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임 파인, 땡큐, 앤 유?
김래빈 나랑 약속해. 나 죽으면 바다 보러 가!
*
차유진이 죽었다. 세상이 망한 지 일 년 만이었다.
세상이 얼어붙었다. 하늘에 자욱하게 낀 먹구름 탓에 낮이고 밤이고 어두웠다. 녹을 틈도 없이 눈이 쌓였고 폭풍이 불어닥쳤다. 김래빈과 차유진은 첫눈이 내리던 날로부터 일 년 동안 똘똘 뭉쳐 생존했다. 그러다가 차유진이 죽었다. 사인은 동사였다. 이름에 불꽃을 품은 주제에 얼어 죽었다. 밖에선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김래빈은 덤덤하게 행동했다. 열기를 뺏긴 차유진의 몸을 질질 끌어 굴 밖에 던져놓은 것이다.
이쯤에서 김래빈은 솔직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까, 둘이 살기엔 좁지만 하나가 살기엔 너무 큰 이 늑대굴 안에서 혼자 궁상맞게 넋 놓고 있는 지금 말이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뭐 감정이 닳아 없어져서 눈물이 나지 않는다는 느낌은 아니고. 그냥 빌어먹게 추워서 그랬다. 눈물이 고이면 금세 얼어붙었다. 그래서 안 흘렀다. 그냥 그뿐이었다. 눈꺼풀에 들러붙은 서리에 시야가 침침했다. 김래빈은 벽에 기댄 채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다 타들어 간 모닥불에서 피어난 탄내만이 김래빈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사람 키를 훌쩍 넘을 만큼 쌓인 눈 사이를 파고들어 지은 이글루였다. 깊고 단단했다. 좀 춥긴 했으나 이 정도 추위는 차라리 나았다. 밖에 비하면 훨씬 따뜻했다. 차유진은 이곳을 늑대굴이라고 불렀다. 늑대들도 추우면 이렇게 땅 파고 들어가. 눈보라가 멈출 거라는 희망을 아직 품었던 시절 차유진은 이렇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여기도 늑대굴이야. 차유진은 자신만만하게 명명했고 김래빈은 별생각 없이 수긍했다. 늑대들이 실제로 굴 파는 습성을 가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처음엔 작게 지었던 늑대굴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야금야금 넓어졌다. 이젠 허리를 반쯤 숙인 채 한 바퀴를 쭉 돌면 땀이 몽글몽글 솟았다. 누가 봐도 혼자 살기엔 넓었다.
근데 왜 나는 여기에 혼자 있지. 김래빈은 차가운 벽에 머리를 박았다. 쿵. 단단한 벽은 파이지도 않았다. 꽝꽝 언 눈은 웬만한 쇳덩이보다 단단하게 느껴졌다. 박은 이마만 욱신거렸다. 김래빈은 화끈거리는 이마를 만지작거리다가 벽면에 기댔다. 힘 하나 없는 몸은 벽을 타고 스르르 흘러내렸다. 겉옷을 세 겹이나 껴입었는데도 추위가 날카로웠다. 뼛속까지 시렸다. 이가 자꾸만 딱딱거리는 게 거슬렸다. 추위에 곱은 손은 감각이 없었다. 이상했다. 손이 차갑다는 게 낯설었다. 늑대굴 안에서 차유진은 항상 손을 잡아줬다. 차유진은 다른 사람들보다 체온이 높은 편이기 때문에 핫팩을 쥔 기분이었다. 김래빈의 손은 차유진이 잡아줘서 항상 따뜻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김래빈은 몸을 일으켰다. 눈보라 치는 바깥에선 마치 늑대가 길게 우짖는 듯한 소리가 났다. 발은 두꺼운 등산용 양말을 네 겹 덧씌우고 장화 안에 구겨 넣었다. 눈이 들어가지 않도록 꽉꽉 묶자 이젠 감각도 거의 안 느껴졌다. 두꺼운 패딩 지퍼를 끝까지 올리고 후드를 뒤집어썼다. 마스크도 두 겹으로 썼다. 고글을 쓰려다가 잠깐 멈췄다. 김래빈은 바로 엊그저께 고글을 잃어버렸다. 늑대굴 안에서 잃어버렸으니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하지만 찾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김래빈은 차유진의 고글을 썼다. 익숙지 않은 느낌 덕분에 영 불편했다. 얼굴에 꽉 맞게 조이고 장갑을 두 겹으로 꼈다. 나서려는데 차가운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길어진 머리칼을 성의 없이 뚝뚝 깨트렸다. 그리고 마침내 허리를 반쯤 숙인 채 늑대굴 밖으로 나섰다.
문을 열고 몸을 비집어 넣자마자 맹렬한 추위가 덮쳤다. 옷을 그렇게 껴입었는데도 추위는 순식간에 틈새를 파고들었다. 사람이 너무 추우면 뜨겁다고 느낀다던데 딱 그 꼴이었다. 그러나 김래빈은 멈추지 않았다. 차유진의 고글 너머로 본 세상은 주황색이었다. 세찬 눈보라에 몸이 휘청거렸다. 무릎께까지 쌓인 눈을 헤집고 나아가는데 옷을 잔뜩 껴입은 몸이 휘적휘적 뜻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차유진이 봤더라면 웃었으려나. 멍하니 뇌까리다가 간신히 생각을 떨쳤다.
멀리 가진 않았다. 그 전에 봐야 할 것이 있었다. 김래빈은 두 걸음 걷고 주위 보고 두 걸음 걷고 주위 살피길 반복했다. 그리고 딱 열네 걸음 걸었을 때 발견했다. 눈을 매섭게 부릅뜨지 않았더라면 놓쳤겠지. 목표를 발견한 김래빈은 휘적휘적 걸어갔다. 늑대 울음소리가 들렸다.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올린 절규를 닮았다. 목표에 다가간 김래빈은 이내 풀썩 앉았다. 수북하게 쌓인 눈이 체온에 녹았다가 김래빈 위로 새로 쌓였다.
내놓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눈이 덮여. 김래빈은 장갑 낀 손을 눈 속에 푹 담갔다. 그리고 두껍게 쌓인 눈을 천천히 털기 시작했다. 장갑 속으로 차가운 눈이 우수수 떨어졌다. 감각이 없었다. 춥지도 않았다. 어딘가 아주 중요한 나사가 하나 빠진 것 같았다. 칼바람과 함박눈은 마치 배경음악처럼 깔렸다. 바람에 원혼이 깃들었다는 할머니의 한탄을 떠올리면서도 손은 기계처럼 움직였다. 한참을 파헤치는데 빨간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눈을 대충 털어내자 흐릿하게 보였다. 감은 눈과 얼어붙은 머리카락. 창백한 피부와 시퍼런 입술 같은 것들. 얼굴을 만지니 얇게 서렸던 살얼음이 손끝에 부서졌다. 차유진이었다. 얼어 죽은 차유진. 이상하리만치 창백하지만 않았더라면 잠든 거라고 착각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평온한 얼굴이었다. 김래빈은 차유진의 숨이 끊겼음을 확인하자마자 그를 늑대굴 밖에 내놓았다. 부패를 막기 위하느니 뭐라느니 같은 이유는 아니었다. 늑대굴 안에서 차유진 손을 잡았더니 식은 체온이 느껴졌다. 그게 싫었다. 그래서 밖에 내놨다. 그뿐이었다.
김래빈은 차유진을 가만히 바라봤다. 김래빈 위로도 눈이 수북하게 쌓였다. 슬슬 어깨가 무거웠다. 차유진이 자신에게 기댈 때도 꼭 이런 기분이었다. 대신 조금 더 따뜻했지. 김래빈은 버릇처럼 손을 들어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굴곡진 손가락 대신 눈이 부스스 흩어졌다. 장갑 낀 손이 어찌나 차가운지 눈은 녹지도 않았다. 손을 떨궜다. 김래빈은 머뭇거리다가 차유진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꽁꽁 언 머리카락은 정말이지 손쉽게 부러트릴 수 있었다.
“가져갈게.”
김래빈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차유진의 머리카락을 한 줌 가득 부러트렸다. 손에 담긴 머리카락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일어났다. 늑대굴을 한 번 바라봤다. 아깝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세상엔 불가항력의 일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이를테면 차유진이 죽은 것. 김래빈이 차유진을 늑대굴 밖에 내놓은 것. 김래빈이 늑대굴을 떠나는 것. 김래빈이 차유진을 떠나는 것 따위의.
김래빈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돌풍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바다에 갈 시간이었다.
차유진 따라 캘리포니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김래빈이 스물넷일 때 벌어진 일이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김래빈은 자신이 뜨거운 햇살을 견디지 못하고 흐물흐물 녹을 줄만 알았다. 캘리포니아는 날씨 좋기로 유명하지 않은가. 게다가 차유진도 우리 집에선 파도 소리 들린다며 틈만 나면 웃었다. 떨림과 두려움과 그보다 큰 기대감에 부풀어 시답잖게 투닥거리는 와중에 비행기는 그들을 캘리포니아에 내려줬다. 공항을 나설 때 차유진은 김래빈의 손을 꽉 잡으며 그의 뺨에 키스했다. 그리곤 웃었다. 캘리포니아 어때? 얼굴을 한껏 붉힌 채 차유진을 노려보던 김래빈은 장난스러운 질문에 불퉁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고작 공항 입구에 왔을 뿐이니 벌써 캘리포니아 전반에 대한 인상을 결정하는 건 옳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차유진 공공장소에서 뽀뽀하지 마! 차유진은 입술을 비죽 내밀면서도 김래빈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공항에서 나와선 차유진네 가족을 만났다. 스페인어와 영어를 현란하게 섞어가며 대화하는 가족을 보면서 김래빈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솔직히 말해서 그냥 차유진 1, 차유진 2, 차유진 3, 차유진 4…… 같은 느낌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정말이지 무례한 생각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차유진이 한 걸음 뒤에 물러나 있던 김래빈을 당겨 곁에 세운 건 그때였다. 모두의 이목이 단번에 쏠렸다. 김래빈이 저도 모르게 허리를 곧추세우는데 차유진이 말갛게 웃으며 영어를 발음했다. 그러자 가족들이 와락 웃음을 터트렸다. 김래빈만 차유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물음표만 띄웠다. 나중에 물어봐도 그냥 바보라고 했어, 할 뿐 알려주지 않았다.
김래빈은 차유진네 집에 머물렀다. 그동안 차유진과 서핑도 하고 수영도 하고, 개도 산책했다. 사실 김래빈이 개를 산책시키는 게 아니라 개가 김래빈을 산책시키는 것 같은 꼴이긴 했다. 일 중독 기질은 캘리포니아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돼서, 사방에서 날아드는 강렬한 자극들을 비트와 박자와 선율로 바꾸느라 김래빈은 매일같이 꼭두새벽에 잠들었기 때문이었다. 한밤중에 노트북 밝기를 최대로 낮추고 딸깍대는 김래빈을 구경하느라 차유진도 덩달아 늦게 잤다. 어느 때는 치근덕거리는 차유진을 밀어내다가 눈이 맞은 일도 있었다.
김래빈은 캘리포니아가 좋았다. 비록 영어엔 젬병이라 항상 차유진이나 차유진의 가족 중 한 명과 동행해야 했고, 그도 아니라면 번역기를 간절하게 쥔 채로 다녀야 하기는 했지만. 하루걸러 하루꼴로 찾아오는 차유진의 친구들에게 기를 쪽쪽 빨려서 기절할 것 같은 날들을 보내기도 했지만, 어쨌든. 배려해주신 덕분에 한식도 먹을 수 있었고 차유진이 곁에 있었고 무엇보다 햇볕이 따스했다. 잔디밭에 누워 뜨끈뜨끈한 햇살에 몸을 지지고 있으면 웃통을 깐 차유진이 익숙하게 곁에 누웠다. 그러면 별말 없이 멍하니 하늘이나 같이 올려다보는 것이다. 그런 게 좋았다.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모든 게 자연스럽던 날들.
여긴 따뜻해서 좋아. 어느 날 김래빈이 말했을 것이다. 적당히 달궈진 선베드 위에 누워서. 방금까지 물놀이 하다 온 차유진은 수건 하나를 덮은 채 옆 공간에 끼어 있었다. 선베드 하나는 건장한 성인 남성 둘이 눕기엔 좁았으나 차유진은 항상 김래빈 옆에 끼어들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인가 김래빈은 선베드 끝자리에 딱 붙어 있었다. 선베드를 혼자 써도 그렇게 했다. 버릇이었다.
반대쪽 끝자리에 딱 붙은 차유진이 몸을 꾸역꾸역 돌렸다. 작은 공간에서 눈이 마주쳤다. 차유진한테선 바다 냄새가 났다. 짠 내와 약간 묵은 물 냄새. 차유진은 김래빈을 빤히 바라보다가 되물었다. 그게 끝이야? 캘리포니아 좋은 점 따뜻한 거 빼도 많아. 그렇게 말하기에 눈을 데굴데굴 굴렸던 것도 같고.
사실 그때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떠올릴 수 있는 걸 나열하자면 아무래도 아득하게 부서지던 파도 소리. 해변을 뛰노는 사람들의 영어, 즐거운 비명. 딱 달라붙었던 뜨끈한 차유진의 온기. 맞붙은 이마의 축축함. 나직한 차유진의 목소리. 입술을 부딪친 순간 느껴졌던 소금기. 떨어지자마자 들렸던 차유진 누나의 쾌활한 웃음과 놀림. 달아오르던 얼굴과 불퉁하게 대꾸하던 차유진의 말투 같은 것들.
그리운 것들을 나열하자면 아무래도 그런 것들이겠지.
죽어야겠다. 차유진이 죽은 지 열흘 만에 김래빈은 결심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이렇게 살다간 어차피 얼마 못 가서 죽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은 탓이었다.
늑대굴을 떠나면서 김래빈은 차유진의 머리카락 한 줌만 덜렁 들고 왔다. 쌓아놨던 물자는 하나도 챙기지 않았다. 열흘간 다른 생존자들을 여럿 만났다. 그들은 모두 영어를 썼고 한국어가 가능하다고 해봤자 한두 단어나 겨우 발음했다. 김래빈은 영어를 해봤자 하이, 하우 얼 유, 아임 파인 땡큐 앤 유밖에 못 했다. 한마디로 말이 안 통했다. 대화가 안 되니 피차 이득이랄 게 없었다. 세 번째인가 만났던 생존자가 피골상접한 김래빈 꼴을 보고 안타까웠는지 참치 통조림 몇 개 쥐여줬다. 김래빈은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며 서툴게 물었다. 라호이야 비치, 웨얼?
하필이면 라호이야 비치인 이유는 없었다. 거기가 아마 거리상 가장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생존자를 처음 만났을 때 김래빈은 영어로 더듬더듬 물었다. 비치, 니얼, 웨얼? 그러자 상대는 고민하다가 라호이야 비치를 말했다. 그래서 라호이야 비치에 가기로 했다. 사실 모르는 외국인 입에서 나온 이름에 좀 놀라기도 했다. 익숙해서 그랬다. 차유진네 집에서 보이고 들리는 해변 이름이 라호이야 비치였다. 이건 뭐 운명의 장난인가. 땡큐 하며 생존자와 헤어진 직후 김래빈은 멍하니 생각했더랬다.
생존자들에게 물어물어 나아가는 여정은 지리멸렬하고 지루했다. 사방에 눈이 내려 모든 것이 잠겼다.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고 사람 만나기도 힘들었다. 게다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몰아치는 눈보라에 김래빈은 방향 감각을 잃었다. 사실 이대로 가다간 라호이야 비치에 닿는 것보다 얼어 죽거나 굶어 죽는 일이 더 빠르겠다고 생각했다. 죽어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차유진은 항상 버릇처럼 말했다. 바다가 그렇게 보고 싶다고 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그냥 집에 계속 있을걸, 하고 투덜거렸다. 그건 갈피 잃은 후회나 뼈아픈 실책을 말하는 목소리라기엔 너무 가벼웠다. 할 말이 없으니 그냥 중얼거리고 보는 혼잣말 같은 거였다. 김래빈은 그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차유진은 매번 바다 보고 싶다고 칭얼거렸고, 김래빈은 그걸 매번 들었다. 그런데 차유진이 죽었다. 김래빈만 살았다. 늑대굴은 혼자 살기엔 너무 컸다. 그러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냥 바다 보러 가는 수밖에. 다른 말로 바꾸자면, 차유진이 아니었더라면 김래빈은 바다에 가지 않았을 거란 뜻이었다.
차유진 유언 이뤄주려다가 죽어버리는 것보단 그냥 죽어야겠다고 결심한 다음에 죽는 게 낫지. 그래야 나중에 차유진 만났을 때 할 말이 있었다. 그래야 차유진이 죄책감을 덜 가질 것이다. 그래서 김래빈은 눈을 파서 만든 임시 거처에서 머리를 박고 생각했다. 음. 죽어야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죽어야겠다. 이렇게 살다간 어차피 죽을 것이니 차라리 내 자유 의지라고 생각하기로 하자. 그러는 편이 나았다. 임시 거처는 말 그대로 임시인 탓에 엉성하기 그지없었다. 몸을 쭈그려만 채로 날밤을 지새웠다. 잠이 안 온 게 아니라 추워서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결심한 다음 날 김래빈은 참치 통조림 반 캔을 까먹었다. 꽝꽝 얼어서 그냥 대충 녹여 먹었다. 비린내가 입안을 한참 맴돌았다. 눈이라도 퍼먹을까 싶어서 잠깐 고민하다가 말았다. 물 없다고 눈 퍼먹었다간 저체온증으로 죽었다. 죽어야겠다고 결심한 게 바로 어젯밤이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할 수 있는 데까진 하고 싶었다. 바다 못 볼 가능성이 크지만 그 언저리까지는 닿고 싶었다. 그래서 눈 먹는 계획은 포기했다. 대신 열심히 침을 삼켰다. 참치 비린내 가득한 침이 넘어갈 때마다 속이 울렁거렸다.
입안에서 텁텁하게 감돌던 비린내가 어느 정도 사라지자 김래빈은 일어났다. 임시 거처를 나섰다. 그리고 걷기 시작했다. 여전히 눈보라가 쳤고 여전히 세상이 어두웠다. 걷기 시작했을 때는 네 겹이던 양말은 이제 세 겹이 됐다. 바깥에 있던 것 하나가 완전히 얼어서 체온을 뺏기 시작한 탓이었다. 동상에 걸릴 수는 없으니 벗었다. 마땅히 녹일 방법은 없어서 눈 속에 잘 묻었다. 다른 생존자가 발견한다면 어디든 요긴하게 쓰이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틈틈이 늑대굴이 궁금해졌다. 늑대굴에서 김래빈과 차유진은 일 년이 넘도록 살았다. 정이 안 드는 게 이상했다. 게다가 거기엔 불을 피울 수 있는 공간과 조금 과장해 산처럼 쌓인 물자들이 있었다. 늑대굴에서 버텼더라면 아마 일이 년쯤은 더 살았을 터였다. 물자를 야금야금 갉아먹다가 마지막에 가선 외로워 죽었을 테지만. 거동이 힘들고 피로가 쌓이니 이젠 별생각이 다 떠올랐다. 김래빈은 그날 스물여섯 번째로 고민했다. 외로워서 죽은 거라면 사인은 뭘까? 사랑해서 죽으면 사인은 뭘까? 애사? 진짜 이상한 생각이었다. 그 이상한 생각마저 못 할 지경이 되면 김래빈은 잠깐 멈춰 섰다. 휘청거리는 몸뚱어리를 잠깐 내버려 두고 주머니를 뒤졌다. 항상 지퍼를 단단히 잠가두는 주머니 속에는 작은 유리병이 있었다. 눈보라와 칼바람 속에 우두커니 서서 유리병만 들여다봤다. 그러면 어느 순간 몸 위에 쌓인 눈이 영 무거워지는 때가 있었다. 그때 다시 출발했다.
유리병 안에는 차유진의 머리카락을 넣어놨다. 떠나기 직전 차유진의 머리에서 냉큼 깨트려온 머리칼. 염색한 지 오래된 탓에 검정이 얼룩덜룩 묻은 붉은색 염색모.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유리병 안에는 차유진이 있었다.
우리 가자. 한 달쯤 지났을 때 차유진이 말했다. 그때는 꼭두새벽이었고 김래빈은 노트북 앞에 쭈그려 앉아 멍하니 마우스를 딸깍거리고 있었다. 차유진이 바꿔놓은 농담곰 마우스 커서는 클릭할 때마다 탐스러운 엉덩이를 흔들어댔다. 처음엔 영 신경 쓰여서 싫었는데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안 바꿨다. 영감이 오지 않거나 작업이 죽도록 풀리지 않을 때 아무 생각 없이 마우스를 클릭했다. 이를테면 지금처럼.
차유진은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새벽 세 시에 감자칩 먹겠답시고 튀어 오르는 걸 네 번쯤 말렸던 것도 같았다. 곁눈질로 바라본 차유진은 천장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 김래빈은 잠시 고민하다가 되물었다. 어디로? 그러자 차유진이 당연하다는 듯 대꾸하는 것이다. 좀 멀리. 김래빈 샌디에이고 말고 다른 데 가본 적 없지? 아무래도 그런 편이지, 하고 고개를 주억거리자 차유진이 발딱 일어났다. 그러니까 나랑 같이 가자. 그렇게 말하면서.
하여간 이놈의 새벽 감성이 문제였다. 김래빈은 죽도록 풀리지 않는 작업물과 엉덩이만 계속 흔드는 농담곰 마우스 커서를 생각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낯선 감각들은 한 달쯤 지나자 그 빈도가 훅 줄었다. 게다가 샌디에이고 밖으론 가본 적 없는 미지의 땅이었다. 미국 사막엔 특이한 지형들이 그렇게 많다는데. 아닌가. 인터넷 어디선가 보았던 짜깁기 정보들을 하나하나 셈하던 김래빈은 마침내 대답했다. 그러자. 그런데 네가 운전해야 해. 나는 길 모르니까. 그러면 안 됐다. 새벽 감성에 촉촉하게 젖어 풀리지 않는 작업물에 좌절했더라도 그러면 진짜 안 됐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당시의 차유진은 만족스럽게 씨익 웃었다. 바깥에선 이파리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김래빈은 농담곰에서 눈을 떼고 차유진을 봤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차유진은 턱을 괴고 히히 웃더니 오 분 뒤에 꿈나라로 갔다.
김래빈과 차유진은 정말로, 그날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차를 빌리고 훌쩍 떠났다. 조촐한 여행 가방과 다소 홀쭉한 지갑만 챙기고서. 운전하는 동안 김래빈은 직접 데모를 녹음한 노래를 재생했다. 차유진은 신나서 어설픈 데모를 따라서 흥얼거렸다. 어디 가냐는 질문에도 차유진은 그냥 히히 웃을 뿐이었다.
이튿날부턴 눈이 왔다. 목적지에 도착하지도 못한 채 자동차가 얼어붙었다. 샛길이나 다름없는 비포장도로 한복판에서. 조난이었다.
“[그런데 그건 괜찮은 건가요?]”
김래빈은 느리고 정중한 영어에 고개를 들었다. 파란 눈 외국인이 김래빈의 오른손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 하고 희미하게 신음한 김래빈이 손을 들었다. 오른손 안에는 차유진이 있었다.
김래빈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잇츠 오케이. 상대는 영 못 미덥다는 눈으로 김래빈과 차유진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리곤 되묻는 것이다. 리얼리? 진짜로? 김래빈은 할 말을 찾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았다. 아마도? 자신할 수는 없었으나 이런 상황에서 자신할 수 있는 요소가 몇이나 될는지 모르겠다. 그러니 아마도 괜찮을 거였다. 남자가 눈을 찡그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 적나라했다.
당연했다. 김래빈은 손에 들린 차유진을 내려다봤다. 살인적인 추위를 버티지 못한 차유진은 며칠 전부터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이젠 거의 반으로 쪼개지기 직전이었다. 손에 쥐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주머니에 넣어놓으면 깨질 게 분명해서.
상대는 잠시 말이 없었다. 김래빈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상대는 영어가 서툰 김래빈에게 라호이야 비치의 위치를 두 번이나 읊어줬다. 게다가 레드빈 통조림을 두 개나 줬다. 이런 상황에서 김래빈이 손에 쥔 유리병 걱정이나 한다는 건 그만한 여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고심하는 듯하던 남자는 이내 굳게 다짐한 얼굴로 말했다.
“Wait. [이 정돈 알아듣지? 잠깐만 기다려줘요.] I’ll be right back.”
아이 윌 비 라잇 백. 김래빈은 딱딱하게 굳은 혀로 상대가 뱉은 문장을 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문장을 알았다. 차유진은 김래빈과 함께 있는 도중 급한 일이 생기면 곧잘 말하곤 했다. 기다려! 알 비 라잇 백! 그리고 우다다 뛰어갔다. 그리고 정말 금방 돌아왔다. 눈을 내리깔았다. 손에 쥔 차유진 때문일까. 어쩐지 손바닥이 따끔거리는 것도 같았다.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던 남자는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낯선 사람이 함께였다. 멀리서 동료가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김래빈은 낯선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 살폈다. 김래빈과 마찬가지로 고글에 마스크에 후드까지 눌러쓴 탓에 이목구비는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어쨌든.
“[얘야?]”
“[응. 라호이야 비치 간다는데.]”
“[알겠지만, 토마스, 우리가 마냥 데려갈 순 없어.]”
“[알아. 하지만 물어볼 수는 있잖아.]”
대화가 오갔다. 김래빈은 반절 이상 못 알아들었다. 낯선 남자는 한숨과 함께 다가왔다. 김래빈은 흠칫 놀랐으나 그게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다. 포커페이스에 익숙해진 게 아니라, 그냥 몸이 꽝꽝 얼어붙어서 제대로 움직이지 않은 탓이었다.
“[그 사람 영어는 잘 못 하는 것 같던데.]”
뒤에서 파란 눈이 덧붙였다. 김래빈의 바로 앞에 선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김래빈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꽁꽁 싸맨 탓에 더더욱 그랬다. 김래빈이 마른침을 삼키는데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영어 못하면, 한국말은 할 줄 압니까?”
그 순간 김래빈은 울고 싶어졌다. 얼마 만에 듣는 한국어인지 몰랐다. 다행스럽게도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눈가가 좀 벌게지긴 했으나 고글 덕분에 티가 나진 않을 터였다. 김래빈은 크게 숨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한국인입니다!”
“아. 다행이네요. 저도 한국인입니다.” 남자는 덤덤하게 말했다. 호흡이 가지런하고 발음이나 발성이 매끄러웠다. 노래를 배우셨나. 멍하니 딴생각이나 하는데 남자가 빠르게 말했다. “라호이야 비치에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저 친구가 그러던데요.”
지목당한 파란 눈이 어깨를 으쓱였다. 김래빈은 파란 눈을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뜻밖의 말이 들렸다.
“그럼 같이 가시겠습니까? 저희도 마침 그쪽으로 향하는 중이라.”
제안이었다. 놀란 김래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황한 나머지 말문이 막혔다. 조금 기뻤고 조금 놀라웠다. 같이 가자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목적지가 달라서 매번 거절했다. 아쉬운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바다엔 가야 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목적지마저 같은, 심지어 한국인이 제안했다. 김래빈은 입을 한참 여닫다가 간신히 대답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일행 늘어나면 좋죠, 뭐. 원래 추위는 사람 많을수록 덜한지라.”
그렇지. 추위는 사람이 많을수록 덜하지. 그래서 혼자 다니는 내내 그렇게 추웠던 거지. 김래빈은 속으로 멍하니 뇌까리다가 눈을 끔뻑였다. 남자는 이어지는 말 없이 김래빈을 지긋하게 바라봤다. 고민은 짧았고 결심은 빨랐다. 어차피 김래빈에겐 이득밖에 없었다. 지도가 있지 않은 이상 매번 헤맬 텐데, 이 남자를 따라간다면 적어도 도중 굶어 죽을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졌다. 그리고 저 목소리. 무덤덤하지만 내심 당연하게 라호이야 비치에 도착할 거라고 여기는 저 목소리. 음, 그렇지. 아무래도 혼자 뱅뱅 헤매는 것보단 확신 있는 일행에 합류하는 것이 훨씬 나으니까.
그리고 아무래도 혼자는 좀 추웠다. 좀 많이 추웠다. 그래서 김래빈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염치 불고하고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서 파란 눈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차유진이 있었다. 눈앞에 차유진이 있었다. 빨간 머리 바람에 휘날리면서 바닷가를 걷고 있었다. 이름을 발음했다. 먹먹한 목소리를 목구멍에서 끄집어냈다. 차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리저리 흔들리며 노래나 흥얼거렸다. 미완성인 채 데모만 덮어놨던 그 노래였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불현듯 목소리가 들렸다.
김래빈 보고 싶어.
나는 너 안 보고 싶어.
김래빈 나 두고 갔어.
아니야. 나 너 안 두고 갔어. 너 내 옆에 있잖아, 바보야.
아냐. 김래빈은 나 두고 가야 해.
그건 무슨 소리야. 내가 왜 널 두고 가.
그래야 해. 김래빈 나 두고 가야 해.
제대로 설명을 해, 차유진. 상대를 이해시키려면 우기는 게 아니라 조리 있는 설명을 통해서 대화를 나눠야…….
그런데 김래빈 바보라서 나 안 두고 가.
바보는 너야, 차유진!
나 두고 가, 김래빈.
너야말로 얼굴도 안 보여주고.
나 두고 가.
얼굴 보여주는 게 그렇게 힘들어?
나 두고 멀리멀리 가, 김래빈.
그리고 김래빈은 눈을 떴다.
천장이 있었다. 눈을 얼기설기 뭉쳐 판 굴이 아니라 진짜 천장이었다. 앓는 소리를 삼키며 일으킨 몸이 가벼웠다. 내려다보니 겉옷 한 장밖에 입고 있지 않았다.
“깼어, 래빈이?”
몽롱한 정신을 다정한 목소리가 일깨웠다. 눈을 끔뻑이며 눈을 들자 익숙한 인영이 웃어 보였다. 류청우였다.
박문대를 포함한 일행 다섯과 합류한 지 벌써 사흘이 지났다. 파란 눈과 헤어지며 돌아오는 길에 자신을 박문대라고 밝힌 남자는 일행이 몇 더 있다고 했었다. 그런데 그 몇이라는 게 넷이나 될 줄은 몰랐다. 기껏해야 한둘인 줄 알았지. 게다가 전부 한국인이었다. 김래빈은 개중 막내였다. 추위는 김래빈과 일행 사이의 낯섦도 완전히 얼려버렸다. 이상하리만치 빠르게 가까워졌다는 뜻이었다.
사흘 동안 김래빈은 박문대가 하는 밥을 먹고, 류청우가 피운 불을 쬐고, 이세진이 찾은 산장에서 자고, 선아현이 수선한 이불을 덮었으며, 배세진이 건네준 책을 읽었다. 받기만 하는 것이 송구스러워 어떻게든 일하려고 했으나 전부 거절당했다. 막내는 그냥 받아, 하며 생글생글 웃는 이세진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것도 이젠 연례행사 비슷한 것이 됐다.
김래빈은 몸을 일으켜서 빠릿빠릿하게 인사했다. “잘 주무셨습니까, 류청우 형!” 힘차게 묻자 류청우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며 손짓하는 것이다. 김래빈은 익숙하게 류청우 곁에 자리 잡았다. 이 산장에는 운 좋게도 벽난로가 있었다. 류청우는 자연스레 벽난로 담당이 됐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불을 쬐자 얼었던 몸이 천천히 녹았다.
“문대가 밥하고 있어. 조금만 기다리자.”
“네!”
“밤새 악몽이라도 꿨어?”
“어, 아니요……. 그렇게 판단하신 저의가 무엇인지 여쭤도 됩니까?”
“별건 아니야. 그냥 좀 끙끙거리길래.”
그리고 류청우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김래빈은 평온한 류청우의 얼굴을 힐끔거리다가 잠시 고민했다. 악몽인가? 꿈에선 차유진이 나왔다. 얼굴은 못 봤다. 뒤통수만 잔뜩 보여주고 이해 못 할 말만 실컷 떠들었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김래빈은 그냥 악몽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별 이유는 없었다. 차유진이 얼굴을 안 보여줬으니까. 깨고 좀 심란했으니까. 그러니까 악몽이라고 하자. 차유진이 들었더라면 코웃음 쳤을 판단이었다.
아침 식사는 금세 나왔다. 김래빈은 박문대표 맛깔스러운 아침을 싹싹 긁어먹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조리도구와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식자재들의 환상적인 합작이었다. 국물 마지막 한 그릇까지 쭉 마시고 형들의 그릇을 수거했다. 설거지는 김래빈 몫이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자니 양심이 그렇게 찔릴 수가 없어서 직접 부탁해 따낸 일감이었다.
그릇을 열심히 닦았다. 물은 눈을 녹여 만들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열이 닿지 않는 부엌에 놓여 있던 터라 좀 미지근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게 어디야. 맨손으로 설거지하려면 이 정도 온도가 적당했다. 김래빈은 마지막 그릇까지 꼼꼼히 헹구고 옷에 손을 닦았다. 그리고 거실로 향했다. 형들은 옹기종기 모여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거든.” 그러며 이세진이 지도 한 구석을 짚었다. “그리고 라호이야 비치는 여기.” 또 반대쪽을 짚었다. 멀지 않았다.
“거의 다 왔네. 사나흘이면 도착하겠는데.”
“중간에 폭풍만 안 만나면요. 아무래도 그렇죠.”
“폭풍……. 만나려나?”
“요즘 눈보라가 좀 죽었던데요. 그럴 가능성은 작지 않을까요. 그래도 배제할 수 없기는 한데.”
김래빈은 형들의 대화에 끼어드는 대신 열심히 경청하길 선택했다. 그들은 저들끼리 열심히 대화했다. 김래빈이 구태여 애를 써가면서까지 낄 필요는 없었다. 형들의 신중한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김래빈은 버릇처럼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딱딱하고 차가운 것이 손끝에 닿았다. 그걸 손바닥에 넣고 만지작거렸다. 차유진이었다.
차유진은 금이 많이 갔다. 한 번 부러질 뻔한 것을 우연히 구한 순간접착제로 붙여놨다. 김래빈은 여전히 어디든 차유진을 갖고 다녔다. 두껍게 껴입던 패딩을 자주 벗게 된 덕분에 이제 차유진은 가장 안쪽 후드티 주머니에 들어갔다. 김래빈은 그 변화가 조금은 마음에 들었다. 추위에도 덜 깨지고 언제든 만질 수가 있어서.
“래빈아?”
“네?”
갑작스러운 호명에 넋을 놨던 김래빈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형들의 시선이 전부 김래빈을 향한 채였다. 김래빈은 입을 살짝 벌렸다가 부산스럽게 고개를 디밀었다. 죄송합니다, 못 들었습니다! 입을 어물거리다가 말하자 류청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라호이야 비치 가고 싶댔으니까 들르려고 하는데. 일정 계산하려면 해변에서 얼마나 머물지 생각해야 해서. 거기 왜 가는 건지 물었지.”
“아.”
“그냥 구경만 하고 올 거라면 하루로 잡고, 거기서 누구 만나야 하면 이틀 정도로 잡으려고 하는데. 그런데 래빈아. 라호이야 비치 간 다음엔 뭘 할 거야?”
“어…….”
뭘 할 거냐고? 대수롭지 않게 물은 질문에 김래빈이 눈을 깜빡였다. 어, 그러게. 나 뭐 하지. 김래빈은 죽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죽어버렸다는 말보다는 죽었다는 말이 더 나아서 그랬다. 김래빈은 자신이 바다로 향하는 동안 죽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일행을 만났다. 생각보다 훨씬 수월하게 가고 있었다. 죽음의 지읒 자도 안 보였다. 이러다간 진짜 꼼짝없이 해변에 도착할 것 같았다. 해변에 도착하면? 김래빈이 멍하니 되물었다. 바다에 도착하면 나 어쩌지? 차유진의 유언은 바다에 가달라는 것뿐이었다. 그 외엔 어떻게 하라곤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김래빈은 멀뚱히 눈만 끔뻑이다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예상치 못한 난관이었다. 한참 대답이 없자 류청우가 천천히 고개를 갸웃했다. 입만 여닫던 김래빈은 이내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자신이 들어도 얼빠진 소리가 나왔다.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뭐. 생각나면 말해줘.”
“네.”
“그럼 차후 일정은 라호이야 비치 도착한 다음에 구상하자.”
“네.”
이후 회의는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다가 끝났다. 형들이 모두 흩어지자 김래빈은 방구석에 처박혔다. 벽난로가 잘 보였다. 벽에 기대어 앉아 멍하니 불꽃만 구경했다. 벽난로 속에서 타닥거리며 오르는 불씨를 하나씩 셈하던 김래빈은 넋 놓은 채 생각했다. 진짜로 어쩌지. 죽지도 않고 바다에 닿으면 나는 어쩌지. 손에 차유진이 잡혔다. 꺼내서 들여다봤다. 잔뜩 금이 간 유리병 안에 차유진이 웅크리고 있었다.
몇 시간 후 김래빈과 일행은 산장을 떠났다. 다음 산장을 찾은 이세진이 앞장섰다. 김래빈은 가장 뒤에서 따랐다. 기세가 죽었다지만 눈보라는 여전히 거셌다. 세찬 칼바람에 덮어쓴 후드가 흔들리며 찢겼다. 김래빈은 이를 악물고 나아갔다. 바로 앞에 선 배세진의 등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꾸역꾸역 걸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잠시 쉬었다. 류청우가 능숙하게 땐 불 앞에서 모두가 몸을 녹였다. 간단히 요깃거리를 나눠 먹었다. 김래빈은 육포 두 조각을 꼭꼭 씹어 삼켰다. 칼바람은 여전히 짐승 우짖는 소리였다. 그래도 조금 작아진 것 같긴 했다. 체력을 보충하느라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적막 속에서 김래빈은 멍하니 넋을 놨다. 차유진을 꺼내든 건 거의 버릇 같은 행동이었다.
차유진을 꺼냈다. 금이 간 차유진을 손바닥 위에 놓은 찰나였다.
“우왁!”
돌풍이 불었다. 피웠던 모닥불이 순식간에 꺼짐과 동시에 앉아 있던 모두가 바람에 밀려 뒷걸음질 쳤다. 김래빈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필이면 바람을 등지고 있었던 탓에 그대로 코를 박았다. 얼굴이 눈에 파묻히는 것과 거의 동시에 벼락같이 깨달았다. 손이 비었다.
김래빈은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다급히 고개를 쳐들고 주위를 살폈다. 없었다. 유리 조각 하나 없었다. 흰 눈 속에서도 유달리 잘 보이던 붉은색 하나 잡히지 않았다. 안 돼. 목이 꽉 막혔다. 래빈아, 하고 형들이 어리둥절하게 묻는 소리마저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안 돼. 차유진이었다. 그건 차유진이었다. 차유진이 곁에 있어야 했다. 차유진을 두고 갈 순 없었다. 돌려줘. 우두커니 선 김래빈이 멍하니 뇌까렸다. 안 돼. 가져가지 마. 돌려줘. 차유진을 돌려줘. 차유진을…….
김래빈 나 두고 갔어. 꿈에서 나왔던 차유진의 목소리만 한참을 메아리쳤다.
헬로.
뭐야, 차유진. 한국말로 해.
헬로, 래빈.
한국말로 하라니까. 영어로 하면 대화가 안 돼.
하우 알 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하필이면 왜 그런 걸 물어?
아임 파인.
그래서?
앤, 유 알?
나는 왜 물어. 묻지 마. 자꾸 이상한 거 물을 거면 차라리 얼굴이나 보여주고 말하지. 상대방 얼굴도 보지 않은 채로 말을 거는 건 무례한 짓이야, 차유진.
…….
그러니까 나 좀 봐주면 안 돼?
김래빈과 차유진은 늑대굴에서 살았다. 처음은 조촐했으나 가면 갈수록 여유가 늘어났다. 조난 초반엔 피차 예민해서 틈만 나면 언성을 높이고 싸워댔다. 꼭 붙어야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늑대굴이 야금야금 넓어진 것도 그 탓이었다. 대판 싸우고 난 후 차유진이 자꾸만 밖으로 나가서. 김래빈 얼굴 보기 싫다고 씩씩대며 늑대굴 밖으로 나서서. 얼굴 보기 싫어도 나가지는 말라며 김래빈은 혼자서 한참 눈을 팠다. 돌아온 차유진은 넓어진 늑대굴과 내가 꼴 보기 싫으면 차라리 넓어진 저 구석으로 가라는 김래빈의 말을 들으며 허,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냥 그렇게 화해했다.
김래빈은 가만히 누워서 천장만 들여다봤다. 천장은 괴상한 무늬가 그려져 있었는데 누워서 올려다보니 꼭 애벌레 같았다. 구부러진 검은 점들을 서른여섯 번째로 셈하다가 그냥 뒤척였다. 방엔 김래빈 혼자였다. 딱히 독차지한 건 아니고, 형들은 제각기 일로 바빴다. 김래빈이 바쁘지 않은 건 김래빈이 앓아누워서였다. 폭설 내리기 시작한 때로부터 다섯 번째로 걸리는 감기였다.
열감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형들은 주기적으로 찾아와 물수건을 갈아줬다. 솔직히 말해서 김래빈은 형들께 감사하다기보단 죄송한 마음밖에 없었다. 어떻게 보면 뒤늦게 합류한 혹이나 다름없는데, 두고 가지도 않고 간호까지 해주신다니. 앓아누운 자신이 진짜로 짐덩이 같이 느껴져서 좀 훌쩍거리기도 했다. 간신히 진정했을 때는 버릇처럼 주머니를 뒤지다가 아무것도 잡히지 않아서 또 눈물이 터졌다. 산장 두세 개만 더 거치면 바로 라호이야 비치라는 형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또 잤다. 먹고 자고 울고 먹고 자고 울고의 반복이었다.
차유진을 잃어버렸다. 추위와 폭설과 돌풍은 김래빈에게서 차유진을 두 번이나 빼앗았다. 라호이야 비치가 코앞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거기 가면 나는 이제 뭐 하지. 도착해서 소리나 빽빽 지른 다음에는 뭐 하지. 라호이야 비치 갔을 때 차유진이 나 기다리고 있었으면 좋겠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면 형들한테 차유진 소개하고 같이 다녀도 되겠냐고 물어볼 텐데. 멍하니 벽만 바라보며 그렇게 한참 상상하다가 말았다. 어차피 이런 건 전부 덧없는 몽상에 불과하다는 걸 알았다.
열에 몽롱한 정신으로 눈만 깜빡이는데 마침 문이 열렸다. 김래빈은 눈을 깜빡이다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그릇을 든 류청우였다. 류청우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웃으며 다가왔다. 괜찮냐고 묻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열이 살짝 있기는 했으나 그래도 훨씬 나았다.
“우리 내일 출발할 거야. 래빈이 체력 맞춰서 좀 천천히 갈 테지만 그래도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네. 죄송합니다.”
“이런 한파에 사람이 감기 한 번 안 걸리는 게 이상하지. 죄송할 필요 없어.”
류청우는 그렇게 말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김래빈은 아랫입술을 사리물곤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저렇게 해도 형님들은 모두 건강하셨다. 껴입은 옷의 소매가 손안에 말려들었다. 류청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 건 그때였다.
“그런데 래빈아. 라호이야 비치 도착해서 말이야. 하고 싶은 거 있어?”
다정한 물음이었다. 지난 산장에서 물었던 질문과도 같았다. 김래빈은 입술을 꾹 물고 고개를 저었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제 손에 차유진이 없다는 거였다. 차유진이 없었다. 사실 차유진이 없어진 지는 한참 됐다. 차유진은 늑대굴에서 죽었으니까. 진짜 평온한 표정으로 잠든 것처럼 죽어버렸으니까. 그래서 눈 속에 파묻고 오지 않았는가. 꽁꽁 얼어버리라고. 그러니 따지고 본다면 차유진은 늑대굴을 떠난 그 시점부터 김래빈 곁에 없었다. 알았다. 머리론 아는데 마음은 몰랐다.
김래빈이 힘없이 고개를 젓자 류청우는 한참 말이 없었다. 고개를 떨군 탓에 류청우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몰랐다. 그냥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느껴졌다. 차유진은 등을 토닥이지 않았다. 차유진은 그냥 혼자 내버려 뒀다가 어느 순간 냅다 껴안았다. 그리고 한참을 지분거렸다. 귀찮을 지경이 되어서 짜증을 내려고 하면 눈을 맞추고 히히 웃었다. 그러면 어느 순간 불안이 가라앉고 화가 녹아내렸다. 차유진 보고 싶다. 차유진은 요즘 꿈에도 나오지 않았다.
“있지, 래빈아. 우리가 같이 의논해봤는데……. 혹시 래빈이만 괜찮으면, 라호이야 비치 들른 이후에도 같이 다니지 않을래?”
“예?”
“하고 싶은 것도 없고, 할 것도 없고. 가고 싶은 곳도, 갈 곳도 없다면서. 라호이야 해변에 도착한 다음을 생각해놓지 않았을 수 있어. 누구나 목표를 이루고 난 다음은 잘 계획하지 않으니까.”
류청우가 침착하게 말했다. 김래빈은 멍하니 고개를 들어서 류청우를 바라봤다. 온화하지만 단단했다. 류청우는 분명 우리라고 말했다. 형들이 전부 의논하신 걸까. 눈을 깜빡였다. 류청우는 어리둥절한 김래빈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러며 말을 이었다.
“뭔가 한참 계획했던 일이 끝나면 괜히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지거든. 이것만 끝내면 내 세상이 확 바뀔 것 같은데, 목표를 달성하고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면……. 그러면 정말로 힘드니까.”
“전…….”
“그러니까, 다음으로 하고 싶은 일이 생길 때까지 우리랑 같이 다니는 게 어떨까 싶어서. 물론 같이 다니다가 뭔가 하고픈 일이 생긴다면 붙잡지 않을 거지만.”
류청우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곤 덧붙였다. “라호이야 해변에 닿고 당분간 우리랑 같이 다니면서, 밥도 제때 먹고 운동도 하고…… 같이 나중을 생각하는 거지.”
다정한 권유였다. 김래빈은 류청우의, 형들의 제안을 멍하니 속으로 곱씹었다. 그럴까. 그러는 것도 나쁘지 않지. 하고 싶은 것은 없었다. 해야 할 것도 없었다. 갈 곳은커녕 가고 싶은 곳도 없었다. 류청우의 말은 한 점 틀림이 없었다. 라호이야 비치. 닿기 전에 죽으리라 생각해서 죽고자 마음먹었다. 그러니 라호이야 비치에 닿은 차후를 생각해놨을 리가.
김래빈이 한참 말이 없자 류청우가 눈을 살짝 찡그리며 웃었다. 그러더니 장난스럽게 말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 일행이 불편하다면 어쩔 수 없지만…….”
“아, 아닙니다! 그런 것 때문에 고민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님들께서는 객관적으로 보나 주관적으로 보나 몹시 대단한 분들이시기 때문에 동행에 있어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그래? 그럼 뭐 때문에 고민하는 거야?”
훅 들어온 질문에 김래빈의 입이 닫혔다. 대답을 찾기가 어려웠다. 말이 목구멍에 걸려서 나오질 않았다. 입만 한참 여닫는데 류청우가 손을 들어 어깨를 천천히 토닥였다. 김래빈은 눈을 깜빡였다. 그러니까, 차유진. 차유진이 문제였다. 차유진이. 자신이 두고 간 차유진. 늑대굴 근처에 파묻혀 있을 차유진. 그러니까, 다른 말로 바꾸자면, 김래빈이 문제라는 것이다. 김래빈이. 차유진을 두고 간 김래빈이. 늑대굴 근처에 차유진을 파묻은 김래빈이. 미련 넘치는 김래빈이.
“고민할 수 있지. 고민될 거야. 생각 정리되면 말해줘. 기다릴게.” 류청우는 익숙하게 김래빈을 도닥이더니 들고 온 그릇을 건네며 말했다. “그리고 이건 문대가 만들었어. 죽이야. 소화 안 되면 큰일이니까 천천히 먹어.”
“아. 감사합니다!”
“푹 쉬어, 래빈이.”
류청우가 일어났다. 문을 열고 나섰다. 닫히기 직전 바깥에서 소란이 들렸다. 형들의 목소리였다. 뭐래요? 고민해본다네. 죽은 줬어요? 줬어. 자신의 이야기였다. 귀를 기울이려는 찰나 문이 닫혔다. 그리고 다시 침묵.
김래빈은 죽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숟가락을 들었다. 적당히 묽은 죽을 입안에 밀어 넣었다. 고소하고 적당히 심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따뜻했다.
“잠깐 대화할 수 있어?”
김래빈은 어딘가 비장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얼굴을 굳힌 배세진이 문간에서 고개를 디민 채였다. 방 안에서 옷을 꾸리던 김래빈은 곧장 허리를 곧추세우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배세진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근처에 자리하고 앉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배세진은 김래빈에게 책을 몇 번 빌려준 적이 있었다. 사람을 죽이는 폭설 속에서도 꿋꿋하게 책을 가져왔구나 싶어서 존경스러웠던 기억이 있었다. 게다가 얼마 없는 책들은 분야가 전부 다양해서, 세상이 폭설에 갇히지만 않았더라면 어떤 사람이었을까 궁금했다. 게다가 상대적으로 유해 보이는 인상과는 다르게 굉장히 단단한 사람이었다, 배세진은.
그런 배세진은 김래빈의 곁에 앉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힐끔힐끔 바라본 얼굴은 어딘가 진지해 보였다. 김래빈은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들의 속내를 짐작하는 데에 능하지 못했다. 그래서 배세진이 진지한 얼굴로 물을 질문들을 이리저리 셈하다가 말았다. 세 번째 질문을 셈하고 있는데 배세진이 입을 연 것이다.
“유리병 안에 든 거, 뭐였어?”
“예?”
“지난번에 봤어. 물론 일부러 찾아본 건 아니고! 우연히 봤는데, 그거……. 머리카락 아니야?”
“아.”
김래빈은 배세진에게서 눈을 돌렸다. 버릇같이 창밖을 봤다. 이상하리만치 고요하게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김래빈은 말했다.
“네. 차유진입니다.”
“차유진?”
“제…….”
뭐라고 말해야 하지. 친구? 애인? 차유진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제대로 감이 잡히지 않았다. 너무 오래돼서 그런지도 몰랐다. 만일 차유진이 곁에 있었더라면 뭐라고 했으려나. 관계를 묻는 배세진에게 의미심장하게 씨익 웃고는 못 알아들을 영어를 지껄였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하지만 차유진은 곁에 없었다. 김래빈만 덜렁 있었다. 첫 번째 차유진은 눈 속에 파묻었고, 두 번째 차유진은 돌풍에 날아갔다. 그래서 혼자였다. 그래서 뭐라고 할지 모르겠다.
김래빈이 머뭇거려도 배세진은 그를 채근하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물고 사뭇 비장한 태로 김래빈을 가만히 응시했다. 김래빈은 입을 몇 번 여닫았다가 간신히 말했다. 그래도 형님께서 묻는데 무슨 대답이라도 내놔야 한다는 강박감이 차유진과 김래빈의 관계를 서툰 낱말로 정의하게 했다.
“제가…… 두고 온 사람입니다.”
“그래?”
“네.”
“그렇구나.”
다행스럽게도 배세진은 말을 잇지 않았다. 김래빈은 고개를 떨궈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귀를 기울이면 돌풍 치는 소음이 들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지. 이 산장은 벽이 두껍고 까마득하게 쌓인 눈이 모든 소음을 삼킬 테니까. 눈이 쌓이고 기온이 내려가자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소음도 얼고 사람도 얼었다. 사랑도 얼고 눈물도 얼었다. 그리하여 차유진도 언 것이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배세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듣기 좋은 또렷한 발음이 김래빈의 귓가를 파고들어 고막을 울렸다.
“두고 온 거 맞아?”
김래빈은 대답하지 않았다. 잘 모르겠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을 것만 같아서 그랬다. 차유진을 묻었고 늑대굴은 떠나왔다. 두고 온 줄 알았다. 차유진이 돌풍에 날아갔고 끙끙 앓았다. 두고 온 줄만 알았다. 차유진이 꿈에서 나와서 얼굴을 보여달라고 했다. 두고 온 줄만 알았다. 그런데 되짚어 보니 한 번도 두고 온 적 없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술을 깨물었다. 김래빈은 여전히 잠결에 누군가 제 손을 잡아주는 상상을 했다.
두고 오는 건 어떻게 하는 걸까. 이미 얼어버려서 나와 꼭 붙어버린, 이제는 쇳덩이처럼 느껴지는 이 감정은 대체 어떻게 두고 와야 하는 걸까. 어떻게 떨어트려야 하는 걸까. 추위에 사랑이 얼었다. 김래빈과 한 몸이 되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녹이기엔 너무 추웠다. 온종일 불을 쬐어도 녹지 않았다. 이름에 불을 품은 사람을 사랑했더니 웬만한 불로는 끄떡없었다. 곤란했다. 정말이지 곤란했다. 김래빈이 작게 숨을 삼켰다. 배세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꿈에 나와?”
“네. 가끔 나옵니다.”
“나와서 뭐 해?”
“아무것도 안 합니다. 그냥 항상 바다에 있습니다. 바닷가 거닐다가 맨날 헬로, 하우 알 유, 합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영어를 잘하지 못해서……. 한국어로 하라고 채근하다가 맨날 깹니다.”
“그렇구나.”
“네.”
정말 그러했다. 차유진은 지금껏 꿈에 여러 번 나왔다. 매번 바다였고 매번 뒤통수만 보여줬다. 매번 앞장섰고 매번 뒤돌아보지 않았다. 김래빈은 앞서나간 차유진의 발자국만 고대로 밟으며 따라갔다. 차유진은 매번 헬로 김래빈, 하우 알 유, 하고 영어로 떠들었다. 한국말 쓴 건 첫 번째 꿈밖에 없었다. 그때조차 자기를 두고 가느니 뭐라느니 했다. 진짜 바보였다.
그때 배세진이 느릿느릿 말했다.
“내가 읽었던 책에 이런 구절이 있었거든. 가장 궁극적인 작별은 서로를 향한 안부 인사로부터 시작한다.”
“그렇습니까?”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김래빈.”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김래빈이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맞았다. 배세진은 김래빈을 뚜렷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단단한 고동색 시선이 김래빈을 향했다. 굳세고 한 점 흔들림 없었다.
“우리 연습하자. 다음번에 차유진이 꿈에 찾아오면, 너도 똑같이 하우 알 유, 하고 물을 수 있게.”
김래빈은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을 고르느라 그랬다. 하고픈 말들이 목구멍을 꽉 막아서 숨쉬기가 어려웠다. 멍하니 눈만 깜빡이는데 배세진은 침착하게, 그러나 조금 빨라진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했다.
“류청우가 피우는 불은 잘 꺼지지도 않고 따뜻해.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이라면 뭐든 빌려줄 수 있어. 박문대가 하는 밥은 먹을 때마다 속이 편하고 따뜻해져. 이세진 덕분에 매번 편한 산장에서 머물 수 있고, 옷에 구멍이 나거나 하면 선아현이 고쳐줄 수 있어. 그러니까 우리랑 같이 다니자. 같이 다니면서 연습하자, 김래빈. 차유진 두고 올 수 있게. 차유진한테 안부 인사 건넬 수 있게.”
배세진의 목소리는 일견 비장하게까지 들렸다. 김래빈은 눈만 깜빡였다. 안부 인사. 헬로. 하우 알 유. 아임 파인. 땡큐. 앤 유? 뱃속이 느글거렸다. 몇 안 되는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다가 사라졌다.
배세진과의 대화 후 김래빈은 이틀 간 주의 깊게 일행을 살폈다. 류청우가 피운 불은 정말 따뜻했다. 바람이 맹렬하게 부는데 용케 꺼지지 않았다. 꺼질 듯해도 류청우가 몇 번 손짓하면 금세 살아났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모두가 옹기종기 모여 몸을 녹였다. 그러며 시답잖은 이야기나 했다. 형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다음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배세진은 김래빈에게 주기적으로 책을 빌려줬다. 산장에 들를 때마다 어디선가 새 책을 구해왔다. 책 한 권을 돌려 읽고 주제를 정해서 함께 이야기했다. 배세진의 날카로운 견해를 들을 때마다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배세진과의 이야기가 기대되어 어서 다음 산장으로 옮기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들었다.
박문대가 해주는 밥은 정말 맛있었다. 찬기가 가득한 몸을 이끌고 그릇을 쥐면 손바닥에서부터 온기가 퍼졌다. 차가운 몸을 데우는 음식들을 꼭꼭 씹어 삼키면서 김래빈은 녹여 먹었던 참치 통조림을 생각했다. 입안이 텁텁하지도, 비리지도 않았다. 몸속이 따뜻했다. 이제 김래빈은 매번 식사 시간을 기대했다.
이세진은 산장 찾는 데에 도가 텄다. 하루 이틀 간격으로 나갔다가 들어오곤 지도에 새로운 산장 위치를 찍었다. 이세진이 찾아내는 산장 덕분에 모두가 편리하기 그지없었다. 산장 찾아내는 실력은 거의 신이 들렸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다음 산장은 어떻게 생겼을까 조금씩 궁금해졌다.
옷에 구멍이 났을 때 선아현이 한 시간 만에 뚝딱 고쳐줬다. 두꺼운 방한용 천을 덧대어 꼼꼼하게 바느질해서 돌려줬다. 고마움에 허리를 구십 도로 꾸벅꾸벅 숙이니 그럴 필요 없다며 손사래 쳤다. 그러며 손에 파란색 천으로 만든 인형을 쥐여줬다. 있는 단추가 검은색밖에 없어서 눈이 검은색이라고 했다. 인형은 차유진과 닮은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김래빈은 결심했다.
파도 소리가 들렸다.
김래빈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멀리서 파도 소리가 들렸다. 희미하고 아득했으나 확실히 들렸다. 형들이 삼삼오오 떠드는 소리가 파도 소리 위로 맞물렸다. 주머니 안에 손을 찔러넣었다. 선아현이 선물해줬던 인형이 잡혔다.
라호이야 비치가 코앞이었다. 돌풍은 잦아들었고 함박눈만 소리 없이 내렸다. 서리가 낀 창문 위에 김래빈의 얼굴이 비쳤다. 날카로운 눈동자가 김래빈을 똑바로 직시했다. 김래빈은 부러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얼룩덜룩한 창문 너머를 쏘아보자 푸른빛이 간신히 보였다.
라호이야 비치에 가기 직전 들른 산장이었다. 이세진과 박문대와 김래빈만이 라호이야 비치에 갈 것이다. 류청우와 배세진과 선아현은 산장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이세진과 박문대가 무슨 의도로 라호이야 비치에 가는지는 몰랐으나, 그들은 김래빈이 거기서 무슨 짓을 하든 건드리지 않겠다고 말했다. 김래빈도 똑같이 되풀이했다. 간섭하지 않겠습니다! 형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호이야 비치였다. 거진 일 년 만이었다.
“준비됐어, 래빈이?”
“아, 네. 준비 끝났습니다!”
“가자. 저희 다녀올게요.”
“너무 늦진 마. 눈이 많이 그쳤지만 혹시 모르니까.”
“네.”
김래빈은 배낭을 고쳐맨 채 종종걸음으로 이세진과 박문대에게 향했다. 문간에서 서로 시선을 주고 받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글을 내려쓴 이세진을 선두로 밖에 나섰다. 눈발은 많이 그쳤다. 이제는 추위도 참을 만했다.
여전히 쌓인 눈 사이를 헤치며 김래빈은 멍하니 생각했다. 라호이야 비치. 사람들이 없었다. 조용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는데. 한 손엔 서프보드, 다른 손엔 비치볼 들고 왁자지껄 떠들던 사람들의 소음이 아직도 귓가에 선명했다. 차유진도 개중 하나라서 더더욱 그랬다. 수영복을 입으면 근육이 잘 짜인 몸이 드러났다. 차유진은 서프보드를 겨드랑이에 끼고 김래빈을 한참 놀려댔었다. 뭐 때문에 그렇게 놀렸더라. 그건 기억나지 않았다. 워낙 이런저런 사소한 이유로도 투닥거렸던지라.
그런 라호이야 비치에 김래빈은 돌아왔다. 차유진 없이. 차유진 부탁 때문에.
“보인다.”
앞장서던 이세진이 나직이 말했다. 김래빈은 폐부를 찌르는 차가운 숨에 간신히 호흡하면서도 고개를 들었다. 파도 소리가 가까워졌다. 귀를 단단히 싼 후드를 비집고 먹먹한 파도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김래빈은 이를 악물고 눈에서 발을 뺐다. 그리고 다시 나아갔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이 푹푹 꺼졌다가 올라오길 반복했다.
바다가 좋았어. 말하진 않았지만 바다가 좋았어. 파도 소리가 좋았고 사람들 웃음소리도 좋았어. 그리고 무엇보다 네가 좋았어, 차유진. 네가 좋아서 사람들 웃음소리가 좋고 파도 소리가 좋고 바다가 좋았어. 네가 좋아서 샌디에이고가 좋고 캘리포니아가 좋고 미국이 좋았어. 네가 좋아서 그랬어.
두껍게 쌓인 눈 속에 발이 빠졌다. 디딘 땅은 더는 아스팔트가 아니었다. 사부작거리는 모래가 느껴졌다. 알알이 흩어지는 모래사장을 짓밟으며 김래빈은 멍하니 나아갔다. 이세진과 박문대와는 다른 방향이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갈라졌다. 이세진과 박문대는 김래빈을 잡지 않았다. 김래빈도 그들을 잡지 않았다.
이윽고 김래빈은 바다 앞에 섰다. 바다는 파도치고 있었다.
살얼음이 둥둥 떠다녔다. 파도가 밀려오고 쓸려가길 반복한 덕분에 경계선 부분엔 눈이 없었다. 희끄무레한 모래가 버젓이 드러나 있었다. 김래빈은 눈에서 발을 떼 모래사장을 밟았다. 발이 푹 빠졌다. 김래빈의 발자국이 남았다. 파도가 밀려와 발등을 적시고 사라졌다.
나 왔어, 차유진. 바다에 왔어.
파도가 쳤다. 포말이 부서졌다. 짠 소금 냄새가 났다. 눈이 따끔거렸다.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다에 도착할 수가 없을 테니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살이 흔들렸다. 그런데 도착했다. 바다에 왔다. 죽어야겠다. 죽을 바에는 죽어버리는 게 더 낫다고. 어차피 죽음 아니면 죽음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너 보고 싶어, 하고 김래빈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너 보고 싶어. 너무 보고 싶어. 네가 보고 싶어, 차유진. 네가 어떻게 웃었는지, 네가 어떻게 심통 부렸는지, 어떻게 볼을 부풀리고 어떻게 채근했는지 기억 나지가 않아. 그래서 보고 싶어. 보고 싶은데…….
그런데.
류청우가 피운 불 근처에 모여 나누는 형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배세진이 책을 읽고 내놓는 감상평이 신기했다. 박문대가 만든 식사를 기대했고 이세진이 찾을 다음 산장이 궁금해서. 선아현이 쥐여준 인형에 차유진 닮은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어서. 그래서.
그래서 살고 싶어졌어.
마침내 눈물이 흘러내렸다. 뺨을 적시고 입술을 적시고 옷깃을 적시며 떨어졌다. 벌어진 잇새에서 울음이 튀어나왔다. 김래빈은 울었다. 세상 서럽게 울었다. 미안해서 울었고 서러워서 울었다. 화가 나서 울었고 속상해서 울었다. 쏟은 눈물은 바다가 되고 내뱉은 울음은 파도가 됐다. 토해낸 눈물과 울음은 그렇게 물살에 흔들리며 떠났다.
웅크린 몸 위로 햇살이 쏟아졌다. 따뜻했다.
*
김래빈은 꿈을 꿨다. 바다였고 차유진이 있었다. 모래사장을 거니는 차유진은 여전히 뒤통수만 보였고 여전히 앞장섰다. 여전히 뒤돌아보지 않았고 여전히 일정한 발자국만을 남기며 걸어갔다. 김래빈은 차유진을 뒤쫓지 않았다. 멀어진 차유진이 말간 목소리로 말했다. 헬로, 김래빈.
얼굴을 보여달라고 하진 않았다. 모래 위 선명하게 남은 차유진의 발자국을 따라 걷지도 않았다. 김래빈은 대신 가만히 입을 열어 말했다.
헬로.
하우 알 유.
아임 파인. 땡큐. 앤 유?
*
차유진이 죽었다. 세상이 망한 지 일 년 만이었다.
세상이 얼어붙었다. 하늘에 자욱하게 낀 먹구름 탓에 낮이고 밤이고 어두웠다. 녹을 틈도 없이 눈이 쌓였고 폭풍이 불어닥쳤다. 김래빈과 차유진은 첫눈이 내리던 날로부터 일 년 동안 똘똘 뭉쳐 생존했다. 그러다가 차유진이 죽었다. 사인은 동사였다. 이름에 불꽃을 품은 주제에 얼어 죽었다. 밖에선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김래빈은 덤덤하게 행동했다. 열기를 뺏긴 차유진의 몸을 질질 끌어 굴 밖에 던져놓은 것이다.
이쯤에서 김래빈은 솔직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까, 둘이 살기엔 좁지만 하나가 살기엔 너무 큰 이 늑대굴 안에서 혼자 궁상맞게 넋 놓고 있는 지금 말이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뭐 감정이 닳아 없어져서 눈물이 나지 않는다는 느낌은 아니고. 그냥 빌어먹게 추워서 그랬다. 눈물이 고이면 금세 얼어붙었다. 그래서 안 흘렀다. 그냥 그뿐이었다. 눈꺼풀에 들러붙은 서리에 시야가 침침했다. 김래빈은 벽에 기댄 채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다 타들어 간 모닥불에서 피어난 탄내만이 김래빈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사람 키를 훌쩍 넘을 만큼 쌓인 눈 사이를 파고들어 지은 이글루였다. 깊고 단단했다. 좀 춥긴 했으나 이 정도 추위는 차라리 나았다. 밖에 비하면 훨씬 따뜻했다. 차유진은 이곳을 늑대굴이라고 불렀다. 늑대들도 추우면 이렇게 땅 파고 들어가. 눈보라가 멈출 거라는 희망을 아직 품었던 시절 차유진은 이렇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여기도 늑대굴이야. 차유진은 자신만만하게 명명했고 김래빈은 별생각 없이 수긍했다. 늑대들이 실제로 굴 파는 습성을 가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처음엔 작게 지었던 늑대굴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야금야금 넓어졌다. 이젠 허리를 반쯤 숙인 채 한 바퀴를 쭉 돌면 땀이 몽글몽글 솟았다. 누가 봐도 혼자 살기엔 넓었다.
근데 왜 나는 여기에 혼자 있지. 김래빈은 차가운 벽에 머리를 박았다. 쿵. 단단한 벽은 파이지도 않았다. 꽝꽝 언 눈은 웬만한 쇳덩이보다 단단하게 느껴졌다. 박은 이마만 욱신거렸다. 김래빈은 화끈거리는 이마를 만지작거리다가 벽면에 기댔다. 힘 하나 없는 몸은 벽을 타고 스르르 흘러내렸다. 겉옷을 세 겹이나 껴입었는데도 추위가 날카로웠다. 뼛속까지 시렸다. 이가 자꾸만 딱딱거리는 게 거슬렸다. 추위에 곱은 손은 감각이 없었다. 이상했다. 손이 차갑다는 게 낯설었다. 늑대굴 안에서 차유진은 항상 손을 잡아줬다. 차유진은 다른 사람들보다 체온이 높은 편이기 때문에 핫팩을 쥔 기분이었다. 김래빈의 손은 차유진이 잡아줘서 항상 따뜻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김래빈은 몸을 일으켰다. 눈보라 치는 바깥에선 마치 늑대가 길게 우짖는 듯한 소리가 났다. 발은 두꺼운 등산용 양말을 네 겹 덧씌우고 장화 안에 구겨 넣었다. 눈이 들어가지 않도록 꽉꽉 묶자 이젠 감각도 거의 안 느껴졌다. 두꺼운 패딩 지퍼를 끝까지 올리고 후드를 뒤집어썼다. 마스크도 두 겹으로 썼다. 고글을 쓰려다가 잠깐 멈췄다. 김래빈은 바로 엊그저께 고글을 잃어버렸다. 늑대굴 안에서 잃어버렸으니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하지만 찾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김래빈은 차유진의 고글을 썼다. 익숙지 않은 느낌 덕분에 영 불편했다. 얼굴에 꽉 맞게 조이고 장갑을 두 겹으로 꼈다. 나서려는데 차가운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길어진 머리칼을 성의 없이 뚝뚝 깨트렸다. 그리고 마침내 허리를 반쯤 숙인 채 늑대굴 밖으로 나섰다.
문을 열고 몸을 비집어 넣자마자 맹렬한 추위가 덮쳤다. 옷을 그렇게 껴입었는데도 추위는 순식간에 틈새를 파고들었다. 사람이 너무 추우면 뜨겁다고 느낀다던데 딱 그 꼴이었다. 그러나 김래빈은 멈추지 않았다. 차유진의 고글 너머로 본 세상은 주황색이었다. 세찬 눈보라에 몸이 휘청거렸다. 무릎께까지 쌓인 눈을 헤집고 나아가는데 옷을 잔뜩 껴입은 몸이 휘적휘적 뜻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차유진이 봤더라면 웃었으려나. 멍하니 뇌까리다가 간신히 생각을 떨쳤다.
멀리 가진 않았다. 그 전에 봐야 할 것이 있었다. 김래빈은 두 걸음 걷고 주위 보고 두 걸음 걷고 주위 살피길 반복했다. 그리고 딱 열네 걸음 걸었을 때 발견했다. 눈을 매섭게 부릅뜨지 않았더라면 놓쳤겠지. 목표를 발견한 김래빈은 휘적휘적 걸어갔다. 늑대 울음소리가 들렸다.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올린 절규를 닮았다. 목표에 다가간 김래빈은 이내 풀썩 앉았다. 수북하게 쌓인 눈이 체온에 녹았다가 김래빈 위로 새로 쌓였다.
내놓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눈이 덮여. 김래빈은 장갑 낀 손을 눈 속에 푹 담갔다. 그리고 두껍게 쌓인 눈을 천천히 털기 시작했다. 장갑 속으로 차가운 눈이 우수수 떨어졌다. 감각이 없었다. 춥지도 않았다. 어딘가 아주 중요한 나사가 하나 빠진 것 같았다. 칼바람과 함박눈은 마치 배경음악처럼 깔렸다. 바람에 원혼이 깃들었다는 할머니의 한탄을 떠올리면서도 손은 기계처럼 움직였다. 한참을 파헤치는데 빨간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눈을 대충 털어내자 흐릿하게 보였다. 감은 눈과 얼어붙은 머리카락. 창백한 피부와 시퍼런 입술 같은 것들. 얼굴을 만지니 얇게 서렸던 살얼음이 손끝에 부서졌다. 차유진이었다. 얼어 죽은 차유진. 이상하리만치 창백하지만 않았더라면 잠든 거라고 착각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평온한 얼굴이었다. 김래빈은 차유진의 숨이 끊겼음을 확인하자마자 그를 늑대굴 밖에 내놓았다. 부패를 막기 위하느니 뭐라느니 같은 이유는 아니었다. 늑대굴 안에서 차유진 손을 잡았더니 식은 체온이 느껴졌다. 그게 싫었다. 그래서 밖에 내놨다. 그뿐이었다.
김래빈은 차유진을 가만히 바라봤다. 김래빈 위로도 눈이 수북하게 쌓였다. 슬슬 어깨가 무거웠다. 차유진이 자신에게 기댈 때도 꼭 이런 기분이었다. 대신 조금 더 따뜻했지. 김래빈은 버릇처럼 손을 들어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굴곡진 손가락 대신 눈이 부스스 흩어졌다. 장갑 낀 손이 어찌나 차가운지 눈은 녹지도 않았다. 손을 떨궜다. 김래빈은 머뭇거리다가 차유진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꽁꽁 언 머리카락은 정말이지 손쉽게 부러트릴 수 있었다.
“가져갈게.”
김래빈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차유진의 머리카락을 한 줌 가득 부러트렸다. 손에 담긴 머리카락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일어났다. 늑대굴을 한 번 바라봤다. 아깝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세상엔 불가항력의 일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이를테면 차유진이 죽은 것. 김래빈이 차유진을 늑대굴 밖에 내놓은 것. 김래빈이 늑대굴을 떠나는 것. 김래빈이 차유진을 떠나는 것 따위의.
김래빈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돌풍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바다에 갈 시간이었다.
차유진 따라 캘리포니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김래빈이 스물넷일 때 벌어진 일이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김래빈은 자신이 뜨거운 햇살을 견디지 못하고 흐물흐물 녹을 줄만 알았다. 캘리포니아는 날씨 좋기로 유명하지 않은가. 게다가 차유진도 우리 집에선 파도 소리 들린다며 틈만 나면 웃었다. 떨림과 두려움과 그보다 큰 기대감에 부풀어 시답잖게 투닥거리는 와중에 비행기는 그들을 캘리포니아에 내려줬다. 공항을 나설 때 차유진은 김래빈의 손을 꽉 잡으며 그의 뺨에 키스했다. 그리곤 웃었다. 캘리포니아 어때? 얼굴을 한껏 붉힌 채 차유진을 노려보던 김래빈은 장난스러운 질문에 불퉁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고작 공항 입구에 왔을 뿐이니 벌써 캘리포니아 전반에 대한 인상을 결정하는 건 옳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차유진 공공장소에서 뽀뽀하지 마! 차유진은 입술을 비죽 내밀면서도 김래빈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공항에서 나와선 차유진네 가족을 만났다. 스페인어와 영어를 현란하게 섞어가며 대화하는 가족을 보면서 김래빈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솔직히 말해서 그냥 차유진 1, 차유진 2, 차유진 3, 차유진 4…… 같은 느낌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정말이지 무례한 생각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차유진이 한 걸음 뒤에 물러나 있던 김래빈을 당겨 곁에 세운 건 그때였다. 모두의 이목이 단번에 쏠렸다. 김래빈이 저도 모르게 허리를 곧추세우는데 차유진이 말갛게 웃으며 영어를 발음했다. 그러자 가족들이 와락 웃음을 터트렸다. 김래빈만 차유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물음표만 띄웠다. 나중에 물어봐도 그냥 바보라고 했어, 할 뿐 알려주지 않았다.
김래빈은 차유진네 집에 머물렀다. 그동안 차유진과 서핑도 하고 수영도 하고, 개도 산책했다. 사실 김래빈이 개를 산책시키는 게 아니라 개가 김래빈을 산책시키는 것 같은 꼴이긴 했다. 일 중독 기질은 캘리포니아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돼서, 사방에서 날아드는 강렬한 자극들을 비트와 박자와 선율로 바꾸느라 김래빈은 매일같이 꼭두새벽에 잠들었기 때문이었다. 한밤중에 노트북 밝기를 최대로 낮추고 딸깍대는 김래빈을 구경하느라 차유진도 덩달아 늦게 잤다. 어느 때는 치근덕거리는 차유진을 밀어내다가 눈이 맞은 일도 있었다.
김래빈은 캘리포니아가 좋았다. 비록 영어엔 젬병이라 항상 차유진이나 차유진의 가족 중 한 명과 동행해야 했고, 그도 아니라면 번역기를 간절하게 쥔 채로 다녀야 하기는 했지만. 하루걸러 하루꼴로 찾아오는 차유진의 친구들에게 기를 쪽쪽 빨려서 기절할 것 같은 날들을 보내기도 했지만, 어쨌든. 배려해주신 덕분에 한식도 먹을 수 있었고 차유진이 곁에 있었고 무엇보다 햇볕이 따스했다. 잔디밭에 누워 뜨끈뜨끈한 햇살에 몸을 지지고 있으면 웃통을 깐 차유진이 익숙하게 곁에 누웠다. 그러면 별말 없이 멍하니 하늘이나 같이 올려다보는 것이다. 그런 게 좋았다.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모든 게 자연스럽던 날들.
여긴 따뜻해서 좋아. 어느 날 김래빈이 말했을 것이다. 적당히 달궈진 선베드 위에 누워서. 방금까지 물놀이 하다 온 차유진은 수건 하나를 덮은 채 옆 공간에 끼어 있었다. 선베드 하나는 건장한 성인 남성 둘이 눕기엔 좁았으나 차유진은 항상 김래빈 옆에 끼어들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인가 김래빈은 선베드 끝자리에 딱 붙어 있었다. 선베드를 혼자 써도 그렇게 했다. 버릇이었다.
반대쪽 끝자리에 딱 붙은 차유진이 몸을 꾸역꾸역 돌렸다. 작은 공간에서 눈이 마주쳤다. 차유진한테선 바다 냄새가 났다. 짠 내와 약간 묵은 물 냄새. 차유진은 김래빈을 빤히 바라보다가 되물었다. 그게 끝이야? 캘리포니아 좋은 점 따뜻한 거 빼도 많아. 그렇게 말하기에 눈을 데굴데굴 굴렸던 것도 같고.
사실 그때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떠올릴 수 있는 걸 나열하자면 아무래도 아득하게 부서지던 파도 소리. 해변을 뛰노는 사람들의 영어, 즐거운 비명. 딱 달라붙었던 뜨끈한 차유진의 온기. 맞붙은 이마의 축축함. 나직한 차유진의 목소리. 입술을 부딪친 순간 느껴졌던 소금기. 떨어지자마자 들렸던 차유진 누나의 쾌활한 웃음과 놀림. 달아오르던 얼굴과 불퉁하게 대꾸하던 차유진의 말투 같은 것들.
그리운 것들을 나열하자면 아무래도 그런 것들이겠지.
죽어야겠다. 차유진이 죽은 지 열흘 만에 김래빈은 결심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이렇게 살다간 어차피 얼마 못 가서 죽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은 탓이었다.
늑대굴을 떠나면서 김래빈은 차유진의 머리카락 한 줌만 덜렁 들고 왔다. 쌓아놨던 물자는 하나도 챙기지 않았다. 열흘간 다른 생존자들을 여럿 만났다. 그들은 모두 영어를 썼고 한국어가 가능하다고 해봤자 한두 단어나 겨우 발음했다. 김래빈은 영어를 해봤자 하이, 하우 얼 유, 아임 파인 땡큐 앤 유밖에 못 했다. 한마디로 말이 안 통했다. 대화가 안 되니 피차 이득이랄 게 없었다. 세 번째인가 만났던 생존자가 피골상접한 김래빈 꼴을 보고 안타까웠는지 참치 통조림 몇 개 쥐여줬다. 김래빈은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며 서툴게 물었다. 라호이야 비치, 웨얼?
하필이면 라호이야 비치인 이유는 없었다. 거기가 아마 거리상 가장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생존자를 처음 만났을 때 김래빈은 영어로 더듬더듬 물었다. 비치, 니얼, 웨얼? 그러자 상대는 고민하다가 라호이야 비치를 말했다. 그래서 라호이야 비치에 가기로 했다. 사실 모르는 외국인 입에서 나온 이름에 좀 놀라기도 했다. 익숙해서 그랬다. 차유진네 집에서 보이고 들리는 해변 이름이 라호이야 비치였다. 이건 뭐 운명의 장난인가. 땡큐 하며 생존자와 헤어진 직후 김래빈은 멍하니 생각했더랬다.
생존자들에게 물어물어 나아가는 여정은 지리멸렬하고 지루했다. 사방에 눈이 내려 모든 것이 잠겼다.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고 사람 만나기도 힘들었다. 게다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몰아치는 눈보라에 김래빈은 방향 감각을 잃었다. 사실 이대로 가다간 라호이야 비치에 닿는 것보다 얼어 죽거나 굶어 죽는 일이 더 빠르겠다고 생각했다. 죽어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차유진은 항상 버릇처럼 말했다. 바다가 그렇게 보고 싶다고 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그냥 집에 계속 있을걸, 하고 투덜거렸다. 그건 갈피 잃은 후회나 뼈아픈 실책을 말하는 목소리라기엔 너무 가벼웠다. 할 말이 없으니 그냥 중얼거리고 보는 혼잣말 같은 거였다. 김래빈은 그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차유진은 매번 바다 보고 싶다고 칭얼거렸고, 김래빈은 그걸 매번 들었다. 그런데 차유진이 죽었다. 김래빈만 살았다. 늑대굴은 혼자 살기엔 너무 컸다. 그러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냥 바다 보러 가는 수밖에. 다른 말로 바꾸자면, 차유진이 아니었더라면 김래빈은 바다에 가지 않았을 거란 뜻이었다.
차유진 유언 이뤄주려다가 죽어버리는 것보단 그냥 죽어야겠다고 결심한 다음에 죽는 게 낫지. 그래야 나중에 차유진 만났을 때 할 말이 있었다. 그래야 차유진이 죄책감을 덜 가질 것이다. 그래서 김래빈은 눈을 파서 만든 임시 거처에서 머리를 박고 생각했다. 음. 죽어야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죽어야겠다. 이렇게 살다간 어차피 죽을 것이니 차라리 내 자유 의지라고 생각하기로 하자. 그러는 편이 나았다. 임시 거처는 말 그대로 임시인 탓에 엉성하기 그지없었다. 몸을 쭈그려만 채로 날밤을 지새웠다. 잠이 안 온 게 아니라 추워서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결심한 다음 날 김래빈은 참치 통조림 반 캔을 까먹었다. 꽝꽝 얼어서 그냥 대충 녹여 먹었다. 비린내가 입안을 한참 맴돌았다. 눈이라도 퍼먹을까 싶어서 잠깐 고민하다가 말았다. 물 없다고 눈 퍼먹었다간 저체온증으로 죽었다. 죽어야겠다고 결심한 게 바로 어젯밤이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할 수 있는 데까진 하고 싶었다. 바다 못 볼 가능성이 크지만 그 언저리까지는 닿고 싶었다. 그래서 눈 먹는 계획은 포기했다. 대신 열심히 침을 삼켰다. 참치 비린내 가득한 침이 넘어갈 때마다 속이 울렁거렸다.
입안에서 텁텁하게 감돌던 비린내가 어느 정도 사라지자 김래빈은 일어났다. 임시 거처를 나섰다. 그리고 걷기 시작했다. 여전히 눈보라가 쳤고 여전히 세상이 어두웠다. 걷기 시작했을 때는 네 겹이던 양말은 이제 세 겹이 됐다. 바깥에 있던 것 하나가 완전히 얼어서 체온을 뺏기 시작한 탓이었다. 동상에 걸릴 수는 없으니 벗었다. 마땅히 녹일 방법은 없어서 눈 속에 잘 묻었다. 다른 생존자가 발견한다면 어디든 요긴하게 쓰이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틈틈이 늑대굴이 궁금해졌다. 늑대굴에서 김래빈과 차유진은 일 년이 넘도록 살았다. 정이 안 드는 게 이상했다. 게다가 거기엔 불을 피울 수 있는 공간과 조금 과장해 산처럼 쌓인 물자들이 있었다. 늑대굴에서 버텼더라면 아마 일이 년쯤은 더 살았을 터였다. 물자를 야금야금 갉아먹다가 마지막에 가선 외로워 죽었을 테지만. 거동이 힘들고 피로가 쌓이니 이젠 별생각이 다 떠올랐다. 김래빈은 그날 스물여섯 번째로 고민했다. 외로워서 죽은 거라면 사인은 뭘까? 사랑해서 죽으면 사인은 뭘까? 애사? 진짜 이상한 생각이었다. 그 이상한 생각마저 못 할 지경이 되면 김래빈은 잠깐 멈춰 섰다. 휘청거리는 몸뚱어리를 잠깐 내버려 두고 주머니를 뒤졌다. 항상 지퍼를 단단히 잠가두는 주머니 속에는 작은 유리병이 있었다. 눈보라와 칼바람 속에 우두커니 서서 유리병만 들여다봤다. 그러면 어느 순간 몸 위에 쌓인 눈이 영 무거워지는 때가 있었다. 그때 다시 출발했다.
유리병 안에는 차유진의 머리카락을 넣어놨다. 떠나기 직전 차유진의 머리에서 냉큼 깨트려온 머리칼. 염색한 지 오래된 탓에 검정이 얼룩덜룩 묻은 붉은색 염색모.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유리병 안에는 차유진이 있었다.
우리 가자. 한 달쯤 지났을 때 차유진이 말했다. 그때는 꼭두새벽이었고 김래빈은 노트북 앞에 쭈그려 앉아 멍하니 마우스를 딸깍거리고 있었다. 차유진이 바꿔놓은 농담곰 마우스 커서는 클릭할 때마다 탐스러운 엉덩이를 흔들어댔다. 처음엔 영 신경 쓰여서 싫었는데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안 바꿨다. 영감이 오지 않거나 작업이 죽도록 풀리지 않을 때 아무 생각 없이 마우스를 클릭했다. 이를테면 지금처럼.
차유진은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새벽 세 시에 감자칩 먹겠답시고 튀어 오르는 걸 네 번쯤 말렸던 것도 같았다. 곁눈질로 바라본 차유진은 천장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 김래빈은 잠시 고민하다가 되물었다. 어디로? 그러자 차유진이 당연하다는 듯 대꾸하는 것이다. 좀 멀리. 김래빈 샌디에이고 말고 다른 데 가본 적 없지? 아무래도 그런 편이지, 하고 고개를 주억거리자 차유진이 발딱 일어났다. 그러니까 나랑 같이 가자. 그렇게 말하면서.
하여간 이놈의 새벽 감성이 문제였다. 김래빈은 죽도록 풀리지 않는 작업물과 엉덩이만 계속 흔드는 농담곰 마우스 커서를 생각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낯선 감각들은 한 달쯤 지나자 그 빈도가 훅 줄었다. 게다가 샌디에이고 밖으론 가본 적 없는 미지의 땅이었다. 미국 사막엔 특이한 지형들이 그렇게 많다는데. 아닌가. 인터넷 어디선가 보았던 짜깁기 정보들을 하나하나 셈하던 김래빈은 마침내 대답했다. 그러자. 그런데 네가 운전해야 해. 나는 길 모르니까. 그러면 안 됐다. 새벽 감성에 촉촉하게 젖어 풀리지 않는 작업물에 좌절했더라도 그러면 진짜 안 됐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당시의 차유진은 만족스럽게 씨익 웃었다. 바깥에선 이파리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김래빈은 농담곰에서 눈을 떼고 차유진을 봤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차유진은 턱을 괴고 히히 웃더니 오 분 뒤에 꿈나라로 갔다.
김래빈과 차유진은 정말로, 그날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차를 빌리고 훌쩍 떠났다. 조촐한 여행 가방과 다소 홀쭉한 지갑만 챙기고서. 운전하는 동안 김래빈은 직접 데모를 녹음한 노래를 재생했다. 차유진은 신나서 어설픈 데모를 따라서 흥얼거렸다. 어디 가냐는 질문에도 차유진은 그냥 히히 웃을 뿐이었다.
이튿날부턴 눈이 왔다. 목적지에 도착하지도 못한 채 자동차가 얼어붙었다. 샛길이나 다름없는 비포장도로 한복판에서. 조난이었다.
“[그런데 그건 괜찮은 건가요?]”
김래빈은 느리고 정중한 영어에 고개를 들었다. 파란 눈 외국인이 김래빈의 오른손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 하고 희미하게 신음한 김래빈이 손을 들었다. 오른손 안에는 차유진이 있었다.
김래빈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잇츠 오케이. 상대는 영 못 미덥다는 눈으로 김래빈과 차유진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리곤 되묻는 것이다. 리얼리? 진짜로? 김래빈은 할 말을 찾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았다. 아마도? 자신할 수는 없었으나 이런 상황에서 자신할 수 있는 요소가 몇이나 될는지 모르겠다. 그러니 아마도 괜찮을 거였다. 남자가 눈을 찡그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 적나라했다.
당연했다. 김래빈은 손에 들린 차유진을 내려다봤다. 살인적인 추위를 버티지 못한 차유진은 며칠 전부터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이젠 거의 반으로 쪼개지기 직전이었다. 손에 쥐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주머니에 넣어놓으면 깨질 게 분명해서.
상대는 잠시 말이 없었다. 김래빈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상대는 영어가 서툰 김래빈에게 라호이야 비치의 위치를 두 번이나 읊어줬다. 게다가 레드빈 통조림을 두 개나 줬다. 이런 상황에서 김래빈이 손에 쥔 유리병 걱정이나 한다는 건 그만한 여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고심하는 듯하던 남자는 이내 굳게 다짐한 얼굴로 말했다.
“Wait. [이 정돈 알아듣지? 잠깐만 기다려줘요.] I’ll be right back.”
아이 윌 비 라잇 백. 김래빈은 딱딱하게 굳은 혀로 상대가 뱉은 문장을 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문장을 알았다. 차유진은 김래빈과 함께 있는 도중 급한 일이 생기면 곧잘 말하곤 했다. 기다려! 알 비 라잇 백! 그리고 우다다 뛰어갔다. 그리고 정말 금방 돌아왔다. 눈을 내리깔았다. 손에 쥔 차유진 때문일까. 어쩐지 손바닥이 따끔거리는 것도 같았다.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던 남자는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낯선 사람이 함께였다. 멀리서 동료가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김래빈은 낯선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 살폈다. 김래빈과 마찬가지로 고글에 마스크에 후드까지 눌러쓴 탓에 이목구비는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어쨌든.
“[얘야?]”
“[응. 라호이야 비치 간다는데.]”
“[알겠지만, 토마스, 우리가 마냥 데려갈 순 없어.]”
“[알아. 하지만 물어볼 수는 있잖아.]”
대화가 오갔다. 김래빈은 반절 이상 못 알아들었다. 낯선 남자는 한숨과 함께 다가왔다. 김래빈은 흠칫 놀랐으나 그게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다. 포커페이스에 익숙해진 게 아니라, 그냥 몸이 꽝꽝 얼어붙어서 제대로 움직이지 않은 탓이었다.
“[그 사람 영어는 잘 못 하는 것 같던데.]”
뒤에서 파란 눈이 덧붙였다. 김래빈의 바로 앞에 선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김래빈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꽁꽁 싸맨 탓에 더더욱 그랬다. 김래빈이 마른침을 삼키는데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영어 못하면, 한국말은 할 줄 압니까?”
그 순간 김래빈은 울고 싶어졌다. 얼마 만에 듣는 한국어인지 몰랐다. 다행스럽게도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눈가가 좀 벌게지긴 했으나 고글 덕분에 티가 나진 않을 터였다. 김래빈은 크게 숨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한국인입니다!”
“아. 다행이네요. 저도 한국인입니다.” 남자는 덤덤하게 말했다. 호흡이 가지런하고 발음이나 발성이 매끄러웠다. 노래를 배우셨나. 멍하니 딴생각이나 하는데 남자가 빠르게 말했다. “라호이야 비치에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저 친구가 그러던데요.”
지목당한 파란 눈이 어깨를 으쓱였다. 김래빈은 파란 눈을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뜻밖의 말이 들렸다.
“그럼 같이 가시겠습니까? 저희도 마침 그쪽으로 향하는 중이라.”
제안이었다. 놀란 김래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황한 나머지 말문이 막혔다. 조금 기뻤고 조금 놀라웠다. 같이 가자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목적지가 달라서 매번 거절했다. 아쉬운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바다엔 가야 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목적지마저 같은, 심지어 한국인이 제안했다. 김래빈은 입을 한참 여닫다가 간신히 대답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일행 늘어나면 좋죠, 뭐. 원래 추위는 사람 많을수록 덜한지라.”
그렇지. 추위는 사람이 많을수록 덜하지. 그래서 혼자 다니는 내내 그렇게 추웠던 거지. 김래빈은 속으로 멍하니 뇌까리다가 눈을 끔뻑였다. 남자는 이어지는 말 없이 김래빈을 지긋하게 바라봤다. 고민은 짧았고 결심은 빨랐다. 어차피 김래빈에겐 이득밖에 없었다. 지도가 있지 않은 이상 매번 헤맬 텐데, 이 남자를 따라간다면 적어도 도중 굶어 죽을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졌다. 그리고 저 목소리. 무덤덤하지만 내심 당연하게 라호이야 비치에 도착할 거라고 여기는 저 목소리. 음, 그렇지. 아무래도 혼자 뱅뱅 헤매는 것보단 확신 있는 일행에 합류하는 것이 훨씬 나으니까.
그리고 아무래도 혼자는 좀 추웠다. 좀 많이 추웠다. 그래서 김래빈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염치 불고하고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서 파란 눈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차유진이 있었다. 눈앞에 차유진이 있었다. 빨간 머리 바람에 휘날리면서 바닷가를 걷고 있었다. 이름을 발음했다. 먹먹한 목소리를 목구멍에서 끄집어냈다. 차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리저리 흔들리며 노래나 흥얼거렸다. 미완성인 채 데모만 덮어놨던 그 노래였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불현듯 목소리가 들렸다.
김래빈 보고 싶어.
나는 너 안 보고 싶어.
김래빈 나 두고 갔어.
아니야. 나 너 안 두고 갔어. 너 내 옆에 있잖아, 바보야.
아냐. 김래빈은 나 두고 가야 해.
그건 무슨 소리야. 내가 왜 널 두고 가.
그래야 해. 김래빈 나 두고 가야 해.
제대로 설명을 해, 차유진. 상대를 이해시키려면 우기는 게 아니라 조리 있는 설명을 통해서 대화를 나눠야…….
그런데 김래빈 바보라서 나 안 두고 가.
바보는 너야, 차유진!
나 두고 가, 김래빈.
너야말로 얼굴도 안 보여주고.
나 두고 가.
얼굴 보여주는 게 그렇게 힘들어?
나 두고 멀리멀리 가, 김래빈.
그리고 김래빈은 눈을 떴다.
천장이 있었다. 눈을 얼기설기 뭉쳐 판 굴이 아니라 진짜 천장이었다. 앓는 소리를 삼키며 일으킨 몸이 가벼웠다. 내려다보니 겉옷 한 장밖에 입고 있지 않았다.
“깼어, 래빈이?”
몽롱한 정신을 다정한 목소리가 일깨웠다. 눈을 끔뻑이며 눈을 들자 익숙한 인영이 웃어 보였다. 류청우였다.
박문대를 포함한 일행 다섯과 합류한 지 벌써 사흘이 지났다. 파란 눈과 헤어지며 돌아오는 길에 자신을 박문대라고 밝힌 남자는 일행이 몇 더 있다고 했었다. 그런데 그 몇이라는 게 넷이나 될 줄은 몰랐다. 기껏해야 한둘인 줄 알았지. 게다가 전부 한국인이었다. 김래빈은 개중 막내였다. 추위는 김래빈과 일행 사이의 낯섦도 완전히 얼려버렸다. 이상하리만치 빠르게 가까워졌다는 뜻이었다.
사흘 동안 김래빈은 박문대가 하는 밥을 먹고, 류청우가 피운 불을 쬐고, 이세진이 찾은 산장에서 자고, 선아현이 수선한 이불을 덮었으며, 배세진이 건네준 책을 읽었다. 받기만 하는 것이 송구스러워 어떻게든 일하려고 했으나 전부 거절당했다. 막내는 그냥 받아, 하며 생글생글 웃는 이세진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것도 이젠 연례행사 비슷한 것이 됐다.
김래빈은 몸을 일으켜서 빠릿빠릿하게 인사했다. “잘 주무셨습니까, 류청우 형!” 힘차게 묻자 류청우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며 손짓하는 것이다. 김래빈은 익숙하게 류청우 곁에 자리 잡았다. 이 산장에는 운 좋게도 벽난로가 있었다. 류청우는 자연스레 벽난로 담당이 됐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불을 쬐자 얼었던 몸이 천천히 녹았다.
“문대가 밥하고 있어. 조금만 기다리자.”
“네!”
“밤새 악몽이라도 꿨어?”
“어, 아니요……. 그렇게 판단하신 저의가 무엇인지 여쭤도 됩니까?”
“별건 아니야. 그냥 좀 끙끙거리길래.”
그리고 류청우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김래빈은 평온한 류청우의 얼굴을 힐끔거리다가 잠시 고민했다. 악몽인가? 꿈에선 차유진이 나왔다. 얼굴은 못 봤다. 뒤통수만 잔뜩 보여주고 이해 못 할 말만 실컷 떠들었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김래빈은 그냥 악몽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별 이유는 없었다. 차유진이 얼굴을 안 보여줬으니까. 깨고 좀 심란했으니까. 그러니까 악몽이라고 하자. 차유진이 들었더라면 코웃음 쳤을 판단이었다.
아침 식사는 금세 나왔다. 김래빈은 박문대표 맛깔스러운 아침을 싹싹 긁어먹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조리도구와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식자재들의 환상적인 합작이었다. 국물 마지막 한 그릇까지 쭉 마시고 형들의 그릇을 수거했다. 설거지는 김래빈 몫이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자니 양심이 그렇게 찔릴 수가 없어서 직접 부탁해 따낸 일감이었다.
그릇을 열심히 닦았다. 물은 눈을 녹여 만들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열이 닿지 않는 부엌에 놓여 있던 터라 좀 미지근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게 어디야. 맨손으로 설거지하려면 이 정도 온도가 적당했다. 김래빈은 마지막 그릇까지 꼼꼼히 헹구고 옷에 손을 닦았다. 그리고 거실로 향했다. 형들은 옹기종기 모여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거든.” 그러며 이세진이 지도 한 구석을 짚었다. “그리고 라호이야 비치는 여기.” 또 반대쪽을 짚었다. 멀지 않았다.
“거의 다 왔네. 사나흘이면 도착하겠는데.”
“중간에 폭풍만 안 만나면요. 아무래도 그렇죠.”
“폭풍……. 만나려나?”
“요즘 눈보라가 좀 죽었던데요. 그럴 가능성은 작지 않을까요. 그래도 배제할 수 없기는 한데.”
김래빈은 형들의 대화에 끼어드는 대신 열심히 경청하길 선택했다. 그들은 저들끼리 열심히 대화했다. 김래빈이 구태여 애를 써가면서까지 낄 필요는 없었다. 형들의 신중한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김래빈은 버릇처럼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딱딱하고 차가운 것이 손끝에 닿았다. 그걸 손바닥에 넣고 만지작거렸다. 차유진이었다.
차유진은 금이 많이 갔다. 한 번 부러질 뻔한 것을 우연히 구한 순간접착제로 붙여놨다. 김래빈은 여전히 어디든 차유진을 갖고 다녔다. 두껍게 껴입던 패딩을 자주 벗게 된 덕분에 이제 차유진은 가장 안쪽 후드티 주머니에 들어갔다. 김래빈은 그 변화가 조금은 마음에 들었다. 추위에도 덜 깨지고 언제든 만질 수가 있어서.
“래빈아?”
“네?”
갑작스러운 호명에 넋을 놨던 김래빈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형들의 시선이 전부 김래빈을 향한 채였다. 김래빈은 입을 살짝 벌렸다가 부산스럽게 고개를 디밀었다. 죄송합니다, 못 들었습니다! 입을 어물거리다가 말하자 류청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라호이야 비치 가고 싶댔으니까 들르려고 하는데. 일정 계산하려면 해변에서 얼마나 머물지 생각해야 해서. 거기 왜 가는 건지 물었지.”
“아.”
“그냥 구경만 하고 올 거라면 하루로 잡고, 거기서 누구 만나야 하면 이틀 정도로 잡으려고 하는데. 그런데 래빈아. 라호이야 비치 간 다음엔 뭘 할 거야?”
“어…….”
뭘 할 거냐고? 대수롭지 않게 물은 질문에 김래빈이 눈을 깜빡였다. 어, 그러게. 나 뭐 하지. 김래빈은 죽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죽어버렸다는 말보다는 죽었다는 말이 더 나아서 그랬다. 김래빈은 자신이 바다로 향하는 동안 죽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일행을 만났다. 생각보다 훨씬 수월하게 가고 있었다. 죽음의 지읒 자도 안 보였다. 이러다간 진짜 꼼짝없이 해변에 도착할 것 같았다. 해변에 도착하면? 김래빈이 멍하니 되물었다. 바다에 도착하면 나 어쩌지? 차유진의 유언은 바다에 가달라는 것뿐이었다. 그 외엔 어떻게 하라곤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김래빈은 멀뚱히 눈만 끔뻑이다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예상치 못한 난관이었다. 한참 대답이 없자 류청우가 천천히 고개를 갸웃했다. 입만 여닫던 김래빈은 이내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자신이 들어도 얼빠진 소리가 나왔다.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뭐. 생각나면 말해줘.”
“네.”
“그럼 차후 일정은 라호이야 비치 도착한 다음에 구상하자.”
“네.”
이후 회의는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다가 끝났다. 형들이 모두 흩어지자 김래빈은 방구석에 처박혔다. 벽난로가 잘 보였다. 벽에 기대어 앉아 멍하니 불꽃만 구경했다. 벽난로 속에서 타닥거리며 오르는 불씨를 하나씩 셈하던 김래빈은 넋 놓은 채 생각했다. 진짜로 어쩌지. 죽지도 않고 바다에 닿으면 나는 어쩌지. 손에 차유진이 잡혔다. 꺼내서 들여다봤다. 잔뜩 금이 간 유리병 안에 차유진이 웅크리고 있었다.
몇 시간 후 김래빈과 일행은 산장을 떠났다. 다음 산장을 찾은 이세진이 앞장섰다. 김래빈은 가장 뒤에서 따랐다. 기세가 죽었다지만 눈보라는 여전히 거셌다. 세찬 칼바람에 덮어쓴 후드가 흔들리며 찢겼다. 김래빈은 이를 악물고 나아갔다. 바로 앞에 선 배세진의 등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꾸역꾸역 걸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잠시 쉬었다. 류청우가 능숙하게 땐 불 앞에서 모두가 몸을 녹였다. 간단히 요깃거리를 나눠 먹었다. 김래빈은 육포 두 조각을 꼭꼭 씹어 삼켰다. 칼바람은 여전히 짐승 우짖는 소리였다. 그래도 조금 작아진 것 같긴 했다. 체력을 보충하느라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적막 속에서 김래빈은 멍하니 넋을 놨다. 차유진을 꺼내든 건 거의 버릇 같은 행동이었다.
차유진을 꺼냈다. 금이 간 차유진을 손바닥 위에 놓은 찰나였다.
“우왁!”
돌풍이 불었다. 피웠던 모닥불이 순식간에 꺼짐과 동시에 앉아 있던 모두가 바람에 밀려 뒷걸음질 쳤다. 김래빈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필이면 바람을 등지고 있었던 탓에 그대로 코를 박았다. 얼굴이 눈에 파묻히는 것과 거의 동시에 벼락같이 깨달았다. 손이 비었다.
김래빈은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다급히 고개를 쳐들고 주위를 살폈다. 없었다. 유리 조각 하나 없었다. 흰 눈 속에서도 유달리 잘 보이던 붉은색 하나 잡히지 않았다. 안 돼. 목이 꽉 막혔다. 래빈아, 하고 형들이 어리둥절하게 묻는 소리마저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안 돼. 차유진이었다. 그건 차유진이었다. 차유진이 곁에 있어야 했다. 차유진을 두고 갈 순 없었다. 돌려줘. 우두커니 선 김래빈이 멍하니 뇌까렸다. 안 돼. 가져가지 마. 돌려줘. 차유진을 돌려줘. 차유진을…….
김래빈 나 두고 갔어. 꿈에서 나왔던 차유진의 목소리만 한참을 메아리쳤다.
헬로.
뭐야, 차유진. 한국말로 해.
헬로, 래빈.
한국말로 하라니까. 영어로 하면 대화가 안 돼.
하우 알 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하필이면 왜 그런 걸 물어?
아임 파인.
그래서?
앤, 유 알?
나는 왜 물어. 묻지 마. 자꾸 이상한 거 물을 거면 차라리 얼굴이나 보여주고 말하지. 상대방 얼굴도 보지 않은 채로 말을 거는 건 무례한 짓이야, 차유진.
…….
그러니까 나 좀 봐주면 안 돼?
김래빈과 차유진은 늑대굴에서 살았다. 처음은 조촐했으나 가면 갈수록 여유가 늘어났다. 조난 초반엔 피차 예민해서 틈만 나면 언성을 높이고 싸워댔다. 꼭 붙어야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늑대굴이 야금야금 넓어진 것도 그 탓이었다. 대판 싸우고 난 후 차유진이 자꾸만 밖으로 나가서. 김래빈 얼굴 보기 싫다고 씩씩대며 늑대굴 밖으로 나서서. 얼굴 보기 싫어도 나가지는 말라며 김래빈은 혼자서 한참 눈을 팠다. 돌아온 차유진은 넓어진 늑대굴과 내가 꼴 보기 싫으면 차라리 넓어진 저 구석으로 가라는 김래빈의 말을 들으며 허,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냥 그렇게 화해했다.
김래빈은 가만히 누워서 천장만 들여다봤다. 천장은 괴상한 무늬가 그려져 있었는데 누워서 올려다보니 꼭 애벌레 같았다. 구부러진 검은 점들을 서른여섯 번째로 셈하다가 그냥 뒤척였다. 방엔 김래빈 혼자였다. 딱히 독차지한 건 아니고, 형들은 제각기 일로 바빴다. 김래빈이 바쁘지 않은 건 김래빈이 앓아누워서였다. 폭설 내리기 시작한 때로부터 다섯 번째로 걸리는 감기였다.
열감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형들은 주기적으로 찾아와 물수건을 갈아줬다. 솔직히 말해서 김래빈은 형들께 감사하다기보단 죄송한 마음밖에 없었다. 어떻게 보면 뒤늦게 합류한 혹이나 다름없는데, 두고 가지도 않고 간호까지 해주신다니. 앓아누운 자신이 진짜로 짐덩이 같이 느껴져서 좀 훌쩍거리기도 했다. 간신히 진정했을 때는 버릇처럼 주머니를 뒤지다가 아무것도 잡히지 않아서 또 눈물이 터졌다. 산장 두세 개만 더 거치면 바로 라호이야 비치라는 형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또 잤다. 먹고 자고 울고 먹고 자고 울고의 반복이었다.
차유진을 잃어버렸다. 추위와 폭설과 돌풍은 김래빈에게서 차유진을 두 번이나 빼앗았다. 라호이야 비치가 코앞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거기 가면 나는 이제 뭐 하지. 도착해서 소리나 빽빽 지른 다음에는 뭐 하지. 라호이야 비치 갔을 때 차유진이 나 기다리고 있었으면 좋겠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면 형들한테 차유진 소개하고 같이 다녀도 되겠냐고 물어볼 텐데. 멍하니 벽만 바라보며 그렇게 한참 상상하다가 말았다. 어차피 이런 건 전부 덧없는 몽상에 불과하다는 걸 알았다.
열에 몽롱한 정신으로 눈만 깜빡이는데 마침 문이 열렸다. 김래빈은 눈을 깜빡이다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그릇을 든 류청우였다. 류청우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웃으며 다가왔다. 괜찮냐고 묻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열이 살짝 있기는 했으나 그래도 훨씬 나았다.
“우리 내일 출발할 거야. 래빈이 체력 맞춰서 좀 천천히 갈 테지만 그래도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네. 죄송합니다.”
“이런 한파에 사람이 감기 한 번 안 걸리는 게 이상하지. 죄송할 필요 없어.”
류청우는 그렇게 말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김래빈은 아랫입술을 사리물곤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저렇게 해도 형님들은 모두 건강하셨다. 껴입은 옷의 소매가 손안에 말려들었다. 류청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 건 그때였다.
“그런데 래빈아. 라호이야 비치 도착해서 말이야. 하고 싶은 거 있어?”
다정한 물음이었다. 지난 산장에서 물었던 질문과도 같았다. 김래빈은 입술을 꾹 물고 고개를 저었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제 손에 차유진이 없다는 거였다. 차유진이 없었다. 사실 차유진이 없어진 지는 한참 됐다. 차유진은 늑대굴에서 죽었으니까. 진짜 평온한 표정으로 잠든 것처럼 죽어버렸으니까. 그래서 눈 속에 파묻고 오지 않았는가. 꽁꽁 얼어버리라고. 그러니 따지고 본다면 차유진은 늑대굴을 떠난 그 시점부터 김래빈 곁에 없었다. 알았다. 머리론 아는데 마음은 몰랐다.
김래빈이 힘없이 고개를 젓자 류청우는 한참 말이 없었다. 고개를 떨군 탓에 류청우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몰랐다. 그냥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느껴졌다. 차유진은 등을 토닥이지 않았다. 차유진은 그냥 혼자 내버려 뒀다가 어느 순간 냅다 껴안았다. 그리고 한참을 지분거렸다. 귀찮을 지경이 되어서 짜증을 내려고 하면 눈을 맞추고 히히 웃었다. 그러면 어느 순간 불안이 가라앉고 화가 녹아내렸다. 차유진 보고 싶다. 차유진은 요즘 꿈에도 나오지 않았다.
“있지, 래빈아. 우리가 같이 의논해봤는데……. 혹시 래빈이만 괜찮으면, 라호이야 비치 들른 이후에도 같이 다니지 않을래?”
“예?”
“하고 싶은 것도 없고, 할 것도 없고. 가고 싶은 곳도, 갈 곳도 없다면서. 라호이야 해변에 도착한 다음을 생각해놓지 않았을 수 있어. 누구나 목표를 이루고 난 다음은 잘 계획하지 않으니까.”
류청우가 침착하게 말했다. 김래빈은 멍하니 고개를 들어서 류청우를 바라봤다. 온화하지만 단단했다. 류청우는 분명 우리라고 말했다. 형들이 전부 의논하신 걸까. 눈을 깜빡였다. 류청우는 어리둥절한 김래빈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러며 말을 이었다.
“뭔가 한참 계획했던 일이 끝나면 괜히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지거든. 이것만 끝내면 내 세상이 확 바뀔 것 같은데, 목표를 달성하고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면……. 그러면 정말로 힘드니까.”
“전…….”
“그러니까, 다음으로 하고 싶은 일이 생길 때까지 우리랑 같이 다니는 게 어떨까 싶어서. 물론 같이 다니다가 뭔가 하고픈 일이 생긴다면 붙잡지 않을 거지만.”
류청우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곤 덧붙였다. “라호이야 해변에 닿고 당분간 우리랑 같이 다니면서, 밥도 제때 먹고 운동도 하고…… 같이 나중을 생각하는 거지.”
다정한 권유였다. 김래빈은 류청우의, 형들의 제안을 멍하니 속으로 곱씹었다. 그럴까. 그러는 것도 나쁘지 않지. 하고 싶은 것은 없었다. 해야 할 것도 없었다. 갈 곳은커녕 가고 싶은 곳도 없었다. 류청우의 말은 한 점 틀림이 없었다. 라호이야 비치. 닿기 전에 죽으리라 생각해서 죽고자 마음먹었다. 그러니 라호이야 비치에 닿은 차후를 생각해놨을 리가.
김래빈이 한참 말이 없자 류청우가 눈을 살짝 찡그리며 웃었다. 그러더니 장난스럽게 말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 일행이 불편하다면 어쩔 수 없지만…….”
“아, 아닙니다! 그런 것 때문에 고민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님들께서는 객관적으로 보나 주관적으로 보나 몹시 대단한 분들이시기 때문에 동행에 있어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그래? 그럼 뭐 때문에 고민하는 거야?”
훅 들어온 질문에 김래빈의 입이 닫혔다. 대답을 찾기가 어려웠다. 말이 목구멍에 걸려서 나오질 않았다. 입만 한참 여닫는데 류청우가 손을 들어 어깨를 천천히 토닥였다. 김래빈은 눈을 깜빡였다. 그러니까, 차유진. 차유진이 문제였다. 차유진이. 자신이 두고 간 차유진. 늑대굴 근처에 파묻혀 있을 차유진. 그러니까, 다른 말로 바꾸자면, 김래빈이 문제라는 것이다. 김래빈이. 차유진을 두고 간 김래빈이. 늑대굴 근처에 차유진을 파묻은 김래빈이. 미련 넘치는 김래빈이.
“고민할 수 있지. 고민될 거야. 생각 정리되면 말해줘. 기다릴게.” 류청우는 익숙하게 김래빈을 도닥이더니 들고 온 그릇을 건네며 말했다. “그리고 이건 문대가 만들었어. 죽이야. 소화 안 되면 큰일이니까 천천히 먹어.”
“아. 감사합니다!”
“푹 쉬어, 래빈이.”
류청우가 일어났다. 문을 열고 나섰다. 닫히기 직전 바깥에서 소란이 들렸다. 형들의 목소리였다. 뭐래요? 고민해본다네. 죽은 줬어요? 줬어. 자신의 이야기였다. 귀를 기울이려는 찰나 문이 닫혔다. 그리고 다시 침묵.
김래빈은 죽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숟가락을 들었다. 적당히 묽은 죽을 입안에 밀어 넣었다. 고소하고 적당히 심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따뜻했다.
“잠깐 대화할 수 있어?”
김래빈은 어딘가 비장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얼굴을 굳힌 배세진이 문간에서 고개를 디민 채였다. 방 안에서 옷을 꾸리던 김래빈은 곧장 허리를 곧추세우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배세진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근처에 자리하고 앉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배세진은 김래빈에게 책을 몇 번 빌려준 적이 있었다. 사람을 죽이는 폭설 속에서도 꿋꿋하게 책을 가져왔구나 싶어서 존경스러웠던 기억이 있었다. 게다가 얼마 없는 책들은 분야가 전부 다양해서, 세상이 폭설에 갇히지만 않았더라면 어떤 사람이었을까 궁금했다. 게다가 상대적으로 유해 보이는 인상과는 다르게 굉장히 단단한 사람이었다, 배세진은.
그런 배세진은 김래빈의 곁에 앉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힐끔힐끔 바라본 얼굴은 어딘가 진지해 보였다. 김래빈은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들의 속내를 짐작하는 데에 능하지 못했다. 그래서 배세진이 진지한 얼굴로 물을 질문들을 이리저리 셈하다가 말았다. 세 번째 질문을 셈하고 있는데 배세진이 입을 연 것이다.
“유리병 안에 든 거, 뭐였어?”
“예?”
“지난번에 봤어. 물론 일부러 찾아본 건 아니고! 우연히 봤는데, 그거……. 머리카락 아니야?”
“아.”
김래빈은 배세진에게서 눈을 돌렸다. 버릇같이 창밖을 봤다. 이상하리만치 고요하게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김래빈은 말했다.
“네. 차유진입니다.”
“차유진?”
“제…….”
뭐라고 말해야 하지. 친구? 애인? 차유진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제대로 감이 잡히지 않았다. 너무 오래돼서 그런지도 몰랐다. 만일 차유진이 곁에 있었더라면 뭐라고 했으려나. 관계를 묻는 배세진에게 의미심장하게 씨익 웃고는 못 알아들을 영어를 지껄였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하지만 차유진은 곁에 없었다. 김래빈만 덜렁 있었다. 첫 번째 차유진은 눈 속에 파묻었고, 두 번째 차유진은 돌풍에 날아갔다. 그래서 혼자였다. 그래서 뭐라고 할지 모르겠다.
김래빈이 머뭇거려도 배세진은 그를 채근하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물고 사뭇 비장한 태로 김래빈을 가만히 응시했다. 김래빈은 입을 몇 번 여닫았다가 간신히 말했다. 그래도 형님께서 묻는데 무슨 대답이라도 내놔야 한다는 강박감이 차유진과 김래빈의 관계를 서툰 낱말로 정의하게 했다.
“제가…… 두고 온 사람입니다.”
“그래?”
“네.”
“그렇구나.”
다행스럽게도 배세진은 말을 잇지 않았다. 김래빈은 고개를 떨궈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귀를 기울이면 돌풍 치는 소음이 들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지. 이 산장은 벽이 두껍고 까마득하게 쌓인 눈이 모든 소음을 삼킬 테니까. 눈이 쌓이고 기온이 내려가자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소음도 얼고 사람도 얼었다. 사랑도 얼고 눈물도 얼었다. 그리하여 차유진도 언 것이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배세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듣기 좋은 또렷한 발음이 김래빈의 귓가를 파고들어 고막을 울렸다.
“두고 온 거 맞아?”
김래빈은 대답하지 않았다. 잘 모르겠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을 것만 같아서 그랬다. 차유진을 묻었고 늑대굴은 떠나왔다. 두고 온 줄 알았다. 차유진이 돌풍에 날아갔고 끙끙 앓았다. 두고 온 줄만 알았다. 차유진이 꿈에서 나와서 얼굴을 보여달라고 했다. 두고 온 줄만 알았다. 그런데 되짚어 보니 한 번도 두고 온 적 없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술을 깨물었다. 김래빈은 여전히 잠결에 누군가 제 손을 잡아주는 상상을 했다.
두고 오는 건 어떻게 하는 걸까. 이미 얼어버려서 나와 꼭 붙어버린, 이제는 쇳덩이처럼 느껴지는 이 감정은 대체 어떻게 두고 와야 하는 걸까. 어떻게 떨어트려야 하는 걸까. 추위에 사랑이 얼었다. 김래빈과 한 몸이 되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녹이기엔 너무 추웠다. 온종일 불을 쬐어도 녹지 않았다. 이름에 불을 품은 사람을 사랑했더니 웬만한 불로는 끄떡없었다. 곤란했다. 정말이지 곤란했다. 김래빈이 작게 숨을 삼켰다. 배세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꿈에 나와?”
“네. 가끔 나옵니다.”
“나와서 뭐 해?”
“아무것도 안 합니다. 그냥 항상 바다에 있습니다. 바닷가 거닐다가 맨날 헬로, 하우 알 유, 합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영어를 잘하지 못해서……. 한국어로 하라고 채근하다가 맨날 깹니다.”
“그렇구나.”
“네.”
정말 그러했다. 차유진은 지금껏 꿈에 여러 번 나왔다. 매번 바다였고 매번 뒤통수만 보여줬다. 매번 앞장섰고 매번 뒤돌아보지 않았다. 김래빈은 앞서나간 차유진의 발자국만 고대로 밟으며 따라갔다. 차유진은 매번 헬로 김래빈, 하우 알 유, 하고 영어로 떠들었다. 한국말 쓴 건 첫 번째 꿈밖에 없었다. 그때조차 자기를 두고 가느니 뭐라느니 했다. 진짜 바보였다.
그때 배세진이 느릿느릿 말했다.
“내가 읽었던 책에 이런 구절이 있었거든. 가장 궁극적인 작별은 서로를 향한 안부 인사로부터 시작한다.”
“그렇습니까?”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김래빈.”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김래빈이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맞았다. 배세진은 김래빈을 뚜렷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단단한 고동색 시선이 김래빈을 향했다. 굳세고 한 점 흔들림 없었다.
“우리 연습하자. 다음번에 차유진이 꿈에 찾아오면, 너도 똑같이 하우 알 유, 하고 물을 수 있게.”
김래빈은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을 고르느라 그랬다. 하고픈 말들이 목구멍을 꽉 막아서 숨쉬기가 어려웠다. 멍하니 눈만 깜빡이는데 배세진은 침착하게, 그러나 조금 빨라진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했다.
“류청우가 피우는 불은 잘 꺼지지도 않고 따뜻해.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이라면 뭐든 빌려줄 수 있어. 박문대가 하는 밥은 먹을 때마다 속이 편하고 따뜻해져. 이세진 덕분에 매번 편한 산장에서 머물 수 있고, 옷에 구멍이 나거나 하면 선아현이 고쳐줄 수 있어. 그러니까 우리랑 같이 다니자. 같이 다니면서 연습하자, 김래빈. 차유진 두고 올 수 있게. 차유진한테 안부 인사 건넬 수 있게.”
배세진의 목소리는 일견 비장하게까지 들렸다. 김래빈은 눈만 깜빡였다. 안부 인사. 헬로. 하우 알 유. 아임 파인. 땡큐. 앤 유? 뱃속이 느글거렸다. 몇 안 되는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다가 사라졌다.
배세진과의 대화 후 김래빈은 이틀 간 주의 깊게 일행을 살폈다. 류청우가 피운 불은 정말 따뜻했다. 바람이 맹렬하게 부는데 용케 꺼지지 않았다. 꺼질 듯해도 류청우가 몇 번 손짓하면 금세 살아났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모두가 옹기종기 모여 몸을 녹였다. 그러며 시답잖은 이야기나 했다. 형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다음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배세진은 김래빈에게 주기적으로 책을 빌려줬다. 산장에 들를 때마다 어디선가 새 책을 구해왔다. 책 한 권을 돌려 읽고 주제를 정해서 함께 이야기했다. 배세진의 날카로운 견해를 들을 때마다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배세진과의 이야기가 기대되어 어서 다음 산장으로 옮기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들었다.
박문대가 해주는 밥은 정말 맛있었다. 찬기가 가득한 몸을 이끌고 그릇을 쥐면 손바닥에서부터 온기가 퍼졌다. 차가운 몸을 데우는 음식들을 꼭꼭 씹어 삼키면서 김래빈은 녹여 먹었던 참치 통조림을 생각했다. 입안이 텁텁하지도, 비리지도 않았다. 몸속이 따뜻했다. 이제 김래빈은 매번 식사 시간을 기대했다.
이세진은 산장 찾는 데에 도가 텄다. 하루 이틀 간격으로 나갔다가 들어오곤 지도에 새로운 산장 위치를 찍었다. 이세진이 찾아내는 산장 덕분에 모두가 편리하기 그지없었다. 산장 찾아내는 실력은 거의 신이 들렸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다음 산장은 어떻게 생겼을까 조금씩 궁금해졌다.
옷에 구멍이 났을 때 선아현이 한 시간 만에 뚝딱 고쳐줬다. 두꺼운 방한용 천을 덧대어 꼼꼼하게 바느질해서 돌려줬다. 고마움에 허리를 구십 도로 꾸벅꾸벅 숙이니 그럴 필요 없다며 손사래 쳤다. 그러며 손에 파란색 천으로 만든 인형을 쥐여줬다. 있는 단추가 검은색밖에 없어서 눈이 검은색이라고 했다. 인형은 차유진과 닮은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김래빈은 결심했다.
파도 소리가 들렸다.
김래빈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멀리서 파도 소리가 들렸다. 희미하고 아득했으나 확실히 들렸다. 형들이 삼삼오오 떠드는 소리가 파도 소리 위로 맞물렸다. 주머니 안에 손을 찔러넣었다. 선아현이 선물해줬던 인형이 잡혔다.
라호이야 비치가 코앞이었다. 돌풍은 잦아들었고 함박눈만 소리 없이 내렸다. 서리가 낀 창문 위에 김래빈의 얼굴이 비쳤다. 날카로운 눈동자가 김래빈을 똑바로 직시했다. 김래빈은 부러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얼룩덜룩한 창문 너머를 쏘아보자 푸른빛이 간신히 보였다.
라호이야 비치에 가기 직전 들른 산장이었다. 이세진과 박문대와 김래빈만이 라호이야 비치에 갈 것이다. 류청우와 배세진과 선아현은 산장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이세진과 박문대가 무슨 의도로 라호이야 비치에 가는지는 몰랐으나, 그들은 김래빈이 거기서 무슨 짓을 하든 건드리지 않겠다고 말했다. 김래빈도 똑같이 되풀이했다. 간섭하지 않겠습니다! 형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호이야 비치였다. 거진 일 년 만이었다.
“준비됐어, 래빈이?”
“아, 네. 준비 끝났습니다!”
“가자. 저희 다녀올게요.”
“너무 늦진 마. 눈이 많이 그쳤지만 혹시 모르니까.”
“네.”
김래빈은 배낭을 고쳐맨 채 종종걸음으로 이세진과 박문대에게 향했다. 문간에서 서로 시선을 주고 받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글을 내려쓴 이세진을 선두로 밖에 나섰다. 눈발은 많이 그쳤다. 이제는 추위도 참을 만했다.
여전히 쌓인 눈 사이를 헤치며 김래빈은 멍하니 생각했다. 라호이야 비치. 사람들이 없었다. 조용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는데. 한 손엔 서프보드, 다른 손엔 비치볼 들고 왁자지껄 떠들던 사람들의 소음이 아직도 귓가에 선명했다. 차유진도 개중 하나라서 더더욱 그랬다. 수영복을 입으면 근육이 잘 짜인 몸이 드러났다. 차유진은 서프보드를 겨드랑이에 끼고 김래빈을 한참 놀려댔었다. 뭐 때문에 그렇게 놀렸더라. 그건 기억나지 않았다. 워낙 이런저런 사소한 이유로도 투닥거렸던지라.
그런 라호이야 비치에 김래빈은 돌아왔다. 차유진 없이. 차유진 부탁 때문에.
“보인다.”
앞장서던 이세진이 나직이 말했다. 김래빈은 폐부를 찌르는 차가운 숨에 간신히 호흡하면서도 고개를 들었다. 파도 소리가 가까워졌다. 귀를 단단히 싼 후드를 비집고 먹먹한 파도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김래빈은 이를 악물고 눈에서 발을 뺐다. 그리고 다시 나아갔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이 푹푹 꺼졌다가 올라오길 반복했다.
바다가 좋았어. 말하진 않았지만 바다가 좋았어. 파도 소리가 좋았고 사람들 웃음소리도 좋았어. 그리고 무엇보다 네가 좋았어, 차유진. 네가 좋아서 사람들 웃음소리가 좋고 파도 소리가 좋고 바다가 좋았어. 네가 좋아서 샌디에이고가 좋고 캘리포니아가 좋고 미국이 좋았어. 네가 좋아서 그랬어.
두껍게 쌓인 눈 속에 발이 빠졌다. 디딘 땅은 더는 아스팔트가 아니었다. 사부작거리는 모래가 느껴졌다. 알알이 흩어지는 모래사장을 짓밟으며 김래빈은 멍하니 나아갔다. 이세진과 박문대와는 다른 방향이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갈라졌다. 이세진과 박문대는 김래빈을 잡지 않았다. 김래빈도 그들을 잡지 않았다.
이윽고 김래빈은 바다 앞에 섰다. 바다는 파도치고 있었다.
살얼음이 둥둥 떠다녔다. 파도가 밀려오고 쓸려가길 반복한 덕분에 경계선 부분엔 눈이 없었다. 희끄무레한 모래가 버젓이 드러나 있었다. 김래빈은 눈에서 발을 떼 모래사장을 밟았다. 발이 푹 빠졌다. 김래빈의 발자국이 남았다. 파도가 밀려와 발등을 적시고 사라졌다.
나 왔어, 차유진. 바다에 왔어.
파도가 쳤다. 포말이 부서졌다. 짠 소금 냄새가 났다. 눈이 따끔거렸다.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다에 도착할 수가 없을 테니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살이 흔들렸다. 그런데 도착했다. 바다에 왔다. 죽어야겠다. 죽을 바에는 죽어버리는 게 더 낫다고. 어차피 죽음 아니면 죽음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너 보고 싶어, 하고 김래빈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너 보고 싶어. 너무 보고 싶어. 네가 보고 싶어, 차유진. 네가 어떻게 웃었는지, 네가 어떻게 심통 부렸는지, 어떻게 볼을 부풀리고 어떻게 채근했는지 기억 나지가 않아. 그래서 보고 싶어. 보고 싶은데…….
그런데.
류청우가 피운 불 근처에 모여 나누는 형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배세진이 책을 읽고 내놓는 감상평이 신기했다. 박문대가 만든 식사를 기대했고 이세진이 찾을 다음 산장이 궁금해서. 선아현이 쥐여준 인형에 차유진 닮은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어서. 그래서.
그래서 살고 싶어졌어.
마침내 눈물이 흘러내렸다. 뺨을 적시고 입술을 적시고 옷깃을 적시며 떨어졌다. 벌어진 잇새에서 울음이 튀어나왔다. 김래빈은 울었다. 세상 서럽게 울었다. 미안해서 울었고 서러워서 울었다. 화가 나서 울었고 속상해서 울었다. 쏟은 눈물은 바다가 되고 내뱉은 울음은 파도가 됐다. 토해낸 눈물과 울음은 그렇게 물살에 흔들리며 떠났다.
웅크린 몸 위로 햇살이 쏟아졌다. 따뜻했다.
*
김래빈은 꿈을 꿨다. 바다였고 차유진이 있었다. 모래사장을 거니는 차유진은 여전히 뒤통수만 보였고 여전히 앞장섰다. 여전히 뒤돌아보지 않았고 여전히 일정한 발자국만을 남기며 걸어갔다. 김래빈은 차유진을 뒤쫓지 않았다. 멀어진 차유진이 말간 목소리로 말했다. 헬로, 김래빈.
얼굴을 보여달라고 하진 않았다. 모래 위 선명하게 남은 차유진의 발자국을 따라 걷지도 않았다. 김래빈은 대신 가만히 입을 열어 말했다.
헬로.
하우 알 유.
아임 파인. 땡큐. 앤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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