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GRB

사과나무 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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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 @admin
2025-11-29 21:36


시작하기에 앞서

1. 본 글은 유진래빈 앤솔로지
에 참가한 글입니다.





바람 냄새가 났다. 드문 일이었다.

코끝이 미세하게 간지러웠다. 단잠을 깨우는 방해꾼에 차유진은 고개를 뒤척였다. 아직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그는 직전까지 아주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온전히 깨어나지 못한 정신이 몽롱하게 사유했다. 다리가 어디 있지. 내 다리가 어디로 갔지. 손은 또 어떻고. 하반신이 느껴지지 않는데.

그리고 다시 풍기는 바람 냄새. 약간의 습기를 머금었다. 피붓결과 맞닿으며 눅진하게, 또 언뜻 산뜻하게 지나쳤다.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칼이 이마를 간질였다. 한차례 북풍이 불었다. 콧잔등에 무엇인가가 떨어졌다. 반쯤 벌어진 입에 들어온 걸 반사적으로 깨물자 씁쓸한 즙이 나왔다.

“으엑.”

혀를 톡 쏘는 쓴맛에야 차유진은 눈을 번쩍 떴다. 그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이불은 반쯤 밀려 떨어졌고 베개도 바닥을 나뒹굴었으나, 그래도 침대는 침대였다. 매트리스를 한 번 쓸어내린 차유진은 시선을 돌렸다. 제 입속을 침투한 짓궂은 장난꾸러기는 다름아닌 이파리였다.

잎사귀를 퉤 뱉고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시야가 넓어졌다. 볕뉘가 켜켜이 쌓여 얼굴에 쏟아지고 있었다. 숲이라고 말하기엔 조악하나 어찌 되었든 나무의 군락이었다. 드문드문 심긴 나무들은 하나같이 잎이 파랬다. 차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꺾었다. 하늘도 푸르렀다. 햇빛이 눈을 아프게 쏘는 탓에 오래 볼 수는 없었지만. 사실 자다 깬 직후라 눈이 더 아픈 것도 사실이다.

차유진은 대신 고개를 내렸다. 하늘을 알고 싶다면 위가 아닌 땅을 보면 됐다. 그림자가 하늘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신선한 바람이 한 번 불 때마다 이파리가 우수수 떨렸다. 그림자도 함께 공명했다. 점점이 흩날리는 볕뉘. 길게 늘어지는 침대. 위를 덮는 자신.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끝에서 불투명하게 일렁이는 불규칙한 움직임. 유리창이 하늘을 뒤덮고 있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여긴 일종의 온실인 셈인 것이다. 그리고 온실이라면 즉 관리인이 있다는 건데.

차유진은 생각한다. 여긴 어디인가. 아주 오래 고민했거늘 답은 명징하지 못했다. 그래서 차유진은 질문을 살짝 바꿨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자다 깼다는 사실은 알겠다. 잠들기 전은 기억나지 않으나 적어도 침대에서 태평히 눈을 붙이진 않았으리라. 이마저 대답이 시원찮자 차유진은 마지막으로 질문을 뽑아냈다. 여기엔 나 혼자뿐인가?

다행스럽게도 이번엔 깔끔한 답이 나왔다. 물론 차유진의 작은 머리통에서가 아니라.

“……차유진?”

누군가 잎사귀를 밟으며 걸어왔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차유진은 태평하게 생각했다. 찾았다. 내 대답.



*



결론부터 말하자면, 차유진은 김래빈을 알았다. 여기서 차유진이 뜻하는 앎이란 단순히 상대의 신상정보를 파악하고 있다는 데에 국한하지 않았다. 차유진이 의미한 앎이란 조금 더 깊이 있는 유대감의 영역이었다.

그들은 아주 오랫동안 서로를 알고 지냈다. 얼마나 깊이 알고 지냈냐면, 차유진이 신체를 여섯 번째 교체하던 날 김래빈은 차유진 앞에서 울었다. 낡은 몸을 뜯고 새 부품을 가져다 붙이는 건 옳지 못한 일이라며 호소했다. 그때 김래빈은 부러진 오른팔을 교체하지 않고 부목으로 고정해 둔 상태였다. 차유진은 그걸 내심 미련하다고 생각했다.

차유진은 김래빈을 알았기에 조금 놀랐다. 임무를 수행 중이라 여기서 지낸다는 김래빈의 말은 어딘가 기묘한 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일컬은 ‘여기’란 멸망한 모성 지구라는 사실을 깨닫곤 더더욱 놀랐다. 하다못해 생존율이 클 바다 근처를 마다하고 선택한 곳이 허허벌판 사막 중심인 것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랬어?” 하고 묻자 김래빈은 대답 대신 눈을 가늘게 떴다. 악문 입이 고집스러웠다. 저 표정을 지은 김래빈은 항상 대답을 거부했다. 이번에도 그랬다. 넌 알 것 없다며 핀잔한 김래빈은 식탁에 앉은 차유진 앞으로 그릇을 밀었다. 이거나 먹으란 뜻이었다. 수프에선 드물게도 향긋한 허브 냄새가 났고 그건 차유진을 조금 들뜨게 했다.

“허브 어디서 났어?”

그러자 김래빈은 잠깐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온실에서 땄어. 갓 수확한 거니 향이 좋을 거라고 장담해.”

차유진은 수프를 한 숟갈 가득 떴다. 입에 머금자마자 김래빈의 말이 사실임을 알았다. 허브 향이 입안을 가득 메운 것이다.

“맛있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했다. 그러자 김래빈이 입을 움찔댔다. 잠시 머뭇거리던 김래빈은 이내 양은 충분하다고 말했다. 더 먹고 싶다면 얼마든지 더 먹으란 말이 뒤따랐다.

이런 식의 식사는 오랜만이었다. 차유진과 김래빈은 무언가를 먹을 필요가 현저히 떨어졌기에 미각도 그다지 발달하지 않았다. 주는 대로 먹는다는 말의 훌륭한 표본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특성상 식자재가 풍부한 별로는 파견 자체가 드물었다. 말라비틀어지는 별에 긴급 수액처럼 뿌려대는 게 그들이었다. 콩 한 쪽 찾기 어려운 별에선 맛과 영양소 중 하나만 선택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은 당연하게도 항상 후자를 골랐다.

식사를 끝내고 차유진은 김래빈을 설득해 끌고 나왔다. 설거지는 나중에 해도 된다는 말에 김래빈은 어째서인지 크게 감명받은 듯했다. 그들은 걸었다. 숲이라기엔 작고, 수풀이라기엔 큰 군락 사이를 거닐며 긴 이야기를 나눴다. 차유진은 김래빈에게 내가 왜 여기 있느냐 물었다. 김래빈은 아주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파견 나온 직후 교체한 신체에서 치명적인 결함이 발견되었어. 본부에서는 임무 수행에 방해될 것을 염려해 교체 부품이 도착할 때까지 본체와의 연결을 끊어놓기로 했고.”

“난 그런 기억 없는데.”

뺨을 긁적이자 김래빈은 고개를 돌렸다. 이어진 문장엔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작은 뒤통수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치명적인 결함이라고 했잖아. 부품을 교체하는 과정에서 기억 데이터 일부분이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커.”

이상한 말이었다. 하지만 차유진은 구태여 캐묻지 않기로 했다. 김래빈이 제법 불편해 보였을뿐더러 더 중요한 질문거리가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 이번 임무는 지구야?”

김래빈은 그 질문에 대답하는 데에도 한참이 걸렸다. 겨우 고개를 끄덕인 게 대답의 전부였다.

차유진은 그제야 이 군락을 이해했다. 숲이라고 하기에 애매한 까닭은 아마 그만치 자라기에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리라. 이 온실은 아마도 그들의,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김래빈의 영역일 테고.

차유진은 감각을 슬쩍 확장해 보았다. 김래빈의 영역은 제법 규모가 컸다. 외곽을 따라 걸으면 너덧 시간은 족히 걸릴 크기였다. 원형이 아닌 타원형이었는데 꼭 거대한 달걀을 눕힌 것처럼 보였다. 영역을 둥글게 덮은 투명한 유리 벽은 근원을 지하에 두었다. 유리 껍질만 똑 떼온다면 동그란 요람과 닮았을 것이다.

하기야. 모성 지구는 몇 세기 이전 겹겹이 겹친 재앙을 이기지 못하고 멸망했다. 적어도 그렇게 들었다. 이때 통상적으론 인재가 아닌 자연재해라고 기록되었으나 몇몇 사람은 그것들이 인재가 아닐 수 없다고 주장했다. 육지의 삼십 퍼센트가 모래사막이, 사십 퍼센트가 암석사막이 된 상황에서 탓할 생명체는 하나밖에 없지 않냐며 말이다. 인류는, 정확히 말하자면 살아남은 인류는 모성 지구에 그들을 보내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한동안 시끄러웠다. 몇 번의 대규모 회의와 전인류적 투표 끝에 그들의 파견은 결렬되었다.

“왜 하필 지금이야?”

그래서 차유진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인류는 한 번 모성 지구를 포기했다. 골든 타임은 지나다 못해 까마득했다. 모성 지구를 잃은 시간 동안 인류는 망망공허를 표류하다 외딴 별에 정착했다. 모성 지구와 닮은 모습이라곤 조금도 없었으나 인류는 기어코 적응해 냈다. 인류는 이제 외딴 별을 고향으로 삼는 세대가 주류였다. 그만한 시간이 흘렀다. 인제와 모성 지구에 우리를 파견하는 건 비상식적인 일이며 낭비에 불과했다.

앞서가던 김래빈이 잠시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반쯤 숙이자 머리칼이 흘러내리며 하얀 목덜미가 드러났다. 볕이 이렇게 강한데 조금도 타지 않았다. 혈색이라곤 없는 목에서 시선이 조금 더 내려가면. 펄럭이는 옷자락 틈새로 까만 점 같은 것이 언뜻 비쳤다. 점과 줄로 이뤄진 바코드였다. 또한 그들의 이름이며 정체성이었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결정도 아니었어.” 하고 김래빈이 느리게 말했다. 문장 사이의 간격이 드물게도 길었다. 차유진은 바람에 흔들리는 옷자락 틈새를 집요하게 관찰했다. 피부에 점점이 박힌 바코드 아래엔 숫자 일이 네 번 연속 찍혀 있었다. “하지만 윗선에서 결정한 사실을 내가 바꿀 수도 없는 노릇임을 알잖아. 손이 비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고, 형께서는 내게 선택지를 주셨어. 아주 멀리 떨어진 변방의 별과 모성 지구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셨지. 변방의 별엔 죽은 기계들이 한껏 쌓여 있어서 그곳도 무덤과 다를 바 없을 거라고 하셨어.”

펄럭, 하며 옷자락이 나부꼈다. 바람에 이물질이 섞여 있었는지 눈이 찌르르 아팠다. 차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찡그렸다. 눈물이 살짝 고였다. 손등으로 슥슥 닦아내는데 김래빈이 말했다. 차분하리만큼 담담한 목소리였다.

“이도 저도 무덤일 거라면 모성 지구가 낫다고 생각했어.”

차유진은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묻거나 말꼬리를 잡는 대신 슬쩍 발을 맞추어 섰다. 곁눈질로 바라본 김래빈은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있었다. 어딘가 심경이 상당히 복잡해 보였다. 채 내뱉지 못한 말들이 얼굴 곳곳에 안개처럼 자욱하니 끼어 있었다.

“혹시 네가 착각할까 염려되어 하는 말이지만, 나는 내가 모성 지구를 살릴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아! 모성 지구를 되살리는 건 우리 둘로는 역부족임을 인지하고 있어.”

김래빈이 어깨를 으쓱였다. 차유진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아무리 행성을 살리는 게 그들의 업이라지만 모성 지구는 조금 상황이 특별했다. 몇백 년을 방치된 쓰레기통을 고작 몇 년 만에 청소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에 가까우니 말이다.

“그렇지만 할 수 있는 선에선 최선을 다해볼 생각이야.”

김래빈은 그렇게 말했다.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조금 의뭉스러웠다. 차유진은 반사적으로 김래빈을 봤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쳤고, 잠시 할 말을 잊었으며, 그와 거의 동시에 고개가 빳빳하게 돌아갔다. 제 머리 위로 쏟아지는 볕뉘를 가리며 차유진은 멍하니 생각했다. 방금 뭐였지?

모성 지구엔 그와 김래빈뿐이었으므로 대답해 줄 사람은 없었다.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



모성 지구를 잃은 인류는 몇 세기를 걸쳐 우주를 떠돌았다. 그들은 항상 어딘가에 정착하고 싶어 했다. 단단한 대지에 발 붙인 채로 태어난 사람들은 마치 숙명처럼 그들을 지탱할 중력과 대지를 찾아 헤맸다. 처음은 항상 서툴기 마련이므로 그들 또한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쳤다. 가능성을 보고 내려섰던 별에 실망하고 다시 우주로 돌아갔다. 기묘한 회귀와 불분명한 시도를 몇 번씩 시도한 끝에 그들은 어느 날엔가 정착에 성공했다.

일반인이라면 딱 그 정도만 알았다. 교과서에서 말하는 시행착오가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가벼운 실수 정도로 묘사하는 착오가 실은 별을 완전히 죽이는 오판이었다는 사실은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숨겨졌다.

완전하고도 은밀한 은폐를 위해 그들이 태어났다. 외딴 별 중심부에 있는 커다란 정보 저장소에서 태어난 그들은 인류의 시행착오들을 씻어내는 역을 도맡았다. 죽어가는 별에 떨어져 몇십 년에 걸쳐 별을 되살렸다. 죽거나 다쳐도 걱정이 없었다. 그들의 육체는 일회성이었으며 부분 교체도 손쉽게 이뤄졌다. 완전히 망가진 육체는 코어만 회수한다면 새로운 육체에서 눈 뜰 수 있었다. 그들을 개발한 소장은 더러운 것을 씻어 없애고, 화기를 억누르며, 정순한 물을 다룬다는 전설의 동물로부터 이름을 따와 해태라고 붙였다.

차유진과 김래빈은 육 세대 해태였다. 그들은 의식을 저장한 정보 저장소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다. 자율성과 주체성이 높은 모델로 개발한 그들은 지령이 닿기 어려운 변방의 별을 살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차유진은 개중에서도 특출난 모델이었다. 다른 말로 유별나게 제멋대로라는 뜻이었다.

지령을 무시한 적은 없었으나 곧이곧대로 들은 적도 손에 꼽았다. 차유진이 보기에 명령을 내리는 윗선은 어딘가 머리 한구석이 꽃밭인 감이 있었다. 항상 그랬다. 말이 좋아서 오염된 별이지 실상은 사지와 다름없었다. 일일이 조종할 수 없으니 편의성을 위해 지성을 부여했다고 주장하는 그들을 보며 차유진은 매 순간 가소로움과 약간의 분노를 느꼈다. 멸망을 겪으며 하나로 똘똘 뭉친 인류는 지난 공포를 뼛속에 새겼는지 유달리 배척성이 강했다. 그것도 무척이나.

지성은 주었으나 감정은 허락하지 않겠다니. 자주성은 부여할 것이나 살고자 하는 본능은 인정하지 않는다. 명징한 모순은 항상 차유진을 피곤하게 했다.

그래서 차유진은, 김래빈의 영역인 유리 온실 안에서 지낸 여느 세월 동안, 더할 나위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모성 지구와 현 인류의 요람은 아주 멀었다. 당연히 지령 따위가 도착할 일도 없었다. 차유진은 그저 맘껏 먹고 놀고 김래빈을 도와 영역을 조금씩 넓혔다. 가장자리를 따라 걸으면 너덧 시간이 걸리던 온실은 어느덧 하루가 꼬박 걸릴 만큼 커졌다. 단순한 나무의 군락도 어느새 제법 숲을 닮아 갔다. 제게서 발견되었다던 중대한 결함 같은 건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유진은 김래빈이 더욱 신경이 쓰였다.

기억은 불분명했으나 확실한 점은 하나 있었다. 차유진은 김래빈과 파트너였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처음 눈을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유진과 김래빈은 같은 조원으로서 활동했다. 형들과 함께 옛 문헌에 나오는 질병의 이름을 딴 반동분자들을 물리치기도 했다. 아주 먼 별에서 푸른 새벽을 보고, 우주 저 끝까지 날아갔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확신할 수는 없으나 그들 사이엔 단순한 조원 이상의 감정이 짙게 쌓여 있었다. 유대감을 닮았으나 보다 더 농도 깊은 종류였다.

그러나 가장 께름칙한 건, 그런 김래빈의 얼굴을 볼 때마다 이상하리만치 오랜만인 기분이 든다는 사실이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항상 살을 부대끼고 지낸 주제에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자리를 지키는 김래빈이 생소했다. 마치 있어선 안 될 사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사라지는 게 당연한 듯싶다가도 시야에서 벗어나면 작은 불안감이 용솟음쳤다. 차유진은 그럴 때마다 손을 지그시 쥐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푸른 하늘. 내리쬐는 볕. 시원한 바람. 그리고 그 중간에 선 김래빈이 얼마나 당연한 일인지를 한없이 곱씹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차유진은 시야 끄트머리에서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거듭하는 김래빈이 얼마나 일상적인지를 되뇌려 애쓰고 있었다. 코어는 심장을 닮지 않아 쿵쾅대지 않았으나 점점이 이어지는 불온한 전기 신호는 차유진의 전신에서 따끔거렸다. 아주 깊은 잠에서 깨어난 탓에 채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건가. 차유진은 멍청한 생각이나 하다가 간신히 떨쳤다. 한도 끝도 없어지는 의뭉스러움에 눈이 절로 찡그려졌다. 차유진은 그냥 한숨을 삼켰다. 애써 다른 곳에 고정해 둔 시선은 보람없이 김래빈에게 향했다.

김래빈은 근래 바빴다. 재생 영역을 넓히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이상하리만치 푹 빠져 있었다. 이렇게까지 집중하는 건 처음이었다. 영역을 유지하는 데에는 코어의 에너지를 사용하기에 차유진은 조금 걱정이었다. 김래빈은 한 가지 일에 몰두하기 시작하면 주위를 종종 잊었다. 외딴 별에서야 문제가 없었으나 여긴 오염된 모성 지구였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 유리된다는 건 양날의 검이었다.

조금 쉬라고 말해야겠다. 차유진은 그렇게 결심하며 몸을 일으켰다. 숲 안쪽 샘에는 기분 좋은 바람이 부니 그곳에서 숨이라도 돌리자고 권유할 참이었다. 사념이 가득한 머릿속을 비우는 데에도 도움이 될 성싶었다. 차유진은 한 걸음 내디뎠다. 입을 열어 김래빈, 하고 불렀다. 사건은 그때 일어났다. 땅에 손을 짚어가며 열중하던 김래빈의 몸이 스르르 무너진 것이다.

비명도 뭣도 없었다. 건전지를 빼낸 로봇처럼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실수라기엔 이어지는 행동이 없었다. 그대로 잠들었다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됐다. 아니, 만일 저대로 잠든 거라면 그건 그것대로 심각한 일이었다. 해태는 사지에 던져질 것을 예상하고 설계되어 수면 시간이 엄격하게 짜여 있었다. 인간으로 치자면 본능인 시스템을 거슬렀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당황스러운 일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풀숲에 파묻힌 김래빈을 보며 차유진은 떠올리고 말았다. 본 적이 있음을. 김래빈이 제 눈앞에서 쓰러진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님을.

기묘한 일이었다. 김래빈과 나간 파견 근무에서 그들은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겼다. 쓰러진 김래빈이야 한두 번 본 것도 아니었다. 김래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팔다리 하나쯤이야 없어져도 상관없는 몸으로 만들어진 것도 그 이유였다. 그런데. 차유진은 반사적으로 주먹을 꾹 쥐었다. 과열된 몸체를 식히려 냉각수가 축축하게 배어 나왔다. 뭔가 이상했다.

본 적이 있어. 차유진이 멍하니 생각했다. 너는 내 앞에서 쓰러졌던 적이 있어. 한 번 기시감을 느끼자 기억이 우후죽순 이어졌다. 너는 눈을 마주치면서 내게 말했어. 치명적인 결함이 생겼다고. 그때는 아마 나도 누워 있었을 거야. 다름이 아니라 세상이 가로로 기운 채였거든. 그런데 왜일까. 내가 왜 누워 있었는지. 너는 왜 쓰러졌는지. 네가 말한 치명적인 결함이 무엇이었는지. 조금도 기억나지 않아.

시야가 점멸했다. 빛과 어둠이 번갈아 스몄다. 코어 한가운데에서 찌릿한 통증이 일었다. 차유진이 가슴께를 쥐었다. 코어가 있을 둥그런 공간을 생각했다. 하얀 껍질이 보호하고 있을 여린 기계 심장 같은 것을. 지금도 빼곡한 전산을 처리할 해태의 심장.

정말로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알 것만 같았다.





차유진은 눈을 떴다. 쇠 비린내가 났다. 사방이 어두웠다. 반쯤 닫힌 문틈으로 새어드는 빛으론 공간을 밝히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차유진은 몸을 일으켰다. 관절 부분이 삐걱댔다. 조립하다가 만 느낌이었다. 고정 나사가 어색하게 풀렸을 때 이런 느낌이 종종 났다. 팔뚝을 한번 괜히 쓸어내렸다. 손끝에 닿은 인공 가죽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김래빈은 어딨지.

한기 어린 공간이 어디인진 대강 유추할 수 있었다. 수리실일 것이다. 하지만 차유진은 수풀에서 쓰러졌다. 모성 지구에 김래빈 말고 다른 이가 있을 리 만무하므로 전원이 꺼진 차유진을 옮긴 건 김래빈일 터였다. 하지만 김래빈이 어째서 멀쩡한 제 관절을 후벼놨는지는 잘 모르겠다. 마땅한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눈을 찡그린 차유진은 직후에 김래빈의 말을 반추했다. 제게 있다던 치명적인 결함. 결국엔 그 때문일까.

잠시 침묵하던 차유진이 걸음을 옮겼다. 어찌 되었든 김래빈을 만나야 했다. 답을 찾지 못한 채 의문으로 곪아가는 건 성정에 맞지 않았다.

수리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유리 온실이 달걀의 흰자라면 이 공간은 노른자였다. 임시 거처이자 그들이 가장 나약해지는 곳이었다. 작은 노른자 안에서 그들은 고장 난 부분을 수리하고 탈피하듯 육체를 벗고 입었다. 그러나 가장 유약해지는 장소라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게 공간은 비교적 협소했다. 길도 어렵지 않았다. 곧게 뻗은 복도를 따라 걷다 보면 어디든 갈 수 있었다. 예산 문제도 문제였으나 그들이 파견되는 곳에 해태를 위협할 만한 생물은 살 수 없으리라고 추정한 윗선에서 직접 지시한 디자인이었다.

덕분에 차유진은 김래빈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김래빈은 통신실에 있었다. 유일하게 외딴 별과 연락이 닿는 공간이었다. 적어도 그렇게 설계되었다. 모성 지구와 외딴 별은 거리가 꽤 있었으므로 직접 통신하는 건 불가능할 거였다. 문은 반쯤 닫혀 있었다. 안에선 은은한 푸른빛이 새어 나왔다. 문을 밀고 들어가려던 차유진은 푸른색 앞에서 우뚝 멈췄다. 발끝에서부터 야금야금 밀고 올라오는 조명등을 지나친 시선이 틈새로 보이는 김래빈의 등으로 향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김래빈은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목소리는 차분하다 못해 어딘가 음울하게 들렸다. 착 가라앉은 음성이 텅 빈 공간을 울릴 때마다 차유진의 코어도 세찬 신호를 보냈다. 들어 올렸던 손이 그대로 떨어졌다. 의도한 건 아니었다. 헐거웠던 접합부 부분을 간신히 붙들던 나사가 툭 빠져버린 탓이었다. 왼손으로 덜렁대는 오른손을 붙잡는데 김래빈이 말했다.

“형이 맞습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지금 차유진이 저렇게 되어버린 건 오류를 발견하자마자 보고하지 않았던 제 탓이 큽니다. 형은 아니라고 하실지 몰라도, ……아니요. 형이 옳습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나사가 발치에서 굴렀다. 깡통 구르는 소리가 났다. 그 위를 김래빈의 목소리가 덮었다. 바람 없는 호수 수면 같았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주 오랫동안 곱씹어 본, 그래서 본인에겐 몹시 당연해진, 오늘도 지평선에서 해가 떴다는 명징한 사실을 밝히듯이.

“그런데, 형.”

“…….”

“저는 가끔 어떤 가능성에 대해 생각합니다.”

손에 쥐었던 고철 덩어리가 떨어졌다. 철판 부딪히는 소리가 퍽 컸다. 대화에 열중하던 김래빈의 등이 움찔했다. 모니터를 응시하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그렇게 눈이 마주쳤다. 놀란 기색은 없었다. 평온하던 얼굴에는 금이 갔으나 그건 충격이나 경악보다는 농도 짙은 피로감에 가까웠다. 미뤄두었던 숙제를 뒤늦게야 마주한 사람처럼.

“몸은 좀 어때?”

다가온 김래빈이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차유진은 떨어진 팔과 김래빈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제야 김래빈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갑작스럽게 전원이 꺼졌길래 점검 중이었어. 도중에 급한 연락이 와서 자리를 비웠는데 그새 깨어날 줄은 몰랐어. 미안해.”

“누구야?”

“형들.”

차유진은 그 말에 어렴풋한 형체를 떠올렸으나 누군가를 특정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입을 달싹이는데 김래빈이 차유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고갯짓은 수리실을 향했다.

“가자. 도로 붙여줄게.”

“간다고 말 안 해도 돼?”

“아.” 잠깐 멈칫한 김래빈은 서둘러 등을 돌렸다. “잠깐만!”

차유진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안쪽에서 김래빈은 약간의 타박과 조금의 농담이 뒤섞인 대화를 주고받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닫고 나왔다. 조금은 개운해진 얼굴이었다. 그게 조금 이상했다. 김래빈을 두고 제가 하지 못한 일을 누군가가 해냈다는 게. 애당초 형들이라는 설명에 저도 모르게 이해한 것도. 차유진은 김래빈을 따라 수리실로 돌아가며 마침내 인정했다. 치명적인 결함은 정말 말 그대로,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수리실에 도착했을 때 김래빈은 차유진을 앉혔다. 구석에서 드라이버와 여분의 나사를 가지고 돌아온 김래빈에게 차유진은 팔을 건넸다. 떨어진 팔을 조립하는 김래빈은 제법 익숙해 보였다. 긴 대화는 없었다. 그들은 여상처럼 약간 투닥거렸고, 대화에 공백이 찾아왔을 때 차유진은 일부러 말을 걸지 않았다. 김래빈이 확실히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다음부터는 조금 더 소중히 대하도록 해. 네 팔이든 뭐든.”

나사를 완전히 조였을 때 김래빈이 말했다. 뿌듯한 표정이었다. 이마를 한번 훔치는 김래빈을 보는 눈이 절로 가늘어졌다. 입을 삐죽이자 공구를 정리하던 김래빈이 고개를 팩 돌렸다.

“왜 그런 표정이야?”

그건 내가 할 말인데. 차유진은 유치한 대꾸를 삼키고 다른 패를 꺼냈다.

“이제 김래빈 차례야.”

“무슨 소리야?”

“아까 김래빈도 쓰러졌어. 내가 김래빈 볼 차례야.”

차유진은 의자에서 내려와 앉았다. 푹신한 의자를 팡팡 치자 김래빈이 코웃음 쳤다. 나는 필요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차유진이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게 유감스럽기는 했지만.

“나는 김래빈 파트너고, 김래빈 없으면 이 임무 큰일 나. 그러니까 김래빈이 괜찮다는 거 내 눈으로 봐야 해. 난 그렇게 배웠어.”

“예외적인 상황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야, 차유진. 우기지 마!”

“지금은 예외 상황 아니야. 아니면 나한테 설명이라도 해. 김래빈이야말로 우기고 있어.”

김래빈은 한숨을 참듯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렀다. 그러다가 한숨을 푹 내쉰 김래빈이 발을 질질 끌며 걸어왔다. 의자에 앉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김래빈의 목적지는 차유진이었다. 어깨에 기대듯이 얼굴을 묻은 김래빈이 깊이 숨을 들이켰다. 훅 좁아진 거리에 차유진이 놀랄 틈도 없었다.

“너도 알다시피 모성 지구는 에너지를 수급할 수 있는 자원이 극도로 적어. 태양열과 풍력을 비롯한 모든 자연 요소를 총동원하고 있지만, 운이 나쁘면 종종 아슬아슬하게 적정량을 채우지 못해. 그 탓에 잠깐 절전 상태로 돌입했을 뿐이야. 전원이 아예 꺼진 너하고는 달라, 바보야.”

얇은 옷과 인조 가죽 너머에서 김래빈의 열기가 느껴졌다. 차유진은 잠깐 고민하다가 슬쩍 손을 들었다. 잘 조립된 팔이 올라가더니 김래빈의 뺨을 콕 눌렀다. 그대로 정적이 흘렀다. 일 초. 이 초. 그리고 삼 초.

김래빈이 눈동자를 굴려 차유진을 응시했다. 뭐하냐고 묻는 것 같았다. 그 불퉁한 얼굴에 지그시 삼켰던 말이 툭 튀어나왔다.

“내가 할 말인데.”

“뭐가?”

“김래빈 완전 뭐하냐고 하는 얼굴이었어. 눈 이렇게 뜨고 막.”

“내가 언제, 바보야!”

익숙한 타박과 함께 매운 손이 날아왔다. 차유진은 그걸 곧이곧대로 맞으면서도 연신 킥킥댔다. 속으로는 커다란 물음표를 그리고 있었지만. 김래빈이 아무렴 허물없는 사이래도 이렇게까지 거리감이 좁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김래빈의 행동이 의문스러운 것도 전부 그 치명적인 결함 때문일까.

한바탕 난리가 끝나고 소강상태에 이르자 김래빈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새 지친 기색이었다. 드문 일이었다. 파리채처럼 휘둘렀던 오른팔을 주물대는 김래빈의 곁에 슬쩍 다가가 붙었다. 있지, 김래빈. 말을 붙이자 무뚝뚝한 대답이 돌아왔다.

“왜?”

시선 한 번 안 던졌다. 예의 바른 김래빈은 제게만 어딘가 느슨했다. 그 사실은 이런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잘 드러났다. 차유진은 제게만 허용된 김래빈 특유의 널널함을 좋아했다.

“나 결함 있다고 했잖아.”

그런 김래빈이 이상하리만치 엄격해질 때가 있었다. 당장에선 이해할 수 없을 때가 태반이었다. 끝의 끝에 가서야 이해했을 때는 그 엄격함이 김래빈 기준에서 본인을 위한 거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차유진이 힐끔 김래빈의 얼굴을 살폈다. 그늘이 짙게 내려앉은 덕에 표정을 읽기가 쉽지 않았다.

“그거 김래빈이 고칠 수 있어?”

“결함이 뭔지는 물어보지 않는 거야?”

엉뚱한 질문이 되돌아왔다. 차유진은 대답을 신중하게 골랐다. 결함이 궁금하기야 하지만 듬성듬성 이뤄진 기억으로 어느 정도 추측했다. 아마도 기억 데이터를 저장하는 부품이 고장이 났거나 그에 준하는 오류일 것이다. 지금으로서 더 중요한 건 고칠 수 있느냐 없느냐였다. 그보다 궁금한 건 어째서 김래빈이 결함을 방치하느냐는 질문이었고.

그래서 차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침묵이 내렸다. 김래빈은 말이 없었다. 한참 조용하던 김래빈이 걸음을 옮겼다. 여분의 나사와 볼트를 모아놓은 상자였다. 무언가 뒤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김래빈의 목소리는 한참 낮았기에 차유진의 예민한 청각으로도 간신히 잡혔다.

“너는 결함을 고치고 싶어?”

이상한 질문이었다. 그렇노라고 대답하려던 찰나 차유진은 입을 다물었다. 목구멍이 턱 막힌 기분이었다. 돌멩이를 주워 먹은 것처럼 숨 쉴 수가 없었다. 목을 더듬대는데 김래빈이 나직이 말했다. 대답은 필요하지 않다는 양.

“그렇구나.”

김래빈의 말은 무심히 다가왔다. 조용하고 완전하게 맞이한 무언가의 한계처럼.





네가 상상하는 가능성이 궁금해. 차유진이 그렇게 말했을 때 김래빈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마시던 물컵을 차분히 내려놓곤 두 눈을 지그시 감더니 본인의 전원을 내려버린 것이다.

당연히 차유진은 대경실색했다. 아니 뭐 망상한 게 궁금하다고 본인 의식까지 꺼버릴 일인가? 같이 상상해 혼자 하지 말고! 유치한 감정과 더불어 너는 뭘 생각했기에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나 하는 불안감이 뱃속에서 느글거렸다. 스스로 전원을 꺼버린 김래빈은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차유진은 작은 노른자 속에서 진정한 적막과 마주했다.

전원이 꺼진 해태는 깡통과 진배없었다. 볼을 찔러도 눈 한번 찡그리지 않고 풀잎으로 간질여도 기침 하나 하지 않았다. 차유진은 미동 없는 김래빈의 머리맡을 제법 오래 지켰다. 김래빈이 그러고도 깨어나지 않자 자리에서 일어나 유리 온실을 둘러봤다. 주인의 코어가 잠들었으니 온실엔 대체 관리자가 필요했다. 누구도 임명한 적 없거늘 차유진은 스스로 그 역할을 도맡았다.

차유진은 관리를 꽤 잘했다. 아침마다 온실을 나가 갓 넓힌 영역에도 식물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도왔다. 병이 들거나 영양이 부족한 식물은 없는지 섬세히 살폈다. 설계한 적 없음에도 어느샌가 한두 마리씩 보이기 시작한 나비와 벌레 따위를 주의 깊게 관찰하기도 했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냇가에 발을 담갔다. 볕뉘는 눈을 떴을 때보다 빽빽했고 더위는 그때보다 한풀 꺾인 채였다. 조금씩 시원해지는 공기를 맡는 건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그날도 똑같았다. 차유진은 아침에 눈을 떴고, 김래빈이 여전히 도피 생활에서 빠져나오지 않았음을 확인한 후 온실로 향했다. 영역의 주인인 김래빈이 잠들어 영역을 넓히지 못하는 새 식물들은 제법 빽빽하게 자란 상태였다. 성장은 빠른데 영역은 좁으니 가지들이 저들끼리 얽히고설켰다. 가지치기라도 해주고파 나무를 만지작대는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시스템에 접속해서 권한을 얻고 영역을 넓히는 거였다.

불가능한 상상은 아니었다. 영역을 제어하는 시스템은 코어 밖에도 있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아마도 통제실 정중앙에 제어 시스템이 돌아가고 있으리라. 김래빈도 이 온실에 신경을 쏟고 있으니 이쯤은 괜찮겠지 싶었다. 제가 전원을 꺼버린 와중에 정원이 과포화 상태가 되어서 망가지는 건 김래빈으로서도 최악의 일일 테니까. 무엇보다 관리자를 자칭했는데 이전보다 못난 온실을 김래빈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차유진은 통제실로 향했다. 닫힌 문을 열자 어김없이 제어 시스템이 눈에 들어왔다.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제멋대로 전원을 꺼버린 김래빈에 대한 소소한 복수라는 생각에 약간의 통쾌함도 들었다. 프로그램을 순조롭게 돌리던 제어 시스템에 접속하자 시스템은 익숙하게 차유진을 반겼다.

겉보기엔 평범해 보였다. 저 구석에서 토끼 문양이 깜빡거렸다. 김래빈의 의식을 나타내는 토큰이었다. 괜히 손을 뻗어 쿡쿡 찌르자 문양은 여백을 두고 두어 번 깜빡거리더니 픽 사라졌다. 사라지기 보였던 그 몇 번의 점멸이 꼭 성가시게 하지 말라는 타박 같았다. 차유진이 킥킥 웃었다. 바보같은 김래빈은 아마 제가 시스템에 접근할 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통쾌함에 손끝이 찌릿했다.

차유진은 본격적으로 작업에 착수했다. 복잡하게 꼬인 메인 화면에서 영역을 관할하는 시스템으로 넘어갔다. 짧은 로딩을 끝으로 지금껏 김래빈이 수행해온 기록들이 빼곡하게 화면을 채웠다. 가장 끄트머리에서 반짝이는 추가 접속자 패널에 손을 올리려던 찰나였다. 차유진이 그 문장을 발견한 건.

잔여 용량 14퍼센트. 잔여 연료 27퍼센트.

내뻗었던 손이 우뚝 멈췄다. 차유진은 그 짧은 문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잔여 용량 14퍼센트. 잔여 연료 27퍼센트. 다시 읽어도 토씨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오류인가. 파랗게 빛나는 화면을 지그시 읽던 차유진이 무심코 생각했다. 김래빈은 최근 다소 피로해 보였는데. 시스템상 오류 때문이었던 건가.

그들은 외딴 별로 돌아갈 때마다 용량을 초기화했다. 자기 자신을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기억을 제하면 기타 정보들은 작게 압축해 깊숙한 곳에 넣어놓았다. 파견 임무 도중 용량 부족 사태를 맞닥뜨린다면 그 피해가 어떨지 예측할 수 없어서였다. 잔여 용량이 팔십 퍼센트 이하라면 파견 임무에 나가지 못할 텐데. 김래빈만 규칙에서 예외일 리가 없었다. 차유진 또한 지금까지 여러 기억을 작게 눌러 기억 속에 묻었다. 잔여 용량 14퍼센트. 망막에 맺힌 문장을 빤히 바라보던 차유진은 반사적으로 제 용량을 계산했다. 삼십이 퍼센트. 김래빈과 별반 다를 것 없다.

그렇다면 잔여 연료는?

오십육 퍼센트. 반쯤 찬 배터리가 시야 위에 가볍게 떴다가 사라졌다. 낯선 기시감을 느낀 건 그때였다. 차유진은 멈췄던 손을 움직였다. 추가 접속자 패널에 손을 올렸다. 인식 중이라는 안내문을 지나 새 화면이 떴다. 이미 등록을 완료한 사용자입니다. 거기서부터는 기시감이 얕은 확신이 됐다. 차유진은 제 시스템과 김래빈의 시스템을 연결했다. 김래빈의 기록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그리고 마침내 동기화가 끝났을 때. 차유진은 김래빈이 한 구석으로 밀어둔 온실의 정보를 불러왔다. 그리고 가장 아래에서 선명히 빛나는 연료량을 눈에 담았다.

주연료. 개체명 김래빈의 주동력. 잔여 십칠 퍼센트.

기타 연료. 모성 지구의 자가발전. 이십육 퍼센트…….

더 읽을 것도 없었다. 차유진은 동기화를 해제했다. 돌아가는 길에 차유진은 넋을 놓은 채 고민했다. 이 복도가 이렇게 길었던가. 이렇게 조용했던가. 왜 내 시스템은 김래빈의 것과 동기화되어 있을까. 김래빈은 무얼 숨기고 있을까. 애당초 나는 무엇을 잃었나.

한숨을 삼키며 다다른 곳은 눈을 감은 김래빈 앞이다.

“김래빈.”

김래빈의 이마에 손끝이 닿았다. 살짝 미니 저항 하나 없이 스르르 밀렸다. 여전히 전원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차유진은 그 앞에 무릎을 접고 앉았다. 들리지도 않을 테니 명백한 시간 낭비였다. 하지만 차유진은 어째서인지 입을 열었다. 어쩌면 이러지 않으면 참지 못할 것 같아서일지도 몰랐다.

“이거 치사해. 반칙이야.”

“…….”

“나한테 하나도 안 알려줬어.”

입을 다물자 죽음 같은 침묵이 몰려왔다. 차유진은 눈을 내리깔았다. 김래빈의 육체엔 열기 하나 없었다. 전원을 꺼버리자 동력원은 가동을 멈췄다. 덕분에 김래빈은 맥동하지도 않았다. 뛰지 않는 심장. 감은 눈. 온기 없는 피부. 그 모든 것을 헤아리던 차유진은 이내 조소했다.

어쩌면 너는 죽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내가 모르는 이런저런 까닭에. 내가 모르는 이런저런 시간들을 지나서. 네가 숨긴 이런저런 순간을 거쳐 지금, 비로소.

그래도 김래빈.

긴말은 하지 않을 테니 그냥 돌아와. 화내지도 투정 부리지도 않을 테니 적당한 때에 눈을 뜨는 거야. 떠나지 않을 테니 그냥 그렇게, 일어났다며 좋은 아침이라는 인사를 건네봐. 그러면 볕 좋은 곳에서 바람 냄새를 맡으며 얘기하자. 내 결함과 네가 숨긴 것들과 그 모든 걸 아우르는 아주 커다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그 모든 말을 꼭꼭 씹어 삼킨 채 차유진이 눈을 감았다.





“일어나, 차유진! 언제까지 잘 셈이야?”

벼락같은 고함에 차유진이 눈을 번쩍 떴다.

어젯밤 온실 한가운데에서 넋을 놓은 것까진 기억하는데. 이후엔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이 없었다. 묘하게 욱신대는 뒤통수를 만지작대던 차유진이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여전히 잔디밭 위였다. 탁 트인 정경은 변함이 없었다. 그냥 환청이었나? 뺨을 긁적이던 차유진은 몸을 일으켰다. 그나저나 환청도 웃기지. 도무지 일어날 생각을 안 하는 건 김래빈인데.

“깼으면 나 좀 도와줘. 사다리가 쓰러져서 도무지 내려갈 수가 없어!”

그러니까, 일어날 생각을 안 하는 건 김래빈……이었는데.

“김래빈 거기서 뭐 해?!”

“보면 몰라 바보야? 가지치기하잖아!” 훌쩍 자란 나무 위에 대롱대롱 매달린 김래빈이 꽥 소리를 질렀다. “보지만 말고 좀 도와달라니까! 떨어질 것 같단 말이야!”

차유진은 얼마 전 보았던 시스템 동기화 메시지를 떠올렸다. 그리고 단단히 의심하기 시작했다. 실은 동기화 안 된 거 아냐? 동기화가 된 거면 쟤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왜 저기에 매달려 있는데? 가지치기가 말이야?

“차유진, 빨리!”

그래도 김래빈의 비명은 나름대로 좀 절박하게 들렸다. 차유진은 터지려는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것을 꾹 삼키며 걸음을 옮겼다. 사다리는 정말 근처에 쓰러져 있었다. 그 위에 서 있다가 잘못 쳐서 쓰러진 모양새였다. 주섬주섬 사다리를 들자 나뭇가지에 매달렸던 김래빈이 외쳤다.

“사다리가 생각보다 잘 흔들리니 아래쪽을 잘 잡고 있도록 해!”

“잘 잡고 있어, 바보야!”

가지에 매달렸던 김래빈이 가위를 품에 인 채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신중한 걸음이 땅에 닿을 때까지 차유진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물론 속으로는 김래빈 나 김래빈이 이럴 때마다 울고 싶어 하며 눈물 찔끔 흘리고 있었지만. 뭐든 겉모습이 멀쩡하면 된 거라고 스스로 위안하는 순간에 김래빈이 땅으로 내려왔다.

“고마워. 사다리는 나 줘.”

“가지치기 좀 더 있다가 나랑 같이 해도 되잖아.”

“네가 곤히 자는데 그걸 어떻게 깨워?”

“거짓말. 김래빈 방금 잘만 깨웠어.”

“그건 사다리가 쓰러져서…….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에 널 깨운 거니 의미가 조금 달라!”

말꼬리를 잡는 대신 차유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눈을 흘기는 걸 보니 김래빈도 제가 순순히 이해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듯했다. 차유진으로서는 오히려 반가웠다. 한참 만에 깨어난 동료가 나뭇가지에 매달려서 추락사 위기를 직면해 있으면 그게 반갑나. 어이가 없지. 단박에 이해할 수 있음 그 사람도 좀 의심해 봐야 해.

그러거나 말거나. 김래빈은 차유진에게 표정을 갈무리하라고 잔소리를 몇 마디 던지더니 걸음을 옮겼다. 한 손에는 쳐낸 가지를, 반대쪽엔 사다리를 이고서는 망설임 없이 걷기 시작했다. 차유진은 자연스럽게 보폭을 맞췄다. 사다리는 내가 들까, 하고 묻자 김래빈은 고개를 저었다.

김래빈은 노른자 속으로 쏙 들어갔다. 사다리를 집어넣고 가지들은 도로 들고나왔다. 번거롭게 들고 다닐 필요가 있나. 저 가지들은 어디에 쓰게. 의문을 구태여 내뱉지는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김래빈이 어련히 잘하겠지 싶기도 했고. 묻기도 전에 의문이 해결된 덕도 있었다.

김래빈은 가지를 조금 떨어진 평지로 가져갔다. 전에는 없던 구역이었다. 제가 잠들고 김래빈이 깨어나며 엇갈렸던 그 찰나의 순간에 생겨난 듯했다. 김래빈은 흙을 파헤치고 가지를 차곡차곡 심었다. 가지는 몹시 많았기에 차유진도 팔을 걷어붙였다. 땅을 파고 가지를 심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네가 궁금해할 게 아주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김래빈이 말했다. 차유진은 대답을 고르다가 관뒀다. 그렇다고 대답하는 건 너무 당연했으니 오히려 시간 낭비였다. 차유진은 대신 가지를 집었다. 땅을 파헤치며 꼿꼿하게 심었다. 그러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궁금한 것을 물어보라고 하는 게 나을까? 아니면 우선 내가 설명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설명해 줘. 그다음에 물어볼래.”

이야기는 한참의 공백 끝에 시작했다. 바람과 볕이 적당히 안온한 낮을 간식거리 삼아서.

아주아주 먼 옛날에. 아니, 실은 그렇게까지 멀지는 않고. 우리가 태어나고 훈련받고 아직은 신입 해태로서 선배들과 함께 파견 나가던 그 시절에. 차유진과 김래빈이 많은 것에 서툴던 그때.

“너는 한번 죽었어.”

그들에게는 죽음이라는 개념이 없다. 물리적인 파괴를 죽음으로 삼지 않자 죽음이라는 개념 그 자체가 모호해졌다. 김래빈이 죽는다고 표현한 것들의 진의가 궁금했다. 차유진은 질문을 삼켰다. 이후 물어볼 심산이었다. 직후에 김래빈이 대답하지만 않았더라면.

“해태는 죽지 않는다는 건 당연한 전제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차유진. 너는 분명 죽었어. 육체는 부서졌고 심장은 완전히 파괴되었어. 선배들은 네 파편을 회수해 외딴 별로, 본부로 가져갔지만 이 정도 고장은 고칠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어. 그렇다면 돌려달라고 요구했더니 그들은 이미 폐기 처리를 완료했다고 했지.” 김래빈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땅을 고르게 두드리던 손은 어느샌가 멈춰 있었다. 담담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그가 조용히 읊조렸다. “우습게도 나는 네가 폐기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야 네 죽음을 실감했어.”

존재하지 않는 기억이었다. 차유진은 폐기당한 적이 없었다. 반사적으로 제 몸을 훑었다. 손과 발에서 시작하는 모든 감각이 선명했다. 조금 더 집중하면 온몸에 에너지를 보내려 힘차게 박동하는 코어가 느껴졌다. 손끝에 감기는 축축한 흙, 까끌까끌한 나뭇가지, 걷어붙인 소매와 드러난 맨살을 스치는 바람. 온갖 감촉이 이다지도 또렷한데.

그런데도 차유진은 김래빈을 본다. 그리고 네가 실감했다던 죽음이란 무엇인지 상상한다. 침묵은 짧았으나 상상은 공백을 채우고도 남았다.

이후의 일을 설명하는 김래빈의 목소리는 느렸다. 높낮이가 없었고 문장은 이상한 곳에서 한두 번씩 뚝뚝 끊겼다. 가끔 말이 끊길 때면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그 빈자리를 채웠다. 차유진은 그럴 때마다 얼마 전 보았던 잔여 배터리양을 떠올렸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한심한 걱정이었다. 아는데도 우선순위에서 밀어 치울 수가 없었다. 윙윙대는 모터가 한 바퀴 돌아갈 때마다 김래빈의 배터리도 일 퍼센트씩 깎이는 것만 같았다. 목소리에서도 그게 느껴졌다. 배터리가 아니더라도. 모터가 윙 울 때마다 김래빈의 무엇인가는 한 겹씩 깎여나가고 있었다.

“네가 죽은 이후로 나는 이렇다 할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지 못했던 것 같아. 때마침 연구원들은 새로운 세대를 개발에 성공했지.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나는 그들에게 더는 필요하지 않았을 거야. 어느 날엔가 그들은 내게 지구를 수복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나를 지구에 보냈거든.”

“지구를.”

“응. 지구를.”

차유진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훑었다. 커다란 유리 온실 덕에 사위가 파랬다. 널따란 들판과 저 너머 어렴풋하게 흔들리는 숲. 하지만 이 온실을 나서면 여전히 한도 끝도 없이 이어졌을 사막. 모래. 열기와 죽음 따위가.

혼자서는 수복할 수 없었다. 외딴 별과 지구는 한참 떨어져 있으므로 애당초 확인조차 힘들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김래빈에게 지구를 수복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파견을 보냈다. 그건 정말로 수복을 원한다기보다는 일종의 추방령에 가깝다는 사실을 차유진은 어렴풋이 깨달았다.

김래빈도 알 것이다. 아무렴 눈치가 없다지만 시간과 세월은 지난하고 길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유일무이한 인간 또는 해태로서 지구에서 영위하는 매 순간에 김래빈은 고민했을 것이다. 차유진이 그러했듯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돌아가지 않았으리라. 어쩌면 돌아갈 수 없었으리라.

그때. 김래빈이 고개를 들었다. 이야기를 시작하고 눈을 마주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차유진은 지레 놀라 몸을 흠칫했다. 반사적으로 상체를 물리려는 순간. 김래빈이 눈을 깜빡였다. 유리를 투과한 빛이 부드러운 보라색 눈동자를 비췄다. 일렁이는 눈동자 깊은 곳에서 차유진은 다정하고 상냥한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내가 너를 찾은 건 정말 우연이었어, 차유진.”

차유진은 김래빈의 눈을 빤히 보며 생각했다. 결국 너는 나를 찾았구나.

“그들은 너를 지구에 폐기했던 거야. 몸체는 조각조각 부서져 있었지만 수리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어. 그런데 전부 조립하고 보니 치명적인 오류를 발견하고 만 거야.”

김래빈의 시선이 떨어졌다. 시선은 자연히 심장께에서 멈췄다. 차유진은 제 가슴께를 더듬었다. 코어가 있을 부근이었다. 치명적인 결함이라는 건 역시 코어인가. 가슴을 살짝 누르듯 문지르는데 김래빈이 말을 이었다.

“네 코어가 깨어나지 않았어. 에너지의 문제인가 싶어서 온갖 종류의 에너지를 전부 사용해 보았는데도 불가능했지. 고민 끝에 나는 한 가지 결론에 다다랐어. 에너지의 순환이 이뤄지지 않아서 코어가 깨어나지 않는 거라고 말이야!”

“그래서?”

“그렇다면 체내 에너지가 순환하기만 한다면 너는 깨어날 거라는 뜻이지. 하지만 내가 네게 주입한 에너지를 순환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고 판단했지. 내 자체 에너지는 주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으니 그걸 네게 주입한다면 주 시스템을 사용한 원격 조종이 가능할 거라는 가설을 세웠고, 결국 성공했어.”

자신만만하게 웃으면서 할 얘기가 아닌 것 같은데. 차유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니까 결국. 요지는 그거잖아. 그냥 에너지를 주입하면 순환하지 않으니 제 에너지를 주입해서 주 시스템을 이용해 강제로 순환하게 한다는 것. 지레짐작이 공설이 되었다. 그리고 차유진은 그냥 할 말을 잃었다. 살다 살다 이런 미친 계획은 또 처음 들어봤다. 자칫 잘못했다간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김래빈까지 고장 났을지도 몰랐다.

“김래빈 혹시 미쳤어?”

“사람에게 미쳤다니 무슨 무례한 소리냐고 하고 싶지만 네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혹시 네가 걱정할까 말하자면 내 사고회로는 완벽하게 정상이야.”

“그거 무모했어. 김래빈도 알지?”

이번엔 김래빈이 눈을 한껏 가늘게 떴다.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매섭게 노려보는가 싶더니 눈동자를 데굴 굴려 시선을 피했다. 그리곤 다시 가지를 집어드는 일련의 동작에서 불퉁함이 가득 묻어났다. 영문 모를 태세 전환에 차유진만 고개를 갸웃했다. 남들이 뭐라고 생각할진 몰라도 차유진 눈엔 마냥 서운한 것처럼 보였다.

뭔가를 묻기도 전에 김래빈이 입을 열었다. 다음 말은 아무튼, 하며 이어졌다.

“내 동력원으로 온실과 나 개인과 너까지 감당하고 있으니 가끔 정전되는 것뿐이야. 지난번에 쓰러진 것도 그 때문이고. 설명할 건 이게 전부야.”

손에 쥔 가지를 땅에 묻은 김래빈이 몸을 일으켰다. 으그극, 하는 괴상한 신음과 함께였다. 허리를 퉁퉁 두드리는 김래빈을 빤히 바라보며 차유진도 일어섰다. 둘은 남은 가지를 들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돌아가는 길에 김래빈이 운을 뗐다. “궁금한 건 물어봐도 좋아.”

차유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그럼 김래빈은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할 거냐니?”

“김래빈 동력 하나로는 전부 유지 못 해. 우리 동력도 영원한 거 아냐.” 차유진이 말했다. 김래빈은 옆에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의 의미였다. 그 동의를 딛고 차유진이 말을 이었다. “게다가 명령은 지구 수복? 그거 하나잖아. 언제 끝날지 몰라. 언제까지고 나랑 온실을 전부 유지할 수 없어.”

“그건 그렇지.”

“게다가 내 코어에 아직도 심각한 결함이 있으니까. 유지하려면 더 힘들어. 김래빈은 선택해야 해.”

모든 선택지가 모 아니면 도는 아니다. 하지만 때때로 어떤 선택지는 양날의 검이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베였다. 조금 덜 아픈 곳을 찾고 고심해야 할 때가 있었다. 차유진은 그게 지금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김래빈은 태연했다. 조금 곤란해할 줄 알았는데. 눈썹을 찡그리거나 시선을 피한다거나. 불편한 주제를 맞닥뜨렸을 때 으레 나오는 반사적인 행동 같은 건 없었다. 차유진은 그게 조금 의아했다. 내 말을 이해하긴 했나. 뺨을 긁적이는데 김래빈이 말했다.

“네 말이 맞아. 하지만 네가 모르는 사실이 두 가지 있어.”

차유진의 걸음이 멎었다. 김래빈도 덩달아 멈췄다. 고개를 돌려 눈을 맞췄다. 때마침 바람이 불었다. 숲을 관통하고 지나는 북풍이었다. 이파리가 일순 떨리며 크게 울었다. 파도 소리와 꼭 닮은 울림이었다.

“첫째. 나는 이미 선택을 끝냈어.”

“…….”

“그리고 둘째. 네 코어에 심각한 결함이 남은 건 사실이지만, 그건 네가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형태일 거야.”

김래빈이 잠시 입을 오므렸다. 짧은 고민이 얼굴을 스쳤다. 하지만 그 또한 찰나였다. 차유진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꾹 쥐었다. 숲을 등진 김래빈의 얼굴 위로 볕뉘가 쏟아졌다. 흔들리고 일렁일 때마다 그림자가 얼룩처럼 남고 사라지길 거듭했다. 표정이 보였다가 안 보였다. 조급한 마음에 한 걸음 다가갔다. 김래빈이 입을 연 것도 그때였다.

“너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네 죽음엔 내 책임이 커. 그때 우리는 파견 나간 채였거든. 긴급 상황이 발생했고 다급하게 후퇴하려던 참이었어. 나는 실수로 인해 낙오되었는데 너는 지침대로 철수하지 않고 나를 구하러 왔지. 탈출하려던 차에 공격을 받았어. 내가 크게 부서지고 네가 죽은 건 바로 그 공격 때문이야.”

차유진은 불현듯 흐린 꿈을 떠올렸다. 김래빈이 쓰러지던 떠올랐던 불분명한 환각을 반추했다. 뜨겁던 열기와 땅에 비스듬히 누워 있던 자신과 김래빈. 머릿속에서 아득한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불온한 감각이었다. 차유진은 입을 열었다. 그만하라고 말할 셈이었다. 하지만 김래빈이 빨랐다.

“너는 그때 내게 사랑한다고 했어.”

김래빈이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비어 있던 자리에 무언가가 끼어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모든 불분명한 기억은 어렴풋한 감각에서 시작된다. 그때는 어땠더라, 하는 희미한 궁금증. 또는 그때는 어땠느냐고 묻는 타인의 질문 따위로. 돌연 던져진 질문으로 아는 것이다. 정말로 잊힌 건지. 혹은 잊었노라 생각했던 건지.

차유진은 잊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떠올린다. 하늘에서 빼곡하게 떨어지던 유성, 파편, 유실물. 무너지는 건물과 갈라지는 대지. 스프링이 나간 고철처럼 뒤틀리고 구부러지다가 기어코 튕겨 나가던 땅 위에서. 차유진과 김래빈은 달리고 있었다.

열세 번째 파견 임무였다. 그들은 그때도 동료였고 파트너였다. 운 좋게 같은 육체로 열세 번이나 파견되었다. 별을 열두 개나 닦았다. 해태라는 이름에 걸맞게 쓸고 닦고 새 생명이 움트는 것을 보았다. 맑은 물을 내리게 했고 볕이 진정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들은 우수했다. 아니지. 우리는 우수했다. 말로는 투닥거리면서도 막상 임무에 들어가면 합이 그렇게 잘 맞을 수가 없었다. 마냥 즐거운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종내엔 재밌었다는 감상으로 묶을 수 있을 정도의 고난만 있었다. 열두 번의 파견이 끝난 후. 외딴 별로 복귀했을 때. 차유진은 김래빈을 불렀다. 눈을 마주쳤다. 그 속에서 움튼 부드러운 영혼을 속삭였다.

사건의 도화선은 바로 그때다.

부서진 육체에서 코어를 회수하면 말끔한 몸으로 되살아날 수 있었다. 그들의 코어는 심장과 다를 바 없었다. 비록 기억엔 구멍이 뚫려 있을 수 있으나 같은 코어를 쓰는 한 같은 개체로 기록되었다. 모든 해태는 그렇게 배웠다. 차유진도 그랬다. 김래빈도 그랬다. 같은 걸 배우고 믿는다고 생각했기에 김래빈은 열세 번째 별의 멸망 앞에서 의연했다. 외딴 별에서 다시 만나자는 우스운 작별 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그렇게 차유진의 등을 떠밀 수 있었다.

김래빈이 간과한 사실은. 차유진이 그와 같은 것을 믿지 않는단 것. 언제부터냐고 묻는다면, 아마 인공안구에 박힌 소형 카메라에서 누군가의 영혼을 보았던 그때부터.

떠나지 않은 차유진은 김래빈을 구했다. 처음으로 육체가 산산이 조각났다. 땅바닥에 쓰러진 차유진은 움직이지 않는 팔다리와 함께 죽음을 감각했다. 아주 가까웠다. 망가진 회로 덕인지 시야가 삐걱거렸다. 저 너머에서 김래빈이 누워 있었다. 코어의 빛이 깜빡거렸다. 희미했다. 너 대신 죽을 생각은 없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널 살리고 내가 죽으려고 뛰어든 것도 아니었다. 알량한 영웅 심리도 아니었다. 아무 노력 없이 널 두고 탈출하기가 싫었다. 고열에 회로들이 녹고 엉겨 붙기 시작했다. 질척한 덩어리가 뭉치더니 주먹만 한 호두가 됐다. 끔뻑이는 의식 속에서 차유진은 자각했다. 죽음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두고 간다면 너는 죽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자 견디지 못한 것이다.

치명적인 결함이 생겼어.

냉각수가 깨진 표층을 타고 흘러내렸다. 눈에 고였다가 아슬아슬하게 떨어졌다. 흐린 시야 너머 눈이 마주쳤다. 무어라고 빠끔거린 것도 같았다.

그리고 차유진은 다시 깨어난다.

멸망한 별에서도 밤은 온다. 고요하고 눅진하게 잦아드는 시간이다. 찬바람이 살갗을 스쳤다.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제 위로 떨어진 이파리들이 팔랑팔랑 낙하했다. 숲이었다. 이제는 군락이라고 부르기도 미안했다. 빽빽하고 아득했다. 멀리서 본다면 커다란 벽처럼 보일 것이다. 차유진은 다시 땅을 디뎠다.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저변에서 나직이 울렸다.

사랑한다고 했어. 맨발로 수풀을 밟을 때마다 사부작거림 위에 김래빈의 낮은 목소리가 덮였다. 너는 그때. 열세 번째 별에서. 폐품도 못될 만큼 갈가리 찢어졌는데도. 도망가라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아니라. 사랑한다고 했어. 내 눈을 보고 그렇게 말하더니 직후에 가동을 멈췄어…….

배터리 잔여량 이십사 퍼센트.

아주 오랫동안 찾아 헤맸어. 네 코어를 회수해서 다른 육체에 끼웠는데도 너는 깨어나지 않았어. 코어에는 결함을 찾을 수 없었는데도 네가 일어나지 않자 상부에선 너를 폐기하기로 했어. 네 코어와 몸체는 그렇게 버려졌어.

배터리 잔여량 이십이 퍼센트.

새로운 해태들이 나오기 시작했어. 네가 죽어 있는 틈에 새로운 해태들이 탄생했어. 차근차근 폐기 과정을 밟는 와중에 나는 지구로 파견되었어. 상부는 나를 보내며 지구를 수복하라고 했어. 명령은 그게 전부였어. 아마도 돌아오지 말라는 뜻인지도 모르겠다고 형들이 아주 조심스럽게 말해주셨어.

배터리 잔여량 십구 퍼센트.

내가 여기서 널 찾은 건 순전한 우연이라고 생각해. 산처럼 쌓인 기계 부품 사이에서 너를 파낼 수 있었던 것도. 마침 내겐 네 코어가 있었고, 수리해야 할 부품은 무덤에 널려 있었어. 거기까지도 우연이었을까?

배터리 잔여량 십육 퍼센트.

네가 깨어나자마자 무슨 말을 할지 몹시 궁금했지만, 동시에 영영 깨어나지 않기를 바란 것도 사실이야.

차유진은 버릇처럼 시선을 올렸다. 시야 구석에서 점멸하는 배터리 잔여량을 확인했다. 십일 퍼센트. 십 퍼센트 이하로 내려간다면 충전을 촉구하는 메시지와 함께 절전 상태에 돌입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능 상당수가 차단되어 말 한마디 내뱉기도 힘들겠지. 차유진은 그러나 평온하게 걸음을 옮겼다. 사실 그런 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아서.

정처 없는 발걸음과 함께 차유진은 주위를 돌아본다. 그가 막 깨어났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바닥은 모래가 섞인 땅이었다. 공기는 탁했고 이상기온으로 인해 밤에는 밖에 나서지 못했다. 유리 온실은 한눈에 둘러볼 수 있는 크기였고 사막 바람을 조금이라도 맞으면 식물은 금세 쪼그라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우거진 숲과 맑아진 공기. 넓어진 온실과 그 속을 가득 메우는 숲. 온실을 거두면 순식간에 말라붙을지 모르지만. 지금보다도 더 오랜 시간을 보내면. 그러면. 어느 순간엔가 얇은 온실이 없어도 마른 땅에 뿌리를 내릴 수 있지 않을까.

너도 그렇지. 김래빈.

“돌아갈 거야?”

주어 없는 말은 바람을 타고 날아가 상대에게 다다른다. 차유진을 등진 채 앉아 있는 인영은 미동도 없었다. 다만 잠깐의 침묵 끝에, 차유진이 다시금 걸어 곁자리를 차지하고 앉을 그 찰나 이후에 덤덤한 목소리가 대답해 오는 것이다. “아직 명령을 완수하지 않았으니 돌아갈 예정은 없어.”

“명령을 끝내면?” 무릎을 품에 끌어안은 차유진이 그렇게 물었다. “지구를 다시 살리면, 그래서 김래빈의 도움이 필요 없어지면. 그때는 돌아갈 거야?”

“이 비슷한 대화를 최근에 했던 것 같은데. 차유진.”

“그때 김래빈 무슨 선택 했는지 대답 안 해줬어. 다른 말만 했지.”

그러자 김래빈은 조금 후에 말했다. “내가 돌아가지 않는다면 너는 어떻게 할 셈이야?”

차유진은 답하기에 앞서 시선을 돌렸다. 배터리 잔여량 십 퍼센트. 곧 있으면 화면은 깜빡거리기 시작할 것이다. 애당초 차유진은 그렇게 오래 버티지 못한다. 차유진과 온실까지 한꺼번에 가동한다면 김래빈 또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시간이 부족하다.

그러나 차유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그건 대답을 미룬다거나 시간을 끄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세상이 밝아지고 어두워지기를 거듭하고 그림자가 짧아지고 길어지다가 서로에게 얽매이는 순간을 기다리는 거다. 어느 순간인가에 자연스럽게, 매일 같이 해가 뜨고 저물 듯이, 선택이라는 이름의 필연으로써 확신하기를 한 걸음 물러나 고대하는 것이다.

“돌아가지 않을 거야.” 마침내 중얼거린 말은 선명하게 와닿았다. 까마득한 지평선 너머로 추락하는 태양과 함께. “이곳에 남을 거야. 나는…….”

볕이 그들 위로 가라앉았다. 배터리 잔여량 육 퍼센트. 까치놀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반짝거리는 붉음이 경고 메시지 때문인지 하늘 때문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차유진이 몸을 기울였다. 머리가 가볍게 어깨에 닿았다. 얼굴은 부러 보지 않았다. 그들에겐 눈물샘도 눈물도 없었으니까.

“나는 가끔 너와 지구에 영영 머무르는 모습을 상상했어.”

예정된 끝을 선언한 김래빈이 입을 다물었다.

차유진은 그냥 웃었다. 미안하다는 말이 없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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