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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격발—궤도이탈

<span class="sv_member">o-ri</span>
o-ri @admin
2025-11-29 21:38



*



00.

잘 도착했어?





02.

김래빈은 얼굴을 덮은 마스크를 만지작거렸다. 깊이 눌러 쓴 모자며 검정 마스크까지. 완전히 얼굴을 꽁꽁 싸맨 제가 조금 낯설었다. 이렇게까지 감출 필요는 없는데.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갈 곳 잃은 손은 마스크를 건 귓등을 연신 만지작거렸다. 행여 줄이 끊어질라 몇 번이고 고쳐 썼다. 입술이 바싹 말랐다. 조금 더울 정도로 빵빵한 난방 탓이었다.

인천 공항은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제 갈 길 바쁜 사람들도 들끓었다. 웅성거림과 웃음과 안내방송이 겹겹이 겹치기를 거듭했다. 김래빈은 중앙 라운지 어드매에 앉아 있었다. 근처에 앉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거나 일행과 함께였다. 이어폰을 끼지도 누군가와 대화하지도 않는 건 근방에 김래빈뿐이었다. 주위를 살피는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렀다. 누나랑 같이 올 걸 그랬나. 뒤늦은 후회가 고개를 슬쩍 내밀었다. 혼자 다다른 인천 공항은 조금 낯설고 어색했다.

스마트폰을 꺼내는 대신 김래빈은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전광판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온갖 비행기들의 이착륙 일정표였다. 실시간으로 깜빡거리며 모습을 바꾸는 숫자들에 눈이 조금 아팠다. 어젯밤 늦게까지 혹사한 눈이 인제야 파업하는지도 몰랐다. 김래빈은 손을 들어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시야가 까맣게 가려졌다. 아무것도 안 보였다. 피로는 그 어둠을 시작으로 몰려왔다. 터지려는 한숨을 꾹 삼키고 얼굴을 다리 사이에 묻었다. 몸을 옹송그리자 소음마저 아득했다.

얘는 왜 안 와. 불편한 허리에 나직이 앓으면서도 그런 생각이나 했다. 올 때가 됐는데. 아니. 사실 이미 지났는데. 시간에 딱 맞춰서 도착했는데. 근데 왜 안 보이지. 전광판에 김래빈이 찾는 비행기는 없었다. 기록할 시간이 지났다는 의미였다.

너 또 어디 간 거야?

이런 종류의 불안은 습관이었다. 불온한 분위기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길러진 눈치 같은 것.

“김래빈.”

누군가가 제 이름을 불렀다. 타인을 의식한 듯 목소리를 나직이 깐 채였다. 김래빈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숙였던 허리를 펴고 눈을 떴다. 빛이 시야 가득 번졌다. 울렁이고 일렁이고 흔들려서 인영 하나 똑바로 안 보였다.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렸다.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리자 너는 그제야 보였다.

“여기서 뭐 해.”

건조한 질문이었다. 오랜만의 안부 인사기도 했고.





03.

“달에 갈 거야.”

유진이 그렇게 말했을 때. 솔직히 말하자면 래빈은 가장 먼저 며칠 전 보았던 국제 뉴스를 떠올렸다. 미국에서 성행한다는 강력하지만 값싼 마약, 마리화나, 길거리에서 좀비처럼 굳어버린 마약 중독자들, 기타 등등. 그만큼 허황한 이야기였다. 유진은 그런 래빈의 얼굴을 한번 힐끔 곁눈질하고는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이해하기 어려운 빠른 영어를 쏟아냈다.

“잠, 잠깐만. 한국말로 해. 아직 그렇게까지 빠른 영어는 이해하기가 어려워!”

“아직?”

“그리고, 차유진. 난 미치지 않았어!”

그건 오히려 너와 가깝지 않느냐는 말이 턱 끝에 걸렸다가 사라졌다. 유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어온 탓이었다. 그는 마치 불쾌하기 짝이 없다는 것처럼, 혹은 예상치 못한 사건에 당혹스러워하는 사람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리곤 낮게 물었다. “래빈, 영어 해?” 뜻밖의 질문에 래빈은 눈을 동그랗게 떴고,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맞잡았다가, 이내 뒤통수를 긁적이고는 대꾸했다.

“프리랜서로 활동하면서 해외 클라이언트들을 여럿 만났어. 그럴 때마다 매번 누군가의 손을 빌릴 수 없다고 판단해서 가벼운 회화 정도를 연습하는 중이야!”

래빈은 말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덧붙였다. “그런데 그건 왜, 차유진?”

유진은 이렇다 할 말을 내놓지 않았다. 대신 그는 옅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턱짓으로 운전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가. 가서 말해. 나 피곤해.” 유진은 말을 마치고 눈을 감았고, 등받이에 몸을 깊이 파묻었으며, 래빈은 유진의 언행에서 견고한 침묵을 읽었으므로 군말 없이 차를 출발했다.

인천 공항을 빠져나가 서울로 향하는 내내. 래빈은 유진을 곁눈질했다. 그들은 이제 앞자리가 이가 아닌 삼이었고, 알고 지낸 시간보다 모르고 지낸 시간이 더욱 많아졌다. 유진은 그새 전부 또렷해져 있었다. 눈썹도, 아이홀도, 턱 선도. 하다 못해 굳게 다문 입술까지. 유진의 몸짓 하나하나에서 래빈은 제가 알지 못하는 세월을 읽었고 시간을 체감했다. 오히려 그래서 알았다. 유진의 침묵은 숫제 어린애 투정 같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건 알았다. 다만 유진은 공항에서 래빈의 작업실에 도착하는 거진 세 시간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간헐적으로 목말라, 피곤해, 졸리다, 따위의 말들이 불규칙적으로 튀어나왔으나 그건 대화를 위한 게 아니었다. 래빈은 적당한 대꾸를 골라 적당히 대답했고 그럴 때마다 유진은 눈을 감았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기어코 돌아오는 적막과 함께 래빈은 자신 또한 나이를 먹었음을 실감했다.

작업실 문을 열고 불을 켜자 유진은 기다렸다는 듯 들어섰다. 온전히 작업실로 사용하기엔 과하게 좋은 공간이었다. 누군가가 본다면 집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만큼 있어야 할 건 전부 있었다. 래빈은 신발과 옷을 정리하고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커피를 탈까 하다가 얼마 전 카페인은 자제하라던 의사의 말에 티백을 뜯었다. 김이 나는 머그잔을 두 잔 쥐고 휴식용 소파로 향했다. 유진은 제 장비들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마셔.”

“Thanks.”

“그래서, 차유진. 진짜로 왜 왔어?”

머그잔을 받아 든 유진이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파에 몸을 내맡기듯 주저앉았다. 래빈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유진을 재촉하고 싶지 않았다. 설령 주어진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얼마 후에 유진이 생뚱맞은 소리를 했다.

“지금도 작곡 해?”

우스운 말이었다. 대답은 곧장 나오지 않았다. 대신 눈썹이 불쑥 일그러졌다. 뜸을 두고 래빈은 답했다. 응. 이전처럼 앞뒤에 기다란 설명이 붙지 않았다. 그 한마디면 되었다. 래빈이 단독으로 작사, 작곡한 노래는 아무 노래 스트리밍 사이트를 켜도 볼 수 있었다. 빌보드, 멜론, 유튜브, 사운드클라우드, 기타 등등. 유진이 모를 수가 없었다. 그가 모르도록 세계가 놔두지 않았을 것을 알았다.

유진은 잠시 후에 스마트폰을 꺼냈다. 잠시 무언가를 뒤적이는 듯하다가 래빈에게 화면을 디밀었다. 문자였다. 래빈은 회색 배경에 쓰인 영어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게 뭔데, 하고 묻자 유진은 말없이 문자 내용을 복사했다. 번역기 앱에 붙여넣고 한글로 번안했다. 그리고 다시 래빈에게 들이밀었다.

래빈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우주선 시리우스호의 시민 탑승 이벤트 추첨 참가 당첨 안내]. 그 아래에 적힌 길고도 번잡한 주의 사항. 그제야 래빈은 다시 며칠 전 뉴스를 떠올렸다. 어쩌면 몇 달 전일지도 몰랐다. 한국에 있는 어느 대기업에서 최초로 우주 탐사선에 시민을 태우겠다며 전세계적으로 추첨 이벤트를 열었더랬다. 안전성 문제와 더불어 비용 문제 등이 도마에 올랐으나 기어코 진행된 모양이었다.

“달에 갈 거야.”

유진이 스마트폰을 거두며 말했다. 그리고 잠시 후 덧붙였다. “이틀만 재워줘. 오늘이랑 내일. 이틀만 자고 바로 떠날 거야.”





04.

그날 래빈은 오래된 꿈을 꿨다. 눈부신 스포트라이트가 그들을 주목하고 있었다. 알 수 있었다. 무대였다. 그들은 멋들어진 옷을 입고, 진한 화장을 받고, 공을 들여 머리를 하고, 그렇게 무대에 올랐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환호성에 푹 젖었다. 래빈은 아득한 광경을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바로 옆에 유진이 있었다. 아직은 모든 게 둥글둥글하던 유진이.

환호가 따가웠다. 공연장은 광활했다. 눈부신 순간이었다. 그래서 꿈임을 알았다.





05.

“왜 그랬어?”

샌드위치를 먹던 유진이 래빈의 물음에 움찔 멈췄다.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던 그는 샌드위치를 내려두고 주스를 들이켰다. 래빈은 유진의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머리부터 끝까지 외출복 차림이었으나 사실 갈 곳은 없었다. 집이었더라면 작업실로 출근했겠지만 작업실에서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 손에 자동차 키를 꾹 쥔 채 래빈은 유진에게 다시 물었다. 왜 그랬어, 하고.

이해할 수 없었다. 시선이 언뜻 스치기만 해도 알 수 있었던 세월이 거짓말인 양. 유진은 입을 다물고 래빈을 지그시 바라보기만 했다. 의뭉스러운 태도였다. 래빈은 알고 싶었다. 시리우스호 추첨에 참여한 까닭이 궁금했다. 거기에 당첨되자 무르지 않은 이유를 알고 싶었다. 하루를 앞두고 왜 제게 왔냐는 게 가장 큰 의문이었다. 이벤트를 개최한 기업이 한국 기업이고 출발지가 인천공항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굳이 제게 신세를 지겠다고 부탁한 까닭이 아리송했다. 듣기로는 당첨자들의 안전과 건강을 위해 출발 전부터 숙소를 제공한다고 했는데.

알 수 없었다. 불가해한 일들이 너무 많았다. 래빈은 답이 필요했다. 고작 몇 시간, 기껏해야 며칠이지만 래빈은 그 짧은 날 동안 억겁 같은 고민을 끊임없이 곱씹어야 했다.

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기억 속 차유진보다 여러모로 한층 두꺼워진 채로 래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썹과 아이홀, 콧대와 입술, 턱선과 몸. 모든 게 확실했다. 선명했고 확신에 차 있었다. 어릴 적 차유진이 잘 깎고 관리한 보석이라면 유진 차는 풍파에도 마모되지 않은, 보다 거대하고 불가해한 개념 같았다. 어딘가 광막하게 느껴지는 유진을 보며 래빈은 의문을 품었다. 알 수 없는 물음을 해석하고 싶었다. 그를 제 세계로 빨아들여 낱낱이 해체하고 싶었다. 그렇게 숨겨진 정답을, 보물을, 또 어쩌면 유진을 알아내고팠다.

우습게도 그 순간 래빈은 십여 년 전 한 기사를 떠올렸다. 그들이 막 데뷔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였다. 스포트라이트와 관심이 한 몸에 쏠려 있었다. 어느 기자는 유진의 무대 장악력을 일컬으며 폭력적일 정도의 인력을 지녔다고 서술했다. 래빈은 문득, 사람으로부터 나온 어떤 문장은 영영 죽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유진을 묘사했던 기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꿈꿨어?]”

유진이 물었다. 초급자 수준의 단어였기에 래빈은 큰 무리 없이 받아들였다. 무슨 꿈, 하고 되물으려는 찰나에 목구멍이 턱 막혔다. 래빈은 알았다. 저 눈이 말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알 수 없어진 그의 친구였기에 래빈은 그 사실만큼을 알 수 있었다.

너도 똑같은 꿈을 꿨구나.





06.

눈을 떴을 때 래빈은 혼자였다. 방 밖으로 나서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유진은 떠났다.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았다. 새벽 여섯 시 이십칠 분이었다. 유진은 오후 두 시 미국 로스앤젤레스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예정이었다. 래빈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 가만히 생각했다. 그는 떠났다. 인사 한마디 없이 갔다. 그리고 이제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건 참 기묘한 감각이었다. 어째서인지 래빈은 불분명한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시리우스호는 지구의 궤도에서 탈출해 달 기지로 향할 예정이었다. 달 기지에서 일주일을 지내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 계획의 전부였다. 유진이 메일을 통해 귀환을 이야기했을 때 래빈은 전부 찾아보았다. 이벤트, 계획, 예산, 총책임자, 안전성까지. 전부.

손을 뻗어 스마트폰을 들었다. 여섯 시 삼십일 분이었다. 화면을 열고 인터넷에 접속했다. 가장 먼저 뜬 건 메일이었다. 래빈은 화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거기에 적힌 글들을 끊임없이 읽고 되짚었다. 이해할 수 있는 낱말들로 익숙한 문법에 따라 쓰인 문장들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해하기에는 아주 오래 걸렸다.



우주선 시리우스호의 시민 탑승 이벤트 당첨 문자 오발송 및 추첨 오류에 관하여 – 답변 완료



안녕하세요, 김래빈 님. 우주선 시리우스호의 시민 탑승 이벤트 추첨에 참여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문의해 주신 당첨 문자 오발송 및 추첨 오류에 관해 답신을 드립니다.

확인 결과 김래빈 님의 참여 코드 RB-S-1111 은 당첨 내역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한 당첨 문자 오발송 사례 또한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당사를 향한 김래빈 님의 관심에 항상 감사드립니다. 이외 문의 사항은 공식 웹사이트 문의 사항란을 이용해 주십시오.



담당자. ■■■



래빈은 다시 스마트폰을 껐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옷 위에 겉옷을 그대로 걸치고 마스크와 모자를 챙겼다. 차 키를 쥐고 운동화를 구겨 신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모자를 깊이 눌러썼다. 주차장에서는 오랜만에 이를 악물고 뛰었다. 자동차 문을 열고 자리에 앉아 시동을 켰다. 심호흡 한번 후에 액셀을 밟았다. 성마른 발짓과는 달리 차는 부드럽게 출발했다.

내비게이션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목적지를 입력해 주세요. 래빈은 발음이 확실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 경로를 검색합니다.”

로딩 표시가 뜨는 내비게이션을 기다리는 대신 래빈은 핸들을 꺾었다. 지정 속도를 지키며 운전하자니 마음이 갈수록 조급해졌다. 손가락이 핸들 위에서 부산스럽게 리듬을 탔다. 래빈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 입술을 잘근 물었다가 떼고, 발가락에 힘을 주었다가 풀기를 거듭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그리고 동시에 생각했다. 닮았다. 십여 년 전과.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 해가 채 뜨지 않아 푸른 하늘. 너는 모르겠지만, 차유진.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정말로, 진심으로, 내게 운전면허가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어.





05.

래빈은 입을 다물었다. 유진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주 오랫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낱말 하나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대화했다. 묵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자신만만하던 과거를 떠들었다. 너만 있으면 다 될 줄 알았다고. 너랑 나라면 실패할 리 없다고. 그렇게 믿었다고.

나도 그랬다고. 네가 그러했듯 나 또한 같은 순간, 같은 공간, 같은 감정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06.

신호등이 눈앞에서 빨갛게 물들었다. 래빈은 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세웠다. 차를 세우니 시선은 괜히 스마트폰으로 갔다. 직접 손가락으로 누르지 않아도 명령만 한다면 얼마든지 전화를 걸 수 있었다. 방법 또한 알았다. 할머니께 방법을 알려준 것도 래빈 본인이었다. 참 쉬웠다. 명령어를 부르고 누구누구한테 전화 걸어줘, 하면 됐다. 유진이 문자 했던 번호는 메시지를 수신했던 그 순간부터 저장해두었다. 저장명도 기억했다. 차유진, 이름 석 자였다. 그러니 말만 하면 되었다. 시리야. 차유진한테 전화해 줘, 하고.

힐끔 곁눈질한 도보 신호등의 파란색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십이 초, 십일 초, 십 초. 래빈이 입을 열었다. 시리야. 구 초, 팔 초, 칠 초, 육 초. 차유진한테 전화 걸어줘. 그러자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오 초, 사 초, 삼 초. 차유진 님께 전화를 걸게요. 이 초, 일 초, 이어지는 기다란 수신음.

신호등이 파란색으로 변한다. 래빈이 기어를 바꾸고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느림보보다 조금 더 빠른 속도로 자동차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수신음이 끊겼다.

“여보세요? 김래빈?”

래빈은 대답 대신 찢어지는 경적을 들었다. 자각하기도 전 몸을 가눌 수도 없는 힘에 종이처럼 튕기다 안전띠에 잡혀 도로 고꾸라졌다.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한발 늦게 에어백이 터져서 그렇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매캐한 탄내가 났다. 찢어지는 듯한 이명에 귀가 아팠다. 깨진 유리창 너머 뿌옇고 파란 하늘이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행기 한 대가 길고 하얀 꽁지깃을 만들며 가로질렀다.

먼 곳에서 파샾 미가 폭발하듯 울려 퍼졌다. 그리고 아득하게 사라졌다.





00.

래빈이 깨어났을 때 누나가 옆에 있었다. 누나는 놀란 기색 한 점 없이 래빈을 지그시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내가 너 일찍 자라고 했지. 래빈은 침대에 누워서 삑삑 울리는 기계음을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물었다. 차유진은?

“차유진? 갑자기 걔는 왜?”

“차유진은 잘 갔대?”

“너 꿈꿨니?”

익숙한 질문이었다. 래빈이 멍청하게 눈을 껌뻑이는 동안 누나의 잔소리가 포탄처럼 쏟아졌다. 너는 네 나이가 몇인 줄 아느냐, 건물 청소부님께 감사 인사드려라, 그분 아니었으면 너 지금쯤 저승에서 오락가락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자면서 무슨 꿈을 꿨길래 일어나자마자 차유진을 찾아, 걔랑 연락 끊긴 지 십 년은 됐을 거면서 무슨. 래빈은 누나의 잔소리가 잦아든 후에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멀끔했다. 오른쪽 이마에 붙은 반창고를 제하면 다친 곳이 없었다.

“너 쓰러지면서 식탁에 머리 박았다더라.”

누나가 말했다. 래빈은 이마에 붙은 반창고를 손끝으로 문지르다가 누나를 보았다. 형용할 수 없는 기시감이 목구멍 속에서 움찔거렸다. 누나는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래빈의 등을 손바닥으로 세게 쳤다. 눈물이 찔끔 날 만큼 따끔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다녀. 그리고 핸드폰은 네 작업실에 아직 있을걸.”

누나는 역시 눈치가 빨랐다.

래빈은 세 시간 후에 퇴원했다. 애초에 기절한 시간도 얼마 되지 않는다고 했다. 다섯 시간 전 과로로 인한 실신으로 구급차에 실려 왔고, 목숨에 지장이 없다는 결과를 받은 후 수액을 맞으며 계속 잠들어 있었다고 했다. 래빈은 그 모든 이야기를 들으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꾸 과로하면 콱 집으로 불러들일 거라는 누나의 협박에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배웅을 대신했다. 영 믿음직스럽지 않다며 투덜거리던 누나는 이윽고 떠났다.

혼자 남은 래빈은 작업실 바닥을 뒤졌다. 스마트폰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전원 버튼을 꾹 눌렀으나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방전된 모양이었다. 하는 수 없이 충전기에 연결하고 컴퓨터를 켰다. 가장 먼저 인터넷에 접속해 시리우스호를 검색했다.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기껏해야 초등학생이 과학 시간에 만든 물로켓 이름을 시리우스호라고 지었다는 블로그가 전부였다. 기억하는 기업 이름을 쳐보았다. 미래지향적인 과학 혁신을 추구한다는 문구와 함께 낯익은 대표의 얼굴이 떴다. 조금 반가운 마음에 웹사이트에 접속했다. 그러자 배너에 대문짝만하게 창 하나가 떴다. 시리우스호 시민 탑승 이벤트 안내 사항이었다.

창을 끈 래빈은 다시 메일로 들어갔다. 고작 몇 시간 새 읽지 않은 메일이 쌓여 있었다. 정크 메일부터 외주나 협력 신청, 작업물 컨펌 메일 등이 한가득 있었다. 래빈은 그것들을 전부 지나쳤다. 찾다가 찾다가 나오지 않아 메일 검색창에 들어갔다. 짧은 고민이 발목을 잡았다. 키보드에 손을 올려두고 머뭇거리다가 ‘시리우스호’를 쳤다. 그러자 메일이 하나 떴다. [우주선 시리우스호의 시민 탑승 이벤트 당첨 문자 오발송 및 추첨 오류에 관하여 – 답변 완료.] 익히 아는 제목이었다. 거기서 약간의 용기를 얻었다. 이번엔 ‘유진’을 쳤다.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검색창을 다시 확인해 발신자명 포함을 눌렀다. 그리고 다시 검색했다. 여전히 뜨지 않았다. 앞에 차를 붙였다. 뜨지 않았다. 영문으로 바꿨다. 뜨지 않았다. 중간 이름까지 포함해 풀네임을 썼다. 그래도 뜨지 않았다.

컴퓨터를 껐다. 충전기로 갔다. 불이 들어와 있었다. 잠금을 풀고 문자 메시지로 들어갔다. 가장 최근에 있는 건 모 유명 음반사와의 협업을 위한 대화였다. 아래로 내려보았다. 유진과의 대화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번엔 통화 앱에 들어갔다. 여전히 없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목을 가다듬었다. 시리야, 하고 부르자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머뭇거림은 짧았다. 래빈이 말했다.

“차유진한테 전화 걸어줘.”

약간의 뜸을 두고 시리가 대답했다. “차유진 님의 연락처는 저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래빈은 스마트폰을 껐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유진의 질문을 곱씹었다. 꿈꿨어? 그리고 누나의 질문. 너 꿈꿨니? 래빈은 이제 장담할 수 없었다. 발을 붙인 이곳은 현실이었으나 유진의 존재가, 시간과 공간이 거짓이라기엔 지나치게 생생했다. 걸음은 홀린 듯이 컴퓨터 앞으로 향했다. 자리에 앉고 다시 전원을 켰다.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다가 가장 익숙한 앱을 켰다. 온갖 가상악기와 효과음으로 범벅이 된 화면이 떴다.

래빈이 궁금한 건 하나였다. 영원한 불가해로 남을 질문 단 한 개.





01.

너 정말 달에 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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