래빈 형제만의 회개를 바라는 건 아니지요.]”
신부가 대답했다. 진심이었다. 사내는 한번 크게 웃었다.
13.
“[예상하지 못했단 말이야. 평소엔 그렇게 고분고분하던 놈이 냅다 날 계단에서 밀칠 줄은.]”
남자는 호탕하게 웃었다.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김래빈은 우두커니 서서 저 남자를 상대로 몸싸움이 붙었을 때 이길 가능성을 셈했다. 여긴 제 집이다. 공간적으로 유리하다. 하지만 남자는 손에 나이프를 들었다. 아주 능숙하게 사용할 것이다. 김래빈에겐 머핀 두 개가 담긴 검정 봉지밖에 없다. 미사가 끝나고 받은 것이다. 여기서 부엌까지 달려간다면 무기로 쓸 만한 걸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건 즉 등을 보인다는 뜻이고.
“[말이라도 좀 해봐라. 덕분에 죽다 살아났는데.]”
“[죄송하다는 말은 못 하겠습니다.]”
“[그런 건 기대도 안 하지. 그래도 옳지, 성대는 아직 멀쩡히 붙어 있는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역시 도망쳐야 하는데. 적어도 집안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어디가 좋을까. 골목길인가. 역시 골목길이지. 골목길로 다니지 말라고 했으니 그 본인도 대로변을 선호할 테니까. 그런데 그건 어떡하지. 빼앗기지 않겠지. 빼앗기면 안 되는데. 아니. 중요한 건 이게 아니라.
“[생각보다 버젓이 잘살고 있어서 좀 놀랐다. 일부러 여기에 자리 잡은 거라면 칭찬해 주고 싶어. 땅 주인들 눈 피해서 헤집고 다니느라 여간 고생이 아니었으니까. 성당 사람들 얘기 못 들었다면 진작 포기했을 거야.]”
김래빈은 벽면에 붙은 찬장을 올려다봤다. 손바닥보다 살짝 더 큰 원형 철제 상자. 처음엔 이걸 언제 다 채우지 싶었는데 요즘엔 넣을 자리가 마땅찮다. 지폐를 동그랗게 말고 자리를 내어 비집고 넣으면 뚜껑을 닫기도 힘들어졌다. 목마르다.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이프가 두껍고 억센 손끝에서 묘기처럼 휘휘 돌아간다. 그러자 허기가 졌다.
“[하여간에. 성당이라니. 어울리지도 않는 짓거리 덕분에 찾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
그 신부님은 아직도 우리더러 지옥 갈 거래?
유감스럽지만. 그렇대, 차유진.
김래빈이 힘껏 봉지를 집어던진다. 남자의 얼굴에 정확히 맞으며 경쾌한 소리를 낸다. 살벌한 욕지거리가 등 뒤에서 살처럼 날아옴과 동시에 김래빈은 몸을 던진다. 찬장을 열어젖히고 먼지를 쓸어 넘기다가. 손끝에 걸리는 상자를 품에 안고.
현관문을 박차고 나선다. 지옥은 일개 장소와 무관한 어떠한 현상이다.
00.
차유진. 일어나.
왜?
도망가자.
무슨 소리야?
불났어. 지금 애들도 다 도망치고 있고. 빨리 일어나. 우리도 가야 해.
14.
“[김래빈이 나한테 영성체를 받으라고 하더라고요.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그 신부님이 우리더러 지옥 갈 거라고 했냐니까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청년이 씨익 웃었다. 그 순간 신부는 신께서 자신에게 또 다른 시련을 내렸음을 직감했다. 담소의 형태로 오가고 있으나 이건 분명한 고해성사였다. 신부는 부러 몸을 살짝 옆으로 틀었다. 고해성사 시 신부는 한 인간 개인이 아닌 신의 대리인으로서 역할한다. 상대 신자가 무슨 죄를 지었든 인간이 아닌 신의 대리자로서 판단하는 것이 가장 기본이었다. 벽 너머 신자가 누구인지 궁금해하지 않을 것. 추측하지 않을 것. 알게 되더라도 모르게 할 것. 알지 않을 것. 바오로 신부는 충직한 신의 종이다. 그는 그가 배운 대로 했다.
“[지옥에 가는 게 왜 우리냐고 하더라고요.]”
남자는 계속 웃었다. 킬킬거리는 소리가 잔향처럼 맴돌았다.
“[나한테 걔는 항상 우리였는데. 걔도 똑같은데. 그런데 성당을 다니기 시작한 이후로 기묘하게 벗어난 느낌이란 말이에요. 궤도에서 탈락한 위성처럼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렇군요.]”
“[우스운 건 말이에요. 우리가 지옥에 가는 것과 내가 천당에 가는 것, 둘을 비교했을 때 나는 전자를 고를 거라는 사실이에요.]”
아버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이 가엾은 어린 양을 구하소서. 바오로 신부는 묵주 팔찌를 꾹 쥐었다. 지옥이란 그렇게 쉬이 입에 올리고 가볍게 선택할 수 있는 곳이 아니거늘. 이 어린 청년들은 지옥이 마치 또 다른 삶, 공간, 눈을 감고 힘을 합치면 극복할 수 있는 무언가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는 걸까. 신부는 한참 고민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으나 별 쓸모는 없었다. 상대가 한발 빨랐던 것이다.
“[무슨 생각인지 다 보여요. 내가 지옥을 너무 얕보고 있는 것 같죠?]”
“[아니라고는 못 하겠군요.]”
“[얕보는 건 당신들이에요. 회개하지 않은 자는 전부 지옥으로 처박아 버릴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당신들이야말로 신을 우습게 보는 거죠.]”
“[형제님.]”
“[이그나시오예요.]” 돌연 청년이 말했다. 바오로 신부는 눈을 살짝 찡그렸다. 익숙한 이름이었다. 성경에도 나오지 않던가. 사도 요한의 제자 중 하나인 안티오키아의 성 이그나시오. 바오로 신부의 몸이 다시 돌아갔다. 눈이 마주쳤다. 이그나시오는 웃음을 지운 채 신부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영성체를 받지 않아요. 죄를 사해달라고 빌지도 않을 거고요. 잘못한 게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글쎄요, 뉘우치고 말고는 내가 정할 거예요.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불경한 소리라는 것만은 잘 알겠습니다.]”
“[말이 좀 통하네요.]”
이그사니오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러니까 김래빈한테 엄한 소리하지 말라고요. 덧붙이는 말에 바오로 신부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하늘에 맹세코 그는 김래빈 형제에게 엄한 소리를 한 적 없었다. 세례도 받지 않은 창창한 청년이 주일 미사마다 구석진 곳에 앉아 있는 게 신경 쓰였을 뿐이었다. 바오로 신부에게 죄가 있다면 무지한 인간의 질문에 높고 깊은 신의 뜻을 전달했다는 것밖에 없다.
이그나시오는 등을 돌렸다. 미사가 시작하기까지 삼십 분쯤 남아 있었다. 슬슬 준비를 시작해야 했다. 벽면에 걸린 시계를 한번 힐끔 곁눈질한 바오로 신부는 목을 가다듬었다.
“[미사를 지내고 가지 그러십니까.]”
“[방금 말이 좀 통했다고 생각했는데요.]”
“[원하지 않으신다면 어쩔 수 없군요.]”
바오로 신부는 걸음을 옮겼다. 신자는 아니나 손님이었다. 배웅하는 게 도리였다. 이그나시오는 탐탁지 않은 듯 보였으나 따라붙은 발걸음을 구태여 거절하진 않았다. 그들은 대화 없이 걸었다. 성당 밖에선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굵은 빗줄기가 사정없이 땅을 두드리며 일정한 울림을 가지고 진동했다.
“[우산은 있으십니까?]”
“[없어도 괜찮아요.]”
이그나시오가 한 걸음 내디뎠다. 그렇군요, 하며 바오로 신부는 젊은이의 잘생긴 얼굴을 뜯어 살폈다. 동생이라더니. 전혀 닮지 않았다. 게다가 키도 이그나시오 쪽이 더 컸다. 아마 피로 이어진 형제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불(Ignacio)이라니. 참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형제님의 삶에도 많은 고난이 있었겠군요.]”
그 말을 뱉은 건 온전한 충동이었다. 고해성사 규칙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발언이었으나 바오로 신부는 어째서인지 자신의 이야기를 멈출 수 없었다. 턱에 나사가 풀린 것처럼 말은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막 빗줄기 속에 나섰던 이그나시오가 멈췄다. 고개를 들었다. 눈이 선뜩하리만치 예리하게 빛났다.
“[무슨 뜻이에요?]”
“[말 그대로의 뜻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불이었을까요?]”
이그나시오가 눈을 찡그렸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형형한 눈을 올려다보던 바오로 신부가 말했다.
“[보육원에 불이 났다고 했지요.]”
“[고해성사를 봤어요? 김래빈이?]”
“[형제님은 알고 계시는군요.]”
“[세례도 받지 않은 사람인데?]”
“[김래빈 형제님은 알지 못합니다.]”
짧게 뜸을 들인 신부는 이내 덧붙였다.
“[두려워하더군요. 당신의 죄로 인해 동생이 지옥에 갈까.]”
빗소리가 컸다.
이그나시오가 빗줄기에 녹아 없어졌다. 세상이 하얗게 일 만큼 세찼는데도 거리낌 없이 나아갔다. 그 등이 어둠에 물들었다가 이윽고 자취를 감출 때까지 바오로 신부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보이지 않은 표정을 헤아리며 바오로 신부는 어쩌면 자신이 은퇴할 때가 도래했는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렸다.
00.
김래빈. 손 안 아파? 다 쓸렸는데.
…….
김래빈. 왜 이렇게 떨어? 무서워?
…….
김래빈. 괜찮아?
…….
김래빈. 나 머리 아파.
…….
…….
……조금만 더 가고 쉬자.
15.
그날에도 장대비가 내렸다면 죄책감이 그나마 덜했을까. 궁금해한 적이 있다. 공기가 말라붙어 있던 덕에 불이 더 잘 붙은 건 아닐까, 하고. 마른 낙엽처럼 타들어 가는 건물을 아주 멀리서 보다가 만약 여름이었다면, 장마철이었다면, 그래서 비가 내리고 있었다면. 그랬더라면 불길이 조금 더 일찍 잡혔을까 고민한 적이 있다.
성경에서 일컫는 연옥은 죽은 자를 위한 장소일지언정 지옥이란 통칭은 눈에 보이는 무언가에 특정하지 않는다. 김래빈은 제 손에 성냥갑이 들린 순간부터 이후의 일을 아주 모호하게 기억한다. 하지만 희미한 기억 기저에 깔린 감정은 몹시도 강렬하다. 신께선 모르는 자를 탓하지 않으시나 알고 행한 자는 벌하신다.
비틀어진 성냥갑을 내려다보며 김래빈은 그 자신이 아주 오래전부터 이 순간만 기다려 왔음을 깨달았다.
문을 지키던 어른을 밀었다. 그 주머니에서 성냥갑을 꺼냈다. 불을 붙였다. 따닥따닥 튀는 불티를 바라보다가 다시 계단을 올랐다. 차유진의 몸에도 불이 있었다. 펄펄 들끓는 열마저 태워주기를 간곡히 바라면서 그를 깨웠다. 그렇게 도망쳤다. 전부 두고 뛰쳐나왔다. 버린 유류품은 화마가 삼키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별을 대비한 까닭은 보잘것없었다. 자각한 어느 순간. 방아쇠를 당기는 건 어렵지 않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으슥한 골목길에 기댄 채 김래빈은 숨을 골랐다. 어깨 아래부터 감각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도망치고 도망치다가 쓰러졌다. 싸우고 발악하고 물어뜯고 주먹질하다가 어느 순간 전원이 끊긴 로봇처럼 픽 주저앉았다. 그러자 피로가 몰려들었다. 눈꺼풀을 무겁게 짓누르며 그를 깊은 잠으로 부르고 있었다. 차가운 손끝이 움찔거렸다. 매끄러운 철제 통은 뿌연 감각 속에서도 간신히, 그러나 의외로 뚜렷하게 만져졌다.
허기가 졌다.
01.
발소리를 들었다. 네가 오고 있음을 안다.
철제 상자 안에 꾹꾹 눌러 담은 돈과 편지와 그 속에 숨긴 죄악감을 지니고 멀리멀리 도망가기를 마음 깊이 바란다. 이유를 묻거든 대답은 정해져 있다.
어쨌든 너는 잘살아야 하니까.
00.
늦어지는 듯하여도 너는 기다려라.
그것은 오고야 만다. 지체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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